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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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최고 통치자였던 쇼와 천황 히로히토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다룬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들은 쇼와 천황에게 책임을 묻는 반면, 일부는 천황이 입헌군주로서 통치 권한이 제한적이었다고 주장하며 책임을 부인한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쇼와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지만, 재판장은 정치적 고려에 의한 면죄임을 시사했다. 이후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은 일본 내에서 금기시되었으며, 한국을 포함한 연합국들은 쇼와 천황의 책임을 두고 다양한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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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음방송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쇼와 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일본의 항복을 선언한 방송을 의미하며, 천황의 육성을 통해 전쟁의 종결과 미래를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히로히토 (裕仁) |
존칭 | 천황 폐하 (天皇陛下) |
휘 | 미치노미야 (迪宮) |
출생일 | 1901년 4월 29일 |
사망일 | 1989년 1월 7일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아오야마 어소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고쿄 |
묘소 | 무사시노 능 |
배우자 | 고준 황후 |
부모 | 다이쇼 천황, 데메이 황후 |
재위 기간 | |
즉위 | 1926년 12월 25일 |
퇴위 | 없음 (사망) |
연호 | 쇼와 시대 (昭和) |
정치 | |
정당 | 무소속 |
종교 | |
종교 | 신토 |
기타 정보 | |
![]() | |
로마자 표기 | Hirohito |
전쟁 책임 논란 | |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논란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의 최고 통치자였던 쇼와 천황의 책임과 관련되어 있다. |
쇼와 천황의 역할 | 쇼와 천황은 일본군의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쟁에 관여했지만, 실제 정치적 권한은 내각에 있었다. |
책임 주장 | 일각에서는 쇼와 천황이 전쟁에 대한 도의적, 정치적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
면책 주장 | 다른 일각에서는 쇼와 천황이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며, 실제 전쟁 결정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
논쟁 지속 |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논란은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
2. 천황 책임론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주장하는 측은 그가 일본 제국의 최고 통치자이자 군 통수권자로서 침략 전쟁에 대한 실질적인 책임이 있다고 본다. 종전 직후 난바라 시게루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 대해 법률적, 정치적, 윤리적인 범주를 구분해서 발언했으며, 전쟁 직후에는 천황의 전쟁 책임이 거론되고 퇴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었다.[24][25]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 독일 11월 혁명으로 제국이 붕괴된 독일과 달리,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의도적으로 패전 후 일본 황실을 유지시켰다. 전쟁 피해자로는 피침략국의 민간인과 군인, 연합군, 일본 내 민간인과 군인 등이 있으며, 이들 전반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26]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은 일본과 싸운 교전국에 대한 책임은 없으며 일본인에게만 책임이 있다는 입장을 가졌다.[27]
이노우에 키요시는 '천황의 전쟁책임'에서 쇼와 천황이 일본 제국 헌법상 통치자, 신성(神聖), 원수로 규정되어 대일본제국의 유일한 최고 통치자였으며, 군 통수권자로서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의 명령으로 여겨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8년부터 천황을 신의 자손이자 정당한 통치자로 존숭해야 한다는 사상을 헌법과 교육 칙어로 명문화하여 국민에게 심었다고 지적했다.[35][36]
쇼와 천황 자신도 전쟁 책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각종 증언과 수기에서 확인된다. 포츠담 선언 수락 조건(국체수호) 관련 답변이나, 전후 퇴위 의사를 밝힌 것 등이 그 예이다.
