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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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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요한 22세는 1316년부터 1334년까지 재위한 교황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하고 교황청에서 일했으며, 아비뇽 유수 시기에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교황청의 행정을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교황령을 편찬하여 교회법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마녀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다루었으며, 토마스 아퀴나스를 시성했다.

요한 22세는 프란치스코회 청빈 논쟁에서 교회의 재산 소유를 옹호하며 프란치스코회와 갈등을 빚었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 황제 선출 및 교황권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또한 지복직관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으나, 사망 직전 입장을 철회했다. 그는 로타 법정을 정비하여 교황청의 사법 기능을 강화했으며, 연금술을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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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2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개요
14세기 교황 요한 22세 프레스코 초상화 (아비뇽 루르 궁 소장)
14세기 교황 요한 22세 프레스코 초상화 (아비뇽 루르 궁 소장)
이름요한 22세
로마자 표기Ioannes PP. XXII
직책로마 교황
신상 정보
출생명자크 뒤에즈 또는 드외즈
출생일1244년경
출생지프랑스 왕국 카오르
사망일1334년 12월 4일
사망지아비뇽, 콩타 베네생, 교황령
국적프랑스
경력
교황 즉위1316년 8월 7일
교황 퇴위1334년 12월 4일
이전 교황클레멘스 5세
다음 교황베네딕토 12세
추기경 서임1312년 12월 23일
추기경 서임자클레멘스 5세
교회 정보
소속 교회가톨릭 교회
스타일
경칭성하
존칭각하
종교적 호칭거룩하신 아버지
사후 호칭없음

2. 생애 초기와 교황 선출

프랑스 카오르에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난 자크 뒤에즈는 몽펠리에 대학교파리 대학교에서 법학과 신학을 공부했다.[20] 툴루즈와 카오르에서 교회법과 시민법을 가르쳤다. 1300년 나폴리의 카를로스 2세의 추천으로 프레쥐스의 주교가 되었고, 1309년 카를로 2세의 재상으로 등용되어 아비뇽으로 발령되었다. 1312년 12월 23일 교황 클레멘스 5세에 의해 포르토-산타루피나의 주교급 추기경에 서임되었다.[19]

1314년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선종한 후, 리옹에서 콘클라베가 소집되었으나 추기경들이 두 파벌로 나뉘어 합의를 이루지 못해 2년 3개월간 교황좌가 공석 상태였다. 결국 1316년 자크 뒤에즈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요한 22세라는 이름을 선택하고 리옹에서 즉위하였다. 그는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아비뇽 유수 시대를 계속 이어나가 로마가 아닌 아비뇽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였다.[19]

3. 교황 통치와 업적

요한 22세는 뛰어난 행정가로서 교회 조직을 효율적으로 재편성하고 재정을 확충했다.[19][21] 1331년 고향 카오르에 대학교(카오르 대학교)를 창설하고,[4][7] 아비뇽도서관을 설치했다.[4]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전 기독교 국가에 통용되는 학위 인정을 승인하여 대학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4]

1328년 프란치스코회 수사 피에트로 라이날두치가 니콜라오 5세를 자칭하며 대립교황이 되었지만, 1330년 퇴위했다.[4]

요한 22세는 1316년 9월 15일 성직자 녹(祿)에 관한 교황 칙서 《에크스 데비토(Ex debito)》를 반포, 교황권에 의한 "전반적인 유보" 대상이 되는 녹을 정밀하게 정의했다.[8] 이는 아비뇽 교황의 성직록 정책 및 교황청 행정의 근간이 되었다.[8] 클레멘스 5세와 자신이 발한 교령(교황 결정이 기록된 서한) 중 교의나 교회법 관련 내용을 편찬, 『교황 교령집』을 발간하여 교회법 발전에 기여했다.[4] '삼위일체 축일'을 제정했다.[4]

아시아 전도를 장려했으며,[4] 1318년 기독교인에게 관대했던 무슬림 통치자 우즈베크 칸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21]

