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로베르 기스카르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로베르 기스카르는 11세기 이탈리아 남부에서 활약한 노르만족 출신 군인으로, "기략가"라는 뜻의 별명 "기스카르"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오트빌 가문 출신으로, 1047년 이탈리아에 도착하여 용병으로 활동하다가 아풀리아 백작이 되었고, 1059년 교황 니콜라오 2세로부터 아풀리아, 시칠리아,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과 사라센의 지배를 받던 지역을 정복할 명분을 얻었으며,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그는 동로마 제국을 침공하여 두라초 전투에서 승리하기도 했으나, 교황을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를 약탈하기도 했다. 로베르는 1085년 케팔로니아 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사후 아들 로제르 보르사가 공작위를 상속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노르만인 용병 - 에르베 프랑코포울로스
    에르베 프랑코포울로스는 11세기 비잔틴 제국의 군인이자 반란 지도자로, 마기스트로스 직함 요구 거절 후 노르만족 용병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후 화해하여 고위직을 맡았지만 투르크족 뇌물 혐의로 처형되었으며, 후기 프랑코풀로스 가문의 창시자로 추정된다.
  • 1015년 출생 - 하랄드 3세 하르드라디
    하랄 3세 하르드라디는 '결단력 있는 자'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11세기 노르웨이 왕으로, 키예프 루스와 비잔티움 제국에서 군사 경험을 쌓고 국내 반대 세력을 진압하며 왕국을 강화했으나, 1066년 잉글랜드 침공 중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전사하여 바이킹 시대의 종말을 가져왔다고 여겨진다.
  • 1015년 출생 - 언드라시 1세
    언드라시 1세는 1046년부터 1060년까지 헝가리를 통치한 국왕으로, 이교도 반란을 통해 왕위에 오른 후 기독교 질서를 회복하려 노력했으나, 헝가리 왕위 계승 문제로 인해 동생과의 다툼 끝에 사망했다.
  • 1085년 사망 - 곽희
    북송 시대 화가 곽희는 신종의 총애를 받으며 독창적인 화법으로 웅장하고 깊이 있는 산수화를 그렸고, 이곽파를 형성하여 중국 산수화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신종 사후에는 잊혀졌다.
  • 1085년 사망 - 정호
    정호는 북송 시대의 유학자로서 동생 정이와 함께 '이정'으로 불리며 신유학의 선구자로 여겨지고, 인을 중심 사상으로 성경의 마음가짐을 강조하며 우주의 이치를 직관적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후대 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로베르 기스카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로베르 기스카르가 교황 니콜라오 2세에 의해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임명됨
로베르 기스카르가 교황 니콜라오 2세에 의해 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으로 임명됨
작위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공작
통치 기간1059년 8월 23일 – 1085년 7월 17일
이전 통치자신설 작위
후임 통치자로저 보르사
작위1풀리아와 칼라브리아의 백작
통치 기간11057년 8월 – 1059년 8월 23일
이전 통치자1옹프루아 드 오트빌
작위2시칠리아의 군주
통치 기간21059년 8월 23일에 서임됨
후임 통치자2로저 1세 (백작으로서)
작위3베네벤토 공
통치 기간31078년 - 1081년
이전 통치자3란돌프 6세
후임 통치자3작위 소멸
배우자알베라다 디 부오날베르고
시켈가이타
가문오트빌 가
가문 유형귀족 가문
아버지탕크레드 드 오트빌
어머니프레센다
출생일대략 1015년
출생지오트빌라기샤르 또는 코탕탱, 노르망디 어딘가
사망일1085년 7월 17일
사망지케팔로니아
매장지베노사의 산티시마 트리니타 수도원
종교가톨릭
이름
별칭교활공 ()
타란토 공작
재위 기간1080년–1085년
전임자피에르 (섭정)
후임자보에몽 1세

2. 이름

로베르의 별명인 "기스카르"(당시 라틴어 Viscardusla 및 고대 프랑스어 Viscartfro, 영어 고어 wiseacre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는 종종 "기략가", "교활한 자", "능수능란한 자", "여우", 또는 "족제비"로 번역된다. 이탈리아 자료에서는 그를 Roberto il Guiscardo|로베르토 일 구이스카르도it 또는 Roberto d'Altavilla|로베르토 달타빌라it(로베르 기스카르와 로베르 드 오트빌을 의미함)로 부르는 반면, 중세 아랍어 자료에서는 그를 간단히 Abārt al-dūqa|아바르트 알두카ar(로베르 공작)로 부른다.[2]