2. 1. 법적 책임
쇼와 천황은 일본 제국 헌법에 따라 육해군 통수권을 가진 국가원수이자 일본군 대원수였기 때문에 침략 전쟁 지도자로 간주될 수 있었다. 따라서 도쿄 재판에서 국제법 위반으로 기소될 가능성이 있었다.[24][25]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지만, 재판장 윌리엄 웹은 천황의 책임을 언급하며,[28] 정치적 고려에 의해 기소되지 않았음을 밝혔다.[29] 웹 재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천황의 권위는, 천황이 전쟁을 종결하였다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었다. (이하 생략)
:2. 천황에 대하여 재판이 면제된 것은, 국제군사재판소가 형을 선고함에 있어, 당연히 고려해야 할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3. 천황은 항상 주위의 진언에 따라 행동해야 했다는 의견은, 증거에 반하거나, 또 만일 그렇다고 해도 천황의 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4. 나는 천황이 처형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이것은 내 관할 이외의 문제이고, 천황이 재판을 면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연합국의 최선의 이익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30]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항복하기 전까지 일본은 일본 제국 헌법을 헌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 헌법에 따르면, 천황은 일본 제국의 통치권 총괄자로서 문무관의 임명, 육해군의 통수권, 그 편제 및 상비병액의 결정, 선전·강화 및 조약 체결 등 군사, 외교와 관련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41] 그러나 천황의 국무에 대한 권한 행사는 국무대신들로부터 자문을 얻도록 규정했기 때문에 천황은 법률, 정책 상의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고, 대신 그 책임을 국무대신들이 떠안아야 했다.[41]
2. 2. 정치적, 도덕적 책임
쇼와 천황은 일본 제국 헌법에 따라 일본군의 통수권을 가진 국가원수였으므로, 침략 전쟁의 지도자로서 국제법 위반으로 기소될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입헌군주제 하에서 일본 국민에게 정치적,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4][25]이노우에 키요시는 저서 '천황의 전쟁책임'에서 쇼와 천황이 신격화된 권위를 이용하여 일본 국민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고 비판했다.[35] 그는 쇼와 천황이 헌법상 통치자, 신성(神聖), 원수로 규정되어 대일본제국의 유일한 최고 통치자였으며, 군 통수권자로서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의 명령으로 여겨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1868년부터 천황을 신의 자손이자 정당한 통치자로 존숭해야 한다는 사상을 헌법과 교육 칙어로 명문화하여 국민에게 심었다고 지적했다.[36]
1945년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는 상주문을 올려 조기 종전을 요청했으나,[39] 천황은 전황을 유리하게 만든 뒤 패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거부했다. 이는 천황의 능동적 판단으로 오키나와 전투와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 등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는다.[40]
2. 3. 일본 국내외의 비판적 시각
일본공산당은 1989년 쇼와 천황이 사망하자, "천황 히로히토는 침략 전쟁의 최대 및 최고의 책임자"라는 중앙위원회 성명을 발표했다.[37]간 나오토는 2005년 5월 8일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천황은 천황기관설에 따른 역할이었으므로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상징적인 책임이 있었으며, 퇴위를 통해 전쟁 책임을 명확히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38]
허버트 빅스는 쇼와 천황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1945년 2월 14일 고노에 후미마로 전 총리가 패전을 확신하고 전쟁의 조기 종결을 요청하는 상주문을 올렸으나,[39] 천황은 전황을 유리하게 만든 뒤에 패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여 이를 거부했다.[40] 이는 천황이 능동적으로 판단하여 전쟁 피해를 키운 결과로 이어졌다. 만약 천황이 이 상주문을 수용했다면 오키나와 전투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는 없었을 수도 있다.[40]
외교 평론가 가세 히데아키는 종전 당시 쇼와 천황의 태도가 무책임했고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했으며, 이러한 무책임 체계가 오늘날의 일본에 여전히 살아있다고 비판했다.
3. 천황 책임 반대론
쇼와 천황 책임 반대론은 천황이 입헌군주제 하에서 실질적인 권한이 없었으며, 전쟁은 군부와 정치인들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종전 직후 난바라 시게루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 대해 법률적, 정치적, 윤리적인 범주를 구분해서 발언했으며, 전쟁 직후에는 천황의 전쟁 책임 및 퇴위 요구 의견도 있었다.[24][25]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후 독일 11월 혁명으로 제국이 붕괴된 것과 달리,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의도적으로 패전 후 일본 황실을 유지시켰다.
21세기에 들어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전쟁 책임에는 법적, 정치적, 도덕적, 형이상학적 구분이 있다”고 발언했다.[2]
3. 1. 입헌군주제와 책임 회피
쇼와 천황은 입헌군주로서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천황을 보필하거나 상주한 정치가나 군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대일본제국 헌법에는 천황에게 거부권이 있을 뿐, 의사 결정과 정책 입안은 내각과 제국의회가 수행했다는 의견이 있다. 또 천황의 정치적 무답책이 규정되어 있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전 황제로서 책임을 추궁당한 것처럼[43] 국제법상 기소 가능성은 있었다. 도쿄 재판에서도 군주무답책론이 언급되지 않았다.[4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퇴위 후에도 “전 황제”로서 전쟁 책임을 추궁당한 사례가 있어,[15] 국제법상 소추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한 도쿄 재판에서도 “군주불책임”론이 공식적으로 이용된 적은 없었다.[16]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는 “천황이 자국의 전쟁에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조항이 없다.
