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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에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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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비에네 전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그의 제국을 분할하려는 장군들인 디아도코이 간의 전쟁 중 하나로, 안티고노스 1세와 에우메네스가 격돌했다. 전투 직전 안티고노스의 기습 시도가 실패하고, 전투에서는 에우메네스 군의 병참대가 공격받았지만, 에우메네스 군의 활약으로 안티고노스 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에우메네스는 부하들의 배신으로 안티고노스에게 넘겨져 처형당했다. 이 전투 이후 안티고노스는 세력을 확장하여 다른 디아도코이들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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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비에네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에우메네스]]
에우메네스; 17세기 후반 판화.
전투 정보
분쟁가비에네 전투
일부디아도코이 전쟁의 일부
시기기원전 316년 겨울 ~ 기원전 315년
장소가비에네 (이스파한 주, 이란)
결과결정적이지 않음, 전투 후 에우메네스가 배신당하면서 안티고노스 왕조의 전반적인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안티고노스와 동맹군
교전국 2에우메네스와 동맹군
지휘관
지휘관 1안티고노스
지휘관 2에우메네스
병력 규모
병력 1총 병력 미상
**중보병: 22,000명**
경보병: ???
기병: 9,000명
코끼리: 65마리
병력 2총 병력 약 43,000명
보병: 36,700명
기병: 6,000명
코끼리: 114마리
사상자 규모
사상자 1약 5,000명
사상자 2300명

2. 배경

파라에타케네 전투 이후,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 양군은 겨울을 나기 위해 각 부대를 분산 배치했다. 안티고노스는 이 틈을 타 물이 부족한 사막 지대를 통과해 기습 공격을 감행하려 했으나, 병사들이 피운 장작불 때문에 발각되었다.[39]

에우메네스는 적의 접근을 지연시키기 위해 많은 장작을 피우게 하여, 적이 이미 군대를 집결시켰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안티고노스는 기습 작전이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보급이 용이한 길로 우회했다.[40]

에우메네스가 시간을 버는 동안, 그의 장군들은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러나 에우메네스 군의 전투코끼리 부대가 고립되자, 안티고노스는 이를 빼앗기 위해 기병과 경장보병을 보냈다. 에우메네스는 이를 알아채고 병력을 보내 전투코끼리 부대를 구출했다. 이렇게 에우메네스는 위기를 벗어났고, 양군은 가비에네에서 대치하게 되었다.[20]

2. 1. 디아도코이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23년에 사망한 후, 그의 장군들은 즉시 그의 제국을 놓고 다투기 시작했다. 곧, 이는 공개적인 전쟁으로 변질되었고, 각 장군은 알렉산드로스의 광대한 왕국의 일부를 차지하려 했다. 이들을 디아도코이라 불렀다. 디아도코이 중 가장 재능 있는 장군 중 한 명은 안티고노스 1세(외눈 안티고노스)였는데, 그는 포위 공격에서 눈을 잃어 이와 같이 불렸다. 계승자들 간의 초기 전쟁 동안, 그는 이미 크라테로스를 격파한 유능한 장군 에우메네스와 마주했다. 두 디아도코이는 소아시아, 페르시아, 메디아에서 일련의 전투를 벌였고, 마침내 가비에네 (고대 그리스어: Γαβιηνή)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안티고노스는 필리포스 2세의 장군이었고, 그의 암살 이후에는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장군이 되었다. 그는 전쟁에 능숙하고 경험이 풍부했으며, 많은 전투에서 그의 능력을 증명했다. 에우메네스는 나머지 디아도코이와 달리 고대 마케도니아인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는 필리포스의, 그 다음에는 알렉산드로스의 비서였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에우메네스에게 군사적 재능을 알아보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에서 여러 고위 지휘권을 부여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에우메네스는 자신의 능력을 빠르게 보여주며 페르디카스와 동맹을 맺고 아나톨리아의 많은 지역을 장악했다.