3. 역사적 배경

999년부터 1042년까지, 여러 노르망인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용병으로 활동하며 비잔티움 제국과 여러 롬바르드 귀족들을 섬겼다.[3] 최초로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한 노르망 귀족은 라인울프 드랭고였다. 그는 아베르사 요새에 자리를 잡고 아베르사 백작이자 가에타 공작이 되었다.[4]

1038년, 로베르 기스카르의 형제들인 기욤 드 푸아티에와 드로고 드 오트빌이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이들은 탱크레드 드 오트빌(노르망디 코탕탱 반도의 오트빌-라-기샤르 영주)의 장남들이었다.[5] 두 형제는 롬바르드인들이 시작한 아풀리아에서의 비잔티움 제국 지배에 대한 반란에 가담했다. 1040년경 비잔티움 제국은 아풀리아 지방의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1042년, 노르망인들은 멜피를 수도로 삼아 아풀리아에 정착했다. 같은 해 9월, 노르망인들은 기욤 드 푸아티에를 백작으로 선출했다. 기욤의 뒤를 이어 그의 형제인 드로고 드 오트빌(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전역의 노르망인 백작, comes Normannorum totius Apuliæ e Calabriæ|콤스 노르만노룸 토티우스 아풀리아이 에 칼라브리아이lat)이 백작위를 계승했고, 그 다음으로는 1044년경 도착한 또 다른 형제 움베르토 드 오트빌이 뒤를 이었다.[2]

4. 생애

노르망디오트빌(Hauteville) 가문 출신인 탕크레드의 아들로, 루제루 1세의 형이다. 탕크레드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중 로베르를 포함한 여덟 명의 아들이 11세기 중반 이탈리아로 건너가 남부 이탈리아 정복에 참여했다.

1057년 아풀리아 백작이 되었으며, 1059년 형 윙프레가 사망한 후에는 교황 니콜라오 2세로부터 아풀리아, 시칠리아, 칼라브리아의 공작으로 임명받았다.[28][29] 당시 이 지역들은 비잔티움 제국과 사라센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교황의 임명은 로베르에게 정복의 명분을 주었다.

이후 로베르는 1060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대부분을 빼앗았다. 1061년에는 동생 루지에로와 함께 시칠리아를 침공하여 메시나를 점령하고, 시칠리아 정복의 발판을 마련했다. 1071년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이탈리아 거점인 바리를 정복했으며, 이듬해 팔레르모를 함락시켜 시칠리아에서 사라센 세력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076년에는 롬바르드 왕국으로부터 살레르노를 빼앗아 자신의 공국 수도로 삼으며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지배권을 공고히 했다.

4. 1. 이탈리아 도착과 초기 활동

노르망디오트빌(Hauteville) 가문 출신인 탕크레드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로베르 기스카르는 1015년경 탕크레드와 그의 두 번째 아내 프레센다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번째 아들이며, 루제루 1세의 형이다. 탕크레드의 아들 중 다섯 명은 뛰어난 용병 지도자로 활약했으며, 11세기 중반에는 로베르를 포함한 여덟 명의 아들이 이탈리아로 건너가 남부 정복에 참여했다.

1047년, 로베르는 비잔티움 역사가 안나 콤네나의 기록에 따르면 기병 다섯 명과 보병 서른 명이라는 소규모 병력만을 이끌고 노르망디를 떠나[6][2][25] 남부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도착 초기에는 약탈자 무리를 이끄는 두목으로 활동했으며, 산적과 같은 생활을 했다.[6][2] 안나 콤네나는 기스카르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하지만 안나 콤네나는 1083년에 태어나고 로베르가 1085년에 사망했으므로, 이 묘사는 직접 본 것이 아니거나 노르만 용병 또는 로베르의 아들 안티오크의 보에몽에게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 "이 로베르는 출신은 노르망디였지만,[7] 기원은 미천했고, 거만한 성격과 철저히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8] 그는 용감한 전사였고, 위대한 사람들의 부와 권력을 공격하는 데 매우 교활했다.[9]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절대적으로 불굴의 의지를 가졌고,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비판을 피했다. 그는 키가 매우 컸고, 가장 큰 사람들보다도 컸다. 그는 불그스름한 안색, 금발, 넓은 어깨, 불꽃이 튀어나올 듯한 눈을 가졌다. 잘 생긴 사람에게는 여기는 넓고 저기는 가는 부분이 있지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놀랍도록 잘 비례하고 우아했다...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가 외칠 때 듣는 사람들이 난동을 부리는 군중의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로베르의 고함은 수만 명을 도망치게 했다고 한다."[6]

