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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내청 시모후사 어료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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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궁내청 시모후사 어료목장은 1875년 설치된 일본의 목장으로, 메이지 시대에 시작되어 다이쇼, 쇼와 시대를 거치며 운영되었다. 초창기에는 목양장과 종축장으로 시작해, 이후 궁내성 소속으로 변경되어 황실의 어료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벚꽃 명소로도 유명했으며, 메이지 천황과 쇼와 천황 등이 방문하기도 했다. 1969년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로 인해 폐장되었으며, 현재는 일부 부지가 기념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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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내청 시모후사 어료목장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위치일본 지바현 나리타시
좌표위도: 35° 44' 54" N
경도: 140° 22' 19" E
종류목장
소유궁내청
개장1886년
추가 정보
주요 역할황실 관련 행사용 농축산물 생산
특징황실 관련 행사 시 사용되는 농축산물 생산, 천황 관련 행사 지원

2. 역사

후토리시 료고쿠에 세워진 오쿠보 경 목양장 선정의 비


에도 시대 시모사 대지에는 군마나 농경마를 방목하는 사쿠라목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쿠라목은 "사쿠라 7목"이라고도 불렸으며, 산리즈카는 그 중 하나인 톳코목(取香牧)에 속했다. 1869년(메이지 2년) 에도 막부가 망하면서 사쿠라목은 폐지되었다. 문명개화의 영향으로 국내에서 모섬유 생산을 늘릴 필요성이 생겨, 내무성은 미국 양목가를 기용해 각지를 조사했고, 1875년(메이지 8년) 9월 톳코목 인접지에 시모후사 목양장이 개장했다. 톳코목은 우마 개량을 담당하는 톳코 종축장으로 재설치되었다.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가 현지를 시찰한 뒤 내무성의 이와야마 타카요시가 목양장과 종축장 양장의 초대 장장으로 취임했다.[1]

1878년(메이지 11년)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당한 후, 1880년(메이지 13년) 시모후사 목양장과 토리카 종축장은 합병하여 시모후사 종축장이 되었다. 시모후사 종축장은 장내를 산리즈카구, 료고쿠구 등 7개 구로 나누었으며, 본청은 료고쿠구에 설치되었다.

1881년(메이지 14년) 시모후사 종축장의 관리는 내무성에서 농상무성으로 이관되었고, 1885년(메이지 18년) 궁내성 어료국의 직관이 되었다. 1888년(메이지 21년) 「궁내성 시모후사 어료목장」으로 개칭되었고, 료고쿠에 있던 본청이 산리즈카로 옮겨졌다. 이후 목양 사업은 점차 축소되었다.

다이쇼 시대로 넘어가면서 목장 경영 개선을 도모했지만, 사업은 더욱 축소되었다. 1922년(다이쇼 11년)에는 목장 경영 악화로 말 번식이 일시 중단되었다. 1923년(다이쇼 12년) 목장 총면적의 60%를 제실임야국으로 이관, 7개 구에서 산리즈카, 료고쿠 2개 구만 남았다.

쇼와 시대 들어 말 번식을 재개, 서러브레드, 프랑스 원산의 앵글로아랍 등 경주마도 다루면서 한때 호황을 누렸다. 특히 1927년(쇼와 2년) 영국에서 수입한 서러브레드 종마 투르느솔로부터 제1회 도쿄준마대경주 우승마 와카타카가 나왔고, 1935년(쇼와 10년)에 수입된 다이올라이트에게서 일본 경마 사상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마 세인트라이트가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사회당의 다테 히로이 등이 중심이 되어 어료목장 해방운동이 일어났다.[2]

1966년(쇼와 41년) 일본국 정부는 어료목장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부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3]

1969년(쇼와 44년) 어료목장은 도치기현 다카네자와정으로 이전이 결정되었고, 같은 달 18일에 폐장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나리타 공항 반대투쟁이 격화되어 공항 반대파가 식장 내에 난입하는 가운데 94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도치기의 신 목장에는 80가구 약 300명, 가축 약 400마리가 이전했다. 시모후사 어료목장의 일부는 산리즈카 기념공원으로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리즈카 고료 목장 터(산리즈카 기념 공원·나리타시산리즈카 고료)

