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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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일본의 경제적 침탈에 맞서 대한제국의 빚을 갚기 위해 일어난 민족 운동이다. 일본의 차관 제공과 화폐 정리 사업으로 경제적 위기가 심화되자, 대구의 김광제와 서상돈이 담배를 끊고 국채를 갚자는 제안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금연 운동과 모금 활동이 벌어졌으나, 일제의 탄압과 자금 횡령 의혹 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국채보상운동은 국민들의 자주독립 의지를 보여준 중요한 사건으로, 현재 대구에는 이를 기념하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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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 |
---|---|
운동 정보 | |
명칭 | 국채보상운동 |
한자 표기 | 國債報償運動 |
로마자 표기 | Gukchae Bosang Undong |
다른 로마자 표기 | Kukch'ae Bosang Undong |
분류 | 한국 독립운동 |
시기 | 1907년 2월 – 1908년 |
장소 | 대한제국 |
원인 | 일본 제국의 차관 제공, 대한제국 경제적 예속 시도 |
목적 | 차관 1,300만원 상환 (경제적 예속 시도 저지) |
유형 | 시민 운동, 모금 운동 |
참여 단체 | 대동광문회, 국채보상기성회, 각계 신문사 외 |
관련 인물 | 서상돈, 양기탁, 윤필오, 김광제 |
관련 단체 | 조선통감부 |
결과 | 16만 ~ 19만 원 모금 (총 부채의 약 1.5%), 모금액은 일본에 의해 압수됨 |
관련 항목 | 1907–1908년 한국 제국에서의 운동 |
2. 배경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에 상당한 액수의 차관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차관을 갚을 능력이 없었다. 사실상 일본이 대한제국에게 제공한 차관은 일본이 한국에서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데 사용되었다.[1] 일반 국민들은 이것이 한국 경제와 주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다.[1]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경 경상도 대구 등지에서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2. 1. 일본의 경제적 침탈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상당한 액수의 차관을 제공했다.[1] 어려운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하는 것은 한국의 주권을 박탈하고 일본에 유리한 인프라 건설을 준비하기 위한 전략이었다.[1] 일본은 대한제국에게 차관을 제공하여 한국의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고자 하였다. 1905년(광무 9년)에는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를 조선에 보내,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여 대한제국의 은행들을 일본 은행에 종속시키고 차츰 대한제국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이르러 대한제국이 일본에 갚아야 할 차관은 1300만원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대한제국에게는 갚기 어려운 큰 금액이었다.2. 2. 국채보상운동의 발단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 (
이들은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에 진 빚 1,300만 원을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를 잃게 된다고 호소했다. 이는 2022년 가치로 3,300억 대한민국 원 또는 3300억달러에 해당한다.[3] 이들은 돈을 모으기 위해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담배 흡연을 삼갈 것을 제안했다.[1]
1907년 2월 21일, 대동광문회는 대구 북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서상돈 등 수천 명의 유지, 신사들과 시민들이 참석하여 의연금을 내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시작되었다.[8]
3. 경과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廣文社)는 대동광문회(大同廣文會)로 이름을 바꾸기 위한 특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부사장 서상돈이 국채보상문제를 제의하였다. 2월 초순, 김광제와 서상돈 등은 국채보상 취지문을 작성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국민들의 참여를 호소하였다. 제국신문은 2월 16일 자에 이 취지문을 처음으로 보도하였다.
청일 전쟁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여 근대화를 추진하고자 하였다. 1907년 대구의 서점 사장 김광제는 이러한 경제적 예속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대한제국 정부가 빌린 총액 1300만 원을 국민 모금을 통해 갚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김광제 등은 "담배를 구매하는 대신 국채를 보상하자"라며 금연을 제안하였다. 대한제국 국민 2000만 명이 한 달에 20전을 소비하는 담배 흡연을 3개월간 중단하면 1300만 원을 충분히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 운동은 서울신문과 제국신문 등의 지지를 받으며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끊고 모금에 참여하여 한때 16만 4200원이 모였다.
