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기간 오스트레일리아의 군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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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기간 오스트레일리아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육해공군을 파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병력으로 구성된 K-Force를 파견하여 지상군, 해군, 공군 부대가 참전했다. 지상군은 제3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3 RAR)를 주축으로 가평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고, 해군은 항공모함, 구축함, 프리깃함을 파견하여 해상 봉쇄, 함포 사격,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공군은 제77 비행대대를 중심으로 P-51D 머스탱 전투기 및 글로스터 미티어 제트 전투기를 운용하며 지상 공격 및 제공 임무를 수행했다. 1953년 휴전 협정 체결 이후에도 오스트레일리아군은 4년간 군사 감시단으로 주둔했으며, 6.25 전쟁 참전을 통해 미국, 뉴질랜드와의 ANZUS 조약 체결 등 정치적, 안보적 이점을 얻었다. 6.25 전쟁에서 1,5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 중 339명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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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기간 오스트레일리아의 군사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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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45년 8월 10일 소련군이 한반도에 진입하고 몇 주 후 미군이 인천을 통해 한반도에 진입했다.[4] 미 육군 중장 존 R. 하지는 1945년 9월 9일 서울의 구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38선 이남의 일본군 항복을 공식적으로 접수했다.[4]
오스트레일리아는 6.25 전쟁 발발 직후,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을 결정하고 육해공군을 모두 파병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병력을 중심으로 'K-Force'를 모집하여 한국에 파병했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조선인민군은 1950년 6월 25일 38선을 넘어 6.25 전쟁을 일으켰다.[5]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즉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82를 통해 북한의 38선 철수와 모든 적대 행위 중단을 요구했다.[5]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1,000명의 남성을 모집하여 한국군 또는 '''K-Force'''라고 불리는 부대에 3년간 복무할 것을 요청했다.[6][7]
조선인민군이 남한으로 진입했을 때, 서울 전투에서 일주일도 안되어 서울이 함락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은 제대로 저항을 하지 못하고 부산을 향해 후퇴하였다. 이틀 안에 미국은 지원을 제안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회원국들에게 미국이 지휘하는 유엔군의 후원 하에 공격을 격퇴하도록 요청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즉시 제77 비행대와 제3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를 투입했으며, 이들은 모두 영국 연방 점령군 소속으로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다.
제77 비행대는 1946년 2월 일본에 도착하여 P-51D 머스탱 전투기로 전환하여 영국 연방 점령군에 참여 하였고, 6.25 전쟁 발발 직전 오스트레일리아로 복귀할 예정이였으나, 즉시 한국으로 파견되어 주로 지상 지원, 전투 초계 및 호위 임무를 수행하며 전쟁에 참전한 최초의 유엔 공군 부대가 되었다. 제3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유엔군에 대한 주요 지상군으로 빠르게 투입되었다. 일본에서의 집중 훈련과 증강 기간을 거친 후, 이 대대는 1950년 9월 말 한국에 도착했다. 이 대대는 제27 영국 연방 여단의 일부를 형성하여 유엔군의 북한 진격과 이후 1950-51년 겨울 중국 중국 인민지원군의 제2차 공세 이후의 유엔군의 북한 철수에 참여했다. 그들은 가평 전투 이후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은 세 부대 중 하나였다. 전투 병력 외에도 오스트레일리아군은 1952년 영국 연방군 한국으로 대체된 영국 연방 점령군에 대부분의 보급 및 지원 병력을 제공했다.
3.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참전
== 부대 규모 및 편성 ==
6.25 전쟁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총 17,164명이었다.[25] 지상군은 보병 2개 대대(제3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3 RAR) 등) 규모로 2,282명이 참전하였다.[25] 해군은 항공모함 1척, 구축함 4척, 프리깃함 4척을 파견하였다.[25]구분 함정명 작전기간 지휘관 항공모함 시드니/Sydney영어 1951.8 ~ 1952.6 대령 D.H.Harries 1953.10 ~ 1954.6 대령 G.C.Oldham 프리깃함 쇼칼하벤/Shocalhaven영어 1950.7 ~ 1950.9 중령 I.H.McDonald 머치슨/Murchison영어 1951.5 ~ 1952.2 중령 A.N.Dollard 콘다민/Condamine영어 1952.8 ~ 1953.4 중령 R.C.Savage 컬고아/Culgoa영어 1953.4 ~ 1953.6 중령 D.A.H.Clarke 구축함 바탄/Bataan영어 1950.7 ~ 1951.5 중령 B.M.Marks 1952.2 ~ 1952.8 중령 S.Bracegridle 와라뭉가/Warramunga영어 1950.8 ~ 1951.8 대령 O.H.Becher 1952.2 ~ 1952.7 중령 J.M.Ramsay 안작/Anzac영어 1951.8 ~ 1951.9 중령 J.Plunkett-Cole 1952.9 ~ 1953.6 대령 G.G.O.Gatacre 토브룩/Tobruk영어 1951.8 ~ 1952.6 중령 R.I.Peek 1953.6 ~ 1954.2 중령 I.H.McDonald
공군은 전투비행대대 1개 및 수송기편대 1개를 파견하였다.[25]
== 주요 참전 부대 ==3. 1. 부대 규모 및 편성
