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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전역 (1941년~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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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핀 전역 (1941년~1942년)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공하여 점령한 일련의 전투를 의미한다. 1898년 미국 식민지가 된 필리핀은 일본의 침공에 대비하여 미국 극동 육군(USAFFE)을 창설하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지휘 하에 병력을 배치했다. 일본군은 진주만 공격과 같은 날인 1941년 12월 8일 루손 섬을 공격하며 침공을 시작했고, 미군은 바탄 반도로 철수하여 저항했다.

이후 일본군은 바탄 전투에서 승리하고, 코레히도르 섬을 함락하며 필리핀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필리핀 점령 기간 동안 바탄 죽음의 행진과 같은 만행을 저질렀고, 이에 맞서 미국과 필리핀 게릴라들이 저항했다. 필리핀 전역은 일본군의 예상보다 훨씬 오래 지속되었으며, 미군에게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첫 번째 대규모 전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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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전역 (1941년~1942년)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 명칭필리핀 전역
전체 전쟁태평양 전쟁
시기1941년 12월 8일 – 1942년 5월 8일
장소필리핀, 필리핀해
결과일본의 승리, 일본의 필리핀 점령
교전 세력
교전국 1미국
필리핀 연방
교전국 2일본
지휘관 및 지도자
미국 및 필리핀 연방군더글라스 맥아더
조너선 M. 웨인라이트
조지 M. 파커
마누엘 L. 케손
바실리오 발데스
일본군혼마 마사하루
오바타 히데요시
이보 다카하시
쓰카하라 니시조
병력 규모
일본군129,435명
90대 전차
541대 항공기
미국 및 필리핀 연방군151,000명
108대 전차
277대 항공기
사상자 규모
일본군 (일본 측 추정)총 11,225명
전사 4,130명
실종 287명
부상 6,808명
일본군 (미국 측 추정)17,000–19,000명
전사 또는 부상 7,000명
질병으로 사망 10,000–12,000명
미국 및 필리핀 연방군146,000명
전사 25,000명
부상 21,000명
포로 100,000명
기타 정보
관련 전투 목록바탄 섬 침공
코레히도르 전투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들이 임시 들것을 사용하여 전우를 운반하는 모습 (1942년 5월, [[바탄 죽음의 행진]])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들이 임시 들것을 사용하여 전우를 운반하는 모습 (1942년 5월, 바탄 죽음의 행진)
무방비 도시를 선언한 마닐라
무방비 도시를 선언한 마닐라

2. 배경

필리핀은 7,1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로,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결과 미국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미국은 필리핀에 자치를 허용하고 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1935년부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 군사력 건설을 위한 군사고문으로 일했다. 맥아더는 1937년 미 육군에서 퇴역했지만, 1941년 초 미일 관계 악화와 일본군 침공 예상으로 현역으로 재소집되었다. 미국은 필리핀 방위군을 미군으로 편입, 1941년 6월 26일 맥아더 휘하에 미국 극동 육군(USAFFE)을 창설했다.

당시 필리핀 총병력은 약 13만 명이었고, 이 중 미군은 13,500명이었다. 미국 본토에서 증원군이 올 예정이었으나, 일본군의 침공이 먼저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11]



일본은 1923년 제국 국방 방침을 개정하여 미국을 가상 적국 1위로 삼고, 필리핀 점령을 통해 미국의 극동 근거지를 빼앗는 작전을 구상했다. 1941년 11월 5일 어전 회의에서 대영미란 전쟁이 결정되었고, 6일에 남방 작전 부대의 전투 서열이 하달되었다. 필리핀 작전의 목적은 필리핀의 적을 격파하고 주요 근거지를 멸망시키는 것이었다.[93][95]

2. 1. 전전(戰前) 필리핀

필리핀은 7,1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도서 국가로, 남북으로 1,100마일, 동서로 700마일에 걸쳐 넓게 퍼져 있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결과 미국식민지가 된 후 미국의 극동 근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필리핀에 가능한 많은 자치를 허용하고, 이후 독립시키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35년부터 신생 필리핀 군사력 건설을 위한 군사고문으로 근무했다. 맥아더는 1937년 미 육군에서 퇴역했지만, 미일 관계 악화와 일본군 침공 예상으로 1941년 초 현역으로 재소집되었다. 미국은 필리핀 방위군을 미군으로 편입, 1941년 6월 26일 맥아더 휘하에 미국 극동 육군(USAFFE)을 창설했다.

당시 필리핀 총병력은 약 13만 명이었고, 그 중 미군은 13,500명이었다. 항공기는 277대가 있었으나 전투 가능한 것은 142대였고, 해군도 미약했다. 미국 본토에서 2만여 명의 병력과 50만 톤의 보급품이 도착 예정이었으나, 일본군의 침공이 먼저 시작되었다.

1899년부터 필리핀은 미국의 식민지였다. 미국은 일본의 공격에 대비하여 1924년 오렌지 계획을 구체화했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마닐라만 항구는 대규모 함대 지원 능력이 부족하여, 해군 기지는 5,000마일 떨어진 진주만을 사용해야 했다. 반면 일본의 기지는 필리핀에서 1,500마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단기간에 대병력 투입이 가능했다. 이러한 상황에 맞춰 1936년에 개정된 오렌지 계획(WPO-3)에서는 필리핀 전토 방어를 포기하고 병력을 마닐라만 주변에 집중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는 이 안에 불만을 가졌다. 맥아더는 1935년 미국 육군 참모총장 퇴임 후 마누엘 케손의 요청으로 필리핀군 신설을 위한 군사 고문으로 취임했다. 1937년 미 육군에서 퇴역했지만, 1941년 7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요청으로 현역 복귀하여 필리핀 주둔 미국 극동 육군 사령관이 되었다. 맥아더는 10개 사단까지 육성한 필리핀군과 미국군의 최신예기 전력으로 필리핀 방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1941년 10월, 오렌지 계획을 계승한 레인보우 계획(RAINBOW 5)이 개정되자, 맥아더는 재검토를 요구하여 필리핀 전토 요지에 병력을 배치하는 적극적인 방어책으로 전환했다.

2. 2. 일본군의 필리핀 작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국 극동 육군(USAFFE)은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루손섬을 방어하고, 방어선이 돌파되면 바탄반도로 철수하여 마닐라만을 확보하는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해군 보급 유지라는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한편, 필리핀 침공을 담당한 일본군 제14군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지휘했으며, 제16사단과 제48사단, 그리고 제65여단으로 구성되었다. 오바타 히데요시 중장 휘하의 제5항공집단이 육상 작전을 지원했고, 다카하시 이보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제3함대가 수륙 양용 침공을 수행했다. 츠카하라 니시조 해군 소장의 제11항공함대는 육상 기반 항공기를 지원했다.

일본군의 필리핀 침공 목표는 다음과 같았다.[11]

일본은 1923년 제국 국방 방침을 개정하여 미국을 가상 적국 1위로 삼고, 필리핀 점령을 통해 미국의 극동 근거지를 빼앗는 작전을 구상했다. 1941년 11월 5일 어전 회의에서 대영미란 전쟁이 결정되었고, 6일에 남방 작전 부대의 전투 서열이 하달되었다. 남방 작전은 필리핀에서의 우회전 작전("E 작전")과 말레이에서의 좌회전 작전으로 자바를 목표로 했다.[93] 필리핀 작전의 목적은 필리핀의 적을 격파하고 주요 근거지를 멸망시키는 것이었다.[95]

3. 일본군의 침공

1941년 중반,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 국가들은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필리핀의 연합 방위군은 극동 미국 육군 (USAFFE)으로 편성되었으며, 여기에는 필리핀 육군 제1정규 사단, 제2(헌병대) 사단, 10개의 예비 사단[13], 그리고 미국 육군의 필리핀 관구가 포함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쟁부에 의해 은퇴에서 복귀하여 1941년 7월 26일 USAFFE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4]

맥아더는 USAFFE를 4개의 전술 사령부로 재편성했다.[23] 조나단 M. 웨인라이트 소장이 지휘하는 노스 루손 부대는 루손 중부 평원과 상륙이 예상되는 주요 지점을 방어했다. 사우스 루손 부대는 조지 M. 파커 주니어 준장이 지휘했으며, 마닐라 동쪽과 남쪽 지역을 담당했다. 비사야-민다나오 부대는 윌리엄 F. 샤프 준장이 지휘했으며, PA 제61, 제81, 제101 보병 사단으로 구성되었다. 맥아더의 직접 통제를 받는 USAFFE 예비 부대는 필리핀 사단, 제91 사단 (PA) 등으로 구성되어 마닐라 북쪽에 배치되었다.

