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우드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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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즈우드 학살은 1923년 1월, 플로리다주 로즈우드에서 백인 폭도들이 흑인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살해한 사건이다. 1922년 백인 여성의 폭행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었으며, 흑인 용의자를 찾기 위한 수색 과정에서 폭력 사태로 번졌다. 로즈우드 학살은 수많은 흑인 사망자를 냈지만,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80년대 이후 생존자들의 증언과 언론 보도를 통해 진실이 밝혀졌다. 1990년대에는 주 정부의 배상과 역사적 진실 규명 노력이 이루어졌으며, 영화와 책으로 제작되어 사건의 비극성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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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즈우드 학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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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 명칭 | 로즈우드 학살 |
시대적 배경 | 미국의 인종 관계의 나락과 미국 내 인종 폭력의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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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미국 플로리다주 레비 카운티 로즈우드 |
대상 | 아프리카계 미국인 |
발생일 | 1923년 1월 1일 ~ 7일 |
피해 | |
사망자 | 공식 기록: 흑인 6명, 백인 2명 일부 보고: 27명 ~ 150명 |
부상자 | 알 수 없음 |
2. 배경
1847년 로즈우드는 멕시코만 근처 시더키에서 동쪽으로 약 14.48km 떨어진 곳에 정착했다. 지역 경제는 삼나무를 베어 만든 붉은색 목재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목재 산업에 크게 의존했다. 시더키 근처에는 두 개의 연필 공장이 있었고, 주민들은 감귤류와 목화 재배 외에도 섬너에서 약 4.83km 떨어진 여러 테레빈유 공장과 제재소에서 일했다. 1870년에는 플로리다 철도에 우체국과 기차역이 건설될 정도로 성장했지만, 도시로 통합되지는 않았다.[14]
초기에는 흑인과 백인 정착민이 모두 로즈우드에 거주했다. 1890년경 지역의 삼나무가 대부분 벌채되면서 연필 공장이 문을 닫고 많은 백인 주민들이 섬너로 이주했다. 1900년경 로즈우드의 인구는 주로 흑인이었고, 섬너는 주로 백인이었지만 두 지역 사회는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5] 로즈우드에서는 고인스 가문과 캐리어 가문이 가장 영향력 있었다. 고인스 가문은 테레빈유 산업을 이끌었고, 학살 이전 레비군에서 두 번째로 큰 토지 소유주였다.[6] 그러나 백인 경쟁자들의 소송을 피해 고인스 형제는 게인스빌로 이주하면서 로즈우드의 인구는 다소 감소했다.[14] 캐리어 가문은 주로 벌목 작업을 담당했다. 1920년대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서로 먼 친척 관계였다.[7] 1915년 로즈우드의 인구는 355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당시 플로리다주는 높은 투표 등록 요구 사항으로 흑인 유권자들의 참정권을 사실상 박탈한 상태였고, 섬너와 로즈우드는 미국 인구조사국의 단일 투표 구역에 속했다.
