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조지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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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조지아 전쟁은 1014년부터 1022년까지 동로마 제국과 조지아 왕국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을 의미한다. 조지아는 1014년 타오 지역을 점령하며 분쟁을 시작했고, 이에 동로마 제국은 반격에 나섰다. 전쟁은 조지아의 패배로 끝났으며, 조지아는 타오, 파시아네, 콜라, 아르타안, 자바케티를 동로마에 넘겨주고 아들을 볼모로 보내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후 1028년과 1040년대 초에도 조지아 내전과 동로마 제국의 개입이 있었으며, 조지아는 비잔틴 제국에 영토를 잃었지만 독립을 유지했다. 1204년에는 조지아의 지원을 받은 트라페준타 제국이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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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로마-조지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분쟁 개요 | |
| 분쟁 | 동로마-조지아 전쟁 |
| 관련 | 룸 술탄국 |
| 시기 | 1064년 ~ 1308년 |
| 장소 | 소아시아 |
| 결과 | 조지아는 패배 이후에 영토를 재정복함.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동로마 제국 |
| 교전국 2 | 조지아 |
| 지휘관 | |
| 동로마 제국 지휘관 | 미상 |
| 조지아 지휘관 | 미상 |
| 병력 규모 | |
| 동로마 제국 병력 | 1025년경: 25만 명 이상 1140년경: 2만 5천 ~ 5만 명 |
| 조지아 병력 | 제국 군인 수보다 소수 |
| 기타 | |
| 관련 전투 | 시림니 전투 스빈닥스 전투 사시레티 전투 찰디아 원정 |
| 추가 정보 | |
| 분쟁 시기 | 1014년–1204년 |
| 분쟁 지역 | 조지아 지역인 타오-클라르제티, 남캅카스, 트레비존드 |
| 지휘관 1 | 바실리오스 2세 콘스탄티노스 8세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 클데카리의 리파리트 4세 아나코피아의 데메트리오스 콘스탄티노스 9세 모노마초스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 |
| 지휘관 2 | 조지아의 기오르기 1세 조지아의 바그라트 4세 타마르 여왕 다비트 콤니노스 트레비존드의 알렉시오스 1세 |
| 지원 세력 | 아르메니아 왕국 |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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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976년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일으킨 반란으로 동로마 제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조지아의 공작 타오의 다비드 3세는 황제 바실 2세를 지원했다. 그 대가로 다비드 3세는 판칼레이아 전투에서 황제군이 승리한 후 소아시아 동부의 중요 제국 영토를 평생 통치할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987년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 당시 다비드 3세가 바실 2세 지원을 거부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조정은 조지아 통치자들을 불신하게 되었고,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다비드 3세는 자신의 사후에 광대한 영지를 바실 2세에게 상속한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이는 다비드가 이전에 자신의 양아들인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를 상속자로 지정했던 약속을 뒤집는 것이었다.
1001년 초 다비드 3세가 사망하자, 바실 2세는 약속에 따라 그의 영지였던 타오, 테오도시오폴리스, 파시안, 반 호수 지역(아파후니크), 그리고 만지케르트를 이베리아 테마로 편입시켜 제국의 영토로 삼았다. 이듬해, 바그라트 3세의 친아버지인 조지아 공작 이베리아의 구르겐이 다비드 3세의 영지를 되찾으려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지만, 안티오키아의 둑스였던 동로마 장군 니케포로스 우라노스에게 저지당했다. 결국 조지아의 바그라티온 왕조는 이러한 영토 변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바그라트 3세는 1008년 여러 조지아 지역을 통합하여 통일 조지아 왕국의 첫 번째 왕위에 올랐다. 그는 1014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조지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조지 1세는 동로마 제국이 차지한 옛 다비드 3세의 영토, 특히 타오 지역에 대한 조지아의 오랜 영유권 주장을 이어받게 되면서, 이는 양국 간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2. 1. 동로마 제국의 팽창 정책
동로마 제국은 976년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일으킨 대규모 반란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이 긴급한 상황에서 조지아의 공작 타오의 다비드 3세는 바실 2세 황제를 지원했고, 판칼레이아 전투에서 황제 충성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데 기여했다. 그 대가로 다비드 3세는 소아시아 동부의 중요한 제국 영토를 평생 다스릴 권리를 얻었다.
그러나 987년 바르다스 포카스가 또 다른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비드 3세는 바실 2세 지원을 거부했다. 이 일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조정은 조지아 통치자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반란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비드 3세는 자신의 사후 막대한 영지를 바실 2세에게 넘긴다는 약속을 강제로 해야만 했다.
이 합의는 다비드 3세가 이전에 자신의 양아들인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를 상속자로 삼았던 약속을 뒤집는 것이었다. 1001년 초 다비드 3세가 사망하자, 바실 2세는 약속대로 그의 영지였던 타오, 테오도시오폴리스(현재의 에르주룸), 파시안, 반 호수 주변 지역(아파후니크), 그리고 만지케르트(현재의 말라즈기르트)를 이베리아 테마로 편입시켜 제국의 영토로 만들었다.
