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컬러스 힐리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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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컬러스 힐리어드는 1547년 엑서터에서 태어난 영국의 세밀화가이자 금세공인이다. 1572년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으며, 1619년 사망할 때까지 왕실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그는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프랑스 미술의 영향을 받았고, 세밀화에 관한 저술인 『림닝의 예술』을 남기기도 했다. 힐리어드는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받았으며, 주요 작품으로는 엘리자베스 1세의 미니어처 초상화, "피닉스"와 "펠리컨" 초상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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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컬러스 힐리어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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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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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547년 경 |
출생지 | 잉글랜드, 엑서터 |
사망 | 1619년 1월 7일 |
사망지 | 잉글랜드, 런던 |
활동 분야 | 금 세공, 미니어처 |
직업 | |
직업 | 금세공인 |
직업 | 채색 삽화가 |
직업 | 미니어처 초상화가 |
영향 관계 | |
영향을 준 예술가 | 아이작 올리버 |
영향을 받은 예술가 | 아이작 올리버 |
후원 | |
후원자 | 엘리자베스 1세 |
후원자 | 제임스 1세 |
기타 | |
제자 | 로렌스 힐리어드 |
제자 | 존 호스킨스 |
제자 | 아이작 올리버 |
제자 | 로버트 피크 시니어 |
2. 어린 시절과 가계
니컬러스 힐리어드는 1547년 엑서터에서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자 금세공인인 리처드 힐리어드의 아들로 태어났다.[2][37] 그의 아버지는 1568년 엑서터의 보안관을 지냈으며, 어머니 로렌스는 런던 시 금세공인의 딸이었다.[3] 힐리어드는 어린 시절,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여왕의 가톨릭 정책을 피해 개신교 신자였던 존 보들리 가족과 함께 제네바로 망명하여 잠시 생활하기도 했다.[5][38] 이 시기 프랑스어를 익혔으며, 이는 훗날 그의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5]
13세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고, 18세에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6][39][7][40] 이후 런던으로 돌아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보석 세공인이자 금세공사였던 로버트 브랜든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으며,[9][42] 이 시기 세밀화 기술도 익혔을 것으로 추정된다.[9] 1569년 존경받는 금세공인 협회의 자유 시민이 되었고,[3][37] 1576년에는 스승 브랜든의 딸인 앨리스 브랜든(1556–1611)과 결혼하여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8][41]
2. 1. 출생과 가계

니컬러스 힐리어드는 1547년 엑서터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엑서터 출신의 금세공인이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리처드 힐리어드(1519–1594)로, 1568년에는 엑서터 주장관을 지냈다.[2][37] 어머니 로렌스는 런던 시 금세공인 존 월의 딸이었다.[3] 니컬러스는 네 아들 중 장남이었으며, 다른 두 동생은 금세공인이 되었고 한 명은 성직자가 되었다.[4][5] 그는 미국 뉴 헤이븐 식민지의 공동 설립자 테오필루스 이튼(1590–1657)의 첫 번째 아내였던 그레이스 힐러(힐리어)와 가까운 친척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다.[7][40]
