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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콜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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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17세기 프랑스의 정치가로, 루이 14세 치세 동안 재무, 상업, 해군 장관 등을 역임하며 프랑스의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중상주의 정책을 통해 산업을 육성하고, 해외 무역을 장려했으며,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와 같은 여러 기관을 설립하여 예술과 과학을 진흥했다. 콜베르는 '콜베르티슴'으로 불리는 정책을 펼쳤으며, 상사 조례 제정, 파리 천문대 설립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지나친 규제, 보호무역주의, 농업 경시, 식민지 수탈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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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티스트 콜베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콜베르의 초상화
'Portrait de Jean-Baptiste Colbert (1655), 필리프 드 샹파뉴'
존칭 접미사방디에르와 세르네의 영주
별칭'르 그랑 콜베르 (Le Grand Colbert, 위대한 콜베르)'
출생일1619년 8월 29일
출생지랭스, 프랑스 왕국
사망일1683년 9월 6일
사망지파리, 프랑스 왕국
안장 장소생 외스타슈 교회
국적프랑스
자녀장바티스트
자크 니콜라
장쥘아르망
관직
국무 장관monarch: 루이 14세
term_start: 1661년 3월 9일
term_end: 1683년 9월 6일
predecessor: 쥘 마자랭
successor: 루부아 후작
해군 장관monarch1: 루이 14세
term_start1: 1669년 3월 7일
term_end1: 1683년 9월 6일
predecessor1: 위그 드 리온
successor1: 세녜레 후작
재정 총감monarch3: 루이 14세
term_start3: 1665년 12월 12일
term_end3: 1683년 9월 6일
predecessor3: 루이 르 토넬리에
successor3: 클로드 르 펠티에
왕실 사무 장관monarch2: 루이 14세
term_start2: 1669년 2월 16일
term_end2: 1683년 9월 6일
predecessor2: 앙투안 드 라타봉
successor2: 루부아 후작
경제학 관련 정보
소속 기관(프랑스 학술원)
(왕립 건축 아카데미)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분야경제학
군사학
건축
학파중상주의
영향조시아 차일드
바르텔레미 드 라페마
기여콜베르티즘
수상성령 훈장
서명
기타 정보
관련 법령검은 법전: 콜베르 사후 2년 뒤인 1685년에 공포되었으며, 콜베르가 '식민지 법전'이라는 이름으로 구상함. https://books.google.com/books?id=JVugAAAAMAAJ

2. 초기 경력

랭스의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콜베르는 미셸 르 텔리에 아래에서 공직 경력을 시작했다. 이후 루이 14세의 재상이었던 쥘 마자랭 추기경의 신임을 얻어 그의 대리인으로서 재정 관리를 담당했다. 콜베르는 마자랭을 충실히 보좌하며 그의 이익을 대변했고, 이를 통해 루이 14세의 신뢰 또한 얻게 되었다.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한 후, 루이 14세의 친정이 시작되자 콜베르는 재무 담당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당시 재무 총감이던 니콜라 푸케의 비리를 밝혀내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푸케의 몰락은 콜베르가 프랑스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콜베르는 프랑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장관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2. 1. 출생과 가문

1619년 프랑스 랭스에서 부유한 모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랭스에서 상업에 종사했다. 콜베르 가문은 스코틀랜드 혈통이라고 주장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널리 알려진 바에 따르면(하지만 확인되지는 않음) 어린 시절을 예수회 대학에서 보냈고, 파리의 은행가와 장 샤플랭의 아버지 밑에서 일했다.

20세가 되기 전, 콜베르는 육군성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의 삼촌이 당시 육군 장관이었던 미셸 르텔리에의 여동생과 결혼한 인연 덕분으로 여겨진다. 그는 잠시 군대 감찰관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르텔리에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1647년, 콜베르는 알려지지 않은 경위로 삼촌 푸소르(Pussort)의 압수된 재산을 획득했다. 1648년에는 마리 샤롱(Marie Charron)과 결혼하여 막대한 지참금을 얻었고, 같은 해 부부는 출처 미상의 4만 크라운을 받았다. 이듬해인 1649년, 그는 국무원 의원(conseiller d'État)이 되었다.

