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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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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3 항쟁은 1964년 박정희 정부의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에 반대하여 일어난 대규모 시위이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자금 확보 등을 위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며, 3억 달러의 청구권 보상과 평화선 포기를 결정했다. 이에 반발한 재야 세력과 학생들이 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단식 농성을 시작으로 각 대학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6월 3일, 서울 시내 1만 2천 명의 학생들이 가두 시위를 벌였고,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 주동자들을 검거했다. 6·3 항쟁은 한일협정 체결을 막지 못했지만,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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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항쟁
기본 정보
명칭6·3 항쟁
다른 이름한일협상 반대 운동
1964년 6월 조선대학교에서 벌어진 한일기본관계조약 반대 시위
날짜1964년 6월 3일
장소대한민국 전역
원인박정희 정부의 한일협상 시도
목표한일협상 반대
방식시위 행진 및 시민 불복종
결과박정희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및 시위 진압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통한 대한민국-일본 관계 정상화
교전 세력
교전 1대한민국
교전 2시위대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 1 지휘관박정희
교전 2 지휘관중앙 집중화된 지도부 없음
참가 규모
시위 참가자3만 명 이상
피해 규모
체포된 사람1,120명
형사 처벌된 사람348명
관련 정보
관련 문서한일기본조약

2. 배경

1960년대 초,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자금 확보, 미국의 압력, 대북 안보 강화 등을 위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64년, 대한민국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를 위한 비밀 협상을 추진하고 결론을 도출하려 했다.

2. 1. 한일협정 추진 과정

박정희 정부는 비밀리에 한일 교섭을 추진하고 조속히 타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964년 2월, 정부와 여당은 3월 중 대일(對日) 교섭의 기본 방침을 밀고 나가겠다는 결정을 발표하였다.[12] 같은 해 2월 22일, 민주당에서는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에 관한 대안(代案)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권은 일반 여론을 무시한 채 청구권 보상금 3억 달러에 만족하면서 한국 어민들의 생명선인 '평화선'(平和線)을 일본에게 넘겨주기로 작정하고 있었다.[12] 박정희 정부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재야 세력이 총궐기하여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2]

1964년 3월 정부는 여당과 연석회의를 열고(3월 5일) 한일 협상 일정을 발표하였다. 3월 10일부터 농상회담, 12일부터 본회담, 4월에 외상(外相)회담을 개최한다는 것이었다.[12] 3월 6일 민정당, 민주당, 자민당, 국민의당 등 재야의 모든 야당과 사회[12],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12]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 투쟁에 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투쟁위원회 의장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12]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며, "저들의 뜻대로 될 리가 없다."라고 비판하였다.[13][2]

2. 2. 한일협정 반대 움직임

1964년 2월 22일, 민정당은 당론으로 확정된 한일 교섭에 관한 대안(代案)을 발표했다. 박정희 정부일본과의 협상을 서두르자 재야 세력은 구국의 봉화를 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12]

1964년 3월 6일, 민정당, 민주당, 자민당, 국민의당 등 재야의 모든 야당과 사회, 종교, 문화단체 대표 등 저명 인사 200명이 주축이 되어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12] 3월 9일, 서울 종로예식장에서는 각계 정치인, 재야 인사 등이 모여 구국선언을 채택하고 반대 투쟁에 전력으로 총궐기할 것을 다짐했다. 투쟁위원회 의장을 맡은 윤보선은 구국선언문을 낭독하였다.[12] 장택상은 한일회담을 한·일 합방에 비유하며 비판하였다.[13]

3. 전개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 문과대학생들은 일본 국기를 불태우고 김종필을 형상화한 인물을 불태우는 의식을 거행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3] 5월 20일에는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했는데,[3] 이는 박정희 정권이 사용하던 명칭이었기 때문이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은 교정에서 한일회담과 박정희 정권을 성토하는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으며, 이는 6·3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4] 서울대학교 학생회장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했다.[14] 윤보선은 이 선언문을 비장하다고 평가했다.[12]

단식 농성에 참여하는 학생 수는 점점 늘어갔고, 교수들과 시민들은 학생들을 격려하며 먹을 것을 놓고 갔다.[12] 윤보선함석헌도 농성 현장을 방문했는데, 윤보선은 정치적인 목적보다는 자식 같은 학생들을 위로하기 위한 마음이 더 컸다고 회고했다.[14] 단식으로 쓰러진 학생들은 서울대 의대로 옮겨졌고,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은 밤을 새워가며 이들을 보살폈다.[14]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의 단식 농성은 다른 대학교 학생들을 자극하여,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6월 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들이 가두 시위를 주도했고,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했다.[14]

