사두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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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두개파는 다윗 시대 대제사장 사독의 후예라고 여겨지는 유대교의 한 분파이다. 제2성전 시대에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기득권을 누리며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 모세오경만을 중시하고 부활, 천사, 내세 등을 부정하며 바리새파와 대립했다. 예수와도 갈등을 겪었으며,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후 쇠퇴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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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두개파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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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사두개파 |
로마자 표기 | Sadu Gepha |
한자 표기 | 撒杜該派 |
영어 | Sadducees |
히브리어 | צְדוּקִים |
그리스어 | Σαδδουκαῖος/-οι |
라틴어 | Sadducaeus/-ei |
역사 | |
창립 | 기원전 167년경 |
해산 | 서기 73년 |
활동 시기 | 기원전 2세기 ~ 서기 1세기 |
정치 | |
중심지 | 예루살렘 |
이념 | 귀족주의 성문 토라 |
종교 | |
종교 | 헬레니즘 유대교 |
지도자 | |
주요 지도자 | 요한 히르카누스 알렉산더 얀나이오스 아리스토불루스 2세 |
2. 어원
사두개파는 다윗 시대 대제사장(대사제)이었던 사독에서 파생한 말로 여긴다. 의롭다는 의미의 차디크(tsaddiq)라는 형용사에서 유래했다는 종래 설은 차디크의 "i"가 차두크(tsadduq)의 "u"로 변한 까닭을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 대에 제사장을 수행한 사독이 사두개인의 선조라는 게 타당하다고 여긴다.[2]
사두개파는 마카베오(마카비) 시대까지 사제직을 수행했던 사독의 후손들을 지지하는 당파였다. 이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예루살렘 멸망(기원후 70년)까지 세력을 가졌던 유파로, 귀족 계급 출신의 대제사장 및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로 구성되었다. 바리새파와 대립했는데, 바리새파가 종교적이었던 반면 사두개파는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 소수였지만 교양이 있었고, 제사장 계급을 독점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영어 용어는 라틴어를 거쳐 에서 유래했다. 사독(Zadok)이라는 이름은 뿌리 צָדַק|ṣāḏaqhe (옳다, 정의롭다)와 관련이 있으며,[2] 이는 그들의 존재 초기 사회적 귀족 신분을 나타낼 수 있다.[3]
사두개파(サドカイ派)라는 명칭은 솔로몬을 축복한 대제사장 츠아독(ツァドク)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26]
3. 역사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현세적으로는 헬레니즘 문화에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마카비 전쟁 시대에는 종교적, 민족적 개혁에 냉담했으나, 하스몬 왕조가 세속화되면서 세력을 펴고, 이에 비판적이었던 바리새파와 대립했다. 이러한 경향은 헤로데 왕조의 친로마 정책과도 맞물려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 지도자로서 제사장 계급이 강화되었고, 공회 의원도 많았다. 그러나 민중과는 거리가 멀어 대중적 인기는 없었다.
사두개파는 신앙과 사상 면에서 보수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현세적이었다. 바리새파가 중시한 유전을 인정하지 않고 성문화된 모세 율법만을 인정했다. 그 결과 부활, 천사, 영의 존재를 부정했다.(마가복음 12:18, 누가복음 20:27, 사도행전 23:8) 또한 내세의 보응을 부정하고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믿었으며,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거의 믿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예수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세례자 요한은 이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마태복음 3:7) 이들은 예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고(마태복음 16:1-4), 부활에 대한 질문으로 시험하기도 했다.(마태복음 22:23-33) 예수는 이들을 바리새파와 함께 비난했지만,(마태복음 16:6,11) 복음서에서는 바리새파만큼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이는 사두개파의 신앙이 민중에게 영향력이 적어 예수의 시야에 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두개파는 초대 교회와 바울도 박해했다.(사도행전 4:1-22, 23:1-10)
사두개파의 명칭은 솔로몬을 축복한 대제사장 츠아독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26] 현대 학자들은 사두개파를 성전에 기반을 두고 권력자들과 결탁한 제사장 집단으로 보고 있다.
