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중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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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중 십자군은 1096년 예루살렘 원정을 목표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에 호응하여 자발적으로 조직된 대규모의 비정규 십자군이다. 은자 피에르의 설교를 통해 서유럽의 사회적, 종교적 불안과 천문 현상, 기근, 역병 등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예루살렘 탈환에 대한 열망이 커지면서, 수만 명에 달하는 군중들이 전투 경험 없이 성지 순례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동로마 제국을 거쳐 소아시아로 진출했으나, 지휘 체계의 혼란과 룸 셀주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대부분 궤멸되었다. 군중 십자군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 부정적으로 갈리며, 은자 피에르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하게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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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세기 십자군 - 제1차 십자군
11세기 후반 서유럽 기독교 세계가 셀주크 투르크의 팽창과 성지 예루살렘의 위기에 대응하여 일으킨 종교적 군사 원정인 제1차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로 시작되어 예루살렘 점령과 십자군 국가 건설로 이어졌으나, 잔혹 행위와 갈등 또한 야기했다.
군중 십자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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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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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096년 4월 ~ 10월 |
장소 | 중앙유럽, 아나톨리아, 니케아 |
결과 | 룸 술탄국의 승리 |
원인 | 십자군의 약탈과 학살 십자군의 전투력 부족 룸 술탄국의 군사적 우위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서유럽 가톨릭 신자 |
교전국 2 | 룸 술탄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십자군 | 은자 피에르 고티에 상 아부아르 플론하임의 에미코 |
룸 술탄국 | 킬리지 아르슬란 1세 |
병력 규모 | |
십자군 | 20,000명 (초기 40,000명) |
룸 술탄국 | 알 수 없음 |
피해 규모 | |
십자군 | 극심한 피해, 거의 전멸 |
룸 술탄국 | 비교적 적은 피해 |
관련 항목 | |
캠페인 상자 | |
사건 | |
주요 사건 | 라인란트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 학살 |
결과 | 라인란트에서 가톨릭 승리 |
명칭 | |
영어 명칭 | People's Crusade, Peasant's Crusade, Pauper's Crusade |
2. 배경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파견할 것을 호소하여, '성지 탈환'이라는 열풍이 서유럽을 휩쓸었다. 교황은 프랑스 남부 제후들의 군대를 1096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출발시킬 예정이었으나, 그보다 몇 달 전 서민과 하급 기사들의 자발적인 병력이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당시 군중 십자군은 무지하고 무능한 농민 집단으로 여겨졌으나, 이는 성직자나 제후의 관점에서 '서민'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중소 토지 소유자, 하급 성직자, 심지어 기사들도 참가했다. 제1차 십자군 연대기를 남긴 샤르트르의 풀케와 '무산공'으로 알려진 하급 기사 고티에도 참가자였다. 또한, 은자 피에르를 포함하여 예루살렘 순례 경험이 있는 이들도 있었기에, 예루살렘의 위치를 몰랐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2. 1. 서유럽의 사회적, 종교적 상황
1095년 11월,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예루살렘으로 군대를 파견할 것을 호소했고, 이는 곧 서유럽 전역에 "성지 탈환"이라는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교황은 당초 1096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프랑스 남부 제후들의 군대를 출발시킬 예정이었으나, 그보다 몇 달 앞서 예기치 않게 서민과 하급 기사들이 자발적으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11세기는 중세 온난기로 인해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고, 사람들은 이주, 개간, 하극상 등을 통해 그 힘을 발산하며 폭발 직전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민들은 수년간 가뭄, 기근, 전염병에 시달렸고, 이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을 얻고자 순례에 참여하기도 했다. 1095년 초에는 유성우, 오로라, 월식, 혜성과 같은 천체 현상이 발생하여, 서민들에게 "하늘의 축복"으로 여겨지며 십자군 참여를 부추겼다.[7] 호밀 등에 기생하는 맥각균으로 인한 맥각 중독 또한 만연했는데, 맥각 중독 유행 이후에는 속죄나 요양을 위한 순례가 유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11세기 초, 새로운 천년기(千年紀)가 시작되면서 성경에 언급된 "천년왕국"에 대한 기대감이 다시 부활했다.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배경은 우르바누스 2세가 예상했던 수천 명 규모의 기사 원정을 넘어, 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한 최대 4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군중 십자군으로 이어졌다.[7]
이러한 움직임을 이끈 정신적 지도자는 아미앵 출신의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자 은자 피에르였다. 그는 허름한 옷을 입고 노새를 타며 북프랑스에서 플랑드르까지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며 십자군 참여를 열정적으로 설파했다. 피에르는 예수가 직접 자신에게 나타나 설교를 명했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십자군을 처음 제안한 사람이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아니라 은자 피에르라고 믿기도 했다.