해안 포병대 4개 연대는 마닐라 만 입구를 경비했으며, 코레히도르 섬도 포함되었다.[25][26][27] USAFFE의 항공 부대는 극동 공군 (FEAF)이었으며, 루이스 H. 브레레톤 소장이 지휘했다. 주요 전투력은 91대의 P-40 워호크 전투기와 34대의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였다.[36]

미국 아시아 함대와 제16해군관구는 마닐라에 주둔하며 필리핀 해상 방어를 담당했다. 토머스 C. 하트 제독이 지휘하는 아시아 함대의 수상 전투함은 중순양함, 경순양함, 그리고 13척의 제1차 세계 대전 시대 구축함이었다.[30]

1941년 12월 8일 오전 2시 20분(현지 시각), 진주만 공격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필리핀에 전해졌다.[33][34] 오전 3시 30분,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장인 리처드 서덜랜드 준장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격 소식을 들었다.[33]

1941년 12월 8일부터 1942년 1월 8일까지 일본군의 루손 섬 상륙 및 진격


일본 제14군은 1941년 12월 8일, 루손 섬 북쪽 해안에서 120km 떨어진 바탄 섬 (바탄 반도와 혼동하지 말 것)에 해군 육전대 부대를 상륙시키면서 침공을 시작했다. 이틀 뒤에는 카미긴 섬, 비간, 아파리, 곤자가 등 루손 섬 북부 지역에 상륙이 이어졌다.

12월 12일, 일본군은 루손 섬 남부의 레가스피에 제16사단 병력 2,500명을 상륙시켰다. 12월 19일에는 민다나오섬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주요 공격은 1941년 12월 22일 이른 아침, 라 유니온 주 동해안의 아고, 카바, 바우앙 3개 마을에 링가옌 만을 따라 시작되었다.[60] 12월 23일 밤, 일본군은 내륙으로 16km 진격했다.

다음 날, 제16사단 7,000명이 루손 남부의 라몬 만 해안을 따라 세 곳에 상륙하여 마닐라를 향해 북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24일, 맥아더는 전쟁 전 계획인 오렌지 3호를 발동하여 군대를 바탄으로 철수시켰다.[61] 12월 26일, 맥아더는 마닐라를 개방 도시로 선언했다.[62]

3. 1. 일본군의 초기 목표

일본은 "대동아 전쟁" 계획의 일환으로 필리핀 점령을 목표로 했다. 이 계획에서 남방군은 말레이시아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원자재를 확보하고, 연합 함대는 미국 태평양 함대를 무력화시키려 했다.[11] 필리핀 침공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주요 목표가 있었다.[11]

  • 미국군의 전진 기지로서 필리핀 사용을 방지한다.
  •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대한 작전을 강화하기 위한 발진 기지와 보급 기지를 확보한다.
  • 점령된 남부 지역과 일본 열도 간의 통신선을 확보한다.
  • 연합군이 호주와 솔로몬 제도에서 공세를 시작하려 할 때, 필리핀 및 주변 국가에 주둔한 모든 병력을 파견하여 연합군의 개입을 제한한다.


일본은 1923년에 제국 국방 방침을 개정하여 미국을 가상 적국 1위로 삼았으며, 필리핀 주요 지역을 빠르게 점령하여 극동에서 미군 근거지를 빼앗는 작전을 구상했다. 1941년 11월 5일, 어전 회의에서 대영미란 전쟁이 결정되었고, 6일에 남방 작전 부대의 전투 서열이 하달되었다.[93] 필리핀 작전은 "E 작전"으로 명명되었으며,[94] 그 목적은 "필리핀에 있는 적을 격파하고 그 주요 근거를 멸망시키는 데" 있었다.[95]

3. 2. 침공 부대

혼마 마사하루 중장이 지휘하는 일본군 제14군이 필리핀 침공을 담당했다.[12] 오바타 히데요시 중장 휘하의 제5항공집단이 만주에서 타이완으로 이동하여 육상 작전을 지원했다.[12] 다카하시 이보 해군 소장이 지휘하는 제3함대가 수륙 양용 침공을 수행했으며, 츠카하라 니시조 해군 소장의 제11항공함대의 육상 기반 항공기가 지원했다.[12]

제14군은 제16사단과 제48사단의 두 개 보병 사단, 그리고 제65여단을 보유했다.[12] 제48사단은 린가옌 만 상륙, 제16사단은 라몬 만 상륙 임무를 맡았다. 제14군은 제4 및 제7전차연대,[12] 5개의 야전 포병 대대, 5개의 대공포 대대, 4개의 대전차 중대, 그리고 박격포 대대를 보유했다. 제14군의 지원 부대에는 강력한 공병 및 가교 부대가 포함되었다.

침공을 위해 제3함대는 제2함대의 두 구축함 전대와 순양함 사단, 그리고 제1항공함대의 항공모함 류조에 의해 증강되었다. 필리핀군은 항공모함 1척, 중순양함 5척, 경순양함 5척, 구축함 29척, 수상기 모함 2척, 기뢰 제거함 및 어뢰정으로 구성되었다.[12]

상륙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육군과 해군 항공 전력은 총 541대가 할당되었다. 제11항공대는 156대의 G4M "베티" 및 G3M "넬" 폭격기, 107대의 A6M 제로 전투기, 수상기 및 정찰기로 구성되었다.[12] ''류조''는 16대의 전투기와 18대의 어뢰 폭격기를 추가 제공했으며, 수상함에는 수색 및 관측을 위한 68대의 수상기가 있어 총 412대의 해군 항공기가 투입되었다. 육군의 제5항공집단은 192대의 항공기를 보유했는데, 76대의 Ki-21 "샐리", Ki-48 "릴리", 및 Ki-30 "앤" 폭격기, 36대의 Ki-27 "네이트" 전투기, 그리고 19대의 Ki-15 "밥스" 및 Ki-36 "이다" 정찰기로 구성되었다.[12]

3. 3. 초기 상륙 (1941년 12월 8일 ~ 20일)



일본 제14군은 1941년 12월 8일, 루손섬 북쪽 해안에서 120km 떨어진 바탄 섬 (바탄 반도와 혼동하지 말 것)에 해군 육전대 부대를 상륙시키면서 침공을 시작했다.[52] 이틀 뒤에는 카미긴 섬, 비간, 아파리, 곤자가 등 루손 섬 북부 지역에 상륙이 이어졌다.

곤자가에서는 두 대의 B-17 폭격기가 하역 중인 일본 함선을 공격했다. 전투기 호위를 받은 다른 B-17 폭격기들은 비간에서 상륙 작전을 공격했다. 극동 공군의 마지막 합동 작전에서, 미국 항공기는 일본 수송선 2척 (''오이가와 마루''와 ''다카오 마루'')과 순양함 , 구축함 에 피해를 입혔고, 기뢰정 ''W-10''을 격침시켰다.[52]

12월 12일 이른 아침, 일본군은 루손 섬 남부의 레가스피에 제16사단 병력 2,500명을 상륙시켰는데, 이는 가장 가까운 미국 및 필리핀 군대에서 150km 떨어진 곳이었다. 12월 19일에는 민다나오섬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다.