힐리어드는 어린 시절 엑서터의 주요 개신교 신자였던 존 보들리 집안과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존 보들리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보들리 도서관을 세운 토마스 보들리의 아버지이다. 가톨릭 신자인 메리 1세가 즉위하자 존 보들리는 망명길에 올랐고, 1557년 5월 8일 당시 10세였던 힐리어드는 제네바에서 보들리 가족과 함께 존 녹스가 주관하는 칼뱅주의 예배에 참석한 기록이 남아 있다.[5][38] 이 시기 칼뱅주의가 힐리어드에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해외 생활을 통해 익힌 유창한 프랑스어는 훗날 도움이 되었다.[5] 제네바에서 힐리어드보다 두 살 많았던 토마스 보들리는 뛰어난 학자들에게 고전 교육을 받았으나, 힐리어드가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5]
힐리어드는 1560년, 13세의 나이에 자신의 초상화를 그렸으며[6][39], 18세에는 메리 스튜어트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7][40]
1576년, 그는 로버트 브랜든의 딸 앨리스(1556–1611)와 결혼하여[8][41]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 로버트 브랜든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보석 세공인이자 런던 시의 금세공인이었다.[9][42]
2. 2. 유년 시절과 종교적 배경
니컬러스 힐리어드는 1547년 잉글랜드 데번주 엑서터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 리처드 힐리어드(1519–1594)는 엑서터 출신의 금세공인이자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으며, 1568년에는 엑서터의 보안관(Sheriff)을 지냈다.[2][37] 리처드는 런던 시의 금세공인 존 월의 딸인 로렌스와 결혼했다.[3] 니컬러스는 네 아들 중 장남이었으며, 그의 형제 중 두 명은 금세공인이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성직자가 되었다.[4][5] 그는 미국의 뉴 헤이븐 식민지 공동 설립자인 테오필루스 이튼(1590–1657)의 첫 번째 아내였던 그레이스 힐러(힐리어)와 가까운 친척이었을 가능성이 있다.[7][40]
힐리어드는 어린 시절, 엑서터의 주요 개신교 신자였던 존 보들리의 집안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존 보들리는 훗날 옥스퍼드 대학교의 보들리 도서관을 설립한 토마스 보들리 경의 아버지이다.[38] 가톨릭 신자였던 잉글랜드의 메리 1세 여왕이 즉위하자 개신교도였던 존 보들리는 국외로 망명했다.[5] 1557년 5월 8일, 당시 10세였던 힐리어드는 제네바에서 존 녹스가 주재하는 칼뱅주의 예배에 참석한 보들리 가문 일원 11명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5][38] 칼뱅주의 신앙 자체가 힐리어드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지는 않지만, 이 시기 국외 생활을 통해 습득한 유창한 프랑스어는 훗날 그에게 유용하게 쓰였다.[5][38] 힐리어드보다 두 살 위였던 토마스 보들리는 제네바의 저명한 학자들 밑에서 집중적인 고전 교육을 받았으나, 힐리어드가 그와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는지는 불분명하다.[5]
힐리어드는 1560년, 13세의 나이에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으며[6][39], 18세 때에는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7][40]
그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보석 세공인이자 런던 시의 재무관이었던 금세공사 로버트 브랜든(1591년 사망) 밑에서 도제 생활을 시작했다.[9][42] 미술사학자 로이 스트롱 경은 힐리어드가 이 시기에 플랑드르 출신 여성 화가 레비나 테얼링크에게서 세밀화 기법을 배웠을 수도 있다고 추정한다.[9][42] 테얼링크는 플랑드르 채색 필사본 전통의 마지막 거장 중 한 명인 시몬 베닝의 딸이었으며, 한스 홀바인 더 영거 사후 잉글랜드의 헨리 8세의 궁정 화가가 되었다.[9] 7년간의 도제 기간을 마친 힐리어드는 1569년에 존경받는 금세공인 협회의 자유 시민(freeman)이 되었다.[3][37] 그는 남동생 존과 함께 공방을 운영했으며, 다른 형제 한 명도 금세공인이었다.[5][38] 1576년에는 스승 브랜든의 딸인 앨리스 브랜든(1556–1611)과 결혼하여[8][41]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8]
2. 3. 도제 생활
힐리어드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보석 세공인이자 금세공사, 런던 시 재무관이었던 로버트 브랜든(:en:Robert Brandon, ?–1591)[9][42]에게 도제 생활을 하였다. 영국의 미술사학자 로이 스트롱 경(:en:Roy Strong)은 힐리어드가 이 시기에 플랑드르 출신 여성 화가 레비나 테얼링크에게서 세밀화 기법을 배웠을 가능성을 제기한다.[9][42] 테얼링크는 플랑드르 채색 필사본 전통의 마지막 주요 화가로 평가받는 시몬 베닝(:en:Simon Bening)의 딸이며, 한스 홀바인 사후 헨리 8세의 궁정 화가가 된 인물이다. 힐리어드는 7년간의 도제 기간을 마친 후, 1569년 존경받는 금세공인 협회(:en:Worshipful Company of Goldsmiths)의 자유 장인(freeman)이 되었다.[3][37] 이후 남동생 존과 함께 공방을 열었으며[5][38], 1576년에는 스승 브랜든의 딸 앨리스 브랜든(Alice Brandon, 1556년–1611년)과 결혼하여[8][41]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3. 경력
