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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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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화 금기는 일본에서 천황과 천황제를 비판하는 언론 보도에 대한 암묵적인 금기를 의미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는 불경죄와 치안유지법에 의해 천황에 대한 비판이 억압되었고, 전후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익 단체의 테러와 압력으로 인해 언론의 자율 규제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자율 규제는 매스 미디어에서 국화 탭으로 불리며, 천황과 황실에 대한 비판을 꺼리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현재는 쇼와 천황 붕어 이후 황실 관련 논의가 확대되고 있지만, 여전히 국화 금기의 잔재가 남아있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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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 금기
일반 정보
개념일본 사회의 금기
관련 개념천황
로마자 표기Kiku tabū
한국어 번역국화 금기
일본어菊タブー (きくタブー)

2. 역사적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에는 천황천황제에 대한 비판과 논의가 일본 형법에 의해 황실 모독죄로 간주되어 엄중히 처벌되었다.[7] 1925년에는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어 천황제 비판을 처벌했다.

전후 일본 헌법 제21조에 의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구 형법의 황실 모독죄 조항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우익 단체들은 위협, 협박, 폭력을 통해 이러한 변화에 저항했다. 1961년 시마나카 사건에서는 우익 청년이 천황과 황후를 풍자한 소설을 게재한 ''주오코론'' 발행인을 암살하려 했다.[7]

일본 대중 매체는 우익 단체의 공격을 우려해 천황 비판을 자제하는 "자율 규제"를 따랐으며, 이는 암묵적인 금기로 작용했다.

2. 1. 메이지 유신 이후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메이지 유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까지 천황천황제에 대한 비판은 불경죄치안유지법으로 엄격하게 처벌되었다.[7] 이는 황실 모독으로 간주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강한 배제 압력이 있었다. 1925년에는 천황제 비판을 처벌하기 위한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헌법 제21조에 의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의해 불경죄를 금지했던 구 형법이 폐지되면서 천황과 천황제에 대한 비판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13] 그러나 1960년대부터 우익 단체들은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며 위협, 협박,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7]

일본의 대중 매체는 우익 단체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천황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자제했다. 이러한 "자율 규제"는 암묵적이지만 널리 이해되는 금기의 형태로 나타났다.[13] 예를 들어, 일본 민간 방송 연맹 방송 기준에는 "국가 및 국가 기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취급은 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해설에는 "국가의 상징으로서의 천황도 여기에 포함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10]

3. 우익 단체의 테러와 언론의 자율 규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 헌법 제21조에 의해 언론의 자유가 널리 인정되고, 황실 모독죄를 금지했던 구 형법이 폐지되면서 천황과 천황제에 대한 비판이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일부 우익 단체들은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여 위협, 협박, 폭력 등의 수단을 사용하기 시작했다.[7]

특히 1961년 시마나카 사건은 우익 청년이 천황과 황후의 목이 잘린 풍자적인 단편 소설을 게재한 월간지 ''주오코론''의 발행인을 암살하려 한 사건으로, 언론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해당 잡지는 내용을 철회하고 "자율 규제"를 약속했으며,[8] 다른 언론사들도 유사한 조치를 취했다.[9]

일본 대중 매체는 우익 단체의 공격을 우려하여 천황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자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자율 규제"는 암묵적이지만 널리 퍼진 금기 형태로 나타났다. 인쇄 매체에서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지만, 방송 매체에는 일본 상업 방송 협회(JBA) 기준에 "국가 및 국가 기관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취급은 하지 않는다."라는 내용이 있으며, 국가의 상징인 천황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명시되어 있다.[10]

3. 1. 시마나카 사건 (1961년)

1960년 (쇼와 35년), 후카자와 시치로의 소설 「풍류몽담」이 『주오코론』 12월호에 게재되었다. 소설 속에서 황태자비가 민중에게 살해당하는 부분이나 민중이 황거를 습격하는 부분이 그려진 것에 대해, 일부 우익 단체가 불경하다고 주오코론사에 철회와 사죄를 요구했다. 1961년 (쇼와 36년) 2월 1일, 우익을 자칭하는 소년이 시마나카 호지 주오코론사 사장 자택에 침입하여 가정부 1명을 살해하고, 시마나카 호지의 아내에게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시마나카 사건).[7] 이후 주오코론사는 「풍류몽담」 게재 자체가 잘못이었다고 사죄하고, 『사상의 과학』 천황제 특집호 (1962년 1월호) 발매를 중단했다.[8]

3. 2. 기타 자율 규제 사례

1980년대 이후에도 언론 및 출판 관련 자율 규제 사례는 다양하게 나타났다.

