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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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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고지는 소가노 우마코에 의해 아스카에 창건된 아스카데라를 기원으로 718년 헤이조쿄로 천도하면서 나라로 옮겨진 사찰이다. 나라 시대에는 도다이지, 고후쿠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큰 가람이었으나, 쇠퇴를 거쳐 현재는 극락방이 있는 간고지(극락방)와 탑적이 화엄종으로 나뉘어 있다. 극락방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본당, 선실, 오층소탑 등 다수의 국보와 중요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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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고지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이름간고지 (元興寺)
로마자 표기Gangō-ji
종파진언율종
본존지코 만다라 (智光曼荼羅)
위치나라 현 나라 시 추인초 11
국가일본
웹사이트간고지 공식 웹사이트
역사
창건자스이코 여왕 및 소가노 우마코
완공 연도593년
문화재 정보
고쿠라쿠보 본당
고쿠라쿠보 본당 (국보)

2. 역사

간고지는 원래 소가노 우마코가 아스카에 세운 아스카데라였다. 718년 수도가 헤이조쿄로 옮겨지면서 절도 함께 나라로 이전되었다.[1]

초기 간고지는 현재 나라마치(나라 시의 보존지구) 안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며 7개의 당과 탑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에도 시대에 걸쳐 발생한 화재로 인해 당초 건축물은 대부분 소실되었다.[1]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 율령 제도가 붕괴되면서 간고지는 점차 쇠퇴했다. 1451년 토이치키에 의한 방화로 주요 건물들이 소실되었고, 이후 금당은 재건되지 못했다. 이 무렵 간고지는 극락방, 관음당, 소탑원의 세 사찰로 분열되었다.

극락원은 진언율종 사찰이 되어 지광만다라를 중심으로 민간 신앙의 중심지로 번영했지만, 메이지 시대 이후 황폐해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츠지무라 타이엔이 주지가 되면서 경내 정비와 건물 수리가 진행되었고, 원흥사불교민속자료연구소(후에 원흥사문화재연구소)가 설립되었다.

관음당은 동대사의 말사가 되어 오중탑을 중심으로 유지되었으나, 1859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후 오중탑은 재건되지 않았고, 1930년에 현재의 본당인 관음당이 재흥되었다. 2023년부터 참배가 중단되었다가 2024년부터 봄·가을 관광 시즌에 한해 특별 참배가 실시되고 있다.[6][7]

2. 1. 창건과 아스카 시대

소가노 우마코가 아스카에 아스카데라를 세웠다. 710년 헤이조쿄로 수도를 옮기면서 야쿠시지, 구마야사카데라(후의 코후쿠지), 다이칸다이지(후의 다이안지) 등이 신도로 이전했다.[1]

아스카데라


요로 2년(718년) 아스카데라(호코지)도 헤이조쿄로 이전했지만, 아스카의 호코지는 폐지되지 않고 원래 장소에 남았다. 일반적으로 아스카에 있는 절을 “호코지”, “혼겐코지”라 칭하고, 헤이조쿄 쪽 절을 “겐코지(신겐코지)”라 칭하여 구별한다. “호코”와 “겐코”는 모두 일본에서 처음으로 불법이 흥륭한 절이라는 뜻이다.[1]

2. 2. 나라 시대

소가노 우마코가 아스카에 세운 아스카데라가 간고지의 기원이다. 718년 수도가 헤이죠쿄로 옮겨지면서 절 또한 나라로 이전되었다.[1]

나라 시대(奈良時代)의 간고지는 삼론종(三論宗)과 법상종(法相宗)의 도장으로 번성하여 도다이지(東大寺) 및 코후쿠지(興福寺)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큰 가람(伽藍)을 자랑했다. 가람은 남대문, 중문, 금당(본존은 미륵보살), 강당, 종당, 식당이 남북으로 일직선으로 배치되었고, 중문 좌우에서 뻗어 나온 회랑이 금당을 둘러싸고 강당 좌우에 이르렀다. 회랑 외곽 동쪽에는 5층탑을 중심으로 하는 동탑원, 서쪽에는 소탑원이 있었다(소탑원에는 국보인 5층소탑이 실내에 안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건물들은 모두 소실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강당 뒤편 좌우에는 여러 동의 승방(승려가 거주하는 건물)이 있었다. 이 중 동쪽 앞쪽에 있던 승방을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에 개조한 것이 현재 남아 있는 극락방의 본당과 선실이다.