6.25 전쟁에 참전한 오스트레일리아군은 총 17,164명이었다.[25] 지상군은 보병 2개 대대(제3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3 RAR) 등) 규모로 2,282명이 참전하였다.[25] 해군은 항공모함 1척, 구축함 4척, 프리깃함 4척을 파견하였다.[25]
구분 | 함정명 | 작전기간 | 지휘관 |
---|---|---|---|
항공모함 | 시드니/Sydney영어 | 1951.8 ~ 1952.6 | 대령 D.H.Harries |
1953.10 ~ 1954.6 | 대령 G.C.Oldham | ||
프리깃함 | 쇼칼하벤/Shocalhaven영어 | 1950.7 ~ 1950.9 | 중령 I.H.McDonald |
머치슨/Murchison영어 | 1951.5 ~ 1952.2 | 중령 A.N.Dollard | |
콘다민/Condamine영어 | 1952.8 ~ 1953.4 | 중령 R.C.Savage | |
컬고아/Culgoa영어 | 1953.4 ~ 1953.6 | 중령 D.A.H.Clarke | |
구축함 | 바탄/Bataan영어 | 1950.7 ~ 1951.5 | 중령 B.M.Marks |
1952.2 ~ 1952.8 | 중령 S.Bracegridle | ||
와라뭉가/Warramunga영어 | 1950.8 ~ 1951.8 | 대령 O.H.Becher | |
1952.2 ~ 1952.7 | 중령 J.M.Ramsay | ||
안작/Anzac영어 | 1951.8 ~ 1951.9 | 중령 J.Plunkett-Cole | |
1952.9 ~ 1953.6 | 대령 G.G.O.Gatacre | ||
토브룩/Tobruk영어 | 1951.8 ~ 1952.6 | 중령 R.I.Peek | |
1953.6 ~ 1954.2 | 중령 I.H.McDonald |
[27]
공군은 전투비행대대 1개 및 수송기편대 1개를 파견하였다.[25]
3. 2. 주요 참전 부대
- 지상군: 6.25 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주력 지상군은 제3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3 RAR)였다.[21] 3 RAR은 1950년 9월 28일 부산에 도착하여 유엔군의 북진에 합류, 평양 인근에서 첫 주요 작전을 수행했다.[21] 1950년 10월 21일, 미국 제24보병사단과 제27영국 연방여단은 평양에서 대동강을 건너 북쪽으로 진격했고, 다음 날 3 RAR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진격을 이끌었다.[21]
- 해군: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RAN) 함정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 항복에 따라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북한의 남침 이후 즉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21] 로버트 멘지스 총리는 6월 29일 프리깃함 과 구축함 을 한국에서 유엔군 지휘 하에 둘 것이라고 발표했다.[21] 1950년 7월 1일, HMAS ''쇼알헤이븐''은 부산으로 이동하여 미국 탄약 수송선을 호위하는 첫 호주 작전을 시작했고, 7월 27일에는 구축함 도 투입되었다.[21] 1950년 10월 원산 상륙작전에서 HMAS ''와라문가''는 함포 사격을 지원했고, 12월 흥남 철수 작전에서는 HMA 선박 ''바탄''과 ''와라문가''가 철수를 지원했다.[21] 1951년 10월, 항공모함 는 시 퓨리 (제805 비행대 및 제808 비행대)와 파이어플라이(제817 비행대)를 탑재하고 한국 해역에 도착하여 3개월간 임무를 수행했다.[21] ''시드니''는 9대의 항공기 손실, 조종사 3명 사망, 2,700회 이상의 출격 임무를 수행하고 일본으로 귀환했다.[21] 이후 전쟁에서 RAN 소속 함선 9척이 북한 해상 봉쇄에 참여했다.[21]
- 공군: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공군(RAAF) 제77 비행대대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연방 점령군의 일환으로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6.25 전쟁 발발 당시 P-51D 머스탱 전투기를 운용하고 있었다.[21] 제77 비행대대는 유엔군의 일환으로 한국에 투입되어 1950년 7월 2일 첫 지상 공격 작전을 수행했다.[21] 1950년 10월, 제30 통신 비행대대, 제491 (정비) 비행대대, 제391 (기지) 비행대대가 제91 (혼성) 비행대대(No. 91 (Composite) Wing RAAF)로 통합되어 일본 이와쿠니 해병대 항공 기지에 주둔했다.[21] 제77 비행대대는 유엔군의 북진을 지원하다가 중국군의 개입으로 11월 부산으로 철수했다.[21] 1951년 4월 글로스터 메테오 제트 전투기로 재무장한 후 7월에 작전에 복귀했으나, 미그-15에 비해 성능이 열세였다.[21] 이후 1951년 12월부터 지상 공격 임무를 주로 수행했으며, 1954년 11월 호주로 귀국할 때까지 한국에 주둔하며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21]
4. 주요 전투
4. 1. 지상군 활동
3 RAR이 9월 28일 부산에 도착했을 때, 조선인민군은 후퇴하고 있었다.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고, 한반도 남단에서는 부산 교두보에서 돌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꾸준한 진격이 시작되어 북한군을 북쪽으로 몰아내며 38선을 향해 나아갔다. 10월에 유엔군은 북한으로 진격을 시작했고, 3 RAR은 평양 인근에서 첫 번째 주요 작전에 참여했다.10월 21일까지, 미국 제24보병사단은 제27영국 연방여단을 선두로 하여 평양에서 대동강을 건너 북쪽으로 향했다. 다음 날, 3 RAR의 오스트레일리아 군인들이 진격을 이끌었고, C 중대가 선두 부대였다.
1950년 10월 20일, 영연방 제27여단과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는 평양에 입성하여 숙천-박천-정주를 목표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날 아침, 갑자기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에게 포위된 미 제187공수연대를 구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동강을 도하하여 진격하게 된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장이었던 그린 중령은 사령부로부터 미 공수부대가 대대가 점령중인 진지 북쪽 2km 지점에서 남진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때 북한군은 대대에게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린 대대장은 즉시 1개 중대로 돌파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돌파 임무를 받은 데니스 대위의 C중대는 과수원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전차중대가 이를 엄호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당황하여 화기와 진지를 버려두고 후퇴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측면을 엄호 중이던 전차와 9소대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었다.