사건내용
소문의 진상 황실 포르노 기사 사건 (1980년)월간지 《소문의 진상》이 황실 포토콜라주 기사를 게재하자 일부 우익 단체가 인쇄소를 습격하고 광고주에게 항의했다. 편집장은 사죄문을 게재했다.[13]
도에이 영화 《도쿠가와 일족의 붕괴》 사건 (1980년)고묘 천황 암살 묘사가 불경하다는 이유로 일부 우익 단체가 항의 시위를 벌였다. 프로듀서는 헤이안 신궁센뉴지에 참배하여 타협했고, 영화는 공개되었으나 흥행 부진으로 대작 시대극 노선은 중단되었다.[19] 재상영 시 암살 장면은 삭제되었고, 소프트화도 되지 않았다.[20]
쇼와 천황 콜라주 사건 (1982년~1985년)오우라 노부유키의 연작 판화 《원근을 껴안고》에 쇼와 천황 사진이 콜라주로 사용되어 우익 단체로부터 불경하다는 항의를 받았다. 도야마현립미술관은 작품을 비공개·매각하고 도록을 소각했다. 오우라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기리야마 오습 소설 《파르티잔 전설》 사건 (1983년)쇼와 천황 테러 계획을 다뤘다는 이유로 우익 단체의 가두 선전 차량이 출판사에 몰려들었다.
타모리 쇼와 천황 흉내 사건 (1985년)탤런트 타모리가 쇼와 천황 흉내를 냈다가 일부 우익으로부터 협박을 받았다. 소속사 사장이 항의를 받는 사태까지 벌어졌고, 타모리는 이후 쇼와 천황 흉내를 봉인했다.[26]
《창》 TV 아사히 내부 자료 보도 사건 (1988년)미디어 비평지 《창》이 TV 아사히의 천황 붕어 X 데이 관련 내부 자료를 보도하자 우익 단체가 불경하다며 항의했다.
일본 가정교사 센터 학원 CM 사건 (1992년)록풍으로 편곡된 《기미가요》를 CM에 사용하려던 일본 가정교사 센터 학원 학원장에게 우익 단체가 협박장과 자살 권고장을 보냈다. CM은 방송사 자율 규제로 중지되었다.
다카라지마샤 및 분게이슌추 사장 자택 총격 사건 (1993년)반 황실 보도에 항의하는 권총 탄환이 발사되었다.[27]
《주간 금요일》 주최 집회 사건 (2006년)황실 비판 극이 상연되자 비판이 쇄도했고, 주간 금요일은 사죄했다.



아마모토 히데요는 천황제와 쇼와 천황전쟁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세력을 비판하며 "텔레비전 녹화에서 언급하면 그 부분은 전부 컷된다. 이런 짓을 하는 한 일본인은 언제까지나 자립할 수 없다"고 말했다.[14]

야마키 마사하루는 "일본은 상당히 자유로운 나라고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천황제 문제에 이르면 상황이 다르다. 상당한 지식인조차도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린다"고 지적했다.[15]

4. 궁내청과 보도 규제

대일본제국 헌법 하에서 천황은 현인신으로 여겨져 천황에 대한 비판이나 조롱은 불경죄가 적용되어 체포되었으며, 치안유지법 등에 의해 국체(천황제)를 부인하는 운동은 단속 대상이었다. 따라서 천황과 황실에 대해서는 보도의 자유를 포함하여 거의 논의가 불가능했다.[16]

1945년 패전 후, 점령 정책에 따른 민주화로 불경죄, 치안유지법이 폐지되면서 천황제와 전쟁 책임에 관한 논의가 발생했고, 천황제 비판 및 존폐에 관한 논설을 게재하는 잡지도 출판되었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천황을 직접 문책하지 않고 오히려 점령 정책에 이용하려 했다.[17][18]

GHQ의 민주화 정책 하에 공직 추방, 단체 등 규제령으로 정체되었던 우익 단체는 역 코스에 의해 부활했고, 노동조합과 시민 운동의 데모와 파업에 대해 협박, 폭력 등의 실력 행사를 하는 단체도 나타났다. 1960년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1990년 나가사키 시장 총격 사건 등 우익 테러도 발생했다.

궁내청은 언론 보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규제를 가했다.



