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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 파르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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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G 파르벤은 1925년 독일의 6개 화학 회사가 합병하여 설립된 기업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정권과 협력하여 전쟁 수행을 지원했다. 이 회사는 합성 염료, 의약품, 독가스 등을 생산했으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공장을 건설하고 강제 노동자를 착취하는 등 전쟁 범죄에 깊이 관여했다. 전쟁 후 연합군에 의해 해체되었으며, 관련 임원들이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현재는 청산 절차를 거치며, 기업 윤리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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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 파르벤 - [회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I.G. 파르벤 로고
I.G. 파르벤 로고
IG 파르벤 빌딩
IG 파르벤 빌딩, 프랑크푸르트, 1931년 완공, 1945년 연합군에 의해 최고 연합군 사령부 본부로 압수됨. 2001년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의 일부가 됨.
형태주식회사
설립일1925년 12월 2일
해산일2012년 10월 31일 (청산 완료)
설립자칼 보슈
칼 뒤스베르크
에드문트 테어 메어
헤르만 슈미츠
아르투어 폰 바인베르크
본사 위치프랑크푸르트, 독일
산업화학
고용 인원1943년 330,000명 (강제 노동 포함)
이전 회사아그파
바스프
바이엘

회흐스트
바일러-테어 메어
이후 회사아그파
바스프
바이엘
사노피 (이전 회흐스트)
추가 정보

2. 설립 배경

20세기 초, 독일 화학 산업은 합성 염료 세계 시장을 주도했으며, 특히 합성 염료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BASF, 바이엘, 호이스트는 수백 가지의 다양한 염료를 생산했고, 아그파, 카셀라, 칼레, 그리스하임-일렉트론, 바일러-테르메르 등은 고품질 특수 염료에 집중했다.

독일 기업들은 시장 점유율 확보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카르텔 형성이 시도되기도 했다.[8] 1903년 바이엘(Bayer) 회장 칼 두이스베르크(Carl Duisberg)는 미국을 여행하며 스탠더드 오일, 미국강철(U.S. Steel) 등 대형 미국 트러스트들을 방문한 후,[9] 1904년 독일 염료 및 제약 회사들의 합병을 제안했다.[8]

칼 두이스베르크(Carl Duisberg)는 1904년 독일의 염료 및 제약 회사 합병을 주장했다.


호이스트와 몇몇 제약 회사는 합류를 거부했다. 대신 호이스트와 카셀라는 1904년 상호 지분 참여를 기반으로 동맹을 맺었다. 이에 BASF 회장 하인리히 폰 브룬크와 칼 두이스베르크(Carl Duisberg)는 협상을 가속화했다. 1904년 10월 바이엘, BASF, 아그파 간의 '인테레센-게마인샤프트'(Interessengemeinschaft, 이익 공동체)가 결성되었는데, 이는 '드라이분트'(Dreibund) 또는 소규모 IG로도 알려졌다.

2. 1. 초기 독일 화학 산업의 발전

20세기 초, 독일 화학 산업은 합성 염료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BASF, 바이엘, 호이스트 세 개의 주요 업체가 수백 가지의 다양한 염료를 생산했다.[7] 아그파, 카셀라, 칼레, 그리스하임-일렉트론, 바일러-테르메르 등 다섯 개의 소규모 업체는 고품질 특수 염료에 집중했다. 1913년, 이 여덟 개 업체는 세계 염료 공급량의 거의 90%를 생산하고 생산량의 약 80%를 해외로 판매했다.[7]

세 개의 주요 업체는 필수 원료 생산으로 상류 산업에 진출했고, 의약품, 사진 필름, 농약, 전기화학 등 다른 화학 분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다른 산업과는 달리, 창립자와 그들의 가족은 독일 주요 화학 회사의 최고 의사 결정에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는데, 이는 전문적인 급여 관리자들의 손에 있었다.[7] 이러한 독특한 상황 때문에 경제 역사가인 알프레드 D. 챈들러 주니어(Alfred D. Chandler Jr.)는 독일 염료 회사들을 "세계 최초의 진정한 관리형 산업 기업"이라고 불렀다.[7]

