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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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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이델베르크인은 중기 홍적세에 살았던 멸종된 인류로, 네안데르탈인보다 원시적인 특징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1907년 독일에서 발견된 아래턱뼈를 모식 표본으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아프리카와 유럽 등지에서 화석이 발견되었다. 하이델베르크인은 호모 에렉투스에서 분화되어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공통 조상일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나, 분류에 대한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해부학적으로는 현대 인류와 유사한 얼굴과 큰 뇌 용량을 가지며, 석기 도구 제작, 불 사용, 창 사용 등 다양한 기술을 사용했다. 예술 활동의 증거도 발견되었으며, 언어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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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크인 - [생물]에 관한 문서
개요
[[마우어 1]]의 하악골
마우어 1(타입 표본)
학명Homo heidelbergensis
명명자Schoetensack, 1908
멸종 여부멸종
화석 발견 범위중기 플라이스토세(0.7–0.2백만년 전)
이명호모 로데시엔시스? (Woodward, 1921)
분류
동물계
척삭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원숭이목)
아목진원아목
하목협비하목
상과사람상과
사람과
아과사람아과
사람족
아족사람아족
사람속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학술적 정보
기타 명칭Homo heidelbergensis
Homo erectus heidelbergensis

2. 분류 및 진화

하이델베르크인의 분류 및 진화 과정은 복잡하고 논쟁의 여지가 많다. 1907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근교 마우어 마을에서 발견된 하악골을 기반으로 쇼텐자크가 *Homo heidelbergensis|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la* 로 명명했다.[63] 이후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도 유사한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호모 로데시엔시스라고도 불리지만 일반적으로는 하이델베르겐인과 같은 종으로 간주된다.

하이델베르크인은 네안데르탈인과 비교했을 때 눈썹뼈 융기가 매우 크고 앞뇌부는 작아 더 원시적인 종으로 간주된다. 하악골은 크고 튼튼하지만, 치아는 현생 인류보다 약간 큰 정도로, 같은 시대의 베이징 원인보다는 작다.

현생 인류네안데르탈인의 공통 조상이 언제, 어떤 종에서 분기되었는지는 논쟁거리다. 유전자 분석과 화석 증거를 종합하면, 하이델베르크인은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공통 조상이거나, 최소한 그 조상과 매우 가까운 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021년에는 호모 보도엔시스라는 새로운 종이 제안되기도 했지만, 학계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20][21]

2. 1. 연구사

1907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근처 마우어에서 한 노동자가 마우어 1 (아래턱뼈)을 발견했다. 1908년 독일 인류학자 오토 쇼텐삭은 이 턱뼈를 새로운 종인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Homo heidelbergensis)의 모식표본으로 지정했다.[4] 그는 턱뼈의 크기가 크다는 점 등을 근거로 새로운 종으로 분리했고, 이 턱뼈는 당시 유럽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람 턱뼈로 64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5]

1921년 잠비아 카브웨에서는 스위스 광부 톰 즈비글라르가 카브웨 1 두개골을 발견했다. 이 두개골은 영국의 고생물학자 아서 스미스 우드워드에 의해 *'H. rhodesiensis'* 로 분류되었다.[6]

1950년대 에른스트 마이어는 인류 종을 단순화하여 *'호모 에렉투스'*, *'호모 사피엔스'* 등으로 정리했다.[9] 그러나 이후 하이델베르겐인의 독자성이 다시 인정받았다.

1974년 영국의 생물 인류학자 크리스 스트링거는 카브웨 1과 그리스 페트랄로나 두개골이 현대 인류 및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1979년 스트링거와 비외른 쿠르텐은 이 두개골과 마우어 1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7]

스트링거 등은 중기 플라이스토세 아프리카-유럽 화석과 *'호모 에렉투스'* ''센수 스트릭토''(엄밀한 의미)의 차이점을 보고하며,[8] 60만 년 전에서 30만 년 전 사이의 아프리카-유럽 유물(카브웨, 페트랄로나, 보도, 아라고 등)을 *'H. heidelbergensis'* 로 분류했다.