니컬러스 힐리어드는 엘리자베스 1세 시대, 새로운 왕실 초상화가가 필요했던 시기에[9][42] 금세공 도제 수업을 마치고 경력을 시작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그는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 화가(세밀화가)이자 금세공인으로 임명되어[8][41] 여왕과 로버트 더들리, 레스터 백작 등 주요 궁정 인물들의 미니어처 초상화를 제작하며 명성을 얻었다.[10][11] 1576년부터 약 3년간 지식 습득과 수입 증대를 목적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활동했으며,[12] 파리의 영국 대사 에이미어스 폴렛 경과 교류하고 프랑스 궁정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다.[7][13]
1579년경 영국으로 돌아온 힐리어드는 런던 거터 레인에 공방을 열고 활동했다.[21] 그의 고객층은 기존의 궁정 중심에서 점차 신사 계급과 부유한 도시 상인들로 확대되었다.[21][50] 그는 미니어처 작가 아이작 올리버, 화가 롤랜드 로키 등 여러 제자를 두었으며,[22] 아들 로렌스 힐리어드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가로 활동했다. 힐리어드는 미니어처 제작 외에도 이를 담는 보석 로켓과 같은 금세공 작업[24] 및 중요 문서 장식 작업[25]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엘리자베스 1세 사후에도 제임스 1세의 후원을 받아 왕실 초상화 판화 제작 독점권을 얻는 등[27]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누렸다. 그러나 성공적인 경력 이면에는 금광 투자 실패[16][18] 와 빚보증 문제[17] 등으로 인한 재정적 어려움이 평생 동안 지속되었다. 그는 1619년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의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에 묻혔다.[7]
3. 1. 궁정 화가

힐리어드는 새로운 왕실 초상화가가 "매우 필요했던"[9][42] 시기에 도제 수업을 마쳤다. 그가 그린 것으로 오랫동안 여겨져 온 두 점의 패널 초상화, 이른바 "피닉스"와 "펠리컨" 초상화는 1572년에서 1576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힐리어드는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 화가(세밀화가)이자 금세공인으로 임명되었다.[8][41] 그가 그린 여왕의 첫 번째 미니어처는 1572년으로 추정되며,[43] 이미 1573년에는 "훌륭하고, 진실하며, 충실한 봉사"를 인정받아 여왕으로부터 임대 권한을 받았다.[10] 1571년에는 여왕의 총애를 받던 로버트 더들리, 레스터 백작을 위해 "초상화 책(''a booke of portraitures'')"을 만들었는데, 이를 통해 궁정에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힐리어드는 레스터 백작과 그의 측근들의 이름을 따서 자녀들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11][44]
이러한 후원에도 불구하고, 1576년 막 결혼한 힐리어드는 "이 여행을 통해 지식을 늘리고, 귀국 후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여기 귀족들에게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당시 파리의 영국 대사였던 에이미어스 폴렛 경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폴렛 경은 힐리어드의 체류 목적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당시 대사관에 소속되어 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미니어처를 파리에서 그리기도 했다.[12][45]

힐리어드는 1578년에서 1579년경까지 프랑스에 머물면서 궁정 주변의 예술계와 교류했다. 여왕의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제르맹 필롱과 조지 오브 겐트(George of Ghent)와 함께 지냈으며,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피에르 드 롱사르를 만나기도 했다. 롱사르는 힐리어드에 대해 "섬들은 사실 어떤 솜씨 있는 사람을 거의 배출하지 않지만, 배출하면 매우 훌륭하다"는 다소 이중적인 평가를 남겼다고 힐리어드 자신이 인용하기도 했다.[13][46]