현재 황실을 비판하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으며, 황족 관련 프로그램은 긍정적인 내용 외에는 제작을 꺼리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31] 일부 신문사는 황실·황족의 일상적인 움직임을 추적하는 전용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궁내청의 항의는 프린세스 마사코의 출판을 금지하는 한편, 주간지의 황후 마사코에 대한 비판은 간과하는 등 공정성을 결여한 부분이 있다.

4. 1. 고야마 이토코의 소설 「미치코 님」 중단 (1963년)

1963년, 헤이본샤에서 발행된 잡지 '헤이본'에 연재되었던 고야마 이토코의 소설 「미치코 님」은 궁내청으로부터 사생활 침해라는 항의를 받고 중단되었다.[29] 이는 궁내청이 언론 보도에 개입하는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4. 2.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부부 사진 논란 (1990년)

1990년 신문 각지에 게재된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키코 비의 사진에 대해, 의도된 기념 사진이 아니라는 이유로 궁내청은 게재 중단을 요구했다.[30]

4. 3. 구로다 사야코 결혼식 보도 논란 (2005년)

2005년 (헤이세이 17년) 구로다 사야코의 결혼식 보도에서, 궁내청은 경비상의 이유 등으로 상공 취재 자제를 궁내청 기자회에 요청했다. NHK경시청이 설정한 비행 자제 요청 구역 밖에서의 취재라면 경비 면에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궁내청의 자제 요청 범위 밖이라고 하여 상공 취재를 했다. 이에 대해 궁내청은 규칙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혼식 기자회견에 NHK 기자의 참석을 사실상 거부하는 요청을 했다. NHK는 이 요청에 따라 취재 자제에 따르지 않았다고 사과했다.

5. 대중의 인식과 자율 규제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천황천황제에 대한 비판이 황실 모독죄로 엄중히 처벌되었고, 일본 사회에서도 강력한 압력이 있었다. 1925년에는 치안유지법이 제정되어 천황제 비판을 더욱 억압했다.

전쟁 후, 일본 헌법 제21조에 의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황실 모독죄가 폐지되면서 천황과 천황제에 대한 비판은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비판에 대한 관용이 이전보다 커졌다.

그러나 1960년대에 일부 우익 단체들은 이러한 변화에 반발하여 위협, 협박,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1년 시마나카 사건에서는 우익 청년이 천황과 황후를 풍자한 소설을 게재한 주오코론 발행인을 암살하려 했다.[7] 주오코론은 해당 내용을 철회하고 "자율 규제"를 약속했으며,[8] 일본 국회가 황실 모독죄 법률 부활을 모색하자 다른 언론사들도 유사한 "자율 규제"를 약속했다.[9]

일본 대중 매체는 우익 단체의 공격을 우려하여 천황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자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자율 규제"는 암묵적이지만 널리 통용되는 금기 형태로 나타났다. 인쇄 매체에서는 천황 관련 자율 규제에 대한 명시적인 규칙이나 기준이 공표되지 않았지만, 방송 매체에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일본 민간 방송 연맹(JBA) 기준에는 "방송 매체는 국가 및 국가 기관의 권위를 훼손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으며, 국가의 상징인 천황도 여기에 포함된다"는 내용이 있다.[10] 이러한 자율 규제로 인해 천황과 천황제에 대한 비판은 대중 매체에서 금기시되었다.

5. 1. 쇼와 천황 입원 시 자숙 분위기 (1988년)

1988년 (쇼와 63년), 쇼와 천황 입원 당시 오락 프로그램 방송 중단 및 광고 문구 수정 등[11] 자숙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축제나 스포츠 대회도 자숙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영국 더 선 지는 "지옥이 천황을 기다리고 있다"고 보도했고, 일본 외무성은 재일 영국 대사관을 통해 항의했다. 자민당 와타나베 미치오 의원은 "특파원을 국외 추방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러나 당시 황태자가 "과도한 반응은 폐하의 뜻이 아닐 것"이라 언급하면서, "자숙을 자숙"하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5. 2. 오타 및 오변환 관련 사건

1989년 2월 2일, 각 신문 조간에 후소샤다이닛폰 인쇄 주식회사의 연명으로 "2월 2일 발매의 'SPA!'의 기사 일부에 부적절한 오자가 있었음을 깊이 사과드립니다(원문)"라는 사과 광고가 게재되었고, 그 주의 『SPA!』가 발매 중지되었다. 이는 『SPA!』에서 당시 연재되던 칼럼에서 다이쇼 천황이 다이쇼 ''세뇌''로 오타·오변환된 채 인쇄되어 버린 교정 미스가 원인이었지만, 그 자세한 내용은 사과 광고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35]