신약 성서의 복음서에는 사두개파가 영혼 불멸, 죽은 자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부정했고, 이것이 바리새파와의 논쟁거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7] 복음서에는 사두개파의 "부활은 없다"는 주장을 예수가 논박하는 장면도 있다.[28][29]
3. 1. 제2성전 시대
제2성전 시대는 기원전 516년 예루살렘에 제2성전이 건립된 시점부터 로마의 예루살렘 포위 공격으로 성전이 파괴된 시점(기원후 70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이 시기 동안 예루살렘은 여러 세력의 지배를 받았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대에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 지역의 중심 예배 장소가 되었고, 성전의 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세속적인 문제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경향은 헬레니즘 시대까지 이어졌다.[10]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지중해 세계 정복으로 기원전 539년부터 334/333년까지 지속된 예루살렘에 대한 아케메네스 제국의 지배는 끝나고 헬레니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어, 그리스 문화, 그리스 철학 사상이 널리 퍼져 유대교와 융합되어 헬레니즘 유대교가 탄생했다.[10]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 이후 그의 장군들은 제국을 나누어 가졌고, 유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았다. 이스라엘 대제사장은 일반적으로 그리스 지배자의 승인을 받아 임명되었고, 종교 정치와 정부의 혼합이 계속되었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는 기원전 168~167년경 유대인 관습을 박해했고, 이는 유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하스몬 가문의 지휘 아래 일어난 마카비우스 반란은 기원전 142년경 독립적인 하스몬 왕국을 세웠다. 많은 학자들은 마카비우스 시대에 여러 종파들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추정하며, 사두개파는 초기 하스몬 시대, 요한 히르카누스와 같은 통치자들 아래 유대 종교 엘리트 계층에서 생겨났다는 추측이 제기된다.[10]
하스몬 왕조의 통치는 기원전 63년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까지 지속되었고, 이후 유대의 로마 시대가 시작되었다. 로마 유대 지방은 기원후 6년에 설립되었다. 로마와 유대인 간의 협력은 헤로데와 그의 손자 아그리파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강력했지만, 로마는 기원후 6년 키리니우스의 인구 조사를 시작으로 권력을 로마 관리에게 넘겼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은 기원후 66년에 발발했고, 몇 년 후 로마는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하여 기원후 70년에 제2성전 시대를 끝맺었다.[11]
로마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70년)와 함께 사두개파는 의지할 곳을 잃고 사라졌다. 이후 라이벌이었던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다. 사두개파 자체가 소멸하고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정통파가 되었기 때문에, 사두개파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서와 탈무드 등이 사두개파를 이해하는데 유익한 자료로 여겨진다.
3. 2. 성전 파괴 이후
예루살렘 성전 파괴(70년)와 함께 사두개파는 의지할 곳을 잃고 사라졌다. 이 때문에, 경쟁 상대였던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주류가 되었다.[31]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저서와 탈무드 등은 사두개파를 아는 데 유익한 자료로 여겨지나, 사두개파 자체가 소멸하고 경쟁 상대였던 바리새파가 유대교의 정통파가 되었기 때문에, 관련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유대교의 신학과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달리 헬레니즘의 영향을 그대로 방치했다. 광야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마태복음서 3:7)로 취급했다. 하지만 사두개파들의 활동무대였던 예루살렘의 성전이 기원후 70년 유대독립전쟁으로 붕괴되면서 사두개파들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12]
4. 신념과 특징
사두개파는 마카베오(마카비) 시대부터 예루살렘 멸망(기원후 70년)까지 존속한 유대교의 한 분파이다. 이들은 대제사장을 지지하는 당파로, 귀족 계급과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로 구성되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대립 관계에 있었는데, 바리새파가 종교적인 반면 사두개파는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다. 수는 적었지만 교양이 있었고, 제사장 계급을 독점하여 세력을 확장했다.[31]
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현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마카비 전쟁 시대에는 냉대받았으나, 하스몬 왕조가 세속화되면서 세력을 펴고 바리새파와 대립했다. 헤롯 왕조의 친로마 정책과도 영합하여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 지도자로서 제사장 계급이 강화되었고, 공회 의원도 많았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는 받지 못했다.[31]
사두개파는 성문화된 모세오경만을 인정하고, 바리새파가 중시한 구전(유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부활, 천사, 영의 존재와 내세의 보응을 부정했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믿었고,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며 하느님(하나님)의 섭리를 거의 믿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은 예수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세례자 요한은 이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고(마태복음 3:7), 예수도 이들을 비판했다(마태복음 16:6, 11).[31] 신약 성서의 복음서에는 사두개파가 영혼 불멸, 죽은 자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부정했고, 그것이 바리새파와의 논쟁거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7]
사두개파는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친로마파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기득권을 누렸다.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함께 법관 역할을 했다(사도행전 23:1-9).[31]