다음 해인 1002년, 바그라트 3세의 친아버지인 조지아 공작 이베리아의 구르겐이 다비드 3세의 영지를 되찾으려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지만, 안티오키아 총독이었던 동로마 장군 니케포로스 우라노스에게 저지당했다. 결국 조지아의 바그라티온 왕조는 이러한 영토 변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트 3세는 1008년 여러 조지아 지역을 통합하여 통일 조지아 왕국의 첫 번째 왕위에 올랐다. 그는 1014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조지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조지 1세는 동로마 제국이 차지한 옛 다비드 3세의 영토, 특히 타오 지역에 대한 조지아의 오랜 영유권 주장을 이어받았다.
2. 2. 조지아의 통일 왕국 등장
비잔틴 제국의 통합성은 976년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이끄는 전면적인 반란으로 심각한 위협을 받았다. 조지아 공작 타오의 다비드 3세는 이 긴급한 상황에서 바실 2세 황제를 도왔고, 판칼레이아 전투에서 황제 충성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그 대가로 소아시아 동부의 핵심 제국 영토에 대한 평생 통치권을 보상받았다.
그러나 다비드 3세가 987년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 당시 바실 2세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비잔틴 제국 중앙 정부는 조지아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반란이 실패한 후, 다비드 3세는 자신의 사후 영지를 바실 2세에게 넘긴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다. 이 합의는 다비드가 이전에 자신의 양아들인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를 상속자로 지정했던 약속을 뒤집는 것이었다.
1001년 초 다비드 3세가 사망하자, 바실 2세는 그의 영지였던 타오, 테오도시오폴리스, 파시안, 반 호수 지역(아파후니크), 그리고 만지케르트를 이베리아 테마로 편입하여 직접 통치하에 두었다.
이듬해, 바그라트 3세의 친아버지인 조지아 공작 이베리아의 구르겐이 다비드 3세의 옛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격했지만, 안티오키아의 둑스(군사령관)인 비잔틴 장군 니케포로스 우라노스에게 저지당했다. 결국 조지아의 바그라티드 왕조는 비잔틴 제국의 이러한 영토 재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트 3세는 1008년 여러 조지아 공국들을 통합하여 통일된 조지아 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 즉위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014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조지 1세는 왕위를 계승하면서 비잔틴 제국이 점유한 옛 타오 지역에 대한 조지아의 오랜 영유권 주장 또한 물려받게 되었다.
2. 3. 타오 지역 분쟁
976년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주도한 대규모 반란으로 비잔틴 제국의 통합성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조지아 공작 타오의 다비드 3세는 바실 2세 황제를 지원했고, 판칼레이아 전투에서 황제 충성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자 그 대가로 소아시아 동부의 핵심 제국 영토에 대한 종신 통치권을 보상받았다.
그러나 987년 바르다스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비드 3세가 바실 2세 지원을 거부하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제국 정부는 조지아 통치자들에 대한 불신을 갖게 되었다.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다비드 3세는 자신의 사후에 광대한 영지를 바실 2세에게 넘긴다는 약속을 강요받았다. 이 합의는 다비드 3세가 이전에 자신의 양아들인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를 상속자로 지정했던 약속을 뒤집는 것이었다.
1001년 초 다비드 3세가 사망하자, 바실 2세는 약속된 상속 영토인 타오, 테오도시오폴리스, 파시안, 반 호수 지역(아파후니크), 그리고 만지케르트를 확보하여 이베리아 테마에 편입시켰다.
이듬해인 1002년, 조지아의 바그라트 3세의 친아버지인 조지아 공작 이베리아의 구르겐이 다비드 3세의 상속 영토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으나, 안티오키아의 둑스였던 비잔틴 장군 니케포로스 우라노스에게 저지당했다. 결국 조지아의 바그라티드 왕조 후계자들은 이 영토 재편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바그라트 3세는 1008년 통일된 조지아 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 즉위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014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조지 1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비잔틴 제국이 점유한 타오 지역에 대한 조지아의 오랜 영유권 주장 또한 이어받게 되었다.
3. 동로마-조지아 전쟁 (1014년–1022년)

1014년부터 1022년까지 이어진 동로마 제국과 조지아 왕국 사이의 전쟁이다. 조지아의 젊은 왕 게오르게 1세는 1014년, 과거 다비드 쿠로팔라테스 사후 동로마 제국에 넘어간 영토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타오와 파시아네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불가리아 제국과의 오랜 전쟁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초기에는 조지아의 공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1018년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한 후, 바실리오스 2세는 조지아를 향해 대규모 군사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021년 가을, 바실리오스 2세는 바랑인 근위대를 포함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직접 조지아를 침공했다. 여러 전투 끝에 1021년 시림니 전투에서 동로마 군대가 큰 피해를 감수하며 승리했고, 1022년 봄 스빈닥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게오르게 1세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평화 조약을 통해 타오, 파시아네, 콜라, 아르다한, 자바케티 등 상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할양하고, 자신의 어린 아들 바그라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궁정에 인질로 보내야 했다. 이 전쟁의 구체적인 전개 과정은 하위 문단에서 상세히 다룬다.