사찰 부지는 남북 4정(약 440m), 동서 2정(약 220m)으로 남북으로 길쭉했으며, 코후쿠지(興福寺) 남쪽에 있는 사루사와이케(猿沢池) 남쪽, 오늘날 “나라마치(ならまち)(奈良町)”라고 통칭되는 지역의 대부분이 원래 간고지의 경내였다. 사루사와이케 남동쪽에 있는 파출소 부근이 옛 경내의 북동쪽 끝, 나라시 음성관 부근이 옛 경내의 남서쪽 끝에 해당한다.

헤이조쿄의 간고지 모형(나라시청(奈良市役所) 소장 헤이조쿄 1/1000 모형의 일부).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후방의 사찰은 코후쿠지(興福寺)이다.

2. 3. 쇠퇴와 분립

헤이안쿄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남도불교계에서는 동대사, 고후쿠지가 세력을 확장하는 한편, 간고지는 율령 제도가 붕괴된 헤이안 시대 중기(10~11세기) 이후 점차 쇠퇴해 갔다. 1035년의 「당사손색검록장」이라는 사료에 따르면, 금당을 비롯한 간고지의 건물들은 이 무렵에는 황폐하여 볼품이 없었다고 한다. 이 무렵, 간고지의 별당이 수리를 위해 현상(현상)과 쌍벽을 이루는 명물로 여겨졌던 사찰 보물인 비파 「간고지」를 고쥬자쿠 천황에게 매각했다는 이야기가 「강담초」, 「고금착문집」에 보이는데, 사찰 유지를 위해 사찰 보물인 비파를 팔아야 했던 간고지의 궁핍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또한 1246년의 기록에 따르면, 이 무렵까지 오중탑의 4, 5층과 상륜이 없어지고, 남대문, 종루가 크게 파손되었다고 한다.

무로마치 시대 1451년 토이치키에 의한 방화로 소탑원이 불타자 불길은 간고지 전체로 번졌다. 오중탑 등은 간신히 남았지만, 금당 등 주요 당우와 지광만다라 원본은 타 버렸다. 금당은 재건되었지만, 1472년의 큰 바람에 무너져 이후 금당은 재건되지 않았다.

이후, 폐허에 주택이 지어진 것도 있어 이 무렵을 경계로 사찰은 지광만다라를 봉안하는 극락당(만다라당)을 중심으로 한 「극락원」(극락방), 오중탑을 중심으로 한 「관음당」(현·탑터), 그리고 「소탑원」이라는 3개의 사찰로 분열되었다. 극락방은 나라 사이다이지의 말사가 되어 진언율종 사찰이 되고, 중세 이후는 지광만다라, 홍법대사(쿠카이), 성덕태자 등의 민간 신앙의 사찰로 번영하였다.

극락원은 메이지 시대 이후 황폐해져,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본당도 1950년 무렵까지는 마루는 무너지고 지붕은 뚫려 "요괴가 나온다"고 말해질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에 극락원의 주지가 된 츠지무라 타이엔(辻村泰圓)은 전후가 되어 전쟁 고아를 위한 사회복지 사업에 전념하는 한편, 경내 정비와 건물 수리를 진행했다. 1962년에는 츠지무라에 의해 경내에 재단법인 원흥사불교민속자료연구소(元興寺仏教民俗資料研究所)가 설립되었고( 1978년에 원흥사문화재연구소(元興寺文化財研究所)로 개칭), 1965년에는 사찰 보물을 수장 전시하는 수장고가 완성되는 등 점차 정비가 진행되었다. 원흥사불교민속자료연구소는 본당 해체 수리 중에 지붕 밑에서 발견된 수만 점의 서민 신앙 자료(판탑파 등)를 연구하는 것을 초기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극락원은 1955년에 "원흥사극락방(元興寺極楽坊)"으로 개칭되었고, 1977년에 "원흥사(元興寺)"로 개칭되었다.

