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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열반경 (상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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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반열반경 (상좌부)은 석가모니의 마지막 여정과 열반에 대한 기록을 담은 경전으로, 아자타사트루 왕의 밧지국 침략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경전은 석가모니가 밧지족의 번영을 위한 일곱 가지 법을 설하고, 수행승들에게 쇠망을 초래하지 않는 법을 가르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석가모니의 마지막 여정, 춘다의 공양, 열반, 다비, 사리 분배 과정 등을 상세히 묘사하며, 불교의 주요 가르침인 사성제, 팔정도, 삼십칠도품, 자등명 법등명 등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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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반열반경 (상좌부)
개요
제목마하파리닙바나 숫타(Mahā-parinibbāna Sutta(nta))
종류
소속팔리 경전 / 경장 / 장부
내용
주제고타마 붓다의 열반
설명고타마 붓다의 마지막 나날들과 죽음을 상세히 묘사
붓다의 마지막 가르침과 장례 절차를 포함
중요성
중요성초기 불교의 중요한 경전 중 하나
붓다의 삶과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
구성
구성여러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붓다의 마지막 여정과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를 포함
관련 경전
관련 경전대승 대반열반경 (Mahāyāna Mahāparinirvāṇa Sūtra)
해당 경전은 내용과 주제 면에서 유사하지만, 대승불교의 관점을 반영

2. 시대 배경

석가모니의 마지막 여정은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트루 왕이 밧지국을 침략하려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상좌부 《대반열반경》은 아자타사트루 왕이 밧지족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면서 석가모니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2]

경전에는 당시 물류 거점이었던 파탈리 마을이 요새화되어 가는 모습도 나타나 있다. 또한 우기가 시작되기 며칠 전, 마가다의 하리양카 왕조의 왕 아자타삿투의 제안으로 대신 바사카라가 라자가하에서 부처님을 방문하는 내용으로 시작하여, 우기 세 달을 지나 부처님의 열반, 다비, 그리고 부처님의 유해를 모신 8개의 차이티야가 세워지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데,[2] 이는 불교 장례 관습의 인도 기원을 보여준다.[3]

2. 1. 아자타사트루 왕과 밧지국 침략

아자타사트루 왕은 밧지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석가모니에게 자문을 구한다.[2] 이는 상좌부 《대반열반경》의 시작 부분에 묘사되어 있으며, 경전 전체의 중요한 배경 설정을 이룬다. 당시 갠지스강 남안의 국경 마을이자 물류 거점이었던 파탈리 마을은 침략 거점의 요새로 변모해가는 과정에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아자타사트루 왕은 권력욕에 눈이 멀어 백성을 전쟁으로 몰아넣으려는 전형적인 구시대적 군주의 모습을 보여준다.)

2. 2. 파탈리푸트라의 성장

갠지스강 남안의 국경 마을이자 물류 거점이었던 파탈리 마을(파탈리푸트라)은 아자타사트루 왕대에 침략 거점의 요새로 변모해 갔다.[1] 아자타사트루 왕의 뒤를 이은 우다인 왕 시대에는 마가다국의 수도가 라자그리하에서 파탈리푸트라로 옮겨졌다.[1]

3. 판본 및 구성

Mahāparinibbānasuttapi(대반열반경)는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중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전해진다.[4][5][6][7]

3. 1. 팔리어본

『마하빠리닙바나 숫따』에는 수많은 판본이 존재한다. 그중 팔리어 판본은 언어와 내용 면에서 초기 판본에 속한다. 『마하빠리닙바나 숫따』는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매우 높아 불교, 부처의 생애, 불교 사상 및 문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어 왔다. 이 경전의 다른 판본들은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중국어로도 존재한다.

어학적 증거에 따르면, 인도학자이자 팔리어 전문가인 오스카 폰 히위버는 일부 팔리어 경전이 부처의 생애에 근접한 시기의 매우 고대 지명, 문법, 역사적 자료, 특히 ''대반열반경''을 보존하고 있다고 말한다. 히위버는 이 경전의 편찬 시기를 늦어도 기원전 350-320년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부처의 생애에 대한 짧은 연대기를 받아들일 경우 약 60년 전의 사건에 대한 "진정한 역사적 기억"을 허용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텍스트가 원래 정확한 역사적 기록보다는 성자전에 가깝게 의도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4][5]