3. 1. 조지 1세의 선제 공격
야심만만한 젊은 조지 1세는 다비드 쿠로팔라테스 사후 동로마 제국에 넘어간 영토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원정을 시작했다. 1014년부터 1016년 사이에 그는 타오와 파시아네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또한, 조지 1세는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파조 통치자 알-하킴과 동맹을 맺었다. 이는 당시 불가리아 제국과의 전쟁에 주력하고 있던 동로마 황제 바실 2세를 곤란한 상황에 빠뜨렸고, 조지아의 공세에 즉각적으로 강력히 대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동로마는 군대를 보내 조지아군을 격퇴하려 했으나 오히려 패배하기도 했다. 다만 동로마 해군은 조지아 영토 북서쪽 후방의 하자르족 항구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018년, 바실 2세가 마침내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동맹이었던 알-하킴마저 사망하자 상황이 변했다. 바실 2세는 조지아를 향해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설 준비를 시작했다. 테오도시오폴리스를 재요새화하는 등 대규모 원정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1021년 가을, 바실 2세는 바랑인 근위대까지 동원하여 강화된 대규모 동로마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와 그 동맹인 아르메니아를 공격했다. 동로마 군대는 파시아네 지역을 되찾고 타오 국경을 넘어 조지아 내부로 깊숙이 진격했다. 조지 1세 왕은 올티시가 적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도시를 불태우고 콜라로 후퇴했다. 1021년 9월 11일, 팔라카지오 호수(현재 터키 칠디르 호) 근처 시림니 마을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매우 치열했으며,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동로마 제국은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승리했고, 조지 1세는 북쪽의 자기 왕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바실 2세는 조지아 영토를 약탈하며 트레비존드로 물러나 겨울을 보냈다.
분쟁 해결을 위한 협상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 사이 조지 1세는 카케티로부터 지원군을 받아 군대를 보강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 후방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한 동로마 지휘관 니케포로스 포카스 및 니케포로스 시피아스와 동맹을 맺으려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1021년 12월, 조지 1세의 동맹이었던 바스푸라칸의 아르메니아 왕 세네케림이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에 시달리다 결국 자신의 왕국을 동로마 황제에게 넘겨주면서 조지아는 더욱 고립되었다.
1022년 봄, 바실 2세는 최종 공세를 시작하여 스빈닥스에서 조지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위협을 받게 된 조지 1세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 조약에 따라 조지 1세는 타오, 파시아네, 콜라, 아르탄, 자바헤티 지역을 동로마 제국에 넘겨주어야 했으며, 어린 아들 바그라트를 바실 2세에게 인질로 보내야 했다.
3. 2. 바실리오스 2세의 반격
게오르게 1세는 1014년 타오와 파시안 지역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이는 과거 다비드 쿠로팔라테스 사후 동로마 제국에 귀속되었던 영토의 계승권을 주장하는 행보였다. 게오르게 1세는 또한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파조 통치자 알-하킴과 동맹을 맺어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당시 바실리오스 2세 황제는 제1차 불가리아 제국과의 오랜 전쟁에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지아의 공세에 즉각적으로 강력하게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1018년, 동로마 제국이 마침내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고, 게오르게 1세의 동맹이었던 알-하킴마저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조지아를 향해 군사력을 집중할 여유를 확보했고,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테오도시오폴리스(현재의 에르주룸)를 재요새화하며 군사 작전의 기반을 다졌다.
1021년 가을, 바실리오스 2세는 바랑기아 친위대까지 포함된 대규모 동로마 군대를 이끌고 직접 조지아를 침공했다. 동로마 군대는 먼저 파시안 지역을 되찾고, 타오 국경을 넘어 조지아 내륙 깊숙이 진격했다. 게오르게 1세는 동로마 군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올티시 마을을 불태우는 청야 전술을 사용하며 콜라 지역으로 후퇴했다.
같은 해 9월 11일 (혹은 11월 9일[1][2]), 팔라카치오 호수(현재 터키의 칠디르 호수) 인근 시림니 마을 근처에서 양측 군대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동로마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승리했고, 게오르게 1세는 북쪽의 본국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승리 후 트라브존으로 이동하여 겨울을 나면서 점령지를 약탈했다.
전투 이후 양측 간에 협상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결렬되었다. 그 사이 게오르게 1세는 카헤티로부터 지원군을 확보하고, 동로마 제국 내부의 반란 세력인 니케포로스 포카스와 니케포로스 크시피아스와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조지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021년 12월, 게오르게 1세의 동맹이었던 바스푸라칸 왕국의 세네케림 왕은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왕국을 동로마 제국에 넘겨주었다.
1022년 봄, 바실리오스 2세는 조지아에 대한 최종 공세를 감행하여 스빈닥스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압박을 받게 된 게오르게 1세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 조약에 따라 조지아는 타오, 파시안, 콜라, 아르다한, 자바케티 등 많은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할양해야 했으며, 게오르게 1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인 바그라트를 인질로 바실리오스 2세에게 보내야 했다.
3. 3. 협상 결렬과 전쟁 재개
시림니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우스 2세 황제는 트레비존드에서 겨울을 보내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양측은 분쟁 해결을 위해 협상을 시도했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이 기간 동안 조지 1세는 카헤티로부터 지원군을 받아 군사력을 보강하려 했다. 또한, 동로마 제국 내부에서 니케포로스 포카스와 니케포로스 시피아스 등이 일으켰다가 실패한 반란 세력과 연대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1021년 12월, 조지아의 주요 동맹이었던 아르메니아의 바스푸라칸 왕국의 세네케림 왕이 셀주크 투르크의 계속되는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왕국을 동로마 제국에 넘겨주면서, 조지아는 외교적으로 더욱 고립되었다.