2010년 8월, 선실의 일부에 사용되고 있는 목재가 세계 최고(最古)의 현역 목조 건축 부재임이 확인되었다.

1451년의 토일봉기에 의한 방화 이후, 절은 지광만다라를 봉안하는 "극락원"(극락방), 오중탑을 중심으로 하는 "관음당"(현·탑터), 그리고 "소탑원"의 세 개의 사찰로 분열되었다. 관음당은 곧 동대사의 말사가 되어, 오중탑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로 유지되었다.

오중탑은 나라 시대에 건립된 높이 72m 또는 57m라고도 하는 거대한 것이었으며, 나라의 명물로 유명했다. 그러나 1451년의 화재에도 불타지 않고 남은 창건 유구의 오중탑 및 관음당은 에도 시대 말기 1859년에 관음당 동쪽의 마을집에서 난 화재에 휘말려 소실되었다. 이후 오중탑은 재건되지 않았다. 이후 "원흥사"라는 사찰 이름은 이어졌지만 쇠퇴해갔다.

1930년에 현재의 본당인 관음당이 재흥되었다.

2023년 7월 이후, 관리인의 이사로 인해 참배할 수 없게 되었으나, 지역 자치회와 시민 등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정비에 협력하여, 2024년 이후로는 봄·가을 관광 시즌 등에 한정하여 특별 참배를 실시하게 되었다.[6][7]

2. 4. 지광만다라와 민간 신앙

나라 시대의 승려 지광(智光)이 그리게 한 극락(極楽)정토(浄土)의 변상도(変相図)인 「'''지광만다라(智光曼荼羅)'''」는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말법사상(末法思想)의 유행과 아미타(阿彌陀)정토신앙(浄土信仰)의 융성과 함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 만다라를 봉안하는 당(堂)은 「극락원(極楽院)」 (현재 극락당)이라 불렸으며, 점차 원흥사 본체와는 별개의 사찰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나라시 중인정(中院町)에 있는 원흥사, 즉 원흥사극락방(元興寺極楽坊)이다.[1] 현존하는 원흥사극락방의 본당과 선실은 나라 시대에 지광을 비롯한 승려들이 거주했던 승방(僧房)을 가마쿠라 시대에 개축한 것이다.[1]

당시 원흥사에서는 중문에 안치되어 있던 이천상(二天像) (지국천(持国天)・증장천(増長天))과 그 권속인 야차(夜叉)상 8체, 마찬가지로 중문에 안치되어 중문관음이라 불렸던 십일면관음(十一面観音)상이 많은 신앙을 모았다.[1]

이천상과 야차상에 대해서는 9세기 전반경에 원흥사의 승려였던 의소(義昭)가 편찬한 「일본감령록(日本感霊録)」이나 「금석이야기(今昔物語集)」(권18 제50화) 등의 불교 설화집에 영험한 상(像)으로 알려져 있다.[1] 운경(運慶)도 신고사(神護寺) 중문의 이천상 조립 시 이 원흥사 중문 이천상을 모각(模刻)하였고(『신고사략기(神護寺略記)』), 교왕호국사(教王護国寺) 중문 재건 시에도 원흥사 이천상을 모각하였으나(『동보기(東宝記)』), 이 상은 문명(文明) 18년(1486년)의 토일기(土一揆)로 소실되었다.[1]