로베르가 아풀리아에 도착했을 때는 땅이 부족하여, 당시 백작이었던 형 오트빌의 드로고로부터 영지를 받기 어려웠다. 드로고는 이미 다른 형제인 오트빌의 험프리에게 라벨로 백작령을 준 상태였다. 1048년, 로베르는 카푸아의 판둘프 4세와 손잡고 살레르노의 과이마르 4세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다음 해, 연대기 작가 몬테카시노의 아마투스에 따르면 판둘프가 성과 자신의 딸과의 결혼을 약속하고 이를 지키지 않자 로베르는 그를 떠났다. 로베르는 다시 드로고에게 돌아가 영지를 요청했고, 칼라브리아에서 군사 작전을 마친 드로고는 그에게 스페차노 알바네세(Scribla) 요새의 지휘권을 맡겼다. 하지만 로베르는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산 마르코 아르젠타노 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칼라브리아에 머무는 동안 로베르는 부오날베르고의 알베라다와 결혼했는데, 이는 그녀의 조카 부오날베르고의 지라르가 결혼이 성사되면 기사 200명을 이끌고 로베르에게 합류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었다.[2]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족의 세력이 커지자 기존의 동맹이었던 롬바르드족이 반기를 들었다. 교황 레오 9세는 노르만족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몰아내기 위해 반 노르만 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1053년 벌어진 치비타테 전투에서, 당시 백작이 된 형 험프리가 이끄는 노르만군은 교황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로베르 역시 이 전투에 직접 참전했으며, 아풀리아의 윌리엄은 그가 전투 중 세 번이나 말에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매번 다시 일어나 싸웠다고 기록했다.[2]

4. 2. 아풀리아 백작과 멜피 조약

로베르 기스카르와 시켈가이타가 콘스탄티누스 아프리카누스를 맞이하는 모습


1057년 형 움베르토가 사망하자, 로베르 기스카르는 다른 형인 제프리를 제치고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백작이 되었다. 얼마 후인 1058년경, 기스카르는 첫 부인 알베라다와의 결혼을 혈족결혼을 이유로 파기하고, 살레르노의 기술프 2세의 누이인 시켈가이타와 결혼하였다. 이는 롬바르드족과의 새로운 동맹을 맺기 위한 전략적인 결정이었다. 기술프는 여동생과의 결혼 대가로 기스카르에게 자신의 영토 내에 있는 동생 윌리엄의 성 두 곳을 파괴해 달라고 요구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서임권 투쟁으로 갈등을 겪고 있던 교황청은 남부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노르만족을 동맹으로 삼으려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059년 8월 23일 멜피에서 교회회의가 열렸고, 이 기간 동안 멜피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로베르 기스카르는 교황 니콜라오 2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28][29] 그 대가로 교황은 기스카르에게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 및 시칠리아 영주("하느님과 성 베드로의 은총으로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 그리고 만약 나를 돕는다면 미래의 시칠리아 영주")의 칭호를 공식적으로 수여했다.[2][10]

당시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고, 시칠리아사라센(시칠리아 에미르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교황의 이러한 작위 수여는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 지역들을 정복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이는 기스카르가 합법적으로 남부 이탈리아의 비잔티움 제국 영토와 이슬람교 세력을 공격하고 정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중요한 사건이었다.

4. 3.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 정복

1057년 로베르는 아풀리아 백작위를 받았다. 1059년 형 윙프레가 사망한 후, 같은 해 8월 23일 멜피 교회회의에서 교황 니콜라오 2세는 로베르를 아풀리아, 시칠리아, 칼라브리아의 공작으로 임명했다.[28][29] 당시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고, 시칠리아는 사라센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에, 교황의 이러한 조치는 로베르에게 이 지역들을 정복할 합법적인 명분을 주었다.