그린 대대장은 우측방의 고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2개 중대를 보내고, 또다른 중대를 보내 C중대를 엄호하게 하였다. 이렇게 모든 중대를 산개시키고 본부요원들 중 1개 소대 병력을 차출하였고 북쪽으로 급파하여, 남하중이던 미 공수부대와의 연결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미군은 적을 포위할 수 있었고, 포위한 적은 대부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에서 제3대대는 북한군 150명을 사살하고 239명을 포획하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군은 7명만이 부상을 입었다.
박천지구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제3대대가 6.25 전쟁에 참전한 이후 중공군과 최초로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해 유엔군은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11월 3일 사단 우전방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구룡강을 도하하였고 그 일대를 방어중이던 미 24사단을 돌파한 뒤 압박을 강화하여, 여단 후방으로 우회하여 박천-신안주 간 작전도로를 위협하였다. 오후 늦게 영국군 정찰대가 박천 동북쪽 10km 지점에서 대규모 중공군이 남진중인 것을 목격하였고 이날 밤 우측의 미 24사단은 차량과 중장비를 유기하고 안주로 철수하였다. 11월 5일 08시 중공군은 후퇴하던 미군을 추격하였고, 일부는 서쪽으로 우회하여 박천 남쪽 3km 지점의 미군 포병부대를 강타하였다. 이는 박천-신안주 간의 작전도로가 차단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코드 준장은 즉시 대령강 도하장을 방어중이던 오스트레일리아 군에 반격을 명령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A중대를 우전방, B중대를 좌전방에 배치하여 즉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대대는 1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추도리를 재탈환하고 진지를 재편성하였다. 이날 밤 중공군의 반격으로 인해 추도리 남쪽 1.5km 지점까지 철수했으나 D중대의 반격으로 진지를 다시 확보할 수 있었고 적을 후퇴시킬 수 있었다.
11월 6일 3대대는 산병호를 파고 포진지를 보강하였다. 또한 정찰대 임무를 수행하던 C중대는 추도리 동북쪽 깊숙한 산륙까지 진출하여 달아나던 중공군 11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3대대는 영국군과 함께 대령강 동안 일대에서 계속 진지를 점령하고 박천-신안주 도로를 경비하는 임무를 전담하였고 전방 수 km 지점까지 수색대와 정찰대를 파견하여 접적을 시도하였다.
죽둔리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가 가평 7km 북쪽 지점에 위치한 죽둔리에서 중공군 춘계공세를 맞아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경춘가도를 차단하려던 중공군의 기도를 좌절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엔군은 1951년 4월 22일 중공군 춘계공세에 봉착하였고, 군단 예비부대로 가평에 위치한 영국 제27여단과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는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여단장이었던 버크 준장은 죽둔리를 중심으로 가평천 동북지역에 제3대대를, 서북지역에 캐나다 대대를 배치하여 저지진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의 각 중대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오후 6시경 각 진지점령을 완료하였다. 이날 밤 10시, 중공군 선두부대가 대대 정면 최북단 도로상의 미군 전차소대를 공격하고 주력이 죽둔리 쪽을 공격하였다. 이날 야간 죽둔리 남쪽까지 침투하여 교차로 일대를 차단한 중공군은 다음날인 4월 24일 새벽에 가평천 건널목을 차단하고 계속 남하를 시도하였다.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결국 오스트레일리아군은 가평 동북쪽 2km 지점의 논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자 중공군과의 전투는 더 치열해졌다. A,B 중대와의 교신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편 D중대는 가장 고지대의 방어를 맡아 전날 밤 한 차례의 집중공격을 막아내었지만 날이 밝자 이 일대의 감제고지였던 504고지를 노리는 적의 공격을 받았다. 정오가 지나도 공격이 계속되자 워드 중위는 적에게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12소대를 504고지 부근으로 철수시켰다. 이를 모르던 중공군은 오후 3시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에 D중대는 뉴질랜드 포병에게 집중포격을 요청하는 한편 중대의 모든 가용화기를 총동원하여 집중사격을 실시하였다. 그제서야 아군의 기도를 알게 된 중공군은 많은 시체를 유기한 채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공방전은 계속되었고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적은 두 차례나 중대의 거점을 강습하였으나 그때마다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하였다.

이리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는 1951년 4월 23일 밤부터 24일 밤에 이르기까지 만 24시간 동안 끊임없이 밀어 닥친 중공군의 남진을 죽둔리 일대에서 저지하며 가평-청평 도로를 장악하여 경춘도로를 차단하려는 적의 의도를 완전히 분쇄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31명이 전사하였고, 5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명이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 적지 않은 병력 손실이 발생하였다.
가평 전투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제118사단 병력이 가평 계곡을 공격하여 대한민국과 뉴질랜드 군대를 후퇴시켰다. 심한 압박을 받은 대한민국 육군의 제6사단은 붕괴되었고 전선은 무너졌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심한 압박 속에서도 전선을 지키며 지원 사격을 가했고, 그 틈을 타서 대한민국 군인들이 뚫고 지나갔다.
제3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의 오스트레일리아 군과 프린세스 패트리샤 캐나다 경보병 연대의 캐나다 군에게 이 중공군의 진격을 막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제27영국 연방 여단 병력의 임무는 가평으로 향하는 두 개의 접근로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그들은 방어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중공군 제118사단은 4월 23일 두 개의 전진 대대와 교전을 벌였다. 전투 초반에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와 뉴질랜드 왕립 포병대 제16야전 포병 연대가 거의 포위될 뻔했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캐나다 경보병 연대 제2대대(제2PPCLI)와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가 지키는 전진 진지의 저항으로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가 후퇴할 수 있었다. 제1대대는 예비대로 투입되었다.