중문관음은 장례사(長谷寺)의 관음상과 같은 나무로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 성립된 「건구고순례기(建久御巡礼記)」 (『당마사(當麻寺)』 항목 참조)나 「호국사본제사연기집(護国寺本諸寺縁起集)」 등에서는 장례사에 참배하는 자는 먼저 이 중문관음에 참배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1] 실제로 덴록(天禄) 2년(971년), 쇼랴쿠(正暦) 원년(990년)에 각각 장례사 참배를 한 후지와라노 미치츠나 모친(藤原道綱母)이나 후지와라노 산스케(藤原実資) 등이 그 길에 원흥사에 참배하여 등명 등을 헌납한 것이 각각 「잠자리일기(蜻蛉日記)」(132단), 「소우기(小右記)」(쇼랴쿠 원년 9월 7일 조)에 보인다.[1]

이천상은 오닌(応仁) 원년(1467년)에 낙뢰로 인해 소실되었으나, 이 무렵 이미 원흥사 관음당으로 옮겨졌던 중문관음은 피해를 면하고, 원흥사 관음당의 후신인 원흥사(탑적)의 본존으로 현재에도 봉안되어 있다.[1]

2. 5. 근현대

소가노 우마코에 의해 아스카에 세워졌던 간고지는 718년에 수도가 헤이조쿄로 이전되면서 나라로 옮겨지게 되었다.

간고지는 본래 7개의 건물과 탑으로 이루어진 사원이었고 나라 시의 보존 지구인 현재의 나라마치의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래의 건축물들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15세기와 19세기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극락원은 메이지 시대 이후 황폐해져,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본당도 1950년 무렵까지는 마루는 무너지고 지붕은 뚫려 "요괴가 나온다"고 말해질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에 극락원의 주지가 된 츠지무라 타이엔(辻村泰圓)은 전후가 되어 전쟁 고아를 위한 사회복지 사업에 전념하는 한편, 경내 정비와 건물 수리를 진행했다. 1962년에는 츠지무라에 의해 경내에 재단법인 원흥사불교민속자료연구소가 설립되었고(1978년에 원흥사문화재연구소로 개칭), 1965년에는 사찰 보물을 수장 전시하는 수장고가 완성되는 등 점차 정비가 진행되었다. 원흥사불교민속자료연구소는 본당 해체 수리 중에 지붕 밑에서 발견된 수만 점의 서민 신앙 자료(판탑파 등)를 연구하는 것을 초기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극락원은 1955년에 "원흥사극락방"으로 개칭되었고, 1977년에 "원흥사"로 개칭되었다.

2010년 8월, 선실의 일부에 사용되고 있는 목재가 세계 최고(最古)의 현역 목조 건축 부재임이 확인되었다.

보덕 3년(1451년)의 토일봉기에 의한 방화 이후, 절은 지광만다라를 봉안하는 "극락원"(극락방), 오중탑을 중심으로 하는 "관음당"(현·탑터), 그리고 "소탑원"의 세 개의 사찰로 분열되었다. 관음당은 곧 동대사의 말사가 되어, 오중탑을 중심으로 하는 사찰로 유지되었다.

오중탑은 나라 시대에 건립된 높이 72m 또는 57m라고도 하는 거대한 것이었으며, 나라의 명물로 유명했다. 그러나 보덕 3년(1451년)의 화재에도 불타지 않고 남은 창건 유구의 오중탑 및 관음당은 에도 시대 말기 안세이 6년(1859년)에 관음당 동쪽의 마을집에서 난 화재에 휘말려 소실되었다. 이후 오중탑은 재건되지 않았다. 이후 "원흥사"라는 사찰 이름은 이어졌지만 쇠퇴해갔다.

1930년에 현재의 본당인 관음당이 재흥되었다.

2023년 7월 이후, 관리인의 이사로 인해 참배할 수 없게 되었으나, 지역 자치회와 시민 등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정비에 협력하여, 2024년 이후로는 봄·가을 관광 시즌 등에 한정하여 특별 참배를 실시하게 되었다.[6][7]

3. 건축

남쪽에서 바라본 모습. 후방의 사찰은 코후쿠지(興福寺)이다.]]