한편, 토머스 C. 하트는 12월 10일, 일본군의 공습으로 카비테의 미국 해군 시설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필리핀 해역에서 미국 아시아 함대 대부분을 철수시켰다. 일본 해군의 우위에 대항하기 위해 잠수함만 남았지만, 이들의 지휘관들은 전쟁 전 교리에 의해 함대 잠수함이 공중 및 대잠 공격에 실제보다 더 취약한 정찰선으로 여겨졌고, 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났다. 잠수함 작전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교리와 마크 14 어뢰의 문제점으로 인해, 필리핀 전역에서 아시아 함대에 의해 단 한 척의 일본 군함도 격침되지 않았다.[53]

제임스 로이츠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 헨리 스팀슨 (미국 전쟁 장관)은 미국 해군 잠수함의 부재를 두고 하트 제독과 갈등을 빚었다. 맥아더는 하트 제독에게 "당신의 잠수함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소?"라고 질문했다.[57]... 맥아더는 하트의 소극적인 태도가 일본 해군에게 자유로운 작전을 허용했다고 불평했다.[58]"

1941년 12월 7일 오후 9시 35분, 제1날씨 정찰대의 육상 공격기 2기가 타이난 기지를 발진했다. 오후 11시 30분, 제2날씨 정찰대의 육상 공격기 2기가 발진했다. 정찰 결과, 공격대의 야간 진격이 가능한 상태로 판단되었다. 8일 오전 0시 15분, 이 정찰을 탐지한 미군은 이바, 클라크에 전 기 15분 대기를 명령하고, 그 후 일본 정찰기 요격을 위해 전투기를 발진시켰으며, 일본의 고웅 통신대는 그것들을 엿들었다.[96]

일본의 각 항공 부대는 8일 오전 2시 30분 발진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짙은 안개가 발생하여 "0500 이후 2시간 대기"를 명하고, 공격대의 발진을 늦추었다.[96] 또한, 마닐라 지역의 공격을 중지하고 제1격을 클라크, 이바 양 기지에 집중하는 작전으로 변경되었다. 오전 3시 20분, 항공 부대 사령부는 하와이 기습 성공을 알고, 이어서 미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 아시아 함대에 작전 개시를 발령한 것도 인지했다.[97]

8일, 태평양 전쟁의 개전 초두, 필리핀에 대한 항공 공격은 이상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다음 날 9일은 기상 불량으로 인해 충분한 활동을 할 수 없었지만, 10일에는 제11항공함대가 마닐라 주변 항공 기지 및 해군 기지를 공격하여, 미 항공 전력의 대부분을 괴멸시켰기 때문에, 선견대의 상륙은 큰 항공 피해를 면했다.[98] 12월 10일에는 북부 루손의 아파리와 비간에 조공부대가 상륙하여 비행장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12일에는 남부 루손의 레가스피에 역시 조공부대가 상륙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조공에 기만당하지 않고, 장차 예상되는 주공에 대비하였다.

12월 18일부터 일본군은 당초 계획대로 공군을 이용하여 루손 기지에서 작전을 개시하였다. 20일, 다바오 공략 부대는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상륙에 성공하여, 다바오 시를 점령했다.[99]

3. 4. 클라크 기지 공격 (1941년 12월 8일)

1941년 12월 8일 오전 2시 20분(현지 시각), 진주만 공격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필리핀에 전해졌다.[33][34] 극동 공군(FEAF) 요격기는 자정 직후 보고된 접근하는 항공기에 대한 공중 수색을 이미 수행했지만, 이는 기상 조건을 보고하는 일본 정찰기였다.[35][36] 오전 3시 30분,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장인 리처드 서덜랜드 준장은 상업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격에 대해 들었다.[33] 오전 5시에 브레레튼은 USAFFE 본부에 보고했고 맥아더를 만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서덜랜드에게 공격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레인보우 5 전쟁 계획 지침에 따라 포르모사(타이완)에 대한 폭격 임무를 극동 공군에 가동할 것을 권고했다. 브레레튼은 또한 다바오 만에서 공격을 인지하게 되었다.[37] 승인은 보류되었지만, 곧 조지 C. 마셜 장군으로부터 레인보우 5를 실행하라는 지시를 담은 전보에 따라 브레레튼은 나중에 승인받을 수 있도록 타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6][38]

일련의 논쟁과 결정 과정을 통해 첫 번째 공습 승인은 일몰 직전의 공격을 위해 오전 10시 15분에야 이루어졌으며, 다음 날 새벽에 후속 공습이 이루어졌다. 그동안 일본의 클라크 및 이바 기지 공격 계획은 포르모사 기지의 안개로 인해 6시간 지연되어 일본 육군 소규모 임무만 루손 북부의 목표물을 공격했다. 오전 8시에 브레레튼은 헨리 H. 아놀드 장군으로부터 그의 항공기가 지상에 있는 동안 공격받는 것을 허용하지 말라는 경고 전화를 받았다. 극동 공군은 예방 조치로 오전 8시에서 8시 30분 사이에 세 개의 비행대 규모의 전투기 순찰대와 루손의 모든 사용 가능한 폭격기를 출격시켰다.[39] 맥아더가 브레레튼에게 공습을 승인한 후, 폭격기들은 착륙하여 오후에 포르모사에 대한 공습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세 개의 추격 비행대 모두 연료가 부족해지기 시작하여 동시에 순찰을 중단했다.

제20추격 비행대의 커티스 P-40B 요격기는 폭격기들이 오전 10시 30분에서 10시 45분 사이에 클라크 기지에 착륙하여 정비를 위해 격납고로 분산되는 동안 해당 지역을 순찰했다.[36] 니콜스 기지에 주둔한 제17추격 비행대도 클라크에 착륙하여 조종사들이 점심을 먹는 동안 항공기에 연료를 보급한 후 오전 11시 직후에 조종사들에게 경계를 발령했다.[40] 클라크 기지의 B-17 중 두 대를 제외한 모든 기체가 지상에 있었다.[41]

오전 11시 27분과 11시 29분에 이바 기지의 레이더 기지는 130마일 떨어진 곳에서 두 번의 접근하는 공습을 감지했다. 이는 극동 공군 본부와 클라크 기지 사령부에 경고를 보냈지만, 이 경고는 혼란스러운 보고가 여러 번 발생하여 추격 비행대 사령관인 오린 L. 그로버 소령에게만 전달되었다.[36][38] 제3추격 비행대는 오전 11시 45분에 이바에서 서부 세력을 요격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륙했지만, 이들은 마닐라를 목표로 삼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륙 중 먼지 문제로 인해 비행이 분산되었다. 니콜스 기지에 있는 제21추격 비행대(PS)의 두 개 비행대(P-40E 6대)는 1차 윌리엄 E. 다이스 중위의 지휘 하에 오전 11시 45분에 이륙했다. 그들은 클라크로 향했지만 제3PS가 세력을 요격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제2방어선으로 마닐라 만으로 우회했다. 제21비행대의 세 번째 비행대는 5분 후에 이륙하여 클라크를 향했지만 새로운 P-40E의 엔진 문제로 인해 기수가 두 대로 줄었다. 제17추격 비행대는 오전 12시 15분에 클라크에서 이륙하여 바탄과 마닐라 만을 순찰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델 카르멘의 제34PS는 클라크 기지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고 발진하지 않았다.[42] 클라크에 분산된 제20PS는 이륙할 준비가 되었지만, 비행대 본부로부터 명령을 받지 못했다. 대신 한 정비반장이 접근하는 일본 폭격기 편대를 보고 분대 사령관인 조셉 H. 무어 중위가[43] 직접 스크램블을 명령했다.

레이더로 추적되고 세 개의 미국 추격 비행대가 공중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11항공전대가 오전 12시 40분에 클라크 기지를 공격했을 때,[44] 전술적 기습을 달성했다. 두 개의 B-17 비행대가 지상에 분산되어 있었다. 제20PS의 P-40 대부분은 활주로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27대의 일본 "넬" 폭격기의 첫 번째 파도에 의해 공격을 받았다. 폭탄이 떨어질 때 제20PS P-40B 4대만이 이륙에 성공했다.

