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뵈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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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츠 뵈메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세르비아 점령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유대인,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등을 체포하고, 독일군 사망 시 민간인 보복 처형을 지시하는 등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뉘른베르크 후속 재판에서 기소될 예정이었으나, 유고슬라비아로 송환되기 직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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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뵈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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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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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5년 4월 15일 |
출생지 | 첼트베크,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사망 | 1947년 5월 29일 |
사망지 | 뉘른베르크, 바이에른, 독일의 연합군 군정기 |
묻힌 곳 | 그라츠 성 레온하르트 묘지, 오스트리아 |
소속 | |
국가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18년까지)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1938년까지) 나치 독일 (1938년-1945년) |
군 |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 오스트리아 연방군 국방군 (Wehrmacht) |
복무 기간 | 1900년 ~ 1938년 (오스트리아) 1938년 ~ 1945년 (독일) |
최종 계급 | 소장 (오스트리아) 산악병대장 (독일) |
지휘 | 제32보병사단 제18산악군단 제20산악군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훈장 |
2. 생애
프란츠 뵈메는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주 첼트베크 출신의 군인이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치아, 볼히니아, 쿠를란트, 뒤나부르크, 이손초 등 여러 전선에서 복무했다. 전쟁 후에는 오스트리아 연방군에 남았으며, 1938년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직전에는 소장 계급으로 정보 기관장을 맡고 있었다. 안슐루스 이후 독일 국방군으로 편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공방전에 제32보병사단장으로 참전했다. 1941년 9월부터는 독일군 점령 하의 세르비아 지역 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아돌프 히틀러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저항 세력에 대한 매우 가혹한 탄압 정책을 시행했다. 그의 지휘 아래 독일군은 독일군 사상자 발생 시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보복 살해를 자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 민간인이 학살되는 전쟁 범죄가 발생했다. 특히 크랄레보와 크라구예바츠 등지에서의 학살은 그의 책임 하에 이루어진 대표적인 만행이다. 뵈메가 세르비아 점령군 사령관으로 있던 몇 달 동안 약 2만 명에서 3만 명의 민간인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1944년 6월에는 유고슬라비아 전선에서 제2기갑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 추락 사고로 부상을 입고 사임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후 1945년 1월부터 종전까지 노르웨이 주둔 제20산악군 사령관을 맡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노르웨이에서 연합군에 의해 포로로 잡혔고, 1947년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일부인 포로 재판에서 세르비아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재판이 진행 중이던 1947년 5월 29일, 수감되어 있던 뉘른베르크 구치소 건물에서 투신하여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프란츠 뵈메는 1885년 4월 15일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첼트베크에서 태어났다. 17세 때 부친이 사망했고, 2년 후 모친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스트리아 제국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1900년 10월 생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 입대하여 1905년 보병 연대에서 소위로 임관했다.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갈리치아 전선에서 복무했으며, 1917년에는 볼히니아, 쿠를란트, 뒤나부르크 등 여러 전선을 옮겨 다녔다. 1917년부터 1918년까지는 이손초 전선에서 싸웠다. 전쟁이 끝난 1918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분데스헤어에 남아 군 복무를 이어갔다.
