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불가리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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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불가리아 전쟁은 7세기부터 15세기에 걸쳐 동로마 제국과 불가리아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쿠브라트 칸 사후 불가르족의 이동과정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초기 불가리아의 건국과 영토 확장을 위한 동로마 제국과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7세기 말 아스파루흐의 정착과 콘스탄티누스 4세의 패배, 테르벨의 활약 등이 있었고, 8세기에는 콘스탄티누스 5세의 공격과 불가리아의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전쟁이 지속되었다. 9세기 초 크룸 칸의 공격적인 정책으로 세르디카 점령과 니케포로스 1세의 죽음, 베르시니키아 전투에서의 승리가 있었고, 시메온 1세 시대에는 제국의 야망을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10세기에는 페타르 1세의 통치와 사무엘의 저항, 클레이디온 전투에서의 패배로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했다. 11세기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대한 반란이 있었고, 12세기 말 아센과 페테르의 봉기로 불가리아 제2제국이 성립되었다. 칼로얀 시대에 라틴 제국과 대립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이반 아센 2세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14세기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멸망했고,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전쟁은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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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로마-불가리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분쟁 개요 | |
| 분쟁 명칭 | 동로마-불가리아 전쟁 |
| 기간 | 680년–1355년 (675년) |
| 장소 | 발칸 반도 |
| 결과 | 결론 없음 |
| 교전 세력 | |
| 교전 대상 1 | 제1차 불가리아 제국 |
| 교전 대상 2 | 제2차 불가리아 제국 |
| 교전 대상 3 | 동로마 제국 |
| 지휘관 | |
| 불가리아 지휘관 | 칸과 차르: 아스파루흐 테르벨 코르미소시 비네흐 텔레츠 텔레리그 크룸 오무르타그 말라미르 프레시안 1세 보리스 1세 시메온 1세 페타르 1세 보리스 2세 사무일 가브릴 라도미르 이반 블라디슬라프 페타르 델얀 콘스탄틴 보딘 페타르 4세 이반 아센 1세 칼로얀 이반 아센 2세 미하일 2세 아센 미초 아센 콘스탄틴 티흐 이바일로 스밀레츠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 게오르기 2세 미하일 시슈만 이반 스테판 이반 알렉산더르 |
| 동로마 지휘관 |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 유스티니아누스 2세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 콘스탄티누스 5세 니키포로스 1세 미하일 1세 랑가베 레오 5세 테오필로스 미하일 3세 레오 6세 알렉산드로스 레오 포카스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 바실리우스 2세 그레고리오스 타로니테스 니키포로스 우라노스 미하일 4세 미하일 7세 이사키우스 2세 앙겔로스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치스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미하일 9세 팔레올로고스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 |
| 시각 자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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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쿠브라트 칸의 막내 아들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족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남부 베사라비아를 점령하면서 비잔티움 제국과 처음으로 충돌했다. 콘스탄티누스 4세 황제는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족을 육해상 합동 작전으로 공격했으나, 옹갈 전투에서 패배했다. 건강이 악화된 콘스탄티누스 4세는 군대를 떠났고, 비잔티움 제국군은 불가르족에게 패배했다. 681년, 콘스탄티누스 4세는 모이시아에 불가리아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비잔티움 트라키아에 대한 추가적인 침략을 막기 위해 조공을 바쳐야 했다.[1]
2. 1. 불가르족의 이동과 정착
쿠브라트 칸 사후 대불가리아를 건설한 불가르족은 하자르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중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족은 도나우강 삼각주 지역에 거점을 건설하고 현지 슬라브인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1] 이를 위협으로 여긴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불가르족을 토벌했지만 (옹글로스의 전투) 패배하여 오히려 모에시아를 점령당했다. 동로마는 불가르족의 이주와 건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조약을 맺었다.[1]2. 2. 비잔티움 제국의 상황
7세기 비잔티움 제국은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내부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불가르족이 발칸반도에 정착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1]3. 초기 충돌 (7세기-8세기)
680년 옹갈 전투에서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이 콘스탄티누스 4세의 비잔티움 제국군을 격파하고 도나우강 이남에 국가를 건설했다. 이후 테르벨 칸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복위를 돕고 비잔티움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71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에서 비잔티움을 지원하여 우마이야 왕조 군대를 격파했다.[1]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5세 시기부터 양국 관계는 악화되어 여러 차례 전쟁이 벌어졌다. 콘스탄티누스 5세는 763년 안키알루스 전투에서 텔레츠 칸을 격파하는 등, 775년 병사할 때까지 불가리아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그의 손자 콘스탄티누스 6세도 불가리아에 침입했지만, 카르담이 이끄는 불가리아 군대에 격퇴되었다.