1022년 봄, 바실리우스 2세는 조지아에 대한 총공세를 재개했다. 동로마 군대는 스빈닥스 전투에서 조지아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강력한 압박을 받게 된 조지 1세는 결국 항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평화 조약의 결과, 조지아는 타오, 파시안, 콜라, 아르탄, 자바케티 등 주요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할양해야 했다. 또한, 조지 1세는 자신의 어린 아들인 바그라트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로마 궁정에 인질로 보내야만 했다.
3. 4. 스빈닥스 전투와 조약 체결
시림니 전투 이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값비싼 승리를 거두었으나, 조지아의 게오르게 1세는 북쪽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바실리오스는 트라브존에서 겨울을 보내며 주변 지역을 약탈했고, 양측 간의 평화 협상 시도는 결렬되었다.
이 기간 동안 게오르게 1세는 카케티로부터 지원군을 확보하고, 동로마 제국 내부의 반란을 시도했던 사령관 니케포로스 포카스와 니케포로스 시피아스와 접촉하며 반격을 모색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세는 조지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021년 12월, 게오르게 1세의 주요 동맹이었던 바스푸라칸의 아르메니아 왕 세네케림은 동쪽에서 셀주크 투르크의 압박이 거세지자 결국 자신의 왕국을 동로마 제국에 넘겨주었다.
1022년 봄, 바실리오스 2세는 조지아에 대한 최종 공세를 개시했다. 스빈닥스 전투에서 동로마 군대는 조지아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바다 양면에서 가해지는 압박을 견디지 못한 게오르게 1세는 결국 평화 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조약에 따라 조지아는 타오, 파시안, 괴레, 아르다한, 자바헤티 등 상당한 영토를 동로마 제국에 할양해야 했으며, 어린 아들인 바그라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인질로 삼도록 했다.
4. 동로마-조지아 전쟁 (1028년)
1027년 조지아의 바그라트 4세가 부친 기오르기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즉위 직후부터 내부 반란과 외부 세력의 개입이라는 도전에 직면했다. 바그라트 4세의 먼 사촌인 데메트레 (클라르제티의 구르겐의 아들)를 중심으로 한 일부 귀족 세력은 그의 통치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1010년대 초 바그라트 3세에게 상속 영지인 아르다누치를 빼앗긴 데메트레를 지지하며, 1028년 동로마 제국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1]
이에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8세 황제는 데메트레를 지원하기 위해 동로마 군대를 파견했다. 동로마 군대는 조지아 국경을 넘어 트리알레티 지방의 주요 요새인 클데카리를 포위 공격했으나 점령에는 실패하고 샵셰티 지역으로 물러났다. 이 과정에서 트베티의 지방 주교였던 사바는 동로마 군대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냈다.[1]
콘스탄티누스 8세는 군사적 압박과 함께, 망명 중이던 또 다른 조지아 왕족 데메트레를 내세워 조지아 왕위를 차지하려 시도했다. 이 망명 왕자는 많은 이들에게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로 여겨졌기에, 그의 등장은 바그라트 4세와 그의 섭정인 어머니 마리암 여왕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그러나 1028년, 콘스탄티누스 8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동로마의 조지아 침공은 중단되었다. 새로운 황제 로마누스 3세는 조지아에 파견되었던 군대를 철수시켰고, 이로써 1028년의 동로마-조지아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4. 1. 데메트레의 반란과 동로마 제국의 개입
조지아의 바그라트 4세는 부친 기오르기 1세가 사망한 1027년에 왕위를 계승했다. 그러나 즉위 직후부터 내부 반란과 외부 세력의 개입에 직면해야 했다. 바그라트 4세의 먼 사촌인 데메트레 (클라르제티의 구르겐의 아들)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귀족 세력은 바그라트 4세의 통치권 인정을 거부했다. 데메트레는 1010년대 초 바그라트 3세에 의해 자신의 세습 영지였던 아르다누치를 빼앗긴 인물이었다. 이들 반대파 귀족들은 1028년 동로마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군사적 개입을 유도했다.[1]이에 콘스탄티누스 8세 황제는 데메트레를 지원하고 아르다누치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동로마 군대는 조지아 국경을 넘어 트리알레티 지방의 주요 요새인 클데카리를 포위했으나 점령에 실패하고 샵셰티 지역으로 후퇴했다. 당시 트베티의 지방 주교였던 사바는 동로마 군대의 약탈로부터 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그들의 전술 변경을 강요했다.[1]
콘스탄티누스 8세는 군사적 압박과 더불어, 망명 중이던 조지아 왕자 데메트레를 내세워 조지아 왕위를 강제로 차지하려 시도했다. 이 망명 왕자는 일부 세력에게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었으며, 그의 등장은 바그라트 4세와 그의 섭정이자 모후인 바스푸라칸의 마리암 여왕에 대항하는 새로운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1028년 콘스탄티누스 8세가 사망하고 로마누스 3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면서 동로마의 조지아 침공은 일단 중단되었고, 로마누스 3세는 조지아에 파견했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상황이 변하자 마리암 여왕은 1029년 또는 1030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직접 방문하여 로마누스 3세와 평화 협상을 벌였다. 협상 결과, 1032년 마리암 여왕은 바그라트 4세를 위한 동로마 제국의 고위 작위인 쿠로팔라테스 칭호와 함께, 로마누스 3세의 조카딸인 헬레나 공주를 바그라트 4세의 아내로 맞이하여 조지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040년대 초, 봉건 귀족 세력은 글데카리의 리파리트 4세 공작을 중심으로 다시 바그라트 4세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또다시 동로마 제국에 원조를 요청하고 망명 왕자 데메트레를 왕으로 옹립하려 시도했다. 반란군은 중요 요새인 아테니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동로마 군대의 지원을 받아 벌어진 사시레티 전투에서 바그라트 4세의 군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패배로 바그라트 4세는 조지아 서부 산악 지대로 피신해야만 했다.