가평에서의 중공군 초기 공격은 504고지에서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와 교전했다. 그 후 중공군은 캐나다 전선을 강타했다.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은 4월 23일 밤 동안 지속되었다. 격렬한 전투의 밤을 보낸 후,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A 중대 지휘관인 소령 버나드 오다우드는 제1해병사단의 한 장교에게 무선 전화를 통해 연락하는 데 성공했다. 돌아온 답은 공격 부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전날 밤에 전멸했다는 것이었다.[12] 중공군은 4월 23일 아침까지 여단 진지에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군은 중공군 제118사단 전체와 대치하고 있었다. 전투는 결국 양쪽 전선에서 백병전으로 이어졌고, 총검 돌격이 벌어졌다. 포위에 직면한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4월 24일 늦은 시각에 새로운 방어 진지로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PPCLI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제2PPCLI D중대 지휘관 대위 밀스는 4월 25일 새벽, 점령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677고지에 있는 자신의 진지에 여러 차례 포격을 요청해야 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공중 투하로 보급을 받아야 했다.[13] 새벽이 되자 캐나다 진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잦아들었고, 4월 25일 오후에는 캐나다군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중공군이 제거되었고, 이 때 제2대대는 구원받았다. 뉴질랜드 왕립 포병대 제16야전 포병 연대도 후퇴하여 미국 육군의 제72중전차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이 부대들은 근접하여 강력한 포병 지원을 제공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철수 중에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B중대 소속 4명의 병사가 측면 공격을 막기 위해 후방 경계대를 형성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 4명은 중공군 3개 파를 막아 최소 25명을 사살하고 더 많은 부상자를 냈다. 이틀 밤낮의 전투 끝에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32명이 사망하고 5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자신들의 진지를 탈환했다. 중공군 진격을 늦춘 이 기여로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는 미국 부대 표창을 받았다.

수적으로 엄청난 우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병력은 심하게 열세였다. 그들의 용기와 끈기는 훈련이 잘 되고 규율이 잘 잡혀 있으며 무장이 잘 된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군을 이길 수 없었다.[12]
이 교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중령 브루스 퍼거슨과 캐나다의 중령 제임스 R. 스톤은 각각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14][15] 스톤에게는 1944년 이탈리아 올리브 작전에서 처음 받은 DSO에 대한 두 번째 훈장이었다.[16][17]
코만도 작전 기간 중,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는 전곡 부근 방어선에서 10km 북쪽 마량산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3일간의 공격 작전에서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을 격파하고 마량산을 점령하였다.[32][32]
미군 제 1군단장이었던 John W. Daniel은 1951년 10월 철원-김화의 주요 보급로를 확보한다는 코만도 작전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에 따라 영연방 제 28여단장은 임진강 서안-사미천 동안 사이 마량산 일대 고지를 탈환하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여단 예하의 각 대대는 1951년 10월 3일 새벽 우일선에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를, 중앙일선과 좌일선의 영국군 각각 1개 대대를 전개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우일선에 배치되었던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이른 아침 중공군의 저항없이 199고지를 점령한 후 계속하여 사단의 좌일선 공격대대로서 마량산을 공격하였다. 마량산은 높이 솟아 있고 동남방이 가파른 절벽인데다가 서쪽이 평탄하여 적진의 후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8부 능선 주위에 무수한 유개호와 산병호를 구축하고 있었다.
헤셋 중령은 A중대로 하여금 317고지 동남쪽 하단에서 양동공격을 하여 적의 주의를 그 방향으로 유인하고, 그 사이에 B중대가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마량산 산기슭과 중간능선까지 진출하게 하였다. 뒤를 바짝 따르던 D중대가 초월 전진하여 목표고지를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C중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A중대가 5일 새벽 3시 30분 동남쪽 능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자 선봉에 있던 B중대가 동쪽으로부터 고지 동쪽능선을 향해 진격하고, 주공인 D중대가 제 10소대를 선두로 그 뒤를 따랐다. 최종 목표고지까지는 두 개의 중간 목표가 있었는데 제 1목표 고지는 199고지 북쪽 1.5km이며, 제2목표인 발디 고지는 그로부터 마량산 쪽으로 500m 거리에 있었다. 10여 분의 공격준비사격 이후 기관총과 전차포의 엄호를 받으며 제 11소대가 공격을 개시하고, 12소대가 이를 초월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결국 이날 16시경 D중대는 제1목표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중간목표 2개를 모두 탈취하고 최종목표인 마량산 만을 눈앞에 남겨놓았다. 대대장은 C중대에게 D중대를 초월하여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예상외로 적의 저항이 경미하여 C중대는 이날 18시에 최종목표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대대장은 대대 지휘소를 마량산으로 추진하고 B중대의 힌지 고지에 대한 공격을 직접 지휘하였다. 아포, 전차포, 박격포를 통해 힌지 고지를 집중공격하였다. B중대는 일선 2개 소대가 좌우로 산개하여 전진하고 그 뒤를 예비소대와 중대본부가 따랐다. 공격소대들은 공격을 개시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적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8일 5시 힌지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자 영국군 대대의 1개 중대가 217고지를 공격하여 거의 적의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하였다. 대대는 이 전투에서 20명이 전사하였고 89명이 부상을 입는 큰 피해를 당했으나 200명의 중공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51년 이후, 양측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서부 전선과 유사한 형태의 전투를 벌였는데, 병사들은 터널, 요새, 모래주머니로 만든 요새에서 철조망 방어선 뒤에 숨어 살았다. 1951년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3 왕립 호주 연대(3 RAR)는 임진강 북동쪽 언덕의 영연방 사단 진지의 동쪽에서 참호를 점령했다. 그들 맞은편에는 강력하게 요새화된 중공군의 진지가 있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다른 여러 국가들은 더 많은 지상군을 파병하는 데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했다. 그러나 호주는 제1 RAR을 파견하여 한국에서의 병력을 증강했다.[18] 이 대대는 1952년 4월 6일 한국에 도착했으며 7월 2일 작전 블레이즈 중에 첫 번째 주요 전투를 치렀다.[19] 1953년 3월, 그들은 제2 RAR로 교체되었다.[20]