3. 1. 아스파루흐의 전쟁 (680-681)
쿠브라트 칸의 막내 아들 아스파루흐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현재의 남부 베사라비아를 점령하면서 불가리아 건국자들과 비잔티움 제국은 처음으로 충돌했다. 아스파루흐는 콘스탄티누스 4세 황제가 이끄는 비잔티움 제국을 육해상 합동 작전으로 격파하고, 옹갈의 요새화된 야영지를 성공적으로 포위했다. 건강이 악화된 황제는 군대를 떠나야 했고, 이는 군대가 공황 상태에 빠져 불가르족에게 패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 681년, 콘스탄티누스 4세는 모이시아에 불가리아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비잔티움 트라키아에 대한 추가적인 침략을 막기 위해 보호금을 지불해야 했다.[1]쿠브라트 칸 사후 대불가리아를 건설한 불가르족의 각 부족은 분열되어 동쪽의 하자르의 공격을 받아 서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인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르족은 도나우강 삼각주 지역에 거점을 건설하고 현지 슬라브인들과 동맹 관계를 맺었다. 이를 위협으로 여긴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4세는 680년 불가르족을 토벌했지만 (옹글로스의 전투) 오히려 모에시아를 점령당했다. 동로마는 불가르족의 이주와 건국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조약을 맺었다.
3. 2. 테르벨의 전쟁 (705-719)
테르벨은 704년 폐위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비잔틴 제국 기록에 처음 등장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테르벨에게 우정과 선물, 그리고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조건으로 황제 복위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테르벨은 15,000명의 기병을 제공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들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여 705년에 도시를 점령했다. 복위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자신의 찬탈자들인 황제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오스 3세를 비롯한 많은 지지자들을 처형했다. 그리고 테르벨에게 많은 선물과 함께 황제 다음가는 지위인 카이사르 칭호를 하사했다. 이는 비잔틴 역사상 외국 통치자가 카이사르 칭호를 받은 최초의 사례였다. 또한, 자고레라고 불리는 트라키아 북동부 지역을 할양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유스티니아누스의 딸 아나스타시아가 약속대로 테르벨과 결혼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3년 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약속을 어기고 할양된 영토를 되찾기 위해 군사 작전을 시작했다. 그러나 테르벨은 708년 안키알루스 전투에서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격파했다. 711년, 소아시아에서 심각한 반란에 직면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다시 테르벨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3,000명의 군대만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반란 황제 필리피쿠스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불가르족 동맹군은 불가리아로 돌아갔다. 테르벨은 비잔틴 제국의 혼란을 틈타 712년 트라키아를 습격하여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약탈했다.[1]
''이메니크''의 연대기 정보에 따르면 테르벨은 715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비잔틴 연대기 작가 고백자 테오파네스는 테르벨이 718년 또는 719년에 폐위된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2세를 복위시키려는 시도에 관여했다고 기록했다. 만약 테르벨이 이때까지 살아있었다면, 그는 716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3세와 새 조약을 체결한 불가리아 통치자였을 것이다. 이 조약은 비잔틴 제국이 불가리아에 지불하는 연례 조공과 트라키아 영토 할양을 확인하고, 상업 관계 및 정치적 망명자 처우를 규정했다. 또한, 테르벨은 717년~718년 제2차 아랍 콘스탄티노플 포위전을 육로로 구원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불가르족은 이 전투에서 약 22,000명의 아랍인을 학살했다.[1]
3. 3. 콘스탄티누스 5세의 전쟁 (756-775)
세바르가 죽은 후, 불가리아는 오랜 위기와 불안정의 시기로 접어들었지만, 비잔틴 제국은 그들의 입지를 굳혔다. 756년부터 775년까지,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5세는 불가리아를 상대로 아홉 차례의 원정을 이끌어 다뉴브강에 비잔틴 국경을 설정하려 했다.[2] 20년 동안 8명의 칸이 즉위하는 등 잦은 통치자 교체와 끊임없는 정치적 위기로 인해 불가리아는 멸망 직전에 놓였다.