사두개파의 신앙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파괴와 함께 몰락한 것으로 보이며, 현존하는 기록은 대부분 적대적인 출처에서 나온 것이다.[15] 사두개파라는 명칭은 솔로몬 왕을 축복한 대제사장 츠아독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26]
4. 1. 종교적 특징
사두개파는 마카베오(마카비) 시대까지 사제직을 수행했던 사독의 후손들로,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까지 세력을 가졌던 유대교의 한 유파이다. 이들은 귀족 계급 출신으로 대제사장 및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바리새파와 대립했다. 바리새파가 종교적인 반면, 사두개파는 정치적인 색채가 강했다.[31]사두개파는 종교적으로는 보수적이었으나, 현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하스몬 왕조가 세속화되면서 세력을 확장했고, 이에 비판적이었던 바리새파와 대립했다. 이들은 헤롯 왕조의 친로마 정책과도 영합하여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 지도자로서 제사장 계급을 강화했고, 공회 의원도 많았다. 그러나 민중으로부터는 인기가 없었다.[31]
사두개파는 성문화된 모세오경만을 인정하고, 바리새파가 존중한 구전(유전)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부활, 천사, 영의 존재를 부정했으며(마가복음 12:18, 누가복음 20:27, 사도행전 23:8), 내세에서의 보응도 부정했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믿었고,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며, 하느님(하나님)의 섭리를 거의 믿지 않았다.[31]
세례자 요한은 사두개파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으며(마태복음 3:7), 예수 역시 이들을 비판했다(마태복음 16:6, 11). 사두개파는 예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고(마태복음 16:1-4), 부활에 대한 질문으로 시험하기도 했다(마태복음 22:23-33). 복음서에는 사두개파의 "부활은 없다"는 주장을 예수가 논박하는 장면도 묘사된다.[28][29]
신약 성서에는 사두개파가 영혼 불멸, 죽은 자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부정했고, 이것이 바리새파와의 논쟁거리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7]
사두개파는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친로마파였으며,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기득권을 누렸다. 이들은 모세 율법에 배타적으로 집착하고, 바리새파 사람들이 받아들인 전승들을 거부했다.[31]
사두개파의 종교적 책임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유지 관리가 포함되었다. 제사장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책임이 있었으며, 예루살렘 순례의 세 가지 축제 기간 동안 제사를 주관했다. 코헨은 "모든 제사장, 대제사장, 귀족이 사두개파였던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바리새파였고, 어떤 집단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라고 언급했다.[13]
사두개파라는 명칭은 솔로몬 왕을 축복한 대제사장 츠아독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26]
4. 2. 정치적 특징
사두개파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멸망 때까지 세력을 가졌던 유대교의 한 분파이다. 이들은 귀족 계급 출신 대제사장 및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바리새파와 대립 관계에 있었다. 바리새파가 종교적인 성향이 강했던 반면, 사두개파는 매우 정치적인 색채를 띠었다.[31] 사두개파는 수가 비교적 적었지만, 교양이 높았고 특히 제사장 계급을 독점하여 세력을 확장했다.[31]사두개파는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친로마파였으며,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기득권을 누렸다.[31] 이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방치했다.[31]
사두개파는 다음과 같은 국가의 여러 공식적인 업무를 감독했다.[14]
역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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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행정 업무 |
국가 대표로서 국제 업무 처리 |
산헤드린 의회 참여 (주로 바리새파와 대립) |
세금 징수 (디아스포라 유대인으로부터의 국제적 공물 포함) |
군대 장비 및 지휘 |
로마 제국과의 관계 조절 |
국내 분쟁 중재 |
바리새파와 함께 산헤드린 의회에서 법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는 사도 바울로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행 23:1-9).[31]
기원후 70년 유대독립전쟁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면서 사두개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31]
4. 3. 바리새파와의 갈등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대립했는데, 바리새파가 종교적인 데 반하여 사두개파는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 사두개파는 수가 적었지만, 교양이 있었고 제사장 계급을 독점하여 세력을 폈다.[31]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고, 현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그래서 마카베오 전쟁 시대의 종교적, 민족적 개혁기에는 냉대받았으나, 하스몬 왕조가 세속화되면서 세력을 펴고 이에 비판적인 바리새파와 대립하게 되었다.[31]사두개파는 바리새파가 부가하고 존중한 유전(遺傳)을 인정하지 않고, 성문화된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했다. 그 결과 부활, 천사, 영의 존재를 부정했고, 내세의 보응도 부정했다.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는다고 믿었으며,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거의 믿지 않았다.[31]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예수에게도 반대했다.[31]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함께 산헤드린 의회에서 법관 역할을 했다. 사도 바울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았다.[16] 사두개파는 구전 율법을 거부하고 성문 율법을 유일한 신적 권위의 원천으로 보았다.[16]
요세푸스에 따르면 사두개파의 신앙은 다음과 같았다.