그러나 이 운동에 동참하는 척하면서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모금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자금을 횡령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안중근도 이 운동에 호응하여 평양에 설치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하였다.[6]
3. 1. 전국적 확산
1907년 2월 21일, 대구 북문 밖 북후정에서 국채보상운동 대구군민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는 서상돈을 비롯한 수천 명의 유지, 신사, 시민들이 참석하여 의연금을 냈다. 이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8]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만세보 등 언론기관들이 국채보상운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1] 윤웅렬, 이상재, 유길준, 양기탁 등 조정 관료들도 참여했으며, 윤웅렬은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의 제2대 소장에 임명되었다.
남성들은 금연을 하고, 여성들은 패물을 내놓는 등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대구, 한성부, 진주, 평양 등지에서는 여성 국채보상운동 단체가 설립되기도 했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민원식 등도 기부금을 보내왔다.[9][10]
김성희(金成喜)는 2월 22일에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했다. 이들은 자금 모금을 위한 다양한 거점들을 조직했다. 전국적으로 약 20개의 유사한 지역 조직이 설립되었다.[1]
3. 2. 일제의 탄압과 운동의 좌절
1908년 무렵부터 국채보상운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3][1] 운동이 쇠퇴한 정확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본의 반발, 특히 양기탁과 베델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3] 일본은 1907년부터 베델을 추방하려 시도했고, 결국 1908년 5월 그를 체포했다. 7월에는 양기탁도 체포되었다. 일본 당국은 베델과 양기탁이 보관하고 있던 자금을 횡령했다고 주장했다.[3][1] 양기탁 재판에서 일본 검사는 양기탁에 대한 증거가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무죄 판결을 받기를 바랐다고 한다.[3] 양기탁은 결국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1]결국 재판에서 양기탁은 국채보상운동의 기부금들을 사익을 위해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이 법정에서 인정되어 무죄로 풀려나 누명을 벗었지만, 통감부의 착복 소문으로 인해 국채보상운동은 이때를 계기로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일부에서는 양기탁 등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에 대한 의심과 불신까지 갖게 되었다. 이와 같은 참여 저조와 통감부의 착복 소문으로 인해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와해되었다. 통감부의 착복 소문으로 양기탁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의심과 불신까지 받는 처지가 되었지만, 통감부의 입장에서는 조선인들을 왜곡시켜서 국채보상운동을 와해시키는데 성과를 거둔 셈이 되었다.
정진석은 베델이 실제로 그에게 주어진 자금 일부를 잘못 관리했다고 주장한다. 베델은 자금의 일부를 미국의 광산 회사인 콜브란-보스트윅 개발 회사(Collbran-Bostwick Development Company)의 주식에 투자했고, 서울에 있던 프랑스인 호텔 경영자 마틴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이로 인해 대중의 열기가 다소 식어버렸다.[3] 일부 풀뿌리 모금 활동이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결국 중단되었다.[1]
4. 국채보상운동 발기 연설문 및 취지서
1907년 1월 29일 광문사 특별회에서 김광제가 작성, 낭독한 연설문과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 자에 실린 국채보상운동 취지서는 국채 보상의 필요성과 방법을 제시했다. 김광제와 서상돈은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에서 금연을 통해 국채를 갚을 것을 제안했다.[1]
4. 1. 국채보상운동 발기 연설문 (1907년 1월 29일)