제1차 불교 결집에 대한 이야기의 내용은 ''대반열반경''에 제시된 이야기와 거의 일치하며, 루이 피노와 에리히 프라우발너와 같은 학자들은 이들이 원래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를 형성했다고 결론 내렸다.[6] 제1차 결집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현존하는 여섯 개의 전통에서 부분적으로 또는 전체적으로 발견되며, 많은 학자들은 그 구성과 기본적인 내용이 불교 승가에서 분파 이전 불교에서 유래했다고 믿고 있다.[6][7] 일부 버전에서 경전의 내용은 율장(Vinaya Pitakas)의 칸다카(Skandhaka) 부분이 끝나는 제1차 결집의 이야기 앞에 포함되어 있다. 다른 경우, 경전 이야기와 결집 이야기는 경장(Sutta Pitaka)과 율장 사이에 나뉘어져 있다.[6]

3. 2. 구성

Dīgha Nikāyapi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장은 석가모니의 여정과 가르침, 그리고 열반 이후의 사건들을 순차적으로 다룬다.[4][5][6][7]

  • 제1장
  • * 영취산에서 설법 (1-5절)
  • * 수행자들에게 가르침 (6-12절)
  • * 여정의 시작 (13-18절)
  • * 파탈리 마을에서 (19-34절)
  • 제2장
  • * 코티 마을에서 (1-4절)
  • * 나디카 마을에서 (5-10절)
  • * 상업 도시 바이샬리에서 (11-13절)
  • * 기녀 암바팔리 (14-20절)
  • * 베르바 마을에서 (21-26절)
  • 제3장
  • * 죽음을 결심 (1-6절)
  • * 악마와의 대화 (7-9절)
  • * 대지진 (10-47절)
  • * 사별의 운명 (48-51절)
  • 제4장
  • * 반다 마을로 (1-4절)
  • * 보가 시와, 4가지 가르침 (5-12절)
  • * 대장장이 춘다 (13-25절)
  • * 푹사와의 만남 (26-43절)
  • 제5장
  • * 심각한 병 (1-12절)
  • * 아난다의 통곡 (13-17절)
  • * 대선견왕의 이야기 (18절)
  • * 말라족에게 호소 (19-22절)
  • * 수밧다의 귀의 (23-30절)
  • 제6장
  • * 임종의 말씀 (1-7절)
  • * 죽음을 애도함 (8-12절)
  • * 유해의 화장 (13-23절)
  • * 유골 분배와 숭배 (24-28절)


인도학자이자 팔리어 전문가인 오스카 폰 히위버는 이 경전의 편찬 시기를 늦어도 기원전 350-320년으로 추정한다.[4][5] 제1차 불교 결집에 대한 이야기는 ''대반열반경''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며, 여러 학자들은 이 내용이 분파 이전 불교에서 유래했다고 본다.[6][7]

4. 석가모니의 여정

석가모니는 마가다국에서 밧지국, 말라국을 거쳐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었다. 이 여정은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이 바르지국을 침략하려던 시기와 겹치며, 경전에는 그 시대적 배경이 반영되어 있다.[2]

갠지스강 남쪽, 국경 마을이자 물류 거점이었던 파탈리촌은 아자타삿투 왕에 의해 침략 거점 요새로 만들어졌다. 이후 우다야바드라 왕 시대에 마가다국의 수도는 라자그리하에서 파탈리푸트라로 옮겨진다.

석가모니의 마지막 여정은 다음과 같다.[9]

석가모니의 마지막 여정
국가여정
마가다국영취산, 왕사성 → 암발라티카원[10] → 날란다[10]파탈리 마을 (갠지스 강을 건너 (고타마의 나룻배))
밧지국코티 마을 → 나디카 마을 → 바이샬리 시, 베르바 마을 (우기 안거) → 반다 마을 → 하티 마을, 암바 마을, 잠부 마을 → 보가 시
말라국파바 시 (카쿠타 강) → 쿠시나라



4. 1. 마가다국

아자타삿투 왕이 밧지국 침략을 계획할 당시, 석가모니는 영취산에서 아자타사트루 왕의 사신 밧사카라를 만나 밧지국 침략에 대한 조언을 했다.[2] 이후 왕사성, 암발라티카원[10], 날란다[10], 파탈리 마을 등에서 설법을 하고 가르침을 전했다.