1651년부터는 루이 14세의 재상 쥘 마자랭 추기경을 섬기며 재정 관리를 맡았다. 1657년에는 세네레이 남작령(Barony of Seignelay)을 구입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콜베르는 프랑스 왕정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2. 2. 초기 관직 생활

랭스에서 모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상인이었으며, 스스로는 스코틀랜드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어린 시절을 예수회 대학에서 보냈다는 널리 퍼진 믿음이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파리의 은행가와 장 샤플랭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기도 했다.

20세 이전에 육군성에서 일자리를 얻었는데, 이는 그의 삼촌이 육군 장관 미셸 르 텔리에의 여동생과 결혼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잠시 군대 감찰관으로 일했고, 이후 르 텔리에의 개인 비서가 되었다.

1647년, 알려지지 않은 경위로 삼촌 푸소르(Pussort)의 압수된 재산을 획득했다. 1648년 마리 샤롱(Marie Charron)과 결혼하여 막대한 지참금을 얻었으며, 같은 해 부부가 함께 출처를 알 수 없는 4만 크라운을 받기도 했다.[3] 1649년 국무원 의원이 되었다. 1657년에는 세네레이 남작령(Barony of Seignelay)을 구입했다.

1651년부터 루이 14세의 재상 마자랭 추기경을 섬기기 시작했으며, 마자랭에 의해 루이 14세에게 추천되었다. 마자랭이 망명 중이던 1652년에는 그의 부재 중 업무를 관리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 새로운 책임 때문에 기존에 맡고 있던 '전쟁 위원' 역할에서는 멀어졌다. 콜베르는 원칙적으로 마자랭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변함없는 헌신으로 추기경의 이익을 옹호하며 루이 14세의 신뢰를 얻었다.

콜베르가 세금 개혁을 시도한 초기 기록 중 하나는 마자랭에게 보낸 보고서 형태로 나타난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국민이 납부한 세금의 절반도 채 왕에게 전달되지 않는다고 지적했으며, 당시 재무 총감이던 니콜라 푸케에 대한 비판도 담았다. 파리의 우체국장이었던 푸케의 정보원이 이 편지를 입수했고, 이는 마자랭이 수습해야 했던 분쟁으로 이어졌다.[3]

1661년 마자랭이 사망하자, 콜베르는 마자랭의 숨겨진 재산을 루이 14세에게 알림으로써 왕의 총애를 확보했다.[3] 젊은 왕 루이 14세의 지원을 받은 콜베르는 왕실 자금 횡령 혐의가 가장 컸던 니콜라 푸케를 겨냥했다. 푸케의 몰락은 콜베르 자신의 승진을 보장했으며[3], 그가 실권을 장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 중상주의 정책

루이 14세 치하에서 재정 실권을 장악한 콜베르는 프랑스의 경제력 증진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중상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의 핵심 목표는 국가 주도로 프랑스 국내 산업을 육성 및 보호하고, 수출을 장려하며 수입품을 제한함으로써 국가의 부를 축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경제 정책 기조는 훗날 '콜베르티슴'으로 불리게 되었다.

콜베르는 국가가 경제 활동 전반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특히 사치품을 중심으로 한 제조업을 육성하고, 보호무역주의에 입각하여 높은 관세를 부과했으며, 상품의 품질 유지를 위해 엄격한 규제를 도입했다. 또한, 영국네덜란드 등 경쟁국에 맞서 해외 무역을 확대하고 식민지 개척에도 힘썼다. 이를 위해 왕립 특허 회사들을 설립하고 프랑스 해군력을 강화했으며, 캐나다(누벨프랑스), 서인도 제도 등지에 프랑스 식민제국 건설의 기초를 마련했다. 상업 활동의 법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상사 조례와 같은 법률 정비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콜베르의 중상주의 정책은 프랑스 산업과 상업 발전에 기여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데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지나친 국가 통제와 루이 14세의 계속된 전쟁 비용 지출이라는 한계도 안고 있었다.