2. 1. 성립 (메이지 시대)

에도 시대에 시모사 대지에는 군마나 농경마를 방목하는 사쿠라목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쿠라목은 7개의 으로 구성되어 "사쿠라 7목"이라고도 불렸으며, 산리즈카는 그 중 하나인 톳코목(取香牧)에 속했다. 에도 막부가 망하면서 1869년(메이지 2년) 사쿠라목은 폐지되었다. 문명개화의 영향으로 국내에서 모섬유 생산을 늘릴 필요성이 생겨, 내무성은 미국 양목가를 기용해 각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톳코목 인접지가 목양장으로 결정되어 1875년(메이지 8년) 9월 시모후사 목양장이 개장했다. 이때 톳코목은 우마 개량을 담당하는 톳코 종축장으로 재설치되었다.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가 현지를 시찰한 뒤 내무성의 이와야마 타카요시가 목양장과 종축장 양장의 초대 장장으로 취임했다.[1]

1878년(메이지 11년) 5월 오쿠보 도시미치가 암살당한 후, 1880년(메이지 13년) 1월 시모후사 목양장과 토리카 종축장은 합병하여 시모후사 종축장이 되었다. 이 합병은 사업 정리의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시모후사 종축장은 장내를 산리즈카구, 료고쿠구 등 7개 구로 나누었으며, 본청은 료고쿠구에 설치되었다.

1881년(메이지 14년) 시모후사 종축장의 관리는 내무성에서 농상무성으로 이관되었고, 1885년(메이지 18년) 6월에는 궁내성 어료국의 직관이 되었다. 1888년(메이지 21년) 10월 「궁내성 시모후사 어료목장」으로 개칭되었고, 료고쿠에 있던 본청이 산리즈카로 옮겨졌다. 이후 목양 사업은 점차 축소되고 면양의 수도 감소했다.

2. 2. 다이쇼-쇼와 시대

메이지 시대에서 다이쇼 시대로 넘어가면서 목장 경영 개선을 도모했지만, 사업은 더욱 축소되었다. 1922년(다이쇼 11년)에는 목장 경영 악화로 말 번식이 일시 중단되었다. 1923년(다이쇼 12년) 목장 총면적의 60%에 해당하는 2044정보를 제실임야국으로 이관, 종래의 7구에서 산리즈카, 료고쿠 2구만 남았다.

쇼와 시대 들어 말 번식을 재개, 서러브레드, 프랑스 원산의 앵글로아랍 등 경주마도 다루면서 한때 호황을 누렸다. 특히 서러브레드 산출은 유명했는데, 1927년(쇼와 2년) 영국에서 수입한 서러브레드 종마 투르느솔로부터 제1회 도쿄준마대경주 우승마 와카타카가 나왔다. 또한 1935년(쇼와 10년)에 수입된 다이올라이트에게서 일본 경마 사상 최초의 트리플 크라운마 세인트라이트가 나왔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에는 일본사회당의 다테 히로이 등이 중심이 되어 어료목장 해방운동이 일어났다.[2]

2. 3. 폐장

1966년(쇼와 41년) 7월 4일, 일본국 정부는 각의 결정을 통해 어료목장을 없애고 그 자리에 신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부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3]

1969년(쇼와 44년) 8월, 어료목장은 도치기현 다카네자와정으로 이전이 결정되었고, 같은 달 18일에 폐장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나리타 공항 반대투쟁이 격화되어 공항 반대파가 식장 내에 난입하는 가운데 메이지 시대 이래 94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도치기의 신 목장에는 80가구 약 300명, 가축 약 400마리가 이전했다. 시모후사 어료목장의 일부는 산리즈카 기념공원으로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주요 시설 및 역할

에도 시대 시모사 대지에 설치된 사쿠라목은 군마와 농경마 방목지로 활용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개화와 함께 국내 모섬유 생산 증대를 위해 1875년 시모후사 목양장이 개장되었고, 초대 장장은 이와야마 타카요시였다. 1880년 시모후사 목양장과 톳코 종축장이 합병되어 시모후사 종축장이 되었으며, 1885년 궁내성 관할이 되었다가 1888년 궁내성 시모후사 어료목장으로 개칭되었다.

