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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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월 선언은 1905년 러시아 혁명 당시 차르 니콜라이 2세가 발표한 칙령으로, 러시아 제국의 정치적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발표되었다. 1905년 러일 전쟁 패배 이후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과 연이은 사회 혼란 속에서, 10월 선언은 인격의 불가침,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두마(국회) 선거 참여 확대, 두마 승인 없는 법률 무효화 등을 약속했다. 이 선언으로 러시아는 입헌 군주제로의 첫걸음을 내디뎠지만, 차르는 두마의 권한을 제한하고 반대 세력을 탄압하여 10월 선언은 단기적인 성공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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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선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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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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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선언 |
서명일 | 1905년 10월 17일 (율리우스력 기준) |
장소 | 상트페테르부르크 |
서명자 | 니콜라이 2세 |
언어 | 러시아어 |
배경 | |
원인 | 러시아 1905년 혁명 |
내용 | |
주요 내용 | 개인의 시민권 보장 국가 두마의 권한 강화 법률 제정 시 국가 두마의 동의 필요 |
약속된 자유 |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
영향 | |
결과 | 러시아 제국의 정치 체제 변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 시도 혁명 세력의 분열 |
한계 | 황제의 권한 유지 두마 해산 권한 보유 선언 내용의 불완전한 이행 |
2. 배경
이러한 상황에서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르 불리긴 내상에게 칙령("불리긴 선언")을 발표하게 했다. 그러나 설립이 약속된 국회(두마)의 권한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고, 결국 10월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2. 1. 1905년 러시아 혁명
러시아 제국은 차르가 통치하는 오래된 전제 정치 정부를 유지했다.[4] 1890년대 초 러시아는 재무 장관 세르게이 비테의 지도하에 외자 유치와 관세 부과를 통한 국가 주도의 산업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5]그러나 이 시기 산업의 급속한 성장은 정치 개혁으로 이어지지 않아, 확대되는 노동 계급의 불만이 심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민은 여전히 인구의 80%를 차지했으며, 알렉산드르 2세 차르의 농노 해방에도 불구하고 농업 문제는 여전히 심각했다.[6] 러시아는 대부분 농업 경제를 유지하면서, 서로 다른 사회 계급 간의 경제적 문제와 갈등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제 정치 정부와의 갈등을 야기했다.
러시아의 경제적, 정치적 문제로 인한 갈등은 1905년 러시아 혁명 시기에 최고조에 달했다.[6] 1905년 1월 22일, 평화 시위대는 전통에 따라 차르에게 청원서를 전달하려 했다.[7] 그러나 이 시위는 겨울 궁전 밖에서 경비병들이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으면서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7] 이 폭력적인 시위 진압의 결과는 "피의 일요일"로 알려지게 되었다.[6] 이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반응은 러시아 전역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 피의 일요일 이후 러시아 국민들 사이에서 불안이 고조되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출근을 거부했고, 총파업으로 제국은 마비되었다.[7] 결국 불안은 러시아 시골로 퍼져 농민들이 지주의 저택을 불태우기 시작하면서 러시아 국민들은 전제 정치에 반란을 일으켰다.[7] 러시아의 통신, 운송 및 공공 서비스가 파업으로 마비되자 니콜라이 2세는 권력을 완전히 잃기 전에 행동을 취해야 했다.
2. 2. 세르게이 비테의 역할
세르게이 비테는 러시아 제국의 재무 장관으로, 1890년대 초 외자 유치와 관세 부과를 통해 국가 주도의 산업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5] 1905년 혁명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비테는 러일 전쟁에 반대했으며, 주전파였던 뱌체슬라프 플레베, 베조브라조프 등과 대립했다. 패전 후 전권 수석으로서 미국으로 가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 조약 체결에 이르렀다. 귀국 후, 비테는 총리로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 비테는 알렉세이 오보렌스키와 함께 10월 선언을 기초했다. 처음에는 니콜라이 2세의 칙령에 의한 사태 수습에 반대했지만, 자신의 의견을 칙령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칙령 발표에 최종적으로 동의했다. 니콜라이 2세는 칙령이 차르의 전제 권력을 축소하는 것이라고 하여 칙허를 망설였다. 그러나 비테는 자신의 의견이 통과되지 않으면 총리직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황제를 반 협박하여, 강제로 칙령에 동의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3. 주요 내용
Октябрьский Манифестru은 니콜라이 2세가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약속한 선언이다.[8][9]
- 인격의 불가침,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자유.
- 두마(국회) 선거에 폭넓게 참여할 수 있도록 선거권을 확대하고, 새로운 입법 조치 하에 보통 선거를 실시하여 유권자를 증가시킴.
- 두마의 승인을 받지 않은 법률은 무효화하고, 국회의원에게 행정 행위의 합법성과 적법성을 통제·감시하는 권한을 부여.
