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KK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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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YKK는 1991년 자민당 내 다케시타 노보루 파벌에 반발하여 가토 고이치, 야마자키 다쿠,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결성한 동맹 관계를 의미한다. 이들은 1972년 총선 동기로 친분이 있었으나, 파벌이 달라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 YKK는 정책 집단 결성, 보보 연합 구상 모색 등 자민당 내 정치 역학에 영향을 미쳤으며, 가토의 난, 고이즈미 내각 출범 등 정치적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009년 고이즈미의 정계 은퇴와 함께 YKK는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멤버 간의 관계는 우정과 갈등이 공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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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KK (정치) | |
|---|---|
| 기본 정보 | |
![]() | |
| 결성 | 1995년 |
| 해소 | 2000년대 초반 |
| 활동 기간 | 5년 |
| 주요 인물 | 야마사키 다쿠 가토 고이치 고이즈미 준이치로 |
| 목표 | |
| 목적 | 자유민주당의 개혁 정치 자금 규제 강화 정책 중심의 정치 |
| 배경 | |
| 배경 | 정치 개혁 열망 자유민주당 내 파벌 정치의 폐해 극복 새로운 정치 세력에 대한 국민적 기대 |
| 영향 | |
| 영향 |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탄생에 기여 자유민주당 개혁의 부분적 성공 일본 정치의 변화에 대한 기대 고조 |
| 관련 인물 | |
| 관련 인물 | 무토 가분 가메이 시즈카 미야자와 기이치 |
| 기타 | |
| YKK 명칭 유래 | 주요 인물 이니셜 (Yamasaki, Kato, Koizumi) |
2. 역사적 배경
1991년, 당시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이었던 다케시타파(게이세이회)의 영향력에 맞서기 위해 가토 고이치가 1972년 중의원 동기인 야마자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그룹 결성을 제안하면서 YKK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세 사람은 국회 의석이 가까워 친분을 쌓았지만, 각각 오히라 마사요시 파벌(가토), 나카소네 야스히로 파벌(야마자키), 후쿠다 다케오 파벌(고이즈미)에 속해 있어 정치적으로는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YKK는 이후 자민당 내 주요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며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2. 1. YKK의 등장 (1991년)
1991년, 당시 자민당 내 최대 파벌로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다케시타파(게이세이회)에 대한 반발로 가토 고이치가 의원 동기인 야마자키 타쿠와 고이즈미 준이치로에게 그룹 결성을 제안한 것이 YKK의 시작이었다.세 사람은 1972년 총선거에서 나란히 처음 당선된 동기 그룹으로, 국회 의석이 서로 이웃하여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야마자키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파벌, 가토는 오히라 마사요시 파벌, 고이즈미는 후쿠다 다케오 파벌에 속해 있었기에 서로 다른 정치적 배경을 가진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다.
한때 나카무라 기시로를 포함하여 NYKK로 불린 적도 있었지만, 1994년 나카무라가 알선 수뢰 혐의로 체포되면서 이들의 관계는 정리되고 YKK 3인 체제가 확립되었다. 같은 해 YKK는 정책 집단인 '그룹 신세기'를 창설하여 활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1995년 5월에는 당시 신진당 소속이던 후나다 하지메 등과 함께 보보 연합 구상을 모색하며 '총리 공선제와 총리의 자질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이들은 각자 파벌의 주류에 편입되기 전까지 총리 공선제 도입을 주장했다.
하시모토 내각 시기에는 모리 요시로를 더해 MYKK, 여기에 YKK와 가까운 관계였던 다카무라 마사히코까지 포함하여 MY3K로 불리기도 했다. 각 파벌 내에서 유력 정치인으로 부상하면서 점차 파벌 수장이나 간부들로부터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 동안 YKK는 일관되게 재정 재건을 강력히 주장하며 자민당 내의 정치 역학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부상했다.