흔히 군중 십자군은 무지하고 무능한 농민 집단으로 묘사되지만, 이는 성직자나 영주의 관점에서 "서민"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중소 토지 소유자와 같은 부유한 사람이나 하급 성직자도 참여했으며, 군사 경험이 없는 기사들도 있었다. 십자군에 대한 연대기를 남긴 샤르트르의 후세와 "무산공" 또는 "무일푼의 발터"로 알려진 하급 기사 고티에 생자부아도 군중 십자군에 참가했다.[8] 또한, 당시에는 예루살렘 순례가 활발했기 때문에 (피에르 자신도 십자군 이전에 예루살렘을 순례한 경험이 있다는 설이 있다), 군중 십자군 구성원 중 누구도 예루살렘의 위치와 거리를 몰랐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다.

2. 2. 클레르몽 공의회와 우르바누스 2세의 호소
로마 교황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11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성지 예루살렘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호소했고, '성지 탈환'의 열정이 순식간에 서유럽을 뒤덮었다. 교황은 당초 프랑스 남부 제후들의 군대를 성모 승천 대축일인 이듬해 1096년 8월 15일에 출발시킬 예정이었지만, 그보다 몇 달 전에 예정에 없던 서민이나 하급 기사들의 자발적인 병력이 예루살렘으로 출발했다.11세기는 중세 온난기로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인간은 이주와 개간, 하극상 등 그 힘을 발산시키며 언제든 폭발할 계기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빈민들은 수년 전부터 가뭄과 기근, 역병에 시달리면서 그러한 가운데 도피와 구원을 찾아 순례에 참가하는 자들도 있었다. 또한 1095년 초에는 유성우, 오로라, 월식, 혜성 출몰과 같은 천체현상이 일어났고, 이러한 현상들도 서민들에게 '하늘로부터의 축복'으로 여겨져 자극제가 되었다. 나아가 호밀 등의 맥각균이 일으킨 맥각 중독도 만연했는데, 맥각 중독이 유행하고 난 뒤 속죄나 전지 요양을 위한 순례가 유행하곤 했다.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가 시작된 11세기 초에는 성경에서 말한 '천년왕국'에 대한 대망마저 다시 부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우르바누스 2세가 기대했던 수천 명 규모의 기사에 의한 원정을 넘어 4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이주단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 거의 대부분은 전투 경험이 없는 미숙한 전사, 여자, 아이들이었다.[7]
이를 정신적으로 주도한 것은 카리스마 높은 열렬한 설교자였던 아미앵의 은자 피에르였는데, 그는 허름한 옷에 당나귀를 타고 북프랑스에서 플랑드르까지 넓은 지역을 돌며 십자군 참여를 설파하고 나섰다. 피에르는 예수가 자신의 눈앞에 나타나 설교하도록 명했다고 주장했고,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십자군을 처음으로 발안한 것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아닌 은자 피에르라고 주장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2. 3. 은자 피에르의 역할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가 십자군 원정을 호소한 후, 아미앵 출신의 은자 피에르가 이 운동을 이끌었다. 피에르는 카리스마 넘치는 수도사이자 강력한 웅변가로, 노새를 타고 다니며 수수한 옷을 입고 프랑스 북부와 플랑드르 전역을 돌며 십자군 참여를 열정적으로 설교했다.[7] 그는 그리스도가 직접 자신에게 설교를 명했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는 교황이 아닌 피에르가 십자군을 처음 제안했다고 믿었다.[8]피에르의 설교는 당시 사회적 배경과 맞물려 큰 호응을 얻었다. 11세기는 중세 온난기로 인구와 농업 생산량이 증가했지만, 동시에 가뭄, 기근, 역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십자군을 고난에서 벗어날 기회로 여겼다.[7] 또한 1095년 초부터 유성우, 오로라, 월식, 혜성 출현 등 천체 현상이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이를 하늘의 축복으로 여기고 십자군 참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호밀 등에서 발견되는 맥각균으로 인한 맥각 중독의 만연 또한 속죄와 치유를 위한 순례 열풍을 일으켰고, 이는 십자군 참여로 이어졌다.