종교 정책 면에서 마녀이단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하고,[4] 1326년 교황 칙서 ''Super illius specula''를 통해 마법 관련자들을 파문하겠다고 경고했다.[2] 1320년 종교 재판에서 마법을 다룰 수 있도록 허가했다.[2] 신학자 오컴의 윌리엄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대해 이단심문을 행했고(오컴은 도망, 에크하르트는 투옥 중 사망),[4] 1329년 칙서 《주님의 땅에서》(In Agro Dominico)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저술을 이단으로 단죄했다.[22] 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대립, 그를 옹호한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를 파문했다.[4]

3. 1. 잉글랜드와의 관계

교황 요한 22세는 1316년 12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2세로부터 더블린과 캐셜의 공석인 주교구에 관한 사절단을 받았다.[1] 에드워드 2세는 자신이 선호하는 임명자를 제시했고, 요한 22세에게 아일랜드 원주민을 주교나 대주교로 승진시키지 말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1] 이에 요한 22세는 오소리 주교 윌리엄 피츠존을 캐셜 주교로 임명하고, 에드워드 2세가 추천한 알렉산더 비크노르를 더블린 주교로 임명했다.[2]

1318년 1월, 요한 22세는 에드워드 2세에게 에드워드 브루스를 상대로 승리한 것을 축하하는 서한을 보냈다.[3] 그는 에드워드 2세의 모든 적을 파문한다고 결정했고, 이후 로버트 브루스와 에드워드 브루스를 지목했다.[3] 요한 22세는 에드워드 2세가 비엔 협의회에서 부과한 십자군세를 유지하도록 허용하는 한편, 잉글랜드가 교황의 봉토이며 교황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함을 상기시켰다.[4] 몇 달 후, 요한 22세는 아일랜드 군주들이 에드워드 2세를 아일랜드의 주권 군주에서 교체해 달라고 청원하는 내용을 접수했다. 이들은 잉글랜드의 역대 국왕들이 헨리 2세에게 아일랜드를 하사한 교황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5] 요한 22세가 에드워드 2세에게 보낸 서한은 아일랜드 영주에 대한 교황의 재평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님을 시사했다.[6]

3. 2. 토마스 아퀴나스 시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시성 관련 예비 조사는 1317년 11월까지 베네벤토 도미니코 수도원장인 기예르모 데 토코가 이끌었다.[1] 1318년 여름, 교황 요한 22세는 데 토코를 만나 시칠리아 군주들이 아퀴나스의 시성을 위한 교황 조사를 간청하는 서한을 제시받았다.[1] 데 토코는 또한 아퀴나스의 기적에 대한 공증 기록과 군주 및 대학교에서 아퀴나스 시성을 요청하는 서신을 교황에게 전달했다.[1] 교황 요한 22세는 제시된 기록을 심사하기 위해 도미니코 수도회 출신이 아닌 세 명의 추기경을 선택했고, 오류를 발견하지 못한 그들은 교황에게 권고안을 전달했다.[1] 이후 교황은 교황 사절로 나폴리 대주교 움베르토, 비테르보 주교 안젤로, 그리고 참석하지 못한 판돌포 데 사벨로를 임명하는 두 개의 서신을 발송했다.[1]

데 토코는 나폴리 대주교 궁에 세 명의 교황 사절 중 두 명을 모았고, 조사는 1319년 7월 21일부터 9월 18일까지 진행되었다.[1] 마지막 날, 조사 서류는 서명, 봉인되어 아비뇽의 교황청으로 보내졌다.[1] 문서를 받은 요한 22세는 이를 추기경 위원회에 넘겼다.[1] 1321년 6월 23일, 교황은 아냐니 주교 피터 페리, 테라치나 주교 앤드류, 판돌포 데 사벨로로 구성된 새로운 위원회를 만들었다.[1] 이 조사는 15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위원회는 111명의 증언을 들었다.[1] 위원회는 최종 문서를 교황청에 보냈고, 요한 22세는 1323년 7월 18일 토마스 아퀴나스를 정식으로 시성했다.[1]

4. 주요 논쟁과 갈등

교황 요한 22세의 초상화


요한 22세는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논쟁과 갈등에 휘말렸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프란치스코회와의 청빈 논쟁,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갈등, 지복직관 논쟁 등이 있다.