2. 2. 오스트리아 연방군 복무 및 독일 국방군 편입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치아, 볼히니아, 쿠를란트, 뒤나부르크, 이손초 전선 등에서 복무했다. 1918년 이후 오스트리아 분데스헤어에 남았다. 1938년 3월,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직전에는 오스트리아 연방군의 소장 계급으로 정보 기관장을 맡고 있었다. 1938년 2월 베르히테스가덴 합의 이후, 독일에 대한 항전을 주장하던 참모총장 알프레트 얀자(Alfred Jansa)의 후임으로 지명되어 취임했다.안슐루스 이후 베르마흐트로 전속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제30보병사단과 제32보병사단을 지휘했다.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과 1940년 5월과 6월 프랑스 공방전에는 제32보병사단을 이끌고 참전했다. 이러한 전공으로 1940년 6월 29일 철십자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
2.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뵈메는 제32보병사단을 이끌고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에 참전했다. 이듬해인 1940년 5월과 6월에는 프랑스 공방전에서도 같은 사단을 지휘하여 참전했으며, 이 전공으로 1940년 6월 29일 철십자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1941년 9월, 뵈메는 독일군 점령 하의 세르비아 지역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에게 세르비아 내 저항 세력을 가혹하게 진압할 것을 직접 명령했다. 뵈메는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모든 공산주의자, 그 혐의가 있는 남성 시민, 모든 유대인, 일정 수의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사상을 가진 시민"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한, 독일군 병사 1명이 사망하면 민간인 100명을, 1명이 부상당하면 민간인 50명을 처형하는 보복 조치를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독일 국방군은 점령지에서 수많은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 민간인을 학살했다. 특히 크랄레보와 크라구예바츠에서는 제717보병사단 병사들이 파르티잔 및 체트니크와의 전투 후 보복으로 며칠 만에 시민 약 4,000명을 학살했다(크라구예바츠 학살). 뵈메가 세르비아 점령군 사령관으로 재직한 1941년 12월까지 몇 달 동안, 독일군 측 사상자는 사망 160명, 부상 278명에 불과했지만, 파르티잔은 3,562명이 전사했으며, 민간인 약 2만 명에서 3만 명이 독일군에게 처형되었다.
1944년 6월, 뵈메는 유고슬라비아 전선에서 제2기갑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군을 지휘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탑승했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로 중상을 입고 사임했다.
상처가 아문 뒤, 1945년 1월 8일 노르웨이에 주둔하고 있던 제20산악군의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2. 4. 세르비아 점령군 사령관 시절의 전쟁 범죄
1941년 9월 16일, 프란츠 뵈메는 나치 독일 점령 하의 세르비아 지역 점령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뵈메에게 매우 엄격한 조치를 통해 세르비아 내 저항 세력을 진압하고 치안을 확보하라고 직접 명령했다. 이에 따라 뵈메는 "모든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남성 시민, 모든 유대인, 그리고 일정 수의 민족주의 및 민주주의 성향을 가진 시민"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특히 그는 독일 국방군에게 독일 병사 1명이 사망하면 세르비아 민간인 100명을, 독일군 병사 1명이 부상을 입으면 50명을 처형하는 잔혹한 보복 정책을 명령했다. 이 지시에 따라 독일 국방군은 세르비아인, 유대인, 로마인 등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처형을 자행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1년 9월 16일부터 12월 2일 사이에 421 군단 통신부대 소속 병사 22명이 파르티잔의 공격으로 사망하자, 뵈메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크라구예바츠 학살에서 민간인 2,000명의 처형을 명령했다.[1]
또한, 점령군 행정 참모장 하랄트 터너의 제안을 받아들여, 1941년 7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진 세르비아 봉기에 대한 보복 작전으로 1941년 9월과 10월에 마чва 작전을 지시했다. 이 작전의 목표는 "포드리니예 지역을 정화"하는 것이었으며, 뵈메는 독일군에게 총격을 가하거나 무기가 발견된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15세에서 6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9월 25일에는 이 작전을 세르비아 전역에 본보기로 삼기 위해 더욱 무자비하게 실행하라는 추가 명령을 내렸다.
10월 2일 토폴라 근처에서 독일군 병사 21명이 사망하자, 뵈메는 이 사건에 대한 대응으로 사망한 독일군 병사 1명당 100명의 비율에 따라 포로 처형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샤바츠와 베오그라드의 강제 수용소에 있던 약 2,000명의 수감자(주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가 선발되어 10월 9일 야부카와 판체보 사이 지역에서 처형되었다. 10월 14일에는 저항군에 가담한 사람들의 가족, 즉 15세 이상의 아내와 남성 친척들을 체포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크랄레보와 크라구예바츠에서는 제717보병사단 병사들이 파르티잔 및 체트니크와의 교전 후, 며칠 만에 민간인 4,000명을 학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뵈메가 세르비아 점령군 사령관으로 재임한 1941년 9월부터 12월까지 불과 몇 달 동안, 독일군은 병사 160명이 사망하고 278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반면, 같은 기간 동안 파르티잔은 약 3,562명이 전사했으며, 약 2만 명에서 3만 명에 달하는 세르비아 민간인이 독일군에 의해 보복 처형당했다.
뵈메는 1941년 12월 5일 세르비아 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났고, 후임으로는 파울 바더가 임명되었다.
