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계림군은 조선 세조의 증손이자 덕종의 손자로, 월산대군의 서자 덕풍군의 아들이며, 중종의 왕비 장경왕후의 조카이다. 성종의 아들 계성군의 봉사손으로 계림군에 봉해졌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으나, 선조 때 신원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사형된 왕족 - 견성군
견성군 이돈은 조선 성종의 아들로 연산군 시대에 횡포와 부정행위를 저질렀으나 중종반정 이후 공신이 되었고, 이후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된 후 신원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다. - 사형된 왕족 - 이지 (1598년)
이지는 광해군의 장남으로 1598년에 태어나 세자 책봉 후 인조반정으로 폐세자가 되어 강화에 위리안치되었다가 1623년 자결한 인물이다. - 1502년 출생 - 이황
이황은 16세기 조선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발전시키고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의 저서를 남기고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으며, 만년에 도산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다 문묘에 종사되었다. - 1502년 출생 - 교황 그레고리오 13세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1572년부터 1585년까지 재임한 제226대 교황으로, 그레고리력 도입을 통해 달력 체계를 개선하고, 예수회와 오라토리오회를 후원하며, 가톨릭 교회 개혁에 힘썼다. - 1545년 사망 - 윤임
윤임은 조선 중기 무신이자 정치가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으나, 인종 즉위 후 윤원형과의 갈등 속에 을사사화로 유배되어 사사되었으며, 그의 생애는 당쟁 속 시대상을 보여주며 정치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논란과 엇갈린 평가를 남긴다. - 1545년 사망 - 인순공주
인순공주는 조선 중종과 문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공주로, 명종의 친동생이지만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묻혔으며, 명종 때 명복을 빌던 사찰 혁파 상소가 있었다.
계림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계림군 |
원어 이름 | 桂林君 |
휘 | 이유(李瑠) |
작위 | 조선의 왕족 |
가계 | |
부친 | 덕풍군 (친부) · 계성군 (양부) |
모친 | 파평현부인 윤씨 (친모) 안산군부인 원씨 (양모) |
배우자 | 연창군부인 죽산 안씨(안가이) 오천군부인 동래 정씨(정수정) 군부인 교하 노씨(노진덕) |
자녀 | 5남 3녀 |
생애 | |
출생일 | 1502년 |
사망일 | 1545년 |
묘소 | |
능묘 | 계림군 묘역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호국로 1245번길 |
2. 생애
계림군은 조선의 왕족으로, 월산대군의 서손자이자 덕풍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중종의 왕비인 장경왕후의 언니인 파평현부인 윤씨이다. 처음에는 '''계림부정'''(桂林副正)에 봉해졌으나, 성종의 아들인 계성군의 제사를 받드는 후사(봉사손)로 입적되면서 '''계림군'''(桂林君)으로 진봉되었다.
그의 생애는 1545년 발생한 을사사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외숙부인 윤임 등이 어린 명종 대신 계림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고변으로 인해 역모 혐의를 받게 되었다.[1] 이 사건으로 계림군은 강원도 안변으로 도피하여 숨어 지냈으나 곧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혹독한 국문 끝에 결국 역모 혐의를 인정하고 거열형이라는 참혹한 형벌을 받아 처형되었으며, 그의 직계 가족 대부분도 함께 화를 입었다.
사후 선조 대인 1577년에 이르러 억울함이 인정되어 신원이 회복되었다.
2. 1. 가계와 배경
세조의 증손자이며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의 장남인 월산대군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월산대군의 서자인 덕풍군이며, 어머니는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장녀인 파평현부인 윤씨이다.중종 비 장경왕후는 계림군의 이모이며 대윤의 영수인 윤임은 외숙부이다. 효혜공주, 인종과는 친가로는 6촌 형제이며 외가로는 이종 사촌 관계이다.
처음에는 '''계림부정'''(桂林副正)에 봉해졌다가, 이후 성종의 둘째 아들인 계성군의 봉사손(제사를 받드는 후손)으로 입적되면서 '''계림군'''(桂林君)에 봉해졌다. 첫 번째 부인은 정의공주의 손자인 안방형의 딸 연창군부인 죽산 안씨이며, 두 번째 부인은 정유침의 딸인 오천군부인 연일 정씨이다. 《사미인곡》으로 유명한 송강 정철은 계림군의 처남이며,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는 처형이다.
2. 2. 을사사화 연루와 죽음
계림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후궁인 귀인 남씨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중종의 맏딸인 효혜공주 역시 이모인 윤씨와 남귀인을 어머니처럼 따랐다. 효혜공주가 딸 김선옥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윤씨는 남귀인과 함께 조카손녀인 선옥을 길렀다. 남귀인은 효혜공주의 재산이 사위인 연성위 김희의 첩에게 넘어갈 것을 우려하여 여덟 궤짝의 재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남귀인은 임종 전 윤씨에게 "효혜공주의 딸이 크면 돌려주라"는 유언과 함께 재물을 맡겼다. 이후 윤씨는 이를 보관하다가 임종을 앞두고 둘째 아들인 계림군에게 네 궤짝, 장남 파림군과 막내아들 전성부정에게 각각 두 궤짝씩 나누어 주었다. 이 재산 분배에 불만을 품은 계림군의 형수 허씨와 제수 신씨가 문정왕후에게 하소연하면서, 문정왕후는 계림군을 크게 꾸짖고 미워하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희빈 홍씨의 제부인 경기 감사 김명윤은 유관, 유인숙, 윤임 등이 계림군이나 봉성군 중 한 명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 한다는 역모를 고변했다. 이 사건이 바로 을사사화의 시작이었다.[1] 을사사화로 윤임을 비롯한 대윤(大尹) 세력이 대거 숙청되었다.
