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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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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수왕은 백제의 제6대 왕으로, 214년부터 234년까지 재위했다. 재위 기간 동안 신라, 말갈 등과 잦은 전투를 치렀으며, 특히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216년에는 말갈의 침입을 받았으나 격퇴했고, 222년에는 우두성을 약탈하기도 했다. 221년에는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고, 234년에 사망한 후 아들 사반왕이 즉위했으나, 고이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구수왕의 가계와 관련된 기록은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으나, 일부 기록의 연대와 인물에 대한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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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수왕
기본 정보
인물 정보
본명부여구수(扶餘仇首)
별명미상
출생일미상
출생지미상
사망일234년
사망지미상
매장지미상
부왕초고왕
모후미상
왕비미상
자녀사반왕
비류왕
우복
가문부여씨(扶餘氏)
종교미상
묘호미상
시호미상
호칭어라하
재위 정보
즉위년도214년
퇴위년도234년
전임자초고왕
후임자사반왕
왕조미상
연호미상
목록제6대 백제 국왕

2. 생애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초고왕부터 고이왕까지 말갈, 신라 등과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으나, 대부분 백제의 패배로 끝났다고 한다. 또, 재위 말에는 혹심한 가뭄이나 기근 등의 재난이 겹치기도 했다.

216년 음력 8월에 말갈이 적현성을 침범하였으나 성주가 굳게 지켜 물러가게 했고, 왕이 기병 8백 명을 이끌고 적을 추격했으나 사도성 근처에서 멈추었다. 217년 음력 2월에 사도성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졸을 나누어 보내 지키게 하였다. 218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자 신라 내해 이사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8]

234년 구수왕이 죽은 후,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이 즉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 하는 것은 연대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고이왕은 구수왕과는 온조계 왕실 내의 서로 다른 출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구수왕의 차남으로 지목되는 비류왕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는 구수왕의 아들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다. 또,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얻었다고도 한다. 비류왕과 비류왕의 형 사반왕 사이에는 7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므로 형제 여부에 관하여 이견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아버지로 지목하는 구수왕과 형으로 지목한 사반왕이 죽은 뒤 70년만에 즉위하여 40년을 통치한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비류왕을 구수왕의 아들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라 기술하고도 같은 조의 다른 줄에는 생구로 살면서 명성을 얻었다는 구절이 나타난다.

개루왕, 소고왕에 이어 신라, 말갈과의 전쟁이 계속되었다. 신라에는 218년 7월에 쳐들어가 장산성 (경상북도 경주시)을 포위했으나, 신라왕의 반격을 받고 패퇴했다. 222년 10월에는 우두성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에 침입하여 약탈하고, 맞서 싸우는 이벌찬 충훤을 웅곡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동남쪽 감계[3])에서 크게 무찔렀다. 224년 7월에는 일길찬 연진이 침입해 와서 봉산 (경상북도 영주시[4])에서 맞서 싸웠으나 패배했다.

말갈에 대해서는 216년 8월에 적현성까지 침입당해 포위되었으나, 성주가 방어에 힘써 말갈 병사들이 물러간 곳을 추격하여 사도성 부근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에도 220년 10월에 북부 변경에 침입당한 것을 격퇴했으나, 229년 11월에 우곡성 주변에 침입당했을 때는 정예병 300명을 파견했으나, 말갈군의 매복에 끼여 크게 패했다.

재위 21년 만인 234년에 죽었다. 매장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 템플릿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는 백제 제5대 왕 고구려 고국원왕의 장남이었다.[1] 그는 214년, 고구려 고국원왕의 49년간의 통치가 끝나고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는 "키가 일곱 자에 달하고 힘이 남달리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2]"

이 내용은 구수왕과 관련된 내용이 아니므로 삭제한다.

3. 사후

仇首중국어가 죽자 그의 장남 사반이 잠시 제7대 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초고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대 학자들은 경쟁 왕족 출신으로 보고 있다. 두 계보 간의 지속적인 경쟁을 보여주듯, 구수의 차남이 제11대 왕 비류가 되었고, 제14대 왕 근수의 이름은 구수 계보의 후손임을 나타낸다.