19세기 후반 남부에서 흔했던 것처럼, 플로리다주는 짐 크로 법에 따라 흑백 분리 정책을 시행했다.[9] 흑인과 백인 거주민들은 각자의 공동체 중심지를 만들었고, 1920년 로즈우드 주민들은 대부분 자급자족했다. 그들은 교회 3곳, 학교, 프리메이슨 회관, 테레빈유 공장, 사탕수수 공장, 야구팀(로즈우드 스타스), 그리고 잡화점 2곳(하나는 백인 소유)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에는 12채 정도의 나무 판잣집, 2칸짜리 집, 비어 있던 판자 농장과 저장 시설들이 있었다.[14] 일부 가족은 피아노, 오르간 등 중산층의 번영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소유했다. 생존자들은 로즈우드를 행복한 장소로 기억하며, 1995년 생존자 로비 모틴(당시 79세)은 "모든 사람의 집이 칠해진 마을이었다. 어디를 가든 장미가 있었다. 사랑스러웠다."라고 회상했다.[10]
플로리다주는 로즈우드 학살 이전 몇 년 동안 흑인 남성에 대한 린치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1922년 12월에 발생한 사건을 포함하여, 당시 인종 폭력은 개별적인 불법 행위나 공동체 전체에 대한 공격 형태로 미국 전역에서 흔하게 나타났다. 린칭은 남부 주에서 흑인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고 백인 우월주의를 강요하면서 20세기 초에 절정에 달했다. 1866년 플로리다는 다른 남부 주들과 마찬가지로 흑인 시민의 권리를 박탈하는 흑인 법전을 통과시켰다.[11] 비록 이것들은 곧 뒤집혔지만, 19세기 말까지 흑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1885년 백인 민주당이 지배하는 입법부는 인두세를 통과시켜 가난한 유권자들의 권리를 박탈했다. 정치 권력을 잃은 흑인 유권자들은 법적, 정치적 권리가 악화되었다.[12] 투표권이 없었기에 배심원단에서 제외되고 공직에 출마할 수 없어 정치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미국 전체는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었고, 남부에서 흑인들은 경제적 기회 부족과 2등 시민으로서의 지위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13]
플로리다의 선출된 공무원들은 투표권을 가진 백인 다수를 대표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브로워드 주지사(1905–1909)는 흑인들이 분리되어 살 수 있는 주 외의 위치를 찾는 것을 제안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과 그 이후 수만 명의 흑인들이 대이동을 통해 북부로 이주하여 노동 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펜실베이니아 철도, 철강 산업, 육류 포장과 같은 북부 산업에 의해 모집되었다. 파크 트래멀 주지사(1913–1917)와 시드니 캣츠 주지사(1917–1921)는 흑인의 북부 이주와 그 원인을 무시했다. 트래멀은 주 법무장관과 주지사 재임 동안 발생한 린칭 사건을 기소하지 않았다. 캣츠는 백인 우월주의와 반가톨릭 정서를 내세워 선거 운동을 했으며,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노동력 부족을 주장하자 입장을 바꾸었고, 흑인 노동자들에게 주에 머물 것을 간청했다.[5] 1940년까지 40,000명의 흑인이 플로리다를 떠났다.[14]
제1차 세계 대전을 위한 미군 훈련이 시작되자 많은 남부 백인들은 흑인 군인에게 무기를 주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흑인 군인의 권리에 관한 대립은 1917년 휴스턴 폭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독일의 선전은 흑인 군인들에게 미국 백인에 대항하도록 부추겼다. 프랑스 여성들이 흑인 미국 군인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은 남부의 권력과 혼혈에 대한 두려움을 건드렸다.[5] 플로리다 대학교 역사학자 데이비드 콜번은 인종 간의 성적 친밀함에 대한 증가하는 우려를 로즈우드에서 발생한 일과 연결시키며, "남부 문화는 백인 여성을 그 중심에 두고... 여성에 대한 공격은 남부 사회의 본질 자체를 해체하려는 위협이기도 했다."라고 말한다.[5]