합성 염료 및 기타 화학 제품의 세계 시장을 독일 산업이 지배하면서, 독일 기업들은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카르텔이 시도되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몇 년 동안만 지속되었다. 이익 공유 또는 '인테레센-게마인샤프트'(IG, 즉 "이익 공동체"라는 뜻)의 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8]

2. 2. 경쟁 심화와 합병 논의

20세기 초, 독일 화학 산업은 합성 염료 세계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BASF, 바이엘(Bayer), 호이스트(Hoechst AG) 세 개의 주요 업체가 다양한 염료를 생산했고, 아그파(Agfa-Gevaert), 카셀라(Cassella Farbwerke Mainkur Aktiengesellschaft) 등 소규모 업체들은 고품질 특수 염료에 집중했다. 1913년, 이 여덟 개 업체는 세계 염료 공급량의 거의 90%를 생산하고 생산량의 약 80%를 해외로 판매했다.[7]

독일 기업들은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으며, 카르텔 형성이 시도되기도 했다.[8] 1903년 바이엘(Bayer) 회장 칼 두이스베르크(Carl Duisberg)는 미국을 여행하며 스탠더드 오일, 미국강철(U.S. Steel) 등 대형 미국 트러스트들을 방문한 후,[9] 1904년 독일 염료 및 제약 회사들의 합병을 제안했다.[8]

호이스트(Hoechst)와 몇몇 제약 회사는 합류를 거부했다. 대신 호이스트와 카셀라는 1904년 상호 지분 참여를 기반으로 동맹을 맺었다. 이에 BASF 회장 하인리히 폰 브룬크와 두이스베르크는 협상을 가속화했다. 1904년 10월 바이엘, BASF, 아그파 간의 '인테레센-게마인샤프트'(Interessengemeinschaft, 이익 공동체)가 결성되었는데, 이는 '드라이분트'(Dreibund) 또는 소규모 IG로도 알려졌다. 세 회사의 이익은 BASF와 바이엘(Bayer)이 각각 43%, 아그파(Agfa)가 14%씩 공유했다.[10] 두 동맹은 BASF와 호이스트 간의 호이만-플레거 인디고 합성 특허 공동 활용 협정을 통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다.[11]

'드라이분트' 내에서 바이엘(Bayer)과 BASF는 염료에 집중한 반면, 아그파(Agfa)는 사진 필름에 점점 더 집중했다. 생산 및 회계 분야의 기술 직원 간에는 협력이 있었지만, 다른 분야에서는 협력이 거의 없었다. 생산 또는 유통 시설이 통합되지 않았고, 상업 직원도 협력하지 않았다. 1908년 호이스트와 카셀라는 칼레(Chemische Fabrik Kalle)의 지분 88%를 인수했다. 호이스트, 카셀라, 칼레는 상호 지분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프랑크푸르트 지역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드라이분트'보다 더 성공적으로 협력할 수 있었지만, 생산 시설을 합리화하거나 통합하지도 않았다.

2. 3. 드라이분트(Dreibund) 결성

1904년, 바이엘, BASF, 아그파(Agfa)는 '드라이분트'라는 이익 공동체(IG, Interessen-Gemeinschaft)를 결성했다.[55] 호이스트와 카셀라는 별도의 동맹을 맺었지만, 드라이분트는 초기 협력 단계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3. IG 파르벤의 설립과 성장

1904년, 바덴 아닐린 운트 소다 인더스트리(BASF), 프리드리히 바이엘 염료회사(바이엘), 아닐린 파브리카치온(아그파) 3개사는 삼자 동맹을 결성하여 동맹 관계를 형성하였다.[55] 1916년에는 삼자 동맹에 헵스트(화학 제조업체), 그리스하임-엘렉트론(Chemische Fabrik Griesheim-Elektron) 등을 포함한 6개사가 「독일 염료 타르 이익 공동체」(Interessengemeinschaft der deutschen Teerfarbenfabriken)를 형성하여 독일 화학·염료 업계를 지배하게 되었다.[55]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특허가 징발되어 독일 국내 화학 공업은 큰 피해를 입었다.[52] 이에 대처하기 위해 1925년 이익 공동체 6개사가 트러스트를 형성하였다.[56] 같은 해 12월, ヴァイラー・テア・メール(Dr. E. ter Meer & Cie)사 등 2개사가 추가로 참가, 로이나베르케(Leunawerke), 케미쉐 파브리크 칼레(Chemische Fabrik Kalle), 카셀라 염료 공업(Cassella Farbwerke Mainkur)을 포함한 9개 대기업이 합병하여 IG 파르벤 인더스트리(「염료 산업 이익 공동체」)가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창립 직후 IG 파르베의 이사회(1926년). 앞쪽 왼쪽이 사장 칼 보슈, 그 오른쪽이 감사역 회장 카를 뒤스베르크.