4. 가계

항목내용
부왕초고왕
정비?
차비?
아들사반왕, 비류왕비류왕|비류왕한국어 (사반왕, 비류왕은 아들 또는 후손)
아들 또는 후손부여우복
아버지초고왕
어머니알려지지 않음
왕비(들)알려지지 않음
첫째 아들제7대 왕, 사반왕 (沙泮王, ?–234) (왕이 되기 전에는 부여사이(扶餘沙伊)로 알려짐)
손자제11대 왕, 비류왕 (比流王, ?–344) (왕이 되기 전에는 부여비류(扶餘比流)로 알려짐; 삼국사기에는 구수의 아들로 기록되었으나 연대차이로 인해 학자들은 현재 그의 구수의 손자라고 믿고 있음)
손자부여우복 (扶餘優福, ?–?) (321년 내신조평(內臣佐平)에 임명되었고, 327년 그의 형 비류왕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됨)


5. 《삼국사기》 기록의 문제점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초고왕부터 고이왕까지 말갈, 신라 등과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으나, 대부분 백제의 패배로 끝났다고 한다. 또, 재위 말에는 혹심한 가뭄이나 기근 등의 재난이 겹치기도 했다.

216년 음력 8월에 말갈이 적현성을 침범하였으나 성주가 굳게 지켜 물러가게 했고, 왕이 기병 8백 명을 이끌고 적을 추격했으나 사도성 근처에서 멈추었다. 217년 음력 2월에 사도성 옆에 두 개의 목책을 설치하였는데, 동서로 서로 떨어진 거리가 10리였다. 적현성의 군졸을 나누어 보내 지키게 하였다. 218년 왕이 군사를 보내어 신라의 장산성(獐山城)을 포위하자 신라 내해 이사금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여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8]

234년 구수왕이 죽은 후, 아들 사반왕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어려서 정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초고왕의 아우인 고이왕이 즉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이왕이 초고왕의 아우라는 것은 연대상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고이왕은 구수왕과는 온조계 왕실 내의 서로 다른 출신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구수왕의 차남으로 지목되는 비류왕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구수왕의 아들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다. 또, 평민으로 살면서 명성을 얻었다고도 한다. 비류왕과 비류왕의 형 사반왕 사이에는 70년 이상의 연대 차이가 나므로 형제 여부에 관하여 이견이 있다. 《삼국사기》에서 아버지로 지목하는 구수왕과 형으로 지목한 사반왕이 죽은 뒤 70년 만에 즉위하여 40년을 통치한다. 또한 《삼국사기》에서는 비류왕을 구수왕의 아들이자 사반왕의 동생이라 기술하고도 같은 조의 다른 줄에는 생구로 살면서 명성을 얻었다는 구절이 나타난다.

삼국사기』에서는 초고왕근초고로, 구수왕이 근구수로 중복되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5] 즉, 『삼국사기』의 초고왕은 즉위년이 근초고왕과 같은 병오년이며, 재위 기간은 166년부터 214년이고, 구수왕의 재위 기간은 214년부터 234년이다. 근초고와 근구수는 『고사기』의 조고왕, 『일본서기』 및 『일본서기』 주(註) 백제계 사서의 초고, 귀수와 연대상 일치한다. 166년부터 234년은 『후한서』, 『위지』의 시대이지만, 이러한 한적(漢籍)에는 그 시대의 백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5] 이 근초고, 근구수는 후대에 날조된 것으로, 초고와 구수를 각각 근초고, 근구수로 하고, 그 앞에 초고, 구수를 둠으로써 두 배로 늘린 것이며, 기원전 37년부터 시작되는 『삼국사기』의 백제 왕계 중 후대에 가상된 인물이 된다.[5]

참조

[1] 서적 백제의중앙과지방 (Central area and regions of Baekje) Juryuseong 2005
[2] 간행물 삼국사기
[3] 백과사전
[4] 백과사전
[5] 논문 大化前代の紀年(三) https://doi.org/10.3[...] 北海道教育大学 1982-09
[6] 인물 한국학중앙연구원
[7] 기타
[8] 간행물 신라본기 제2 내해 이사금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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