흑인의 북동부와 중서부 도시로의 유입은 인종적 긴장을 증가시켰다.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인종적 혼란이 여러 도시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경제적 경쟁에 의해 촉발되었다. 1919년의 붉은 여름에 인종적 동기를 가진 폭도 폭력이 23개의 도시—시카고, 오마하, 워싱턴 D.C. 포함—에서 폭발했다.[15] 1921년 털사 인종 폭동에서도 더 많은 불안이 발생했는데, 이때 백인들이 흑인 그린우드 커뮤니티를 공격했다. 데이비드 콜번은 1923년까지 흑인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폭력을 구별한다. 북부의 폭력은 일반적으로 전체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인 폭도 행동이었고, 남부의 폭력은 린칭 및 기타 사법 외적 행위의 개별적 사건이었다. 콜번에 따르면, 로즈우드 학살은 그 해에 북부에서 더 흔하게 저질러진 폭력과 유사했다.[5]
1920년대 중반, 쿠 클럭스 클랜(KKK)은 남부와 중서부에서 회원 수가 최고조에 달했다. 중서부와 서부에서는 새로운 남부 및 동유럽 이민자들의 물결의 경쟁과 관련이 있었다.[16] KKK는 잭슨빌, 탬파와 같은 플로리다 도시에서 강세를 보였다. 마이애미 지부는 마이애미 컨트리 클럽에서 입단을 거행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클랜은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도 번성했다.[16][17] ''게인스빌 데일리 선''의 편집자는 1922년에 자신이 클랜의 회원임을 인정하고 인쇄물에서 그 단체를 칭찬했다.[5]
캣츠 주지사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백인 폭도들의 행동은 플로리다 북부와 중부의 여러 마을에서 자주 발생했고 지역 법 집행 기관에 의해 제재되지 않았다. 흑인 주민에 대한 사법 외적 폭력은 너무 흔해서 신문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14] 1920년, 백인들은 맥클레니에서 백인 여성을 강간한 혐의를 받는 용의자 4명을 린칭했다. 같은 해 오코이에서는 30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25채의 집, 두 개의 교회, 그리고 한 개의 메이슨 롯지를 파괴했다.[18] 로즈우드 학살 불과 몇 주 전, 1922년 12월 14일과 15일에 페리 인종 폭동이 발생하여 백인 교사가 살해된 후 백인들이 찰스 라이트를 화형시키고 페리의 흑인 공동체를 공격했다.[19] 라이트의 린칭 다음 날, 백인들은 페리에서 두 명의 흑인 남자를 총으로 쏘아 매달았고, 그 다음 마을의 흑인 학교, 메이슨 롯지, 교회, 유흥 홀, 그리고 여러 가족의 집들을 불태웠다.[19][20]
2. 1. 정착
1847년 멕시코만 근처 세다키에서 동쪽으로 약 14.48km 떨어진 곳에 로즈우드가 정착했다. 지역 경제는 대부분 목재 산업에 의존했다. 로즈우드라는 이름은 베어낸 삼나무의 붉은색에서 유래했다. 시더키 근처에 연필 공장 두 곳이 세워졌고, 지역 주민들은 감귤류와 목화를 재배하는 것 외에도 여러 테레빈유 공장과 섬너에서 약 4.83km 떨어진 제재소에서 일했다. 작은 마을은 1870년 플로리다 철도에 우체국과 기차역을 건설할 정도로 성장했지만, 도시로 합병되지는 않았다.[14]초기에 로즈우드에는 흑인과 백인 정착민이 모두 있었다. 1890년경, 이 지역의 대부분의 삼나무가 벌채되면서 연필 공장이 문을 닫았고, 많은 백인 주민들이 섬너로 이주했다. 1900년경, 로즈우드의 인구는 주로 흑인이 되었다. 섬너 마을은 주로 백인이었고, 두 지역 사회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5] 로즈우드에서는 고인스 가문과 캐리어 가문이라는 두 흑인 가문이 가장 강력했다. 고인스 가문은 이 지역에 테레빈유 산업을 가져왔고, 공격이 일어나기 몇 년 전에는 레비군에서 두 번째로 큰 토지 소유주였다.[6] 백인 경쟁자들로부터의 소송을 피하기 위해, 고인스 형제는 게인즈빌로 이주했고, 로즈우드의 인구는 약간 감소했다.[14] 캐리어 가문 또한 대가족이었으며, 주로 이 지역에서 벌목 작업을 했다. 1920년대에는, 이 밀접한 지역 사회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먼 친척 관계였다.[7] 1915년 로즈우드의 인구는 355명으로 정점을 찍었다. 플로리다주는 투표 등록을 위한 높은 요구 사항에 의하여 20세기 초부터 흑인 유권자들의 참정권을 사실상 박탈하였다. 섬너와 로즈우드는 모두 미국 인구조사국에서 집계하는 단일 투표 구역의 일부였다.