756년의 첫 번째 원정에서 콘스탄티누스 5세는 성공을 거두어 불가르족을 두 번이나 격파했지만, 759년 불가르족의 칸 비네흐는 리쉬키 고개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를 완전히 격파했다.[3] 비네흐는 그 후 비잔틴 제국과 평화를 맺으려 했지만, 불가르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 새로운 통치자 텔레츠는 763년 안키알루스 전투에서 패배했다.[4] 이후 원정에서 양측 모두 뚜렷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비잔틴 제국은 발칸 산맥을 통과할 수 없었고, 함대는 두 번이나 심한 폭풍으로 파괴되었다(765년의 한 폭풍에서만 2,600척의 배가 침몰했다).[5][6] 774년, 비잔틴 제국은 베르지티아에서 열세한 불가리아 군대를 격파했지만, 이것이 콘스탄티누스 5세의 마지막 성공이었다. 패배의 결과로 불가르족은 플리스카에 있는 비잔틴 스파이를 제거하기 위해 심각한 예방 조치를 취했다. 칸 텔레리크는 콘스탄티누스 5세에게 비밀 사절을 보내 불가리아를 탈출하여 황제에게 망명을 요청하고, 환대를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텔레리크는 황제가 불가리아에 있는 자신의 요원들을 배신하게 하는 데 성공했고, 그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콘스탄티누스 5세는 775년에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했지만, 병에 걸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길에 사망했다.
3. 4. 콘스탄티누스 6세의 보복 (791-796)
791년, 비잔틴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6세는 스트루마 강 계곡에서 일어난 불가리아의 침략에 대한 보복으로 불가리아 원정을 시작했다. 불가리아의 카르담은 비잔틴의 침략을 예상하고 트라키아의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에서 비잔틴군을 맞이했다. 비잔틴군은 패배하여 도주했다.[1]792년, 콘스탄티누스 6세는 군대를 이끌고 카르노바트 근처 마르켈라이에 진을 치고 요새화했다. 7월 20일, 카르담이 군대를 이끌고 도착하여 인근 고지를 점령했다. 양측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콘스탄티누스 6세는 공격을 명령했지만, 마르켈라이 전투에서 비잔틴군은 대형을 잃고 패배하여 도주했다. 카르담은 황제의 천막과 시종들을 포획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온 콘스탄티누스 6세는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 불가리아에 조공을 바치기로 약속했다.[1]
796년, 카르담은 조공을 요구하며 조공이 지불되지 않으면 트라키아를 황폐화하겠다고 위협했다. 참회자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6세는 금 대신 똥을 "적절한 조공"이라며 보내고, 마르켈라이에서 카르담을 상대로 새로운 군대를 이끌겠다고 조롱했다. 황제의 군대는 북쪽으로 향했고, 아드리아노폴리스 부근에서 카르담과 마주쳤다. 양측은 17일 동안 전투 없이 대치했으며, 협상을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분쟁은 피하고 792년과 동일한 조건으로 평화가 재개되었다.[1]
4. 크룸 칸의 시대 (9세기 초)
803년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집권하여 아바르족을 격파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809년 세르디카(소피아)를 점령했다. 811년 니케포로스 1세가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수도 플리스카를 함락시켰으나, 바르비차 고개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군을 대파하고 니케포로스 1세를 전사시켰다.[10] 이후 크룸은 트라키아를 공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으나, 814년 급사했다.