요한 22세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쓴 책을 이단으로 단죄하여 배포를 금지했다.[22] 프란치스코회 영성파가 주장하는 청빈 사상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오컴의 윌리엄을 파문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와는 황제권과 교황권의 우위를 둘러싸고 대립했다. 루트비히 4세는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와 오컴의 윌리엄의 도움을 받아 교황권에 맞섰으며,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를 내세우기도 했다.

요한 22세는 지복직관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주장하여 신학적 논쟁을 일으켰다. 그는 죄 없이 죽은 영혼이 공심판 전까지는 지복직관을 누릴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파리 대학교 신학부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았다. 결국 그는 임종 직전에 자신의 견해를 철회했다.

4. 1. 프란치스코회 청빈 논쟁

요한 22세la프란치스코회 영성파가 예수와 사도들이 무일푼이었다고 주장하며 교황 니콜라오 3세의 칙서 《씨 뿌리는 자가 나갔다》(Exiit qui seminat)를 인용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자, 이를 지나치다고 판단했다.[24] 1317년, 요한 22세la는 '프라티첼리'(Fraticelli)라고 알려진 그들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비판했다.[24]

1322년 3월 26일, 칙서 《Quia nonnunquam》을 발표하여 전임 교황 니콜라오 3세의 칙서 내용에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언급하며,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근거한 청빈 사상을 조사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위촉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의견이 분분했지만, 대다수는 교회의 재산 소유권 자체를 부정한다며 그들의 청빈 주장이 극단적이라고 비판했다.[24]

1322년 5월 페루자에서 열린 프란치스코회 총회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길을 보여주시며 사람들에게 그 길을 따르도록 모범을 보여주심으로써 사도들도 그 길을 따르셨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물건을 단지 사용만 하셨을 뿐,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그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으셨다고 강하게 주장하는 바이며, 이는 이교적이 아니라 오히려 지극히 가톨릭적이다.”라는 선언을 발표하며 반박했다.[24]

이에 요한 22세la는 1322년 12월 8일 칙서 《교회법의 창시자》(Ad conditorem canonum)를 반포하여 절대적인 재산 포기가 반드시 완덕의 생활이 아니라고 하면서 더는 프란치스코회의 부동산과 재산을 소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며, 프란치스코회원들이 재산과 부동산을 스스로 소유하며 살아가도록 강제하였다. 1323년 11월 12일에는 칙서 《몇몇 사람들 중에는》(Quum inter nonnullos)을 반포해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그릇된 주장이며 이단적이라고 선언했다.[25][26][27]

이에 수도회 총장 체세나의 미켈레, 잉글랜드 관구장 오컴의 윌리엄, 베르가모의 보나그라지아 등 프란치스코회의 유력 인사들이 반발했다. 1324년, 루트비히 4세가 프란치스코회 영성파의 편에 서서 교황을 이단자라고 비난했다. 니콜라오 3세의 칙서 《씨 뿌리는 자가 나갔다》(Exiit qui seminat)가 고정불변이라는 반대자들의 주장에 대한 응답으로 요한 22세la는 1324년 11월 10일 칙서 《그들의 마음이 이러한 고로》(Quia quorundam)를 반포하여 전임 교황의 칙서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1328년, 체세나의 미켈레는 교황의 명령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4세와 결탁한 죄를 추궁받기 위해 아비뇽으로 호출되었다. 체세나의 미켈레는 프란체스코 다스콜리와 베르가모의 보나그라지아, 오컴의 윌리엄과 함께 아비뇽에서 감옥살이를 하였다. 그해 1월, 루트비히 4세는 로마에 입성하여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트비히 4세로 등극하였다. 3개월 후, 루트비히 4세는 요한 22세la의 폐위를 선언하고는 프란치스코회 영성파인 피에트로 라이날두치를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로 내세웠으나, 대립교황을 지지하는 세력은 미미하였다.