1976년 스페인 시에라 데 아타푸에르카의 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SH) 유적에서 고대 인류 유물이 발굴되기 시작했다. 1990년까지 약 600개, 2004년까지 약 4,000개의 인류 유물이 보고되었다. 이들은 최소 28명의 개인을 나타내며, 매우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12] 1997년 후안 루이스 아르수아가는 이들을 *'H. heidelbergensis'* 로 분류했지만, 2014년 SH 인류에게는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한 특징이 없다며 철회했다.[13]

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 두개골 5 ("미겔론")의 석고 모형, 런던 자연사 박물관


고고인류학에서 중기 홍적세는 "중간의 혼란"이라고 불릴 정도로 호모 유해의 종 분류에 대한 논쟁이 심했다.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조상이 이 시기에 갈라졌으며, 2010년대 후반까지 *'H. 하이델베르겐시스'* 가 가장 유력한 최근 공통 조상으로 여겨졌으나, 이 견해는 더 이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14]

2021년 캐나다 인류학자 미르야나 록산디치 등은 *'H. 하이델베르겐시스'* 와 " *'H. 로데시엔시스'* "의 해체를 권고하고, 새로운 종인 *'호모 보도엔시스'* 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 분류는 스트린저 등에 의해 거부되었다.[20][21]

하이델베르크인은 1907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근교 마우어마을에서 발견된 하악골을 기준으로 쇼텐자크가 명명했다.[63] 이후 남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에서도 유사한 화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호모 로데시엔시스라고도 불리지만, 일반적으로는 하이델베르겐인과 같은 종으로 간주된다.

2. 2. 분류 논쟁

중기 플라이스토세는 "중간의 혼란"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시기 호모 유해의 종 수준 분류에 대한 논쟁이 심했다.[14]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 또는 ''H. s.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H. neanderthalensis'' 또는 ''H. s. 네안데르탈렌시스'')의 조상이 이 시기에 갈라졌으며, 2010년대 후반까지 ''H. 하이델베르겐시스''이 가장 유력한 최근 공통 조상으로 여겨졌지만, 이 견해는 더 이상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14] ''H. 하이델베르겐시스''라는 이름이 구세계 전역의 중기 홍적세 인류에게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 아니면 유럽에만 국한하는 것이 더 나은지에 대한 논쟁이 많다. 후자의 경우, 중기 홍적세 아프리카 유해는 "H. 로데시엔시스"로 분리될 수 있다.[15][16][17][18] 후자의 관점에서 "''H. 로데시엔시스''"는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 또는 현생 인류로 진화한 H. 헬메이의 조상으로 볼 수 있다.[22]

2021년, 캐나다 인류학자 미르야나 록산디치와 동료들은 ''H. 하이델베르겐시스''와 "''H. 로데시엔시스''"의 완전한 해체를 권고했는데, ''로데시엔시스''라는 이름이 남아프리카에서 흑인 인구를 억압한 영국 다이아몬드 거물 세실 로즈를 기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유럽의 ''H. 하이델베르겐시스''를 ''H. 네안데르탈렌시스''로 분류하고, ''H. 로데시엔시스''를 새로운 종인 "H. 보도엔시스"와 동의어로 만들었는데, 이 종에는 모든 아프리카 표본과 네안데르탈인 유래 특징이 없는 레반트 및 발칸 반도 일부 표본(체프라노, 말라 발라니카, 하조레아 및 나다우이예 아인 아스카르)이 포함된다. ''H. 보도엔시스''는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추정되지만,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마지막 공통 조상은 포함하지 않는다. 그들은 중기 홍적세의 혼란스러운 형태는 빙하기 주기 이후 인구 붕괴 후 유럽으로의 주기적인 ''H. 보도엔시스'' 이동과 살아남은 토착 인구와의 교배로 인해 발생했다고 제안했다.[19] 스트린저 등은 록산디치 등의 제안이 명명법 규칙을 위반할 뿐만 아니라, 정확히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설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들의 분류학적 권고를 거부했다.[20][21]