이 선언은 러시아 국민에게 특정 권리를 부여했지만, 러시아 정부가 민주적인 방식으로 운영될 것이라고 보장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 선언은 국민이 이제 특정 권리를 가지고 입법에 참여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9]
종교의 자유 조항은 사람들이 이단으로 비난받는 복음주의 개신교로 개종하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를 분노하게 했다.[10]
10월 선언의 한 조항은 러시아에 입법 기관(두마)을 창설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러시아 국민을 위해 전제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었다.[9] 두마는 출범부터 결함이 있었는데, 주요 결함 중 하나는 차르가 원하는 모든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9] 두마는 또한 러시아 관료제의 영향력, 그리고 니콜라이 2세가 두마와 합의에 이르지 못할 경우 두마를 해산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약화되었다.[9]
4. 선언 이후
10월 선언은 러시아 국민에게 인격 불가침, 양심,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두마 (국회) 선거 참여 확대와 두마의 승인 없는 법률 무효화를 약속했다. 이는 러시아가 입헌제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자, 황제의 폭정에 시달려온 국민에게는 헌법과 같은 의미였다.
10월 선언은 단기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어, 선언 발표 직후 파업과 폭력 사태가 대부분 종료되었다.[7] 사람들은 새롭게 얻은 자유와 정부 대표성에 대한 기대감에 휩싸였다.[7] 그러나 선언의 즉각적인 성공 이후, 전제 정치가 점차 권력을 회복하면서 파업과 폭력의 악순환이 다시 시작되었다. 몇 달 안에 무장 혁명가에 대한 처형은 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고,[6] 정부는 정당을 탄압하기 시작했으며, 1906-07년에는 러시아 상당 지역이 계엄령 하에 놓였다.[6]
10월 19일에서 20일 사이에는 10월 선언에 반대하는 현지 유대인 공동체를 대상으로 한 제2차 키시네프 포그롬이 발생하기도 했다.
4. 1. 자유주의 세력의 반응
10월 조서의 반포로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한 자유주의자들은 제정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거뒀다. 온건파는 11월에 10월 17일 동맹(시월당)을 결성했으며, 사회혁명당(에스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은 합법적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얻었다. 입헌민주당과 10월 연합(옥토브리스트)은 언론의 자유와 진정한 대의 정부를 갖는다는 생각에 만족했다.4. 2. 니콜라이 2세의 반동
한편으로 자신의 전제 권력에 흠집을 입은 니콜라이 2세는 사태를 굴욕적인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또한 황후 알렉산드라도 전제를 지향하고 있었다.[7] 니콜라이 2세는 조상들이 만든 체제를 제한하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내가 낭비할 권한이 없는 유산을 낭비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7] 그는 러시아 국민들이 자신의 권력을 제한하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점점 더 그 권력을 국민들에게 불리하게 사용하고 있었다.[7]황제는 국회(두마)에 대해 여러 차례 거부권을 발동하는 등 선거법 개정을 통해 국회의 형해화를 꾀했다. 러일 전쟁 종료 후 차르 정부는 12월에 일어난 모스크바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여 혁명 세력의 퇴조를 이끌어냈다. 비테의 기대대로 자유주의자를 중심으로 10월 선언에 찬동하는 온건파는 국회(두마) 선거에 대비하게 되었다. 1906년 제1국회에서는 자유주의파의 입헌민주당(카데트)이 제1당이 되었다.
니콜라이 2세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국회는 권한이 형해화되었고, 언론의 자유는 제한되었다.
5. 영향 및 평가
10월 선언은 러시아가 입헌제로 나아가는 첫걸음이었다. 이 선언은 황제의 폭정에 시달려온 러시아 국민에게 헌법의 선구자와 같았다.[7]
자유주의자들은 10월 선언으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황제에 대한 비난을 멈추었다. 온건파는 11월에 ‘10월 17일 동맹’(시월당)을 결성했다. 사회혁명당(에스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은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얻었다.
10월 선언은 단기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파업과 폭력 사태는 선언이 발표되자마자 대부분 멈추었다.[7] 사람들은 새롭게 얻은 자유와 정부에 대표성을 갖는다는 생각에 열광했다.[7] 이 선언으로 10월 당이 탄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국민들은 개혁에 반대했다. 10월 19일에서 20일에는 이 선언에 항의하며 시작된 제2차 키시네프 포그롬이 발생하여 현지 유대인 공동체가 피해를 입었다.
선언의 즉각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제 정치는 점차 권력을 되찾으면서 파업과 폭력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몇 달 안에 무장 혁명가에 대한 처형은 천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6] 정부는 정당을 탄압하기 시작했고, 1906-07년에는 러시아의 상당 부분이 계엄령 하에 놓였다. 이는 1907년 혁명이 끝난 후 완화되었다.[6]
참조
[1]
서적
Scenarios of Power, From Alexander II to the Abdication of Nicholas II
https://books.google[...]
[2]
서적
Memoirs of Count Witte
https://archive.org/[...]
[3]
서적
Memoirs of Count Witte
https://archive.org/[...]
[4]
학술지
The Government Program of 17 October 1905
https://www.jstor.or[...]
1975
[5]
웹사이트
Bloody Sunday: The Unhappy History That Led to the Russian Revolution
https://www.thoughtc[...]
2024-04-04
[6]
서적
The Russian Revolution
Oxford University Press
[7]
학술지
The October Manifesto: Democracy Debuts in Russia
[8]
웹사이트
Documents in Russian History-Manifesto of October 17th, 1905
http://academic.shu.[...]
Seton Hall University
2009-02-22
[9]
학술지
The Ruling Bureaucracy and the 'New Order' of Russian Statehood After the Manifesto of 17 October 1905
[10]
학술지
The emergence of 'freedom of conscience' in imperial Russia
https://muse.jh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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