흔히 군중 십자군은 무지하고 무능한 농민 집단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중소 토지 소유자, 하급 성직자, 심지어 군사 경험이 없는 기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9] 이들은 예루살렘으로의 순례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예루살렘의 위치를 전혀 몰랐다는 것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3. 유럽 내 유대인 박해
십자군 운동이 고조되면서 반유대주의 또한 극심해졌다. 프랑스와 독일 일부 지역에서는 유대인이 이슬람교도와 같은 적으로 인식되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멀리 떨어진 무슬림과는 달리 가까운 곳에 있던 유대인을 '이교도'로 간주하여, 십자군 운동 와중에 「멀리까지 싸우러 나갈 것 없이 바로 가까이에 이교도가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라인란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고리대에 대한 종교적인 제한이 없어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렸고, 십자군 참가자 대부분은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돈을 빌려야 했다. 그러나 당시 서구 기독교는 사채를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들이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트샤르크(Gottschalk), 폴크마(Volkmar)라는 선교사, 라이닝겐 백작 에미히 등이 유대인 박해를 주도했다.
3. 1. 라인란트 학살
1096년 봄부터 여름까지, 십자군 운동이 고조되면서 반유대주의가 폭발했다. 프랑스와 독일 일부 지역에서는 유대인이 이슬람교도와 같은 적으로 인식되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당한 책임이 유대인에게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멀리 떨어진 무슬림과는 달리 가까운 곳에 있는 「이교도」였던 유대인에 대해, 십자군 운동 와중에 「멀리까지 싸우러 나갈 것 없이 바로 가까이에 이교도가 있지 않은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라인란트의 유대인 공동체는 당시 기독교인들이 기피하던 고리대에 대한 종교적인 제한이 없어 비교적 풍족한 생활을 누렸고, 십자군에 참가한 대부분은 무기와 장비를 구입하기 위해 돈을 빌려야 했지만, 당시 서구 기독교는 사채를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들이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고트 샤르크(Gottschalk), 폴크마(Volkmar)라는 선교사, 라이닝겐 백작 에미히 등이 유대인 박해를 주도했다. 이들이 이끄는 집단은 1096년 봄부터 여름까지 작센, 마그데부르크, 보헤미아, 라인란트(특히 마인츠와 쾰른) 등 각지에서 유대인 공동체를 습격하여 살육을 자행했다.
1096년 늦봄과 여름, 십자군은 프랑스와 독일에서 전례 없는 대규모 포그롬을 벌여 라인강을 따라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 공동체를 파괴했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하거나, 자살하거나, 기독교로 강제 개종당했다.[10][11][12]
각 도시별 피해 상황은 다음과 같다.
- 슈파이어: 12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지만, 주교가 나머지 유대인들을 구했다.