멜피 조약 이후 로베르 기스카르는 동생인 로제르 1세의 도움을 받아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남부 이탈리아 정복 작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했다. 교황에게 작위를 받을 당시 로베르는 이미 비잔티움 제국군이 일부 점령하고 있던 칼라브리아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작위를 받은 후 칼라브리아로 돌아온 로베르는 카리아티(Cariati) 포위군에 합류했고, 그의 도착 소식에 카리아티는 항복했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로사노(Rossano)와 제라체(Gerace) 역시 항복했다. 로베르는 잠시 아풀리아로 돌아가 타란토(Taranto)와 브린디시(Brindisi)의 비잔티움 수비대를 몰아낸 뒤 다시 칼라브리아로 향했다. 칼라브리아에서는 길고 힘든 포위 공격 끝에 레조 칼라브리아(Reggio Calabria)를 정복했으며, 마지막으로 레조 수비대가 도망친 섬인 스킬라(Scilla, Calabria)까지 점령했다. 이로써 칼라브리아를 완전히 장악한 로베르는 시칠리아 정복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로베르의 발칸 반도 원정 중 시칠리아에서의 노르만 진격: 카푸아, 아풀리아 및 칼라브리아, 그리고 시칠리아 백국은 노르만의 지배하에 있다. 시칠리아 에미르국, 나폴리 공국, 그리고 압루초(남부 스폴레토 공국 지역)의 땅들은 아직 정복되지 않았다.


1061년, 로베르는 동생 로제르와 함께 시칠리아 침공 계획을 세웠다. 로제르가 소규모 병력으로 메시나를 처음 공격했을 때는 사라센 수비대에게 쉽게 격퇴당했다. 그 후 로베르는 1061년 1월, 멜피를 포위한 비잔티움 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0세의 군대에 맞서기 위해 다시 아풀리아로 가야 했다. 로베르 군대의 위세에 비잔티움군은 후퇴했고, 5월까지 아풀리아는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로베르와 로제르는 다시 시칠리아로 돌아와 1061년 메시나를 기습적으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메시나를 요새화한 후, 로베르는 시라쿠사의 에미르 이븐 알-팀나와 동맹을 맺고 카스트로지오반니의 에미르 이븐 알-하와스에 대항했다. 로베르, 로제르, 그리고 무슬림 동맹군은 로메타를 거쳐 시칠리아 중부로 진군하여 파테르노를 정복했다. 이후 카스트로지오반니를 포위했으나 함락에는 실패했다. 1063년 로베르는 아내 시켈가이타와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아풀리아로 잠시 돌아갔고, 칼라브리아의 자신의 성 이름을 딴 산 마르코 달룬치오 요새를 남겨두었다. 1064년 시칠리아로 복귀한 그는 카스트로지오반니를 우회하여 팔레르모로 직접 향했으나, 야영지에 타란툴라가 들끓어 원정을 중단해야 했다.

1071년, 로베르는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이탈리아 거점이었던 바리를 정복했다. 같은 해 노르만 시칠리아 백국이 설립되어 동생 로제르에게 주어졌다. 이듬해인 1072년에는 마침내 팔레르모가 함락되었고, 이를 계기로 시칠리아의 나머지 지역들도 점차 노르만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시라쿠사의 에미르 베나베르트가 마지막까지 저항했으나 1086년에 패배했고, 시칠리아의 마지막 무슬림 거점인 노토는 1091년에 함락되었다. 시칠리아 원정 기간 동안 로베르 기스카르는 검은색 의복을 즐겨 입어 "검은 옷의 로베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11] 1076년에는 롬바르드 왕국의 지술포 2세로부터 살레르노를 빼앗아 자신의 공국 수도로 삼음으로써, 로베르는 이탈리아 남부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다.

무슬림에 의한 팔레르모의 항복, 주세페 파타니아, 노르만 궁전

4. 4. 살레르노와 베네벤토 정복

로렌초 오토니(Lorenzo Ottoni)가 제작한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 동상, 1700~1749년


시칠리아 정복이 진행되는 동안, 로베르는 다시 비잔티움 제국과 싸워야 했다. 로베르의 조카 아벨라르 드 오트빌(Abelard of Hauteville)이 스스로 왕위를 주장하며 비잔티움 군대가 바리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로베르는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4년 동안 바리를 포위 공격했고, 결국 1071년 도시 주민들이 항복했다. 그는 이후 포위 공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했다.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 세력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로베르는 이제 남부 이탈리아에 남아 있던 여러 롬바르드 독립 영토로 관심을 돌렸다.