왕사성의 아자타삿투 왕은 바라문 밧사카라를 영취산에 보내 자신의 밧지국 침략 계획을 묻게 했다. 밧사카라는 석가모니의 조언을 듣고 외교와 이간책을 써야 한다고 판단하고 돌아갔다.[1]

석가모니는 암발라티카원에 있는 아자타삿투 왕의 별장에 머물며 수행승들에게 계율, 정신 통일, 지혜, 그리고 이들의 상호 관계와 수양된 마음, 온갖 번뇌로부터의 해탈에 관한 법을 설했다.[1]

이후 날란다의 망고 숲에서는 사리불 장로가 석가모니를 찬탄했다. 석가모니는 그곳에서 수행승들에게 앞서와 같은 내용의 법문을 설했다.[1]

파탈리 마을에서는 재가자들에게 계율을 어길 때의 재앙과 지킬 때의 과보를 설명하고, 밤늦게까지 가르침을 전했다.

석가모니는 갠지스강을 건너며 "총명한 사람들(청정 수행자들)은 이미 (피안으로) 건너갔다"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1]

4. 1. 1. 영취산 설법

아자타삿투 왕은 밧지국 침략 계획을 위해 대신 밧사카라를 영취산부처에게 보냈다. 부처는 밧지족의 번영을 위한 7가지 조건을 제시했다.[1]

번영의 조건
자주 회의를 열어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협동하여 행동하고 해야 할 일을 한다.
옛 법에 따라 행동한다.
노인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
양가의 부녀자와 어린 소녀를 폭력적으로 구류하지 않는다.
영역을 숭배하고 공물을 끊이지 않게 한다.
존경받는 수행자들을 정당하게 보호하고 방어한다.



밧사카라는 이 조건을 갖춘 밧지족은 침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1]

이후 부처는 아난에게 왕사성 주변 수행승들을 모아 쇠망하지 않는 7가지 법을 설했다. 이는 앞서 말한 밧지족의 번영 조건과 유사하나, 수행승에게 맞게 일부 내용이 변경되었다.[1]

수행승의 번영 조건
자주 회의를 열어 많은 사람이 참여한다.
협동하여 행동하고 해야 할 일을 한다.
옛 법에 따라 행동한다.
노인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
애착에 지배되지 않는다.
숲 속에 사는 것을 원한다.
다른 수행승들을 배려한다.



부처는 이 외에도 쇠망을 막는 다양한 법들을 추가로 제시했다. 여기에는 동작, 담화, 수면, 사교를 멀리하고 나쁜 욕망과 악우를 피하며, 만심에 빠지지 않는 것 등이 포함된다.[1]

또한, 신(信), 괴(愧)하는 마음, 외(畏)함, 박학, 노력, 안정, 지혜의 7가지 법과, 칠각지라 불리는 7가지 수행법(잘 생각을 쏟음, 잘 법을 가려냄, 잘 노력함, 잘 기쁨에 충만함, 심신이 가벼워짐, 정신 통일, 마음의 평정 안정)을 설했다.[1]

마지막으로 무상, 비아, 부정, 염, 사, 리, 지멸의 7가지 법과 신(身), 구(口), 의(意), 계(戒), 정(定), 혜(慧)의 6가지 법을 제시하며, 영취산에서 수행승들에게 계율, 정신 통일, 지혜 등에 대한 가르침을 이어갔다.[1]

4. 1. 2. 파탈리 마을

그 당시 파탈리 마을에서는 마가다국의 두 대신 순이다와 바사카라가 바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곽을 건설하고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것을 보고, 삼십삼천의 신들과 상의하는 듯이 도시 성벽을 건설하고 있으며, 이곳이 훌륭한 장소인 한, 상업의 중심지·물자의 집산지가 될 것이지만, "물", "불", "내분"이라는 3종류의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1]

순이다와 바사카라는 석가모니 일행을 식사에 초대했다. 석가모니는 식사 자리에서 "청정 수행자들을 공양하면, 신령들은 보시의 공덕을 돌린다"는 취지의 시구를 읊었다. 순이다와 바사카라는 기뻐하며, 앞으로 석가모니 일행이 갠지스강을 건너는 나루터를 "'''고타마의 나루터'''"라고 명명한다고 말했다.[1]

4. 2. 밧지국

석가는 코티 마을에 머물면서 수행승들에게 사성제에 대해 설법했다.

또한,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은 "법에 관한 설법"을 했다.