4. 1. 크룸의 전쟁 (807-814)
803년 불가리아의 크룸 칸이 집권하였다. 크룸은 아바르족의 세력이 약해진 것을 틈타 805년에 아바르 영토로 진격하여 세력을 확대했다.[8] 그는 더 나아가 남쪽으로 진군하여 809년 세르디카를 점령했다.불가리아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동로마 황제 니케포로스 1세는 811년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불가리아를 침공했다. 그는 카르노바트 인근의 마르켈라이로 진격하여, 크룸의 협상 시도를 거부하고 진격을 계속했다. 동로마군은 발칸 산맥에서 불가리아군의 매복을 피했고, 모이시아로의 진격을 막으려던 12,000명의 군대를 격파했다. 또한 급조된 50,000명의 군대를 불가리아 수도 플리스카 성벽 앞에서 격파하고,[8] 7월 20일 플리스카를 점령했다. 재무 장관 출신이었던 니케포로스 1세는 크룸의 보물을 챙기고 도시에 불을 지르며, 군대를 주민들에게 풀었다. 크룸의 새로운 외교적 시도는 거부되었다. 니케포로스 1세는 자신의 군대에게 수도의 주민들을 살해하라고 명령하는 잔혹함을 보였다.[9]
니케포로스 1세는 군대의 기강 해이에 우려를 느껴 트라키아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크룸은 가능한 한 많은 백성(여성 포함)을 동원하여 산길에서 퇴각하는 동로마군을 상대로 함정과 매복을 설치했다. 7월 26일 새벽, 동로마군은 바르비차 고개에서 해자와 나무 벽에 갇히게 되었다.[10] 니케포로스 1세는 이어진 전투에서 많은 병력과 함께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스타우라키오스는 목에 큰 부상을 입은 채 황실 근위대에 의해 안전하게 옮겨졌다. 크룸은 황제의 두개골에 은을 입혀 술잔으로 사용했다는 전통이 있는데, 이는 그의 잔혹함에 대한 명성을 높여 "새로운 산헤립"이라는 별명을 안겨주었다.
스타우라키오스는 짧은 재위 기간 후 부상으로 사망하여 퇴위했으며, 그의 매부인 미하일 1세가 뒤를 이었다. 812년 크룸은 동로마령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데벨툼을 점령했고, 근처 요새의 주민들을 겁에 질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가게 했다. 크룸은 이 우세한 입장에서 716년의 평화 조약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하일 1세는 자신의 정권이 약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 이 제안을 거부했는데, 이는 탈주병 교환 조항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크룸은 황제를 더욱 압박하기 위해 812년 가을에 네세바르를 포위하고 점령했다.
813년 2월, 불가르족은 트라키아를 습격했지만 황제의 군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성공에 고무된 미하일 1세는 제국 전역에서 병력을 소집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기대하며 북쪽으로 향했다. 크룸은 군대를 이끌고 아드리아노폴리스 방향으로 남하하여 베르시니키아 근처에 진을 쳤다. 미하일 1세는 불가르족에 맞서 군대를 정렬했지만, 2주 동안 어느 쪽도 공격을 시작하지 않았다. 마침내 813년 6월 22일, 동로마군은 공격을 시작했지만 즉시 패주했다.[11] 크룸의 기병대가 추격하면서 미카엘 1세의 패주는 완벽해졌고, 크룸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여 육로로 포위했다. 불명예를 안게 된 미카엘은 퇴위하여 수도사가 되었는데, 이는 크룸에 의해 3년 만에 무너진 세 번째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4. 2. 오무르타그의 평화 조약 (815)
칸 오무르타그는 비잔티움 제국이 평화 제안을 거부하자 제국을 침공했다. 불가르족은 오늘날의 바바에스키(당시 불가로피곤)까지 남쪽으로 진출했지만, 레오 5세에게 패배했고, 오무르타그는 말을 타고 전장에서 탈출했다. 이 전투가 불가르족에게 결정적인 타격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프랑크 제국과 비잔틴 제국 사이의 반 불가르 동맹 가능성, 새로 정복한 영토에서 불가르족의 권위를 공고히 할 필요성, 대초원에서 부족들의 새로운 움직임은 오무르타그가 815년에 비잔틴 제국과 30년 평화 조약을 체결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 조약은 슐멘 주, 셀치 마을 근처에서 발견된 기둥에 부분적으로 새겨져 있으며, 트라키아의 국경, 비잔티움에 남아있는 슬라브족 문제, 포로 교환을 명시했다.[1] 조약은 양측 모두 준수했으며, 820년 미카엘 2세가 비잔틴 황제로 즉위한 후 갱신되었다.
5. 시메온 1세의 시대 (9세기 말-10세기 초)
보리스 1세 시대에 정교회를 받아들인 불가리아는 수도사로 자란 시메온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변화를 맞이했다.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플 유학 경험을 바탕으로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다. 초기에는 평화로웠으나, 동로마 측이 불가리아와의 교역소를 테살로니키로 옮기고 세금을 인상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13] 분노한 시메온은 894년 군사 행동을 일으켜 동로마군을 격파했다. 동로마 제국은 마자르족과 동맹을 맺었으나, 시메온은 페체네그족과의 동맹으로 남부 부흐 전투에서 마자르족을 격퇴하고, 896년 불가로피곤 전투에서 동로마군에 대승을 거두어 공납금을 받아냈다.[13]
912년 알렉산드로스가 공납금 지불을 중단하자, 시메온은 다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총대주교 니콜라오스는 시메온을 '황제'로 인정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과 즉위식을 허락했고, 시메온은 913년 "로마인과 불가리아인의 황제"를 칭했다. 그러나 조에 카르보노프시나의 쿠데타로 시메온의 대관은 취소되고 불가리아에 대한 적대 정책이 시작되었다. 917년 동로마 제국의 공격은 아켈로이 전투에서 불가리아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후 시메온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방면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에는 실패하고 927년 사망했다.
