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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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희문은 1396년 한양도성 축조와 함께 건립된 문으로, 처음에는 수구문으로 불리다가 이후 광희문으로 개칭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시신을 도성 밖으로 내보내는 통로로 사용되어 '시구문'으로도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손상되지 않았으나, 한국 전쟁 중 파괴되어 1976년에 복원되었으며, 현재는 도로 건설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에 위치해 있다. 광희문은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에 위치하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접근 가능하다. 또한 천주교 성지로, 신유박해 때 순교한 가톨릭 신자들의 시신이 광희문을 통해 버려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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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 [지명]에 관한 문서 | |
---|---|
위치 정보 | |
![]() | |
기본 정보 | |
이름 | 광희문 |
로마자 표기 | Gwanghuimun |
한자 표기 | 光熙門 |
종류 | 한양도성의 일부 |
다른 이름 | 남소문 (南小門) 수구문 (水口門) 시구문 (屍口門) |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2가 105-30번지 |
면적 | 약 700㎡ |
역사 | |
시대 | 조선 태조 5년 (1396년) |
건설 | 1396년 |
파괴 | 1592년 ~ 1593년 (임진왜란) 1928년 |
재건 | 1710년대 1975년 |
관리 | |
상태 | 복원됨 |
기타 | |
문화재청 검색 | http://english.cha.go.kr/ |
한양도성박물관 | https://museum.seoul.go.kr/scwm/board/NR_boardView.do?bbsCd=1002&seq=20201215133223916 |
경향신문 기사 | https://www.khan.co.kr/article/202201202114005 |
동아일보 기사 |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5030700209206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07&officeId=00020&pageNo=6&printNo=16440&publishType=00020 |
2. 역사
1396년 한양도성 축조와 함께 건립된 광희문은 1711년부터 1719년까지 재건되었다.[2]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으나, 한국 전쟁으로 상당 부분 파괴되었다.[2] 이후 1976년에 복원되었는데, 도로 건설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남쪽으로 약간 옮겨졌다.[2]
2. 1. 조선 초기
1396년 한양도성 축조와 함께 건립되었으며, 1711년~1719년 재건되었다.[2]2. 2. 조선 후기
도성 내부에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고, 장례 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은 사소문(四小門) 중에서도 소의문과 광희문밖에 없었다. 창의문은 산에 있는데다 출입이 불편했고, 혜화문은 닫혀있는 숙정문을 대신해 북문으로 쓰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광희문으로 시신이 통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왕의 친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경빈 김씨, 명온공주, 희빈 장씨의 장례행렬이 광희문을 통과했다. 능(陵)을 제외하고 동쪽에 위치한 원(園)과 묘(墓)로 향할 때 이 문이 사용되었다.[21] 광희문 바깥은 금표여서 묘를 쓰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도교 부근과 함께 무덤이 가장 많은 곳이 되었다.[25]조선 후기에는 연산군 대에 혁파되었던 동활인서를 동부 숭신방(崇信坊)에서 남부 두모방(豆毛坊)[26]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활인서에서는 환자를 격리하고 치료하는 것 이외에도 병들어 죽은 자를 처리하는 일도 담당하였으며, 이를 처리하기 위해 광희문 바깥에 시체를 매장하여 무덤을 만들었다.[27]
이런 이유로 시신이 지나다니는 문이라는 의미의 '''시구문'''(屍口門)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9] 광희문은 부정한 문, 즉 '''부정문'''(不淨門)으로 취급되기도 하여 한양도성의 문을 부를 때 이 문을 제외하고 8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28] 문에 대한 인식이 민간에 정착함에 따라 광희(光明)라는 이름보다도 수구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고, 《지봉유설》 등 17세기에는 남소문의 이름을 광희문으로 혼동하는 경우도 발생했다.[29]
광희문 인근 지역 마을 이름에 '신당(神堂)'이 들어가 현재 신당동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까닭을 광희문이 갖는 죽음에 대한 속성과 결부짓는 해석도 존재한다. 광희문이 죽음과 관련되어 주변에 무녀촌이 형성되어 신당이 들어섰다는 것이 이 해석의 골자이다.[30]
고종 연간에는 광희문 외곽 구릉지에 묘지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1902년에는 일본인을 위한 화장터가 생기고, 신당리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9] 가난한 하층민들이 여기에 불법 건축물을 지어 거주하기도 하였다. 공동묘지 한가운데에 움막을 지어 아편굴을 만드는 사례도 나타났다.[31]
1907년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항거하다 살해당한 병사들의 시신이 광희문 바깥에 버려진 모습이 프랑스 〈릴뤼스트라시옹〉지에 실리기도 하였다.[32] 이때 광희문 바깥에 놓인 시신은 총 60구로, 친척이 찾아오지 않은 시신은 모두 광희문 바깥 묘지에 묻었다.[33]
2. 3. 일제강점기
광희문은 1396년에 건립되었으며, 1711년부터 1719년까지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광희문은 거의 손상되지 않고 남아있던 유일한 문이었다.[2]2. 4. 현대