2. 3. 진화

하이델베르크인은 대략 200만 년 전 시작된 최초의 아프리카에서 호미닌의 초기 확산 동안 아프리카의 호모 에렉투스(또는 호모 에르가스터)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5] 유럽으로 흩어져 정착한 종들은 하이델베르크인으로 진화했고, 동아시아로 흩어진 종들은 호모 에렉투스 s. s.로 진화했다.[5] 2016년, 안토니오 프로피코와 동료들은 에티오피아 멜카 쿤투레 지층의 곰보레 II 유적에서 발견된 875,000년 된 두개골 재료가 호모 에르가스터와 하이델베르크인 사이의 전이 화석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하이델베르크인이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기원했을 것이라고 가정했다.[22]

시에마 데 로스 우에소스 유적을 사용한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종분화


유전자 분석에 따르면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최근 공통 조상(LCA)은 현생 인류 계통과 네안데르탈인/데니소바인 계통으로 분리되었고, 후자는 나중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으로 분리되었다. 핵 DNA 분석에 따르면 430,000년 된 SH 인간은 데니소바인보다 네안데르탈인과 더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며, 이는 현생 인류/네안데르탈인 LCA가 일반적으로 하이델베르크인으로 지정된 많은 유럽 표본보다 훨씬 오래전에 존재했음을 시사한다.[23]

1997년, 스페인 고고학자 호세 마리아 베르무데스 데 카스트로 등이 그란돌리나에서 약 백만 년 된 호모 안테세소르를 기술하고, 현생 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의 LCA로 하이델베르크인 대신 이 종을 제안했지만,[24] 2020년 호모 안테세소르의 치아에서 수집된 고대 단백질을 분석한 결과, LCA 자체가 아닌 LCA의 자매 계통의 일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26]

2023년, 3,000명 이상의 생존 개인에 대한 유전체 분석 결과, 호모 사피엔스의 조상 집단은 80만 년에서 90만 년 전 사이에 1,300명 미만으로 감소했다는 것을 나타냈다. 로마 사피엔자 대학교의 인류학자인 조르지오 만지 교수는 이러한 개체 병목 현상이 하이델베르크인의 진화를 촉발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28][29]

3. 해부학적 특징

하이델베르크인은 호모 에렉투스보다 뇌 용량이 크고, 두개골 형태가 더 현대 인류에 가깝다는 특징을 가진다.

하이델베르크인 – 법의학적 안면 재구성


하이델베르크인의 뇌 용량은 평균 1,206cc (1,100cc ~ 1,390cc)로,[30] 이는 현대 인류의 평균 (남성 1,270cc, 여성 1,130cc)[31]네안데르탈인의 평균 (남성 1,600cc, 여성 1,300cc)[32][33][34]의 중간 정도이다.

신체는 호모 에렉투스보다 컸으며, 키는 180cm[63], 몸무게는 100kg[63]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SH 유적에서 발견된 뼈들을 기준으로 추정한 평균 신장은 남성 169.5cm, 여성 157.7cm이다.[35] 진니우산 여성 화석의 추정 신장은 165cm로, SH 여성보다 크다.[35] 카브웨 정강이뼈는 181.2cm로 추정되어, 하이델베르크인이 전반적으로 큰 키를 가졌음을 시사한다.[35] 체격은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하게 크고 튼튼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기 홍적세 동안에는 평균 이상의 키를 가진 사람들이 흔했으며, 대부분의 고인류 집단은 일반적으로 키가 165cm 정도였다.[35]

3. 1. 두개골

코 구멍은 두개골에 완전히 수직으로 위치하며, 전비극은 능선이 있거나 때로는 두드러진 가시를 가질 수 있다. 절치관은 치아 근처에서 열리며, 더 최근 인류 종의 그것과 유사하게 방향을 잡는다. 전두골은 넓고, 두정골은 확장될 수 있으며, 측두골의 인편은 높고 아치형이며, 이는 모두 뇌 크기의 증가와 관련될 수 있다. 접형골은 아래로 뻗어 있는 가시를 특징으로 하며, 두개골 밑면의 관절 결절은 턱 경첩 뒤의 표면이 그렇지 않으면 매우 평평하기 때문에 두드러지게 튀어나올 수 있다.[30]