궁지에 몰린 바그라트 4세는 콘스탄티노플로 건너가 동로마 황실과 3년에 걸친 협상을 벌였다. 결국 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자신의 복위에 대한 승인을 얻어냈고, 1051년 조지아로 귀환하여 반란의 주동자인 리파리트 4세를 체포하고 추방했다. 이로써 바그라트 4세의 왕권은 다시 공고해졌으며, 오랜 기간 지속된 동로마 제국과의 군사적 충돌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4. 2. 콘스탄티누스 8세의 사망과 전쟁 종결
조지아의 바그라트 4세가 1027년 왕위에 오르자, 그의 먼 사촌인 데메트레(클라르제티의 구르겐의 아들)를 중심으로 한 일부 조지아 귀족들은 그의 종주권 인정을 거부했다. 이들은 1010년대 초 바그라트 3세에 의해 상속 영지인 아르다누치를 잃었던 데메트레를 지지하며 1028년 동로마에 도움을 요청했다.[1]이에 콘스탄티누스 8세 황제는 데메트레를 지원하기 위해 동로마 군대를 파견했다. 동로마 군대는 조지아 국경 지대를 넘어 트리알레티 지방의 주요 요새인 클데카리를 포위했으나 점령에는 실패하고 샵셰티 지역으로 후퇴했다. 이 과정에서 트베티의 지방 주교 사바는 동로마 군대로부터 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그들의 전술 변경을 강요했다.
콘스탄티누스 8세는 또한 많은 이들에게 왕위의 정당한 주장자로 여겨지던 망명한 조지아 왕자 데메트레를 보내 조지아 왕위를 강제로 차지하게 하려 했다. 이는 바그라트 4세와 그의 섭정인 미망인 여왕 마리암(바스푸라칸) 여왕에 대항하는 새로운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1028년 콘스탄티누스 8세가 사망하고 새로운 황제 로마누스 3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로마누스 3세는 조지아에 파견된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에 마리암 여왕은 1030년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로마누스 3세와 평화 협정을 교섭했다. 협상 결과, 1032년 바그라트 4세는 동로마 제국의 고위 작위인 쿠로팔라테스 칭호를 받았고, 마리암은 동로마 공주 헬레나를 바그라트의 아내로 데리고 조지아로 돌아왔다.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040년대 초, 글데카리의 리파리트 4세 공작이 이끄는 봉건 반대 세력이 바그라트 4세에 대항하여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동로마의 원조를 요청하며 데메트리우스 왕자를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 비록 주요 요새인 아테니 점령에는 실패했지만, 반란군과 동로마 연합군은 1042년 사시레티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패배로 바그라트 4세는 조지아 서부 산악 지대로 피신해야 했다.
바그라트 4세는 곧바로 콘스탄티노플로 가서 동로마 황실과 3년에 걸친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자신의 복위를 위한 승인을 얻어냈다. 1051년 조지아로 돌아온 그는 반란 주동자 리파리트를 추방했다. 이로써 길었던 동로마-조지아 간의 충돌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5. 조지아 내전
조지아의 바그라트 4세가 1027년 왕위에 오르자, 그의 먼 사촌인 데메트레를 중심으로 한 일부 귀족 세력은 왕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1028년 동로마 군대를 끌어들여 내전을 일으켰다. 동로마 군대는 조지아 국경 지대를 침공하여 크리알레티 지역의 중요 요새인 클데카리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하고 후퇴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8세 황제는 추방된 조지아 왕자 데메트리우스를 보내 왕위를 차지하려 했고, 이는 바그라트 4세와 섭정이었던 어머니 바스푸라칸의 마리암에 대한 반란 세력을 더욱 부추겼다.
