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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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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빈은 서진 시대의 인물로, 젊은 시절에는 무장이었으나 학문에도 정통했다. 279년 왕준과 함께 오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20만 군사를 이끌고 공을 세웠으며, 280년 오나라 멸망 후 옹주자사에 올랐다. 이후 유주 지역을 안정시키고 북방 민족을 통치하는 데 기여했으나, 294년 팔왕의 난 시기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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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빈

2. 생애

노국(魯國) 추현(鄒縣) 출신으로, 젊은 시절 무예에 능했으나 이후 주역 등 경서와 사기에도 정통하게 되었다.

서진(西晉) 건국 후인 279년, 진의 오 정벌에 광무장군(鑛武將軍)으로 참전하여 왕준(王濬)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공을 세웠다. 280년 오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옹주(雍州) 자사(刺史)에 임명되었다. 이후 팔왕의 난(八王之亂)이 한창이던 294년에 사망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노국(魯國) 추현(鄒縣)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는 완련에 의지하는 무장이었으나, 성장하면서 학문에도 힘써 주역 등의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정통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숙했으며 사냥을 즐겼다. 특히 달리는 사슴을 따라잡을 정도의 빠른 발을 가졌고, 키는 8척(192.8cm)에 달했으며 힘 또한 매우 강했다고 전해진다. 성장한 후에는 염덕(閻徳)에게서 경서와 사기를 배웠는데, 특히 주역(易經)에 정통하여 수백 명의 제자가 그에게 몰려들었다. 스승 염덕은 많은 제자 중에서도 당빈만이 장차 정치를 훌륭하게 이끌 재능을 지녔다고 높이 평가했다.

성품은 재능이 있고 도량이 넓었으며,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공명정대하고 엄숙하며 맡은 일을 성실하게 처리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알게 되더라도 이를 뒤에서 조용히 도와줄 뿐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지 않는 신중함도 갖추었다. 당시 관료들 중에 뛰어난 인재가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당빈은 단연 돋보였다고 한다.

처음 관직에 나아간 것은 군(郡)의 문하연(門下掾)이었으며, 이후 주부(主簿)로 옮겼다. 어느 날, 예주(豫州) 자사였던 왕침이 오나라(吳)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아홉 개 군의 관리를 소집했을 때 당빈도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당빈은 초군(譙郡) 주부였던 장운(張惲)과 함께 적극적으로 오나라를 공격해야 한다는 주전론(主戰論)을 펼쳤다. 당시 회의에서는 토벌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으나, 당빈이 논리정연하게 반론하자 아무도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고 왕침 역시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후 공조(功曹)를 거쳐 효렴으로 천거되었고, 별가(別駕)로 승진했다.

당빈이 관직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스승 염덕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는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직접 비(碑)를 세웠다.

2. 2. 관직 진출과 초기 경력

노국(魯國) 추현(鄒縣)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는 완력에 의지하는 무장이었으나, 나중에는 주역사기 등 경서(經書)와 사기(史記)에 정통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숙하고 사냥을 즐겼다. 사슴을 따라잡을 정도의 빠른 발을 가졌으며, 키는 8척(약 192.8cm)에 달하고 힘은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성장하면서 염덕(閻徳)에게서 경사(經史)를 배웠고, 특히 역경(易經)에 정통하여 수백 명의 문하생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스승 염덕은 많은 제자 중 당빈만이 장차 정치를 훌륭하게 이끌 재능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처음에는 군의 문하연(門下掾)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주부(主簿)로 자리를 옮겼다. 예주(豫州) 자사였던 왕침이 동오에 대한 대응책을 논의하기 위해 아홉 군의 관리를 소집했을 때, 당빈도 초청받았다. 이 자리에서 당빈은 초군(譙郡) 주부 장운(張惲)과 함께 적극적인 주전론(主戰論)을 펼쳤고, 왕침은 이에 동의했다. 당시 토벌 반대 의견이 많았으나, 당빈이 당당하게 반론하여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 후 공조(功曹)를 거쳐 효렴으로 추천되었고, 별가(別駕)로 승진했다.

당빈은 재능이 있고 도량이 넓으며,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었다. 또한 공명정대하고 엄숙하며 성실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알게 되면 뒤에서 조용히 도와주고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시 관직 사회에 뛰어난 인재가 많았지만, 당빈은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가 관직에 나섰을 때는 스승 염덕이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당빈은 스승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의 비석(碑)을 세웠다.

