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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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두황은 1858년 한성부에서 태어나 무과에 급제한 후 군인으로 활동했다.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에 참여했으며, 을미사변에 가담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 귀국하여 전라북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한일 병합 후 전라북도 도장관을 지냈다. 그는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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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황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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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두황 |
현지어 표기 | 李斗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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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 자는 공칠(公七), 설악(雪嶽) |
본관 | 인천 |
생애 | 1858년 1월 11일 ~ 1916년 3월 9일 |
종교 | 유교(성리학) → 일본 불교 |
군사 경력 | |
복무 | 조선 육군 |
복무 기간 | 1884년 2월 ~ 1884년 10월 8일 |
최종 계급 | 육군 부령관 |
지휘 | 장위영, 훈련대 제1대대, 훈련대 제2대대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동학 농민 운동 진압, 청일 전쟁 |
기타 이력 | |
기타 이력 | 을미사변 가담, 전라북도관찰사, 전라북도도장관 |
출생지 | 한성부 서부(西部) 방교동 |
부모 | 이명흡, 조씨 |
2. 생애
1858년(철종 9년) 1월 11일 한성부 서부 방교동(현 서울 서대문구 사직동 근처)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83년 말단 무관직에서 시작하여 수문장을 거쳐 훈련원 초관이 되었다. 1884년 수문장이 되었다가 1886년 훈련원주부, 훈련원판관, 훈련원첨정 등을 지냈다. 1889년 흥해 군수를 거쳐 흥양감목관을 지냈다. 1891년 나주감목관이 되었다. 1893년부터는 왕명으로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동학당 토포사에 임명되어 겸직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장위영영관으로서 동학 농민군 진압에 출정하였고, 이후 초토영중군, 죽산부사 겸 양호도순무영우선봉으로 임명되어 동학 농민군과 교전하였다. 충청남도에서 김개남의 동학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퇴하고, 전라북도 전주에서 전주 관군을 도와 전주성을 탈환하도록 도왔다. 1894년 9월 경기도 죽산부사로 부임했으며, 10월 5일 겸임 양호도순무영 우선봉장에 임명되어 동학 농민군 토벌에 다시 참전하였다. 11월에는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 농민군을 전멸시켰다.
청일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에 파견되어 평양에 있던 청군을 공격하기 위한 정찰 수행과 정보 제공을 하였다. 일본군 육군 제5보병사단장 노즈 미치쓰라 육군 중장을 수행하는 한국인병대 제2대대장으로 출전했다. 그는 일본군 육군 5사단의 병참 물자를 지원하고, 평양부 백성을 동원하여 청나라 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업무도 맡았다.
1895년 을미사변에 가담하여 명성황후 시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895년 10월 8일 당시 훈련대 제2대대의 대대장 겸 경복궁 경호관으로 유길준, 우범선, 이주회 등과 함께 일본 낭인들을 지원, 명성황후 제거에 가담하였으며 을미사변 전후로 광화문 경비를 담당하였다.[1] 사건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12년간 생활했다.[1]
1895년 을미사변 가담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져 일본으로 망명하였다.[1]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이두황을 포함한 관련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고, 2월 15일에는 참수명령을 내렸다.[1] 1896년 일시 귀국했지만, 을미사변 관련자 처형 요구 상소가 계속 올라와 1897년 1월 일본으로 재망명하였다. 이후 8년간 일본 도쿄에서 생활하였다.
1904년 3월 고종은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망명자 중 요인 추방을 제의했으나, 일본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1] 1904년 4월 고종은 이두황을 포함한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거절하였다.