- 보름스: 약 800명이 살해되었다.
- 마인츠: 1,00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살해되었다.
- 트리어, 메츠, 쾰른 등: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
이 외에도 다른 사람들은 강제 세례와 개종을 당했다. 설교자 폴크마르와 에미코 폰 플론하임이 학살을 주도하고 선동했다. 1096년 학살의 주요 연대기 작가로는 솔로몬 바르 심슨과 아헨의 알베르트가 있다.[13][12][10][14]
십자군에 의해 살해되거나 자살로 내몰린 유대인 남녀노소의 수는 2,000명에서 12,000명 사이로 추정된다.[15] 노먼 콘은 1096년 5월부터 6월까지 4,000명에서 8,000명 사이로 추산한다.[13] 게달리아 이븐 야흐야는 1096년 4월부터 6월까지 약 5,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16] 에드워드 H. 플래너리는 더 긴 1월부터 7월까지 기간에 10,000명이 살해되었으며, "당시 독일과 북부 프랑스의 유대인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에 해당한다고 추산했다.[17] 유럽의 성직자와 귀족들은 유대인 살해를 비난했고, 이후의 십자군에서는 이를 금지했다.[18]
4. 군중 십자군의 이동 경로와 사건
1096년 4월 12일, 은자 피에르는 프랑스인 군단을 이끌고 쾰른에 집결하여 독일인들에게 십자군 참가를 권유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피에르의 설교를 기다리지 않고 고티에 생자부아의 지휘 아래 수천 명이 먼저 출발하여 5월 8일에 헝가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헝가리를 지나 베오그라드에 도착했지만, 베오그라드 사령관은 이들의 시내 출입을 거부했다. 군중 십자군은 식량이 부족해지자 근처 농촌을 약탈하다 베오그라드 중장보병과 충돌했고, 고티에의 부하 16명이 제문 시장을 약탈하기도 했다.[19]
7월 말, 군중 십자군은 동로마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19]
은자 피에르와 4만 명의 십자군 본대는 4월 20일에 쾰른을 떠났다. 이들은 도나우강에 도착했고, 일부는 배로, 본대는 육로로 이동하여 헝가리로 들어갔다. 헝가리를 통과한 피에르의 본대는 세문에서 배에서 내린 부대와 합류했다. 세문 성벽에는 고티에 부하들의 옷과 갑주가 걸려 있었고, 시장에서 벌어진 다툼 끝에 폭동이 일어나 헝가리인 4천 명이 살해되고 세문은 군중 십자군에게 정복당했다. 십자군은 사바강을 건너 베오그라드로 갔으나 동로마 병사와 충돌했고, 주민이 달아난 베오그라드를 점령해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5]
7월 3일, 군중 십자군은 니시에 도착했다. 니시 사령관은 즉시 떠난다면 식량과 콘스탄티노플로의 길 안내를 돕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독일인 일부가 방앗간에 불을 지르면서 니시 병사들과 교전이 벌어졌고, 군중 십자군은 크게 패배하여 1만 명이 죽었다. 생존자들은 벨라팔란카에서 다시 모여 7월 12일에 소피아에 도착했고, 동로마 제국의 안내를 받아 8월 1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5]
4. 1. 고티에 생자부아와 프랑스인 군대
1096년 5월 8일, 고티에 생자부아가 이끄는 수천 명의 프랑스 십자군이 헝가리에 도착했다. 이들은 칼만 1세가 다스리던 헝가리를 별다른 문제 없이 통과하여 사바강과 도나우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는 헝가리와 동로마 제국의 국경 도시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베오그라드 사령관은 대규모 군대가 도착한 것에 놀라 별다른 대처 명령 없이 이들의 시내 출입을 거부했다. 식량이 부족해진 군중 십자군은 근처 농촌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베오그라드 중장보병과 충돌이 벌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고티에의 부하 16명이 사바강 건너 헝가리령인 제문 시장을 약탈하여 훔친 갑옷과 옷을 성벽 밖에 걸었다.[19]결국 군중 십자군은 니시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고, 그곳에서 식량을 보급받고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내 통과 허가 통지를 기다렸다. 7월 말, 동로마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군중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19]