2. 2. 가토의 난 (2000년) 전후
YKK 내에서는 야마자키 타쿠와 가토 고이치의 사이가 특히 친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시모토 내각 시절 가토가 간사장, 야마사키가 정무조사회장을 맡으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보다는 이 두 사람이 먼저 차기 총재 후보로 부상했다. 1998년 가토는 자신의 파벌(고치카이) 회장직을 계승했고, 이듬해인 1999년 야마사키는 독자적인 파벌을 창설했다. 같은 해 두 사람은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함께 출마하여 당시 총재였던 오부치 게이조에게 도전하며 '포스트 오부치'의 유력 주자로 떠올랐다. 반면 고이즈미는 1995년과 1998년 두 차례 총재 선거에 나섰지만, 이는 소속 파벌인 미쓰즈카파가 사실상 중립을 지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으로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같은 파벌 내에서는 모리 요시로가 유력한 총재 후보로 여겨졌기에 고이즈미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2000년 가토의 난이 발생하자, 고이즈미는 가토가 내각 불신임안에 찬성할 것이라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흘리면서 주류파와 함께 이를 진압하는 데 가담했다. 이 사건은 YKK의 결속력이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실제로 고이즈미는 2000년 12월 "YKK는 우정과 타산의 이중 구조"라고 발언하여 주목을 받았다.[5]
가토의 난 이후 YKK 멤버들의 관계는 변화를 맞이했다. 2001년 고이즈미가 세 번째 총재 선거에 출마하자 가토는 그를 지지했지만, 고이즈미 당선 후에도 입각은 하지 않았다.[6] 이후 가토는 고이즈미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도 점차 비판적인 입장으로 돌아섰고, 2005년 1월에는 "YKK는 실질적으로 종식했다"고 선언했다.
한편, 야마사키는 고이즈미가 총재로 취임했을 때 간사장으로서 활동하며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고이즈미의 당내 인맥을 보완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이즈미는 당무와 정무 양면에서 야마사키를 깊이 신뢰했으며, 고이즈미 퇴진론이 불거졌을 때도 야마사키는 그를 헌신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내각 지지율 하락으로 2003년 9월 개각이 단행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당내 실력자였던 모리, 아오키 미키오, 고가 마코토 등과 연립여당인 공명당은 야마사키와 다케나카 헤이조 중 한 명을 경질할 것을 요구했고, 결국 고이즈미는 야마사키를 부총재로 임명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경질했다. 부총재직은 명예직에 불과했다.
실의에 빠진 야마사키는 스캔들에도 휘말려 두 달 뒤 치러진 총선에서 낙선했다. 그럼에도 야마사키는 당내 저항 세력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공명당과의 관계를 조율하며 고이즈미의 정치 상담역을 맡는 등 여전히 고이즈미에게 필요한 존재였기에, 총리 보좌관으로 기용되었다. 2005년 보궐선거에 야마사키가 출마하자 고이즈미는 "다쿠 씨가 있어서 내가 있다!"고 외치며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고, 야마사키는 국회에 복귀했다.
하지만 우정 해산 이후 단행된 개각에서 야마사키파 소속 의원이 단 한 명도 입각하지 못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해졌다.[7] 고이즈미가 속한 모리파를 제외하면 야마사키파는 유일하게 고이즈미 내각을 꾸준히 지지해 온 파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냉대를 받은 것이었고, 이는 쌓여왔던 불만을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8] 파벌 내에서도 회장인 야마사키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고, 야마사키 역시 고이즈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둘의 밀월 관계는 끝났다.
고이즈미와 야마사키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가토와 야마사키가 다시 협력하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2007년 2월, 고이즈미의 후계자인 아베 신조 내각에 비판적인 입장이었던 가토와 야마사키는 KY 콤비를 결성했다. 이후 고가 마코토가 합류하면서 신YKK로 불렸으며, 여기에 니카이 도시히로까지 가세하여 NYKK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8년 3월에는 KY 콤비가 가메이 시즈카, 간 나오토 등과 회동하면서 3KY로 칭해지기도 했다.