1907년 귀국하여 순종 즉위 후 1907년 9월 6일 사면령으로 사면복권되었다. 1908년 1월 21일 전라북도관찰사, 2월 26일 전라북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였다. 1908년 당시 의병전쟁이 치열했는데, 전라북도관찰사 겸 전라북도재판소 판사로 근무하며 의병 진압에 앞장섰다.[2]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과 동시에 전라북도도장관에 유임되었다. 1914년부터 1916년 3월까지 전라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여 조선총독부의 토지 조사 사업에 협력하였다.[2] 191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2. 1. 젊은 시절
1858년(철종 9년) 1월 11일에 아버지 이명흡(李命洽)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성부 서부(西部) 방교동(芳橋洞, 현 서울 서대문구 사직동 근처) 출신의 평민 집안 출신이다. 출생년도는 불확실하여 1858년생 설과 1856년생 설이 있다. 1865년(고종 2년) 2월경부터 가정에서 성리학과 한문을 공부했다. 그는 자신의 종교를 유교라 하였다.그의 선대는 인천백 이허겸이며, 고려말 첨의정승을 지낸 예안군(禮安君) 또는 승안군(承安君) 이지저(李之氐)가 그의 직계 선조였다. 그의 선조들 중 오천 이문화(烏川 李文和, 시호 공도공(恭度公))는 고려말 우정언, 우헌납, 예문관응교 등을 지내다가 조선 건국에 참여하고, 경상도관찰출척사, 예조판서, 전라도체찰사 등을 지냈다. 그러나 이후 그의 가계는 몰락했고, 증조부 이정추(李廷樞)는 경기도의 유생(儒生)이었으며 친할아버지 이익우(李益祐)는 행부호군을 지냈다. 증조부 이정추의 증 규장각직각, 할아버지 이익우의 증 규장각부제학, 아버지 이명흡의 증 규장각제학 벼슬은 후에 그가 출세하고 나서 추증된 것이다.
1882년(고종 19년) 2월 임오군란 후 무과에 급제, 1883년 3월 친군좌영초관(親軍左營哨官)이 되었다. 1883년 말단 무관직에서 시작하여 수문장을 거쳐 훈련원 초관(訓練院 哨官)이 되어 훈련원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젊어서는 객기가 넘치고 서슴없이 바른말 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만년에는 호인이 되어 주변의 비난, 비판, 원한을 사지 않고 무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2. 2. 군인 생활 초반
1884년 12월 27일 수문장이 되었다가 1886년 1월 30일 훈련원주부가 되었으나 3일만에 의원면직했다. 1886년 7월 29일 훈련원판관, 12월 28일 훈련원첨정 등을 지냈다.1887년 다시 훈련원 첨정이 되고, 1889년 9월 1일 흥해 군수로 나갔다가 9월 19일 흥양감목관(興陽監牧官)으로 발령되었다. 1891년 3월 28일 나주감목관(羅州監牧官)이 되었다가 1893년부터는 왕명으로 전라남도, 전라북도의 동학당 토포사(東學黨 討捕使)에 임명되어 겸직하였다.
2. 3. 동학 농민전쟁과 청일전쟁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청일 전쟁 당시에는 일본군에 파견되어 평양에 있던 청군을 공격하기 위한 정찰 수행과 정보 제공을 하였다. 또한, 일본군 육군 5사단의 병참 물자를 지원하고, 평양부 백성을 동원하여 청나라 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업무도 맡았다.2. 3. 1. 동학 농민군 진압 활동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그해 3월 초토영군(剿討營軍)에 임명되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동학 농민군 진압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장위영영관(壯衛營領官)으로서 동학 농민군 진압에 출정하였다. 이후 초토영중군(剿討營中軍)으로 임명되고, 죽산부사 겸 양호도순무영우선봉(竹山府使兼兩湖都巡撫營右先鋒)으로 임명되어 동학 농민군과 교전하였다. 1894년 중반 동학의 북접(北接)들이 제3차 봉기에 참가하여 보은군 보은장내에 모였을 때 사전에 이들의 집회를 알아내 기습하여 크게 이겼다.충청남도로 올라오는 동학군 남접 김개남(金開南)의 동학군을 목천 세성산에서 격퇴하여, 공주로 북상하던 전봉준의 동학군과 이들의 협공 계획을 무산시켰다. 다시 패퇴하는 김개남 동학군과 서인주 동학군을 추격하여 서산, 해미현, 유구(維鳩), 공주, 논산군 노성(魯城), 논산읍 등지에서 많은 동학군과 교전하여 섬멸하고, 전라북도 전주로 내려가 전주 관군을 도와 전주성에 재집결한 동학 농민군과 교전, 대패시키고 전주성을 관군이 다시 탈환하도록 도왔다.