IG 파르벤은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본사를 설치했으며, 자본금은 11억 라이히스마르크였다. 카를 뒤스베르크는 독일 공업 연맹 회장을 맡아, 재계의 대세와 달리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56] 하팍로이드(Hapag)와 친밀한 M·M·발부르크&CO(막스 워버그(Max Warburg))가 감사역이 되었다.[55]

IG 파르벤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부상하자, 1932년경부터 이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SS 전국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단지의 일부인 모노비츠 강제수용소 근처에 IG 파르벤 부나-N(합성고무) 공장 건설을 지원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IG 파르벤은 나치당과 재계의 연대를 위해 결성된 케플러 그룹(친위대 전국 지도자 우호회(Freundeskreis Reichsführer-SS)의 전신) 창설 멤버로 참가했다.[56] 4개년 계획에서 실질적인 주도자 역할을 한 카를 크라우히는 IG 파르벤의 중역이었다.[57]

3. 1. 주요 주주와 경영진

1925년 12월 발행된 IG 파르벤인더슈트리 AG 주식


IG 파르벤은 1925년 12월 BASF(27.4%), 바이엘(27.4%), 호이스트(카셀라 및 케미셰 파브리크 칼레 포함, 27.4%), 아그파(9%), 케미셰 파브리크 그리스하임-엘렉트론(6.9%), 그리고 케미셰 파브리크 포름. 바일러 테르 메르(1.9%)의 6개 회사가 합병하여 설립되었다.[12]

감독 이사회 구성원들은 "신들의 의회"(Rat der Götter)라고 불렸다.[13] 이 명칭은 동독 영화 "신들의 의회"(1950)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다.

1925년, 이익 공동체 6개사에 의해 BASF의 칼 보슈(Carl Bosch)를 사장으로, 바이엘의 카를 두이스베르크(Carl Duisberg)를 감사역으로 하는 트러스트가 형성되었다.[56] 12월에는 ヴァイラー・テア・メール(Dr. E. ter Meer & Cie)사 등 2개사가 참가하여, 로이나베르케(Leunawerke), 케미쉐 파브리크 칼레(Chemische Fabrik Kalle), 카셀라 염료 공업(Cassella Farbwerke Mainkur)을 포함한 9개 대기업이 합동한 IG 파르벤 인더스트리(「염료 산업 이익 공동체」)가 탄생했다.

카를 크라우히(Carl Krauch)는 IG 파르벤의 중역이었지만 후에 감사역 회장이 되어 독일 경제 당국에서도 요직을 역임했고, 1948년 노예화 죄로 징역 6년을 선고받았지만 2년 만에 석방되어 휠스의 감사역이 되었다.[57]

3. 2. 사업 확장과 국제 협력

IG 파르벤은 염료, 합성 피혁, 무기 화학 제품, 질소, 사진 제품 등 다양한 화학 제품을 생산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스탠더드 오일과의 제휴를 통해 인조 석유 개발에도 착수했다(합작 회사 야스코).[56] 세계 대공황으로 수출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미국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IG 파르벤의 국제 경쟁력은 뛰어났다.[56]

4. 나치 정권과의 협력

IG 파르벤은 나치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급속도로 성장했다. 특히 치클론 B를 생산하여 제2차 세계 대전홀로코스트에 사용되는 등 나치 정권의 전쟁 범죄에 가담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IG 파르벤의 자회사인 데게슈(Deutsche Gesellschaft für Schädlingsbekämpfung MbH, 독일 해충 방제 회사)가 공급한 시안화수소 기반 살충제인 치클론 B가 유럽의 가스실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 대부분 유대인들을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II와 마이다네크 절멸 수용소가 포함된다.[20] 데게슈는 처음에 티푸스를 옮기는 이가 득실거리는 옷을 소독하기 위해 아우슈비츠에 가스를 공급했다. 이후 데게슈는 가스를 섭씨 30도 이상으로 가열하여 1시간 이내에 이를 죽이는 작은 가스실을 건설할 것을 권장했다. 이 가스는 1941년 9월 아우슈비츠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사용되었다.