3. 1. 경제 개혁

루이 14세와 함께 고블랭의 직물 공장을 방문한 콜베르


쥘 마자랭 추기경의 추천으로 루이 14세에게 발탁된 콜베르는 1661년 마자랭 사후 왕의 신임을 얻어 프랑스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특히 재무 장관 니콜라 푸케의 부정 축재를 고발하고 그의 실각을 이끌어내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3] 1665년 재무총감에 임명된 그는 이후 해군 장관(1669년), 건축청장(1664년) 등을 겸임하며 전쟁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내정 분야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3]

클로드 르페브르의 1666년 작, 콜베르


콜베르의 주요 목표는 프랑스의 경제력을 키우는 것이었다. 그는 중상주의 원칙에 따라 국가 주도로 산업을 육성하고 무역을 통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의 경제 정책은 '''콜베르티슴'''(Colbertisme)으로 불리며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 경제의 특징이 되었다.
재정 개혁콜베르는 푸케 실각 이후 본격적인 재정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먼저 정부와 유착하여 부당 이득을 챙긴 금융업자들을 적발하고 처벌했으며, 정부 부채를 일부 탕감하거나 이자율을 낮추는 방식으로 재정 부담을 줄였다. 또한, 세금 제도의 공평성과 효율성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귀족 등 특권층의 면세 혜택을 줄이려 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면세 자격을 엄격히 심사하고 특권층도 피하기 어려운 간접세 비중을 늘리는 대신 일반 농민들의 부담이 컸던 직접세는 줄이고자 했다. 1681년에는 복잡했던 간접세 징수 방식을 특정 업자와 계약하여 세금을 걷는 징세청부제로 일원화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왕실 수입은 크게 늘어났지만, 루이 14세의 계속된 전쟁 비용 지출로 인해 국가 재정은 다시 어려워졌다.[5]
산업 육성콜베르는 프랑스 국내 제조업을 발전시키고 경제파산 직전에서 회복시킨 인물로 평가받는다.[5] 그는 특히 사치품 제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파리의 고블랭 공장을 비롯한 왕립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를 설립하고 지원했으며, 태피스트리, 유리, 도자기 등 고급 제품 생산을 장려했다. 외국의 숙련된 기술자들을 초빙하고 기술 개발을 지원했으며, 상품 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국내 도로와 운하를 정비하는 등 기반 시설 확충에도 힘썼다. 또한, 국내 산업 보호를 위해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시행했다.
무역 및 식민지 확장콜베르는 해외 무역을 통해 국부를 증진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여러 특허 회사를 설립하여 아시아, 아메리카 등과의 무역을 독점적으로 추진하도록 했다.

회사명설립 연도주요 활동 지역
프랑스 동인도 회사 (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rientalesfra)1664년아시아
프랑스 서인도 회사 (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ccidentalesfra)1664년아메리카
Compagnie du Levant|르방 회사fra1670년레반트 (동부 지중해 연안)
Compagnie du Sénégal|세네갈 회사fra1673년세네갈



이 회사들은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회사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프랑스의 해외 진출과 식민지 개척의 발판을 마련했다. 콜베르는 캐나다 (누벨프랑스)와 프랑스령 루이지애나에 적극적으로 식민을 장려했으며, 무역선 보호와 국력 과시를 위해 프랑스 해군을 유럽 최강 수준으로 육성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법제 정비 및 문화 진흥경제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673년에는 상사 조례 (Ordonnance sur le commercefra)를 제정했다. 이 법은 초안 작성에 참여한 자크 사바리( Jacques Savaryfra )의 이름을 따 '사바리 법전( Code Savaryfra )'이라고도 불리며, 세계 최초의 성문 상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콜베르는 파리 천문대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설립에 기여하고, 샤를 페로, 샤를 르브룅 등 문화예술인과 과학자들을 후원하며 프랑스 문화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는 루이 14세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콜베르의 개혁은 프랑스 경제의 기초를 다지고 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지나친 국가 통제와 규제, 그리고 국왕의 과도한 전쟁 비용 지출이라는 한계도 안고 있었다.[5]

3. 2. 산업 육성 정책



콜베르는 중상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의 정책 목표는 프랑스의 경제력을 축적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 국내 산업을 육성 및 보호하고, 수출품을 장려하며 수입품을 제한하는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의 정책은 '콜베르주의'(Colbertisme)로 불리며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 경제 정책의 근간을 이루었다.