2004년, 라이트마이어는 카브웨 1(런던 자연사 박물관에 석고 모형이 있음)을 포함한 여러 표본을 바탕으로 하이델베르크인의 뇌 용량을 추정했다. 그 결과 평균 약 1,206cc (1,100cc ~ 1,390cc)로 나타났다. 이는 현대 인류의 평균 뇌 용량 (남성 1,270cc, 여성 1,130cc)[31]와 네안데르탈인의 평균 뇌 용량 (남성 1,600cc, 여성 1,300cc)[32][33][34]의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

2009년, 고생물학자 오렐리앵 무니에, 프랑수아 마르샬, 실바나 콘데미는 마우어 하악골을 사용하여 ''H. 하이델베르크인''의 감별 진단을 발표했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5]

  • 턱의 축소
  • 하악하 공간 (목 근처)의 노치
  • 측면에서 하악골의 상부 및 하부 경계의 평행성
  • 협치 근처의 여러 정신공 (혈관을 위한 작은 구멍)
  • 수평 후구치 공간 (어금니 뒤의 간격)
  • 어금니와 하악지 사이의 홈
  • 전반적으로 긴 턱
  • 교근을 위한 깊은 와 (우울)
  • 작은 하악각
  • 광범위한 치조 평면
  • 발달된 삼각 평면
  • 세 번째 어금니 수준에서 시작하는 이설골선

3. 2. 신체 크기

SH 유적에서 발견된 뼈들을 기준으로 추정한 평균 신장은 남성 169.5cm, 여성 157.7cm이다. 진니우산 여성 화석의 추정 신장은 165cm로, SH 여성보다 크다. 카브웨 정강이뼈는 181.2cm로 추정되어, 하이델베르크인이 전반적으로 큰 키를 가졌음을 시사한다.[35]

3. 3. 체격

하이델베르크인의 체격은 전반적으로 네안데르탈인과 유사하게 크고 튼튼한 체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기 홍적세 동안 평균 이상의 키를 가진 사람들이 흔했으며, 대부분의 고인류 집단은 일반적으로 키가 165cm 정도였다. 초기 현생 인류는 눈에 띄게 더 컸는데, 스쿨과 카프제 유골은 남성 평균 185.1cm, 여성 평균 169.8cm으로, 평균 177.5cm였다.[35]

다양한 장골의 길이를 기준으로, SH인의 평균 신장은 남성 169.5cm, 여성 157.7cm이며, 최대 신장은 각각 177cm과 160cm였다.[35] 진니우산에서 발견된 여성 부분 골격의 키는 생전에 약 165cm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SH 여성보다 훨씬 컸다.[35] 카브웨에서 발견된 정강이뼈는 일반적으로 181.2cm로 추정된다.[35] SH 인류는 현대 인류와 비슷한 수준의 성적 이형성을 보였다.[37] SH 인간과 다른 중기 홍적세 ''호모''는 네안데르탈인보다 더 원시적인 골반과 대퇴골을 가지고 있었다.[37] 모든 고대 인간의 발은 발목뼈의 활차가 더 높아 발목을 더 유연하게 만들었다.[37]

3. 4. 병리학

SH 두개골 5(일명 미겔론)는 왼쪽 얼굴에서 안와 봉와직염(입안 농양에서 발생한 눈 감염)의 가장 오래된 사례를 보여준다. 이는 패혈증을 유발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을 것이다.[38][39][40]

남성 SH 골반 1은 관절 퇴화를 바탕으로 45년 이상 생존했을 수 있는데, 이는 인류 화석 기록에서 이 연령대의 가장 오래된 사례 중 하나이다. 45세 이상 개인의 빈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증가했지만, 구석기 시대 전체에서는 매우 낮게 유지되었다. 그는 또한 나이와 관련된 요추 후만증(허리 등뼈의 과도한 굽음), L5-S1 척추전위증(마지막 요추와 첫 번째 천추의 정렬 불량), 그리고 L4 및 5의 바스트루프병(극돌기 확대)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질환은 허리 통증을 유발하여 움직임을 크게 제한했을 것이며, 집단적인 간호의 증거일 수 있다.[41]