3. 1. 간고지(극락방)

절에서 가장 잘 보존된 부분은 극락방(極楽坊)이다.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써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나라 시대에는 주변의 도다이지, 고후쿠지와 같은 큰 절이었으나 중세 이후 점차 쇠퇴해 현재는 두 개의 사원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방이 있는 곳이 진언율종에 속하고 다른 한 곳은 화엄종에 속한다.

강오지 극락방 전실


사찰 중 가장 잘 보존된 부분은 Gangō-ji Gokurakubō|元興寺極楽坊일본어로 알려져 있으며, 진언율종에 속한다. 이곳은 세계유산 "나라의 고도(古都)의 역사적 건조물"로 지정한 나라의 사찰, 신사 및 기타 장소들 중 하나이며, 세 개의 국보를 보유하고 있다.

절에 있는 세 개의 일본 국보는 다음과 같다.

  • 본당(本堂) 또는 극락방(極楽坊)
  • 선실
  • 오층소탑(五重小塔)


원흥사(元興寺)의 계보를 잇는 다음 3개의 사찰이 분립하여 현재에 이른다.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 '''원흥사'''(奈良市中院町)
  • 옛 이름은 "'''원흥사극락방'''"이다. 1978년 "원흥사"로 개칭되었다.
  • 진언율종, 서대사 말사이다. 본존불은 판화 지광만다라이다. 원흥사 자원 극락방의 계보를 잇고, 가마쿠라 시대부터 독립하였다. 본당, 선실, 5층 소탑은 국보이다. 경내는 국보 "원흥사극락방 경내"이다. 세계유산 "古都奈良の文化財"의 구성 자산 중 하나이다.


'''원흥사'''(元興寺)는 나라현나라시중원정에 있는 진언율종의 사찰이다. 산호는 없다. 본존은 지광만다라(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극락정토의 모습을 그린 변상도, 정토삼만다라 중 하나이다. 원흥사의 자원이었던 극락방의 계보를 잇기 때문에 '''원흥사극락방'''(元興寺極楽坊)이라고도 불린다. 「고도 나라의 문화재」의 일부로 세계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극락원은 메이지 시대 이후 황폐해져,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본당도 1950년 무렵까지는 마루는 무너지고 지붕은 뚫려 "요괴가 나온다"고 말해질 정도로 황폐해져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3년에 극락원의 주지가 된 츠지무라 타이엔(辻村泰圓)은 전후가 되어 전쟁 고아를 위한 사회복지 사업에 전념하는 한편, 경내 정비와 건물 수리를 진행했다. 1962년에는 츠지무라에 의해 경내에 재단법인 원흥사불교민속자료연구소(元興寺仏教民俗資料研究所)가 설립되었고(1978년에 원흥사문화재연구소(元興寺文化財研究所)로 개칭), 1965년에는 사찰 보물을 수장 전시하는 수장고가 완성되는 등 점차 정비가 진행되었다. 원흥사불교민속자료연구소는 본당 해체 수리 중에 지붕 밑에서 발견된 수만 점의 서민 신앙 자료(판탑파 등)를 연구하는 것을 초기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극락원은 1955년에 "원흥사극락방(元興寺極楽坊)"으로 개칭되었고, 1977년에 "원흥사(元興寺)"로 개칭되었다.

2010년 8월, 선실의 일부에 사용되고 있는 목재가 세계 최고(最古)의 현역 목조 건축 부재임이 확인되었다.

