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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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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연수는 1884년에 태어나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광무국 주사, 공무아문 주사, 농상공부 광산국 기사 등을 역임했다.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06년 귀국 후 통감부 경시, 조선총독부 경무관 등을 지냈다. 1907년 고종 퇴위에도 관여했으며, 이후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경무관, 중추원 참의를 역임하며 친일 행적을 보였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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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수
기본 정보
구연수
구연수
본관능성 구씨
출생1455년
사망1504년
묘소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산 55-3
관력
품계숭정대부
관직형조판서
시호양평 (良平)
가족 관계
구치관 (具致寬)
정부인 평산 신씨
배우자정부인 남양 홍씨
자녀4남

2. 생애

구연수는 1884년 4월 도쿄 센슈 보통 중학교 중학과에 입학해 1886년 4월에 졸업하고, 그해 7월 도쿄제국대학 공예학부 채광급야금학과에 입학해 1892년 8월 졸업했다. 도쿄 제국 대학 재학 중 아키타 현에 있던 광산 학교에 입학해 1892년 졸업했다.

1892년 10월 귀국 후 11월 광무국 주사로 임명되었고, 1894년 6월 공무아문 주사, 1895년 4월 농상공부 광산국 기사가 되었다. 1896년 4월 농상공부 광산국 기사가 되었으나,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2. 1. 을미사변 가담과 일본 망명 (1895년 ~ 1906년)

1895년 을미사변 당시 훈련대 제2대대 소속으로 제2대대장 우범선의 부하로 일본인 낭인들의 안내에 협조했다. 명성황후 시해 후 그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태우는 작업을 감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2] 사건 후 이두황, 우범선 등 다른 을미사변 관련자들과 함께 체포령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했다. 처음에는 히로시마, 교토로 도망쳤다가, 명성황후 시해 주범인 미우라 고로 등이 석방되어 일본으로 돌아오자 도쿄로 이동하여 일본 정부의 비호 아래 망명 생활을 하였다.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구연수,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4월 14일 주한일본공사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1906년 한성부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대한제국 순종의 즉위로 특사가 단행되면서 명성황후 시해범들도 사면되었다.

2. 2. 귀국과 친일 행적 (1906년 ~ 1945년)

1906년 한성부통감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대한제국 순종의 즉위로 특사가 단행되면서 명성황후 시해범들도 사면되었다. 귀국한 그는 통감부 경시, 조선총독부 경무관, 경무국 칙임사무관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경찰 최고 직급인 경무관에 임명된 조선인은 구연수 외에 아직까지 알려진 인물이 없어, 일제의 강한 신임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3][4]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사건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받은 송병준의 명령으로 일진회 회원 300여 명을 동원하여 왕궁을 포위하고 시위를 벌여 고종을 퇴위시키는 데 앞장섰으며, 이 공로로 경무사로 발탁되었다.

1910년 10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의 유일한 조선인 경무관으로 임명되었다. 1923년 4월 경무국 사무관을 퇴직한 후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었다.

3. 사후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의 중추원, 경찰, 친일단체 부문에 선정되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장인송병준을사오적
부인송씨송병준의 딸
아들구용서한국은행 초대 총재


5. 평가

(요약 및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참조

[1]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 한국학 중앙 연구원
[2]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02-01
[3]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02-01
[4] 저널 일제 경찰 자료로 본 식민지 경찰 - '공로가 뛰어나고 일반에 귀감'이 된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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