2. 3. 중앙 정계 진출

주(州)의 사신이 사무 보고를 위해 상국부에 방문했을 때, 사마소 앞에서 당빈을 칭찬하며 거듭 추천했다. 사마소가 참군인 공호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공호는 당빈의 재능을 시기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함께 있던 진건을 들고 "당빈의 인품은 저에게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사마소는 웃으며 "그대와 견줄 만한 인물조차 얻기 어려운데, 어찌 그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고, 우선 당빈을 불러 갑옷조속(鎧曹屬)으로 삼았다.

당빈이 사마소를 알현하자, 사마소는 "그대는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라고 물었다. 당빈은 "향리에서는 학문에 힘쓰고 옛사람의 사적을 깊이 살폈으며, 저의 말과 행동은 천하에 퍼져도 비난받지 않고, 저의 행동은 천하에 미쳐도 미움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큰 소리로 답했다. 사마소는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그 명성이 헛되지 않았구나"라고 말하며 기뻐했다. 훗날 사마소는 공호에게 "가까이서 당빈을 보니 과연 현인이었다. 그대 때문에 하마터면 이 인재를 놓칠 뻔했구나"라고 꾸짖었다.

함희 원년(264년), 성도에 주둔하던 등애전속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등애는 오랫동안 농우(隴右) 지역에 머물며 병사들의 존경을 받았기에, 사마소는 익주에서 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했다. 이에 사마소는 당빈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현지 상황을 살피게 했다.

당빈은 성도 시찰을 마치고 돌아와 사마소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등애는 교활하고 질투심이 많으며, 도량이 좁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는 칭찬하고 직언하는 자는 미워했습니다. 장수나 참모라 할지라도 그의 뜻에 맞지 않는 답변을 하면 욕설을 들었습니다. 규율은 엄격했지만 예의가 없어 인심을 크게 잃었습니다. 또한, 대규모 토목 공사를 자주 벌여 백성들에게 과도한 노동을 부과했습니다. 농우 지역 사람들은 이를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걱정했기에, 그의 죽음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그를 위해 다시 힘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현재 여러 군대가 농우에 도착하여 안팎을 통제하기에 충분하니, 바라건대 이 일에 대해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2. 4. 오나라 정벌

서진(西晉)이 건국된 후, 익주는 동쪽으로 오나라와 접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으나 감군의 직책이 공석이었다. 조정에서는 무릉 태수 양종과 당빈 중 누구를 임명할지 논의했는데, 사마염(무제)은 산기상시 문립에게 의견을 물었다. 문립은 "양종, 당빈 모두 훌륭한 인재이나, 당빈은 재물 욕심이 강하고 양종은 술버릇이 나쁘다는 결점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사마염은 "재물 욕심은 채워주면 그만이지만, 술버릇은 고치기 어렵다"며 당빈을 감 파동 제군사 겸 광무장군(鑛武將軍)으로 임명했다. 당빈은 상소를 올려 오나라 정벌의 계책을 제시했고, 사마염은 자신의 뜻과 일치한다며 기뻐했다.

함녕 5년(279년) 11월, 당빈은 용양장군(龍驤將軍) 왕준(王濬)과 함께 진의 오 정벌에 참전했다.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구촉령(옛 촉나라 영토)에서 장강을 따라 진군했으며, 항상 선봉에 서서 요지에 주둔하고 가짜 병사를 배치하는 등 기회를 엿보며 승리를 거듭했다. 그는 진군을 계속하여 서릉과 낙향을 함락시키고 수많은 오나라 병사를 포로로 잡았다. 이에 파릉과 하구 동쪽의 여러 군현에서는 당빈을 두려워하여 투항하는 자들이 잇따랐다.

당빈은 오나라 군대가 이미 궁지에 몰렸고 손호의 항복이 시간 문제라고 판단했다. 당시 건업에서 2백 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병을 핑계로 진군을 멈추고 공훈 경쟁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먼저 건업에 도착한 장수들은 물건을 약탈하고, 늦게 도착한 자들은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는 혼란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당시 식자들은 당빈의 신중한 행동을 칭찬했다.