3. 2. 간고지(탑적)

나라 시대에는 주변의 도다이지, 고후쿠지와 같은 큰 절이었으나 중세 이후 점차 쇠퇴해 현재는 두 개의 사원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방이 있는 곳이 진언율종에 속하고 다른 한 곳은 화엄종에 속한다. 원흥사(元興寺)의 계보를 잇는 다음 3개의 사찰이 분립하여 현재에 이른다.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 '''원흥사'''(奈良市中院町)

#: 옛 이름은 "'''원흥사극락방'''"이다. 1978년(쇼와 53년) "원흥사"로 개칭되었다.

#: 진언율종, 서대사 말사이다. 본존불은 판화 지광만다라이다. 원흥사 자원 극락방의 계보를 잇고, 가마쿠라 시대부터 독립하였다. 본당, 선실, 5층 소탑은 국보이다. 경내는 국보 "원흥사극락방 경내"이다. 세계유산 "古都奈良の文化財"의 구성 자산 중 하나이다.

# '''원흥사'''(奈良市芝新屋町)

#: 별칭 "'''원흥사탑터'''"이다.

#: 화엄종, 동대사 말사이다. 본존불은 십일면관음이다. 원흥사 5층탑·관음당(중문당)의 계보를 잇는다. 목조 약사여래입상은 국보이다. 경내는 국보 "원흥사탑터"이다.

# '''소탑원'''(奈良市西新屋町)

#: 진언율종이다. 본존불은 虚空蔵菩薩이다. 원흥사 소탑원의 계보를 잇는다. 경내는 국보 "원흥사소탑원터"이다.

본당(국보)


선실(국보)

  • 본당·극락당(국보) - 극락방본당, 만다라당이라고도 한다. 본존인 지광만다라도(판화 및 견본)를 수자 안에 봉안한다. 팔작지붕, 기와지붕이며, 동쪽을 정면으로 하여 건립되었다(동쪽을 정면으로 하는 것은 아미타당 건축의 특징이다). 이 건물은 팔작지붕의 처마 측면(지붕의 모양이 사다리꼴이 아니라 삼각형으로 보이는 측면)을 정면으로 하는 점, 정면 기둥 사이의 간격을 짝수인 6칸으로 하고 중앙에 기둥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불교의 당탑은 정면 기둥 사이의 간격을 3칸, 5칸 등의 홀수로 하고 정면 중앙에 기둥이 없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부는 마루로 된 내진 주위를 다다미를 깐 외진이 둘러싸고 있으며, 내진 주위를 염불을 외우며 걸어 다니는 "행도"에 적합한 구조이다. 가마쿠라 시대 관원 2년(1244년), 옛 승방의 동쪽 끝 부분을 개조한 것으로, 내진 주위의 두꺼운 각기둥과 천장 판재에는 나라 시대의 부재가 재활용되었다. 또한, 지붕 기와의 일부에도 아스카 시대~나라 시대의 옛 기와가 사용되었다. 여기에 사용된 옛 기와는 상부가 가늘게 좁아지고 하부가 넓은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이 기와를 겹쳐 잇는 잇기 방식을 행기葺(ぎょうきぶき)이라고 한다.
  • 선실(국보) - 맞배지붕, 기와지붕. 본당 서쪽에 처마를 맞대고 건립되었다. 원래는 현재의 본당을 포함하여 동서로 긴 하나의 승방이었던 것을 가마쿠라 시대에 개축한 것이다. 정면 4곳에 판문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현존 부분은 4구획으로, 1구획에는 5~8명의 승려가 생활했다고 한다. 본당과 마찬가지로, 부재와 지붕 기와의 일부에는 나라 시대의 것이 남아 있다. 참고로, 2000년(헤이세이 12년)의 원흥사문화재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선실의 부재를 나무의 나이테 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서기 582년 벌채된 나무가 사용되었다고 하며, 사실이라면 이 건물의 일부에는 법륭사 서원가람보다 오래된 목재가 사용된 셈이다.
  • 석불군
  • 법륜관 - 수장고. 1965년(쇼와 40년) 건축.
  • 원흥사문화재연구소
  • 소자방(구 庫裏, 나라현 지정 유형문화재) - 원래는 관분 2년(1662년)에 재건된 소자방을 개축하여 이축한 것.
  • 다실 "태락헌"
  • 벤텐
  • 서실(庫裏) "의락암" - 도시 경관 형성 지정.
  • 북문
  • 개구리돌 - 오사카성의 간루 서쪽 외호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던 돌.
  • 동문(중요문화재) - 동대사 서남원의 문을 중세 말기에 이축한 것. 무로마치 시대.