5. 1. 시메온 1세의 제국적 야망 (894-927)
시메온 1세가 893년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아버지 보리스 1세 시대에 비잔틴 제국과 맺었던 오랜 평화는 곧 끝을 맺으려 했다.[13] 분쟁은 비잔틴 황제 레오 6세 현자가 그의 아내 조에 자우치나와 그녀의 아버지 스틸리아노스 자우체스의 압력에 따라 불가리아 상품의 시장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테살로니키로 옮기면서 발생했는데, 테살로니키에서는 불가리아 상인들에게 막대한 세금이 부과되었다.[13] 이 조치는 불가리아의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시메온은 894년 가을 북쪽에서 비잔틴 제국을 침공했고, 대부분의 비잔틴군이 아랍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동부 아나톨리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다.[13] 레오는 경비병과 수도의 다른 군부대로 구성된 군대를 보내 시메온을 막았지만, 마케도니아 테마 어딘가에서 격파되었다.마자르족은 시메온의 군대를 두 번 격파했지만, 896년 남부 부흐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전쟁은 896년 동트라키아의 불가로피곤 근처에서 불가리아의 대승으로 끝났다.[13] 시장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되돌아갔고, 비잔틴 황제는 불가리아에 연례 조공을 지불해야 했다. 페체네그족의 도움으로 시메온은 비잔틴과 협력했던 헝가리의 침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13]
912년 5월 11일 레오 6세가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7세가 즉위하면서, 레오의 형제 알렉산드로스가 레오의 마지막 아내이자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조에 카르보노프시나를 궁에서 추방하고 섭정했다. 시메온은 황제의 칭호를 주장하고 이 지역에서 비잔티움을 대체하는 새로운 불가리아-비잔틴 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알렉산드로스는 913년 6월 6일에 죽었고, 수도는 무정부 상태가 되었으며 제국의 통치는 총대주교 니콜라스 미스티코스가 이끄는 섭정 회의의 손에 넘어갔다. 시메온은 913년 7월 말 또는 8월에 전력을 다해 공격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달했다. 오랜 협상 끝에 비잔틴 조공의 미납금 지불, 콘스탄티누스 7세가 시메온의 딸 중 한 명과 결혼할 것이라는 약속, 시메온이 블라케르나이 궁전에서 니콜라스 총대주교로부터 불가리아 황제(차르)로 공식 인정받는 결과를 낳았다. 시메온은 통치 말기까지 "불가리아와 로마인의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시메온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한 직후,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조에가 궁으로 돌아와 섭정들을 제거했다. 그녀는 914년 2월에 권력을 장악하여 니콜라스 총대주교를 정부에서 사실상 제거하고, 시메온의 황제 칭호 인정을 부인했으며, 아들과 시메온의 딸의 결혼 계획을 거부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시메온은 914년 여름에 트라키아를 침공하여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했다. 917년, 니케포로스 포카스의 아들 레오 포카스가 이끄는 비잔틴군이 로마노스 레카페노스가 지휘하는 비잔틴 해군과 함께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불가리아 흑해 항구로 항해했다. 메셈브리아(네세바르)로 가는 도중에 포카스의 군대는 앙키알로스(포모리에) 항구에서 멀지 않은 아켈루스 강 근처에서 휴식을 취했다. 시메온은 비잔틴군을 가로막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고, 그들이 무질서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근처 언덕에서 공격했다. 917년 8월 20일 아켈루스 전투 (또는 앙키알로스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은 비잔틴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많은 지휘관을 죽였지만, 포카스는 메셈브리아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 결과 시메온은 페체네그 지도자들을 자신의 세력권에 끌어들였고, 비잔티움의 유럽 지배에 대한 주요 공세를 시작했다. 불가리아군은 비잔틴군의 잔당을 추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근처 카타시르타이 마을에서 레오 포카스 휘하의 비잔틴군과 마주쳤다.[17]
시메온은 비잔티움을 지원하던 중세 세르비아 공국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테오도르 시그리차와 마르마이스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은 이 나라를 침공하여 페타르 고이니코비치와 파블레 브라노비치와 같은 지역 통치자들을 폐위시켰다. 한편, 제독 로마노스 레카페노스는 919년에 어린 콘스탄티누스 7세의 섭정으로 조에를 대신했고, 920년 12월에는 공동 황제의 지위까지 올라 제국을 효과적으로 장악했다. 시메온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벌였다. 920년에서 922년 사이에 불가리아는 비잔티움에 대한 압력을 강화하여 테살리아를 거쳐 서쪽으로 진격하여 코린토스 지협에 도달했고, 동쪽으로는 트라키아로 진격하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람프사쿠스 마을을 포위했다. 시메온의 군대는 92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앞에 나타나 로마노스의 퇴위를 요구하고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했으며, 922년에는 피가에에서 승리하여 골든 혼의 많은 부분을 불태우고 비제를 점령했다.[18]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 위해 시메온은 924년에 대규모 작전을 계획하고 시아 파티마 왕조 통치자 우바이드 알라에게 사절을 보냈다. 우바이드 알라는 동의했고 불가리아인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대표들을 다시 보냈다. 그러나 사절들은 칼라브리아에서 비잔틴군에게 체포되었다. 로마노스는 파티마 왕조의 이집트에 평화를 제안하고, 후한 선물을 덧붙여 불가리아와 파티마 왕조 사이의 동맹을 파괴했다.