19세기 후반 남부에서 흔했던 것처럼, 플로리다주는 흑인과 백인의 공공 시설과 교통을 분리하는 짐 크로우법 아래 법적 인종 차별을 부과하였다.[9] 흑인과 백인 거주민들은 자신들 소유의 공동체 중심지를 만들었다. 1920년까지 로즈우드의 거주민들은 대부분 자급자족했다. 그들은 교회 3곳, 학교 1곳, 프리메이슨 홀, 테레빈유 공장, 사탕수수 공장, 로즈우드 스타스라는 이름의 야구팀, 그리고 잡화점 2곳(그 중 하나는 백인 소유)을 가지고 있었다. 마을에는 12채 정도의 나무 판잣집, 다른 작은 2칸짜리 집들, 그리고 몇 채의 작은 비어 있던 판자 농장과 저장 시설들이 있었다.[14] 어떤 가족들은 피아노, 오르간과 같은 중산층의 번영을 상징하는 물건들을 소유했다. 로즈우드의 생존자들은 그곳을 행복한 장소로 기억한다. 1995년 생존자 로비 모틴은 79세의 나이에 자신이 거기서 어린이었을 때 "로즈우드는 모든 사람의 집이 칠해진 마을이었다. 당신이 걸어간 곳마다 장미들이 있었다. 사랑스러웠다."라고 회상하였다.[10]
2. 2. 플로리다주의 인종 갈등
1847년 로즈우드는 멕시코만 근처 시더키에서 동쪽으로 약 14.48km 떨어진 곳에 정착했다. 지역 경제는 대부분 목재 산업에 의존했다. 로즈우드라는 이름은 잘린 삼나무의 붉은 색에서 유래했다. 시더키 근처에 두 개의 연필 공장이 설립되었다. 감귤류와 목화 재배 외에도 지역 주민들은 섬너에서 약 4.83km 떨어진 여러 테레빈유 공장과 제재소에서 일했다. 이 작은 마을은 1870년 우체국과 플로리다 철도의 정거장이 건설될 만큼 충분히 커졌지만, 도시로 통합되지는 않았다.초기에 로즈우드에는 흑인과 백인 정착민이 모두 있었다. 1890년 지역의 대부분의 삼나무가 베어져 연필 공장이 문을 닫고 많은 백인 거주자들이 섬너로 이주했다. 1900년 로즈우드의 인구는 대부분 흑인이었다. 섬너는 대부분 백인이었고 두 공동체 간의 관계는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로즈우드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가족은 고인스 가와 캐리어 가였다. 고인스 가족은 지역에 테레빈유 산업을 가져왔고 몇 년 안에 공격 이전에 레비군에서 두 번째로 큰 지주가 되었다. 백인 경쟁자들의 소송을 피하기 위해 고인스 형제는 게인스빌로 이주했고 로즈우드의 인구는 점차 감소했다. 캐리어 가족도 큰 가족이었으며 주로 지역에서 벌목업에 종사했다. 1920년대까지 긴밀한 공동체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서로 먼 친척 관계였다. 1915년 로즈우드의 인구는 355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플로리다주는 투표 등록을 위한 높은 요구 사항으로 인해 20세기 초부터 흑인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효과적으로 박탈했다. 섬너와 로즈우드는 미국 인구조사국에서 집계한 단일 투표 구역의 일부였다.
19세기 후반 남부에서 흔했던 것처럼 플로리다주는 흑인과 백인의 공공 시설과 교통을 분리하는 짐 크로 법에 따라 법적 인종 분리를 시행했다. 흑인과 백인 거주자들은 자신들만의 공동체 중심지를 만들었다. 1920년 로즈우드의 거주자들은 대부분 자급자족했다. 그들은 3개의 교회, 하나의 학교, 하나의 메이소닉 홀, 하나의 테레빈유 공장, 하나의 제당소, 로즈우드 스타스라는 야구 팀, 그리고 백인이 소유한 잡화점을 포함한 여러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마을에는 약 12개의 나무 판자 주택, 다른 작은 2칸짜리 주택, 그리고 몇 채의 비어 있던 판자 농장과 저장 구조물이 있었다. 어떤 가족들은 피아노, 오르간 및 기타 중산층 번영의 상징을 소유했다. 로즈우드의 생존자들은 그곳을 행복한 장소로 기억한다. 1995년 생존자 로비 모틴은 79세의 나이에 자신이 어렸을 때 "로즈우드는 모든 집이 페인트칠 된 마을이었다. 어디를 가든 장미가 있었다. 사랑스러웠다."라고 회상했다.