본당·선실 지붕


북문

3. 3. 소탑원

진언율종이다. 본존불은 허공장보살이다. 원흥사 소탑원의 계보를 잇는다. 경내는 국보 "원흥사소탑원터"이다.

4. 문화재

간고지는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써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절에 있는 세 개의 일본 국보는 다음과 같다.


  • 본당(本堂) 또는 극락방(極楽坊)
  • 선실(禅室)
  • 오층소탑(五重小塔)


나라 시대에는 주변의 도다이지, 고후쿠지와 같은 큰 절이었으나 중세 이후 점차 쇠퇴해 현재는 두 개의 사원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극락방이 있는 곳이 진언율종에 속하고 다른 한 곳은 화엄종에 속한다.[3]

4. 1. 간고지(극락방)



'''극락방'''(極楽坊)은 일본 나라현 나라시 중원정에 있는 진언율종 사찰인 간고지(원흥사)의 건축물이다.

나라 시대에는 도다이지, 고후쿠지 등과 같이 큰 절이었으나, 중세 이후 쇠퇴하여 현재는 두 개의 사원으로 나뉘었다. 이 중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방이 있는 곳은 진언율종에 속하며, 다른 한 곳은 화엄종에 속한다.

간고지에서 가장 잘 보존된 부분은 Gokurakubō|극락방일본어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고도 나라의 문화재" 중 하나이다. 이곳에는 세 개의 일본 국보가 있다.

  • Gokurakubō|극락방일본어: 사찰의 몇 안 되는 잘 보존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3]
  • 선(禪)실
  • 소형(높이 5.5미터) 5층탑


지광만다라(판화) (중요문화재)


나라 시대 승려 지광(智光)이 그리게 한 극락 정토의 변상도인 '''지광만다라'''가 있었다. 헤이안 시대 후기 말법사상의 유행과 아미타여래 정토신앙의 융성으로 이 만다라가 신앙 대상이 되었다. 만다라 봉안 당(堂)은 '극락원'(현재 극락당)이라 불리며, 점차 원흥사 본체와는 별개의 사찰로 발전하였다. 이것이 현재 나라시 중인정에 있는 원흥사 극락방이다. 현존하는 원흥사 극락방의 본당과 선실은 나라 시대 승려들이 거주했던 승방을 가마쿠라 시대에 개축한 것이다.

4. 2. 간고지(탑적)

나라 시대에는 주변의 도다이지, 고후쿠지와 같은 큰 절이었으나 중세 이후 점차 쇠퇴해 현재는 두 개의 사원으로 나뉘어 있다. 이 중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 지정된 극락방이 있는 곳이 진언률종에 속하고 다른 한 곳은 화엄종에 속한다.

사찰 중 가장 잘 보존된 부분은 고쿠라쿠보|極楽坊일본어로 알려져 있으며, 진언율종에 속한다. 이곳은 유네스코(UNESCO)가 세계유산 "나라의 고도(古都)의 역사적 건조물"로 지정한 나라의 사찰, 신사 및 기타 장소들 중 하나이며, 세 개의 국보를 보유하고 있다.