924년 시메온은 차슬라프 클로니미로비치가 이끄는 군대를 보내 그의 이전 동맹국이었던 자하리에 프리비사블리에비치를 폐위시켰다. 자하리에가 크로아티아로 도망치면서 성공했다. 같은 해 여름, 시메온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여 총대주교와 황제를 만나기를 요구했다. 그는 924년 9월 9일 골든 혼에서 로마노스와 대화하고 휴전을 맺었는데, 비잔티움은 불가리아에 연례 세금을 지불하지만 흑해 연안의 일부 도시를 반환해야 했다. 926년 시메온의 군대는 당시 비잔틴의 동맹국이었던 크로아티아를 침공했지만 보스니아 고원 전투에서 토미슬라프 국왕의 군대에 의해 심각한 패배를 당했다. 교황 사절 마달베르트는 시메온과 토미슬라프 사이에서 평화를 중재했다. 시메온은 비잔틴에 대한 새로운 공격을 고려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군사력을 유지했다.[19][20]
14년의 전쟁 끝에 시메온은 결국 비잔틴 왕위에 대한 자신의 구상에 좌절했다. 크로아티아에서 군대가 파괴된 이듬해, 비잔틴에 대한 또 다른 공격을 계획하던 중 927년 5월 27일 프레슬라브의 궁전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21]
6. 불가리아 제1제국의 쇠퇴와 멸망 (10세기-11세기 초)
시메온 1세가 927년 사망한 후, 불가리아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 페타르 1세는 즉위 초 비잔티움 제국과 전쟁을 벌였으나, 곧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불가리아는 내륙 마케도니아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시메온 1세가 점령했던 트라키아 지역을 비잔티움에 반환해야 했다.[22] 또한 페타르 1세는 비잔티움 황제 로마노스 1세의 손녀와 결혼하고, 불가리아 통치자의 차르(황제) 칭호와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 지위를 인정받았다.[22]
960년대 후반, 비잔티움 황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는 불가리아와 마자르족의 동맹을 문제 삼아 조공 지급을 거부하고, 키예프 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불가리아를 공격하도록 사주했다. 스뱌토슬라프 1세의 침공으로 불가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22]
이후 사무엘 등 4형제가 동로마 제국의 내분을 틈타 불가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무엘은 한때 바실리우스 2세의 군대를 격퇴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으나, 결국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망했다.[22] 그의 사후 불가리아의 저항은 계속되었지만, 1018년 이반 블라디슬라프의 죽음과 함께 불가리아 제1제국은 완전히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병합되었다.[22]
6. 1. 페타르 1세의 통치 (927-969)
시메온 1세의 아들인 페타르 1세는 즉위 직후 비잔틴 트라키아를 약탈하며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곧 콘스탄티노플로 평화 사절단을 파견하여 평화를 모색했다. 그 결과 897년과 904년의 조약에서 정해진 국경선이 복원되었고, 시메온이 점령했던 트라키아 지역은 비잔틴 제국에 반환되었다. 그 대가로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가 내륙 마케도니아를 지배하는 것을 인정했다.[22]페타르 1세는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1세의 손녀인 마리아 레카페나와 결혼하고, 연례 조공을 받기로 했으며, 불가리아 통치자의 차르(황제) 칭호와 불가리아 교회의 독립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 평화 조약은 966년까지 유지되었다.[22]
960년대 중반, 페타르 1세의 황후가 사망한 후, 비잔틴 황제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는 불가리아와 마자르족의 동맹을 문제 삼아 966년 연례 조공 지불을 거부하고 불가리아 국경에서 무력 시위를 벌였다. 니케포로스 2세는 직접적인 공격 대신 키예프 공작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사절을 보내 북쪽에서 불가리아를 공격하도록 요청했다. 스뱌토슬라프 1세는 즉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시작하여 다뉴브 강에서 불가리아군을 격파하고 968년경 80여 개의 불가리아 요새를 점령했다.[22]
이에 놀란 니케포로스 2세는 서둘러 불가리아와 평화를 맺고, 어린 황제 바실 2세와 콘스탄티누스 8세를 두 불가리아 공주와 결혼시켰다. 페타르 1세의 두 아들은 협상과 인질의 명목으로 콘스탄티노플로 보내졌다. 한편, 페타르 1세는 불가리아의 전통적인 동맹인 페체네그족을 설득하여 키예프를 공격하게 함으로써 키예프 군대를 철수시켰다.[22]
6. 2. 사무엘의 저항과 불가리아 멸망 (976-1018)
요한 1세 사후, 사무엘 등 4명의 형제는 동로마 제국의 내분을 틈타 불가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사무엘은 바실리우스 2세의 토벌군을 격퇴하고 동불가리아를 점령하고 있던 동로마 제국군을 몰아내는 등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22] 그러나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혼란을 수습한 동로마 제국은 점차 불가리아의 영토를 침식했고, 불가리아 귀족과 장군들의 배신도 잇따랐다.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사무엘은 동로마 제국군에게 대패하고 그해 10월에 병사했다.[22] 사무엘의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는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과 계속 싸웠으나 그 역시 병사했고, 마지막 불가리아 황제 이반 블라디슬라프도 전사하면서 불가리아는 1018년에 동로마 제국에 멸망했다.[22]7.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와 불가리아인의 봉기 (11세기-12세기)