3. 2. 자위 전쟁론과 천황 피해자론
쇼와 천황은 입헌군주로서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천황을 보필하거나 상주한 정치가나 군인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군인과 정치가도 책임이 없다는 입장은 일본이 독립 국가로 존속하기 위한 자위 전쟁이었고 아시아 식민지를 구미 열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천황은 최대의 피해자라는 의견도 있다.
대일본제국 헌법에는 천황에게 거부권이 있을 뿐 의사 결정과 정책 입안은 내각과 제국의회가 수행했다는 의견이 있다. 또 천황의 정치적 무답책이 규정되어 있다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전 황제로서 책임을 추궁당한 것처럼 국제법상 기소 가능성은 있었다. 도쿄 재판에서도 군주무답책론이 언급되진 않았다.[44]
천황이 미일 개전에 반대했다는 의견도 있다. 쇼와 천황은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회견에서 "전쟁 책임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 모두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다.
4. 천황의 면죄와 금기화
종전 직후 난바라 시게루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 대해 법률적, 정치적, 윤리적인 범주를 구분해서 발언했다. 전쟁 직후에는 천황의 전쟁 책임이 거론되고 또 퇴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었다.[24][25]
쇼와 천황은 일본 제국 헌법에 따라 육해군 통수권을 가진 국가원수이자 일본군 대원수였기 때문에 침략 전쟁 지도자로 여겨졌다. 따라서 도쿄 재판에서는 국제법 위반으로 쇼와 천황이 기소될 수도 있었다. 또 입헌군주제 아래 일본 국민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책임, 인적 물적 손해와 영토 손실 등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논의가 있었다. 쇼와 천황은 퇴위 의사가 있었지만 실현되진 않았다.
이후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는 사실상 금기시되었다.
4. 1. 미국의 역할과 정치적 고려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패전 후에도 일본 황실을 유지시켰다. 일본의 전쟁 범죄를 재판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에서 쇼와 천황을 기소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곧 사라졌고, 전후 민주적 선거로 구성된 국회에서 일본국 헌법을 제정하여 쇼와 천황의 지위를 유지하는 상징 천황제가 시작되었다.[24][25]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측은 이러한 조치가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비민주적인 조치이며, 이 문제가 현재까지 해결되지 못한 결정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 조치는 일본을 서방 진영으로 끌어들이려는 연합국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결정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반면, 전쟁 책임 추궁에 반대하는 측은 이것이 미국에 의해 만들어진 합리적인 조치이며, 전후 일본의 민주화를 이끈 요인이라고 평가한다. 만약 천황제가 폐지되어 전통문화와 자부심이 훼손되었다면 상당한 악영향이 있었을 것이며, 쇼와 천황이 전범으로 처형되었다면 일본 국민은 미군정에 덜 협력하고 일본이 분열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윌리엄 웹 재판장은 개인적인 의견으로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지만, 정치적 고려로 기소되지 않았음을 명확히 했다.[4][6]
4. 2. 나가사키 시장 피격 사건
1988년 나가사키 시의회에서 모토지마 히토시 나가사키 시장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발언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45] 이 발언으로 인해 모토지마 히토시는 극우 활동가 와카시마 카즈미에게 총격을 당했다. (나가사키 시장 총격 사건)[45]이 사건은 일본 사회에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가 금기시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이후 나가사키 시장을 지지하는 편지가 각지에서 쇄도했다.[45] 일본 전국은 물론 해외에서도 많은 편지와 엽서 등이 나가사키 시장에게 전달되었고, 이를 정리한 책도 발간되었다.[45] 『나가사키 시장에게 온 7300통의 편지』에는 1988년 12월 8일부터 1989년 3월 6일까지 시장에게 도착한 엽서, 편지, 전보, 전자우편 총 7323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시장을 격려하는 내용이 6942통, 비판·항의하는 내용이 381통으로, 압도적으로 많은 지지 내용이 담겨 있다.[45]
하지만 시장을 "지지하는" 것이 곧 "천황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용기에 감명했다"는 취지나 반대 세력의 폭력적인 협박 행위에 대한 비판[17]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 등을 언급하며 시장의 발언에 지지를 표명하는 내용도 많이 수록되어 있다.[45]
5. 세계의 반응
연합국들은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주장했으나, 미국의 주도로 면죄가 이루어졌다. 영국, 네덜란드, 중국 등에서는 아돌프 히틀러, 베니토 무솔리니와 함께 쇼와 천황을 증오의 대상으로 여겼다.