2009년 고이즈미가 정계를 은퇴하면서 YKK의 시대는 본격적으로 저물기 시작했다. 같은 해 총선거에서 야마사키는 낙선했고, 3년 뒤 정계를 은퇴했다. 가토 역시 2012년 총선거에서 낙선한 뒤 다음 해 정계를 떠났다. 야마사키는 자신의 파벌을 이시하라 노부테루에게 넘겨주었으며, 2016년 9월 가토가 사망하면서 YKK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2. 3. 고이즈미 내각과 YKK의 갈등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총리로 취임했을 당시, 당내 기반이 약했던 고이즈미에게 야마자키 타쿠는 간사장으로서 큰 힘이 되었다. 야마자키는 고이즈미에게 부족했던 당내 인맥을 보완해주고 공명당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등, 고이즈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고이즈미 역시 당무와 정무 운영에 있어 야마자키를 깊이 신뢰했으며, 당내에서 고이즈미 경질론이 나올 때마다 야마자키는 헌신적으로 그를 뒷받침했다. 이 시기는 두 사람의 관계가 가장 돈독했던 때로 평가된다.그러나 내각 지지율이 하락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했다. 2003년 9월 내각 개조를 앞두고, 당내 유력자인 모리 요시로, 아오키 미키오, 고가 마코토 등과 공명당은 지지를 대가로 야마자키와 다케나카 헤이조 중 한 명 또는 둘 모두를 경질할 것을 고이즈미에게 강력히 요구했다. 고심 끝에 고이즈미는 야마자키를 경질하는 선택을 했다. 야마자키는 부총재로 임명되었지만, 이는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실의에 빠진 야마자키는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두 달 뒤 치러진 2003년 총선에서 낙선하는 시련을 겪었다. 하지만 야마자키는 당내 저항 세력에 대한 방패막이 역할을 했고, 공명당과의 연결 고리가 되어주었으며, 고이즈미의 정치적 조언자로서 여전히 필요한 존재였다. 이에 고이즈미는 낙선한 야마자키를 민간인 신분으로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에 기용했다. 2005년 보궐선거에서 야마자키가 다시 출마하자, 고이즈미는 직접 선거 유세에 나서 "다쿠 씨가 있어서 내가 있다!"고 외치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고, 야마자키는 국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가토 고이치 역시 야마자키의 선거를 전면적으로 도왔다.
두 사람의 관계에 다시 균열이 생긴 것은 우정 해산 이후의 개각 과정에서였다. 고이즈미 내각을 일관되게 지지해 온 파벌은 고이즈미가 속한 모리파 외에 야마자키파가 유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개각에서 야마자키파 소속 의원은 단 한 명도 입각하지 못하는 냉대를 받았다.[7] 이전부터 인사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어 왔던 야마자키파는 이에 크게 반발했고, 파벌 회장인 야마자키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8] 야마자키 역시 고이즈미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면서 사실상 두 사람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특히 야마자키는 비슷한 시기 불거진 일본 치과의사 연맹 헌금 문제와 관련하여 검찰 조사를 받은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것을 총리대신 관저의 의도적인 정보 유출로 의심하면서, 고이즈미와의 대립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2007년 2월, 고이즈미의 후계자인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공유했던 가토와 야마자키는 'KY 콤비'를 결성했다. 이후 고가 마코토가 합류하면서 '신YKK'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외교 노선 등에서 주류와 다른 목소리를 내며 고이즈미 이후의 자민당 내에서 새로운 역학 관계를 형성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2. 4. YKK의 종언
2009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정계를 은퇴하면서 YKK의 시대도 저물기 시작했다. 같은 해 총선거에서 야마자키 타쿠는 낙선하였고, 3년 뒤인 2012년에 정계를 은퇴했다. 야마자키는 자신의 파벌을 이시하라 노부테루에게 넘겨주었다. 가토 고이치는 2012년 총선거에서 낙선한 뒤 다음 해인 2013년에 정계를 은퇴했다. 이후 2016년 9월 가토가 사망하면서 YKK 멤버 전원이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YKK의 시대는 사실상 끝을 맺었다.3. YKK 멤버 간의 관계
YKK 멤버 간 관계의 중심축은 가토 고이치와 야마사키 타쿠였으며, 두 사람은 1972년 첫 당선 이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초기에는 이 두 사람이 YKK 내에서 총리 후보로 더 유력하게 거론되었다.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 시절 가토가 간사장, 야마사키가 정무조사회장을 맡으면서 이러한 인식이 강해졌다. 1998년 가토는 파벌 회장이 되었고, 1999년 야마사키는 자신의 파벌을 만들었으며, 두 사람은 같은 해 총재 선거에 함께 출마하여 오부치 게이조에 맞섰다.