다이쇼 시대에는 경영 악화로 말 번식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쇼와 시대에 들어서면서 말 번식을 재개, 서러브레드, 앵글로아랍 등 경주마를 생산하며 호황을 누렸다. 특히 투르느솔과 다이올라이트 같은 종마를 통해 와카타카, 세인트라이트 등 뛰어난 경주마를 배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황실에 농축산물을 공급하고 경주마를 생산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3. 1. 벚꽃 명소

삼리츠카는 봄에 벚나무 10만 그루가 만발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였으며, 인근의 나리타산 신쇼지, 소고 레이도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삼리츠카 벚꽃은 목장 개장 당시 방풍림으로 삼나무, 소나무, 느티나무와 함께 요시노 벚꽃, 산벚나무, 겹벚꽃 등을 심은 것이 시초였다. 넓은 목장을 산책하며 꽃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며, "한 리, 두 리, 꽃은 벚꽃의 삼리츠카"라는 칭송도 받았다.[1] 1969년 4월 1일부터 4월 15일까지 열린 마지막 벚꽃 축제에는 20만 명의 인파가 몰려 벚꽃의 아쉬움을 달랬다.[1]

3. 2. 황실과의 관계

1881년(메이지 14년)과 1882년(메이지 15년) 메이지 천황이 시모후사 종축장에 행차하여, 두 번 모두 마차를 이용하지 않고 아카사카 임시 황거에서 환궁까지 4박 5일 동안 37.5리(약 140km)를 승마로 이동하며 면양 방목, 야생마 포획 상황 등을 견학했다.[5] 1885년(메이지 18년) 궁내성으로 이관된 후에는 일본 유일의 궁정 목장으로서 황실의 어료 목장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태평양 전쟁 이후 어료 목장은 어료마와 시종마 생산, 어료용 축산 가공품, 생고기, 계란, 채소류 생산 및 공급을 주로 담당했다.

황족들의 방문도 잇따랐다. 전후 1951년 (쇼와 26년) 10월 20일에는 준궁 세이노미야 양 내친왕이 1박하며 목장 안을 견학하고 고구마나 버섯 채취 등을 했다.[5] 1953년(쇼와 28년)에는 쇼와 천황, 고준 황후, 황태자(현재의 상왕 아키히토)가 행차하여 사육 동물 및 농작업 상황을 견학했다.

황족 숙소로 사용되었던 귀빈관 뒤편에는 콘크리트 구조의 방공호가 있는데, "어문고"라고 불리는 황족용이었다고 한다. 다만, "어문고"라는 정식 명칭은 확인되지 않아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종전 후에는 어료목장에서 수확한 고구마나 감자 저장고, 아이들의 놀이터로 사용되기도 했지만,[10] 2008년 (헤이세이 20년) 10월 21일부터 나리타시에서 본격적인 조사를 진행했다. 공사를 수주한 간구미(현 안도 하지마)의 사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에 일본이 참전한 1941년 12월 8일에 완공되었다고 하며,[11] 내부 배전반에 "쇼와 16년 제조"라고 적혀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12] 시종 소창고차의 당시 일기에는 "공습 시의 동궁 피난 시기는 빠를수록 좋지 않은가, 아직 산리츠카(三里塚)가 완성되지 않은 것 같지만"이라고 돌관 공사의 진척을 걱정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11] 2011년 4월부터는 일반 공개되어 내부를 견학할 수 있게 되었다.