두 번째 폭격 공격(26대의 "베티" 폭격기)이 곧이어 이어졌고, 호위 제로 전투기가 30분 동안 기지를 맹렬하게 공격하여, 현존하는 17대의 미국 중폭격기 중 12대를 파괴하고 다른 3대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손상된 B-17 2대가 비행 가능하게 되어 민다나오로 옮겨졌지만, 그 중 1대가 지상 충돌로 파괴되었다.[38] 54대의 "베티" 폭격기에 의한 북서쪽의 이바 보조 기지에 대한 거의 동시 공격도 성공적이었다. 연료가 부족하고 착륙 패턴에 갇힌 제3추격 비행대의 P-40 4대를 제외한 모든 기체가 전투 또는 연료 부족으로 파괴되었다.[45] 제20비행대(4대), 제21비행대(2대), 제3비행대(6대)에서 12대의 P-40이 공격기를 공격했지만 성공하지 못하고 최소 4대를 잃었다.

극동 공군은 45분간의 공격에서 항공기의 절반을 잃었고, 이후 며칠 동안 다른 비행기의 이륙 사고로 인해 살아남은 B-17을 포함하여 거의 파괴되었다.[36]

3. 5. 마닐라 공략 (1941년 12월 22일 ~ 1942년 1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일본군의 침공 직후, 미 극동공군 격파 및 제공권 장악, 필리핀 고립, 루손섬 상륙 후 마닐라 점령, 잔여 지역 점령 및 지상군 소탕을 골자로 하는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

일본군은 12월 8일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루손섬의 비행장과 중요 기지를 폭격하여 미 항공력에 큰 피해를 입혔다. 12월 10일에는 루손 북부의 아파리와 비간에, 12일에는 남부 레가스피에 조공부대를 상륙시켰으나, 맥아더는 이에 속지 않고 주공에 대비했다.

12월 18일부터 일본군은 루손 기지에서 작전을 개시하여 제공권을 확보하고, 12월 23일 새벽 링가옌 만과 24일 라몬 만에 주공부대를 상륙시켜 마닐라를 향해 진격했다.

1941년 12월 25일~31일 남쪽으로의 철수.


맥아더는 첫 번째 계획이 실패했음을 인지하고, 바탄으로의 철수를 시작했다. 그는 바탄의 지형을 이용한 지연전을 통해 마닐라 만을 확보하고 증원군을 기다리기로 결심했다.

북부 루손부대는 5개의 저지선에서 지연전을 펼쳤고, 남부 루손부대는 강행군 끝에 1942년 1월 2일 바탄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같은 날 마닐라에 무혈 입성했다.[52]

미군은 바탄반도에 주 진지와 예비진지를 구축하고 해안방어 진지도 준비했다. 일본군은 미군의 바탄 철수를 예측하지 못하고 마닐라 점령으로 필리핀 전역이 끝날 것으로 예상하여 주력 부대를 이동시켰다.

바탄반도 내 미-필리핀군은 약 8만 명이었으나, 식량과 의약품 부족, 사기 저하 등의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군은 1월 9일부터 공세를 시작했으나, 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1월 21일에야 서부 해안 쪽으로 돌파할 수 있었다. 미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여 26일까지 예비진지로 철수했다.

혼마 장군은 미군을 굴복시키기 위해 장기간 포위를 시도했으나, 대본영의 압박으로 침투와 우회를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일본 제14군은 1941년 12월 22일 이른 아침, 라 유니온 주 동해안의 아고, 카바, 바우앙 3개 마을에 링가옌 만을 따라 제48사단 43,110명과 제16사단 1개 연대를 상륙시켰다.[60] B-17 폭격기와 미국 잠수함이 공격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와인라이트 장군의 제11사단과 제71사단은 일본군을 막지 못했고, 제26기병대(PS)는 로사리오에서 전투 후 철수했다. 12월 23일 밤, 일본군은 내륙으로 16km 진격했다.

다음 날, 제16사단 7,000명이 라몬 만 해안 세 곳에 상륙하여 저항 없이 진격했다. 그들은 마닐라를 향해 북쪽으로 진격했다.

일본 육군은 마닐라 평야의 동쪽을 제48사단, 서쪽을 우에시마 지대가 진격하고, 동해안에서도 제16사단이 수도 마닐라를 목표로 했다. 은륜 부대가 된 우에시마 지대는 빠른 속도로 진격했지만, 30일 필리핀 제21사단과의 전투에서 연대장 우에시마 요시오 대좌가 전사했다.

일본군은 남북에서 마닐라로 접근했고, 1942년 1월 2일 마닐라를 함락했다.

혼마 마사하루 중장은 마닐라 입성 전 장교들에게 약탈, 강간 등을 금지하는 훈시를 했으나, 마닐라 함락 직후 일본군 간부들이 마닐라 대학교 여학생들을 강간했다는 증언이 있다.

4. 바탄 반도로의 철수 (1941년 12월 24일 ~ 1942년 1월 6일)

1941년 12월 24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쟁 전 계획인 오렌지 3호를 발동했다. 이 계획은 군대가 바탄으로 철수하는 동안 루손 중부에서 5개의 지연 방어선을 사용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61] 맥아더는 파커를 남 루손 군의 지휘에서 해임하고 바탄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으며, 부대가 도착하는 대로 활용했다. 군 본부와 필리핀 정부 모두 그곳으로 이동했다. 6개월 동안 예상되는 43,000명의 병력을 먹이기 위해, 주로 마닐라에서 바지선을 이용해 바탄으로 보급품을 수송하는 9일간의 격렬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결국 80,000명의 병력과 26,000명의 난민이 바탄으로 몰려들었다.)

12월 26일, 맥아더는 마닐라를 개방 도시로 선언했다.[62] 그러나 미군은 도시가 개방 도시로 선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물류 목적으로 도시를 사용했고,[63] 일본군은 그 선언을 무시하고 도시를 폭격했다.[64]

두 방어 부대의 부대들은 바탄으로 가는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특히 산 페르난도, 마닐라 만 북쪽 끝의 깊은 팜팡가 강 위에 있는 칼룸피트의 강철 다리, 마닐라 북쪽의 플라리델을 확보하기 위해 이동했다. 남 루손 군은 "도약" 후퇴 전술을 성공적으로 실행했으며 1월 1일까지 다리를 건넜다. 일본 공군 지휘관들은 48사단이 퇴각하는 병력을 가두기 위해 다리를 폭격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65] 다리는 1월 1일에 필리핀 스카우트 공병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일본군은 12월 30일에 맥아더의 계획을 깨닫고 48사단에게 전진하여 바탄을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1월 2일부터 4일까지의 일련의 작전에서 필리핀 육군 제11사단과 제21사단, 26기병대(PS), 임시 전차대의 미국 M3 스튜어트 전차는 산 페르난도에서 디날루피한까지 반도 목에 있는 도로를 남 루손 군의 퇴각 부대를 위해 확보했고, 이후 자신들의 탈출을 성공적으로 했다. 194 전차 대대는 퇴각 중에 50%의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튜어트와 지원하는 75mm SPM 하프트랙 포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반복적으로 막았고 바탄으로 진입하는 마지막 부대였다.

12월 30일, 미국 제31보병대는 달턴 패스 인근으로 이동하여 루손 중부와 남부에서 철수하는 병력의 측면을 지원했고, 필리핀 사단의 다른 부대는 바탄에 진지를 편성했다. 1월 5일에 제31보병대는 바탄 반도 목에 있는 올롱가포-마닐라 도로 서쪽의 라야크 교차로 근처 방어 진지로 이동했다. 교차로는 1월 6일에 포기했지만 바탄으로의 철수는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5. 바탄 전투 (1942년 1월 7일 ~ 4월 9일)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은 진주만과 말라야 공격과 동일한 날에 침공을 개시하였다. 일본군 항공기들은 루손섬의 비행장과 중요 기지에 조직적인 폭격을 가하여, 항공기를 분산시킬 비행장과 조기경보망 및 대공포가 부족한 미 항공력에 큰 피해를 입혔다.