플로리다주는 1922년 12월에 잘 알려진 사건을 포함하여 로즈우드 학살이 있기 몇 년 전에 특히 흑인 남성에 대한 린치가 많이 발생했다. 당시 인종 폭력은 국가 전체에 걸쳐 흔했으며, 개별적인 불법 행위나 공동체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나타났다. 린칭은 남부 주에서 흑인 유권자들의 투표권을 박탈하고 백인 우월주의를 강요하면서 20세기 초에 절정에 달했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이를 남부 전역에서 사회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1866년 플로리다는 다른 남부 주들과 마찬가지로 흑인 시민의 권리를 박탈하는 흑인 법전이라는 법을 통과시켰다.[11] 비록 이것들은 곧 뒤집혔고 흑인 시민들은 잠시 동안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었지만, 19세기 말까지 흑인의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백인 민주당이 지배하는 입법부는 1885년에 인두세를 통과시켰으며, 이는 주로 모든 가난한 유권자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데 기여했다. 정치 권력을 잃은 흑인 유권자들은 그 후 몇 년 동안 법적 및 정치적 권리의 악화를 겪었다.[12] 투표할 권리가 없었기에, 그들은 배심원단에서 제외되었고 공직에 출마할 수 없었으며, 이는 효과적으로 그들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시켰다. 미국 전체는 유럽 이민자들의 유입, 산업화와 도시의 성장, 그리고 북부에서의 정치적 실험과 같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고 있었다. 남부에서 흑인 미국인들은 경제적 기회의 부족과 2등 시민으로서의 지위에 점점 더 불만을 품게 되었다.[13]
플로리다의 선출된 공무원들은 투표권을 가진 백인 다수를 대표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브로워드 주지사(1905–1909)는 흑인들이 분리되어 살 수 있는 주 외의 위치를 찾는 것을 제안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동안과 그 이후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대이동을 통해 북부로 이주하여 노동 시장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도시에 더 빠른 변화를 도입했다. 그들은 펜실베이니아 철도, 철강 산업, 그리고 육류 포장과 같은 많은 확장되는 북부 산업에 의해 모집되었다. 플로리다 주지사 파크 트래멀 (1913–1917)과 시드니 캣츠 (1917–1921)는 일반적으로 흑인의 북부 이주와 그 원인을 무시했다. 트래멀이 주 법무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의 임기 동안 발생한 29건의 린칭 사건은 기소되지 않았으며, 그가 주지사로 재임하는 동안 발생한 21건의 린칭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캣츠는 백인 우월주의와 반가톨릭 정서를 내세워 선거 운동을 했으며, 그가 플로리다에서 발생한 두 건의 린칭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불평하자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캣츠는 터펜타인과 목재 산업에서 노동력 부족을 주장하자 입장을 바꾸었고, 흑인 노동자들에게 주에 머물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5] 1940년까지 40,000명의 흑인이 고용을 찾기 위해, 또한 분리, 자금 부족 교육 및 시설, 폭력, 그리고 권리 박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플로리다를 떠났다.[14]
제1차 세계 대전을 위한 미군 훈련이 시작되자 많은 남부 백인들은 흑인 군인에게 무기를 쥐여주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흑인 군인의 권리에 관한 대립은 1917년 휴스턴 폭동으로 절정에 달했다. 독일의 선전은 흑인 군인들에게 그들의 "진짜" 적, 즉 미국 백인에 대항하도록 부추겼다. 프랑스 여성들이 흑인 미국 군인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소문이 미국에 도달했는데, 플로리다 대학교 역사학자 데이비드 콜번은 이것이 남부의 권력과 혼혈에 대한 두려움을 건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5] 콜번은 인종 간의 성적 친밀함에 대한 증가하는 우려를 로즈우드에서 발생한 일과 연결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부 문화는 백인 여성을 그 중심에 두고, 그들의 행동과 태도의 순수함이 그 문화의 세련됨을 나타내는 일련의 풍습과 가치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여성에 대한 공격은 남부의 가장 중요한 금기를 위반하는 것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남부 사회의 본질 자체를 해체하려는 위협이기도 했다."