1993년에는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가 『SPA!』에서 연재하던 고만이즘 선언에서 "장어 굽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황태자 나루히토의 결혼과 그것을 보도하는 언론을 개그로 삼은 작품을 집필했을 때 편집부 내에서 문제가 되어 그 회만 급히 연재 중지되었다. 다음 호에서 고바야시는 이에 반발하여 연재 중지에 몰린 해당 작품을 『가로』에 발표했다.[35]

2004년 12월 9일 발매된 『여성 세븐』은 황실 기사의 제목에서 "황태자"의 "태"가 "대"로 오타된 것을 인쇄 도중 깨닫고 작업을 다시 하여 발매가 4일 연기되었다.[35]

2007년 9월, 아키타현청에서 천황·황후의 방문에 관한 공문 작성 시 "악천후"를 "악천황"으로 오변환한 채 결재(확인)를 받지 않고 발송하여 담당 직원이 징계 처분, 상사가 감독 책임을 물어 엄중 주의 처분을 받았다.[35]

5. 3. 오토다케 히로타다 블로그 논란 (2006년)

2006년 9월, 히사히토 친왕의 탄생을 축하하는 분위기 속에서, 오토다케 히로타다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러한 축하 분위기를 비꼬는 듯한 어조의 글을 게시했다.[34] 이로 인해 그의 블로그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결국 오토다케는 사과해야 했다.[34]

5. 4. 마이니치 신문 기자 해고 요구 사건 (2006년)

2006년 10월, 사가현을 방문하는 천황과 황후에 대해 부정적인 질문을 한 마이니치 신문 기자가 인터넷 우익을 중심으로 비판을 받았다.[12] 이 기자가 재일 한국·조선인이라는 이유로 해고 및 면직 요구가 쇄도했고, 마이니치 신문은 해당 기자에게 엄중 경고를 주었다고 발표했다.

6. 쇼와 시대의 종말과 황위 계승 문제

1989년(쇼와 64년) 쇼와 천황이 붕어하면서 쇼와 시대에 대한 재평가가 여러 곳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천황과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인 언론은 체제 비판으로 간주되어 불경죄치안유지법으로 단속되었고, 사회적으로도 강한 배제 압력이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언론의 자유가 널리 인정되고 불경죄가 삭제되면서 천황이나 천황제에 대한 비판이 법적으로 금지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하지만 우익 단체나 그 구성원들이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비판을 막으려는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 언론은 폭력 피해나 문제를 우려하여 천황이나 천황제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를 자율적으로 규제하게 되었다. 이러한 자율 규제는 '국화 탭'이라고 불리며, 매스 미디어에서의 금기 중 하나로 여겨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05년 황실전범에 관한 유식자 회의가 열려, 황위 계승 문제가 널리 일반에게도 언급되게 되었다. 2007년 (헤이세이 19년)에는 아키시노노미야 사야코 여왕의 사생활에 관한 스캔들이 일부 매체에서 보도되기도 했다.

한편, 황실 존폐에 관한 논의나 천황·황족에 관한 패러디 등이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이기에 국화 금기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지적도 있다.

6. 1. 쇼와 천황 붕어 이후의 변화

1989년 (쇼와 64년) 쇼와 천황 붕어 이후, 쇼와 시대에 대한 재평가가 여러 곳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천황 측근의 기록 등이 공개되면서, 그전까지 문제시되지 않았던 쇼와 천황전쟁 책임을 포함한 논설을 적극적으로 출판하는 움직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13][14][15] 또한, 주요 매체에서는 금기시되었던 군복을 입은 쇼와 천황의 어진도 게재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쇼와 천황 독백록』이 유명하다.

6. 2. 황실 관련 논의의 확대

2004년 (헤이세이 16년), 나루히토(당시)가 유럽 순방 전 기자 회견에서 인격 부정 발언을 하여 파문이 일면서, 이전까지 금기시되었던 황실 내부 사정과 황실의 존재 방식에 대한 보도가 "해외 언론 보도 인용"을 포함하여 많이 이루어지게 되었다.[36]

2005년 (헤이세이 17년)에는 황실전범에 관한 유식자 회의가 개최되어, 황위 계승 문제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7. 결론: 현재 상황과 과제

메이지 유신 이후 제2차 세계 대전까지 천황과 천황제에 대한 비판은 체제 비판으로 간주되어 불경죄로 단속되었고, 사회적으로도 강하게 배제되었다. 전후에는 언론의 자유가 널리 인정되고 불경죄가 삭제되면서 법적 제약은 사라졌지만, 우익 단체 등의 폭력적인 위협으로 인해 언론은 천황 및 천황제에 대한 비판을 자율적으로 규제하게 되었다.[13] 이러한 현상을 '국화 탭(菊タブー)'이라고 부른다.