12월 10일에는 북부 루손의 아파리와 비간에 조공부대가 상륙하여 비행장 건설에 착수하였으며, 12일에는 남부 루손의 레가스피에도 조공부대가 상륙하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에 속지 않고, 앞으로 예상되는 주력 부대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12월 18일부터 일본군은 계획대로 공군을 이용하여 루손 기지에서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제공권을 확보하게 되었고, 12월 23일 새벽 서해안의 링가옌만에, 24일에는 동해안의 라몬만에 각각 주력 부대가 상륙하였다. 이 두 부대는 상륙 즉시 마닐라를 향해 맹렬히 진격했다.

맥아더는 첫 번째 계획이 실패했음을 인지하고, 신속히 두 번째 계획인 바탄으로의 철수를 시작했다. 공군력과 기동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은 무모한 일이었기에, 맥아더는 산악과 밀림으로 뒤덮인 바탄의 지형을 이용하여 시간을 벌면서 마닐라만을 확보하여 증원군이 상륙할 수 있도록 하기로 결심하였다.

남부 루손 부대의 바탄 철수를 위해서는 북부 루손 부대의 성공적인 지연 작전이 필요했고, 팜팡가 강의 교량 확보 여부가 중요했다. 북부 루손 부대는 D-1선부터 D-5선에 이르는 5개의 저지선에서 단계적으로 지연전을 펼쳤고, 그동안 남부 루손 부대는 강행군을 실시하여 1942년 1월 2일 무사히 강을 건너 바탄으로 철수했다. 일본군은 같은 날 마닐라에 무혈 입성하였다.

미군은 바탄반도 내 주 진지를 나티브 산 일대에, 예비 진지를 사마트 산 일대에 구축하였고, 일본군의 후방 침투에 대비하여 해안 방어 진지도 준비하였다.

일본군은 미군의 바탄 철수를 예상하지 못했고, 마닐라를 점령하면 필리핀 전역이 끝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혼마 군의 주력인 제4사단을 마닐라 점령 직후 자바 방면으로 이동시켰다. 따라서 일본군은 제16사단 일부와 제65독립혼성여단만으로 바탄의 미군을 격파해야 했다.

바탄반도 내 미-필리핀군은 15,000명의 미군을 포함하여 약 80,000명 정도였으나, 식량과 의약품이 매우 부족했고, 사기 역시 크게 저하되어 있었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주도권을 장악한 일본군은 1월 9일부터 주 진지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였다.

1941년 12월 24일, 맥아더는 전쟁 전 계획인 오렌지 3호를 발동하여 군대가 바탄으로 철수하는 동안 루손 중부에서 5개의 지연 방어선을 사용하도록 했다. 이 계획은 26기병 연대에 의해 부분적으로 실행되었다.[61] 맥아더는 파커를 남 루손 군 지휘에서 해임하고 바탄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도록 했으며, 부대가 도착하는 대로 활용했다. 군 본부와 필리핀 정부 모두 그곳으로 이동했다. 6개월 동안 예상되는 43,000명의 병력을 먹이기 위해, 주로 마닐라에서 바지선을 이용해 바탄으로 보급품을 수송하는 9일간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결국 80,000명의 병력과 26,000명의 난민이 바탄으로 몰려들었다.)

12월 26일, 맥아더는 마닐라를 개방 도시로 선언했다.[62] 그러나 미군은 도시가 개방 도시로 선언되었음에도 여전히 물류 목적으로 도시를 사용했고,[63] 일본군은 그 선언을 무시하고 도시를 폭격했다.[64]

두 방어 부대는 바탄으로 가는 탈출로를 확보하기 위해, 특히 산 페르난도, 마닐라 만 북쪽 끝 팜팡가 강 위에 있는 칼룸피트의 강철 다리, 마닐라 북쪽 플라리델을 확보하기 위해 이동했다. 남 루손 군은 경험 부족과 철수 및 유지를 둘러싼 모호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도약" 후퇴 전술을 성공적으로 실행했으며 1월 1일까지 다리를 건넜다. 일본 공군 지휘관들은 48사단이 퇴각하는 병력을 가두기 위해 다리를 폭격하라는 요청을 거부했다.[65] 다리는 1월 1일에 필리핀 스카우트 공병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일본군은 12월 30일에 맥아더의 계획을 파악하고 48사단에게 전진하여 바탄을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1월 2일부터 4일까지의 일련의 작전에서 필리핀 육군 제11사단과 제21사단, 26기병대(PS), 임시 전차대의 미국 M3 스튜어트 전차는 산 페르난도에서 디날루피한까지 반도 목에 있는 도로를 남 루손 군의 퇴각 부대를 위해 확보했고, 이후 자신들의 탈출을 성공적으로 했다. 194 전차 대대는 퇴각 중 50%의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튜어트와 지원하는 75mm SPM 하프트랙 배터리는 일본군의 공격을 반복적으로 막았고 바탄으로 진입하는 마지막 부대였다.

12월 30일, 미국 제31보병대는 달턴 패스 인근으로 이동하여 루손 중부와 남부에서 철수하는 병력의 측면을 지원했고, 필리핀 사단의 다른 부대는 바탄에 진지를 편성했다. 그 후 1월 5일에 제31보병대는 바탄 반도 목에 있는 올롱가포-마닐라 도로 서쪽의 라야크 교차로 근처 방어 진지로 이동했다. 교차로는 1월 6일에 포기되었지만 바탄으로의 철수는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이후의 내용은 1차 바탄 반도 공략전과 2차 바탄 반도 공략전으로 이어진다.

5. 1. 1차 바탄 반도 공략전 (1942년 1월 9일 ~ 2월 8일)



1942년 1월 7일부터 14일까지 일본군은 아부카이에서 나티브 산을 거쳐 마우반에 이르는 주 전선에 대한 정찰과 공격 준비에 집중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제48사단을 훨씬 덜 유능한 제65여단으로 교체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이는 이후 일본 작전의 성공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일본 제5항공단은 1월 5일 제48사단과 함께 네덜란드령 동인도로 이동하기 위해 작전에서 철수했다.[66]

미국 및 필리핀군은 아부카이 인근에서 야간 공격을 격퇴했고, 1월 16일 미 육군 필리핀 사단 병력이 반격을 가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사단은 1월 26일 반도 중앙의 카사 필라에서 바가크에 이르는 예비 전투선으로 철수했다.

1월 23일, 일본 제14군은 제16사단 대대 병력의 후방 상륙 시도로 공격을 재개했고, 1월 27일부터 전선 전체에 걸쳐 일반 공격을 시작했다. 수륙 양용 상륙은 PT 보트에 의해 방해를 받았고, 미 육군 항공대, 해군 요원, 필리핀 헌병대로 구성된 임시 부대에 의해 가혹하게 울창한 정글에 갇혔다. 그 후 포위된 병력은 양측 모두 심각한 사상자를 내면서 천천히 절벽으로 밀려났다. 1월 26일과 2월 2일에 생존한 포위 병력을 강화하기 위한 상륙은 남은 FEAF P-40s의 공습으로 심각하게 방해를 받았고, 2월 13일 마침내 갇혀 전멸했다.

제1군단 전선에 대한 침투는 멈췄고 여러 개의 포위 지점으로 분열되었다. 2월 8일 혼마는 병력을 재편성하기 위해 공세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제16사단이 제20보병대대 중 포위된 대대를 구출하려 분투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 실행될 수 없었다. 추가 손실을 입으면서, 378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구성된 대대 잔여 병력이 2월 15일 구출되었다. 2월 22일 제14군 전선은 북쪽으로 몇 마일 후퇴했고, USAFFE 병력이 버려진 진지를 재점령했다. 포인트 전투와 포위 전투의 결과는 일본 제20보병대대 3개 대대 모두의 완전한 파괴와 USAFFE의 명백한 승리였다.