가두행진에 나서는 시위대


경찰의 진압


1964년 6월 2일,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법대, 서울대학교 상대생들이 가두 시위를 주도하자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시위 항쟁이 벌어졌다.[14] 6월 초, 공화당 김종필 의장이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월 3일 정오를 기해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이날 서울 시내 1만 2000명의 학생들은 경찰과 충돌하며 도심으로 진출하였다. 윤보선은 이를 4·19 학생의거 당시를 연상케 했다[14]고 묘사했다. 대학생 7000~8000명이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일대는 혼란에 빠졌고, 경찰은 청와대로 올라가는 통의동 앞에 저지선을 만들었다.[15]

몇몇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박정희, 김종필, 민생고(民生苦) 화형식과 일본 수상 이케다 하야토 화형식, 그리고 오일육(吳一陸) 피고에 대한 모의 재판을 열고 박정권을 성토하였다.[15]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은 6월 3일 오후 4시경 교문을 나섰고, 일부 지친 학생들은 들것에 태워진 채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중앙청 앞에서 경찰의 최루탄 공세에 밀려 학교로 철수했지만, 이 시위는 6·3 항쟁의 시발점[15]이 되었다.

고려대학교 법대 학생회장 김재하를 위원장으로, 부위원장 이경우(법대), 박정훈(정경대), 이명박(상대) 등의 주도하에,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생과 함께 서울 18개 대학 1만 5천여 명 등 총 3만 명가량이 거리로 몰려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3. 1.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단식 농성

1964년 3월 24일, 서울대학교 문과대학생들은 일본 국기를 불태우고 김종필을 형상화한 인물을 불태우는 의식을 거행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3] 5월 20일, 학생들은 재결집하여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했다.[3] 이는 박정희 정권 당시 사용된 명칭이 '민족적 민주주의'였기 때문이다.

5월 30일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은 교정에서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어 한일회담과 박정희 정권을 성토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이는 6·3 항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14] 서울대학교 학생회장 김덕룡은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14] 윤보선서울대학교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12]이라며 예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단식 농성에 참여하는 학생 수는 점점 늘어갔다. 교수들과 시민들은 무저항적인 학생들의 농성 현장에 줄을 이어 찾아와 격려하고 먹을 것을 놓고 갔다.[12] 윤보선함석헌은 함께 농성 현장을 찾아갔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정치적인 목적이라기보다는 자식 같은 학생들의 애처로움을 위로해 주기 위한 마음이 더 컸던 것이라고 회고했다.[14] 단식하다 지쳐 쓰러진 학생들은 들것에 실려 서울대 문리대 앞에 있는 서울대 의대로 옮겨졌다. 의대생과 간호학과 학생들은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단식 학생들을 보살폈다.[14]

3. 2. 다른 대학교 학생들의 참여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의 단식 농성은 다른 대학교 학생들을 자극하였다. 서울 시내 각 대학의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6월 2일 고려대, 서울대 법대, 서울대 상대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데모를 주도하자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곳곳에서 시위 항쟁이 벌어졌다.[14]

3. 3. 가두시위



1964년 6월 2일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법대, 서울대학교 상대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데모를 주도하자 서울의 각 대학생들이 이에 호응하여 곳곳에서 시위 항쟁이 벌어졌다.[14] 6월공화당 김종필 의장이 한일국교정상화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자, 6월 3일 정오를 기해 학생들은 거리 시위를 벌였다. 이날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온 서울 시내 1만 2000명의 학생들은 도처에서 경찰과 충돌, 유혈극을 벌이면서 도심으로 진출하였다. 윤보선은 이를 마치 4·19 학생의거 당시를 연상케 했다[14]고 묘사하였다. 대학생 7000~8000명이 중앙청 앞으로 몰려들면서 세종로 일대는 무질서[14]와 혼란에 빠졌다. 중앙청 앞 바리케이드는 이미 무너졌고, 경찰은 청와대로 올라가는 통의동 앞에 저지선을 만들어 놓았다.[15]

몇몇 대학생들은 대학에서 박정희, 김종필, 민생고(民生苦) 화형식과 일본 수상 이케다 하야토 화형식, 그리고 오일육(吳一陸) 피고에 대한 모의 재판을 열고 박정권을 성토하였다.[15]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은 6월 3일 오후 4시경 교문을 나섰다. 일부 학생들은 도보 이동 중 지쳤고, 지친 학생들은 들것에 태우고 시위에 돌입했는데 맨 앞의 들것에는 송철원이 누워 있었다. 이들은 데모 학생들과 연도(沿道)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중앙청 앞에 도착, 데모대의 맨 앞에 섰다가 경찰의 최루탄 공세에 밀려 학교로 철수하고 말았다.[15] 이 시위는 6·3 항쟁을 일으킨 시위의 시발점[15]이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이던 법대 학생회장 김재하를 위원장으로, 부위원장 이경우(법대), 박정훈(정경대), 이명박(상대) 등의 주도하에,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생과 함께 서울 18개 대학 1만 5천여 명 등 총 3만 명가량이 거리로 몰려나와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기까지 했다.