1894년 9월 경기도 죽산부사(竹山府使)로 부임했으며, 죽산부사 부임 직후에도 한동안 장위영부령관을 겸직했다. 10월 5일 겸임 양호도순무영 우선봉장(兼任兩湖都巡撫營右先鋒將)에 임명되어 동학 농민군 토벌에 다시 참전하였다.
1894년 11월 8일부터 11월 14일에는 공주 우금치에서 동학 농민군과 교전하여 6일만에 전멸시켰다. 11월 26일 다시 우선봉장(右先鋒將)에 임명되었다.
2. 3. 2. 청일전쟁 참여
청일 전쟁에 장위영 참령관으로서 평양에 있던 청군을 공격하려는 일본군에 파견되어 정찰 수행과 정보 제공을 하였다. 일본군 육군 제5보병사단장 노즈 미치쓰라 육군 중장을 수행하는 한국인병대 제2대대장으로 출전했다. 그는 일본군 육군 5사단의 병참 물자를 지원하고, 평양부 백성을 동원하여 청나라 군의 시체를 처리하는 업무도 맡았다.2. 4. 을미사변과 망명 생활
1895년 을미사변에 가담하여 명성황후 시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건 이후 일본으로 망명하여 12년간 생활했다.[1]2. 4. 1. 을미사변 전후
1895년(고종 32년) 10월 8일 당시 훈련대 제2대대의 대대장 겸 경복궁 경호관으로 유길준, 우범선, 이주회 등과 함께 일본 낭인들을 지원, 명성황후 제거에 가담하였으며 을미사변 전후로 광화문 경비를 담당하였다.[1]2. 4. 2. 일본 망명생활
1895년 을미사변 가담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이두황은 아들 이진백(李鎭白)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부산으로 도주했다. 부산에서 한국 관리의 눈을 피해 맨몸으로 일본인의 집에 숨었고, 그의 도움을 받아 머리를 자르고 옷을 바꿔 입은 뒤, 부산항에 있던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아들 이진백과 함께 배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1]일본에 도착해서는 일행과 떨어져 히로시마로 건너갔다가 교토로 이동하였다가 다시 도쿄로 은신, 신변보호를 요청하였다. 그는 일본인 경호원 등을 대동하고 일본 각처를 여행다녔다. 일본 망명생활 당시 유길준과 특히 가깝게 지내면서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고, 일본 불교로 개종하여 독실하게 믿었다.[1]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왕명으로 유길준, 조희연, 장박, 권영진, 이두황, 우범선, 이범래, 이진호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2월 15일 고종은 이들에 대한 참수명령을 내렸다.[1]
2. 4. 3. 2차 망명 생활
1895년 11월 법부에서 을미사변 관련자들을 모두 모반자로 지목하여 재판할 때, 궐석으로 재판받았다.[1] 1896년 2월 11일 고종은 왕명으로 유길준,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권영진(權濚鎭), 이두황, 우범선, 이범래(李範來), 이진호(李軫鎬) 등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2월 15일 고종은 이들에 대한 참수명령을 내렸다.1896년 일시 귀국했지만, 그해 6월부터 진사(進士) 정성우(鄭惺愚) 등이 갑신정변 관련자와 을미사변 관련자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처형할 것을 계속 상소하였다. 1897년 1월 을미사변 관련 국사범으로 지목된 그는 체포를 피하여 동대문을 빠져나가 금강산으로 피신, 동해안을 따라 산중에 은신하면서 도보로 부산에 도착, 다시 일본으로 재망명하였다. 이후 8년간 일본 도쿄에서 생활하였다. 도쿄에서 전자판(團子坂)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은신하면서 일본어를 습득했고, 일본의 개화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 및 식산흥업을 연구하였다.