4. 1. 1. 영유리 전투 (1950년 10월)
1950년 10월 20일, 영연방 제27여단과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는 평양에 입성하여 숙천-박천-정주를 목표로 진격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날 아침, 갑자기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에게 포위된 미 제187공수연대를 구호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동강을 도하하여 진격하게 된다. 당시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장이었던 그린 중령은 사령부로부터 미 공수부대가 대대가 점령중인 진지 북쪽 2km 지점에서 남진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때 북한군은 대대에게 박격포와 기관총 사격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린 대대장은 즉시 1개 중대로 돌파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돌파 임무를 받은 데니스 대위의 C중대는 과수원을 향해 공격을 개시하였고 미 전차중대가 이를 엄호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미군의 공격을 받은 북한군은 당황하여 화기와 진지를 버려두고 후퇴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측면을 엄호 중이던 전차와 9소대에 의해 대부분 사살되었다.그린 대대장은 우측방의 고지대를 점령하기 위해 2개 중대를 보내고, 또다른 중대를 보내 C중대를 엄호하게 하였다. 이렇게 모든 중대를 산개시키고 본부요원들 중 1개 소대 병력을 차출하였고 북쪽으로 급파하여, 남하중이던 미 공수부대와의 연결에 성공하였다. 그 결과 오스트레일리아군과 미군은 적을 포위할 수 있었고, 포위한 적은 대부분 사살하거나 포로로 잡았다.
이 전투에서 제3대대는 북한군 150명을 사살하고 239명을 포획하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군은 7명만이 부상을 입었다.
4. 1. 2. 박천지구 전투 (1950년 11월)
박천지구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제3대대가 6.25 전쟁에 참전한 이후 중공군과 최초로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해 유엔군은 청천강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11월 3일 사단 우전방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구룡강을 도하하였고 그 일대를 방어중이던 미 24사단을 돌파한 뒤 압박을 강화하여, 여단 후방으로 우회하여 박천-신안주 간 작전도로를 위협하였다. 오후 늦게 영국군 정찰대가 박천 동북쪽 10km 지점에서 대규모 중공군이 남진중인 것을 목격하였고 이날 밤 우측의 미 24사단은 차량과 중장비를 유기하고 안주로 철수하였다. 11월 5일 08시 중공군은 후퇴하던 미군을 추격하였고, 일부는 서쪽으로 우회하여 박천 남쪽 3km 지점의 미군 포병부대를 강타하였다. 이는 박천-신안주 간의 작전도로가 차단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코드 준장은 즉시 대령강 도하장을 방어중이던 오스트레일리아 군에 반격을 명령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A중대를 우전방, B중대를 좌전방에 배치하여 즉시 공격을 개시하였다. 대대는 1시간에 걸친 격전 끝에 추도리를 재탈환하고 진지를 재편성하였다. 이날 밤 중공군의 반격으로 인해 추도리 남쪽 1.5km 지점까지 철수했으나 D중대의 반격으로 진지를 다시 확보할 수 있었고 적을 후퇴시킬 수 있었다.
11월 6일 3대대는 산병호를 파고 포진지를 보강하였다. 또한 정찰대 임무를 수행하던 C중대는 추도리 동북쪽 깊숙한 산륙까지 진출하여 달아나던 중공군 11명을 사살하였다. 이후 3대대는 영국군과 함께 대령강 동안 일대에서 계속 진지를 점령하고 박천-신안주 도로를 경비하는 임무를 전담하였고 전방 수 km 지점까지 수색대와 정찰대를 파견하여 접적을 시도하였다.
4. 1. 3. 가평 죽둔리 전투 (1951년 4월)
죽둔리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가 가평 7km 북쪽 지점에 위치한 죽둔리에서 중공군 춘계공세를 맞아 중공군과 치른 전투이다. 이 전투는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경춘가도를 차단하려던 중공군의 기도를 좌절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유엔군은 1951년 4월 22일 중공군 춘계공세에 봉착하였고, 군단 예비부대로 가평에 위치한 영국 제27여단과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는 중공군과 치열한 격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여단장이었던 버크 준장은 죽둔리를 중심으로 가평천 동북지역에 제3대대를, 서북지역에 캐나다 대대를 배치하여 저지진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의 각 중대는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오후 6시경 각 진지점령을 완료하였다. 이날 밤 10시, 중공군 선두부대가 대대 정면 최북단 도로상의 미군 전차소대를 공격하고 주력이 죽둔리 쪽을 공격하였다. 이날 야간 죽둔리 남쪽까지 침투하여 교차로 일대를 차단한 중공군은 다음날인 4월 24일 새벽에 가평천 건널목을 차단하고 계속 남하를 시도하였다.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결국 오스트레일리아군은 가평 동북쪽 2km 지점의 논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날이 밝자 중공군과의 전투는 더 치열해졌다. A,B 중대와의 교신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섬네일|246x246픽셀|6.25전쟁 참전한오스트레일리아군]][31]
한편 D중대는 가장 고지대의 방어를 맡아 전날 밤 한 차례의 집중공격을 막아내었지만 날이 밝자 이 일대의 감제고지였던 504고지를 노리는 적의 공격을 받았다. 정오가 지나도 공격이 계속되자 워드 중위는 적에게 노출되지 않은 상태로 12소대를 504고지 부근으로 철수시켰다. 이를 모르던 중공군은 오후 3시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에 D중대는 뉴질랜드 포병에게 집중포격을 요청하는 한편 중대의 모든 가용화기를 총동원하여 집중사격을 실시하였다. 그제서야 아군의 기도를 알게 된 중공군은 많은 시체를 유기한 채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공방전은 계속되었고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적은 두 차례나 중대의 거점을 강습하였으나 그때마다 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하였다.