[5] 혼혈의 금기를 위반하는 것은 그 후 흑인 시민에게 무기를 쥐여주는 것과 결합되어 백인들 사이에서 남부에서 임박한 인종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흑인의 북동부와 중서부 도시로의 유입은 그 도시들에서 인종적 긴장을 증가시켰다. 1917년과 1923년 사이에 인종적 혼란이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발생했는데, 이는 산업 일자리를 놓고 서로 다른 인종 집단 간의 경제적 경쟁에 의해 촉발되었다. 가장 먼저 발생했고 가장 폭력적인 사건 중 하나는 1917년에 촉발된 세인트루이스 동부 폭동이었다. 1919년의 붉은 여름에 인종적 동기를 가진 폭도 폭력이 23개의 도시—시카고, 오마하, 워싱턴 D.C. 포함—에서 폭발했는데, 이는 양 인종의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의 일자리와 주택에 대한 경쟁과 새로운 유럽 이민자들의 물결의 도착에 의해 발생했다.[15] 1921년 털사 인종 폭동에서도 더 많은 불안이 발생했는데, 이때 백인들이 흑인 그린우드 커뮤니티를 공격했다. 데이비드 콜번은 1923년까지 흑인에 대한 두 가지 유형의 폭력을 구별한다. 북부의 폭력은 일반적으로 전체 공동체에 대한 자발적인 폭도 행동이었다. 반면에 남부의 폭력은 린칭 및 기타 사법 외적 행위의 개별적 사건의 형태를 취했다. 콜번에 따르면, 로즈우드 학살은 그 해에 북부에서 더 흔하게 저질러진 폭력과 유사했다.[5]
1920년대 중반, 쿠 클럭스 클랜(KKK)은 1915년경 부활 이후 남부와 중서부에서 회원 수가 최고조에 달했다. 이러한 성장은 많은 성장하는 도시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사회 변화로 인한 긴장의 부분적인 결과였다. 중서부와 서부에서는 새로운 남부 및 동유럽 이민자들의 물결의 경쟁과 관련이 있었다.[16] KKK는 잭슨빌, 탬파와 같은 플로리다 도시에서 강세를 보였다. 마이애미의 지부는 마이애미 컨트리 클럽에서 입단을 거행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 클랜은 또한 재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인종 폭력 전통을 가진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도 번성했다.[16][17] ''게인스빌 데일리 선''의 편집자는 1922년에 자신이 클랜의 회원임을 인정하고 인쇄물에서 그 단체를 칭찬했다.[5]
캣츠 주지사의 태도 변화에도 불구하고, 백인 폭도들의 행동은 플로리다 북부와 중부의 여러 마을에서 자주 발생했고 지역 법 집행 기관에 의해 제재되지 않았다. 흑인 주민에 대한 사법 외적 폭력은 너무 흔해서 신문에서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14] 1920년, 백인들은 맥클레니에서 백인 여성을 강간한 혐의를 받는 용의자 4명을 감옥에서 끌어내어 린칭했다. 같은 해 오코이에서는 두 명의 흑인 시민이 선거 기간 동안 투표소에 가기 위해 무장했다. 대립이 벌어져 두 명의 백인 선거 관리인이 총에 맞았고, 그 후 백인 폭도들이 오코이의 흑인 공동체를 파괴하여 30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발생시키고 25채의 집, 두 개의 교회, 그리고 한 개의 메이슨 롯지를 파괴했다.[18] 로즈우드 학살 불과 몇 주 전, 1922년 12월 14일과 15일에 페리 인종 폭동이 발생하여 백인 교사가 살해된 후 백인들이 찰스 라이트를 화형시키고 페리의 흑인 공동체를 공격했다.[19] 라이트의 린칭 다음 날, 백인들은 페리에서 두 명의 흑인 남자를 총으로 쏘아 매달았고, 그 다음 마을의 흑인 학교, 메이슨 롯지, 교회, 유흥 홀, 그리고 여러 가족의 집들을 불태웠다.[19][20]
3. 로즈우드 사건의 전개
1923년 1월 1일, 플로리다주 섬너에서 백인 여성 패니 테일러가 흑인 남성에게 폭행당했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로즈우드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웃들은 비명을 듣고 달려가 멍이 들고 매를 맞은 테일러를 발견했다.[21][22] 테일러는 흑인 남성에게 폭행당했다고 진술했지만,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상황은 악화되었다. 당시 남부에서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혐의는 매우 자극적인 문제였으며, 쿠 클럭스 클랜(KKK)의 활동과 맞물려 긴장을 고조시켰다.[23]