  • 계율
  • 정신 통일
  • 지혜
  • 계율을 동반한 정신 통일
  • 정신 통일을 동반한 지혜
  • 지혜를 동반한 수양된 마음
  • 수양된 마음에 의한 여러 번뇌(오염)로부터의 해탈


이후 석가는 나디카 마을을 거쳐 바이샬리와 베르바 마을로 이동했다.[9]

4. 2. 1. 바이샬리

석가는 바이샬리로 가서 기녀 암바팔리의 숲에 머물렀다.[1]

거기서 석가는 수행승들에게 사념처와 모든 동작에 대한 "주의"(념, 사티)를 가르쳤다.[1]

기녀 암바팔리가 찾아오자, 석가는 그녀에게 "법에 관한 설법"을 설하고, 가르치고, 격려하고, 기쁘게 했다.[1] 그녀는 석가들을 다음 날 식사에 초대했고, 석가는 이를 승낙했다.[1]

뒤이어 리차비족 사람들이 찾아와 석가에게 "법에 관한 설법"을 듣고 가르침을 받았다.[1] 그들은 석가들을 식사에 초대했지만, 석가는 선약이 있다며 거절했다.[1] 그들은 분해했다.[1]

암바팔리는 밤새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석가들을 대접했다.[1] 그리고 이 정원을 승가에 바치겠다고 말했고, 석가는 그녀에게 "법에 관한 설법"을 설했다.[1]

석가는 머무는 동안 수행승들에게 "계율", "정신 통일", "지혜", "계율"을 동반한 "정신 통일", "정신 통일"을 동반한 "지혜", "지혜"를 동반한 "수양된 마음", "수양된 마음"에 의한 "여러 번뇌(더러움)로부터의 해탈"과 같은 "법에 관한 설법"을 했다.[1]

4. 2. 2. 베르바 마을

석가모니는 헤르바 마을에서 수행승들에게 바이샬리 부근에서 각자 아는 사람에게 의지하여 우안거(우기의 정주)에 들어갈 것을 알렸다.

우안거 기간 동안 석가모니는 큰 병을 얻어 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마음을 굳게 다잡아 이를 극복했다. 이를 본 아난다가 안심했다고 말하자,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가르침을 설했다.

  • 자신은 이미 차별 없이, 숨김없이 이법을 설했다.
  • 자신은 80세의 노령이며, 신체는 늙고 쇠하여, "가죽 끈의 도움으로 겨우 움직이는 낡은 수레"처럼 마음의 통일로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 자신을 의지하고 (자등명), 법을 의지하라 (법등명)
  • 사념처


Ahaṃ kho panānanda, etarahi jiṇṇo vuddho mahallako addhagato vayo anuppatto. Āsītiko me vayo vattati. Seyyathāpi ānanda, jajjarasakaṭaṃ vekkhamissakena 4 yāpeti, evameva kho ānanda vekkhamissakena maññe tathāgatassa kāyo yāpeti.|아난다여, 나는 이제 늙고 쇠하여, 나이를 더하여 노쇠하고, 인생의 여정을 지나, 노령에 도달하였다. 나의 나이는 여든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낡은 수레가 가죽 끈의 도움으로 겨우 움직여 가는 것처럼, 아마 나의 몸도 가죽 끈의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다.pi

Yasmiṃ ānanda, samaye tathāgato sabbanimittānaṃ amanasikārā ekaccānaṃ vedanānaṃ nirodhā animittaṃ cetosamādhiṃ upasampajja viharati, phāsutaro5 ānanda, tasmiṃ samaye tathāgatassa kāyo hoti.|그러나 여래가, 모든 상을 마음에 두지 않고, 각각의 감수(베다나)를 멸함으로써, 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사마디)에 들어 머물 때, 그 때, 여래의 몸은 건강하다.pi

Tasmātihānanda,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아난다여,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타인을 의지처로 삼지 말고,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고 있으라.pi

4. 3. 말라국

석가모니는 말라국의 파바 시에서 대장장이 춘다의 공양을 받은 후 심한 병을 얻는다. 카쿠타 강을 건너 쿠시나라로 향하던 석가모니는, 아난다에게 춘다가 후회하지 않도록 그의 공양에 대한 공덕을 이야기해 주라고 당부한다.[4]

4. 3. 1. 춘다의 공양

석가모니는 파바 시에서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의 망고 숲에 머물렀다. 춘다는 석가모니를 다음날 아침 식사에 초대했고, 석가모니는 이를 승낙했다.[4]