금일(今日) 문제(問題) 국채(國債)의 보상(報償)이로 본사(本社)에서 발기(發起)하니, 본사(本社)의 형편(形便)부터 설명(說明)하고, 본사(本社)를 광문사(廣文社)라 이름 짓고 설립(設立)한 처음의 사정(事情)은 곁에서 듣는 여러분(傍聽諸位)이 다 보고 들은 바이다.[12](중략)
가장 먼저 망할(第一敗亡) 것이자 가장 시급(第一時急)한 바, 일천삼백만원(一千三百萬圓)의 국채(國債)올시다.[12]
(중략)
발기자(發起者) 본사 사장(本社長) 김광제(金光濟), 부사장(副社長) 서상돈(書相敦)으로 자서(自書)하오리다. 본인(本人)들부터 흡연(吸煙)의 도구(諸具)를 자리에 모인 여러분(滿場諸君) 앞에 부수며(破碎), 우리(吾等)의 토지(土地)와 신체(身體)가 전당 잡힌(典執中) 데에 현재(現在)한지라, 갚으면(報償) 땅과 몸을 찾을(贖土贖身) 것이오, 못 갚으면(未報) 나(予)하고도 죄 없는(無罪) 몸이 남(人)의 노예(奴隷) 되리로다.[12]
하늘(皇天)이 감응(感應)하시어 전국 인민(全國人民)으로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一心合力) 대사(大事)를 순조롭게 이루고(順成) 민국(民國)을 보존(保存)케 하옵소서. (합장하고 두 번 절하며(合掌再拜) 땀을 흘리고 숨을 내쉬며(揮汗噓晞) 아래로 쓰러졌다(下坍而頹臥).)[12]
이는 1907년 1월 29일 광문사 특별회를 마치고 김광제 지사가 작성, 낭독한 글이다.[12] 김광제와 서상돈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정부의 부채를 갚기 위한 모금 운동을 제안했다.[1] 이들은 돈을 모으기 위해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담배 흡연을 삼갈 것을 옹호했다.[1]
다음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 자에 실린 내용의 일부이다.
> 과거에 우리의 작은 나라는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것은 우리 군인들이 기꺼이 목숨을 걸고 피비린내 나는 전장으로 뛰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 있는 평민들이 군자금을 위해 신발을 만들고 팔았기 때문이다.
>
> ...아, 우리 2천만 동포가 나라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우리 황제의 극심한 근심과 임박한 멸망을 그저 바라보면서, 단 한 사람도 상황을 바꾸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이 과연 합당한 일인가? ...지금이 깨어나 충성과 의무를 다할 때가 아닌가?
>
> 국가 부채는 현재 1,300만 원이며, 이는 우리 대한제국의 생존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갚지 못하면 나라를 잃는다. 그리고 일단 땅을 잃으면, 되찾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같은 나라가 겪는 혼란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
> ...아, 우리 2천만 동포 중 단 한 명이라도 애국심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다면,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해 황제의 높은 은혜에 보답하고 우리가 서 있는 땅을 지킬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2]
1,300만 원은 2022년 가치로 3,300억 대한민국 원 또는 US$에 해당한다.[3]
4. 2. 국채보상운동 취지서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
1907년 2월, 대구에서 광문사의 김광제와 서상돈은 대한제국의 존망이 걸린 국채 1,300만 원을 갚기 위해, 2천만 국민이 3개월간 금연하여 매달 20전씩 모금하자는 취지서를 대한매일신보에 발표했다.[1] 이들은 국채를 갚으면 나라를 보존하고, 갚지 못하면 나라를 잃게 된다고 강조했다.[2]5. 영향 및 평가
청일 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에서 거액의 차관을 들여와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다. 1907년 대구의 김광제는 경제적 예속으로 이어진다는 위기감을 느껴 국채 보상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서울신문, 제국신문 등의 찬동으로 전국에 퍼져나갔다.[6]
그러나 운동에 찬동하면서도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모금을 횡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또한, 운동 중심인물이었던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이 자금을 횡령하면서 운동은 흐지부지되었다.[6]
대구에는 이 운동을 기념하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ko: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있다.