- 운명이나 예정된 미래의 개념을 거부했다.
- 하나님은 악을 저지르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선과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 영혼은 불멸하지 않으며 사후 세계도 없고, 사후 보상이나 처벌도 없다.
- 철학 교사들과 논쟁하는 것은 미덕이다.[15][17]
사두개파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죽은 자를 위한 전통적인 유대교 개념인 스올은 믿었다.[18] 요세푸스는 사두개파가 바리새파보다 무례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종파적인 모욕으로 간주된다.[15]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파는 믿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바리새파의 보호를 얻기 위해 이러한 분열점을 이용했다.[20] 사두개파는 영이나 천사의 개념을 거부했지만, 바리새파는 인정했다.[20]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간의 논쟁은 율법적 순결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사두개파는 쏟은 물은 의식적으로 부정해진다고 주장했지만, 바리새파는 이것이 부정의 충분한 근거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유대인 상속법에 따르면, 사망한 남자의 재산은 아들이나 딸이 상속받는다. 사두개파는 사망자의 친척들 사이에 상속을 분배할 때, 형식적으로 가족 관계를 찾아 사망자와 가까운 친척을 상속자로 정했다. 초기 유대인 랍비인 요하난 벤 자카이는 사두개파의 주장을 반박했고, 결국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의 가르침에 동의했다.
사두개파는 주인이 자신의 노예가 초래한 손해에 대해 배상할 것을 요구했다. 바리새인들은 노예가 고의적으로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거짓 증인의 증언에 근거하여 판결이 선고되면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두개파는 거짓으로 고발된 자에게 사형이 이미 집행된 경우에만 거짓 증인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세푸스는 파리사이인들이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많은 규례들을 백성에게 전달해 주었는데, 이 규례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사두개인들은 이러한 규례들을 거부하며, 기록된 말씀에 있는 규례만을 준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랍비들은 미슈나 야다임에서 두 종파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설명한다. 미슈나는 사두개인들이 "성경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그 불결함은 그것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받지 않는 호메로스의 책은 손을 더럽히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설명한다. 사도행전의 한 구절은 파리사이인과 사두개인 모두 최고 유대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협력했다는 것을 시사한다.[20]
신약 성서의 복음서에는 사두개파가 영혼 불멸, 죽은 자의 부활, 천사의 존재를 부정했고, 그것이 바리새파와의 논쟁거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27]
5. 예수와의 관계
사두개파는 예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이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마 3:7)[31][24] 사두개파는 예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청하거나(마 16:1-4), 부활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져 시험하기도 했다.(마 22:23-33)[31]
신약 성서, 특히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와 사두개파 지도층 사이의 적대감을 보여주는 일화들을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 12장과 마태복음 22장에서 사두개파는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했던 한 여자가 부활 후 누구의 남편이 될 것인가를 질문하며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예수는 부활한 자들은 "장가도 아니하고 시집도 아니하고 하늘의 천사와 같다"고 답하며, 그들이 성경과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고 비난한다. 이는 사두개파가 율법을 강조했음에도 예수는 그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음을 보여준다.[22][23]
루가의 복음서에도 부활에 대해 사두개파와 예수가 논쟁을 벌였다는 내용이 나온다.(눅 20:27-38)[31] 예수는 바리새파와 마찬가지로 사두개파도 비난했지만(마 16:6,11), 복음서에서는 바리새파만큼 비난의 대상으로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는 사두개파가 민중에게서 멀어져 영향력이 적었기 때문으로 보인다.[31]
6. 다른 유대 분파와의 관계
사두개파는 바리새파, 에세네파 등 다른 유대 분파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들은 헬레니즘 문화에 개방적이었으며,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며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 기득권을 누렸다.