1028년 콘스탄티누스 8세가 사망하고 로마누스 3세가 새로운 황제가 되자, 그는 조지아에 파견했던 군대를 철수시켰다. 마리암 여왕은 1029년 또는 1030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로마누스 3세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1040년대 초, 클데카리 공작 리파리트 4세가 이끄는 봉건 귀족 세력이 다시 바그라트 4세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동로마의 지원을 요청하며 데메트리우스 왕자를 왕으로 내세우려 했다. 반란군은 초기에 사시레티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우세를 보였으나, 결국 바그라트 4세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확보하여 1051년 조지아로 복귀했고, 반란의 주동자였던 리파리트를 제압하고 유형에 처했다. 이로써 동로마 제국이 개입했던 조지아 내전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5. 1. 아나코피아의 데메트리오스 반란

1033년, 조지아 왕실은 또 다른 왕위 계승 문제에 직면했다. 이번에는 바그라트 4세의 이복동생인 아나코피아의 데메트리오스가 관련된 문제였다. 데메트리오스는 선왕 조지 1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알라니아의 알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데메트리오스와 알다는 압하스의 요새인 아나코피아에 거주했는데, 이곳은 조지 1세가 그들에게 물려준 곳이었다. 바그라트의 어머니 바스푸라칸의 마리암은 데메트리오스가 바그라트의 왕위에 충성하도록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알다는 비잔틴 제국으로 망명하여 1033년에 아나코피아를 로마노스 3세 아르기루스 황제에게 넘겨주었고,[2] 황제는 데메트리오스에게 ''관방장관''(magistros|마기스트로스lat) 지위를 부여했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바그라트 국왕은 반대 세력을 격파한 후 아나코피아를 포위했으며, 이후 오타고 차차스제와 그의 군대를 남겨 요새를 관리하게 하고 돌아갔다.
5. 2. 클데카리의 리파리트 4세 반란
1038년, 클데카리 공작 립아리트 4세는 수 세기 동안 무슬림의 지배하에 있던 조지아 도시 트빌리시를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다른 조지아 귀족들은 이 계획을 좌절시키고, 조지아의 바그라트 4세 왕에게 트빌리시 토후와 평화 조약을 맺도록 설득했다. 이 일로 리파리트는 바그라트 4세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그의 적이 되었으며, 복수를 위해 외세와 적극적으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1039년, 그는 동로마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로 돌아와, 왕위를 찬탈하려던 바그라트 4세의 이복 형제 아나코피아의 데메트리오스를 지원하며 반란을 일으켰다.[3]반란군은 요새 아테니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차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리파리트와 동로마 연합군은 사시레티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이 전투에서 참패한 바그라트 4세는 동부 영토에서 물러나 서부 조지아의 고지대로 피신해야 했다.[3] 그러나 1042년, 반란군이 내세웠던 데메트리오스가 예상치 못하게 사망했다. 데메트리오스의 아내 알다와 그의 아들 다비드는 그녀의 고향인 알라니아로 도망쳤다. 그럼에도 리파리트는 바그라트 4세에 대한 투쟁을 계속했으며, 이 지역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위한 주요 옹호자가 되었다.[3]
바그라트 4세는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동로마의 중재를 통해 리파리트가 왕에게 충성하는 신하로서 왕국의 거의 절반(므트크바리 강 남쪽의 트리아레티, 아르그베티, 하 이베리아, 상 이베리아)을 받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로써 1045년부터 1048년까지, 리파리트 4세는 이 지역들의 공작이자 조지아의 콘스타블(군 총사령관)로서 왕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아랍 연대기 작가 이븐 알-아시르가 그를 "압하지아인(즉, 조지아인)의 왕"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동로마 측 기록에서 '리파리테스'라고 불린 리파리트는 동시에 권위 있는 마기스트로스(그리고 아마도 쿠로팔라테스)라는 동로마 제국의 고위 관직도 가지고 있었다.[4][5]
1048년, 아나톨리아에서 벌어진 셀주크 투르크의 침공 동안, 동로마 측에서 싸우던 리파리트는 카페트론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바그라트 4세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동부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리파리트가 1049년 또는 1051년에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자 왕의 운명은 다시 한번 위태로워졌다.[6] 반란을 일으킨 공작은 바그라트 4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망가게 만들었고, 리파리트의 계략으로 인해 바그라트는 3년 동안(1050–1053) 그곳에 갇혀 있어야 했다. 바그라트 4세가 부재한 동안, 리파리트는 조지아의 실질적인 통치자였으며, 심지어 바그라트의 어린 아들 조지 2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자신이 섭정임을 선언했다. 1053년 바그라트 4세가 돌아온 후, 리파리트는 다시 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1060년,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체포되어 왕에게 항복했고, 왕은 그를 안톤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원에 가두었다. 리파리트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조지아 카츠키 수도원에 있는 그의 가문 수도원에 다시 안치되었다.[3]
5. 3. 바그라트 4세의 복위와 리파리트 4세의 몰락
1038년, 클데카리 공작 리파리트 4세는 오랫동안 무슬림 세력 하에 있던 트빌리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그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다른 조지아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귀족들은 조지아의 바그라트 4세 왕을 설득하여 트빌리시 토후와 평화 조약을 맺게 했고, 이 일로 리파리트는 바그라트 4세에게 깊은 반감을 품고 외세와 협력하여 복수를 꾀하게 되었다.[3]