한국 전쟁으로 광희문이 상당 부분 파괴되었으나, 1976년에 복원되었다.[2] 현재의 광희문은 도로 건설로 인해 원래 위치보다 약간 남쪽에 있다.[2] 서울특별시 중구 광희동 2가에 있으며, 금호동길과 퇴계로가 만나는 교차로에 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는데, 이 역은 서울 지하철 2호선과 서울 지하철 4호선이 지난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2호선 3번 출구로 나와 남쪽으로 약 반 블록, 4호선 4번 출구로 나와 동쪽으로 약 2블록 반 정도 가면 광희문이 있다. 지금은 광희문 위로 올라갈 수는 없지만, 문을 통과하여 연결된 한양도성 구간을 둘러볼 수 있다.3. 건축적 특징
광희문은 숭례문, 흥인지문을 제외한 다른 문들과 마찬가지로 단층 목조 문루로 건축되었으며, 육축 높이는 6m, 폭은 8.7m이다. 지붕은 초익공계 우진각지붕 형태이다.[20] 홍예 천장에는 사신도에 따라 청룡과 황룡을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배치하였고, 추녀마루 위에는 장식기와로 용두와 잡석 7개를 두었다.[20]
3. 1. 구조
광희문의 육축 높이는 6m, 폭은 8.7m이다.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제외한 다른 문들과 동일하게 단층으로 된 목조 문루가 설치되어 있다. 문루의 높이는 5.9m이다. 지붕은 초익공계 우진각지붕이다.[20] 홍예의 천장에는 사신도에 따라 청룡과 황룡을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배치하여 흥인지문의 것과 유사한 꼴로 만들었다.[20] 추녀마루 위에는 장식기와로 용두와 잡석 7개를 두었는데, 이는 다른 단층 문루들과 일치한다.[20]3. 2. 문루
숭례문, 흥인지문을 제외한 다른 문들과 동일하게 단층 목조 문루가 설치되어 있다. 문루 높이는 5.9m이다. 지붕은 초익공계 우진각지붕이다.[20] 홍예 천장에는 사신도에 따라 청룡과 황룡을 여의주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배치하여 흥인지문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20] 추녀마루 위에는 장식기와로 용두와 잡석 7개를 두었는데, 이는 다른 단층 문루들과 일치한다.[20]3. 3. 홍예
홍예 천장에는 사신도에 따라 청룡과 황룡을 여의주 사이에 두고 좌우로 배치하여 흥인지문의 것과 유사한 꼴로 만들었다.[20]4. 용도
한양도성의 문은 정문과 간문으로 구분되는데, 광희문은 간문에 속하여 교린 관계인 일본 사신들이 도성으로 들어올 때 이용하였다. 또한 도성 안에서 시신을 밖으로 운반할 때 주로 이용되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시구문(屍口門)'이라는 별명이 붙었다.[9]
광희문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경빈 김씨, 명온공주, 희빈 장씨 등 왕족의 장례 행렬에도 사용되었다.[21] 조선 후기에는 활인서가 동부에서 남부 두모방으로 옮겨 설치되면서, 병들어 죽은 자들을 광희문 밖에 매장하기도 했다.[27]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광희문은 '부정문(不淨門)'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며, 민간에서는 광희문이라는 이름 대신 '수구문'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29] 광희문 인근 지역에 '신당(神堂)'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광희문의 죽음과 관련된 속성과 연관이 있다는 해석도 있다.[30]
고종 연간에는 광희문 바깥 구릉지에 묘지가 빽빽하게 들어섰고, 1902년에는 일본인을 위한 화장터와 신당리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9] 1907년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항거하다 살해당한 병사들의 시신이 광희문 바깥에 버려지기도 했다.[32]
4. 1. 간문(間門)
한양도성의 문은 정문과 간문으로 구분했는데, 광희문은 간문에 속하였다. 이에 따라 사신을 환영할 때 사대교린의 원칙에 따라 교린 관계인 일본 사신들은 간문인 광희문을 통과해 도성에 들어왔다.[21] 개폐 절차와 입직군사에도 차이가 있었다. 정4품인 호군과 30인의 수문병이 근무하던 정문과는 다르게 광희문에는 종6품인 부장 2인과 수문병 10명이 문을 지켰다.[22][23] 개폐 절차도 달랐다. 선전표신과 부험이 모두 필요한 정문과는 다르게 광희문은 개문표신만으로 열었다. 그러나 문을 계속 열어두어야 하는 날에는 광희문에도 선전표신이 갔다.[24]4. 2. 시구문(屍口門)
도성 내부에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고, 장례 행렬이 통과할 수 있는 문은 사소문(四小門) 중에서도 소의문과 광희문밖에 없었다. 창의문은 산에 있는데다 출입이 불편했고, 혜화문은 닫혀있는 숙정문을 대신해 북문으로 쓰인 까닭이었다. 따라서 광희문으로 시신이 통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일반 백성들뿐 아니라 왕의 친척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경빈 김씨, 명온공주, 희빈 장씨의 장례 행렬이 광희문을 통과했다. 능(陵)을 제외하고 동쪽에 위치한 원(園)과 묘(墓)로 향할 때 이 문이 사용된 것이다.[21] 심지어 광희문 바깥은 금표여서 묘를 쓰는 것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도교 부근과 함께 무덤이 가장 많은 곳이 되었다.[25]조선 후기에는 연산군 대에 혁파되었던 동활인서를 동부 숭신방(崇信坊)에서 남부 두모방(豆毛坊)[26]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활인서에서는 환자를 격리하고 치료하는 것 이외에도 병들어 죽은 자를 처리하는 일도 담당하였으며, 이를 처리하기 위해 광희문 바깥에 시체를 매장하여 무덤을 만들었다.[27]
이런 연유로 시신이 지나다니는 문이라는 의미의 '''시구문'''(屍口門)이라는 이명이 붙여졌다.[9] 광희문은 부정한 문, 즉 '''부정문'''(不淨門)으로 취급되기도 하여 한양도성의 문을 부를 때 이 문을 제외하고 8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28] 문에 대한 인식이 민간에 정착함에 따라 광희(光明)라는 이름보다도 수구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였고, 《지봉유설》 등 17세기에는 남소문의 이름을 광희문으로 혼동하는 경우도 발생한다.[29]
광희문 인근 지역 마을 이름에 '신당(神堂)'이 들어가 현재 신당동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진 까닭을 광희문이 갖는 죽음에 대한 속성과 결부짓는 해석도 존재한다. 광희문이 죽음과 관련되어 주변에 무녀촌이 형성되어 신당이 들어섰다는 것이 이 해석의 골자이다.[30]

고종 연간에는 광희문 외곽 구릉지에는 묘지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1902년에는 일본인을 위한 화장터가 생기고, 신당리 공동묘지가 조성되었다.[9] 가난한 하층민들이 여기에 불법 건축물을 지어 거주하기도 하였다. 공동묘지 한가운데에 움막을 지어 아편굴을 만드는 사례도 나타났다.[31]
1907년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에 항거하다 살해당한 병사들의 시신이 광희문 바깥에 버려진 모습이 프랑스 〈릴뤼스트라시옹〉지에 실리기도 하였다.[32] 이 때 광희문 바깥에 놓인 시신은 총 60구로, 친척이 찾아오지 않은 시신은 모두 광희문 바깥 묘지에 묻었다.[33]