1329년, 요한 22세la는 체세나의 미켈레의 주장을 논박하기 위해 《Quia vir reprobus》를 반포하였다. 1330년,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가 요한 22세la에게 항복을 선언했으며, 전 총장 체세나의 미켈레와 오컴의 윌리엄 등이 연이어 사망하였다.[24]

4. 2.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의 갈등

요한 2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두고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4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1세가 경쟁할 때,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다.[23] 그러나 1323년 루트비히 4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요한 22세는 교황의 권위가 황제보다 위에 있다고 주장했고, 이는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 간의 갈등을 일으켰다.[23]

황제 루트비히 4세


루트비히 4세는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와 오컴의 윌리엄에게 교황권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1328년, 루트비히 4세는 로마에 입성하여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를 내세웠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23] 로마 시민 대다수는 교황을 지지했기 때문에, 루트비히 4세가 로마를 떠나자 대립교황은 체포되어 요한 22세에게 항복했다.[14] 요한 22세는 대립교황을 처벌하지 않고 아비뇽 교황궁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4]

이후 루트비히 4세는 1338년 렌제 제국 회의에서 제후들의 다수결로 선출된 로마왕은 교황의 승인 없이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4]

4. 3. 지복직관 논쟁

요한 22세는 지복직관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에 휘말렸다. 교황이 되기 전부터 그는 죄 없이 죽은 영혼은 공심판을 받기 전까지 지복직관을 누릴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식적인 문서에는 이를 기술하지 않았지만, 설교할 때는 한동안 이러한 주장을 계속하였다. 결국 나중에 그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죄 없이 죽은 사람의 영혼은 직접 천국에 들어가 지복직관을 누린다는 것에 동의하였다.[28]

이러한 연유로 요한 22세가 이단자라는 견해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그의 후임자인 교황 베네딕토 12세가 회칙 《찬양하올 하느님》(Benedictus Deus)을 반포하여 지복직관을 공식적으로 교리로 선포하기 전까지는 가톨릭교회의 교리가 아니었고 결국 최종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철회했기 때문에 이단자로 취급되지 않는다.

1331년 11월부터 1332년 3월 사이에 요한 22세는 지복직관에 관해 네 차례 의문스러운 설교를 했다. 요한은 신앙 안에서 죽은 자들은 최후의 심판까지 하느님의 현존을 보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지복직관에 관한 신학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교황으로 재임하는 동안 설교를 통해 이 주장을 계속했지만, 공식 문서로는 가르치지 않았다. 1334년 1월, 소르본 대학교(파리 대학교) 신학부는 요한 22세와 완전히 반대로, 죽은 후 복된 영혼은 지복직관에 이른다고 선언했다. 많은 이들이 신학적으로 무능하다고 여긴[1] 요한은 죽기 전날 입장을 철회하여 은총 속에서 죽은 자들은 즉시 지복직관을 누린다고 동의했다.

1331년 겨울, 교황 요한 22세는 설교를 통해 천국에서 지복을 얻는 조건에 대해, 사람은 죽은 후 즉시 하느님을 뵙고 최고의 행복에 이른다는 기존의 교설(지복직관)과는 달리, 지복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얻을 수 없다는 독자적인 견해를 표명했다.[4] 이 견해는 물의를 빚어 파리 대학교와 많은 재야 신학자들로부터 이단적 교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4] 이로 인해 교황의 만년은 매우 쓸쓸한 것이 되었다.[4] 교황과 반목하는 모든 사람이 요한 22세의 견해를 비판했지만, 교황이 이러한 중대한 위기에서 간신히 구원받은 것은 임종의 참회에 의해서였다.[4]

5. 로타 법정

클레멘스 5세와 요한 22세에 의해 확립된 로타 법정은 처음에는 주로 성직록 관계를 다루는 재판소로 정비되었다.[8] 1331년 요한 22세의 교령 『라티오 유리스(''Ratio juris'' )』에 의해 소송 절차와 규칙, 심결관의 역할 등이 규정되어, 교황청의 최종적인 결정 기관 및 중심 심사 기관으로서 확립되었다.[8] 로타 법원은 10명에서 13명의 심결관이 교회법학의 전통과 합리성을 수호하면서, 가톨릭 세계 전체의 분쟁에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는 최고 법원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15]

6. 연금술 금지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연금술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해왔지만, 특히 교황 요한 22세는 연금술을 금지하는 교령을 발표하고 연금술사와 그 선동자를 처벌 대상으로 선언했다.[17][18]

7. 평가 및 유산

요한 22세는 즉위 당시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청 재정 재건에 힘써 많은 금화를 축적했다고 전해진다.[4] 그는 재정 관리를 위한 행정 개혁을 단행하고, "삼위일체의 축일"을 제정했으며, 『교황 교령집』을 발간하여 교회법 발전에 기여했다.[4]

또한 아시아 선교를 장려하고, 아비뇽에 도서관을 설치했으며, 1331년에는 고향 카오르에 대학교(카오르 대학교)를 창설했다.[4][7] 1318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학위 인정을 승인하여 대학 발전의 기초를 다졌다.