미국-필리핀군은 마닐라를 버리고 바탄 반도로 가는 도로를 사수하며, 주변에 있던 모든 부대의 반도 철수를 성공시켰다. 일본군도 바탄 반도로 향하는 다수의 미-필리핀군이 이동하고 있음을 확인했지만, 패잔병으로 병력은 40,000~45,000명 정도로 예상했다. 네덜란드령 동인도 작전의 일정이 앞당겨진 점도 있어, 바탄 반도를 경시해서는 안 된다는 이견도 있었지만[103], 남방군은 제48사단과 제5비행집단의 대부분에게 네덜란드령 동인도, 버마 방면으로 전진할 것을 명령했다. 바탄 반도 공략에는 보병 제9연대와, 2선급 부대인 제65여단을 투입하면 충분하다는 것이 남방군과 대본영의 판단이었다.

제65여단은 제2수송부대로서 1월 1일 링가엔 만에 도착했다. 1월 9일, 제65여단(보병 제9연대를 임시 배속)은 바탄 반도 입구의 나치부 산 주변의 미-필리핀군 방어선에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필리핀군의 진지는 여러 겹으로 교묘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미군 필리핀 사단이 유효한 반격을 가해 일본군에게 사상자가 속출했다. 바탄 반도는 미-필리핀군이 오렌지 계획에 기초하여 구축한 견고한 방어선이었고, 나치부 산 주변의 제1선 후방에도 바가크에서 필러에 이르는 제2선, 마리베레스 산 주변의 제3선이 대기하고 있었다.

1월 16일 이후, 일본군은 반도 서해안에 제16사단 기무라 지대(보병 제20연대 기간, 병력 5,000)를 투입했지만, 역시 미-필리핀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1월 22일 밤에는 쓰네히로 대대를 주정 기동시켜 미-필리핀군의 배후에 상륙시키는 기습 작전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미-필리핀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했다. 1월 24일 연합군은 방어선 후퇴와 맥아더의 후퇴 명령에 의해, 남쪽으로 군이 쇄도했다[104]. 제65여단은 끈기 있게 공격을 계속하여, 1월 26일까지 미-필리핀군을 제2선으로 후퇴시켰지만, 제2선은 가장 강화된 방어선이었다. 여기에 공격을 가한 제65여단은 병력의 3분의 2를 잃고, 간부도 다수가 전사했다. 2월 8일 혼마 중장은 공격 중지를 지시했고, 일본군의 공세는 중단되었다.

5. 2. 2차 바탄 반도 공략전 (1942년 3월 24일 ~ 4월 9일)

그러나 미국-필리핀 연합군의 사정은 계속해서 악화되어, 정량의 1/2였던 배식은 1/3으로 줄었고, 나중엔 말과 나귀까지 잡아먹을 정도가 되었다. 대부분의 장병들은 영양실조신경쇠약에 허덕였고,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며 전우를 죽이거나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는 동안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남서태평양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3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로 탈출하였으며, 북부 루손군의 지휘관 웨인라이트 중장이 그 뒤를 이었다.[67] 웨인라이트는 3월 23일 필리핀 주둔 미군(USFIP)이 된 부대의 지휘권을 공식적으로 인수했다.

일본군의 병력은 갈수록 증강되었고, 보병 3만 명, 포 200여 문, 전차 50여 대, 항공기 100대를 바탄 섬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3월 31일, 일본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3월 28일부터 일본군의 새로운 공습과 포격이 영양실조, 질병, 장기적인 전투로 심각하게 약화된 연합군을 강타했다. 4월 3일, 조직적인 포격과 돌파에 의해 미군 진지의 우(右)중앙부가 붕괴되기 시작했고, 일본군은 사마트 산을 따라 돌파하기 시작했으며, 공격이 캠페인을 끝내기까지 한 달이 걸릴 것으로 추산했다. 더 이상 조정된 부대로 운영되지 않고 5일간의 거의 끊임없는 전투로 지쳐버린 미 육군 필리핀 사단은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에 효과적으로 반격할 수 없었다. 4월 9일에는 마침내 반도 내의 미-필리핀군 약 54,000명이 투항하였다. 4월 8일 미 제57보병연대(PS)와 제31사단(PA)이 알란간 강 근처에서 유린당했다. 마리벨레스에 도착하여 코레히도르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 제45보병연대(PS)는 4월 10일 마침내 항복했다. 미 제31보병대 300명만이 코레히도르에 성공적으로 도착했다. 그러나 북부 루손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웨인라이트 중장은 코레히도르섬으로 철수하여 한 달을 더 버틴 끝에, 5월 6일 일본군의 코레히도르 상륙으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6. 코레히도르 전투 (1942년 4월 14일 ~ 5월 7일)

일본 폭격기가 코레히도르 상공을 비행


1941년 코레히도르 섬 지도


코레히도르(포트 밀스 포함)는 마닐라 만 입구를 방어하는 미국 육군 해안 포병대 기지였으며, 마닐라 및 수빅 만의 항만 방어의 일부였다. 이 기지는 제59 및 제91 해안 포병 연대(후자는 필리핀 스카우트 부대)의 구형 해안 사라지는 포대 포대, 약 35개의 통제 기뢰 그룹으로 구성된 해상 기뢰밭,[68] 및 대공 부대인 제60 CA(AA)에 의해 무장되었다. 제60 CA(AA)는 코레히도르의 고지대에 배치되었다. 해상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고정 박격포와 거대한 대포가 설치된 구형 고정 포대는 일본 폭격기에 의해 쉽게 무력화되었다. 미국 병사와 필리핀 스카우트는 방어할 것이 거의 없을 때까지 작은 요새를 방어했다. 1942년 초, 일본 공군은 폭격기에 산소를 설치하여 코레히도르 대공 포대의 사정거리보다 더 높이 비행했고, 그 이후 더 강력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1941년 12월, 필리핀 대통령 마누엘 L. 케손, 맥아더 장군, 다른 고위 군 장교, 외교관 및 가족들이 마닐라 폭격에서 탈출하여 코레히도르의 말린타 터널에 수용되었다. 도착하기 전에 말린타의 측면 터널은 고위 지휘 본부, 병원, 식량 및 무기 저장소 역할을 했다. 1942년 3월, 여러 척의 미국 해군 잠수함이 코레히도르 북쪽에 도착했다. 해군은 우편물, 명령 및 무기를 가져왔으며, 고위 미국 및 필리핀 정부 관리, 금과 은, 기타 중요한 기록을 가져갔다. 잠수함으로 탈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전쟁 포로가 되거나 마닐라 및 기타 지역의 민간인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코레히도르에서 일본군에게 항복하는 미군 및 필리핀 군인 및 해군


코레히도르는 코레히도르에 주둔한 위에 언급된 부대, 미 해병대 제4연대, 그리고 보병으로 배치된 미 해군 요원을 포함하여 11,000명의 병력이 방어했다. 일부는 일본군이 그곳의 부대를 제압했을 때 바탄 반도에서 코레히도르로 올 수 있었다. 일본군은 5월 1일에 포격으로 코레히도르에 대한 최종 공격을 시작했다. 5월 5/6일 밤, 일본군 제61보병연대 2개 대대가 섬 북동쪽 끝에 상륙했다.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탱크와 포병의 지원을 받아 교두보를 확보했다. 수비군은 말린타 언덕의 요새로 빠르게 밀려났다.

6일 후, 웨인라이트는 혼마에게 항복 조건을 요청했다. 혼마는 필리핀에 있는 모든 연합군에게 항복을 포함할 것을 주장했다. 웨인라이트는 코레히도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믿고 이를 받아들였다. 8일에 그는 샤프에게 비사얀-민다나오 부대를 항복시키라는 명령을 보냈다. 샤프는 이에 따랐지만, 많은 개인들이 게릴라로 싸움을 계속했다. 강요에 의해 항복해야 했던 지휘관은 거의 없었고, 항복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샤프의 항복 결정에는 많은 요인이 작용했다. 1982년 석사 학위 논문에서 래리 S. 슈미트 소령은 샤프의 결정이 두 가지 이유에 근거했다고 말했다. 일본군이 코레히도르의 생존자 10,000명을 처형할 수 있었고, 샤프는 자신의 부대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처럼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69]

7. 연합군과 일본군의 주요 지휘관

1941년 당시, 미국군과 필리핀군은 합쳐서 약 15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지도 아래 필리핀군은 명목상 10개 사단(정원은 각 7,500명)까지 증강되었지만, 편성 도중 훈련 미달의 부대도 많았다. 미국 육군 극동 파견 부대의 병력은 31,095명으로[109], 이 중에는 필리핀인 부대인 필리핀 스카우트(PS) 11,957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본토 병력도 8,500명이 추가되었다. 미국 극동 항공군은 당시 미국 국외 주둔 항공 부대로는 최대 규모였으며, 특히 최신예 B-17 폭격기는 일본군에게 큰 위협이 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필리핀 전역 (1941년~1942년) 연합군과 일본군의 주요 지휘관 및 부대 구성은 다음과 같다.