피터 헤이스는 아우슈비츠가 주문한 치클론 B의 증가를 보여주는 다음 표를 편집했다. 치클론 B 1톤은 약 312,500명을 죽이기에 충분했다.

치클론 B 생산 및 판매, 1938–1945
1938193919401941194219431944
판매 (마르크 천 단위)257337448366506544
총 데게슈 수익률303857483952
생산 (쇼트톤 단위)160180242194321411231
아우슈비츠가 주문한 양 (쇼트톤 단위)8.213.42.2*
아우슈비츠가 주문한 생산량 비율2.53.31.0*
마우트하우젠이 주문한 양
(절멸 수용소 아님)
0.91.5



전후 IG 파르벤 임원들은 가스 살해에 대해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여러 증언과 정황 증거들은 이들이 가스 살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IG 파르벤 이사회 서기였던 에른스트 스트러스는 회사의 아우슈비츠 수석 엔지니어가 가스 살해에 대해 자신에게 말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아우슈비츠 지휘관 루돌프 회스는 IG 파르벤 아우슈비츠 공장의 기술 관리자 발터 뒤르펠트가 유대인 학살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아우슈비츠 III에 수감되었던 영국 포로 찰스 카워드는 IG 파르벤 재판에서 아우슈비츠 사람들이 가스로 죽임을 당하고 불에 타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알고 있었으며, 파르벤 사람들도 모두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1948년 IG 파르벤 재판에서 빌헬름 루돌프 만, 하인리히 뢰어라인 및 카를 부르스터(IG 파르벤과 데게슈 모두의 이사)는 대량 학살 목적으로 치클론 B를 공급했다는 혐의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뒤르펠트는 8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감형되었다.

4. 1. 정치적 유착

IG 파르벤 경영진 일부는 나치당을 지지했으며, 비밀리에 정치 자금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들은 하인리히 힘러의 친위대 전국지도자 우호회인 '케플러 그룹' 창설 멤버로 참여하는 등 나치와의 관계를 강화했다.[30][32]

4. 2. 아리아화와 유대인 직원 해고

1930년대 IG 파르벤은 나치의 아리아화 정책에 따라 유대인 직원들을 해고하고 이사회에서 유대인 구성원들을 축출했다.[58]

4. 3. 전쟁 수행 지원

IG 파르벤은 석탄 액화 공정을 통해 합성 연료를 생산하여 독일 국방군의 작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28] 또한 신경 작용제 사린 개발 등 군사적 목적의 연구 개발에도 참여했다.[28]

5. 전쟁 범죄와 강제 노동

IG 파르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 정권과 협력하여 심각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특히,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동원하여 노동력을 착취하고, 독가스 생산에 관여한 사실이 밝혀졌다.[50]

IG 파르벤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여러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 이들은 가혹한 환경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IG 파르벤의 자회사였던 데게슈(Degesch)는 치클론 B를 생산하여 나치의 대량 학살에 사용되는 가스실에 공급했다.

5. 1.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와의 관계

IG 파르벤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인근에 모노비츠 부나 공장을 건설하고, 수용소 수감자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했다.[50] IG 파르벤의 자회사 데게슈(Degesch)는 가스실에서 사용된 독가스 치클론 B를 공급했다.

5. 2. 의학 실험

I.G. Farbende의 자회사인 바이엘 직원들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마우트하우젠 강제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비윤리적인 의학 실험을 실시했다.[58],[59],[60],[61],[62],[63] 실험 대상자들은 다양한 질병에 고의로 감염되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종종 영구적인 장애, 기형, 또는 쇠약을 겪었다. 이 실험으로 인해 많은 수감자들이 심각한 부작용을 겪거나 사망했다.