사두개파는 모세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바리새파가 중시하는 구전 율법과 전승은 거부했다. 특히 천사나 악마의 존재, 부활 사상, 내세에서의 보상 등을 부정했다. 누가복음에는 부활에 대한 사두개파와 예수의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눅 20:27-38)[31]
구분 | 사두개파 | 바리새파 | 에세네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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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 | 모세오경만을 인정 | 모세오경 외 구전 율법과 전승도 중시 | 사해 사본 등 독자적인 문헌 존재 |
신앙 | 천사, 악마, 부활, 내세 부정 | 부활, 천사, 내세 등 폭넓게 인정 | 금욕적, 신비주의적 경향 |
정치 | 헬레니즘 문화에 개방적, 로마 제국에 우호적 | 종교적 율법 중시, 로마 제국과 협력 | 속세와 분리된 공동체 생활 |
세례자 요한은 사두개파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비판했다.(마 3:7)[31] 사두개파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법관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으며,(행 23:1-9)[31]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6. 1. 에세네파와의 대립
사해 사본은 종종 에세네파가 작성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를 통해 에세네파와 사두개파 사이의 이념 및 사회적 지위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일부 학자들은 에세네파가 사독파(Sons of Zadok)에서 분리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에세네파 역시 사제 계급, 즉 사두개파와 같은 기원을 가짐을 의미한다. 사해 사본에서 사두개파는 므낫세(Manasseh)로 자주 언급된다. 사해 사본은 사두개파(므낫세)와 바리새파(Ephraim)가 에세네파(진정한 유다)와는 다른 별개의 종교 공동체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에세네파와 사두개파 간의 갈등은 나훔 주석서(Pesher on Nahum)에 묘사되어 있다. "그들(므낫세)은 악한 자들…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통치는 무너질 것이고… 그의 아내들, 그의 자녀들, 그리고 그의 유아들은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그의 전사들과 그의 존경받는 자들은 칼에 죽을 것이다."라는 구절은 사두개파를 이스라엘 통치자로 지칭하며, 주변적 집단이었던 에세네파와 대조되는 귀족적 지위를 보여준다.[21] 나아가 에세네파가 사두개파 통치의 정당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고대 이스라엘 멸망과 예루살렘 포위 공격의 책임을 사두개파의 불경건함에 돌렸음을 시사한다. 사해 사본은 유대 국가를 통치하며 하나님과의 새 언약(New Covenant)을 어긴 사두개파 엘리트들을 신의 심판 대상으로 명확히 지목하고 있다.6. 2. 초기 기독교와의 대립
사두개파는 예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이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마 3:7)[31]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에게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청하거나(마 16:1-4), 부활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져 시험하기도 했다.(마 22:23-33)[31] 마태복음는 세례자 요한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모두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24]신약 성서, 특히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은 예수와 사두개파 지도층 사이의 적대감을 보여주는 일화들을 묘사하고 있다. 마가복음 12장과 마태복음 22장의 한 구절은 예수와 사두개인 사이의 논쟁을 보여주는데, 이 사두개인은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했던 한 여자의 부활 후 남편이 누구일 것인가를 질문하며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예수는 부활한 자들은 "장가도 아니하고 시집도 아니하고 하늘의 천사와 같다"고 응답했다. 그는 또한 그들이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사두개파가 율법을 강조했음에도 예수는 그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다는 주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22][23]
예수는 사두개파를 바리새파와 동일하게 비난했지만,(마 16:6,11)[31] 복음서에서는 바리새인 만큼 비난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다. 이는 사두개파가 바리새파보다 옳아서가 아니라, 민중에게서 멀어진 사두개파의 신앙이 영향력이 적어 예수의 시야에 들어오는 일이 적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31]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교회와 바울도 박해했다.(행 4:1-22, 23:1-10)[31]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행 23:1-9)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함께 산헤드린 의회에서 법관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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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야훼께 동물이나 고운 밀가루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성직자를 말한다. 공동번역에는 사제, 개역한글판에는 제사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31]
문서
사두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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