5. 가톨릭 성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기에 많은 신자들이 광희문을 통해 버려지면서 천주교의 성지가 되었다.[34]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이를 기리기 위해 현양탑, 제대, 순교현양관 등을 설치하였다.[36][37]
5. 1. 박해와 순교
신유박해 당시 수많은 가톨릭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처형당했는데, 이때 친지를 찾지 못한 시신들은 당시 시구문이었던 광희문을 통과해 바깥에 버려졌다. 총 순교자 중 794명의 시신이 광희문을 통해 버려졌는데, 그중 54구는 신유박해(1801)에서 병오박해(1846) 시기에, 나머지 740구는 병인박해(1866)에서 기묘박해(1879) 시기에 버려진 것으로 추정된다.[34] 특히 성인 103위 중 44위, 복자 124위 중 27위가 이곳에 묻히고 유기된 것으로 추정된다.[35][36]5. 2. 성지화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1999년 5월에 현양탑을 설치하고, 2008년 4월에는 제대를 설치하였으며, 2014년 8월에 광희문 앞에 순교현양관을 설치하였다.[36][37]6. 갤러리
7. 교통
광희문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해당 역은 서울 지하철 2호선과 서울 지하철 4호선 모두에 위치해 있다.[1] 2호선 3번 출구에서 남쪽으로 약 반 블록, 4호선 4번 출구에서 동쪽으로 약 2블록 반 정도 떨어져 있다.[1] 현재 광희문을 방문하는 방문객은 문 위로 올라갈 수 없지만, 문을 통과하여 연결된 한양도성 구간을 둘러볼 수 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The Gates and Walls of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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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News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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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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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서울 풍경, 그리고 ‘그때 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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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문서
《태조실록》에는 홍화문은 속칭 동소문(東小門), 흥인문은 속칭 동대문(東大門),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 숭례문은 속칭 남대문(南大門), 소덕문은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였다고 적혀 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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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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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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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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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회통》 4권, 兵典 啓省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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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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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신당동 (서울)|신당동]]에 해당한다. 동활인서 터는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236번지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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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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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卒掩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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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성지의 실체 규명과 순교자 영성", 《제1회 광희문성지 학술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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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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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희문 성지는 한국의 카타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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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웹인용
"[교황 방문지]서소문 순교 성지…시복 124위 중 27위 순교"
https://www.news1.kr[...]
2020-12-30
[37]
웹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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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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