6. 전후 해체와 청산

1947년 연합국은 IG 파르벤 임직원 23명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했고, 1948년 카를 크라우흐 등 13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IG 파르벤 재판).[58] 최고형은 징역 8년이었고,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은 없었으며, 모두 형기 만료 전에 석방되었다.[58] 이는 독일 산업계를 공격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58]

연합군 군정기 IG 파르벤의 국내 공장 처우는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 각 점령 지역에 맡겨졌다. 헨리 모겐소 미국 재무장관 등은 IG 파르벤의 완전 해체를 주장했지만, 독일 산업 재건을 추진하던 국무부와 국방부의 반대에 부딪혔다.[57] 결국 IG 파르벤 자체는 해체되었지만, 그 해체는 독일인 전문가 위원회에 의해 경제적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방침이 정해졌다.[57] 1948년 8월 5일, 영미 점령 지역 합동 관리 이사회 산하에 IG 파르벤 합동 관리국(BIFCO)과 합동 점령 지역 IG 파르벤 분산 위원회(FARDIP)가 설치되었다. 관리국은 연합국 관리 기구의 일부로서 군정 직원으로 구성되었고, 위원회는 관리국의 감독 하에 독일인 전문가로 구성될 예정이었다. 위원 인선을 위해 8월 하순부터 9월 상순까지 여러 차례 독일 측 회합이 열렸으며, 바이어의 울리히 하버란트 등이 참석했다.[68] 관리국에 제출된 위원 후보 명단에는 독일은행 출신 전 IG 파르벤 감사역 헤르만 요제프 아프스, 전 AEG 이사회 회장 헤르만 뷰히어 등이 있었으나,[69] 관리국은 아프스 등을 기피하고 12월 뷰히어를 필두로 위원을 결정했다.[70]

1951년 IG 파르벤은 공식 해산되었으나, 이는 1940년의 재조직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71] 소련 점령 지역(이후 동독)의 공장은 인민공사로 개편되거나 전쟁 배상으로 징발되었고, 프랑스도 징발 등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는 1952년 바이어, 호이스트, BASF, 아그파 등 12개사로 분할되었지만, 곧 바이엘, 호이스트, BASF 3개사에 흡수되었다.[58] IG 파르벤 본체의 업무는 IG 파르벤 청산 회사로 이관되었다.[58] 전쟁 중 배상 문제는 후계 회사인 바이엘, 호이스트, BASF 3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3사는 자신들이 IG 파르벤의 후계 회사가 아니라 신규 기업이므로 배상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며 소송에 응하지 않았다. 이들 3사는 한국 특수로 이익을 얻고, 이후 독일은행, 코메르츠방크, 드레스드너 방크를 주요 은행으로 삼아 합리화와 배당을 실현하며 성장했다.[71]

6. 1. 연합군의 압류와 분할

1945년, 연합군은 IG 파르벤의 재산을 압류하고 회사를 해체하기 위한 절차를 시작했다.[68] 서방 연합국 점령 지역에서는 탈나치화 정책이 진전되면서, 회사를 원래 구성 회사들로 분할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68]

연합군 군정기에는 IG 파르벤의 국내 공장 처우가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 각 관할에 맡겨졌다. 미국의 헨리 모겐소 재무장관 등은 IG 파르벤의 완전 해체를 주장했지만, 독일 산업을 재건하려는 국무부와 국방부의 반대에 부딪혔다.[69] 결과적으로 IG 파르벤 자체는 해체되었지만, 그 해체는 독일인 전문가 위원회에 의해 경제적 규범에 따라 이루어진다는 방침이 정해졌다.[69]

1948년 8월 5일, 영미 점령 지역의 합동 관리 이사회 밑에 IG 파르벤 합동 관리국(Bipartie I.G. Farben Control Office, BIFCO)과 합동 점령 지역 IG 파르벤 분산 위원회(Bizonal I.G. Farben Dispersal Panel, FARDIP)가 설치되었다.[70] 관리국은 연합국 관리 기구의 일부로 군정 직원으로 구성되었고, 위원회는 관리국의 감독 아래에 독일인 전문가로 구성될 예정이었다.[70] 위원 후보 명단에는 독일은행 출신의 전 IG 파르벤 감사역 헤르만 요제프 아프스 등이 있었으나, 관리국은 이들을 기피하고 헤르만 뷰히어를 필두로 위원을 결정했다.[70]

1947년, 연합국은 IG 파르벤 임직원 23명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했고, 1948년 카를 크라우흐를 비롯한 13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IG 파르벤 재판).[58] 최고형은 징역 8년이었으며,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모두 형기 만료 전에 석방되었다.[58] 이는 독일 산업계를 공격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을 해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58]