반면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1995년과 1998년 총재 선거에 출마했지만, 이는 소속 파벌의 의향에 따른 것으로 당시에는 총리 후보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같은 파벌 내에 모리 요시로라는 유력 주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토의 난은 YKK 멤버 간의 관계에 균열을 가져온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고이즈미와 가토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이후 고이즈미 총리 집권기에는 고이즈미와 야마사키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 관계 역시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를 겪었다.
고이즈미 내각 후반기에 고이즈미와 야마사키의 관계가 멀어지면서, 가토와 야마사키가 다시 공동 보조를 취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2007년 2월, 당시 아베 신조 내각에 비판적이었던 가토와 야마사키는 'KY 콤비'를 결성했고, 이후 고가 마코토가 합류하여 '신YKK'로 불리기도 했다. 여기에 니카이 도시히로가 참여하여 'NYKK'로, 2008년 3월에는 가메이 시즈카, 간 나오토 등과 회동하며 '3KY'로 불리기도 했다.
2009년 고이즈미의 정계 은퇴를 시작으로 YKK 시대는 저물기 시작했다. 같은 해 총선에서 야마사키가 낙선했고(2012년 은퇴), 가토는 2012년 총선에서 낙선한 뒤 2013년 정계를 은퇴했다. 야마사키는 자신의 파벌을 이시하라 노부테루에게 넘겨주었고, 2016년 9월 가토가 사망하면서 YKK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렸다.
3. 1. 가토 고이치와 고이즈미 준이치로
1997년 당시 후생대신이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후생성 간부 및 참의원 후생위원회 이사들과 식사를 한 사건으로 문제가 불거졌다. 참의원 심의의 원만한 진행을 위해 이사들의 일정을 관리해야 하는데, 사전 통지를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무라카미 마사쿠니 자유민주당 참의원 간사장이 강하게 반발했다. 무라카미는 참의원 후생위원장에게 의사 진행 권한 발동을 요구하며 후생성 간부의 위원회 출석을 중단시키는 등 사태가 악화되었다. 당시 자민당 간사장이었던 가토 고이치는 당 집행부를 총괄하는 입장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처음에는 무라카미 간사장의 경질까지 고려했으나, 참의원의 독자성을 내세운 무라카미의 저항과 당내 보수파의 반발을 우려하여 입장을 바꾸었다. 결국 가토는 YKK의 동료인 고이즈미 후생상에게 무라카미 간사장에게 직접 사과할 것을 제안했고, 고이즈미가 이를 받아들여 사죄함으로써 사태는 원만하게 해결되었다.2000년 11월, 가토의 난이 발생했을 때 야마사키 다쿠는 가토와 함께 내각 불신임 결의안 표결에 불참했지만, 고이즈미는 당시 모리 요시로 총리를 지지하며 불신임안에 반대표를 던졌다. 고이즈미는 자신이 속한 모리파의 회장이기도 했지만, 이 사건은 YKK가 항상 같은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가토가 고이즈미에게 거사를 의논했을 때, 고이즈미는 "나라면 벌써 했을 것"이라고 답했는데, 가토는 이를 자신에 대한 지지로 해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가토가 불신임안에 찬성할 것이라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흘리며 주류파로서 가토의 난 진압에 가담했다. 가토의 난 이후 같은 해 12월, 고이즈미는 한 파티 석상에서 "YKK는 우정과 타산의 이중 구조"라고 발언하여 주목받았다.[5]
2001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고이즈미가 세 번째로 출마하자 가토는 그를 지지했다. 하지만 고이즈미가 총재로 당선된 후 출범한 고이즈미 내각에 가토는 입각하지 않았다.[6] 일각에서는 고이즈미가 외무대신 자리를 제안했으나 가토가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초기에는 고이즈미 정권을 기본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으나, 점차 고이즈미의 정책이나 정치 운영 방식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5년 1월, 가토는 YKK가 실질적으로 끝났다고 언급했다. 훗날 가토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고이즈미와 YKK 관계를 이제 그만두자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관계가 끝났다고 말하면 끝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고 회상했다.