4. 연표


  • 1875년(메이지 8년) 9월: 시모후사 목양장, 도리카 종축장 개설. 초대 장장에 이와야마 게이키가 임명됨.
  • 1880년(메이지 13년): 시모후사 목양장과 도리카 종축장을 합병하여 시모후사 종축장으로 개칭.
  • 1881년(메이지 14년): 농상무성 설치로 농상무국에 목축, 수의과를 두고 목장은 그 소관이 됨.
  • 1885년(메이지 18년): 목장의 소관이 농상무성에서 궁내성으로 변경. 궁내성 시모후사 종축장으로 개칭.
  • 1888년(메이지 21년): 목장 종마료(種馬寮)의 소관으로 옮겨, 궁내성 어료 목장으로 개칭.
  • 1889년(메이지 22년): 사무소를 료고쿠 구 다카호리에서 산리츠카(三里塚)로 이전.
  • 1914년(다이쇼 3년): 어료 목장 관제 공포, 어료 목장은 궁내대신의 관리에 속하고, 주마두의 통솔을 받게 됨.
  • 1922년(다이쇼 11년): 정부의 행정 정리에 의해, 용지 2,044정보를 제실 임야국으로 이관. 어료 목장제를 폐지. 궁내성 시모후사 목장으로 개칭. 말의 생산 사업을 중지.
  • 1927년(쇼와 2년): 신관 목장으로 이관된 종축장을 본장으로 되돌림. 말의 생산 업무 재개. 영국에서 서러브레드 종마 '투르누솔'(トウルヌソル) 수입.
  • 1935년(쇼와 10년): 영국에서 서러브레드 종마 '다이오라이트'(ダイオライト) 수입.
  • 1939년(쇼와 14년): 문부성의 권장으로 지바현 내의 구제 중학교와 실업학교에서 글라이더 훈련장으로 사용됨[2]
  • 1942년(쇼와 17년): 궁내성 어료 목장으로 개칭.
  • 1949년(쇼와 24년): 궁내부는 궁내청이 되어, 주마료 폐지. 목장은 신설된 궁내청 관리부의 소관이 됨. 경종마의 생산 업무 재개.
  • 1966년(쇼와 41년)
  • * 7월 4일: 산리츠카 지역에 신 도쿄 국제 공항 설치의 각의 결정.
  • * 9월~10월: 신 목장의 후보지 조사 결과, 도치기현 시오야군 다카네자와정 설치 결정.
  • 1969년(쇼와 44년)
  • * 8월 18일: 목장 폐장식 거행.
  • * 8월 - 9월: 신 목장 (다카네자와 어료 목장)으로 이전 시작.


역대 목장장
성명취임퇴임
1이와야마 게이키1875년 (메이지 8년) 11월1883년 (메이지 16년) 5월
2하타노 마사사다1883년 (메이지 16년) 5월1886년 (메이지 19년) 2월
3미야오카 쇼키치1886년 (메이지 19년) 2월1886년 (메이지 19년) 11월
4가쓰노 겐하치로1886년 (메이지 19년) 11월1888년 (메이지 21년) 9월
5신야마 소스케1888년 (메이지 21년) 9월1922년 (다이쇼 11년) 11월
6하베 요시타카1922년 (다이쇼 11년) 11월1923년 (다이쇼 12년) 8월
7마스무라 가오1923년 (다이쇼 12년) 8월1926년 (다이쇼 15년) 6월
8사카이 가쓰미1926년 (다이쇼 15년) 6월1927년 (쇼와 2년) 2월
9다나카 지로1927년 (쇼와 2년) 2월1964년 (쇼와 39년) 10월
10다카노 모리오1964년 (쇼와 39년) 10월1966년 (쇼와 41년) 9월