청소년 SH 두개골 14는 람다형 단일 봉합선 조기 유합(발달하면서 두개골 기형을 유발하는 왼쪽 람다 봉합선의 미성숙한 닫힘)으로 진단되었다. 이는 현대 인류에서 20만 명 중 6명 미만에게서 발생하는 드문 질환이다. 이 개인은 약 10세 경에 사망했는데, 이는 기형 때문에 버려지지 않고 다른 아이들과 동일한 수준의 치료를 받았음을 시사한다.[42]

치아의 법랑질 형성 부전은 영양 스트레스 시기를 판단하는 데 사용된다. SH 인류의 경우 40%의 비율로, 초기 남아프리카 호미닌 ''파란트로푸스 로부스투스''의 스와르트크란스(30.6%) 또는 스테르크폰테인(12.1%)보다 훨씬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안데르탈인은 더 높은 비율과 더 강렬한 법랑질 형성 부전을 겪었지만, 이는 네안데르탈인이 천연 자원을 활용하는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더 가혹한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3.5세에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이유 시기와 관련될 수 있다. 네안데르탈인의 경우 이 최고점은 4세였으며, 많은 현대 수렵 채집인들도 약 4세에 이유한다.[43]

4. 문화

하이델베르크인은 석기 제작, 불 사용, 사냥 등 다양한 문화적 행동을 보였다.

쇤닝겐 창 발굴


영국 박스그로브인에서 발견된 주먹도끼

  • 석기 제작: 하이델베르크인은 올도완 석기 기술을 대체한 아슐리안 석기 기술을 사용했다. 아슐리안 기술은 주로 대칭적인 주먹도끼 생산을 특징으로 한다. 후기 아슐리안 석기는 더 작고, 얇고, 대칭적인 주먹도끼를 생산했다. 50만 년 전 영국 박스그로브인 유적에서는 부드러운 망치를 사용하여 주먹도끼를 얇게 만들고, 도구 제작을 위한 준비된 플랫폼을 발명했다.
  • 불 사용: 40만 년에서 30만 년 전, 추운 기후로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기록에서 불의 증거는 희소하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는 인류가 160만 년 전부터 자연 산불에서 불을 자주 구했을 수 있으며, 아프리카 외에 가장 오래된 지속적인 불의 유적지는 이스라엘의 게셰르 베노트 야아코브로 78만 년 전의 유적이다.
  • 사냥: 반복적인 불 사용은 돌촉을 창에 부착하는 자루 기술과 거의 일치하며, 이는 쇤닝겐 창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30만 년 전 호숫가에서 보존된 9개의 나무 창과 창 조각이 발견되었다. 쇤닝겐 창의 사거리는 최대 35m였을 수 있지만, 약 5m 이내의 단거리에서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 언어: SH 인류는 현대인과 유사한 설골(혀를 지지함)과 중이 뼈를 가지고 있어, 정상적인 인간의 언어 범위 내에서 주파수를 정밀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치아 줄무늬로 판단해 볼 때, 이들은 주로 오른손잡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손잡이는 현대 인간의 언어 처리와 일반적으로 관련된 뇌 기능의 측면화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집단은 어떤 초기 형태의 언어로 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0][62][61]

4. 1. 예술

하이델베르크인의 예술 활동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몇 가지 상징적 행위의 초기 증거를 보여준다. 독일 빌징스레벤에서는 40만 년에서 35만 년 전에 직선엄니 코끼리의 경골에 새겨진 조각이 발견되었고,[49] 프랑스 테라 아마타에서는 38만 년 전의 조약돌 3개가 발견되었다.[49]