기원전 319년, 안티고노스는 군대를 카파도키아(에우메네스의 사트라피)로 진격시켰고, 기습 작전(참조: 오르키니아 전투)을 통해 에우메네스를 카파도키아와 리카오니아 사이의 국경에 있는 강력한 요새인 노라로 몰아냈다. 여기서 에우메네스는 안티파트로스가 죽어 그의 적들이 혼란에 빠질 때까지 1년 이상 버텼다.[1] 그는 속임수를 써서 노라에서 탈출했고, 제국의 새로운 섭정인 폴리페르콘과 동맹을 맺은 후, 작은 군대를 모아 킬리키아로 진격하여 안티게네스와 테우타모스, 즉 마케도니아 은 방패병과 히파스피스트의 지휘관들과 동맹을 맺었다.[1] 결국 에우메네스는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그들의 충성과 미신적인 경외심을 이용하여 이들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다.[2] 그는 킨다의 왕실 재산을 이용하여 용병 군대를 모집하여 자신의 군대와 안티게네스와 테우타모스의 마케도니아 군대에 추가했다.[3] 기원전 317년, 에우메네스는 킬리키아를 떠나 시리아페니키아로 진격하여 폴리페르콘을 위해 해군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4] 준비가 되자 그는 서쪽으로 함대를 보내 폴리페르콘을 지원했지만, 킬리키아 해안에서 안티고노스의 함대와 마주쳐 편을 바꾸었다.[5] 한편,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의 문제를 해결하고 동쪽으로 진격하여 더 이상의 피해를 입기 전에 에우메네스를 제거하려 했다. 에우메네스는 어떻게든 이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었고, 페니키아에서 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진격하여 상부 사트라피에서 지원을 받으려 했다.[6] 안티고노스가 시리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에우메네스가 페니키아의 기지를 떠나 동쪽으로 진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수시아나, 메디아를 통해 서로 진격하고 반격하며 마침내 남부 메디아에서 두 군대가 만나 결판이 나지 않은 파라이타케네 전투를 벌였다.[7] 사상자가 더 많았던 안티고노스는 다음 날 밤 군대를 안전한 곳으로 강제 이동시켰다.[8]

2. 2. 가비에네 전투 이전 상황

기원전 319년,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카파도키아노라 요새에 고립시켰으나, 에우메네스는 속임수를 써서 탈출했다.[1] 에우메네스는 제국의 새로운 섭정인 폴리페르콘과 동맹을 맺고, 은 방패병과 히파스피스트의 지휘관들인 안티게네스와 테우타모스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1] 그는 이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한 충성심과 경외심을 이용하여 지배력을 확보했다.[2]

에우메네스는 킨다의 왕실 재산을 이용하여 용병을 모집하고, 자신의 군대와 동맹군의 병력을 합쳐 강력한 군대를 조직했다.[3] 기원전 317년, 에우메네스는 킬리키아를 떠나 시리아페니키아로 진격하여 폴리페르콘을 위한 해군력을 증강하려 했다.[4] 그러나 준비된 함대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안티고노스의 함대와 마주쳐 편을 바꾸었다.[5]

한편, 안티고노스는 소아시아의 문제를 해결하고 에우메네스를 제거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격했다. 에우메네스는 이를 미리 알고 페니키아에서 시리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하여 상부 사트라피에서 지원을 받으려 했다.[6] 안티고노스는 시리아에 도착해서야 에우메네스가 동쪽으로 진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양군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 수시아나, 메디아를 거치며 서로 진격하고 반격하다가, 마침내 남부 메디아에서 만나 파라이타케네 전투를 벌였으나 승부를 내지 못했다.[7]

파라에타케네 전투 이후, 겨울이 되자 양군은 겨울나기에 들어갔다. 에우메네스 군 지휘관들은 각 부대를 분산하여 겨울을 나게 했다. 이를 안 안티고노스는 물이 없지만 지름길인 사막 지대를 통해 기습하여 분산된 적을 각개격파하려 했다. 그러나 안티고노스 군 병사들이 추위로 장작불을 피웠고, 이를 본 인근 주민들이 에우메네스에게 알리면서 안티고노스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39]

에우메네스는 적의 접근을 늦추기 위해 부하들에게 많은 장작을 피우게 하여, 적이 이미 군대를 집결시켰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안티고노스는 기습 작전이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보급을 받을 수 있는 안전한 길로 우회했다.[40]

에우메네스가 시간을 버는 동안, 그의 장군들은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러나 에우메네스 군의 전투코끼리 부대가 고립되자, 안티고노스는 이를 빼앗기 위해 기병과 경장보병을 보냈다. 에우메네스는 이를 알아채고 병력을 보내 전투코끼리 부대를 구출했다. 이렇게 에우메네스는 위기를 벗어났고, 양군은 가비에네에서 대치하게 되었다.[20]