1951년, IG 파르벤은 공식적으로 해산했다. 그러나 이는 IG 파르벤이 1940년에 결정한 재조직 계획에 기초한 내용이었다.[71] 소련 점령 지역(후의 동독)의 공장은 인민공사로 개편되거나 전쟁 배상으로 징발되었다. 프랑스도 징발 등의 엄격한 조치를 취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는 1952년 바이엘, 호이스트, BASF, 아그파 등 12개사로 분할되었지만, 곧 바이엘, 호이스트, BASF 3개사에 의해 흡수되었다.[58] IG 파르벤 본체의 업무는 IG 파르벤 청산 회사에 이관되었다.[58]

비판적인 주주들은 전쟁 중의 배상은 후계 회사인 바이엘, 호이스트, BASF 3개사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3개사는 IG 파르벤의 후계 회사가 아니라 신규 기업이므로 배상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며,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에는 응하지 않고 있다.[58] 3개사는 한국 전쟁 특수로 이익을 얻고, 그 후에는 독일은행 외에 코메르츠방크, 드레스드너 방크를 주요 은행으로 삼아 합리화와 배당을 실현하고, 미국 독점 자본의 계산으로 전쟁 전보다 뛰어난 성장을 이룩했다.[71]

6. 2. IG 파르벤 재판

1947년, 연합국은 IG 파르벤의 이사 23명을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이 재판은 IG 파르벤 재판으로 불린다. 1948년, 카를 크라우흐(Carl Krauch)를 포함한 13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68] 최고형은 징역 8년이었고,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은 없었으며, 대부분 가벼운 형량을 받고 형기 만료 전에 석방되었다.[68] 이는 독일 산업계를 공격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해가 된다는 판단 때문이었다.[68]

재판 이후, IG 파르벤의 해체는 독일인 전문가 위원회에 의해 경제적 규범에 따라 이루어졌다.[69] 1951년, IG 파르벤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나, 이는 1940년에 결정된 재조직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71] 1952년, Bayer, Hoechst, BASF, Agfa 등 12개사로 분할되었지만, 곧 바이엘, 훽스트, BASF 3개사에 흡수되었다.[68] 이 3개사는 한국 특수로 이익을 얻고, 이후 독일의 주요 은행들과 연계하여 성장했다.[71]

6. 3. 청산 과정과 논란

1951년, IG 파르벤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1952년에 청산이 시작되었다. IG 파르벤은 바이엘(Bayer), 회히스트(Hoechst), BASF, 아그파(Agfa) 등 12개사로 분할되었지만, 곧 바이엘, 회히스트, BASF 3개사에 흡수되었다.[71] IG 파르벤 본체의 업무는 IG 파르벤 청산 회사에 이관되었다.[71]

전쟁 중 강제 노동에 대한 배상 문제는 후계 회사인 바이엘, 회히스트, BASF 3개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3개사는 자신들이 IG 파르벤의 후계 회사가 아니라 신규 기업이므로 배상 의무가 없다고 주장하며 소송에 응하지 않았다.[71]

IG 파르벤의 청산 과정에서 GAF 자산을 둘러싼 미국과 인터한델(Interhandel) 간의 법적 분쟁이 있었다. 1948년 인터한델은 GAF 자산 반환 소송을 제기했지만, 미국은 이를 적성 자산으로 간주하여 반환을 거부했다.[72] 1963년 로버트 F. 케네디(Robert F. Kennedy)와 인터한델 간의 협상을 통해 화해안에 합의, 1965년 GAF 주식이 매각되어 미국 정부와 인터한델이 매각 대금을 나누었다.[75][76]

1982년 IG 파르벤 청산 회사는 인터한델 자산을 목적으로 UBS(UBS AG)를 고소했지만, 1988년 패소했다.[77] 2004년, 청산 회사는 파산 신청을 했다.[80]

7. IG 파르벤과 한국

IG 파르벤은 일제강점기 한국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으나,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에는 해당 내용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지 않다.

8. IG 파르벤의 유산과 현재적 의미

IG 파르벤은 기업 윤리와 사회적 책임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나치 정권과의 협력과 전쟁 범죄는 기업이 정치 권력과 결탁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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