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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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은 1486년 독일에서 태어난 신학자, 의사, 법률 전문가, 군인, 그리고 저술가였다. 쾰른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오컬트와 카발라에 관심을 가졌다. 용병으로 활동하며 기사 칭호를 받았고, 돌 대학교에서 강의하며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저서를 집필했다. 그는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기록 보관관으로 활동했으며, 마녀 박해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숨겨진 철학에 관한 세 권의 책》, 《여성의 고귀함과 탁월성에 대한 선언》, 《학문과 예술의 불확실성과 허영심에 대한 비판적 선언》 등이 있다. 아그리파는 1535년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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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스하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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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폰 네테스하임이라고도 함 |
| 출생일 | 1486년 9월 14일 |
| 출생지 | 네테르스하임, 쾰른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
| 사망일 | 1535년 2월 18일 |
| 사망지 | 그르노블, 프랑스 왕국 |
| 직업 | 오컬트 작가, 신학자, 의사, 법률 전문가, 군인 |
| 모교 | 쾰른 대학교 |
2. 생애
1486년 신성 로마 제국 쾰른 또는 그 근교 네테스하임에서 기사 칭호를 가진 유복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쾰른 대학교에서 법학, 의학, 철학, 외국어를 공부하며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영향을 받아 카발라 연구를 시작했다.
1501년부터 막시밀리안 1세를 군인으로 섬겼고, 1507년 프랑스 돌 대학교에서 성서학을 강의했다. 요한 로이힐린을 지지하다 추방되어 런던으로 갔다가, 1518년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신학을 강의했다. 이후 프랑스 메스에서 시 법률 고문으로 일했다.
마녀로 고발된 여성을 변호하다 도미니코회와 갈등을 빚어 1520년 쾰른으로 돌아갔다. 이후 각지를 방랑하다 1535년 그르노블에서 사망했다.
요하네스 트레테미우스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필리프 멜란히톤과 교류하며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아그리파는 1486년 9월 14일 쾰른 근교 네테스하임에서 중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1] 그의 가족 중 많은 구성원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종이었다.[2] 그는 1499년부터 1502년까지(13~16세) 쾰른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문학 석사(magister artium) 학위를 받았다.[1] 쾰른 대학교는 토미즘의 중심지 중 하나였으며, 인문학부는 지배적인 토미스트와 알베르티즘 추종자들로 나뉘어 있었다. 아그리파가 오컬트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러한 알베르티즘의 영향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3] 그는 후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저서인 『천문학의 거울(Speculum Astronomiae)』을 자신이 처음으로 오컬트를 공부한 텍스트 중 하나로 꼽았다.[3] 이후 파리 대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오컬트와 관련된 비밀 단체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1]2. 2. 군 경력
1508년, 아그리파는 용병으로 활동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갔다.[1] 그는 신성 로마 제국 막시밀리안 1세의 군대에서 대위로 복무했으며, 막시밀리안 1세는 그에게 ''기사'' 칭호를 수여했다.[1]2. 3. 학문 경력
아그리파는 1509년 프랑슈-콩테 총독인 오스트리아의 마가렛과 브장송 대주교이자 돌 대학교 총장인 앙투안 드 베르지의 후원으로 돌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3] 그는 요한 로이힐린의 ''De verbo mirifico''에 대한 강좌를 진행하며, 카발라 사상을 바탕으로 여성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De nobilitate et praecellentia foeminae sexusla(여성의 고귀함과 우수성에 관하여)를 저술했다.[1][3] 이 강의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1] 프란체스코회 수도원장 장 카틸리네에게 "유대교 이단자"로 비난받아 1510년 돌을 떠나야 했다.[1]1509년-1510년 겨울, 아그리파는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인문주의자 요하네스 트레테미우스와 함께 공부했다.[1] 1510년 4월 8일, De occulta philosophiala(숨겨진 철학에 관하여)의 초고를 트레테미우스에게 헌정했고, 트레테미우스는 비술 연구를 비밀로 유지할 것을 권고했다.[1] 이후 잉글랜드로 건너가 존 콜렛의 손님으로 지내며,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유대 사상의 양립 가능성을 주장했다.[1] 쾰른으로 돌아와 대학교 신학부에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1]