로베르는 먼저 자신의 매부인 기술프 2세(Gisulf II)가 다스리던 살레르노 공국을 공격했다. 살레르노는 포위 공격 끝에 1076년 12월 함락되었고, 기술프 2세는 1077년 5월 성을 버리고 물러났다. 로베르는 살레르노를 자신의 공국 수도로 삼았다. 이어서 1078년에는 베네벤토 공국을 점령했다.

베네벤토는 교황령의 영토로 여겨졌기 때문에,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로베르의 점령에 놀랐다. 하지만 당시 교황은 신성 로마 제국헨리 4세 황제와 서임권 투쟁 문제로 갈등하고 있었기에, 노르만인과의 추가적인 분쟁을 피하고자 했다. 시몽 드 크레피가 교황을 대신하여 로베르와의 동맹을 협상했고, 1080년 6월 교황은 로베르에게 압루치, 살레르노, 아말피, 그리고 페르모 변경백국에 대한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주었다. 로베르는 이후 1081년 베네벤토를 교황청에 반환했다.

4. 5. 비잔티움 제국 침공

1073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미카일 7세는 로베르와의 군사 동맹을 위해 자신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두카스와 로베르의 딸 올림피아스의 혼인을 제안했다. 이 제안 이후 로베르는 비잔티움 제국의 제위에 대한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12] 그는 폐위된 황제 미카엘 7세를 자칭하는 수도승 라익토르를 내세워 비잔티움 침공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으며, 라익토르의 주장이 거짓으로 드러난 뒤에도 콘스탄티누스와의 혼담을 근거로 제국 통치권을 주장했다.[12]

1080년, 로베르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비잔티움 영토를 공격하기 위해 함대를 편성하는 등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비잔티움의 새로운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외교적으로 로베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081년 5월, 로베르는 노르만과 롬바르드 군대를 이끌고 비잔티움 속주 일리리아의 수도 두라초(현 알바니아 두러스)를 침공했다. 그의 군대 규모는 자료에 따라 1,300명의 기사[13] 또는 최대 10,000명[13]으로 기록되어 있다. 알렉시우스 1세는 로베르의 침략에 맞서 베네치아 공화국신성 로마 제국하인리히 4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베네치아 해군은 로베르의 함대를 공격했고, 하인리히 4세는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공격했다. 1081년 10월, 디라키움 전투(두라초 전투)에서 로베르군은 알렉시우스 1세의 비잔티움군을 격파하고 두라초를 함락시켰다. 1082년까지 코르푸와 두라초를 점령했다.

그러나 1083년, 로베르는 서임권 투쟁으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에게 카스텔 산탄젤로에 포위된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하라는 요청을 받고 이탈리아로 돌아가야 했다. 1084년 5월, 기스카르는 로마에 입성하여 하인리히 4세를 몰아냈으나, 이후 로마 시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3일간의 로마 약탈을 자행했고, 교황을 로마에서 호송하여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다. 로베르가 이탈리아에 있는 동안, 발칸 반도에 남아 있던 그의 아들 보에몽은 점령지를 대부분 상실했다.

로베르는 다시 발칸 반도로 돌아와 라구사와 드미트리우스 즈보니미르 왕 치하의 다른 달마티아 도시들의 도움을 받아 코르푸와 케팔로니아를 재점령했다.[13][14] 그러나 1085년 7월 17일, 케팔로니아 섬에서 열병에 걸려 사망하면서 그의 비잔티움 원정은 막을 내렸다.

4. 6. 로마 약탈 (1084년)

1081년 동로마 제국 정복 원정 중이던 로베르는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에서의 반란 소식과 함께, 서임권 투쟁으로 대립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가 1084년 3월 21일 로마를 점령했다는 보고를 받았다.[30] 당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산탄젤로 성에 포위하고 있었다. 이에 로베르는 이탈리아로 회군하여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다. 노르만족인 로베르는 교황의 안위 자체보다는, 하인리히 4세의 로마 장악이 자신의 세력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여 개입을 결정했다.