3. 전투 전개

파라에타케네 전투가 무승부로 끝난 후, 겨울이 되자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 양군은 겨울나기에 들어갔다. 에우메네스 군 지휘관들은 각 부대를 분산해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안티고노스는 물이 없지만 지름길인 사막 지대를 통해 몰래 기습하여, 분산되어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적을 각개격파하려 했다.[39] 그러나 추위로 안티고노스 군 병사들이 장작불을 피웠고, 이를 본 인근 주민들이 에우메네스에게 알렸기 때문에 안티고노스의 계획은 사전에 알려졌다.[39]

적의 접근을 알고 경악하는 부장들에게 에우메네스는 사흘 동안 적의 진격을 늦출 테니 그동안 각자 자신의 부대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자신은 약간의 방어 부대를 이끌고 시간을 벌기 위해 나섰다. 그는 부하들에게 많은 장작을 지피라고 시켰고, 이를 본 안티고노스는 적이 이미 군대를 집결시켰다고 착각하여 기습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안티고노스는 더 이상의 위험한 사막 진군을 중단하고, 우회해야 하지만 보급을 받을 수 있는 도시와 마을이 있는 길로 전환했다.[40]

에우메네스가 시간을 버는 동안 그의 장군들은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런데 에우메네스 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다리가 느린 전투코끼리 부대의 진군이 지연되어 고립되었다. 안티고노스는 적의 전투코끼리를 빼앗기 위해 기병 2200기와 경장보병 전대를 보내 전투코끼리 부대를 습격하게 했다. 이를 알아차린 에우메네스는 기병 1500기와 경장보병 3000명을 보내 전투코끼리 부대를 구했다. 에우메네스는 위기를 벗어났고, 양군은 가비에네에서 대치했다.

3. 1. 안티고노스의 기습 시도

파라에타케네 전투가 무승부로 끝난 후, 겨울이 되자 안티고노스와 에우메네스 양군은 겨울나기에 들어갔다. 에우메네스 군 지휘관들은 각 부대를 분산해서 겨울을 나고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안티고노스는 물이 없지만 지름길인 사막 지대를 통해 몰래 기습하여, 분산되어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적을 각개격파하려 했다.[39] 그러나 추위로 안티고노스 군 병사들이 장작불을 피웠고, 이를 본 인근 주민들이 에우메네스에게 알렸기 때문에 안티고노스의 계획은 사전에 알려지게 되었다.[39]

적의 접근을 알고 경악하는 부장들에게 에우메네스는 사흘 동안 적의 진격을 늦출 테니 그동안 각자 자신의 부대를 정비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은 약간의 방어 부대를 이끌고 시간을 벌기 위해 나섰다. 그는 부하들에게 많은 장작을 지피라고 시켰고, 이를 본 안티고노스는 적이 이미 군대를 집결시켰다고 착각하고 기습 작전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안티고노스는 더 이상의 위험한 사막 진군을 중단하고, 우회해야 하지만 보급을 받을 수 있는 도시와 마을이 있는 길로 전환했다.[40]

이렇게 에우메네스가 시간을 버는 동안 그의 장군들은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런데 에우메네스 군이 보유하고 있었던 다리가 느린 전투코끼리 부대의 진군이 지연되어 고립되었다. 그래서 안티고노스는 적의 전투코끼리를 빼앗기 위해 기병 2200기와 경장보병 전대를 보내 전투코끼리 부대를 습격하게 했다. 이를 알아차린 에우메네스는 기병 1500기와 경장보병 3000명을 보내 전투코끼리 부대를 구했다. 이렇게 에우메네스는 위기를 벗어났고, 양군은 가비에네에서 대치했다.

3. 2. 양군의 배치

안티고노스는 기병을 양쪽에, 중장보병을 중앙에 배치하고, 전투 코끼리를 앞쪽에 배치하여 그 사이를 경장보병으로 메웠다. 안티고노스와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가 우익을, 페이톤이 좌익을 지휘했다.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안티고노스 군대는 메디아에서 온 지원군을 포함하여 보병 22,000명, 기병 9,000기, 코끼리 65마리였지만, 이 외에도 경장보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2] 안티고노스 군의 중장 보병은 최소 7,000명의 마케도니아인, 6,500명의 판토다포이, 2,000명의 리키아인 및 팜필리아인, 그리고 6,500명의 그리스 용병으로 구성되었다.[11]