1904년 3월 고종은 일본의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내한하자 망명자 중 요인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변방에 유치시킬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어냈다.[1] 고종이 지명한 요인은 이준용, 박영효, 이규완, 유길준, 조희연, 장박, 이범래, 이진호, 조희문, 구연수, 이두황, 신응희, 권동진, 정난교 등 14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고종에게 약속한 망명자 처분을 이행하지 않았다.[1] 1904년 4월 중순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이두황,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진호, 권동진, 구연수,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일본 망명 생활 도중 일본에서 활개치고 다녔는데, 후쿠자와 유키치가 자기 국모를 시해하고도 은인자중하지 않는다고 질책할 정도였다.
2. 5. 귀국 이후
1896년(건양 원년) 일시 귀국했지만, 그해 6월부터 진사 정성우 등이 갑신정변과 을미사변 관련자들을 역적으로 규정하고 처형할 것을 상소하였다. 고종은 이미 그에게 체포 및 참수 명령을 내렸다가 거두었으나, 을미사변 관련 국사범으로 지목되었기에 1897년(건양 2년) 1월 일본으로 재망명하였다.[1] 이후 8년간 도쿄에서 생활하며 일본어를 습득하고, 일본 개화 지식인들의 도움을 받아 군대 및 식산흥업을 연구하였다. 또, 일본 각지를 여행하며 각 지방의 지식인, 유지들과 교류하였다.[1]1897년에도 김운락, 채광묵, 김석구 등이 이두황, 유길준, 박영효 등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계속 올렸고, 그는 변장 후 도쿄 내에서도 조선인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은신해 생활하였다.[1] 1904년(광무 7년) 3월, 고종은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망명자 중 요인을 해외로 추방하거나 변방에 유치시킬 것을 제의했고, 이두황도 여기에 포함되었으나, 일본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1] 같은 해 4월, 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이두황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1]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망명 생활 중 국모를 시해하고도 은인자중하지 않는다고 질책하기도 했다.
2. 5. 1. 귀국 직후
1907년 귀국했으며, 순종 즉위 후 1907년 9월 6일 사면령으로 사면복권되었다. 1907년 10월 8일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퇴했다. 1908년 1월 21일 전라북도관찰사, 1908년 2월 26일 전라북도재판소 판사를 겸임하였다. 1908년 당시 의병전쟁이 치열했는데, 전라북도관찰사 겸 전라북도재판소 판사로 근무하며 의병 진압에 앞장섰다.[2]2. 5. 2. 생애 후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과 동시에 전라북도도장관에 유임되었다. 전라북도 도장관으로 재직 중 그는 각종 산업 개발과 제조업, 양잠업 공장 설립, 축산 농장 설립, 각종 기계설비, 위생 설비를 도입하는 등 산업 진흥 정책을 적극 추진했고, 일본에서 연구한 식산, 산업 진흥 관련 정책을 현실에 적용하려 하였다. 1914년부터 1916년 3월까지 전라북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여 조선총독부의 토지 조사 사업에 협력하였다.[2]그밖에 제국재향후원회 조선지회 전라북도부회장 등을 맡아보기도 했다. 1916년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일본 체류 때부터 일본 불교를 믿게 되어 자신의 장례도 화장으로 치르게 하였으며, 장례식은 간소하게 하도록 유언을 남겼다.
화장된 그의 유골함은 전라북도 전주시(풍남동, 노송동 근처) 기린봉 아래 묘좌(卯坐)에 매장되고 비석이 세워졌다. 비석의 비문은 김윤식이 지었고, 중추원 찬의였던 정병조가 글을 썼으며,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글씨체로 썼다.
3. 저서
- 양호우선봉일기(兩湖右先鋒日記)
- 설악유고
- 고설악이두황옹추회록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처 | 춘천 박씨 | |
아들 | 이진백 | |
손자 | 이양호 | |
첩 | 다수 | 기생 출신 |
참조
[1]
간행물
내일을 여는 역사 26호
서해문집
2006
[2]
웹인용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http://db.history.go[...]
국사편찬위원회
2008-11-27
[3]
뉴스
장흥동학 전사자 1,510명 새로 확인
http://kjnews.yestv.[...]
예스TV광주
2007-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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