필리핀 전역 (1941년~1942년) 주요 지휘관 및 부대 구성
진영구분지휘관부대비고
연합군미국 극동 육군(USAFFE) 사령관더글러스 맥아더노스 루손 부대, 사우스 루손 부대, 비사야-민다나오 부대, 예비 부대1941년 7월 26일 창설
노스 루손 부대 사령관조나단 웨인라이트 소장제11, 제21, 제31 보병 사단, 제26 기병 연대 (PS), 제45 보병 (PS) 대대 등
사우스 루손 부대 사령관조지 M. 파커 주니어 준장제41, 제51 보병 사단 등
비사야-민다나오 부대 사령관윌리엄 F. 샤프 준장제61, 제81, 제101 보병 사단 등
예비 부대 사령관더글러스 맥아더 (직접 통제)필리핀 사단, 제91 사단 (PA) 등
극동 공군 (FEAF) 사령관루이스 H. 브레레톤 소장B-17 폭격기 35대, P-40 전투기 107대 등 작전기 249대
일본군제14군 사령관혼마 마사하루 중장제16사단, 제48사단, 제65여단 등
제16사단 사단장모리오카 사토루 중장보병 제9연대, 보병 제20연대, 보병 제33연대 등
제48사단 사단장도바시 유이치 중장대만 보병 제1연대, 대만 보병 제2연대, 보병 제47연대 등
제65여단 여단장나라 아키라 중장보병 제122, 제141, 제142연대
제5비행집단 집단장고바타 히데히데 중장중폭 27, 경폭 54, 전투기 72, 정찰기 27, 직협기 12 (작전기 192기)


7. 1. 연합군

1941년 중반부터 일본과 미국, 영국, 네덜란드를 포함한 여러 국가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의 많은 국가들이 전쟁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까지 필리핀의 연합 방위군은 미국 극동 육군(USAFFE)으로 조직되었으며, 여기에는 필리핀 육군의 제1 정규 사단, 제2 (헌병대) 사단, 동원된 예비 사단 10개[13]미국 육군의 필리핀 관구가 포함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전쟁부에 의해 은퇴에서 소환되어 1941년 7월 26일 USAFFE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4]

맥아더는 USAFFE를 4개의 전술 사령부로 조직했다.[23]

1941년 12월 필리핀 전역 연합군 부대
부대명지휘관구성 부대비고
노스 루손 부대조나단 M. 웨인라이트 소장PA 제11, 제21 및 제31 보병 사단, 미군 제26 기병 연대 (PS), 제45 보병 (PS)의 대대, 155 mm 포 2문과 75 mm 산포 1문으로 구성된 제1 임시 포병 그룹상륙 공격이 예상되는 주요 지점과 루손 중부 평원을 방어. 필리핀 제71 보병 사단은 예비대로서 맥아더의 권한 하에서만 투입 가능.[24]
사우스 루손 부대조지 M. 파커 주니어 준장PA 제41 및 제51 보병 사단과 제86 야전 포병 연대 (PS)의 포 2문으로 구성된 제2 임시 포병 그룹마닐라의 동쪽과 남쪽 지역 통제
비사야-민다나오 부대윌리엄 F. 샤프 준장PA 제61, 제81, 제101 보병 사단, 전쟁 발발 후 새롭게 투입된 제73 및 제93 보병 연대로 증원. 제61 사단은 파나이, 제81 사단은 세부와 네그로스, 제101 사단은 민다나오에 주둔. 1월에는 제61 및 제81 사단의 야전 포병 연대가 보병으로 활동하면서 (포병 장비가 없었음) 제101 사단의 제103 보병 연대로부터 민다나오에 제102 사단이 창설. 필리핀 육군 제1 정규 사단의 제2 보병과 미 제43 보병 (필리핀 스카우트)의 제2 대대도 민다나오 부대에 배속
예비 부대더글러스 맥아더 (직접 통제)필리핀 사단, 제91 사단 (PA), PA 및 필리핀 관구의 사령부 부대, 제192 및 제194 전차 대대는 별도의 임시 전차 그룹을 형성하여 맥아더의 직접 지휘 하에 클라크 비행장/포트 스토첸버그에 배치.마닐라 바로 북쪽에 배치. 비행장을 점령하려는 공수 부대의 모든 시도에 대한 기동 방어 태세



4개의 미국 해안 포병대 연대가 마닐라 만 입구를 경비했으며, 코레히도르 섬도 포함되었다.

USAFFE의 항공 부대는 극동 공군 (FEAF)이었으며, 미 육군 항공대의 루이스 H. 브레레톤 소장이 지휘했다. 주요 전투력은 91대의 운용 가능한 P-40 워호크 전투기와 34대의 B-17 플라잉 포트리스 폭격기로 구성되었다. 전술적으로 FEAF는 예비 부대의 일부였으며, 따라서 맥아더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1941년 11월 30일 현재 필리핀의 미 육군 병력은 필리핀 부대를 포함하여 31,095명이었으며, 이는 장교 2,504명과 사병 28,591명 (미군 16,643명과 필리핀 스카우트 11,957명)으로 구성되었다.[28]

미국 아시아 함대 및 제16해군관구는 제독 토머스 C. 하트가 지휘했다. 주요 함선으로는 중순양함 1척(), 경순양함 2척(, ), 구축함 13척, 기뢰 제거함 1척, PT 보트 6척, 잠수함 29척 등이 있었다.

7. 2. 일본군


  • '''육군'''
  • '''제14군''' -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 참모장: 마에다 마사미 중장
  • 제16사단 - 사단장: 모리오카 사토루 중장
  • 보병 제9연대 (가미시마 지대 및 좌측 지대로서 12월 22일 링가옌 만 상륙)
  • 보병 제20연대 (사단 주력, 12월 24일 라몬 만 상륙)
  • 보병 제33연대 (기무라 지대, 12월 12일 레가스피 상륙, 일부는 미우라 지대로서 12월 20일 다바오 상륙)
  • 수색 제16연대, 야포병 제22연대, 공병 제16연대 기간
  • 제48사단 - 사단장: 도바시 유이치 중장
  • 대만 보병 제1연대
  • 대만 보병 제2연대 (다나카 지대 및 간노 지대로서 12월 10일 아파리 및 비간에 상륙)
  • 보병 제47연대
  • 수색 제48연대, 산포병 제48연대, 공병 제48연대 기간 (개전 시 병력 15,663명, 12월 22일 링가옌 만 상륙)
  • 제65여단 - 여단장: 나라 아키라 중장
  • 보병 제122, 제141, 제142연대 기간 (개전 시 병력 7,300명, 1월 1일 링가옌 만 도착)
  • 전차 제4, 제7연대
  • 야전 중포병 제1, 제8연대
  • 독립 공병 제3연대
  • 제5비행집단 - 집단장: 고바타 히데히데 중장, 작전기 192기 (중폭 27, 경폭 54, 전투기 72, 정찰기 27, 직협기 12)
  • '''제16군'''
  • 사카구치 지대 - 제56사단의 일부, 보병 제146연대 기간 (12월 20일 다바오 상륙에 참가 후 란인 작전에 참가)
  • '''증원 부대 (2월 이후 도착)'''
  • 제4사단 - 사단장: 기타노 겐조 중장
  • 보병 제8, 제37, 제61연대, 기병 제4연대, 야포병 제4연대, 공병 제4연대 기간 (2월 27일부터 4월 3일까지 링가옌 만 도착)
  • 제1포병대 - 사령관: 키타지마 키코오 중장
  • 중포병 제1연대 (45식 24榴 8), 포병 정보 제5연대 기간 (사령부는 3월 28일 링가옌 만 도착)
  • 나가노 지대 - 제21사단의 일부, 보병 제62연대 기간 (2월 26일 링가옌 만 도착)
  • 가와구치 지대 - 제18사단의 일부, 보병 제124연대 기간 (4월 10일 세부 섬 상륙, 4월 29일 코타바토 상륙)
  • 가와무라 지대 - 제5사단의 일부, 보병 제41연대 기간 (4월 16일 파나이 섬 상륙, 5월 3일 카가얀 상륙)
  • '''해군'''
  • '''비도 부대'''
  • 제3함대 - 사령장관: 다카하시 이보 중장, 참모장: 나카무라 토시히사 소장
  • 중순양함 마야, 경순양함 나가라 기간
  • '''남방 부대 항공 부대'''
  • 제11항공함대 - 사령장관: 쓰카하라 니시조 중장, 참모장: 오니시 다키지로 소장, 작전기 308기 (함상 전투기 123, 육정 15, 육공 146, 대정 24)