1084년 5월, 로베르는 3만 6,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로베르 군대가 접근하자 하인리히 4세는 로마에서 철수했다. 로베르의 군대는 로마에 입성하여 교황 그레고리오 7세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시가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도시 곳곳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약탈 행위에 격분한 로마 시민들이 봉기하면서 로베르는 잠시 위험에 빠지기도 했으나, 아들 루지에로 보르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노르만 군대의 약탈로 로마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커지자 교황의 신변마저 위태로워졌다. 결국 로베르는 교황을 호위하여 로마에서 철수해야 했다. 로베르가 로마 문제에 개입하는 동안, 그리스를 점령하고 있던 그의 아들 보에몽 1세는 점령지를 동로마 제국에게 다시 빼앗겼다.

4. 7. 죽음과 계승

로마에서 돌아온 로베르는 1084년 다시 비잔티움 제국 원정에 나섰다. 악천후와 베네치아 해군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상륙에 성공하여 원정을 이어갔으나, 도중에 장티푸스로 추정되는 전염병이 군대를 덮쳤다. 그럼에도 로베르는 진군을 멈추지 않았으나, 이듬해인 1085년 7월 17일 케팔로니아섬 아테라스(리크수리 북쪽)로 향하던 중 열병으로 사망했다.[15][16][17][18][19][20]

로베르 기스카르가 매장된 오트빌 가문의 묘소. 이탈리아 베노사의 트리니티 수도원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로 옮겨져 오트빌가의 묘소인 베노사의 산티시마 트리니타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케팔로니아섬의 피스카르도 마을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의 묘비에는 라틴어로 "Hic terror mundi Guiscardu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여기에 세상의 공포 기스카르가 잠들다"라는 의미이다.[15][16][17][18][19][20]

로베르의 사후, 그의 영지는 아들들에게 상속되었으나 상속권을 둘러싼 다툼이 발생했다. 첫 부인 알베라다와의 결혼이 혈족 결혼을 이유로 무효가 되면서 장남 보에몽은 사생자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아풀리아 공국과 칼라브리아 공국의 공작위는 두 번째 부인 시켈가이타 사이에서 낳은 아들 로제르 보르사에게 돌아갔다. 보에몽은 본래 로베르가 발칸반도에서 정복한 영토를 상속받을 예정이었으나, 비잔티움 제국이 이 지역을 되찾으면서 무산되고 대신 타란토 주변의 일부 영지만 받게 되었다. 이후 보에몽은 제1차 십자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어 초대 안티오키아 공작이 되었으며, 새로이 비잔티움 제국과 대립하게 된다. 로베르의 다른 아들들인 기와 로베르 스칼리오는 작위를 주장하지 않았다.

한편, 로베르의 형제인 로제르 1세 시칠리아 백작의 후손들은 훗날 시칠리아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5. 종교

칼라브리아와 시칠리아 정복을 통해 로베르 기스카르는 역사적으로 비잔틴 전례를 따르던 지역에 라틴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칼라브리아의 살레르노 대성당과 산투에우페미아 라메치아에 노르만 양식의 수도원을 세웠다. 특히 산투에우페미아 라메치아 수도원은 합창단으로 유명했으며, 노르망디의 생트브루에서 온 11명의 수도승 공동체로 시작되었고, 초대 수도원장은 로베르 드 그랑메니였다.

기스카르는 때때로 교황과 관계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으며, 교회법에 따라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교황들은 그의 세력 확장을 경계했지만, 비잔틴 제국의 지배보다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가톨릭 노르만 세력의 통치를 선호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기스카르는 신성 로마 제국교황 개혁 반대를 우려했던 교황 니콜라스 2세로부터 시칠리아에 대한 투자 승인을 받았다. 기스카르는 교황의 개혁을 지지했으며, 과거 교황령 영토 침범으로 자신을 파문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구출하기도 했다. 1054년 대분열 이후 극심해진 종교적 대립 속에서 기스카르는 교황과의 동맹을 강화했고, 이는 동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강력한 교황-노르만 연합으로 발전했다.[21]

6. 가족 관계

로베르 기스카르는 두 번 결혼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1051년에 결혼한 알베라다 드 부오날베르고(Alberada de Buonalbergo프랑스어)였다.[22] 두 사람은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로베르 기스카르와 알베라다의 결혼은 나중에 파기되었고, 그는 1058년 또는 1059년에 살레르노 후작 과이마리오 4세의 딸인 시헬가이타(Sichelgaita)와 재혼했다.[22] 시헬가이타와의 사이에서는 다음 자녀들을 두었다.