  • 고쿠라쿠보|極楽坊일본어 (극락방): 사찰의 몇 안 되는 잘 보존된 건축물 중 하나이다.
  • 선(禪) 방
  • 소형(높이 5.5미터) 5층탑

  • 본당·극락당(국보) - 극락방본당, 만다라당이라고도 한다. 본존인 지광만다라도(판화 및 견본)를 수자 안에 봉안한다. 팔작지붕, 기와지붕이며, 동쪽을 정면으로 하여 건립되었다(동쪽을 정면으로 하는 것은 아미타당 건축의 특징이다). 이 건물은 팔작지붕의 처마 측면(지붕의 모양이 사다리꼴이 아니라 삼각형으로 보이는 측면)을 정면으로 하는 점, 정면 기둥 사이의 간격을 짝수인 6칸으로 하고 중앙에 기둥이 있는 점이 특이하다(불교의 당탑은 정면 기둥 사이의 간격을 3칸, 5칸 등의 홀수로 하고 정면 중앙에 기둥이 없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부는 마루로 된 내진 주위를 다다미를 깐 외진이 둘러싸고 있으며, 내진 주위를 염불을 외우며 걸어 다니는 "행도"에 적합한 구조이다. 가마쿠라 시대 간겐(寛元) 2년 옛 승방의 동쪽 끝 부분을 개조한 것으로, 내진 주위의 두꺼운 각기둥과 천장 판재에는 나라 시대의 부재가 재활용되었다. 또한, 지붕 기와의 일부에도 아스카 시대~나라 시대의 옛 기와가 사용되었다. 여기에 사용된 옛 기와는 상부가 가늘게 좁아지고 하부가 넓은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으며, 이 기와를 겹쳐 잇는 잇기 방식을 행기葺(ぎょうきぶき)이라고 한다.[4]
  • 선실(국보) - 맞배지붕, 기와지붕. 본당 서쪽에 처마를 맞대고 건립되었다. 원래는 현재의 본당을 포함하여 동서로 긴 하나의 승방이었던 것을 가마쿠라 시대에 개축한 것이다. 정면 4곳에 판문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현존 부분은 4구획으로, 1구획에는 5~8명의 승려가 생활했다고 한다. 본당과 마찬가지로, 부재와 지붕 기와의 일부에는 나라 시대의 것이 남아 있다. 2000년 (헤이세이 12년)의 원흥사문화재연구소 발표에 따르면, 선실의 부재를 나무의 나이테 연대 측정법으로 조사한 결과, 서기 582년 벌채된 나무가 사용되었다고 하며, 사실이라면 이 건물의 일부에는 법륭사 서원가람보다 오래된 목재가 사용된 셈이다.[4]

5. 만엽집(萬葉集)

만엽집에는 간고지(元興寺)의 승려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는 시가 실려 있다.[2] 이 시인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의 깊어진 이해는 나라 거리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 그의 시는 아마도 그의 과소평가된 처지를 슬퍼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소박한 방식으로 그의 말은 현대 독자들을 잠시 8세기의 그의 조용한 시각으로 되돌려 놓는다.[2]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흰 구슬이여 –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해도 좋으리!

:나 혼자만 그 가치를 알고 있으니

:다른 이는 알지 못한다 해도 –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해도 좋으리!

:: – 간고지(元興寺)의 한 승려[2]

참조

[1] 간행물 Pamphlet printed by 元興寺文化財研究所 (Gangō-ji bunkazai kenkyūsho) http://www.gangoji.o[...] 元興寺文化財研究所 (Gangō-ji bunkazai kenkyūsho)
[2] 서적 The Manyōshū Nippon Gakujutsu Shinkokai 1969
[3] 웹사이트 奈良県指定文化財一覧 http://www.pref.nara[...]
[4] 웹사이트 奈良市指定文化財一覧 http://www.city.nara[...]
[5] 데이터베이스 元興寺極楽坊境内 2004
[6] 웹사이트 管理人不在の元興寺塔跡 ボランティアら協力し23日から特別拝観 https://www.asahi.co[...] 朝日新聞デジタル 2024-03-21
[7] 웹사이트 元興寺塔跡 ご拝観について https://www.instagra[...] 奈良市観光協会 Instagram 2024-10-12
[8] 데이터베이스 元興寺塔跡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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