명종실록에 따르면, 윤임은 어린 명종이 안질을 앓고 있어 정사를 제대로 돌볼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계림군이나 봉성군을 왕위에 올리려 모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윤임은 계림군에게 직접 "네가 당연히 즉위하여야 된다"고 말하며 추대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이 고변으로 역모의 추대자로 지목된 계림군은 강원도 안변의 황룡산으로 도망쳐 토굴을 짓고 머리를 깎아 중 행세를 하며 숨어 지냈다. 그러나 토산 현감 이감남에게 발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다. 곧 국문청이 설치되었고, 계림군은 압슬형과 낙형 등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결국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죄를 시인하였으며, 대명률의 모반대역죄가 적용되어 거열형에 처해진 뒤 시신은 효수되었다. 그의 가족들 또한 연좌되어 처벌받았다.
2. 3. 사후
계림군의 다섯 아들 중 넷째 정양군과 다섯째 은양군은 나이가 어려 연좌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머지 세 아들인 연양정 이시, 금양수 이형, 운양수 이후는 연좌되어 모두 처형되었으며, 왕실 족보인 《선원록》에서도 이름이 삭제되었다.[2]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계림군의 처형(妻兄)인 인종의 후궁 귀인 정씨를 궁궐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명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3] 이후 계림군은 선조 때인 1577년(선조 10년)에 이르러 무고함이 인정되어 신원되었다.3. 가족 관계
세조의 증손자이며 덕종(의경세자)과 인수대비 한씨의 장남인 월산대군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월산대군의 서자인 덕풍군이며, 어머니는 파원부원군 윤여필의 장녀인 파평현부인 윤씨이다.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는 계림군의 이모이며, 대윤의 영수인 윤임은 외숙부이다. 이 때문에 효혜공주, 인종(仁宗)과는 친가로는 6촌 형제이면서 외가로는 이종사촌 관계가 된다.
처음에는 '''계림부정'''(桂林副正)에 봉해졌으나, 이후 성종의 둘째 아들인 계성군(桂城君)의 봉사손(제사를 받드는 후손)으로 입적되면서 '''계림군'''(桂林君)으로 진봉되었다. 첫 번째 부인은 정의공주(세종의 딸)의 증손녀인 연창군부인 안가이이며, 두 번째 부인은 정유침의 딸인 오천군부인 정수정이다. 《사미인곡》으로 유명한 정철은 계림군의 처남(두 번째 부인의 남동생)이며,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는 처형(두 번째 부인의 언니)이다. 세 번째 부인은 노진덕으로, 처음에는 첩이었으나 후에 부인으로 진봉되었다.
구분 | 이름 | 생몰년 | 비고 | |
---|---|---|---|---|
조부모 | 친조부 | 월산대군(月山大君) | 1454년 ~ 1488년 | 덕종과 인수대비의 장남 |
친조모 | 부부인 원주 김씨 | ? ~ ? | 월산대군의 정실 | |
외조부 | 윤여필(尹汝弼) | 1466년 ~ 1555년 |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 |
외조모 | 순천부부인 박씨(順天府夫人 朴氏) | ? ~ 1498년 | ||
부모 | 아버지 | 덕풍군(德豊君) | 1485년 ~ 1506년 | 월산대군의 서자 |
어머니 | 파평현부인 윤씨(坡平縣夫人 尹氏) | 1485년 ~ 1536년 | 윤여필의 장녀 | |
형제 | 형 | 파림군(坡林君) 이주(李珘) | 1500년 ~ 1541년 | |
동생 | 전성부정(全城副正) 이리(李璃) | 1506년 ~ 1545년 | ||
배우자 | 정부인 | 연창군부인(延昌郡夫人) 안가이(安加伊) | 1501년 ~ ? | 정의공주의 증손녀, 안방형의 딸 |
계부인 | 오천군부인(烏川郡夫人) 정수정(鄭守貞) | ? ~ ? | 정유침의 딸, 정철의 누이 | |
부인 | 노진덕(盧眞德) | 1504년 ~ ? | 첩실에서 부인으로 진봉 | |
자녀 | 장남 | 연양군(延陽君) 이시(李諟) | 1518년 ~ 1545년 | 생모: 연창군부인 안씨 |
차남 | 금양수(金陽守) 이형(李詗) | 1522년 ~ 1545년 | 생모: 부인 노씨 | |
삼남 | 운양수(雲陽守) 이후(李詡) | 1526년 ~ 1545년 | 생모: 부인 노씨 | |
사남 | 정양군(正陽君) 이회(李誨) | 생몰년 미상 | 생모: 부인 노씨 | |
오남 | 은양군(恩陽君) 이량(李諒) | 1544년 ~ ? | 생모: 부인 노씨 | |
장녀 | 이옥향(李玉香) | 1521년 ~ ? | 생모: 부인 노씨, 송미로의 처 | |
차녀 | 이옥수(李玉秀) | 1525년 ~ ? | 생모: 부인 노씨, 김난의 처 | |
삼녀 | 이몰노리(李毛乙老里) | 1542년 ~ ? | 생모: 측실 미상, 김대년의 처 | |
손자 | 회은군(懷恩君) 이덕인(李德仁) | 1586년 ~ 1644년 | 정양군 이회의 아들, 심기원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됨 | |
기타 가까운 친척 | 외숙부 | 윤임(尹任) | 1487년 ~ 1545년 | 대윤의 영수 |
이모 |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 1491년 ~ 1515년 | 중종의 계비 |
참조
[1]
서적
명종실록
1545-09-01
[2]
서적
명종실록
1546-09-10
[3]
서적
명종실록
1545-12-1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