콜베르는 국가 주도로 다양한 분야의 제조업 기업을 육성하고자 했다. 새로운 산업을 설립하고 발명가를 보호했으며, 외국의 숙련된 기술자들을 프랑스로 초청하는 동시에 프랑스 노동자의 해외 이민은 금지했다.[3] 특히 태피스트리나 자기류와 같은 고급품 생산에 집중하여 유럽 시장에서 프랑스 제품의 명성을 높이고자 했으며, 파리의 고블랭 공장을 비롯한 매뉴팩처 설립을 지원하고 보호했다.

엄격한 품질 관리 정책도 시행했다. 외국 시장에서 프랑스 상품의 경쟁력을 유지하고 국내 소비자에게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 각 품목의 품질과 수량을 법으로 상세히 규정했다. 규정을 위반할 경우, 위반 사실을 공개하고 관련 상품을 파괴했으며, 세 번째 위반 시에는 사형 기둥에 세우는 등 강력하게 처벌했다.[3] 그러나 이러한 엄격한 규제는 특정 제품의 생산을 금지하거나, 과도한 감독으로 인해 기술 및 생산 방식의 개선을 저해했을 수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3]

콜베르는 기존의 조합(길드) 시스템을 확고히 유지했는데, 이는 각 산업이 특정 특권을 가진 부르주아 계층의 손에 머무르게 하여 하위 계층의 신분 상승 기회를 제한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3]

국내 상업 활성화를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지방 간 상품 이동에 부과되던 관세를 완전히 철폐하지는 못했지만, 관세를 통일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노력했다.[3] 또한 도로와 운하 등 기반 시설 개선에도 힘썼는데, 특히 피에르 폴 리케가 미디 운하를 계획하고 건설하는 데 중요한 후원을 제공했다.[3]

해외 무역 증진과 식민지 확장을 위해 다수의 왕립 무역 회사를 설립했다. 영국네덜란드와 경쟁하기 위해 극동아메리카 지역 무역을 목표로 했으나, 유명한 프랑스 동인도 회사(1664년 설립)를 포함하여 프랑스 서인도 회사(1664년), 르방 회사(1670년), 세네갈 회사(1673년) 등 대부분의 회사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베르는 강력한 해군과 상당한 규모의 상선단을 건설하는 데는 성공했으며, 캐나다(누벨프랑스), 서인도 제도, 극동 지역에 프랑스 해외 제국을 건설하는 기초를 다졌다.

이러한 상업 활동을 법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1673년에는 상사 조례를 제정했다. 이 조례는 초안 작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 자크 사바리의 이름을 따 '사바리 법전'이라고도 불리며, 세계 최초의 성문 상법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상사 조례는 상업 장부 제도를 도입하는 등 근대 상법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3. 3. 해외 식민지 확장 정책

콜베르는 프랑스의 경제력 증진을 위해 중상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해외 무역 확대와 식민지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극동아메리카 대륙 무역에서 영국네덜란드와 경쟁하고자 왕실 주도의 특허 회사 설립을 추진했다.

대표적인 회사들은 다음과 같다.

  • 프랑스 동인도 회사 (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rientales, 1664년 설립)
  • 프랑스 서인도 회사 (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ccidentales, 1664년 설립)
  • 르방 회사 (Compagnie du Levant, 1670년 설립): 레반트 지역 무역 담당
  • 세네갈 회사 (Compagnie du Sénégal, 1673년 설립): 세네갈, 기니 등 서아프리카 지역 무역 담당
  • 북방 회사


이 회사들은 레반트, 세네갈, 기니 등 다양한 지역과의 무역을 통해 프랑스의 부 증대를 목표로 했으나, 대부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3] 그럼에도 콜베르는 이 과정을 통해 프랑스 해군력을 크게 강화하고 상당한 규모의 상선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유럽의 주요 해상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이 되었다.