2. 5. 제2기갑군 및 제20산악군 사령관
1944년 6월 4일, 뵈메는 로타르 렌둘리치 상급대장의 뒤를 이어 발칸 주둔 제2기갑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유고슬라비아 지역 독일군을 지휘했다.[1][2] 하지만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탑승기 추락 사고로 부상을 입었고,[2] 같은 해 7월 육군 최고 사령부 지도자 예비대로 전출되어 막시밀리안 데 안젤리스 장군에게 지휘권을 인계했다.[1]부상에서 회복한 후, 1945년 1월 8일부터 나치 독일이 항복하는 1945년 5월 8일까지 노르웨이 주둔 국방군 사령관 겸 제20산악군 총사령관으로 복무했다.[1][2]
2. 6. 전범 재판과 자살
노르웨이에서 체포된 후, 그는 뉘른베르크 후속 재판의 일부인 인질 재판에 회부되어 1941년 세르비아 점령군 사령관 시절 저지른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당시 그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보복 공격으로 독일군 1명이 사망하면 세르비아인 100명을, 독일군 1명이 부상당하면 50명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이로 인해 수천 명의 민간인이 학살되었다.유고슬라비아로의 송환이 임박하자, 뵈메는 1947년 5월 29일 수감 중이던 뉘른베르크 구치소 5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그의 시신은 오스트리아 그라츠의 성 레온하르트 묘지에 안치되었다.
3. 훈장
4. 참고 문헌
- 마노셰크, 발터 (1995). Serbien ist judenfrei. Militärische Besatzungspolitik und Judenvernichtung in Serbien 1941/42|세르비아는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롭다. 1941/42년 세르비아의 군사 점령 정책과 유대인 학살ger. 제2판. 뮌헨: 군사사 연구소(Militärgeschichtliches Forschungsamt) 저술 시리즈.
- 펠기에벨, 발터-페어 (2000) [1986]. Die Träger des Ritterkreuzes des Eisernen Kreuzes 1939–1945 — Die Inhaber der höchsten Auszeichnung des Zweiten Weltkrieges aller Wehrmachtteile|1939-1945년 철십자 기사십자 훈장 수훈자 — 모든 국방군 부대의 제2차 세계 대전 최고 훈장 소유자ger. 프리트베르크, 독일: 포드준-팔라스. ISBN 978-3-7909-0284-6.
- 루카스, 제임스 (1980). 알파인 엘리트: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산악 부대. 제인 출판. ISBN 0531037134.
- 파트츠발, 클라우스 D.; 셰르처, 파이트 (2001). Das Deutsche Kreuz 1941 – 1945 Geschichte und Inhaber Band II|독일 십자 훈장 1941 – 1945 역사와 수훈자 제2권ger. 노더슈테트, 독일: 베르라크 클라우스 D. 파츠발. ISBN 978-3-931533-45-8.
- 셰르처, 파이트 (2007). Die Ritterkreuzträger 1939–1945 Die Inhaber des Ritterkreuzes des Eisernen Kreuzes 1939 von Heer, Luftwaffe, Kriegsmarine, Waffen-SS, Volkssturm sowie mit Deutschland verbündeter Streitkräfte nach den Unterlagen des Bundesarchives|1939-1945년 기사 철십자 훈장 수훈자 육군, 공군, 해군, 무장 친위대, 국민돌격대 및 독일과 동맹을 맺은 군대의 1939년 철십자 기사 훈장 수훈자 연방 문서 보관소의 문서에 따름ger. 예나, 독일: 셰르처스 밀리테어-베르라크. ISBN 978-3-938845-17-2.
- 바이너, 하나; 오퍼, 달리아; 바버, 앤 (1996). 막다른 여행: 클라도보-사바츠 그룹의 비극적인 이야기. 미국 대학교 출판부. ISBN 0761801995.
- 글리시치, 벤체슬라프 (1970). Teror i zločini nacističke Nemačke u Srbiji 1941–1945|세르비아의 나치 독일의 테러와 범죄 1941–1945hbs. 베오그라드: 라드. OCLC 9151138.
참조
[1]
웹사이트
Massacres And Reprisals During The German Occupation Of Yugoslavia
https://web.archive.[...]
2016-10-20
[2]
서적
티토: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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