4. 2. 은자 피에르와 본대의 발칸 반도 횡단

은자 피에르와 남은 4만 명 규모의 십자군 일행은 1096년 4월 20일에 쾰른을 떠났다. 피에르의 군세는 도나우강에 도착했고, 일부는 배로 도나우 강을 따라 내려가고, 본대는 육로를 따라 외덴부르크(쇼프론)에서 헝가리로 들어갔다. 큰 사건 없이 헝가리를 통과한 피에르의 본대는 동로마 제국과의 국경 세문에서 배에서 내린 부대와 합류했다.[5]
세문 성벽에는 고티에의 부하들이 입던 옷과 갑주가 걸려 있었다. 이를 본 일행들은 의구심을 품었고, 시장에서 신발 값을 놓고 다투던 끝에 폭동이 일어났다. 피에르가 제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면적인 무력 충돌이 벌어져, 헝가리인 4천 명이 살해되고 세문은 군중 십자군에 정복당했다.[5] 십자군은 사바강을 건너 베오그라드 쪽으로 갔으나 동로마 병사와의 충돌이 일어났다. 주민이 달아난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십자군은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5]

군중 십자군은 베오그라드에서 7일 동안 행군하여 7월 3일 니시에 도착했다. 니시 마을의 사령관은 "지금 바로 떠난다면 식량은 물론 콘스탄티노플로의 길 안내도 돕겠다"는 약속을 했다. 피에르는 이튿날 아침 니시를 떠나려 했지만, 군중 십자군에 포함되어 있던 독일인 가운데 일부가 지나가던 주민과 말다툼을 벌이다 방앗간에 불을 질렀다. 니시의 병사들은 십자군과 교전에 들어갔고, 피에르의 제지도 소용이 없었다. 군중 십자군은 니시 병사들에게 완전히 압도되었고, 일행의 1/4인 1만 명이 죽었다.[5] 살아남은 사람들은 벨라팔란카에서 다시 모여 7월 12일 소피아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동로마 제국이 파견한 안내자가 일행을 데리고 8월 1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5]
5. 지휘 체계 혼란과 룸 셀주크와의 전투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평범한 군대가 아닌 군중 십자군의 예상 밖의 도착에 당황했다. 식량 문제와 치안 불안 때문에, 황제는 8월 6일 3만 명 가량의 군중 십자군을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소아시아로 수송했다.[20] 황제가 이들을 투르크족에게 몰살당할 것을 알고도 안내 없이 소아시아로 보냈는지, 아니면 황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이 진군을 강행했는지는 논란거리다. 어쨌든 알렉시오스 1세는 은자 피에르에게 투르크군과의 교전을 피하고, 서유럽에서 제후들의 십자군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경고했다.[21]
피에르는 고티에가 지휘하는 프랑스인 군대,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도착한 이탈리아인 십자군 부대와 합류했다. 소아시아에 도착한 이들은 마르마라해 동쪽의 니코메디아에 이르기까지 마을을 약탈했는데, 이곳에서 독일인, 이탈리아인, 프랑스인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독일인과 이탈리아인은 프랑스인과 결별하여 레이날도를 새 지도자로 추대했고, 프랑스군은 고프리 브루엘이 지휘하게 되었다. 피에르는 이미 군중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상태였다.
알렉시오스 황제가 피에르에게 본대를 기다리라고 요청했지만, 군중 십자군은 흩어져 소아시아를 공격해 나아갔다. 프랑스군은 룸 셀주크 왕조의 수도 니케아 근처에 이르러 그리스인과 튀르크인 마을을 약탈했다. 한편, 독일인 등 6천 명은 니케아 동쪽으로 진격하여 제리골돈을 점령하고 약탈 거점으로 삼았다.