동시에 콜베르는 캐나다, 서인도 제도, 극동 등지에 프랑스 해외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17세기 초반에 발견되어 명맥만 유지되던 퀘벡에는 처음으로 대규모 식민단을 파견하여 누벨프랑스의 기초를 다졌으며, 북아메리카의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지역에 대한 식민 활동도 장려했다. 또한 해외 무역로와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해 해군력 증강에도 힘썼다.

이러한 콜베르의 적극적인 국가 주도 경제 정책과 해외 팽창 노력은 훗날 '콜베르주의(Colbertisme)'로 불리게 되었으며, 다음 세기 프랑스의 상업과 산업 발전 및 식민 제국 확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예술과 과학 진흥

콜베르가 루이 14세에게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회원들을 소개하는 모습


앙투안 쿠아제복스의 콜베르 흉상, 루브르 박물관, 파리


콜베르는 프랑스의 예술과 문화 발전을 자신의 중요한 책임으로 여겼다. 그는 화가작가들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보호하며, 체계적으로 조직화하는 데 힘썼다. 루이 14세 시대의 웅장한 건축 계획들 역시 상당 부분 그의 주도하에 진행되었다.

그는 예술과 문학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럽 각지와 프랑스 영사가 파견된 근동 지역에서 귀중한 필사본을 수집하여 개인 서재를 풍부하게 채웠다. 이 서재는 당대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으며, 피에르 드 카르카비와 에티엔 발루즈와 같은 학자들이 사서로 일했다. 콜베르 사후 그의 손자는 1732년에 이 필사본 컬렉션을 왕립 도서관에 매각했다.[6]

콜베르는 프랑스의 학문과 예술 진흥을 위해 여러 중요 기관을 설립하거나 재편했다.

설립 연도기관명비고
1663년비문학 및 메달 아카데미
1666년프랑스 과학 아카데미현재 프랑스 학사원의 일부
1666년로마 프랑스 아카데미
1667년파리 천문대클로드 페로가 건설, 조반니 도메니코 카시니 초빙
1669년오페라 아카데미후에 아카데미 로열 드 뮤지크로 개칭
1671년건축 아카데미
기타아를, 수아송, 등 여러 도시에 아카데미 설립
재편회화 및 조각 아카데미쥘 마자랭이 설립한 기관 재정비



프랑스와 왕가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던 콜베르는 당대 유럽 최고의 예술가로 꼽히던 이탈리아의 건축가이자 조각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를 파리로 초청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65년 6월부터 10월까지 파리에 머문 베르니니에게 루브르 박물관의 새로운 동쪽 파사드 설계를 맡기려 했던 것이다. 이는 베르니니가 아무리 높은 지위의 후원자 요청이라도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것을 꺼렸던 전례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당시 프랑스와 교황청 간의 외교적 상황과 맞물려 큰 화제를 낳았다. 베르니니는 프랑스 체류 중 루이 14세의 대리석 흉상(현재 베르사유 궁전 소장)을 조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콜베르와 베르니니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고, 결국 베르니니의 루브르 설계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7]

콜베르 자신도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이 되었으며, 아카데미의 주요 사업이었던 ''프랑스 학술원 사전'' 편찬 작업 속도를 높이기 위해 엄격한 규칙을 제안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정해진 시작 시간 전에 도착하여 끝나는 시간까지 자리를 지키지 않으면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식이었다. 1673년에는 생존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첫 번째 전시회를 주관했으며, 수백 점의 그림과 조각상을 구입하여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그는 몰리에르, 피에르 코르네유, 장 라신, 니콜라 부알로, 피에르 다니엘 위에, 앙투안 바리야스 등 수많은 프랑스 문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했으며, 네덜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나 이탈리아의 카를로 로베르토 다티와 같은 외국 학자들에게도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지원은 군주와 자신에 대한 찬사를 유도하려는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문학, 과학, 예술 분야에 대한 그의 실질적인 기여와 관심을 단순히 정치적 동기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콜베르의 이러한 문화 정책과 후원은 루이 14세의 이미지를 예술의 후원자로 각인시키고 프랑스 문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5. 쇠퇴와 사망