에우메네스는 좌익에 정예 기병을 배치하고 자신도 그곳에 진을 쳤다. 우익 기병 부대는 필리포스에게 지휘를 맡기고, 전투를 피하고 부대를 보존하도록 명령했다. 에우메네스 또한 안티고노스와 마찬가지로 전차 부대 54마리(에우다모스 지휘)를 전군 전면에 일렬로 늘어놓았고, 60마리는 좌익을 감싸도록 반원형으로 배치했다. 중앙에는 역시 중장보병을 배치했다. 에우메네스 군대는 보병 36,700명, 기병 6,000기, 코끼리 114마리였다.[23] 이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알렉산드로스 대왕 군대의 베테랑 부대인 아르기라스피데스(은방패대) 3,000명과 히파스피스(방패병) 3,000명이었다.[11]

3. 3. 회전

가비에네 전투의 병력 배치도


가비에네 전투


가비에네 전투, 마지막 움직임


전투가 시작되기 전, 은 방패대의 지휘관 안티게네스는 기병을 안티고노스의 팔랑크스에 보내 조롱했다. ''"악한 자들아, 필리포스와 알렉산드로스 아래에서 온 세상을 정복한 너희 아버지에게 죄를 짓는 것이냐?"'' 안티고노스 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에우메네스 군은 이에 화답하여 큰 함성을 질렀다. 에우메네스는 기회를 엿보고 진격을 시작했다.[12]

전투는 에우메네스 군 좌익의 전투코끼리 부대와 기병대의 돌격으로 시작되었고, 이어서 중앙의 보병 부대도 전진했다. 코끼리와 기병이 전진하면서 상당한 모래 먼지가 발생했고, 이를 본 안티고노스는 적의 병참대를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메디아 기마 궁병과 타렌티네 기병에게 아군의 뒤를 통과하여 우익, 그리고 적의 좌익 바깥을 빠져나가 보급부대를 습격하게 했다. 이 작전은 흙먼지 때문에 에우메네스 군에게 전혀 눈에 띄지 않았고, 허술했던 에우메네스 군 보급대는 쉽게 적의 손에 넘어갔다. 이로 인해 에우메네스 군대의 아내, 자녀, 하인, 그리고 축적된 재산이 안티고노스에게 넘어갔다.[13]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짙은 흙먼지를 이용하여 중기병과 함께 교전 중인 산병과 코끼리를 돌아서 에우메네스 군 기병을 기습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에우메네스 휘하의 페우케스타스가 이끄는 중기병의 상당수가 패주했다. 에우메네스가 안티고노스 군을 몰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수적으로 열세였고 후퇴했다. 안티고노스와 데메트리오스는 기병을 사용하여 에우메네스와 그의 나머지 군대 사이에 방어선을 형성했다. 에우메네스의 선두 코끼리가 죽고 나머지가 당황하여 도망치면서 코끼리와 산병의 전투는 결정되었다. 안티고노스는 우익에서 확실하게 승리했다.[14]

한편, 중앙에서는 두 팔랑크스가 교전했다. 은 방패대를 선두로 에우메네스 군의 팔랑크스가 뚜렷한 승리를 거두었다. 에우메네스는 페우케스타스에게 그의 기병과 함께 다시 전투에 참여하여 이점을 활용하라고 명령했지만, 페우케스타스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더 후퇴했다. 안티고노스는 페이톤(우익 지휘관)에게 에우메네스 군 팔랑크스를 후방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로 인해 에우메네스 군 중보병은 승리에 가까웠음에도 추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전투에 단련된 베테랑들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방진을 형성한 후 안전하게 전장을 벗어났다.[14]

4. 전투 이후

가비에네 전투는 파라에타케네 전투와 마찬가지로 결정적이지 않았다. 에우메네스는 여전히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그날 저녁 군대를 설득하여 다음 날 안티고노스와 다시 싸우려 했다. 그러나 에우메네스 군대는 야영지가 약탈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주저했으며, 사트라프들은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물러나고 싶어 했다.[15] 이러한 상황에서 은 방패병들은 안티고노스가 그들의 아내, 자녀, 하인, 전리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비밀리에 협상을 시작했다.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넘겨받고 충성을 맹세하면 짐과 가족을 돌려주기로 합의했고, 은 방패병들은 즉시 에우메네스와 고위 장교들을 체포하여 안티고노스에게 넘겼다.[15]