11세기에서 12세기 사이,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 불가리아인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에 저항하여 여러 차례 봉기를 일으켰다.
대표적인 봉기로는 페테르 2세 델리안이 이끈 봉기(1040-1041)와 게오르기 보이테흐가 주도한 봉기(1072)가 있다. 페테르 2세 델리안의 봉기는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으나, 내부 분열과 비잔티움 제국의 반격으로 실패했다.[23] 게오르기 보이테흐의 봉기 당시에는 콘스탄틴 보딘이 지원군을 파견하여 프리즈렌에서 페테르 3세로 옹립되기도 하였으나, 이 봉기 역시 곧 진압되었다.[23]
7. 1. 페테르 2세의 봉기 (1040-1041)
페테르 2세 델리안은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하는 대규모 봉기를 이끌었다.[23] 봉기는 초기에 성공을 거두었으나, 내부 분열과 비잔티움 제국의 반격으로 실패하여 페테르 2세는 처형되었다.[23]7. 2. 페테르 3세의 봉기 (1072)
콘스탄틴 보딘은 게오르기 보이테흐의 지도 하에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하여 봉기한 슬라브족에게 지원군을 파견하였고, 1072년 프리즈렌에서 불가리아인의 황제 페테르 3세로 옹립되었다.[23] 그러나 보이테흐와 페테르 3세는 곧 진압되어 포로로 잡혔다.[23]8. 불가리아 제2제국의 성립과 발전 (12세기 말-14세기)
1185년 아센과 페테르 형제의 봉기를 계기로 불가리아 제2제국이 성립되었다. 이들은 비잔티움 제국의 혼란을 틈타 독립을 쟁취했다. 칼로얀은 비잔티움 제국과 라틴 제국에 맞서 싸우며 불가리아의 영토를 확장했고, 이반 아센 2세 시대에는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테살로니카 제국을 격파하는 등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이후 몽골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8. 1. 아센과 페테르의 봉기 (1185-1187)
1185년 이삭 2세가 시칠리아 왕국과의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자, 테오도르와 이반 아센 형제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이삭 2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형제는 이를 불가리아인들에 대한 굴욕으로 여기고 봉기를 일으켰다.[1]봉기 초기, 테오도르는 스스로를 페테르 4세라 칭하며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 페테르 1세를 계승함을 선언했다. 이들은 쿠만족의 지원을 받아 비잔티움 제국군을 연이어 격파했다. 1186년 봄, 이삭 2세는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테오도르와 이반 아센 형제는 모이시아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1]
1187년, 이삭 2세는 다시 한번 불가리아를 공격하여 로베치를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결국 이삭 2세는 러브치 조약을 통해 불가리아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1]
8. 2. 칼로얀의 통치 (1197-1207)
칼로얀은 비잔티움 제국과 라틴 제국에 맞서 싸우며 불가리아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1205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라틴 제국군을 대파했다.[1]8. 3. 이반 아센 2세의 시대 (1218-1241)
이반 아센 2세는 불가리아 제2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황제이다. 1230년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테살로니카 제국을 격파하고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했다.[19] 그는 니케아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후계 국가 중 하나)과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동 공격하기도 했다.9. 불가리아와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와 멸망 (14세기-15세기)
14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침입으로 불가리아와 비잔티움 제국은 모두 멸망했다. 불가리아는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으로 멸망하면서[21], 양국 간의 오랜 전쟁도 막을 내렸다.
9. 1. 불가리아의 쇠퇴와 오스만 제국의 침입
이반 알렉산더 시기 불가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내전에 개입하여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으나, 이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에 패배하면서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9. 2.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
1453년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21]10. 주요 전투
- 온글로스의 전투
- 플리스카 전투
- 메셈브리아 전투
- 베르시니키아 전투
-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 (813년)
- 스페르케이오스 전투
- 프레슬라프 전투
- 클레디온 전투
- 페타르 델리안의 반란
- * 테베 전투
- * 오스트로보 전투
- 크로코트니차 전투
11. 결론