콜베르의 정책이 항상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유럽 무역에서 네덜란드의 우위를 깨뜨리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관세를 통한 압박이 효과를 보지 못하자, 그는 1672년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공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예상과 달리 1679년까지 길어졌고, 프랑스 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며 콜베르가 이룬 많은 성과를 퇴색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683년, 콜베르는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세니에레 후작위를 이어받아 해군 장관이 되었고, 조카 장 역시 토르시 후작으로서 외무 장관에 임명되어 루이 14세를 계속해서 보좌했다.

5. 1. 네덜란드 침공 실패

콜베르는 혁신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의 아이디어들은 리슐리외 추기경과 같은 다른 인물들에게서 비롯되었으며, 콜베르가 이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기도 했다. 그는 22년간 프랑스 경제를 이끌며 방대한 업무 범위와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모든 계획이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 내 다양한 책임과 대책 제도를 통합하거나 국가 안에서 자유 무역을 안정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또한, 그의 명령이 때때로 무시되면서 충실한 조사를 통한 산업 규제는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콜베르의 가장 큰 실패는 극동 및 유럽 무역에서 네덜란드가 누리던 지배력을 끝내려고 시도했을 때 발생했다. 그는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네덜란드에 타격을 주려 했으나 실패하자, 1672년 루이 14세가 네덜란드를 침공하는 것을 지지했다. 몇 주 안에 전쟁이 끝날 것으로 기대했지만, 전쟁은 1679년까지 이어졌고 프랑스 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안겨주었다. 이로 인해 콜베르가 이룬 많은 경제적 성과들이 빛을 바래게 되었다.

5. 2. 사망

콜베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일에 몰두했다. 그는 일찍 일어나 늦게 퇴근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여겼으며, 일은 그에게 종교와 같았다. 말년에 그는 심한 복통으로 큰 고통을 겪었으며, 식사로는 닭 수프에 적신 축축한 만 먹을 수 있었다.

1683년 9월 6일, 64세가 된 콜베르는 병상에 누워 생일 7일 후에 사망했다. 당시 그는 민중에게 인기가 매우 낮았다. 사후 그를 검사한 외과 의사들은 그의 요로에서 거대한 신장 결석을 발견했고, 이것이 그의 극심한 고통의 원인이었음을 확인했다. 한 명의 장관에게 이토록 막대한 책임이 집중된 것은 왕정 하에서 다시는 반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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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아들 장바티스트 콜베르는 세니에레 후작위를 이어받아 아버지처럼 해군 장관이 되었고, 조카 장은 토르시 후작으로서 외무 장관으로 루이 14세를 섬겼다.

6. 평가

루이 14세 시대 프랑스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그의 경제 및 행정 정책은 '''콜베르티슴'''(Colbertisme)으로 불리며 후대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정책들은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영감을 주었으며,[1] 프랑스 해군은 그의 공적을 기려 총 6척의 군함에 그의 이름을 명명했다.[2]

문학 작품 속에서도 그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브라젤론 백작''에서는 니콜라 푸케와 권력 투쟁을 벌이는 인물로 등장하며, 거칠고 무자비하지만 선구적인 애국자로 묘사된다.[3]

한편, 콜베르가 노예법전 초안 작성에 관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현대에 와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2020년에는 프랑스 국회 밖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 이러한 이유로 훼손되기도 했다.[4]