5. 관련 인물


  • D. W. 압존스 (D. W. Ap Jones): 미국 출신의 목양가로, 메이지 정부의 식산흥업 정책에 따라 일본에 왔다. 1875년 시모후사 어료목장 개장 당시 면양 사육 최고 책임자로서 일본 근대 목양업의 기초를 다졌다.[1] 친일적인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 신야마 소스케: 5대 장장으로 32년간 재임하며 일본 수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1924년 그의 공적을 기리는 동상이 건립되었고, 2002년 사토즈카 기념공원에 재건되었다.[6] 장내에 벚꽃을 심는 것을 발의하여 5만 그루의 벚나무를 심어 사람들이 방문하는 장소로 만들었다.[7]
  • 다카무라 고타로: 1924년 4월 13일 시모후사 어료목장을 노래한 시 "춘마"를 발표했다. 이 시는 현재 사토즈카 기념 공원 부지 내에 비문으로 남아 있다.
  • 노다이라 쇼조: 씨수말 관리 담당에서 기수로 전향했으며, 기수 현창자인 노다이라 유지의 아버지이다.
  • 다테 히로이: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어료목장 해방 운동을 주도했다.
  • 오쿠보 도시미치: 내무경으로서 1875년 시모후사 목양장 설치를 주도했다.[1]

6. 기타

징기스칸은 어료목장 직원이 시작한 요리라고 전해지며, 이 지역의 전통적인 식문화가 되었다.[8][9]

황족 숙소로 사용되었던 귀빈관 뒤편에는 콘크리트 구조의 방공호가 있는데, "어문고"라고 불리는 황족용이었다고 한다. 다만, "어문고"라고 정식으로 불렸는지는 확인되지 않아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종전 후에는 어료목장에서 수확한 고구마나 감자를 저장하는 데 사용되었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했지만,[10] 2008년 (헤이세이 20년) 10월 21일부터 나리타시(成田市)에서 본격적인 조사를 했다. 공사를 수주한 간구미(현 안도-마)의 사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에 일본이 참전한 1941년 12월 8일 당일에 완공되었다고 하며,[11] 내부 배전반에 "쇼와 16년 제조"라고 쓰여 있는 글씨가 이를 뒷받침한다.[12] 시종 소창고차의 당시 일기에는 "공습 시의 동궁 피난 시기는 빠를수록 좋지 않은가, 아직 산리츠카(三里塚)가 완성되지 않은 것 같지만"이라고 하며 돌관 공사의 진척을 걱정하는 모습이 적혀 있다.[11] 2011년 4월부터 일반에 공개되어 내부를 견학할 수 있게 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大久保卿牧羊場選定の碑 http://www.city.tomi[...] 富里市 2017-12-13
[2] 서적 房総ヒコーキ物語―大空に挑んだ“鳥人”たち 崙書房 1985-04-10
[3] 웹사이트 千葉県 成田市 三里塚(御料牧場・成田国際空港内)の郵便番号 https://www.post.jap[...] 2024-02-19
[4] 웹사이트 富里牧羊場跡 https://www.pref.chi[...] 2021-07-04
[5] 뉴스 両宮様三里塚へ 朝日新聞 1951-10-21
[6] 간행물 『日本獣医学』の生みの親 新山荘輔・宮内省下総御料牧場初代場長の銅像60年ぶりに再建される
[7] 서적 羊と日本人 彩流社
[8] 뉴스 【探訪・繁盛店】ひつじや(千葉県成田市)ジンギスカン「発祥」PR 日経MJ 2017-02-12
[9] 서적 三里塚アンドソイル 平原社
[10] 웹사이트 三里塚記念公園内にある防空壕では、昭和35(1960)年頃までは、内部で子どもたちが遊んでいたと聞いた。また、戦後すぐの頃には、野菜や芋の貯蔵庫に使っていたとも聞いた。これらのことについて書かれた資料はあるか。 https://crd.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0-04-16
[11] 웹사이트 三里塚記念公園に残る防空壕(成田市) : 遺構を巡る―戦後73年― https://www.yomiuri.[...] 2020-04-16
[12] 웹사이트 戦時下へタイムスリップ 防空壕内部へ入りました http://masaakikoike.[...]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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