3. 2.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야마자키 타쿠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취임 직후, 그는 당내 지지 기반이 탄탄하지 않았고 소속 파벌 내에서도 그의 급진적인 방식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마자키 타쿠는 간사장으로서 고이즈미에게 부족했던 당내 인맥과 공명당과의 관계를 활용하여 고이즈미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고이즈미는 정책 면에서는 다케나카 헤이조 경제 재정 담당 대신에게 의존했지만, 당무와 정국 운영에 있어서는 야마자키를 유일하게 신뢰하고 상담할 수 있는 존재로 여겼다. 당내에서 여러 차례 고이즈미 경질론이 제기될 때마다 야마자키는 헌신적으로 그를 지지했으며, 고이즈미 역시 야마자키를 깊이 신뢰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그러나 내각 지지율이 점차 하락하면서 고이즈미는 당내 지지 기반 확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2003년 9월 내각 개조를 앞두고 모리 요시로, 아오키 미키오, 고가 마코토 등 당내 유력자들과 공명당은 지지의 대가로 야마자키 또는 다케나카 중 한 명(혹은 둘 다)의 경질을 강력히 요구했다. 고심 끝에 고이즈미는 야마자키를 경질하고, 명예직 성격이 강한 부총재로 임명했다.
실의에 빠진 야마자키는 스캔들에도 휘말리며 인사 2개월 후인 2003년 총선에서 낙선했다. 하지만 고이즈미에게 야마자키는 여전히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당내 저항 세력에 대한 방패 역할을 하고, 당과 공명당 사이의 소통 창구를 유지하며, 정치 전반에 대한 상담역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고이즈미는 낙선한 야마자키를 민간인 신분으로 비상근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에 기용했다. 이후 야마자키는 2005년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복귀했는데, 이때 고이즈미는 직접 선거구로 달려가 "다쿠 씨가 있기에 내가 있다!", "나에게 방패가 되어 달라"고 외치며 야마자키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지지를 표명했다.[6] 가토 고이치 역시 야마자키의 선거를 전면적으로 도왔다.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야마자키 파 소속의 다케베 츠토무가 간사장에 기용된 시점부터이다. 결정적으로 관계가 틀어진 것은 우정 해산 이후의 인사였다. 야마자키 파는 모리 파를 제외하고 고이즈미 내각을 일관되게 지지해 온 유일한 파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산 총선거 후 단행된 인사에서 사실상 입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간사장으로 유임된 다케베는 이미 야마자키 파와 소원해진 상태였다). 이전부터 야마자키 파 내에서는 전폭적인 지지에 비해 모리 파에 비해 인사에서 홀대받는다는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는데, 선거 압승 후 단행된 개각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냉대에 대한 불만이 폭발했다.[7][8] 이러한 불만은 파벌 회장인 야마자키에게도 향했고, 야마자키 역시 고이즈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반(反)고이즈미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내각 개조와 비슷한 시기에 야마자키는 일본 치과의사 연맹으로부터의 헌금 문제로 도쿄 지검으로부터 임의 재청취를 받았는데, 야마자키는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된 것을 총리대신 관저의 의도적인 정보 유출로 인식하고 고이즈미와의 대립이 결정적이 되었다고 여겼다. 검찰은 야마자키를 입건하지 않았지만, 2005년 7월 27일 도쿄 제2 검찰 심사회는 기소 상당의 의결을 내렸다. 결국 다음 총재 선거가 다가오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사실상 끝났다는 평가가 지배적이 되었다.
YKK 멤버들이 정계를 은퇴한 후에도 고이즈미와 야마자키는 종종 회담을 가졌다. 2020년 7월에는 아베 신조 총리의 후계 문제에 대해 논의하며 인식을 공유하기도 했다.[3] 또한 니카이 도시히로나 나카가와 히데나오 등과 함께 정기적으로 회식을 가지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4]
4. 관련 인물
- 지미 쇼자부로
- 후나다 하지메
참조
[1]
웹사이트
加藤紘一氏への弔辞で山崎拓氏「YKK」というネーミングは君の発案」
https://web.archive.[...]
スポーツ報知
2016-09-15
[2]
뉴스
山崎拓氏「YKK秘録」 畏友への弔辞と著書に込めた胸中
https://mainichi.jp/[...]
[3]
웹사이트
「来年は岸田か石破だ」小泉元総理と山崎拓氏が会談
https://news.tv-asah[...]
テレ朝news
2020-07-30
[4]
웹사이트
小泉元首相ら二階氏激励 衆院選向け、都内で会食
https://www.nikkei.c[...]
日本経済新聞
2021-10-13
[5]
문서
[6]
문서
[7]
문서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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