|thumb|오스트레일리아군에 포로로 잡힌 중국군, 1951년 4월 24일]]
이리하여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는 1951년 4월 23일 밤부터 24일 밤에 이르기까지 만 24시간 동안 끊임없이 밀어 닥친 중공군의 남진을 죽둔리 일대에서 저지하며 가평-청평 도로를 장악하여 경춘도로를 차단하려는 적의 의도를 완전히 분쇄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31명이 전사하였고, 58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3명이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등 적지 않은 병력 손실이 발생하였다.
가평 전투에서 중국 인민지원군의 제118사단 병력이 가평 계곡을 공격하여 대한민국과 뉴질랜드 군대를 후퇴시켰다. 심한 압박을 받은 대한민국 육군의 제6사단은 붕괴되었고 전선은 무너졌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심한 압박 속에서도 전선을 지키며 지원 사격을 가했고, 그 틈을 타서 대한민국 군인들이 뚫고 지나갔다.
제3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의 오스트레일리아 군과 프린세스 패트리샤 캐나다 경보병 연대의 캐나다 군에게 이 중공군의 진격을 막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제27영국 연방 여단 병력의 임무는 가평으로 향하는 두 개의 접근로를 봉쇄하는 것이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그들은 방어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중공군 제118사단은 4월 23일 두 개의 전진 대대와 교전을 벌였다. 전투 초반에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와 뉴질랜드 왕립 포병대 제16야전 포병 연대가 거의 포위될 뻔했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캐나다 경보병 연대 제2대대(제2PPCLI)와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가 지키는 전진 진지의 저항으로 미들섹스 연대 제1대대가 후퇴할 수 있었다. 제1대대는 예비대로 투입되었다.
가평에서의 중공군 초기 공격은 504고지에서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와 교전했다. 그 후 중공군은 캐나다 전선을 강타했다. 중공군의 계속된 공격은 4월 23일 밤 동안 지속되었다. 격렬한 전투의 밤을 보낸 후,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A 중대 지휘관인 소령 버나드 오다우드는 제1해병사단의 한 장교에게 무선 전화를 통해 연락하는 데 성공했다. 돌아온 답은 공격 부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전날 밤에 전멸했다는 것이었다.[12] 중공군은 4월 23일 아침까지 여단 진지에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군은 중공군 제118사단 전체와 대치하고 있었다. 전투는 결국 양쪽 전선에서 백병전으로 이어졌고, 총검 돌격이 벌어졌다. 포위에 직면한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4월 24일 늦은 시각에 새로운 방어 진지로 질서 정연하게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제2PPCLI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제2PPCLI D중대 지휘관 대위 밀스는 4월 25일 새벽, 점령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677고지에 있는 자신의 진지에 여러 차례 포격을 요청해야 했다. 이 절박한 상황에서 공중 투하로 보급을 받아야 했다.[13] 새벽이 되자 캐나다 진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잦아들었고, 4월 25일 오후에는 캐나다군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중공군이 제거되었고, 이 때 제2대대는 구원받았다. 뉴질랜드 왕립 포병대 제16야전 포병 연대도 후퇴하여 미국 육군의 제72중전차대대와 합류할 수 있었다. 이 부대들은 근접하여 강력한 포병 지원을 제공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의 철수 중에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 B중대 소속 4명의 병사가 측면 공격을 막기 위해 후방 경계대를 형성했다. 오스트레일리아 군 4명은 중공군 3개 파를 막아 최소 25명을 사살하고 더 많은 부상자를 냈다. 이틀 밤낮의 전투 끝에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32명이 사망하고 53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자신들의 진지를 탈환했다. 중공군 진격을 늦춘 이 기여로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는 미국 부대 표창을 받았다.
|thumb|1952년 12월 제3왕립 오스트레일리아 연대에 대통령 부대 표창을 수여한 후 제임스 밴 플리트 미군 장군이 부대원들을 사열하고 있다]]
수적으로 엄청난 우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공군 병력은 심하게 열세였다. 그들의 용기와 끈기는 훈련이 잘 되고 규율이 잘 잡혀 있으며 무장이 잘 된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군을 이길 수 없었다.[12]
이 교전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중령 브루스 퍼거슨과 캐나다의 중령 제임스 R. 스톤은 각각 수훈 십자 훈장을 받았다.[14][15] 스톤에게는 1944년 이탈리아 올리브 작전에서 처음 받은 DSO에 대한 두 번째 훈장이었다.[16][17]
4. 1. 4. 마량산 전투 (1951년 10월)
코만도 작전 기간 중,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는 전곡 부근 방어선에서 10km 북쪽 마량산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3일간의 공격 작전에서 중공군의 완강한 저항을 격파하고 마량산을 점령하였다.[32][32]미군 제 1군단장이었던 John W. Daniel은 1951년 10월 철원-김화의 주요 보급로를 확보한다는 코만도 작전계획을 구상하였다. 이에 따라 영연방 제 28여단장은 임진강 서안-사미천 동안 사이 마량산 일대 고지를 탈환하는 명령을 하달하였다. 여단 예하의 각 대대는 1951년 10월 3일 새벽 우일선에 오스트레일리아 제3대대를, 중앙일선과 좌일선의 영국군 각각 1개 대대를 전개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우일선에 배치되었던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이른 아침 중공군의 저항없이 199고지를 점령한 후 계속하여 사단의 좌일선 공격대대로서 마량산을 공격하였다. 마량산은 높이 솟아 있고 동남방이 가파른 절벽인데다가 서쪽이 평탄하여 적진의 후방과 연결되어 있었다. 중공군은 8부 능선 주위에 무수한 유개호와 산병호를 구축하고 있었다.
