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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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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양명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에 활동한 인물이다. 1906년 제주에서 출생하여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와세다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유학 중 사회주의 단체를 조직하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결성에 참여했으나,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조선일보 기자, 만선일보, 매일신보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일본의 침략 전쟁을 옹호하는 기사를 게재하여 친일 행위자로 분류되었다.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 추천위원, 과도정부 공보부 과장, 서울중앙방송국장 등을 역임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중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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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명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홍양명
원래 이름홍양명(洪陽明)
출생일1906년
사망일?
출생지대한제국 전라남도 제주군 제주면 삼도동리
거주지대한민국 서울 종로구 명륜동
본관남양(南陽)
정당무소속
학력
학력일본 와세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경력
경력前 만선일보 편집국 부국장 겸 국장 대리
조선총독부 대화숙평의회
직책조선총독부 대화숙평의회 대표상무평의원
직책 (원어)前 朝鮮總督府 大和塾評議會 代表常務評議員
임기1941년 5월 31일 ~ 1942년 6월 15일
총독미나미 지로 (조선 주재 일본 총독)
군주히로히토 (일본)
총리고노에 후미마로 (일본 총리)
미군정청 공보부
직책前 미군정청 공보부 정치분석과 과장
직책 (원어)前 美軍政廳 公報部 政治分析科 科長
임기1947년 2월 1일 ~ 1947년 8월 8일
총독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 장관)
장관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 장관)
주석안재홍 (미군정청 민정 장관)

2. 생애

홍양명은 1906년 대한제국 전라남도 제주군 제주면 삼도동리에서 출생하여 일제 강점기와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이다.

(자세한 생애는 하위 섹션 '일제 강점기 활동'과 '광복 이후 활동'에서 다룬다.)

2. 1. 일제 강점기 활동

1906년 대한제국 전라남도 제주군 제주면 삼도동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경기도 인천 제물포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후, 1912년 본래 친가 본적지였던 경성부 종로방 명륜정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921년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22년 8월 러시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모스크바로 잠시 밀항했다가 귀국했다.

1923년 일본 전문학교 입학 자격 특채 선발 시험에 합격한 후, 1925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여 1929년 8월 졸업하였다. 와세다 대학 재학 중이던 1927년 3월, 일본 도쿄에서 사회주의 단체인 제3전선사(第三戰線社)를 조직하고 기관지 《제3전선(第三戰線)》을 발행하는 한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결성에 참여했다.

1928년 2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잡지 《조선운동(朝鮮運動)》을 발행했지만, 같은 해 4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31년부터 1937년 8월까지 《조선일보》 정치부와 편집부 기자, 외신부장, 논설위원을 역임했으며, 1932년 8월 조선문필가협회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만선일보》 정치부장 겸 경제부장, 1940년 1월 23일에서 1941년 6월 8일까지 《만선일보》 편집인과 편집국 부국장 겸 편집국장 대리,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며, 1941년 8월 26일에서 1944년 2월 29일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신징(新京, 신경) 지사장을 역임했다. 《만선일보》와 《매일신보》에 일본의 중국 침략과 만주국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기사와 논설을 게재했으며,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2. 광복 이후 활동

1946년 3월 13일 전조선문필가협회 추천위원을 역임했으며, 1947년 과도정부 공보부 정치분석과장, 서울중앙방송국장(1947년 8월 15일 ~ 1948년 10월 16일)을 역임했다. 1949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공보처 고문을 역임했고, 1950년 3월 10일 대한노동총연맹 전국대회에서 대한노동총연맹 부위원장 겸 자유노동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10일 납북되었으며 그 뒤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3. 비판 및 논란

홍양명은 사회주의 운동가에서 친일 및 우익 노동 운동가로 전향하여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계열에서는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이 강하다.

3. 1. 친일 행적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만선일보》 정치부장 겸 경제부장을 지냈고, 1940년 1월 23일부터 1941년 6월 8일까지 《만선일보》 편집인, 편집국 부국장 겸 편집국장 대리,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41년 8월 26일부터 1944년 2월 29일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신징(新京, 신경) 지사장을 역임했다. 《만선일보》와 《매일신보》에서 일본의 중국 침략과 만주국을 찬양하는 기사와 논설을 게재했다. 이러한 경력 때문에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언론/출판 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3. 2. 전향 논란

홍양명은 1927년 3월 일본 도쿄에서 사회주의 단체인 제3전선사를 조직하고 기관지 《제3전선》을 발행하는 한편,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KAPF) 결성에 참여했다. 1928년 2월 20일 잡지 《조선운동》을 발행했지만, 같은 해 4월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만선일보》 정치부장 겸 경제부장, 1940년 1월 23일부터 1941년 6월 8일까지 《만선일보》 편집인, 편집국 부국장 겸 편집국장 대리,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며, 1941년 8월 26일부터 1944년 2월 29일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신징(신경) 지사장을 역임했다. 《만선일보》와 《매일신보》에 일본의 중국 침략과 만주국을 찬양하는 기사와 논설을 게재하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언론/출판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광복 후 1946년 3월 13일 전조선문필가협회 추천위원을 역임했으며, 1947년 과도정부 공보부 정치분석과장, 서울중앙방송국장(1947년 8월 15일 ~ 1948년 10월 16일)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9년 공보처 고문, 1950년 3월 10일 대한노동총연맹 전국대회에서 대한노동총연맹 부위원장 겸 자유노동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처럼 사회주의 운동가에서 친일, 우익 노동 운동가로 변모한 그의 행적은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더불어민주당 계열에서는 이러한 비판적인 시각이 강하다.

4. 평가

홍양명은 일제 강점기에 언론, 문학, 사회주의 운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친일 행적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언론/출판 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만선일보》 정치부장 겸 경제부장,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만선일보》 편집인과 편집국 부국장 겸 편집국장 대리,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신징(신경) 지사장을 역임하며, 일본의 중국 침략과 만주국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기사와 논설을 게재했다.

광복 이후에는 우익으로 전향하여 1947년 과도정부 공보부 정치분석과장, 서울중앙방송국장을 역임하고, 1950년 대한노동총연맹 부위원장 겸 자유노동연맹 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노동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10일에 납북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의 생애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반영하며, 복합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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