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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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377년은 동진, 전진, 일본 등에서 사용된 연호와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기년, 그리고 정축년에 해당한다. 주요 사건으로는 고구려의 불교 수용 및 율령 반포, 백제의 외교 관계 강화, 페르시아의 훈족 격퇴 등이 있다. 로마 제국에서는 고트족 전쟁이 진행되었으며, 발렌스 황제가 고트족에 대항하여 군대를 파견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또한 구개지가 '낙수의 요녀'를 그렸고, 아르카디우스, 에우티미우스 대제, 발레리아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등이 태어났으며, 치 초, 환 혹, 율리아누스 사바스, 사학 1세 등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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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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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기년법 | 로마: DCCCLXXVII |
간지 | 정축년 |
세기 | 4세기 |
천간 | 정(丁) |
지지 | 소(丑) |
2. 연호
- 동진(東晉) 태원 2년
- 전진(前秦) 건원 13년
- 일본 닌토쿠 천황 65년[1] (황기 1037년)
- 조선
- * 고구려 소수림왕 7년
- * 백제 근구수왕 3년
- * 신라 내물 마립간 22년
- * 단기 2710년
- 불멸기원 920년
- 유대력 4137년 - 4138년
3. 기년
4. 사건
- 고구려 소수림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1]
-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을 막아내고, 동진과 외교 관계를 맺으며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1]
- 고트족 전쟁: 기근으로 하부 모이시아(고트족 점령)가 크게 피해를 입었고, 프리티게른과 그 추종자들은 도움을 요청했으나 총독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그들을 2등 시민으로 여겼다. 수천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1]
- 버드나무 전투: 로마는 게릴라전 전략을 포기하고 고트족을 공격했으나,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1]
- 고트족(아마도 그레우퉁기족)은 일부 훈족, 알란족과 동맹을 맺고 다뉴브 강을 건넜다. 이로 인해 고트족, 훈족, 알란족이 트라키아 남부 저지대로 진출했다.[1]
- 페르시아 왕 샤푸르 2세가 훈족을 카프카스 산맥 너머로 몰아냈다.
4. 1. 동아시아
東|동중국어아시아의 377년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고구려 소수림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는 국가 발전 모델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 백제는 고구려의 침입을 막아내고, 동진과 외교 관계를 맺으며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4. 2. 로마 제국
고트족 전쟁: 기근으로 인해 하부 모이시아(고트족 점령)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프리티게른과 그의 추종자들은 도움을 요청했지만, 총독 루피키누스와 막시무스는 그들을 2등 시민으로 여겼다. 거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수천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로마 국경에 대한 압력은 여전히 심각하며, 타이팔리족과 다른 적대적인 고트족 무리가 다뉴브 강에 있었다. 게다가 훈족과 알란족 집단도 강까지 이동해 왔다.[1]발렌스 황제는 조카 그라티아누스에게 고트족에 대항하여 로마군을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노령의 장군 프리게리두스와 아미아누스가 '판노니아와 트란살피나 보조병(Pannonicis et Transalpinis auxiliis)'이라고 부른 정예 증원군을 파견하여 응답했다. 그라티아누스는 또한 그의 프랑크족 근위대 사령관(궁정군 사령관), 리코메레스를 갈리아 야전군에서 차출한 여러 부대를 이끌고 파견했다.[1]
버드나무 전투: 로마인들은 게릴라전 전략을 포기하고 고트족의 공격을 받았다. 전투는 결정적이지 않지만 양측 모두 큰 인명 피해를 입었다. 고트족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후기 로마군은 더 이상 전투력을 갖추지 못했다. 리코메레스는 그의 군대를 마르키아노플레(불가리아) 남쪽으로 철수했다.[1]
발렌스는 사투르니누스를 발칸 산맥으로 보내 고개를 막게 했다. 이러한 노력은 고트족 통제 지역에서 철수한 ''리미타네이''(경보병) 부대에 의해 지원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작은 무리로 나뉘어 로마의 봉쇄선을 돌파할 만큼 충분한 병력으로 테르빙기족에 합류할 수 없게 된 고트족은 점점 더 절망에 빠졌다.[1]
고트족(아마도 그레우퉁기족)은 다뉴브 강을 따라 일부 훈족과 알란족과 동맹을 맺고 그들을 강 건너편으로 유인했다. 이제 권력의 균형이 바뀐 사투르니누스는 그의 전초 기지가 함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병력을 집중시켰다. 이로 인해 고개가 열리고 고트족, 훈족, 알란족이 트라키아 남부 저지대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1]
가을 – 약탈적인 "야만인" 무리가 식량, 보급품, 전리품을 찾아 그 지방 전역에 퍼졌다. 대부분의 로마군은 도시에 갇혀 있었다. 일부 정예 부대는 현장에 남아 고트족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한 작전 중 하나가 디발툼 마을 외곽에서 벌어졌다. 스쿠타리 중기병이 고트족에 대한 무모한 돌격으로 궤멸되었다.[1]
이제 제국으로 하여금 조건을 제시하게 하기 위한 군사적 승리를 추구하는 고트족은 프리게리두스의 군대를 베로이아에서 몰아내려 했다. 그는 수치(이히트만) 고개를 넘어 일리리아로 후퇴하고, 그라티아누스에게 트라키아의 고트족을 격퇴하려면 주요 황제 군대의 원정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1]
발렌스는 페르시아 제국과 평화를 맺고 동부 국경을 방어할 수 있는 충분한 군대를 남겼다. 여왕 마비아 지휘하의 사라센들이 반란을 일으켜 페니키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시나이 반도(이집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발렌스는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했다.[1]
4. 3. 페르시아
페르시아 왕 샤푸르 2세가 훈족을 카프카스 산맥 너머로 몰아냈다.5. 문화
중국 화가 구개지(顧愷之)가 그의 작품인 '''낙양 낙수의 요녀(遼女)'''를 그렸다.
6. 탄생
7. 사망
참조
[1]
웹사이트
The Gothic Wars Battle of Adrianople
https://warfarehisto[...]
2015-10-05
[2]
서적
Euthymius the Great
https://referencewor[...]
BRILL
2011-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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