에우메네스 군대의 마케도니아인들은 안티고노스 군대에 편입되었다. 안티고노스는 은 방패병의 변덕스러운 충성심을 고려하여, 그들 중 가장 난폭한 1,000명을 멀리 떨어진 아라코시아사트라프에게 보내 인도인과의 국경 전쟁에서 싸우게 했다. 현지 사트라프인 시비르티우스에게는 그들을 소모품으로 간주하라는 특별 명령이 내려졌다.[16]

4. 1. 에우메네스의 배신과 죽음

이 전투에서 에우메네스 군은 300명이 사망한 반면, 안티고노스 군은 5,000명 이상을 잃었다.[29] 전투로 인한 피해는 안티고노스 군이 더 컸지만, 빼앗긴 보급품 중에는 은방패 병단의 재산과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에우메네스는 다시 전투를 준비했지만, 원래 에우메네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안티게네스와 테우타모스 등 장수들과 은방패 병단은 안티고노스와 거래하여 빼앗긴 재물과 처자를 돌려받는 대가로 에우메네스를 안티고노스에게 넘기고 항복했다.[30][31]

안티고노스는 사령관을 팔아넘긴 그들을 나쁘게 생각하여 안티게네스를 구덩이에 떨어뜨려 산 채로 불태워 죽였으며, 에우데모스, 케르바노스 등 적대적인 장수들을 처형했다.[32] 이후 은방패 병단은 벽지 아라코시아로 사실상 좌천되어 모두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33]

안티고노스는 지략이 뛰어난 에우메네스를 부하로 거두고 싶어 했고, 에우메네스의 처우에 대해 장군들과 논의했다. 데메트리오스네아르코스는 에우메네스를 살려줄 것을 주장했지만, 에우메네스의 지략을 얕보다가 자신의 존재감이 떨어질 것을 두려워한 다른 장군들은 반대했다.[34][35] 또한 안티고노스가 토벌할 때 에우메네스는 마케도니아 왕가에 맹목적인 충성을 보여준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가 진심으로 자신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32]

디오도로스에 따르면,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를 처형하고 유골을 유족에게 보냈다.[36] 코르넬리우스 네포스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안티고노스는 마지못해 에우메네스를 처형하기로 했지만, 친구에게 폭력을 쓰는 것을 꺼려 굶겨 죽이기로 했다. 그러나 군 이동 중 혼란을 틈타 에우메네스는 안티고노스가 모르게 (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안티고노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부하들에게 목이 잘려 죽었다.[37][38]

에우메네스를 제거한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의 동맹자들을 부하로 삼으며, 디아도코이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강대해진 안티고노스에게 위협을 느낀 다른 디아도코이는 합종연횡하면서 맞섰다.

4. 2. 디아도코이 전쟁의 변화

에우메네스를 제거한 안티고노스는 에우메네스의 동맹자들을 부하로 삼아, 디아도코이 중에서 굴지의 거대 세력이 되었다. 강대해진 안티고노스에게 위협을 느낀 다른 디아도코이들은 합종연횡하며 맞섰다.

참조

[1]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2]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3]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4]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5] 서적 Strategemata
[6]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7]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8]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9]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10]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11] 서적 Antigonos the One-Eyed and the Creation of the Hellenistic State
[12]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13]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14]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15]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16] 서적 Bibliotheca Historica
[17] 서적 XIX. 37
[18] 서적 XIX. 38
[19] 서적 「エウメネス」
[20] 서적 XIX. 39
[21] 서적 XIX. 40
[22] 문서 吉川
[23] 서적 XIX. 40
[24] 서적 XIX. 41
[25] 서적 XIX. 42
[26] 서적 「エウメネス」
[27] 서적 XIX. 42
[28] 서적 XIX. 43
[29] 서적 IV. 6. 13
[30] 서적 XIX. 43
[31] 서적 「エウメネス」
[32] 서적 XIX. 44
[33] 서적 「エウメネス」
[34] 서적 「エウメネス」
[35] 서적 「エウメネス」
[36] 서적 ibid, XIX. 44
[37] 서적 コルネリウス・ネポス, 「エウメネス」, 12
[38] 서적 プルタルコス, 「エウメネス」, 19
[39] 서적 디오도로스, XIX 37
[40] 서적 ibid, XIX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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