제14군의 개전 시 병력은 군 주력 34,856명, 선박 부대 4,633명, 제5비행집단 3,621명이었다. 군의 주력을 담당하는 것은 제48사단 (대만)이었다. 이 사단은 1940년(쇼와 15년)에 대만 혼성 여단에서 개편된 자동차 편성의 기계화사단으로, 병사는 주로 규슈 출신이었다. 그러나 이 사단은 필리핀 작전 종료 후 즉시 란인 작전에 전용될 예정이었다. 제16사단 (교토)은 필리핀 각지에 분산 상륙하여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했지만, 전력으로는 일류의 야전사단이었다. 제65여단은 중국·시코쿠 지방에서 편성된 부대로, 점령지 수비를 목적으로 하며 편성 및 장비는 야전사단에 비해 현저하게 열등했다.

2월 이후, 증원 부대로 제4사단, 제1포병대, 나가노 지대 (제21사단의 일부)가 투입되었다. 또한 비사야·민다나오 방면 공략을 위해 가와구치 지대 (제18사단의 일부)와 가와무라 지대 (제5사단의 일부)가 투입되었다.

8. 결과 및 영향

1942년 필리핀 바탄을 점령한 일본군


1942년 5월, 미군 포로들


혼마 마사하루(本間雅晴) 장군의 필리핀 승리는 일본 육군 참모 본부, 특히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총리에게 기대만큼 환영받지 못했다.[73] 그들은 혼마 장군의 비효율성과 계획된 시간표에 따라 미국을 격파하려는 의지 부족을 비판했다. 혼마는 이후 예비 장교로 복무하기 위해 도쿄로 소환되었다.[73]

이 패배는 바탄 죽음의 행진과 일본 포로 수용소의 비참함, 그리고 미국인과 연합군 병사들이 광산과 공장에서 노예 노동으로 사용되기 위해 일본으로 보내졌던 "지옥선"과 같은 만행을 포함하여 연합군 생존자들이 3년 반 동안 가혹한 대우를 받는 시작이었다.[74] 수천 명의 사람들이 물, 음식, 충분한 환기 없이 일본 선박의 화물칸에 갇혔다.[74] 일본군은 이 선박의 갑판에 "포로"라고 표시하지 않았고,[74][75] 일부는 연합군 항공기와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76] 예를 들어, 1944년 9월 7일 는 에 의해 격침되어 668명의 포로가 사망했으며, 82명의 포로만 생존했다.[77]

비록 이 작전은 일본의 승리였지만, 필리핀인과 미국인을 격파하는 데 예상보다 더 오래 걸렸다. 이로 인해 보르네오와 자바를 공격하는 데 사용되었을 병력이 필리핀 전투에 투입되어야 했고,[78] 뉴기니와 솔로몬 제도로의 진격도 늦어졌다.[79]

필리핀 점령 기간 동안, 미국과 필리핀 게릴라들은 점령군에 맞서 싸웠다.[80] 연합군과 필리핀 연방군은 1944년 레이테 섬 상륙을 시작으로 필리핀 탈환 작전을 시작했다. 1945년 1월 29일, 미국과 필리핀군은 카바나투안 습격에서 포로들을 해방시켰다.

필리핀 방어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일본 제국 육군에 대한 가장 긴 저항이었다. 아부카이 전투 이후 일본군은 바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4월에 공격을 재개하여 맥아더에게 호주를 작전 기지로 준비할 40일의 시간을 주었다. 필리핀에서의 초기 저항은 호주가 방어 준비를 할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을 벌어주었다.[81] 1942년 4월 9일 바탄 함락까지 일본군에 대항한 필리핀-미국 연합군의 저항은 105일(3개월 2일) 동안 지속되었다.[82]

일본군이 코레히도르 섬을 공략했을 때 맥아더 사령관은 이미 없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맥아더에게 오스트레일리아로 갈 것을 지시했고, 3월 12일, 맥아더와 가족, 참모들 (후에 GHQ의 간부를 맡았던 서덜랜드, 윌러비 등)은 어뢰정을 타고 코레히도르 섬을 탈출, 민다나오 섬에 도착하여 B-17로 오스트레일리아로 갔다. 맥아더의 "''아이 셜 리턴''" (나는 반드시 돌아오겠다)이라는 연설은 3월 20일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했다. 맥아더는 거기서 남서 태평양 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 취임했다.

45일 만에 필리핀을 공략하겠다는 일본군의 예정은 150일이나 걸렸다. 진주만 공격의 굴욕에 잠긴 미국에서, "싱가포르는 함락되었지만 코레히도르는 건재하다"는 소식은 국민들을 용기 있게 만들었고, 맥아더는 영웅이 되었다. 미군이 과달카날 섬에서 본격적인 반격에 나서는 것은 코레히도르 섬 함락으로부터 불과 3개월 후의 일이다.

필리핀에서의 전투에서 제14군의 손해는 다음과 같았다.

전사전상행방불명
제1기 (12/8~1/8, 개전부터 마닐라 공략까지)6271,2827
제2기 (1/9~2/8, 제1차 바탄 반도 공략전)2,7254,049230
제3기 (2/9~4/13, 제2차 바탄 반도 공략전)3821,020-
제4기 (4/14~5/7, 코레히도르 요새 공략전)39645750



일본군에 항복한 포로의 인원은 다음과 같았다.

포로
제1기606명
제2기150명
제3기70,380명
제4기12,495명
총계83,631명



일본군은 바탄 반도에서 7만 명이라는 포로 후송에 어려움을 겪어 바탄 죽음의 행진을 일으켰다.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필리핀군 병사의 많은 수는 도망하여 귀향했지만, 필리핀에서의 일본군의 군정은 물자 부족과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사람들의 반발을 샀고, 전 병사의 많은 수가 유사페 게릴라 (미군 지휘 하)나 훅발라합 (공산당 계열)과 같은 항일 게릴라로 전향했다.

맥아더의 실책은, 적극적인 전토 방위책을 추진함으로써 바탄 반도에 집중되어야 할 전략 물자를 분산시켜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바탄 반도에 농성을 결의한 이후의 맥아더의 작전 지휘는 적절했다. 또한 필리핀에서의 전투는 미군에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처음으로 치르는 본격적인 전투였고, 이 전투에서 얻어진 귀중한 전훈은 맥아더와 그의 참모들에 의해 소화되어, 대일전 승리를 위한 원동력이 되었다.[110]

일본군은 제14군 사령관 혼마 마사하루 중장과 참모장 마에다 마사미 중장을, 바탄 반도에서의 졸전으로 예비역으로 편입했다.

필리핀 독립 운동가 등은 무장 조직 마카피리를 설립하여 일본군을 지원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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