그는 1577년 엘리자베스 여왕의 구혼자 중 한 명이었던 앙주 공작 프랑수아의 문서에 "니콜라스 벨리아르, 앵글로아 화가(''Nicholas Belliart, peintre anglois'')"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200 리브르의 봉급을 받았다. 힐리어드의 작품임이 확실한 마담 드 수르디(Madame de Sourdis)의 미니어처는 1577년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그녀는 프랑스 궁정의 시녀였다. 그 외에도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애첩이었던 가브리엘 데스트레(마담 드 수르디의 조카), 콩데 공주(Princesse de Condé), 몽고메리 부인(Madame de Montgomery)을 그린 미니어처 역시 힐리어드의 작품으로 여겨진다.[7][40]
금전 문제는 힐리어드에게 끊임없는 골칫거리였다. 당시 미니어처의 일반적인 가격은 3GBP였는데, 이는 1570년대 런던에서 활동했던 네덜란드 화가 코르넬리스 케텔이 머리와 어깨 초상화에 1GBP, 전신 초상화에 5GBP를 청구했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괜찮은 가격이었다.[14][47] 노섬벌랜드 백작의 초상화는 1586년에 3GBP의 비용이 들었다.[15] 1574년경 힐리어드는 코르넬리우스 데 보스(Cornelius de Vos)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금광에 투자했으나 손실을 보았다.[16]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에도 스코틀랜드의 금광 채굴 계획에 다시 투자했는데, 이는 사기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25년이 지난 후에도 힐리어드에게 씁쓸한 기억으로 남았다.[18][49]
1599년 힐리어드는 여왕으로부터 연간 40GBP의 수당을 확보했고, 1617년에는 엘리자베스 1세가 1584년에 거부했던 제임스 1세의 미니어처 및 판화 제작 독점권을 얻는 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같은 해 다른 사람의 빚보증을 섰다가 그 금액을 갚지 못해 잠시 루드게이트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그의 장인은 힐리어드의 재정 관리 능력을 거의 신뢰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1591년 장인이 남긴 유언에는 딸에게 남긴 재산을 금세공인 조합에서 관리하도록 명시했다. 같은 해 여왕은 그에게 400GBP를 지급했는데,[17][48] 이는 그가 두 번째 왕실 국새를 제작한 것에 대한 대가였으며, 그가 정기적인 연금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한 상당한 액수였다.
1601년 7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힐리어드는 국무장관 로버트 세실에게 편지를 보내 연간 40GBP의 연금을 인정해주고 런던에서 은퇴하여 시골에서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이 양성한 제자들이 이제 사립 미술 시장에서 자신과 경쟁하고 있다고 설명했으며, 아들을 자신의 직업에 종사시킬 수 없으니 서기로 고용해 달라고 세실에게 부탁하기도 했다.[19]
와데스던 매너에 소장된 두 점의 그림에 대한 21세기 연구는 힐리어드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에이미어스 폴렛 경과 엘리자베스 1세의 대형 초상화 두 점이 새롭게 그의 작품으로 귀속되었는데, 이 그림들은 잉글랜드에서 흔히 사용되던 발트해산 참나무가 아닌 프랑스산 참나무 패널에 그려졌으며, 힐리어드가 프랑스에 머물렀던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새로운 연구 결과는 엘리자베스 초상화에 대한 로이 스트롱 경의 1983년 귀속 주장을 뒷받침한다.[20]
3. 2. 프랑스에서의 활동 (1576-1579)
1576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힐리어드는 "이 여행을 통해 지식을 늘리고, 귀국 후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여기 귀족들에게 돈을 벌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프랑스로 떠났다.[12] 그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인 에이미어스 폴렛 경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당시 대사관에 소속되어 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미니어처 초상화를 파리에서 그리기도 했다.[12] 힐리어드는 1578년에서 1579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면서 프랑스 궁정 주변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그는 여왕의 조각가이자 화가였던 제르맹 필론과 조지 오브 겐트와 함께 지냈으며, 프랑스의 유명 시인 롱사르를 만났다. 롱사르는 훗날 힐리어드가 인용한 것처럼 "섬(영국)에서는 뛰어난 예술가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일단 나오면 매우 탁월하다"는 다소 모호한 칭찬을 남겼다고 전해진다.