19세기 중반, 프랑스 고고학자 자크 부셰 드 페르트는 프랑스 아미앵의 생 아슐에서 구멍 뚫린 해면 화석(''Porosphaera globularis'')을 발견하고 장식용 구슬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은 무시되었다. 1894년, 영국의 고고학자 워싱턴 조지 스미스는 잉글랜드 베드퍼드셔에서 200개의 유사한 구멍 뚫린 화석을 발견하고 구슬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2005년, 로버트 베드나리크는 이 화석들이 의도적으로 선택되었으며, 구멍을 뚫고 목걸이로 착용했을 때 생긴 마모 흔적이 있다고 주장했다.[50] 그러나 2009년, 솔랑주 리고, 프란시스코 데리코와 동료들은 이 화석들이 자연적인 과정이나 19세기 수집가들의 선호에 의해 생성되었을 수 있다고 반박했다.[51]

초기 현생 인류와 후기 네안데르탈인은 붉은 황토를 상징적인 목적으로 사용했지만, 황토는 약용으로도 사용될 수 있었다. 올두바이 협곡과 암브로나, 테라 아마타 등에서 황토 사용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이는 색상 선호도와 분류의 초기 사례를 보여줄 수 있다.[52]

15.5


2006년, 유달드 카르보넬과 마리나 모스케라는 시마 데 로스 우에소스(SH)에서 발견된 손도끼가 묘지 부장품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60]

4. 2. 기술

하이델베르크인은 올도완 석기 기술을 대체한 아슐리안 석기 기술을 사용했는데, 이는 주로 대칭적인 주먹도끼 생산을 특징으로 한다. 아슐리안 기술은 약 100만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초기 아슐리안과 후기 아슐리안으로 나뉜다. 후기 아슐리안은 60만 년에서 50만 년 전 이후 특히 인기를 얻었다.[53]

후기 아슐리안 석기는 더 작고, 얇고, 대칭적인 주먹도끼를 생산했다. 50만 년 전 영국 박스그로브인 유적에서는 부드러운 망치를 사용하여 주먹도끼를 얇게 만들고, 도구 제작을 위한 준비된 플랫폼을 발명했다. 박스그로브의 석공들은 주먹도끼 제작 후 남은 큰 석기 조각들을 나중에 다른 도구로 재활용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후기 아슐리안 유적에서는 석핵을 미리 준비하여 준비된 플랫폼이 필요 없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준비된 플랫폼은 45만 년 전 포레스미스 공업에서 나타난다.[53]

석공들은 원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간접적으로 관련된 품목을 생산해야 했으며, 이는 주요 인지 발달을 나타낸다. 현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플랫폼 준비는 관찰 학습만으로는 배울 수 없으며, 잘 발달된 교육 방법과 자기 조절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박스그로브에서 석공들은 돌뿐만 아니라 뼈와 사슴 뿔을 사용하여 망치를 만들었는데, 이는 다양한 원자재를 사용한 것은 진보된 계획 능력을 보여준다.[53]

40만 년에서 30만 년 전까지는 추운 기후로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기록에서 불의 증거가 희소하다. 불의 잔해가 단순히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라고나 그란 돌리나와 같이 길고 전체적으로 방해받지 않은 점유 시퀀스에서는 불 사용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가 눈에 띄게 부족하다. 이러한 패턴은 이 시기에 점화 기술의 발명이나 화재 유지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으며, 이 시기 이전에는 불이 유럽 사람들의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에 아프리카에서는 인류가 160만 년 전부터 자연 산불에서 불을 자주 구했을 수 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산불이 훨씬 더 자주 발생하므로 불을 (다소) 규칙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프리카 외에 가장 오래된 지속적인 불의 유적지는 이스라엘의 게셰르 베노트 야아코브로 78만 년 전의 유적이다.[57]