춘다는 밤새 맛있는 음식과 버섯 요리(돼지고기라는 설도 있음)를 준비하여 석가모니에게 공양했다. 석가모니는 버섯 요리는 자신에게 주고, 다른 음식은 수행승들에게 주도록 했으며, 남은 버섯 요리는 모두 구덩이에 묻도록 지시했다. 석가모니는 자신 외에는 신과 인간을 막론하고 이 음식을 소화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말했다.[4]

식사를 마친 후, 석가모니는 춘다에게 법에 관한 가르침을 설했다. 춘다의 버섯 요리를 먹은 후, 석가모니는 격심한 병을 얻어 심한 고통과 혈변을 겪었지만, 잘 참아냈다.[4]

이후 석가모니는 카쿠타 강을 건너 망고 나무 숲에서 쉬면서, 아난다에게 춘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석가모니는 춘다가 자신의 공양 때문에 석가모니가 죽었다는 비난을 받고 후회할지도 모르지만, 마지막 공양을 한 춘다에게는 이익과 공덕이 있다고 말하며, 그의 후회를 없애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주는 자에게는 공덕이 더해진다"라는 말을 남겼다.[4]

5. 주요 가르침

대반열반경에는 석가모니의 다양한 가르침이 담겨 있다.

석가는 안발라티카 정원에서 수행승들에게 계율, 정신 통일, 지혜, 그리고 이들을 동반하는 수행과 해탈에 대해 설법하였다. 날란다에서는 사리불이 오개 제거, 사념처, 칠각지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언급했다.

파탈리 마을의 재가자들에게는 계율 준수의 중요성과 그 과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구분계율을 어길 때의 재앙계율을 지킬 때의 과보
1재산을 잃음재산이 풍족해짐
2좋지 않은 평판좋은 평판
3불안으로 위축됨태연해짐
4죽을 때 정신 혼란죽을 때 정신이 혼란하지 않음
5지옥에 다시 태어남천국에 다시 태어남



석가는 마가다국의 대신들에게 파탈리 마을의 미래를 예언했고, 나디카 촌에서는 "법의 거울"을 설하며 삼보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바이샬리에서는 사념처와 "주의" (념, 사티)를 가르치고, 암바팔리 등에게 설법했다.

헤르바 마을에서 석가는 자신의 노쇠함과 임박한 죽음을 암시하며 우안거를 알렸다. 악마의 권유에 3개월 후 죽음을 예언했고, 대지진과 함께 8가지 원인, 모임, 경지, 해탈을 설명했다. 아난다의 간청에도 죽음을 예고했다.

큰 숲의 중각강당에서 삼십칠도품을 설하고 여명이 짧음을 알렸으며, 반다 마을에서는 계, , , 해탈의 "4가지 진리"를 설했다.

5. 1. 사성제

석가는 코티 마을에서 수행승들에게 사성제에 대해 설했다.[1]

5. 2. 자등명 법등명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은 석가모니가 수행승들에게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수행하라고 가르친 것을 말한다.[12]

석가모니는 우안거 기간 동안 큰 병을 앓았지만, 잘 이겨내고 병이 나았다. 아난다가 안심했다고 말하자, 석가모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자신은 이미 차별 없이, 숨김없이 이법을 설했다.
  • 자신은 80세의 노령이며, 신체는 늙고 쇠하여, "가죽 끈의 도움으로 겨우 움직이는 낡은 수레"처럼 마음의 통일로 신체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 자신을 의지하고 (자등명), 법을 의지하라 (법등명)[12]
  • 사념처


Ahaṃ kho panānanda, etarahi jiṇṇo vuddho mahallako addhagato vayo anuppatto. Āsītiko me vayo vattati. Seyyathāpi ānanda, jajjarasakaṭaṃ vekkhamissakena yāpeti, evameva kho ānanda vekkhamissakena maññe tathāgatassa kāyo yāpeti.|아난다여, 나는 이제 늙고 쇠하여, 나이를 더하여 노쇠하고, 인생의 여정을 지나, 노령에 도달하였다. 나의 나이는 여든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낡은 수레가 가죽 끈의 도움으로 겨우 움직여 가는 것처럼, 아마 나의 몸도 가죽 끈의 도움으로 유지되고 있다.pi