  • 마틸다 (Matilda, 마팔다(Mafalda)라고도 불림):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2세(Ramon Berenguer II)와 결혼했다.[22] 그녀의 후손 중에는 아라곤 왕위에 오른 이들이 있으며, 시칠리아 왕이 된 페드로 3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도 그녀의 후손이다. 라몬 베렝게르 2세 사후 나르봉느 부백 에메리 1세와 재혼하여 에메리 2세를 낳았다.
  • 로제르 보르사 (Roger Borsa, 1060/1년 ~ 1111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풀리아와 칼라브리아 공작이 되었다.[22]
  • 마벨 (Mabel, 마빌리아(Mabilia)라고도 불림): 기욤 드 그랑메닐(William de Grandmesnil)과 결혼했다.[22]
  • 딸 (아마도 에리아(Héria) 또는 엘리아(Elia)): 메인 백작 위그 5세(Hugh V of Maine)와 결혼했으나 후에 이혼했다.
  • 로베르 스칼리오 (Robert Scalio, 로베르토 스칼리오(Roberto Scalio)라고도 불림, 1068년경 ~ 1110년)[22]
  • 기 (Guy, 기도(Guido)라고도 불림, 1061년경 ~ 1108년): 아말피 공작이었다.[22]
  • 시빌라 (Sibylla): 루시 백작 에블 2세(Ebles II of Roucy, 에브루 2세라고도 불림)와 결혼했다.[22] 그녀의 딸 마빌(Mabil)은 야파 백작 위그 1세 뒤 푸이제(Hugh I of Le Puiset)와 결혼했다.[27]
  • 올림피아스 (Olympias): 헬레나(Helena)로 개명했으며, 동로마 제국 황제 미카엘 7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두카스(Constantine Doukas)와 약혼했다.[22] 그러나 니케포로스 3세에 의해 약혼이 파기되고 수도원에 보내졌다.
  • 세실 (Cecile)[22]
  • 가이텔그리마 (Gaitelgrima): 사르노 백작 험프리(Humphrey)와 결혼했다.[22]


로베르 기스카르(왼쪽)와 그의 동생 루제로


그의 동생으로는 시칠리아 백작 루제로 1세가 있으며, 조카로는 초대 시칠리아 왕 루제로 2세가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Robert Guiscard 2019-01-14
[2] 웹사이트 Robert Guiscard (c. 1015–1085) http://www.thelatinl[...] 2021-01-28
[3] 서적 The Normans in Europ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Routledge Companion to Medieval Warfare Routledge
[5] 서적 A General History of the World Longmans, Green & Co.
[6] 서적 The Alexiad of Anna Comnena Penguin Books
[7] 웹사이트 Robert Guiscard (c. 1015–1085) http://www.thelatinl[...] 2021-01-28
[8] 웹사이트 Robert Guiscard (c. 1015–1085) http://www.thelatinl[...] 2021-01-28
[9] 웹사이트 Robert Guiscard (c. 1015–1085) http://www.thelatinl[...] 2021-01-28
[10] 서적 The Normans in Europe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1] 논문 Les chevaliers de Dieu
[12] 문서 The Alexiad, Book 1, Chapter 12
[13] 문서 Loud
[14] 서적 Povijest Hrvata u vrijeme narodnih vladara Zagreb
[15] 서적 The Greatest Norman Conquest
[16] 문서 Loud
[17] 논문 L'évocation romantique d'un héros normand https://www.persee.f[...]
[18] 서적 Roger II de Sicile: un Normand en Méditerranée Perrin
[19] 논문 How to fight and win like a Norman: Strategy and tactics of the Norman https://www.jstor.or[...]
[20] 서적 La terreur du monde: Robert Guiscard et la conquête normande en Italie; mythe et histoire Fayard
[21] 서적 Byzantino-Normannica: The Norman Capture of Italy (to A.D. 1081) and the First Two Invasions in Byzantium (A.D. 1081–1085 and 1107–1108) Peeters
[22] 웹사이트 SICILY https://fmg.ac/Proje[...]
[23] 서적 Studies in Dante: Scripture and classical authors in Dante The Clarendon Press
[24] 서적 Encyclopedia of Literary Translation into English Fitzroy Dearborn Publishers
[25] 서적 알렉시아스 유서관
[26] 서적 시칠리아의 만도 태양출판
[27] 문서 Runciman, genealogical trees
[28]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29] 서적 교황연대기 바다출판
[30] 서적 옥스퍼드 교황사전 분도출판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