[13]1577년, 힐리어드는 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구혼자였던 알랑송 공작의 문서에 "니콜라스 벨리아르, 앵글로아(영국인) 화가"(Nicolas Belliart, peintre anglois프랑스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200 리브르의 봉급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7] 힐리어드의 작품으로 확실시되는 프랑스 궁정 시녀 마담 드 수르디의 미니어처는 1577년 작으로 추정되며, 그 해 그녀는 프랑스 궁정의 시녀였다. 그의 작품인 다른 초상화들은 가브리엘 데스트레(마담 드 수르디의 조카), 콩데 공주, 몽고메리 부인을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7]
최근 와데스던 매너에 소장된 에이미어스 폴렛 경과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 두 점에 대한 연구 결과, 이 그림들이 영국에서 주로 사용되던 발트해산 참나무가 아닌 프랑스산 참나무 패널에 그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이 그림들이 힐리어드가 프랑스에 머물던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특히 엘리자베스 초상화에 대한 로이 스트롱 경의 1983년 귀속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20]
3. 3. 재정적 어려움과 후원
힐리어드는 왕실 초상화가가 절실히 필요했던 시기에 도제 수업을 마쳤다.[9] 그는 알려지지 않은 시점에 엘리자베스 1세의 궁정 화가(세밀화가)이자 금세공인으로 임명되었다.[8] 그가 그린 여왕의 첫 번째 미니어처는 1572년경으로 추정되며, 이미 1573년에는 "훌륭하고, 진실하며, 충실한 봉사"를 인정받아 여왕으로부터 임대 권한을 받았다.[10] 1571년에는 여왕의 총애를 받던 레스터 백작을 위해 "초상화 책"을 만들었는데, 이를 계기로 궁정에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11]
이러한 후원에도 불구하고, 1576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힐리어드는 프랑스로 떠났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지식을 늘리고, 귀국 후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프랑스 귀족들에게 그림을 그려 돈을 벌고자 했다. 그는 프랑스 주재 영국 대사인 에이미어스 폴렛 경과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대사관에 소속되어 있던 프랜시스 베이컨의 미니어처를 파리에서 그리기도 했다.[12] 힐리어드는 1578–79년까지 프랑스에 머물면서 궁정 주변의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그는 여왕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제르맹 필론과 조지 오브 겐트와 함께 지냈고, 시인 롱사르를 만나기도 했다.[13] 1577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구혼자였던 알랑송 공작 관련 서류에 "니콜라스 벨리아르, 앵글로아 화가"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200 리브르의 봉급을 받은 기록이 있다. 프랑스 궁정 시녀였던 마담 드 수르디의 미니어처(1577년 추정) 등 프랑스 귀족들의 초상화도 그의 작품으로 여겨진다.[7]
하지만 돈 문제는 힐리어드를 계속 따라다녔다. 당시 미니어처의 일반적인 가격은 3GBP였는데, 이는 1570년대 코르넬리스 케텔이 머리 어깨 초상화에 1GBP, 전신 초상화에 5GBP를 청구했던 것과 비교하면 괜찮은 가격이었다.[14] 노섬벌랜드 백작의 초상화 비용도 1586년에 3GBP였다.[15] 그러나 힐리어드는 1574년경 스코틀랜드 금광 투자에 실패했고,[16]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에도 또 다른 금광 채굴 계획에 투자했다가 손해를 보았다. 이는 25년이 지난 후에도 그가 씁쓸하게 회상할 정도였다.[18]
1599년 힐리어드는 마침내 여왕으로부터 연간 40GBP의 수당을 확보했다. 또한 1617년에는 제임스 1세로부터 미니어처 및 판화 제작 독점권을 얻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엘리자베스 1세가 1584년에 거부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다른 사람의 빚 보증을 섰다가 갚지 못해 1617년 잠시 루드게이트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의 장인조차 그의 재정 관리 능력을 신뢰하지 않아, 1591년 유언을 통해 딸의 생계를 위한 수당을 금세공인 조합에서 관리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같은 해 여왕은 그에게 400GBP를 하사했는데,[17] 이는 그가 두 번째 국새(Great Seal of the Realm)를 제작한 공로와 그간 연금을 받지 못한 점을 고려한 상당한 금액이었다.