1971년 쇼와 천황이 유럽을 방문했을 때, 벨기에, 프랑스에서는 환영받았지만, 일영동맹 시절의 구(舊) 동맹국이었던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쇼와 천황에게 증오심을 품은 퇴역 군인 등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 영국에서는 "천황은 돌아가라!!"라는 항의를 받았고, 대중지 『더 선』은 쇼와 천황을 "피로 물든 독재자"로 묘사하며 버킹엄 궁전에서 VIP 대접을 받은 특집 기사를 냈다.[46][47] 1989년 2월 24일, 대상의례 당시 언론에서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는 보도가 있었다.[47]
네덜란드에서는 쇼와 천황이 탄 차에 계란이나 보온병, 묘목을 던질 정도로 반일 감정이 강했고, 쇼와 천황 재위 중이던 1986년 베아트릭스 여왕의 일본 방문은 네덜란드 국내에서 반대 여론이 높았다.
허버트 빅스는 저서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에서 "쇼와 천황은 반성 없는 생애를 살았다"고 지적했다.[49] 2010년 이 책의 완역본을 소개한 대한민국 언론들은 "쇼와가 평화주의자가 아님을 입증했다"고 평가했다. 빅스의 책에 따르면 쇼와는 중일 전쟁에서 화학 무기 사용과 최루탄 사용을 허가했고, 731 부대 창설도 재가했다. 또한 일본군의 살인, 방화, 약탈을 군 최고 통수권자로서 제재하지 않았다.[49][50]
5. 1. 연합국들의 입장
연합군 측에서는 영국, 호주, 소련, 중국 등이 쇼와 천황의 소추를 주장했다.[46] 영국은 천황을 포로로 삼아야 한다고 계획하기도 했다. 1971년 쇼와 천황의 유럽 방문 당시 벨기에, 프랑스에서는 환영받았으나, 일본과 교전했던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퇴역 군인들의 항의 시위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쇼와 천황을 피에 물든 독재자로 묘사했다.[46][47]네덜란드에서는 쇼와 천황의 차에 계란과 보온병이 던져졌고, 쇼와 천황이 식수한 나무 모종이 뽑히기도 했다. 1986년 베아트릭스 여왕의 일본 방문 역시 반대가 심했다.
미국의 경우 1945년 6월 29일 여론 조사에서 쇼와 천황 처형 의견이 33%, 피소 의견이 17%, 종신형 의견이 11%로 나타났다.[48] 그러나 이후 쇼와 천황은 디즈니랜드를 방문하고 미군 병사 위령비에도 참배했다.
5. 2. 미국의 여론과 변화
미국에서는 1945년 6월 29일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쇼와 천황을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이 33%,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의견이 17%, 종신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11%였다.[48] 그러나 이후 쇼와 천황은 디즈니랜드를 방문했고 미군 병사 위령비에도 참배했다.5. 3. 아키히토 천황의 사과와 한국의 반응
아키히토는 쇼와 천황의 뒤를 이어 천황이 되었으며,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와 관련하여 "통석의 염(痛惜の念, 쓰라리게 아프고 안타까운 마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사과했다.[51] 그러나 대한민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 분쟁 문제와 관련하여 "천황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독립운동가에게 사죄하라"면서, "'통석의 염' 같은 표현을 쓰려면 오지 말라"며 이 표현에 대해 정면으로 비판했다.[52][53] 아사히 신문 주필인 와카미야 요시부미는 이 표현에 대해, "천황이 쓸 수 있는 표현의 최대 한계"라면서 "격식을 갖춘 정식 사과는 실질적인 권한을 가진 내각총리대신의 몫"이라며 천황을 변호했다.[54]6. 한국의 관점과 과제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와 침략 전쟁의 피해 당사국으로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를 중요한 역사적 문제로 인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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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紙「サン」昭和天皇の御真影載せ「血に染まった独裁者」「1万6千人殺害」と描写
http://www5f.biglobe[...]
國民新聞
1998
[47]
방송
일본 죄수 수용소에서 사망한 영국군 12,000명 추모식
BBC, ITN
[48]
서적
國破れてマッカーサー
中央公論新社
[49]
서적
히로히토 평전
[50]
뉴스
日王 '히로히토=평화주의자'? 쇼는 끝났다!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2010-10-29
[51]
뉴스
한국인 고통 "통석의 염" (念)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2012-12-15
[52]
뉴스
브란트의 무릎 꿇기와 일왕의‘통석의 염’
https://news.naver.c[...]
이데일리
2012-08-24
[53]
뉴스
“日王 ‘통석의 염’ 같은 말 할거면 방한 말라”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12-08-15
[54]
뉴스
천황이 할 수 있는 말과 할 수 없는 말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1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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