태강 원년(280년), 오나라가 평정되자 사마염은 조서를 내려 당빈의 공적을 치하했다. "광무장군 당빈은 변방의 임무를 맡아 동쪽으로 오나라를 방어하고 남쪽으로 만월을 임하면서 국경을 안정시키고 나라를 다스려 적을 제어하는 데 공이 있었다. 여러 번 오나라 정벌 의지를 밝혔고, 정벌 명령을 받자 신속히 행동하여 군대의 선봉에서 많은 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그 훈공이 현저하다." 이에 당빈은 우장군·도독 파동 제군사로 임명되었고, 익군교위를 제수받았다. 또한 상용현후로 봉해져 식읍 6천 호와 비단 6천 필을 하사받았으며, 이후 조정의 논의에 항상 참여하게 되었다.

2. 5. 북방 안정과 유주 통치

당시 북방의 소수 민족이 여러 차례 북평군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자, 조정은 당빈을 지절·감유주제군사·호오환교위·우장군으로 임명했다. 유주에 부임한 당빈은 군사를 훈련하고 무기를 정비하는 한편, 농경지를 넓혀 농업 생산을 장려했다. 또한 군의 위세를 떨치고 국가의 법질서를 확립하며, 백성들에게 은혜와 신의를 베풀었다.

이러한 당빈의 통치에 선비족의 수장인 모용외(대막외)와 척하 등은 아들을 인질로 보내며 귀순의 뜻을 표했다. 당빈은 학교를 세워 백성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이끌었으며, 그의 자비와 은혜는 널리 퍼져나갔다. 나아가 과거 나라 시절의 국경 부근까지 영토를 천 리나 확장하고, 장성을 수리하여 온성에서 갈석까지 산골짜기를 따라 삼천 리 가까이 늘렸다. 군대를 배치하여 국경을 지키고 봉수대를 설치하여 방비를 강화하니, 국경 지대는 안정을 되찾고 도적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당빈이 북방에서 세운 공적은 매우 뛰어나 · 시대 이래 그와 견줄 만한 장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당빈의 위세에 두려움을 느낀 일부 선비 부족이 그에게 복속했던 모용외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빈은 즉시 토벌에 나서려 했으나, 조정의 재가를 기다리는 동안 반란 세력이 도주할 것을 염려하여 독단적으로 유주기주의 소와 말을 징발하며 군사 행동을 준비했다. 참군 허지는 이를 명령 불복종으로 보고 몰래 조정에 보고했고, 결국 당빈은 어사에게 체포되어 감옥 수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정위에게 넘겨졌으나, 사실대로 정황을 설명하여 석방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당빈이 살아있을 때부터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을 세워 칭송했다.

2. 6. 만년

280년, 오나라가 멸망한 뒤, 당빈은 옹주(雍州) 자사(刺史)에 올랐다.

원강 연간 초(291년경)에는 사지절(使持節)·전장군(前將軍)·서융교위(西戎校尉)·옹주 자사를 다시 제수받았다. 당빈은 옹주에 부임한 후, 가르침을 널리 펴고 현지 선비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옹주는 이름난 곳이며, 선비들이 많이 모여 있다.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는 황보신숙(皇甫申叔, 황보밀의 자), 엄서룡(嚴舒龍), 강무시(江茂時), 양자원(梁子遠) 등은 모두 높은 뜻과 고결한 품행을 지녔다. 이곳에 오자마자 그들의 명성을 들었으며, 진심으로 그들의 재능을 원한다. 그들에게 벼슬을 권유하려 하지만, 관료의 예로 대하지 않고 평민으로서의 격식으로 만나 도(道)를 논하고자 한다. 어찌 관직 때문에 그들의 고결함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 우선 군국의 예의를 갖추어 그들을 맞이하라. 그래야 나의 마음도 채워질 것이다"라고 훈시했다. 이후 네 사람이 모두 도착하자, 당빈은 그들을 존경하며 정중하게 대했다.

팔왕의 난(八王之亂)이 일어나 혼란스럽던 시기인 원강 4년(294년), 당빈은 옹주 자사 재임 중에 사망했다. 향년 60세였다. 조정에서는 그에게 양(襄)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단 2백 필과 돈 20만 냥을 하사했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당빈

삼국지연의》에서는 279년, 왕준(王濬)과 함께 진의 오 정벌에 종군하였을 때 이름만 언급이 되었으며, 다른 언급은 없었다.

4. 가족 관계


  • 장남: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용현후가 되었고, 광릉 태수를 지냈다.
  • 차남: 당기(唐岐). 정로장군 사마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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