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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바벨론 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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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회의 바벨론 유수》는 1520년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쓴 저서이다. 루터는 교황과 로마 가톨릭 교회가 성사(聖事)를 왜곡하여 교회를 감금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이를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힌 것에 비유하여 '바벨론 유수'라고 표현했다. 이 책에서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7성사 중 성찬례, 세례, 고해 성사만을 성사로 인정하고, 평신도에게 빵과 포도주를 모두 나누어 주는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며, 성변화 교리를 부정했다. 또한, 결혼, 서품, 견진, 종부 성사는 성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종교개혁 운동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루터의 급진적인 주장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루터의 성례 이해를 받아들여 성찬례와 세례를 성례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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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바벨론 유수 - [서적]에 관한 문서
서론
제목 (라틴어)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Martini Lutheri
제목 (독일어)Von der babylonischen Gefangenschaft der Kirche
저자마르틴 루터
언어라틴어, 독일어
발표일1520년
장르신학 논문
내용
주제성례전
주요 주장화체설 부정
고해성사의 필요성 감소
견진성사, 혼인성사, 신품성사, 종부성사 부정 또는 축소
영향종교 개혁 가속화
관련 문서
관련 문서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에게 고함

2. 시대적 배경

1520년 10월, 교황 레오 10세의 칙서가 비텐베르크에 도착했을 때, 《교회의 바벨론 유수》는 출판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이 칙서는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루터는 이 책을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교황이 교회를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성좌인 로마바빌로니아에 비유했다. 바빌로니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향에서 추방하여 포로로 잡은 곳이다. 루터는 교황이 로마 가톨릭의 성사와 가톨릭 신학을 통해 교회를 억압하고 있다고 주장했다.[1]

루터는 자신의 저서, 특히 《교회의 바벨론 유수》를 철회하라는 요청을 받았으나, 이 책은 여전히 고백 루터교가 성사의 수와 맺는 관계를 규정하고 있다.[1]

"교회의 바벨론 유수"라는 제목은 대분열 중의 "아비뇽 유수"라는 어려운 시기를 바탕으로 한다. 1305년부터 1416년까지 이어진 장기간의 위기 동안 교회의 권위는 흔들렸고, 공공연하게 이의가 제기되었다. "대분열"이 끝날 무렵에는 교회의 권위가 여전히 유지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종교 개혁의 씨앗은 이미 그 당시에 뿌려졌다.

3. 주요 내용

루터는 가톨릭교회의 7성사를 성경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성찬, 세례, 고해성사만이 진정한 성례라고 주장했다. 그는 견진성사, 결혼, 서품, 종부 성사는 성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2]

루터는 결혼이 성사가 아닌 이유로, 하나님 아버지가 에덴 동산에서 아담하와에게 결혼을 주셨고, 예수가 인간에게 결혼할 수 있는 능력을 주지 않았다는 점을 들었다. 그는 무슬림유대인의 결혼도 기독교 결혼만큼이나 하나님 앞에서 유효하다고 보았다.[3]

루터는 이 책에서 평신도에게 주의 만찬에서 잔을 빼앗는 것, 성변화 교리, 미사가 희생이자 선행이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바벨론 유수"라고 비판했다.[4]

이 작품은 교황적그리스도라고 정면으로 비난하는 등 격앙된 어조를 보였다.[4] 이는 루터의 견해가 급진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3. 1. 성찬

루터는 평신도에게 빵과 포도주를 모두 나누어 주는 양형 영성체를 주장하고, 성변화 교리를 부정했다.[9] 그는 성찬의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임재한다는 실재론(혹은 '공재설')을 옹호했지만,[9] 미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로 보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비판했다.[9] 루터는 성찬을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받는 통로로 이해했다.

3. 2. 세례

루터세례가 칭의를 가져다주는 조건으로 수혜자의 구원하는 믿음과 결합될 것을 제시했다.[2] 즉,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응답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세례가 구원의 기초이며, 이후 타락한 사람도 세례를 통해 다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2]

3. 3. 고해성사

루터는 고해성사의 본질이 사제의 사죄 선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고백과 하나님의 용서 약속에 대한 믿음에 있다고 보았다.[2] 그는 진정한 회개와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며, 가톨릭교회의 고해성사 제도를 비판했다. 루터는 세례, 성찬례와 함께 고해성사만이 성사로 여겨질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 이유는 이 세 가지만이 신성한 제정과 그것들과 관련된 신성한 구원의 약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2]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세례와 성찬례만이 신성하게 제정된 보이는 표징(세례에서는 물, 성찬례에서는 빵과 포도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사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2]

4. '바벨론 유수'의 의미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 praeludium Martini Lutherila(교회의 바벨론 유수)라는 제목은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 제도가 왜곡되어 신자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사용한 표현이다.[4] 루터는 이러한 상황을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에 비유하여 '바벨론 유수'라고 불렀다.

루터는 다음 세 가지를 '바벨론 유수'라고 비판했다.[6]

바벨론 유수의 세 가지
첫째, 평신도에게 주의 만찬에서 잔을 빼앗는 것이다.
둘째, 성변화 교리이다. 루터는 성변화를 부정했지만, 성찬례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재한다는 것은 긍정했다.
셋째, 미사가 희생이자 선행이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다.


5. 영향

《교회의 바벨론 감금》[9]은 출간 즉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종교개혁 운동이 확산되는 데 기여했다. 루터의 급진적인 주장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동시에 종교개혁의 불길을 더욱 거세게 타오르게 했다. 이 책은 루터의 사상이 급진화되는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후 루터는 교황적그리스도로 규정하는 등 더욱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6]

이 책은 라틴어로 출판되었으나, 스트라스부르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토마스 마르너가 루터를 비판하기 위해 즉시 독일어로 번역했다. 마르너는 루터 사상의 과격함을 알려 사람들이 루터 지지를 멈추게 하려 했으나, 오히려 독일 전역에 루터의 사상이 확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6]

하지만 루터의 신랄한 어조에 불쾌감을 느낀 사람도 있었다. 이전에 루터의 활동을 신중하게 지지했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이 책의 출판 이후 루터와 결별하게 되었다.[6]

6. 한국 교회의 수용

한국의 개신교회는 대체로 마르틴 루터의 성례 이해를 따르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개신교회는 성찬세례 두 가지를 성례(또는 성례전)로 인정하며, 양형 영성체, 믿음을 통한 칭의, 만인 제사장직 등의 개혁 신학을 따르고 있다.[9]

참조

[1] 웹사이트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https://lutheranrefo[...] 2019-11-13
[2] 간행물 Luther, Martin http://www.ccel.org/[...] Schaff-Herzog
[3] 웹사이트 Protestantism - Ninety-five Theses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2023-03-21
[4] 문서 Spitz
[5] 간행물 Luther, Martin http://www.ccel.org/[...] Schaff-Herzog
[6] 문서 Spitz
[7] 문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은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벨론 유수, 그리스도인의 자유 등이다
[8] 웹인용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https://lutheranrefo[...] 2019-11-13
[9] 문서 말틴 루터의 종교개혁 3대 논문 컨콜디아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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