Yasmiṃ ānanda, samaye tathāgato sabbanimittānaṃ amanasikārā ekaccānaṃ vedanānaṃ nirodhā animittaṃ cetosamādhiṃ upasampajja viharati, phāsutaro ānanda, tasmiṃ samaye tathāgatassa kāyo hoti.|그러나 여래가, 모든 상을 마음에 두지 않고, 각각의 감수(베다나)를 멸함으로써, 상이 없는 마음의 삼매(사마디)에 들어 머물 때, 그 때, 여래의 몸은 건강하다.pi

Tasmātihānanda, attadīpā viharatha attasaraṇā anaññasaraṇā, dhammadīpā dhammasaraṇā anaññasaraṇā.|아난다여,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타인을 의지처로 삼지 말고,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의지처로 삼아,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고 있으라.pi

6. 열반과 그 이후

석가모니는 쿠시나가라의 우파와타나에 있는 사라쌍수에서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아래로 하여 누웠다. 사라쌍수는 석가모니를 공양하듯 꽃을 만개시켜 그의 몸에 쏟아졌고, 하늘의 만다라바 꽃과 백단 가루, 그리고 하늘의 악기 소리도 쏟아졌다.[2]

석가모니는 아난다에게, 이러한 현상은 자신을 공양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지만, 비구, 비구니, 재가자들이 이법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 최고의 공양이라고 말했다.[2]

석가모니는 앞에 서 있던 우파나를 물러가게 했는데, 그 이유는 시방세계의 신령들이 자신을 보는 것을 막지 않기 위해서였다.[2]

석가모니는 신자들이 찾아와 감동하는 곳으로 다음 4곳 (4대 성지)을 언급했다.[2]


  • 석가모니의 탄생지 (룸비니)
  •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은 곳 (부다가야·보리수)
  • 석가모니가 설법을 시작한 (초전법륜의) 곳 (녹야원)
  •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곳 (쿠시나가라·사라쌍수)


아난다가 여성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자, 석가모니는 "보지 마라, 말 걸지 마라, 삼가라"고 답했다.[2]

아난다는 유해를 어떻게 할 것인지 물었고, 석가모니는 비구들은 유골 공양에 얽매이지 말고 수행에 힘쓰며, 유골 공양은 왕족, 바라문, 부유한 자들이 할 것이라고 말했다. [2]

석가모니는 슬퍼하는 아난다에게 모든 것은 멸망한다는 것을 지적하며, 아난다의 수행 능력과 신기한 특징들을 언급하며 격려했다.[2]

Alaṃ ānanda mā soci, mā paridevi - nanu etaṃ ānanda mayā paṭikacceva akkhātaṃ sabbeheva piyehi manāpehi nānābhāvo vinābhāvo aññathābhāvo. Taṃ kutettha ānanda labbhā ’yantaṃ jātaṃ bhūtaṃ saṅkhataṃ palokadhammaṃ, taṃ vata tathāgatassāpi sarīraṃ’ māpalujji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Dīgharattaṃ kho te ānanda tathāgato paccupaṭṭhito mettena kāyakammena hitena sukhena advayena appamāṇena, mettena vacīkammena hitena sukhena advayena appamāṇena, mettena manokammena hitena sukhena advayena appamāṇena. Katapuñño’si tvaṃ ānanda padhānamanuyuñja , khippaṃ hehisi1 anāsavo"ti.pi

>아난다여, 그만 슬퍼하고, 슬퍼하지 말아라. 아난다여, 내가 이미 말했지 않느냐. 가장 사랑스럽고 소중한 모든 것들은 헤어지고 흩어지며, 달라지는 존재라고. 태어나 존재하며, 형성되고 부서지는 것, 그것을 두고 "아, 부서지지 말아라"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난다여, 그대는 오랫동안 자애롭고, 이롭게 하며, 행복하고, 비교할 수 없는 무량한 몸짓과 말과 마음으로 여래를 섬겨왔다. 아난다여, 그대는 선행을 쌓았다. 정진하는 것에 전념하라. 곧 번뇌가 없는 자가 될 것이다.