아마모토 히데요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세력을 비판하며, 텔레비전 방송에서 관련 언급이 편집되는 현실을 지적했다.[14] 야마키 마사하루는 일본이 자유로운 국가로 인식되지만, 천황제 문제에 있어서는 예외라고 언급했다.[15]

대일본제국 헌법 하에서는 천황을 현인신으로 여겨 모든 비판이 불경죄로 처벌받았고, 치안유지법으로 천황제를 부정하는 운동이 단속되었다.[16] 1945년 패전 후, 민주화와 함께 천황제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지만,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천황을 문책하기보다는 점령 정책에 이용하려 했다.[17][18]

역 코스로 우익 단체들이 부활하고, 1960년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1990년 나가사키 시장 총격 사건 등 우익 테러가 발생하면서 언론의 자기 검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 사회의 '국화 탭' 현상은 여전히 잔존하는 문제이다.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이러한 탭을 극복하고, 천황제에 대한 자유로운 논의가 가능한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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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In the Realm of a Dying Emperor https://books.google[...] Knopf Doubleday Publishing Group 2011-02-09
[3] 웹사이트 Japan's Political Apologies and the Right to History http://dev.wcfia.har[...] Harvard University 201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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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8]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9]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10] 간행물 民放連 放送基準解説書2014 (JBA Broadcasting Standard Reference) The Japan Commercial Broadcasters Association 20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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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뉴스 Japan Protests British Papers' Hirohito Slurs https://www.latimes.[...] 1988-09-22
[13] 간행물 民放連 放送基準解説書2014 一般社団法人日本民間放送連盟発行 2014-09
[14] 웹인용 インタビュー第7回 昨日も明日もない。あるのは今日だけ。(考える高校生のためのサイト「マンモTV」) http://www.mammo.tv/[...]
[15] 서적 さわやかな風のように ―福祉のまなざしを求めて― キリスト新聞社
[16] 문서 手拭いの旗 暁の風に翻る
[17] 뉴스 制定過程をたどる:2 天皇制守った「象徴」 GHQ、戦争放棄と「セット」 https://mainichi.jp/[...] 毎日新聞 2015-05-04
[18] 뉴스 象徴天皇と戦争放棄は不可分 敗戦からの憲法1条と9条 https://www.asahi.co[...] 朝日新聞 2019-05-02
[19] 서적 シネマの極道 映画プロデューサー一代 新潮社
[20] 서적 その描写は是か!? 孝明天皇暗殺を描いた『徳川一族の崩壊』と昭和天皇への愛憎渦巻く二・二六事件映画 洋泉社
[21] 간행물 編集長日誌 1985-07
[22] 서적 日日不穏 中央公論社
[23] 간행물 うわさの真相 右翼団体のマスコミ攻撃が 講談社ペントハウス回収 新潮社にも街宣車の攻勢が 1985-11
[24] 서적 笑犬樓よりの眺望 新潮社
[25] 서적 日日不穏 中央公論社
[26] 서적 コラム 新宿の夜と密室藝 河出書房新社
[27] 서적 おことば 戦後皇室語録 新潮社
[28] 문서 2006年12月7日号「『陛下のガン』も笑いのネタにした『皇室中傷』芝居」
[29] 서적 明仁さん、美智子さん、皇族やめませんか 元宮内庁記者から愛をこめて 大月書店 2006-01-20
[30] 문서 紀子妃の右手-「お髪直し」写真事件 情報センター出版局
[31] 문서 皇室報道と「敬語」
[32] 간행물 あれをした青年 四月十日、皇居 前で私はなぜ石を投げたか 1959-08
[33] 문서
[34] 웹사이트 『プリンセス・マサコ』を巡って「雅子妃本」に慌てる外務省&大新聞の愚 http://www.e-themis.[...] 月刊テーミス 2007-10
[35] 뉴스 天皇陛下見送り案内状で誤記 2007-09-19
[36] 뉴스 皇室は本当に必要か Newsweek 2005-12-07
[37] 간행물 民放連 放送基準解説書2014 一般社団法人日本民間放送連盟 2014-09
[38] 서적 さわやかな風のように ―福祉のまなざしを求めて― キリスト新聞社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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