테일러의 세탁부였던 사라 캐리어의 손녀 필로메나 고인스는 다른 증언을 했다. 그녀는 테일러의 집에 백인 남자가 드나드는 것을 목격했고, 테일러가 아침에 구타당한 흔적을 보이며 집에서 나왔다고 말했다.[54] 이는 테일러에게 백인 애인이 있었고, 그날 싸움이 났다는 로즈우드 흑인 커뮤니티의 믿음과 일치한다.[24]
레비군 보안관 로버트 엘리아스 워커는 치안 유지대를 소집해 조사를 시작했고, 탈옥한 흑인 수감자 제시 헌터를 용의자로 지목했다.[54] 수색 과정에서 백인 자경단은 테레빈유 증류소에서 일하던 대장장이 샘 카터를 체포해 고문하고 린치했다.[26] 카터의 훼손된 시신은 나무에 매달려 흑인 사회에 대한 경고로 사용되었다.[14]
샘 카터 린치 이후, 백인 폭도들은 사라 캐리어의 아들 실베스터 캐리어를 위협했다. 캐리어는 저항했고, 그의 집에는 많은 흑인들이 피난해 있었다.[28] 1월 4일 저녁, 무장한 백인 남성 무리가 캐리어의 집을 포위하면서 총격전이 벌어졌다.[54] 이 과정에서 사라와 실베스터 캐리어가 사망하고, 백인 2명도 사망했다.[34][35] 집에 있던 아이들은 뒷문으로 탈출해 숲으로 피신했다.[36]
캐리어 집에서의 총격전 소식은 과장되어 신문에 보도되었고, 이는 더 많은 백인들을 로즈우드로 불러 모았다.[37] 백인 폭도들은 흑인 교회와 집들을 불태웠고, 흑인 주민들은 늪으로 피신하거나 백인들의 도움을 받아 대피했다.[54] 렉시 고든, 밍고 윌리엄스, 제임스 캐리어 등 여러 흑인들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54]
1월 6일, 백인 열차 차장 존 브라이스와 윌리엄 브라이스 형제는 흑인 여성과 아이들을 게인즈빌로 대피시켰다.[41] 백인 잡화점 주인 존 라이트 부부도 흑인 주민들을 숨겨주고 대피를 도왔다.[14] 1월 7일, 백인 폭도들은 로즈우드에 남아 있는 건물들을 불태웠다.[42]
3. 1. 패니 테일러의 이야기
1923년 1월 1일, 섬너에 사는 백인 여성 프랜시스 "패니" 테일러가 흑인 남성에게 폭행당했다고 주장하면서 로즈우드 학살이 시작되었다. 테일러는 당시 22세로, 섬너의 커머 앤드 선스(Cummer & Sons)에 고용된 30세 목수 제임스와 결혼하여 두 자녀와 함께 살고 있었다. 제임스는 직업 때문에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이웃들은 패니 테일러를 "매우 특이한" 사람으로 기억했는데, 그녀는 집을 깨끗하게 유지했고, 삼나무 바닥을 표백제로 닦아 하얗게 빛나게 했다. 다른 여성들은 테일러가 냉담하여 아무도 그녀를 잘 알지 못했다고 증언했다.[54]테일러의 이웃은 아직 어두웠던 그날 아침, 비명을 듣고 리볼버를 들고 옆집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패니가 멍이 들고 매를 맞은 채 하얀 바닥에 긁힌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테일러는 흑인 남성이 집에 들어와 뒷문으로 들어와 자신을 폭행했다고 말했다. 이웃은 아기를 찾았지만 다른 사람은 없었다. 테일러의 초기 보고에 따르면 공격자는 그녀의 얼굴을 때렸지만 강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섬너의 백인들 사이에서는 그녀가 강간당하고 강도질을 당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21][22]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혐의는 남부에서 매우 자극적인 일이었다. 그 전날, 쿠 클럭스 클랜(KKK)은 게인즈빌에서 100명이 넘는 복면을 한 클랜 회원들이 불타는 십자가와 "여성성을 먼저 그리고 항상 보호하라"는 배너를 들고 행진과 집회를 열었다.[23]
이웃은 또한 그날 섬너의 백인 여성들이 "사라 이모"라고 부르는 테일러의 세탁부 사라 캐리어의 부재를 보고했다. 캐리어의 손녀 필로메나 고인스는 수년 후 패니 테일러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그날 아침 평소처럼 할머니 캐리어와 함께 테일러의 집에 갔다. 그들은 오전 중에 백인 남자가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녀는 테일러가 아침이 한참 지난 후에 구타당한 흔적을 보이며 집에서 나왔다고 말했다.[54] 캐리어의 손자이자 필로메나의 오빠인 아넷 고인스는 가끔 그들과 함께 갔다. 그는 전에 그 백인 남자를 본 적이 있었다. 캐리어는 그날 본 것을 흑인 커뮤니티 사람들에게 말했고, 로즈우드의 흑인 커뮤니티는 패니 테일러에게 백인 애인이 있었고, 그날 싸움이 났고, 그가 그녀를 때렸다고 믿었다.[24] 그 남자가 테일러의 집을 떠났을 때, 그는 로즈우드로 갔다.[54]