아난다는 석가모니에게 이와 같은 변두리 땅에서 열반에 들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지만, 석가모니는 이곳 쿠시나가라가 옛날 대선견왕이라는 세계를 지배하는 정의로운 제왕의 수도였고, 크사바티라고 불렸다고 설명했다.[2]

석가모니는 아난다에게 쿠시나가라의 주민인 말라족을 불러오도록 지시하여, 그들이 가족 단위로 모여 석가모니에게 경례하도록 했다.[3]

Yo kho ānanda mayā dhammo ca vinayo ca desito paññatto so vo mamaccayena satthā ti.pi

>아난다여, 그대들을 위해 내가 설하고 제정한 "법과 "이, 나의 죽음 이후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석가모니는 자신이 죽은 후의 승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3]

  • 현재는 서로를 "친구"라고 부르고 있지만, 자신이 죽은 후에는 신참은 이름으로, 연장자는 "존자"라고 부르며 장유서열을 정할 것
  • 사소한 계율 조항은 폐지해도 좋다.
  • 협조가 잘 되지 않는 비구 찬나에게는 "브라흐마 단다"(청정한 벌)로 무시할 것


석가모니는 주변의 수행승들에게 부처, 법, 모임, 길, 실천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질문할 것이 없는지 거듭 촉구했지만, 수행승들은 침묵했다. 아난다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의심·의혹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기뻐했고, 석가모니는 그들 500명의 수행승이 머지않아 반드시 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것을 예고했다.[3]

6. 1. 열반

handa'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pi

자,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모든 현상은 지나가는 것이다. 게으름 없이 수행을 완성하라.

석가모니는 수행승들에게 위와 같이 말했으며, 이것은 석가모니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다.

석가모니는 구차제정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먼저 초선, 2선, 3선, 4선,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 상수멸로 올라갔다. 그리고 상수멸, 비상비비상처, 무소유처, 식무변처, 공무변처, 4선, 3선, 2선, 초선으로 내려갔다. 다시 초선, 2선, 3선, 4선으로 올라간 곳에서 열반에 들었다.

석가모니의 열반과 함께, 큰 지진과 천둥이 일어났다. 범천, 제석천, 아누룻다 장로, 아난다 등이 즉시 추도 시를 읊었다.

6. 2. 다비와 사리 분배

석가모니의 유해는 전륜성왕의 장례 절차에 따라 다비되었다. 먼저 새로운 천과 솜으로 500겹을 감싼 후 쇠 기름통에 넣고 다른 쇠 층으로 덮었다. 모든 향료를 포함한 장작 더미 위에서 화장되었으며, 길이 만나는 곳에는 사리탑이 세워졌다.[2] 이는 불교 장례 문화의 인도 기원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3]

다비 후 석가모니의 사리는 8개의 차이티야에 분배되어 모셔졌다.[2]

6. 3. 수밧다

쿠시나가라에 머물던 수행자 수밧다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 가르침을 듣고자 했다. 아난다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석가모니는 수밧다를 만나 팔정도를 설하며 이법에 집중하라고 가르쳤다. 수밧다는 이에 감명받아 귀의를 맹세하고 석가모니의 마지막 직제자가 되었다.[3]

7. 한국 불교에의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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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Buddhism: Critical Concepts in Religious Studies Taylor & Francis 2005
[2] PDF http://www.buddhanet[...] 2022-03
[3] 웹사이트 Buddhism | Definition, Beliefs, Origin, Systems, & Practice | Britannica http://www.britannic[...] 2023-05-15
[4] 논문 Hoary past and hazy memory. On the history of early Buddhist texts https://journals.ub.[...] 2006
[5] 논문 Moving Targets? Texts, language, archaeology and history in the Late Vedic and early Buddhist periods. http://nrs.harvard.e[...] 2009
[6] 서적 The Earliest Vinaya and the Beginnings of Buddhist Literature Istituto Italiano per il Medio ed Estremo Oriente 1956
[7] 간행물 Vinaya MacMillan Reference USA
[8] 문서 中村, 岩波文庫
[9] 문서 『ブッダ最後の旅』岩波文庫
[10] 문서 中村元は、アンバラッティカー園と、ナーランダーの記述については、サンスクリット本・有部本に記述が見られないので、後世の付加であると指摘している
[11] 문서 サンスクリット、チベット、有部本では、この言葉は釈迦ではなく「ある比丘」が言ったことになっている
[12] 문서 中村元は、「八勝処」の記述が他には漢訳阿含部の『大般涅槃経』にしか見られないので、後世の挿入と指摘している
[13] 서적 釈尊の生涯 2003
[14] 서적 初期仏教――ブッダの思想をたどる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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