1039년, 리파리트는 동로마 군대를 조지아로 끌어들여 왕위를 노리던 바그라트 4세의 이복 형제 아나코피아의 데메트리오스를 지원하며 반란을 일으켰다.[3] 비록 반란군이 중요 요새인 아테니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리파리트와 동로마 연합군은 사시레티 전투에서 왕실 군대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패배로 바그라트 4세는 조지아 동부 영토를 내주고 서부 산악 지대로 피신해야만 했다.[3]
그러나 1042년, 데메트리오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다비드는 어머니 알다와 함께 알라니아로 도피했다. 데메트리오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리파리트는 바그라트 4세에 대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조지아 내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대변하는 주요 인물로 활동했다.[3]
바그라트 4세는 동로마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동로마의 중재를 통해 리파리트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므트크바리 강 남쪽의 조지아 영토 절반(트리아레티, 아르그베티, 하 카르틀리, 상 이베리아)을 다스리는 권한을 인정받았다. 이로써 1045년부터 1048년까지 리파리트 4세는 조지아의 콘스타블이자 왕국 내 가장 강력한 실력자로 부상했다. 아랍 역사가 이븐 알-아시르는 그를 "압하지아인(조지아인)의 왕"이라고 칭했으며, 동로마 측 기록에서도 그는 '리파리테스'로 불리며 마기스트로스 및 쿠로팔라테스라는 높은 직위를 가진 동로마 고위 관리로 대우받았다.[4][5]
1048년, 아나톨리아에서 벌어진 셀주크 투르크와의 카페트론 전투에서 동로마군 편에서 싸우던 리파리트가 포로로 잡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그라트 4세는 이 기회를 틈타 동부 영토를 되찾으려 시도했다. 그러나 리파리트가 1049년 혹은 1051년에 포로 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오면서[6] 상황은 다시 리파리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귀환한 리파리트는 다시 반란을 일으켜 바그라트 4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몰아냈다. 바그라트 4세는 리파리트의 계략에 휘말려 3년(1050년–1053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발이 묶였다. 바그라트 4세가 없는 동안 리파리트는 조지아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으며, 바그라트 4세의 어린 아들 조지 2세를 왕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섭정이 되었다.
1053년, 바그라트 4세가 마침내 조지아로 돌아오자 리파리트와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오랜 갈등 끝에 1060년, 리파리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배신당하여 체포되었고, 바그라트 4세에게 넘겨졌다. 왕은 그를 안톤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원에 가두었다. 리파리트는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조지아 카츠키에 있는 가문 수도원에 안치되었다.[3] 리파리트의 몰락으로 길었던 동로마-조지아 간의 충돌은 사실상 마무리되었다.
6. 트라페준타 제국 건립과 조지아의 영향력
비잔틴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과 내부 혼란으로 약화되는 동안, 조지아 왕국은 독립을 유지하며 국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1204년, 비잔틴 황제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가 조지아의 타마르 여왕이 아토스 산의 수도원에 보낸 기부금을 몰수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타마르 여왕은 이를 명분 삼아 조지아계 주민들이 거주하던 흑해 남동부 연안으로의 군사적 확장을 결정했다.[7]
이러한 조지아의 움직임은 마침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진격하며 비잔틴 제국을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던 시기와 맞물려 진행되었다. 타마르 여왕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알렉시오스 콤네노스와 다비드 콤니노스가 이끄는 조지아 군대를 보내 1204년 4월, 트레비존드를 점령했다.[8] 같은 달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되고 라틴 제국이 세워지면서 비잔틴 제국은 사실상 분열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조지아 군대가 점령한 트레비존드와 그 주변 지역에는 알렉시오스와 다비드 콤네노스를 중심으로 트레비존드 제국이 건국되었다. 알렉시오스는 황제가 되었고, 다비드는 군사 지휘관인 스트라테고스를 맡았다. 일부 학자들은 트레비존드 제국이 건국 초기에는 조지아의 영향력 아래 있었거나 사실상 종속국이었을 것으로 본다.[9]
타마르 여왕은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한 국제 정세의 변화와 비잔틴 제국의 약화를 이용하여 성공적인 군사 작전을 펼쳤다. 이를 통해 조지아는 흑해 연안에 영향력을 확보하고 트레비존드 제국이라는 새로운 기독교 국가의 건립을 지원함으로써, 당시 가장 강력한 기독교 왕국 중 하나로 부상하며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였다.
6. 1. 제4차 십자군과 트라페준타 제국 건립

바실리 2세에게 일부 영토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아 왕들은 독립을 지키며 대부분의 조지아 영토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비잔틴 제국에 넘어갔던 많은 영토는 1070년대와 1080년대에 셀주크 투르크에게 정복당했다. 이후 조지아는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가 셀주크에게 참패한 직후 해당 지역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비잔틴 총독 그리고리 파쿠리아노스의 도움으로 이베리아 테마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지 2세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받고 카르스 요새를 하사받아 제국 동쪽 국경 방어를 담당하게 되었다.