불가리아-비잔티움 전쟁은 중세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전쟁은 발칸반도의 정치, 문화, 종교 지형을 바꾸었으며, 불가리아와 비잔티움 제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한국사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전쟁은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을 추구했던 불가리아의 투쟁을 보여주며, 이는 한반도의 역사와 비슷하다.
7세기 말, 아스파루흐가 이끄는 불가리아는 콘스탄티누스 4세의 비잔티움 제국을 격파하고 불가리아 국가를 세웠다.[1] 8세기 중후반, 콘스탄티누스 5세는 불가리아에 여러 차례 원정했으나, 비네흐 칸은 리쉬키 고개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를 대파했다.[3] 이후 텔레츠 칸이 안키알루스 전투에서 패배했지만,[4] 비잔티움은 발칸 산맥을 넘지 못하고, 함대는 폭풍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5][6]
8세기 말, 불가리아의 카르담은 마르켈라이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6세를 격파하고 조공을 받아냈다. 9세기 말, 시메온 1세는 불가로피곤 전투와 아켈루스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를 대파했다.[17] 시메온은 차르 칭호를 사용하며 비잔티움과 대립했으나, 파티마 왕조와의 동맹이 실패하고, 크로아티아에 패배한 후 사망했다.[19][20][21]
11세기 초, 페테르 2세 델리안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오스트로보 전투에서 진압되었다. 12세기 말, 이반 아센 1세는 트랴브나 전투에서 이사악 2세 앙겔로스를 격파하고, 칼로얀은 제4차 십자군 이후 라틴 제국과 대립했다. 이반 아센 2세는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승리하고 영토를 확장했으나, 이후 불가리아는 쇠퇴했다.
14세기 초,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는 비잔티움과 충돌했으나, 평화 조약을 맺었다. 게오르기 2세 테르테르는 비잔틴 제국의 내전에 개입했으나, 사망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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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Chronographia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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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ogra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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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uscula histo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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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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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ogra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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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onymus Vatica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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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que de Michel de Syr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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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ograph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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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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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onic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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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Bulgarian historical review
[1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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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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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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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3]
서적
the Governance of Basil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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