1511년, 아그리파는 막시밀리안 1세를 따라 이탈리아로 가서 피사 공의회(1512)에 참석했다. 7년 동안 이탈리아에 머물며 몬페라토 후작 빌헬름 9세와 사보이 공작 샤를 3세를 섬기며 신학을 가르치고 의학을 실천했다.[2] 파올로 리치 등과 교류하며 마르실리오 피치노,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저작과 카발라를 연구했다.[1] 1515년 파비아 대학교에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의 피만데르에 대해 강의했으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의 승리로 중단되었다.[2]

1518년, 아그리파는 메츠에서 도시 변호사 겸 신디크가 되었다. 마녀 혐의를 받은 여성을 변호하다 도미니코회와 갈등을 겪고 1520년 쾰른으로 돌아갔다. 이후 제네바, 프라이부르크에서 의사로 활동하다 사보이의 루이즈의 의사로 임명되어 리옹으로 갔다.[2] 1528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의 기록 보관관이자 역사학자가 되었다.[2]
1530년 마가렛의 죽음으로 입지가 약화되었고, 브뤼셀에서 빚 때문에 투옥되기도 했다. 쾰른 대주교 헤르만 폰 비드의 보호를 받으며 저술 활동을 했으나, De occulta philosophiala의 인쇄를 막으려는 종교 재판과 대립했다. 프랑스로 갔다가 프랑수아 1세의 명령으로 체포되었지만 곧 풀려났고, 1535년 그르노블에서 사망했다.[2]
2. 4. 사상 및 신념
아그리파는 르네상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아 마법에 대한 종합적인 비전을 제시했다. 그는 자연 세계가 천체와 신성한 것과 결합되는 마법을 주장했다.[1] 그는 카발라 사상을 사용하여 여성의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De nobilitate et praecellentia foeminae sexus|여성의 고귀함과 우수성에 관하여la를 저술했다.[1][3] 또한, 마녀 박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했다.3. 저작

아그리파는 주로 그의 저서로 잘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학문과 예술의 불확실성과 허영심에 대한 비판적 선언》, 《여성의 고귀함과 탁월성에 대한 선언》, 《숨겨진 철학에 관한 세 권의 책》 등이 있다.
3. 1. 주요 저서
- 《학문과 예술의 불확실성과 허영심에 대한 비판적 선언(De incertitudine et vanitate scientiarum atque artium declamatio invectiva)》(De incertitudine et vanitate scientiarum atque artium declamatio invectivala) (1526년 집필, 1527년 쾰른에서 출판): 과학의 슬픈 상태에 대한 회의적인 풍자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피론적 회의주의의 부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몽테뉴, 데카르트, 괴테와 같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4]
- 《여성의 고귀함과 탁월성에 대한 선언(Declamatio de nobilitate et praecellentia foeminei sexus)》(Declamatio de nobilitate et praecellentia foeminei sexusla) (1529년): 여성의 신학적, 도덕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책이다.[4]
- 《숨겨진 철학에 관한 세 권의 책(De occulta philosophia libri tres)》(De occulta philosophia libri tresla) (1권은 1531년 파리, 2-3권은 1533년 쾰른에서 출판): 아그리파의 가장 중요한 저서로, 마법적 사상을 집대성한 책이다. 신플라톤적 참여를 통해 자연 세계가 천체 및 신성과 결합된다는 마법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브루노와 디 등 후대 마법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숫자적 용어로 말라리아에 대한 약초 치료법을 분석하기도 했다.
:*:> 또한 유명한 의사인 라바누스는 숫자의 덕에 대한 훌륭한 책을 썼습니다. 그러나 지금 자연에서 숫자가 얼마나 큰 덕을 가지고 있는지는, 오엽이라고 불리는 풀에서 명백합니다. 이 풀은 다섯이라는 숫자의 덕으로 독에 저항하고, 악마를 쫓아내며, 속죄에 기여합니다. 또한 이 풀의 잎 하나를 하루에 두 번 와인에 타서 마시면 하루 열병을 치료하고, 세 장을 사용하면 삼일열을, 네 장을 사용하면 사일열을 치료합니다. 마찬가지로 턴솔 씨앗 네 알을 마시면 사일열이 치료되고, 세 알은 삼일열이 치료됩니다. 유사하게, 베르빈도 와인에 타서 마시면 열을 치료한다고 합니다. 삼일열의 경우에는 셋째 마디에서 잘라내고, 사일열의 경우에는 넷째 마디에서 잘라냅니다.
- 《마법 의식에 관하여》: ''마법 철학의 네 번째 책''으로 알려져 있으나, 1559년 마르부르크에서 처음 등장했고 아그리파의 저작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3. 2. 기타 저서
《마법 철학의 네 번째 책》(Fourth Book of Occult Philosophy)은 때때로 《마법 의식에 관하여》라고도 불리며, 1559년 마르부르크에서 처음 출판되었다. 이 책은 아그리파의 저작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그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다.[4]참조
[1]
서적
[2]
간행물
Agrippa Von Nettesheim, Henry Cornelius
EB1911
[3]
서적
[4]
웹사이트
Gallica - Agrippa, Henri Corneille (1486-1535). Henrici Cornelii Agrippae De nobilitate et praecellentia foeminei sexus 1529
http://visualiseur.b[...]
Visualiseur.bnf.fr
201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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