두 기독교 왕국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평화로웠으나, 1204년 당시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가 조지아의 섭정 타마르 여왕이 아토스 산의 수도승들을 위해 보낸 상당한 기부금을 몰수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 행동에 분노한 타마르 여왕은 이를 흑해 남서부 해안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이 지역에는 조지아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7]
타마르 여왕의 이러한 움직임은 마침 비잔틴 제국을 분열시키고 있던 제4차 십자군의 상황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알렉시우스 콤네노스와 다비드 콤네노스가 이끄는 조지아 군대는 1204년 3월 말 또는 4월 초에 동쪽에서 비잔틴 제국을 공격했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이 원정은 8일이 걸렸으며 라조나를 거쳐 트레비존드에 도착하여 4월에 도시를 점령했다. 당시 트레비존드의 지역 사령관이었던 두스 니케포로스 팔레올로고스는 조지아 군대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8]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십자군에게 함락되었고, 십자군은 그 자리에 라틴 제국을 세웠다. 중세 기록에 따르면, 조지아가 새롭게 점령한 영토는 알렉시우스와 다비드 콤네노스에게 주어졌고, 이들은 조지아의 지원을 받는 트라페준타 제국을 건국했다. 알렉시우스는 황제로 선포되었고, 다비드는 군사 지휘관인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트라페준타 제국이 건국 초기, 적어도 13세기 초에는 조지아에 종속된 상태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9]
이후 몇 년 동안 다비드 콤네노스는 조지아 군대를 이끌고 트레비존드와 헤라클레아 폰티카 사이의 영토를 성공적으로 정복했다. 한편 알렉시우스 콤네노스는 셀주크 세력을 물리치고 아미소스, 시노페, 오이나이온, 칼리비아 등의 도시를 되찾았다.
타마르 여왕은 제4차 십자군이라는 국제 정세 변화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약화된 비잔틴 제국의 상황을 이용하여 군사 작전을 펼침으로써 조지아 왕국의 영향력과 조공국의 수를 크게 늘렸다. 이를 통해 당시 조지아는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국가 중 하나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6. 2. 조지아-트라페준타 관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바실리 2세에게 일부 영토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아 왕국의 왕들은 독립을 지키며 대부분의 조지아 영토를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비잔틴 제국에 넘어갔던 많은 영토는 1070년대에서 1080년대 사이에 셀주크 투르크에게 정복당했다.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 군대가 셀주크에게 큰 패배를 당한 직후, 비잔틴 총독 그리고리 파쿠리아노스의 도움으로 조지아는 이베리아 테마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셀주크 군대는 이 지역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지 2세는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카이사르'' 칭호를 받았고, 카르스 요새를 하사받아 제국 동쪽 국경 방어를 책임지게 되었다.
두 기독교 국가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지만, 1204년에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가 조지아의 섭정 여왕 타마르가 아토스 산의 수도승들을 위해 보낸 상당한 기부금을 몰수한 것이다. 이 행동에 격분한 타마르 여왕은 이를 흑해 남서부 해안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구실로 삼았다. 이 지역에는 조지아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7]
타마르 여왕의 이러한 움직임은 때마침 진행 중이던 제4차 십자군으로 인해 힘을 얻었다. 제4차 십자군은 결과적으로 비잔틴 제국을 분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204년 3월 말 또는 4월 초, 알렉시우스 1세 콤네노스와 다비드 콤네노스 형제가 이끄는 조지아 군대는 동쪽에서 비잔틴 제국을 공격했다.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이 원정은 8일이 걸렸으며 라조나를 거쳐 트레비존드에 도착하여 4월에 도시를 점령했다. 당시 트레비존드의 지역 사령관이었던 니케포로스 팔레올로고스는 조지아 군대에 효과적으로 맞서지 못했다.[8]
1204년 4월 13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되었고, 십자군은 그곳에 라틴 제국을 세웠다. 중세 기록에 따르면, 조지아 군대가 새롭게 점령한 영토는 알렉시우스와 다비드 콤네노스에게 주어졌고, 이들은 조지아의 지원을 받는 트레비존드 제국을 건국했다. 알렉시우스는 황제로 즉위했고, 다비드는 군사령관 격인 스트라테고스로 임명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트레비존드 제국이 건국 초기, 적어도 13세기 초에는 조지아에 종속된 상태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9]
이후 몇 년 동안 다비드 콤네노스는 조지아 군대를 이끌고 트레비존드와 헤라클레이아 폰티카 사이의 영토를 성공적으로 정복했다. 한편 알렉시우스 1세는 셀주크 군대를 격파하고 아미소스, 시노페, 오이나이온 및 칼리비아(Chalybia) 지역을 되찾았다.
타마르 여왕의 제4차 십자군에 대한 정치적 개입, 비잔틴 제국의 쇠퇴를 이용한 전략, 그리고 성공적인 군사 작전은 조지아 왕국의 영향력과 조공국의 수를 크게 늘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로써 타마르 시대의 조지아는 당대 가장 강력한 기독교 국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7. 결론 및 의의
바실리오스 2세에게 영토를 일부 잃었지만, 조지아의 왕들은 독립을 지키며 대부분의 조지아 영토를 하나의 왕국으로 통일하는 과업을 이어갔다. 1070년대와 1080년대에는 셀주크 투르크의 침입으로 상당한 영토를 빼앗기기도 했으나, 다비트 4세 왕이 이를 다시 되찾았다. 이후 두 기독교 왕국 사이의 관계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다만 1204년, 타마르 여왕이 제4차 십자군으로 혼란해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황을 이용하여 콤네누스 가문이 트라페주스 제국을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해 흑해 연안 속국에 군대를 보낸 일은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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