6. 1. 긍정적 평가

니콜라 푸케의 실각 이후 재정 재건에 착수하여 정부와 유착한 금융업자를 적발하고, 적자 해소에 힘썼다. 1681년 복잡한 간접세를 정리하여 특정 개인과의 일괄 도급 계약으로 하는 징세 도급 제도를 확립하고, 직접세 경감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방법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중상주의적 관점에서 금과 은의 보유를 중시하며, 국가 주도로 다양한 공업을 육성할 계획을 세웠다. 외국인 노동자의 유입을 금지하고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높이는 등 보호무역주의 정책을 채택하는 한편, 산업 발전과 수출을 장려하여 파리의 고블랭 공장을 비롯한 매뉴팩처 설립·보호 및 외국인 기술자 초빙과 기술 발달, 국내 도로 정비·운하 개척과 태피스트리·유리·직물·도자기 등 사치품 제조에 힘썼다.

한편 프랑스 동인도 회사(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rientales프랑스어, 1664년)뿐만 아니라, 프랑스 서인도 회사(Compagnie française des Indes occidentales프랑스어, 1664년), 르방 회사 (Compagnie du Levant프랑스어, 1670년), 세네갈 회사}} (Compagnie du Sénégal프랑스어, 1673년), 북방 회사 등

6. 2. 부정적 평가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장바티스트 콜베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7. 유산

콜베르 가문의 문장


콜베르는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름생몰년비고
잔마리 콜베르1650–1732샤를 오노레 다르베르, 뤽윈 공작과 결혼
장바티스트 콜베르, 세느레 후작1651–1690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군 장관 역임
자크니콜라 콜베르1654–1707루앙 대주교
장쥘아르망 콜베르1664–1704블랭빌 후작, 블레넘 전투에서 전사
앙리에트루이즈 콜베르1657–1733폴 드 보빌리에, 생티냥 2세 공작과 결혼



그의 경제 정책은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인 알렉산더 해밀턴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 해군은 그의 업적을 기려 총 여섯 척의 군함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 1848년 진수된 증기 코르벳함
  • 1875년 진수된 전함
  • 1914년 취역한 화물선
  • 1916년 취역한 던디급 슬루프함
  • 콜베르 (1928년): 1928년 진수된 쉬프렌급 중순양함
  • 콜베르 (C611): 1956년 진수된 미사일 순양함


문학 작품 속에서도 콜베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브라젤론 백작''(삼총사 시리즈의 마지막 편)에서는 콜베르와 니콜라 푸케 사이의 권력 다툼이 주요 내용 중 하나로 다뤄진다. 뒤마는 콜베르를 교양 있는 푸케와 대조적으로 거칠고 무자비한 음모가로 묘사하면서도, 동시에 선구적인 애국자로 그리기도 했다.

파리의 국회 의사당 앞에는 콜베르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2020년, 콜베르가 노예법전(Code Noir) 초안 작성에 관여했다는 사실 때문에 동상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한편, 1989년에 완공된 경제 재무부 청사의 본관 건물은 그의 이름을 따 '콜베르 빌딩'으로 명명되었다.

참조

[1] 서적 Colbert et le colbertisme https://books.google[...] Tallandier
[2] 문서
[3] 문서
[4] 간행물 French Forest Legislation and Administration, 1660-1789 https://www.jstor.or[...] 1955
[5] 서적 Letters to John Law Newton Page
[6] 서적 Les Manuscrits de Chrétien de Troyes Rodopi
[7] 문서
[8] 문서
[9] 웹사이트 The Edict of Nantes https://www.historyt[...] 2022-02-07
[10] 서적 Alexander Hamilton https://archive.org/[...] Penguin Press
[11] 웹사이트 France Colbert row: Statue vandalised over slavery code https://www.bbc.com/[...] BBC 2020-06-24
[12] 서적 Eclipse: Living in the Shadow of China's Economic Dominance https://books.google[...] Peterson Institute
[13] 서적 Capitalism With a Comrade's Face: Studies in the Postcommunist Transition https://archive.org/[...] Central European University Press
[14] 뉴스 Jean-Baptiste Colbert French statesman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15] 논문 Public Debt 1947
[16] 문서
[17]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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