1601년 7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힐리어드는 국무장관 로버트 세실에게 편지를 보내 연간 40GBP의 연금을 인정해 주고, 물가가 비싼 런던을 떠나 시골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이 양성한 제자들이 이제 사설 시장에서 경쟁자가 되었으며, 아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물려줄 수 없으니 서기로라도 고용해 달라고 호소했다.[19]
3. 4. 후기 경력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힐리어드는 1579년부터 1613년까지 런던 치프사이드 외곽의 거터 레인에 있는 집에서 살면서 작업했다. 이후 그의 아들이자 제자인 로렌스가 이 집을 물려받아 수십 년 동안 가업을 이어갔다. 힐리어드는 이후 시 외곽에 있으면서 궁정에 더 가까운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구로 이사했으나, 정확한 주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시기 공방을 열면서 힐리어드의 미니어처 고객층은 기존의 궁정 중심에서 신사 계급으로, 그리고 세기 말에는 부유한 도시 상인들까지 확대되었다.[21][50]
힐리어드는 여러 제자를 두었다. 아들 로렌스는 아버지의 스타일을 이어갔으나 다소 "허약하게" 모방하는 수준에 그쳤다고 평가된다. 그 외 중요한 제자로는 미니어처 작가 아이작 올리버와 화가이자 금세공사였던 롤랜드 로키가 있다. 또한 전문 예술가뿐만 아니라 아마추어에게도 그림을 가르쳤던 것으로 보인다. 1595년 런던에서 "수업을 끝낸" 한 젊은 여성이 보낸 편지에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오후에 한 시간을 씁니다... 나의 숙녀... 그녀는 건강할 때 힐리어드가 와서 저를 가르칠 수 있는지 보겠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녀가 어떤 수단으로든 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라는 내용이 남아있다.[22][51]
그는 금세공사로서의 활동도 계속하여, 목에 거는 형태의 미니어처를 위한 화려한 "그림 상자"나 보석 로켓(리테 보석 등)을 제작했다. 제임스 1세는 엘리자베스 1세보다 이러한 선물에 더 관대했는데, 1610년 궁정인 토마스 라이트에게 하사한 '라이트 주얼(Lyte Jewel)'이 대표적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토머스 헤니지 경에게 준 '아르마다 주얼(Armada Jewel)'과 프랜시스 드레이크 경에게 준 '드레이크 펜던트(Drake Pendant)' 역시 유명한 예이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숭배의 일환으로, 궁정 사람들은 적어도 궁정 내에서는 여왕의 초상을 착용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 자신도 미니어처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침실 캐비닛에 보관하며 각 초상화를 종이에 싸서 라벨을 붙였다고 한다. 레스터 백작의 초상화에는 "나의 주인(My Lord's picture)"이라는 라벨이 붙어 있었다.[24][52]
힐리어드의 왕실 미니어처 화가 임명은 채색 필사본 화가라는 옛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엠마누엘 칼리지의 창립 헌장(1584년)과 같은 중요한 문서를 장식하는 일을 의뢰받았다. 이 헌장에는 플랑드르 스타일의 정교한 르네상스 장식 틀 안에 왕좌에 앉은 엘리자베스 1세가 그려져 있다. 그는 또한 책의 목판화 표지 프레임이나 테두리 디자인도 담당했으며, 일부 작품에는 그의 이니셜이 남아 있다.[25][53] 1584년 신년 선물로, 힐리어드는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다섯 명의 현명한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을 선물했다.[26]
힐리어드는 엘리자베스 1세뿐만 아니라 제임스 1세에게도 총애를 받았다. 1617년 5월 5일, 그는 왕으로부터 특별 임명 특허를 받아 12년 동안 판화(에칭) 형태로 된 왕실 초상화 제작에 대한 독점 라이센스를 얻었다. 이전에도 힐리어드가 판화 작업을 하기는 했지만, 왕실 초상화 판화는 주로 이민자 출신인 레놀드 엘스트랙이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7][54] 제임스 1세의 이러한 후원은 힐리어드 작업장의 위상에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제5대 러틀랜드 백작 로저 매너스가 덴마크 대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의 일행 16명은 왕의 초상화가 새겨진 금사슬을 하사받았고, 다른 이들은 초상화 그림만 받았다.[28][55]
힐리어드에 대한 동시대 사람들의 존경심은 시인 존 던의 작품에서도 나타난다. 던은 그의 시 "폭풍(The Storm)"(1597)에서 힐리어드의 작품을 칭찬했다. 힐리어드는 1619년 1월 3일경 사망하여 1월 7일 웨스트민스터의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교회에 묻혔다. 그의 유언에 따라 교구 빈민에게 20 실링, 두 자매에게 30실링, 하녀에게 약간의 물건을 남기고, 나머지 모든 재산은 그의 유일한 상속자이자 아들인 로렌스 힐리어드에게 돌아갔다.[7][40]
현재 남아있는 힐리어드의 작품 중 가장 큰 컬렉션은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런던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과 대영 박물관에도 여러 점이 있다. 미니어처는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어서 많은 작품들이 훌륭한 상태로 남아 복원가의 손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안료의 퇴색이나 은색 페인트의 산화는 흔히 발견된다.