5. 1. 제리골돈 전투
룸 셀주크 왕조의 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군대를 보내 9월 21일부터 제리골돈을 포위 공격했다. 제리골돈의 물 공급이 끊기자 십자군 병사들은 갈증을 견디지 못하고 당나귀의 피와 자신의 오줌을 마시는 지경에 이르렀다.[22] 결국 9월 29일, 제리골돈은 룸 셀주크 군대에 의해 함락되었다. 포로로 잡힌 병사들 중 이슬람으로 개종한 사람들은 페르시아 동부 호라산으로 보내졌고, 개종을 거부한 사람들은 살해되었다.[22]5. 2. 키보토스 전투 (드라콘 전투)
1096년 10월 21일,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군중 십자군은 룸 셀주크 왕조의 수도 니케아로 향하던 중, 드라콘 마을(키보토스) 근처 좁은 골짜기에서 셀주크 군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 전투는 키보토스 전투 또는 드라콘 전투라고 불린다.킬리지 아르슬란 1세는 제리골돈을 함락시킨 독일인들이 니케아까지 함락시켰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이에 속은 군중 십자군은 약탈에 참여하기 위해 니케아로 진군했다. 은자 피에르는 보급품을 구하러 콘스탄티노플로 간 상황이었고, 군중 십자군 지도부는 피에르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지지를 받던 조프로와는 즉시 니케아로 가서 투르크인과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조프로와의 주장이 지지를 얻어 10월 21일 아침, 군중 십자군은 니케아로 행군했다. 그러나 드라콘 마을 근처의 좁은 골짜기에 이르자, 셀주크 군대의 화살 공격을 받았다. 공황 상태에 빠진 군중 십자군은 궤멸되었고, 숙영지로 도망쳤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흩어진 상태였다.
이 전투로 군중 십자군은 거의 전멸당했고, 여자와 아이 등 항복한 사람들은 노예가 되었다. 월터 상 아브아를 포함한 수천 명의 병사가 전사했다. 조프로와 뷰렐을 포함한 3천 명 정도는 버려진 옛 성터로 피신했다가, 동로마 제국 군대의 도움으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여 나중에 제1차 십자군과 합류했다.
6. 평가
군중 십자군에 대한 평가는 11세기 말과 12세기 초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갈린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빈곤하여 군사적으로 짐이 되었고, 무질서한 오합지졸로 가는 곳마다 약탈을 했다는 부정적 시각과, 민중사관 등의 입장에서 중세 유럽의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민중 운동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십자군의 성지 순례라는 측면에서 이들 「민중」이야말로 십자군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은자 피에르에 대한 오늘날의 시각도 수상한 선동가, 민중 지도자라는 여러 평가로 나뉜다.
6. 1. 긍정적 평가
군중 십자군에 대한 평가는 11세기 말이나 12세기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갈리고 있다. 민중사관 등의 입장에서 당시 중세유럽의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민중에 의한 운동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군사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십자군의 성지 순례라는 측면에서 이들 「민중」이야말로 십자군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6. 2. 부정적 평가
군중 십자군에 대한 평가는 11세기 말과 12세기 초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가지로 나뉘어 있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가난한 집단이었던 그들이 군사적으로 오히려 짐이 되었고, 무질서한 오합지졸이 되어 가는 곳마다 약탈을 자행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한다.6. 3. 은자 피에르에 대한 평가
은자 피에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한편으로는 그를 수상한 선동가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피에르를 민중을 이끈 지도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평가는 군중 십자군에 대한 상반된 시각과 연결되는데, 군중 십자군을 무질서하고 약탈을 일삼는 집단으로 보는 부정적 시각과, 중세유럽의 빈곤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민중의 움직임으로 보는 긍정적 시각이 공존한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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