크로메리아 간빙기 이후부터 유럽에서는 날씨로부터 보호되는 지역에 지어진 견고한 기초를 가진 튼튼한 표면의 움막으로 분류되는 건축된 주거 구조의 증거가 기록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예는 체코 프르제즐레티체에서 발견된 70만 년 된 석조 기초이다. 이 주거지는 큰 바위와 흙으로 된 기초로 지탱되는 두꺼운 나뭇가지나 가는 기둥으로 만들어진 아치형 지붕을 갖추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거지는 독일 빌징슬레벤, 프랑스 테라 아마타, 노르망디의 페르망빌과 생제르맹데보에서 홀스타인 간빙기(42만 4천 년 전에 시작) 동안 또는 그 이후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아마도 겨울 동안 점유되었으며, 평균 면적이 3.5m에 불과하여 아마도 잠자는 데만 사용되었고, 다른 활동 (화기 유지 포함)은 외부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덜 영구적인 텐트 기술은 구석기 시대 유럽에 존재했을 수 있다.[56]

반복적인 불 사용(유럽에서는 잉글랜드의 비치스 피트와 독일의 쇤닝겐에서 가장 먼저 나타남)은 돌촉을 창에 부착하는 자루 기술과 거의 일치하며, 이는 쇤닝겐 창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57] 30만 년 전 호숫가에서 보존된 9개의 나무 창과 창 조각(랜스와 양쪽 끝이 뾰족한 막대기)이 발견되었다. 창의 직경은 2.9cm이며, 전체 길이는 210cm로 오늘날의 경쟁적인 투창과 유사했을 수 있다. 창은 부드러운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졌으며, 4번 창은 (역시 부드러운) 소나무로 만들어졌다.[3] 이는 단단한 주목나무로 만들어진 약 10만 년 전 잉글랜드 클랙턴온시의 클랙턴 창과 대조적이다. 쇤닝겐 창의 사거리는 최대 35m였을 수 있지만,[3] 약 5m 이내의 단거리에서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며, 이는 먹이나 포식자를 상대로 효과적인 원거리 무기로 만들었다.

4. 2. 1. 석기 도구

하이델베르크인은 올도완 석기 기술을 대체한 아슐리안 석기 기술을 사용했는데, 이는 주로 대칭적인 주먹도끼 생산을 특징으로 한다. 아슐리안 기술은 약 100만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초기 아슐리안과 후기 아슐리안으로 나뉜다. 후기 아슐리안은 60만 년에서 50만 년 전 이후 특히 인기를 얻었다.[53]

후기 아슐리안 석기는 더 작고, 얇고, 대칭적인 주먹도끼를 생산했다. 50만 년 전 영국 박스그로브인 유적에서는 부드러운 망치를 사용하여 주먹도끼를 얇게 만들고, 도구 제작을 위한 준비된 플랫폼을 발명했다. 박스그로브의 석공들은 주먹도끼 제작 후 남은 큰 석기 조각들을 나중에 다른 도구로 재활용하기도 했다. 다른 지역의 후기 아슐리안 유적에서는 석핵을 미리 준비하여 준비된 플랫폼이 필요 없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최초의 준비된 플랫폼은 45만 년 전 포레스미스 공업에서 나타난다.[53]

석공들은 원하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간접적으로 관련된 품목을 생산해야 했으며, 이는 주요 인지 발달을 나타낸다. 현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플랫폼 준비는 관찰 학습만으로는 배울 수 없으며, 잘 발달된 교육 방법과 자기 조절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박스그로브에서 석공들은 돌뿐만 아니라 뼈와 사슴 뿔을 사용하여 망치를 만들었는데, 이는 다양한 원자재를 사용한 것은 진보된 계획 능력을 보여준다.[53]

케냐 카프투린 지층에서는 54만 5천 년에서 50만 9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칼날 및 작은 칼날 기술의 가장 오래된 증거가 발견되었다. 이 기술은 중기 구석기 시대에도 드물며, 일반적으로 상 구석기 시대의 현생 인류와 관련이 있다. 이것이 긴 칼날 제작 전통의 일부인지, 아니면 칼날 기술이 여러 번 잃어버리고 재발명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55]