4. 작품 스타일
힐리어드는 미니어처 회화에 관한 중요한 논문인 『세밀화 기법 (The Art of Limningeng)』을 남겼으며, 이는 현재 보들리안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논문은 한때 제임스 1세의 궁정 화가였던 존 드 크리츠가 저자이며, 힐리어드가 그의 제자 중 한 명인 아이작 올리버를 위해 작성한 지침서라고 여겨졌으나, 최근 학계에서는 힐리어드 자신이 저술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3][40][37] 이 논문은 대략 c. 1600년경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세밀화 기법』에서 힐리어드가 언급한 거장들로는 헨리 8세의 궁정 화가였던 한스 홀바인 영거와 알브레히트 뒤러가 있다. 뒤러의 경우, 힐리어드는 아마도 그의 옛 거장 판화를 통해서만 알고 있었을 것이다. 홀바인과 뒤러 모두 힐리어드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으며, 힐리어드는 여러 면에서 홀바인보다 더 보수적인 스타일을 유지했다. 그는 또한 프랑스 미술, 특히 초크 드로잉 기법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탈리아의 예술가이자 이론가인 잔 파올로 로마초를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미술계는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으며, 힐리어드의 예술은 동시대 이탈리아의 초기 바로크 예술가들이나 그의 가까운 동시대인인 엘 그레코(1541–1614)의 양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thumb 1575년]]
힐리어드는 『세밀화 기법』에서 자신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최소한의 키아로스쿠로(명암법) 외에는 과도한 명암 사용을 경계했는데, 이는 그의 주요 후원자였던 엘리자베스 1세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림자가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밝은 빛이 필요하다... 여왕 폐하는... 그 목적을 위해 그림자가 전혀 없는 훌륭한 정원의 열린 길에서 앉을 자리를 선택했다..."[29][56]고 기록했다.
그는 또한 "표정의 우아함, 즉 감정이 나타나는 우아함을 포착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는 "더 현명한 부류가 아니면 잘 사용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현명한 화가"는 모델을 주의 깊게 "주시"하고 "이 사랑스러운 우아함, 재치 있는 미소, 그리고 갑자기 번개처럼 지나가는 훔쳐본 시선을 포착해야 하며, 다른 표정이 나타난다."[30][57]고 주장했다.
힐리어드의 일반적인 작업 방식(왕족의 이미지를 복제하는 경우 제외)은 모델 앞에서 직접 얼굴을 그리는 것이었으며, 아마도 최소 두 번의 작업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다양한 음영으로 미리 준비된 살색 바탕("카네이션")을 여러 개 보관했다. 그런 다음, 매우 가는 다람쥐 털로 만든 붓("연필")으로 얼굴의 윤곽을 희미하게 그린 후, 엷은 해칭으로 세부 묘사를 채워나갔다. 그는 옷과 보석을 묘사하는 데에도 뛰어난 기법을 사용했는데, 특히 두꺼운 물감 점을 사용하여 드리워진 작은 그림자를 표현함으로써 진주나 레이스에 입체감을 부여했다.[31][58] 남아있는 몇 점의 미완성 미니어처는 그의 작업 과정을 잘 보여준다.[32][59] 그는 그림(드로잉)을 거의 그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며, 실제로 남아있는 드로잉은 매우 적다.
힐리어드의 스타일은 몇 가지 기술적인 개선을 제외하고는 1570년대 이후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 특히 제임스 1세와 그의 가족을 반복해서 그린 후기 작품 중 상당수는 초기의 작품보다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제임스 1세가 초상화를 위해 오래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힐리어드가 충분한 작업 시간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 있다. 1590년대부터는 그의 옛 제자였던 아이작 올리버가 강력한 경쟁자로 부상했다. 올리버는 1604년 새로운 왕비인 덴마크의 앤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었고, 1610년 왕세자 헨리 프레데릭, 웨일스 공이 자신의 가문을 세웠을 때도 그의 화가로 임명되었다.[33][60] 올리버는 해외를 여행하며 스승보다 더 현대적인 스타일을 개발했고, 특히 원근법 드로잉에서 더 뛰어난 기량을 보였다. 그러나 작품의 신선함과 인물의 내면을 포착하는 심리적 통찰력 면에서는 힐리어드를 능가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5. 주요 작품
'''엘리자베스 1세'''
'''기타 인물'''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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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稿では「ミニアチュール」は ''miniature'' の本来の意味である「彩色写本の挿絵」ではなく、主に宝飾品、装飾品、家具などの飾り絵として使われている「細密画・精密画」のことを指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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