5. 1. 긍정적 측면
양기탁, 어니스트 베델이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보도되면서, 모든 계층이 이 운동을 지지했다.[1] 고종은 지지를 표명했고, 상인들과 하층민들도 열렬히 지지했다.[1] 심지어 강도들까지도 국채보상운동 자금을 훔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돈을 기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3]김성희는 서울에서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고 자금 모금을 위한 거점들을 조직했으며, 전국적으로 약 20개의 유사한 지역 조직이 설립되었다.[1] 1907년 4월부터 12월까지 운동이 가장 활발했으며, 6월과 8월 사이에 가장 많은 기부금이 모였다.[1] 대구의 서점 사장 김광제는 경제적 예속에 대한 위기감을 느껴 국채 보상 운동을 시작했다. 김광제 등은 "담배를 구매하는 대신 국채를 보상하자"며 금연을 제안했고, 이는 큰 반향을 일으켜 서울신문과 제국신문 등의 찬동으로 전국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끊었다. 안중근도 이 운동에 호응하여 평양에 만들어진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에 취임하여 활동했다.[6]
5. 2. 한계
국채보상운동은 사회 각 계층의 지지를 받았으나, 상위 계층과 부유층의 참여 부족이라는 한계점을 보였다. 일본의 지속적인 탄압과 양기탁을 겨냥한 모함 역시 운동 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3][1] 일본은 1907년부터 베델을 추방하려 했고, 1908년 5월에는 그를 체포했다. 같은 해 7월, 양기탁 또한 자금 횡령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3][1]정진석은 베델이 실제로 자금 일부를 부적절하게 운용하여 미국 광산 회사 주식에 투자하고, 서울의 프랑스인 호텔 경영자에게 돈을 빌려준 사실을 지적한다. 이러한 행위는 대중의 참여 열기를 냉각시켰고, 이후 소규모 모금 활동이 잠시 이어졌으나 결국 중단되었다.[3]
청일 전쟁 이후,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에서 거액의 차관을 도입하여 근대화를 추진했다. 김광제 등은 금연과 모금을 통해 국채를 갚고자 했으나, 일부 참여자들의 비윤리적 행위와 어니스트 베델의 자금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서 운동은 동력을 잃었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양기탁을 구속하여 운동을 방해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조선 측이 일본에 모금액 감소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고, 양기탁 재판 과정에서 베델의 횡령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일본의 방해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6]
6. 기념
1999년 대구광역시 중구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만들어졌고, 공원 앞의 큰길에 국채보상로라는 이름이 붙었다.[4] 2011년에는 국채보상운동 기념관이 공원 내에 개관했다. 기념관에는 국채보상운동 관련 역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운동의 의의와 영향에 대한 전시도 제공한다.[5]
7. 현대적 의의
국채보상운동은 단순한 모금 운동을 넘어, 대한제국 국민들의 자주독립 의지와 경제적 자립 정신을 보여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청일 전쟁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으로부터 많은 돈을 빌려와 근대화를 추진하려 했다. 그러나 1907년 대구의 서점 사장 김광제 등은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우려하여, 국민들의 모금을 통해 국채 1300만 원을 갚자는 운동을 시작했다.[6] 이들은 "담배를 구매하는 대신 국채를 보상하자"며 금연을 호소했고, 이는 서울신문과 제국신문 등의 언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6]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끊고 모금에 참여했지만, 일부에서 담배를 몰래 피우거나 모금액을 횡령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6]
이 운동은 비록 일본의 방해와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의 모금 횡령 의혹 등으로 인해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고 항일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6] 특히, 항일 운동가 안중근도 이 운동에 참여하여 평양에서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동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6]
오늘날 대구에는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기리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
http://encykorea.aks[...]
2021-04-19
[2]
웹사이트
국채 1,300만 환 보상 취지서 < 사료로 본 한국사
http://contents.hist[...]
2024-01-25
[3]
웹사이트
"[유석재의 돌발史전] 국채보상운동 모금액 48억원(현재 가치 환산)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https://www.chosun.c[...]
2024-01-25
[4]
웹사이트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Memorial Park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
https://english.visi[...]
2024-01-25
[5]
웹사이트
National Debt Redemption Movement Memorial Museum
http://gukchae.com/e[...]
2021-10-07
[6]
뉴스
安重根義士崇慕会 国債報償運動(韓国語サイト)
http://www.patriot.o[...]
2014-03-31
[7]
웹사이트
http://heritage.unes[...]
[8]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www.gukchae.c[...]
2019-02-26
[9]
뉴스
國債報償義務金集送人員及額數
황성신문
1907-05-08
[10]
뉴스
國債報償義務金集送人員及額數
황성신문
1907-05-24
[11]
서적
한국경제 100년 과연 어떤일이?
무한
2002
[12]
서적
『강연집(講演集)(동양선생김광제강연(東洋先生金光濟講演))』
광동서관(光東書館)
1909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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