종교 정책 면에서는 마녀이단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했다. 오컴의 윌리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등 신학자들을 이단심문했으며, 신성 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와 대립하여 그를 옹호한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를 파문했다. 1328년에는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가 등장했으나, 1330년 퇴위했다.

참조

[1] 학술지 John XXII and Papal Teaching Authority by James Heft, S.M. https://muse.jhu.edu[...] 1988
[2] 문서 William, Cardinal of Santa Sabina, Letter of 22 August 1320, to Inquisitors of Carcassonne and Toulouse. Latin text in Hansen,''Quellen'' pp. 4–5. Tr. E.P.
[3] 서적 小林(1966)巻末「歴代法王票」p.9
[4] 서적 マックスウェル・スチュアート(1999)pp.166-169
[5] 서적 政治家でもあった[[フィレンツェ]]出身の文人[[ダンテ・アリギエーリ]]は、グエルフィの指導者と目されていた[[ナポリ・アンジュー朝]]のロベルト1世について、「口先だけの王」と断じている。
[6] 서적 小田内(2010)pp.209-213
[7] 문서 カオール大学出身者としては、[[16世紀]]から[[17世紀]]にかけての聖職者・[[法律家]]で[[天文学者]]の[[ジャン・タルド]]がいるが、大学そのものは[[18世紀]]になくなっている。
[8] 학술지 教皇権による聖職禄授与権の立法化とその適用 -ヨハネス22世の聖職禄政策にみる知と権力- https://waseda.repo.[...] 2006-02
[9] 서적 小田内(2010)pp.213-217
[10] 서적 教会の異端審問では、[[拷問]]の適用にはきびしい規制が課せられており、死刑を科すことはできなかった。死刑判決は世俗の裁判所の管轄となっていたので、強情な異端者はそこに引き渡され、刑の宣告や執行がなされた。
[11] 서적 ロバー츠(2003)pp.162-164
[12] 서적 小田内(2010)pp.246-249
[13] 서적 小田内(2010)pp.249-250
[14] 서적 チェザーレのミケーレの流れを汲む人々は、のちに南イタリアのナポリ王国や[[シチリア王国]]に逃亡し、「[[フラティチェッリ]]」と呼ばれる聖霊派の残党と合流した。
[15] 서적 佐藤&池上(1997)p.259
[16] 서적 小林(1966)pp.144-145
[17] 서적 平田(2004)
[18] 서적 フランス王[[シャルル5世 (フランス王)|シャルル5世]]は、[[1380年]]、錬金術の操作に必要な[[器具]]類の所有を禁止した。
[19] 서적 Catholic Encyclopedia Vol. 8 Robert Appleton Company
[20] 서적 Trial by Battle:The Hundred Years War https://books.google[...] Faber and Faber
[21] 서적 The preaching of Islam: a history of the propagation of the Muslim faith https://books.google[...] A. Constable and Company
[22] 서적 Meister Eckhart, the Essential Sermons, Commentaries, Treatises, and Defense: The Essential Sermons, Commentaries, Treatises, and Defense https://books.google[...] Paulist Press
[23] 서적 Medieval Heresy: Popular Movements from the Gregorian Reform to the Reformation https://books.google[...] Blackwell Publishing
[24] 웹인용 History of the Franciscan Movement (3) http://www.christusr[...] Christusrex.org 2001-12-30
[25] 서적 Medieval Italy: An Encyclopedia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06-23
[26] 서적 Papal Primacy: From Its Origins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Liturgical Press 2013-06-23
[27] 서적 Origins of papal infallibility, 1150-1350: 1150 - 1350; a study on the concepts of infallibility, sovereignty and tradition in the Middle Age https://books.google[...] E.J. Brill 2013-06-23
[28] 서적 Vicars of Christ: A History of the Popes https://books.google[...] Citadel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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