4. 2. 2. 불과 건축

40만 년에서 30만 년 전까지는 추운 기후로 진출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기록에서 불의 증거가 희소하다. 불의 잔해가 단순히 훼손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라고나 그란 돌리나와 같이 길고 전체적으로 방해받지 않은 점유 시퀀스에서는 불 사용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가 눈에 띄게 부족하다. 이러한 패턴은 이 시기에 점화 기술의 발명이나 화재 유지 기술이 향상되었음을 나타낼 수 있으며, 이 시기 이전에는 불이 유럽 사람들의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반면에 아프리카에서는 인류가 160만 년 전부터 자연 산불에서 불을 자주 구했을 수 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산불이 훨씬 더 자주 발생하므로 불을 (다소) 규칙적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프리카 외에 가장 오래된 지속적인 불의 유적지는 이스라엘의 게셰르 베노트 야아코브로 78만 년 전의 유적이다.[57]

크로메리아 간빙기 이후부터 유럽에서는 날씨로부터 보호되는 지역에 지어진 견고한 기초를 가진 튼튼한 표면의 움막으로 분류되는 건축된 주거 구조의 증거가 기록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예는 체코 프르제즐레티체에서 발견된 70만 년 된 석조 기초이다. 이 주거지는 큰 바위와 흙으로 된 기초로 지탱되는 두꺼운 나뭇가지나 가는 기둥으로 만들어진 아치형 지붕을 갖추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거지는 독일 빌징슬레벤, 프랑스 테라 아마타, 노르망디의 페르망빌과 생제르맹데보에서 홀스타인 간빙기(42만 4천 년 전에 시작) 동안 또는 그 이후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아마도 겨울 동안 점유되었으며, 평균 면적이 3.5m에 불과하여 아마도 잠자는 데만 사용되었고, 다른 활동 (화기 유지 포함)은 외부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덜 영구적인 텐트 기술은 구석기 시대 유럽에 존재했을 수 있다.[56]

4. 2. 3. 창



반복적인 불 사용 - 유럽에서는 잉글랜드의 비치스 피트와 독일의 쇤닝겐에서 가장 먼저 나타남 - 은 돌촉을 창에 부착하는 자루 기술과 거의 일치하며, 이는 쇤닝겐 창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57] 30만 년 전 호숫가에서 보존된 9개의 나무 창과 창 조각(랜스와 양쪽 끝이 뾰족한 막대기)이 발견되었다. 창의 직경은 2.9cm이며, 전체 길이는 210cm로 오늘날의 경쟁적인 투창과 유사했을 수 있다. 창은 부드러운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졌으며, 4번 창은 (역시 부드러운) 소나무로 만들어졌다.[3] 이는 단단한 주목나무로 만들어진 약 10만 년 전 잉글랜드 클랙턴온시의 클랙턴 창과 대조적이다. 쇤닝겐 창의 사거리는 최대 35m였을 수 있지만,[3] 약 5m 이내의 단거리에서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며, 이는 먹이나 포식자를 상대로 효과적인 원거리 무기로 만들었다. 이 두 지역 외에, 유럽 창 기술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는 유일한 다른 장소는 독일 니더작센주 페르덴 지구의 12만 년 된 레린겐 유적지로, 238cm의 주목 창이 코끼리에 박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8] 아프리카에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카투 팬 1에서 50만 년 된 촉이 창에 부착되었을 수 있다. 간접적인 증거로, 50만 년 된 박스그로브에서 발견된 말의 어깨뼈는 창에 의한 상처와 일치하는 관통상을 보여준다. 유럽과 아프리카 모두에서 자루 기술에 대한 증거는 30만 년 이후에 훨씬 더 흔해진다.[59]

서식스에서 발견된 통칭 의 경골

4. 3. 언어

SH 인류는 현대인과 유사한 설골(혀를 지지함)과 중이 뼈를 가지고 있어, 정상적인 인간의 언어 범위 내에서 주파수를 정밀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치아 줄무늬로 판단해 볼 때, 이들은 주로 오른손잡이였던 것으로 보이며, 손잡이는 현대 인간의 언어 처리와 일반적으로 관련된 뇌 기능의 측면화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집단이 어떤 초기 형태의 언어로 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60][62][6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특성들이 언어와 인간과 같은 말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해부학적 주장에 따른 시기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존재는 주로 인지 과학자 필립 리버먼에 의해 반대되어 왔다.[6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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