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성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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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지성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노론 가문 출신이다. 그는 선전관으로 러시아에 파견되어 자전거, 유리 제조 기술, 카메라를 들여왔고, 동래부사로 재직하며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유배 후 가세가 기울고 아들을 고아원에 보내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독립운동가 김규식의 아버지이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서 태어났으며, 노론 가문인 청풍 김씨의 후예이다. 본명은 김용원(金鏞元)이었으나 후에 김지성으로 개명하였다. 한학에 능통하였고 일본에서 신학문을 익혔으며,[1] 귀국 후 선전관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2리 평판네미골에 안장되었다. 현재 홍천 평판네미골 선영에는 그의 묘소와 부모의 묘소가 함께 있다.
2. 생애
개항 이후 외교 관리로서 러시아에 파견된 경험이 있으며,[1] 선전관으로 재직 중 러시아 방문 시 자전거, 유리제조 기술, 카메라 등을 조선에 처음 들여오기도 했다. 이후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근무하던 중, 당시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 관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유배되었다.[1]
유배 생활로 인해 가세가 크게 기울었으며, 아내의 사망 등으로 어려움이 겹쳐 어린 아들 김규식은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지게 되었다. 김지성은 1892년 또는 1896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2. 1. 가계와 초기 활동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에서 김동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풍 김씨 중방파(仲房派) 22세손으로, 노론 가문의 후예였다. 7대조는 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사후 의정부 영의정에 증직된 김징(金澄)이다. 노론 벽파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상로, 김약로, 김재로는 그의 5대 방계 조상이었으며, 노론 청명당의 지도자였던 김치인과 김종수 등도 그의 방계 선조였다. 본명은 김용원(金鏞元)이었으나 후에 김지성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형 김우성에게 자녀가 없어 자신의 아들 김우성을 형의 양자로 보냈다.
한학에 능통했으며[1] 일본에서 신학문을 배우기도 했다. 귀국 후 관직에 나아가 선전관 등을 지냈다. 선전관으로 재직할 당시 러시아에 다녀오면서 자전거, 유리제조 기술, 카메라를 조선에 처음으로 들여왔다.
개항 이후에는 외교 관리로서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1] 그 뒤 동래부사로 임명되었다. 동래부사로 재직하며 대외 관계 업무를 담당하던 중,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유배를 가게 되었다.[1]
그의 유배로 집안 살림이 매우 어려워졌고, 설상가상으로 아내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이로 인해 어린 아들 김규식은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원에 맡겨지게 되었다.
그의 선대는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2리 논틀말에 정착했으며, 아들 김규식은 김지성이 동래부사로 부임해 있을 때 태어났다. 김지성은 1896년 혹은 1892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2. 2. 외교 활동과 유배
개항 이후 외무관리로서 러시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왔다.[1] 또한 선전관으로 재직 중 러시아에 방문하여 자전거, 유리제조 기술, 카메라 등 당시 조선에는 없던 새로운 문물을 처음으로 들여오기도 했다.
이후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대외 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 동래부사 재직 중, 일본과의 교역에서 발생하는 여러 불평등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유배형에 처해졌다.[1]
그의 유배 생활로 집안 형편은 매우 어려워졌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이로 인해 어린 아들 김규식은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지게 되었다.
김지성은 1892년 또는 1896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2. 3. 유배 이후의 삶과 죽음
동래부사로 재직할 당시, 일본과의 불평등한 교역 관계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것이 빌미가 되어 유배를 가게 되었다.[1] 그의 유배로 인해 집안 살림은 극도로 어려워졌으며, 설상가상으로 아내까지 세상을 떠나면서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어린 아들 김규식은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겨지게 되었다.[1] 김지성은 1896년 혹은 1892년에 사망하였다.
3. 사후
4. 가족 관계
장남: 김규찬(金奎贊, ? ~ ?, 형 김우성의 양자로 입양)
* 손자: 김진성(金鎭成, 세브란스 의전 출신, 독립군 군의관, 의사)
차남: 이름 미상, 요절
삼남: 김규식(金奎植, 1881년? ~ 1950년), 독립운동가·임시정부 외무총장, 부주석 역임
자부: 조은수(趙恩受, 본관은 한양, 1890년 ~ 1917년)
* 손자: 김진필(金鎭弼, 1910년 ~ 1910년, 요절)
* 손자: 김진동(金鎭東, 1910년 ~ 1997년), 독립운동가, 언론인
자부: 김순애(金淳愛, 1889년 음력 5월 12일 ~ 1976년 5월 17일), 독립운동가
* 손자: 김진세(金鎭世)
* 손녀: 김한애(金漢愛, 1923년 ~ 1930년)
* 손녀: 김민애(金敏愛, 1924년 ~ 1927년)
* 손녀: 김우애(金尤愛, 1925년 ~ 2001년 1월, 대학교수, 미국에서 사망)
참조
[1]
뉴스
위클리조선 - 1등 인터넷뉴스 조선닷컴
http://weekly.chosun[...]
조선일보
2006-08-14
[2]
문서
김익승을 김규식의 외삼촌이라고 하는 기록들
[3]
서적
청풍김씨 세보
[4]
문서
김규식은 경주이씨의 소생이 아니라 첩의 소생이라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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