헤셋 중령은 A중대로 하여금 317고지 동남쪽 하단에서 양동공격을 하여 적의 주의를 그 방향으로 유인하고, 그 사이에 B중대가 동쪽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마량산 산기슭과 중간능선까지 진출하게 하였다. 뒤를 바짝 따르던 D중대가 초월 전진하여 목표고지를 돌파하기로 결정하고 C중대를 예비로 확보하였다. A중대가 5일 새벽 3시 30분 동남쪽 능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자 선봉에 있던 B중대가 동쪽으로부터 고지 동쪽능선을 향해 진격하고, 주공인 D중대가 제 10소대를 선두로 그 뒤를 따랐다. 최종 목표고지까지는 두 개의 중간 목표가 있었는데 제 1목표 고지는 199고지 북쪽 1.5km이며, 제2목표인 발디 고지는 그로부터 마량산 쪽으로 500m 거리에 있었다. 10여 분의 공격준비사격 이후 기관총과 전차포의 엄호를 받으며 제 11소대가 공격을 개시하고, 12소대가 이를 초월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결국 이날 16시경 D중대는 제1목표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은 중간목표 2개를 모두 탈취하고 최종목표인 마량산 만을 눈앞에 남겨놓았다. 대대장은 C중대에게 D중대를 초월하여 공격하도록 지시하였다. 예상외로 적의 저항이 경미하여 C중대는 이날 18시에 최종목표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대대장은 대대 지휘소를 마량산으로 추진하고 B중대의 힌지 고지에 대한 공격을 직접 지휘하였다. 아포, 전차포, 박격포를 통해 힌지 고지를 집중공격하였다. B중대는 일선 2개 소대가 좌우로 산개하여 전진하고 그 뒤를 예비소대와 중대본부가 따랐다. 공격소대들은 공격을 개시하여 진지를 점령하고 적의 반격에 대비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 군이 8일 5시 힌지 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자 영국군 대대의 1개 중대가 217고지를 공격하여 거의 적의 저항을 받지 않고 점령하였다. 대대는 이 전투에서 20명이 전사하였고 89명이 부상을 입는 큰 피해를 당했으나 200명의 중공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4. 2. 해군 활동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일본 항복에 따라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6.25 전쟁 발발 직후 즉시 경계 태세에 돌입했다.[21] 로버트 멘지스 총리는 6월 29일 일본 주둔 프리깃함 과 홍콩 주둔 구축함 을 한국에서 유엔 사령부 지휘 하에 둘 것이라고 발표했다.[21] 7월 1일, HMAS ''쇼알헤이븐''은 부산으로 이동하여 미국 탄약 수송선을 호위하는 첫 번째 호주 작전을 시작했고,[21] 7월 27일에는 구축함 도 투입되었다.[21]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은 항공모함, 구축함, 프리깃함 등을 파견하여 해상 봉쇄, 함포 사격, 항공 지원 등 다양한 작전을 수행했다. 1950년 10월 26일 원산 상륙작전 당시, HMAS ''와라문가''는 함포 사격을 지원했다.[21] 1950년 12월 흥남 철수 작전에서 HMAS ''바탄''과 ''와라문가''는 철수를 지원했다.[21]
1951년 10월, 는 3개월간의 임무를 위해 를 대신하여 한국 해역에 도착했다.[21] 시드니는 시 퓨리를 장착한 제805 비행대와 제808 비행대, 파이어플라이를 장착한 제817 비행대로 구성된 두 개의 비행대를 탑재하고, 9대의 항공기 손실과 3명의 조종사 사망을 기록하며 2,700회 이상의 출격 임무를 수행했다.[21]
함대 | 기간 | 활동내용 |
---|---|---|
워라먼가(Warramunga)호 | 1950년 9월 | 인천 상륙 작전 참전. 영국 항공모함 엄호 및 해안포격. 인천 해안에서 함포사격으로 공산군 퇴로 차단[33] |
1950년 12월 | 유엔 기동단대의 일원으로 진남포 철수 엄호작전에 참여[33] | |
머치슨(Murchison)호 | 1951년 7월 | 압록강 입구 및 진남포 연안에서 해상초계 및 해상포격임무 수행.[33] |
1952년 1월 | 한강유역 13개 목표지점에 포격 실시[33] | |
안작(Anzac)호 | 1951년 8월 | 서해안에서 미국의 항공모함 호위하며 해안 경비[33] |
1951년 9월 | 포격작전 가담[33] | |
토브럭(Tobruk)호 | 1951년 10월 | 청진부근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적 화물차 파괴[33] |
콘다민(Condamine)호 | 1952년 8월 | 대연평도 북쪽에 있는 적 대공화기진지와 해안진지 포격. 진남포 해안에서 적 진지에 대한 해안포격 실시[34] |
이후 전쟁에서 RAN 소속 함선 9척이 북한 해상 봉쇄에 참여했다.[21]
4. 3. 공군 활동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1950년 7월 1일부로 공군 참전을 결정했다. 정부는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제77전투비행대대(No.77 RAAF)를 파견하였고, 이들은 미 극동공군 산하 미 제5공군(US Fifth Air Force)에 배속되었다. 제77 비행대대는 유엔군의 일환으로 한국에서 작전에 투입되어, 1950년 7월 2일에 첫 번째 지상 공격 작전을 수행하여 유엔 부대 중 최초로 전투에 참여했다.제77전투비행대대는 전쟁 초기 P-51D 머스탱 전투기를 운용했다. 1950년 7월 1일 파견 후, 함흥 남쪽 연포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해 출격한 미 공군의 B-26 폭격기 편대를 엄호했다.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작전을 전개하는 동안에는 북한군 집결지에 네이팜탄 공격을 가하여 적의 최후공세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 1950년 8월 한 달간 812회 출격하여 북한군 전차 35대, 트럭 182대, 기타 차량 44대, 기관차 4대, 보급 및 연료창고 다수를 파괴했다. 1950년 11월 5일, 박천지구 전투에 무스탕기 편대를 출격시켜 공산군이 점령한 능선에 네이팜탄 공격과 기관총 공격을 가했다.