4. 결과

6.3 항쟁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체결 강행에 반대하여 일어난 시위였다. 비록 박정희 정권은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언론을 탄압하며 시위를 진압했지만, 이 항쟁은 이후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4. 1. 비상계엄령 선포와 탄압

1964년 6월 3일,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당일 밤 9시 40분에 선포하기로 한 비상계엄령을 오후 8시로 소급하여 서울시 전역에 선포하였다.[16]

박정희는 방송담화를 통해 6.3 시위를 "야당 정치인들의 선동"이라며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에 매진해 달라"고 하였다.[15] 비상계엄령 선포 이후, 시위 주동인물과 배후세력으로 지목된 학생, 정치인, 언론인 등 1,120명이 검거되었고,[16] 이명박, 이재오, 손학규, 김덕룡, 현승일, 이경우 등 348명은 내란 및 소요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6개월간 복역하였다.[16]

4. 2. 언론 탄압

1964년 6월 6일, 계엄령 선포 3일 뒤, 무장 군인들이 심야에 학생들에게 호의적이던 동아일보사에 침입하여 위협, 공갈한 사건이 발생했다.[15][17] 당시 동아일보는 친민주당, 친신민당계 언론이었다. 윤보선은 이를 두고 '언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요, 탄압이며 나아가 언론 그 자체를 말살하려는 독재의 극치'라고 비난하였다.[17]

4. 3. 계엄령 해제와 한일협정 체결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 사본

5. 한일 기본 조약의 주요 내용과 논란



한일 기본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대한제국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2조)[10]
  •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확인한다." (제2조)[10]


"이미 무효"에 해당하는 영어 표현이 "already null and void"로 표현되어 있어, 양국 간의 해석 차이가 발생했다. 한국은 병합 자체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은 병합 조약은 합법적이었지만 해방 시점부터 무효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제3조와 제4조는 양국 간의 외교 관계를 인정한다.[10]

6. 평가 및 영향

강원용 목사는 미국박정희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6·3 항쟁을 더욱 부채질하고 확산시켰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18]

7. 주요 참여 인물


  • 윤보선: 6.3 항쟁 당시 학생들을 격려하고 지지하였다.[14] 서울대 문리과 학생회장 김덕룡의 선언문을 비장한 선언문[12]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 장택상: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의 일원으로서 한일협상 반대 또는 조건 수정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 김덕룡: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장으로, 6.3 항쟁의 직접적 계기가 된 자유쟁취궐기대회에서 "오늘의 단식투쟁은 내일의 피의 투쟁이 될 지도 모른다"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14]
  • 함석헌: 윤보선과 함께 학생들의 농성 현장을 방문하여 격려하였다.[14]
  • 김영삼
  • 장준하
  • 이명박
  • 이재오
  • 손학규

참조

[1] 웹사이트 《한국 민주화 운동사》(The History of Democratization Movement in Korea), P.125 https://web.archive.[...] 2011-11-21
[2] 서적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Days of Landsome choice:Yun Posun memoir) The Dong-a Ilbo
[3] 웹사이트 6.3한일회담반대운동(6.3 resistance movement against Korea-Japan negotiations) https://web.archive.[...] 2019-05-27
[4] 서적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Days of Landsome choice:Yun Posun memoir) The Dong-a Ilbo
[5] 서적 한일회담반대운동(movement against Korea-Japan negotiations)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6] 서적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Days of landsome choice:Yun Posun memoir) The Dong-a Ilbo
[7] 웹사이트 <'고대 데모사건 개요' 속 상대생 이명박(Overview of ' The demo case ' College of Administration student, the Lee Myung-bak)> http://news.naver.co[...]
[8] 웹사이트 사라지는 위수령, 역사적 전환점 때 세 번 발령됐다(Disappearing the Garrison act, It's been issued three times during the historic turning point) http://www.hani.co.k[...] 2018-07-27
[9] 웹사이트 "굴욕적 피해 보상" 비판 받았지만...日과 국교정상화 후 고도성장(Though criticized for "deplorable damage compensation" ... high growth after diplomatic normalization with Japan) https://www.hankyung[...] 2019-05-03
[10] 서적 냉전과 한일관계(Cold War and Korea-Japan relations) 국제관계연구회(International relations researcher)
[11] 뉴스 경향신문 1964년 6월4일자 기사 경향신문 1964-06-04
[12] 서적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3] 서적 대한민국 건국과 나:창랑 장택상 자서전 창랑장택상기념사업회
[14] 서적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5] 서적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6] 뉴스 '고대 데모사건 개요' 속 상대생 이명박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7-12-20
[17] 서적 외로운 선택의 나날들:윤보선회고록 동아일보사
[18] 웹사이트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③ http://www.donga.com[...] 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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