1951년 4월, 제77 비행대대는 글로스터 미티어 제트 전투기를 재장비하기 위해 일본으로 철수했으며, 7월에 이 새로운 항공기로 작전에 복귀하여 소련 미그-15 조종사들을 상대로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51년 8월 29일, 정주 상공에서 초계 임무를 수행하던 6대의 미그-15 전투기 편대를 발견, 공중전을 개시하여 격퇴했다. 9월 중순에는 안주 상공에서 미그기 15대와 대규모 공중전을 벌여 적 전투기 1대를 격추시켰다. 그러나 미그기는 여전히 메테오보다 훨씬 우세했다. 1951년 12월 1일 순천 인근에서 벌어진 공중전에서 제77비행대대 소속의 글로스터 미티어 제트기 12대가 40~50대의 중국 MiG-15에 공격을 받았다. 미티어는 소련제 MiG에 비해 기동성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호주 조종사들은 한국 전쟁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으며, 3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호주 측은 MiG 10대 이상을 격추했다고 주장했지만, 중국 및 북한 측은 1대만 격추되었다고 밝혔다.
미그-15 전투기로부터 막대한 피해를 입은 후, 제77 비행대대는 1951년 12월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상 공격 임무를 수행했다. 1952년 5월 4일과 8일, 사리원 상공에서 적 미그기 2대를 격추시켰다. 1952년 8월 29일, 전폭기 부대에 배속되어 평양 공습을 감행하고 서해안에서 공산군 부대 집결지와 보급창을 공격했다. 1953년 3월 16일, 원산 남쪽에서 150여 대로 추정되는 공산군 보급차량을 공격하여 파괴하고 적 건물 5동을 완파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결정되며 참전 임무를 종료했다.
제77 비행대대는 1954년 11월 호주로 귀국할 때까지 한국에 주둔하면서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 제30 통신 비행대대, 제491 (정비) 비행대대 및 제391 (기지) 비행대대는 한국의 유엔군 사령부에 배속되어 1950년 10월 제91 (혼성) 비행대대(No. 91 (Composite) Wing RAAF)로 묶였다. 제91 비행대대는 일본 이와쿠니 해병대 항공 기지에 주둔했다.
제77 비행대대는 10월에 유엔군의 북한 진격을 지원하기 위해 한국에 완전히 배치되었지만, 중국 인민지원군의 반격에 대응하여 11월에 부산으로 철수했다.
주요 주둔지
- 대구
- 포항 (1950년 10월 ~ 1950년 11월)
- 연포 비행장, 북한 (1950년 11월 ~ 1950년 12월)
- 부산 동부 (K-9) 비행장 (1950년 12월 ~ 1951년 4월)
- 김포 (1951년 7월 ~ 1954년 3월)
- 군산 (1954년 3월 ~ 1954년 10월)
5. 정전 협정 및 그 이후
1952년 11월 29일, 미국 대통령 당선자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분쟁 종식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여 선거 공약을 이행했다.[22]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화인민공화국 간에 한국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3년여 간의 전쟁은 휴전 상태에 들어갔지만,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은 협정 서명을 거부했다.[22]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휴전이 발효되면서 전선은 대략 38선으로 복귀했다. 휴전 협정 조건에 따라 비무장 지대(DMZ)가 전선을 따라 설정되었으며, 현재 한쪽은 북한군이, 다른 쪽은 한국군, 미국군 및 유엔군이 방어하고 있다.[22]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레일리아군은 4년 동안 군사 감시단으로 한국에 주둔했다.[23] 오스트레일리아는 한국 전쟁 참전을 통해 미국 및 뉴질랜드와의 ANZUS 조약 체결 등 정치적, 안보적 이점을 얻었다.[23]
한국에서 복무한 17,000명의 오스트레일리아군 중 사상자는 1,500명 이상이었으며, 이 중 339명이 사망했다. 1953년 8월 5일에 시작된 빅 스위치 작전을 통해 21명의 오스트레일리아 전쟁 포로가 송환되었다.
6. 오스트레일리아군의 희생과 유산
6.25 전쟁에서 오스트레일리아군은 1,5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그 중 339명이 사망했다.[23] 오스트레일리아군의 헌신과 희생은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매년 4월 24일에는 가평에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참전용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 행사인 '가평전투 기념식'이 열린다.
전쟁이 끝난 후, 호주군은 4년 동안 군사 감시단으로 한국에 주둔했다.[23] 호주는 ANZUS 조약 체결을 통해 정치적, 안보적 이점을 얻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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