레비군 보안관 로버트 엘리아스 워커는 즉시 치안 유지대를 소집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흑인 수감자인 제시 헌터가 사슬 갱에서 탈출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테일러의 공격에 대해 그를 심문하기 위해 수색을 시작했다. 시더 키, 오터 크릭, 치프랜드, 브론슨에서 온 사람들이 수색을 도왔다. 400명에 달하는 백인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보안관 워커는 그들 중 일부를 보안관 대리로 임명했지만, 전부를 임명할 수는 없었다. 워커는 근처의 죄수 캠프에서 개를 요청했지만, 한 마리의 개는 워커의 권한 없이 행동하는 한 무리의 남성들에 의해 사용되었을 수 있다. 개들은 약 100~150명의 무리를 사라의 조카인 아론 캐리어의 집으로 이끌었다. 아론은 밖으로 끌려 나갔고, 그의 어머니는 그들에게 그를 죽이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는 차에 묶여 섬너로 끌려갔다.[54] 워커 보안관은 치안 유지대의 남성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아론 캐리어를 카운티 청사인 브론슨에 구금시켰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었다. 워커는 이 무리가 통제 불능 상태로 빠르게 커질 것을 우려하여 흑인 직원들에게 자신의 안전을 위해 테레빈유 공장에 머물 것을 촉구했다.[25]
이때 폭도로 변한 백인 자경단은 테레빈유 증류소에서 일하는 지역 대장장이이자 운전수인 샘 카터를 체포했다. 그들은 카터를 고문하여 탈출한 사슬 갱 수감자를 숨겼다는 것을 자백하게 했다. 카터는 그 무리를 그가 헌터를 데려갔다고 말한 숲 속의 장소로 이끌었지만, 개들은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많은 증인들이 놀랍게도, 누군가 카터의 얼굴을 치명적으로 쏘았다.[26] 그 무리는 카터의 훼손된 시신을 나무에 매달아 그 지역의 다른 흑인 남성들에게 상징으로 삼았다.[14] 폭도 중 일부는 그의 옷을 기념품으로 가져갔다.[54] 생존자들은 테일러의 애인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로즈우드로 도망쳐서 동료 참전 용사이자 프리메이슨인 아론 캐리어의 집으로 갔다고 말한다. 캐리어와 또 다른 메이슨인 카터는 도망자를 마차 뒤에 숨겼다. 카터는 그를 근처 강으로 데려가 마차에서 내리게 한 다음 집에 돌아와 폭도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도망자의 냄새를 따라온 개들에게 이끌렸다.[27]
샘 카터를 린치한 후, 폭도들은 아론의 사촌이자 사라의 아들인 실베스터 캐리어를 길에서 만나 마을에서 나가라고 말했다. 캐리어는 거절했고, 폭도들이 움직이자,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으자고 제안했다.[28]
3. 2. 수색과 샘 카터 린치
워커 보안관과 제재소 감독관 W. H. 필스버리의 군중 해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은 계속 모였다. 1월 4일 저녁, 무장한 백인 남성 무리가 로즈우드로 가서 사라 캐리어의 집을 포위했다. 그 집에는 매트리스 아래 2층에 숨어 있는 많은 어린이를 포함해 약 15명에서 25명의 피난민이 있었다. 일부 어린이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할머니 댁을 방문하러 그 집에 있었다.[54] 그들은 실베스터 캐리어와 아마도 다른 두 명의 남자에 의해 보호를 받았지만, 캐리어가 유일하게 무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자부심이 강하고 독립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로즈우드에서 그는 무서운 인물이었고, 명사수이자, 뛰어난 사냥꾼이자, 음악 교사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맨"이라고 불렀다. 많은 백인들은 그를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했다.[14][54]실베스터 캐리어는 ''뉴욕 타임스''에 파니 테일러에 대한 공격이 "흑인들이 간섭 없이 할 수 있는 일의 예"라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30] 그가 이 말을 했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보고된 진술에 격분한 20~30명의 백인 남성 무리가 캐리어의 집으로 갔다. 그들은 로즈우드의 흑인 공동체가 탈옥수 제시 헌터를 숨기고 있다고 믿었다.[14][31]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에 대한 보고는 상충되지만, 무리의 두 사람이 집에 접근한 후 누군가 총을 쐈다. 사라 캐리어는 머리에 총을 맞았다. 사흘 전 아론 캐리어가 집에서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던 그의 아홉 살짜리 조카 미니 리 랭글리도 그 집에 있었다. 랭글리는 누군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 엠마 캐리어를 찾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실베스터는 미니 리를 장작 벽장에 자신 앞에 두고 벽장을 엄호로 삼아 현관을 주시했다. "그는 나무 [통] 뒤에 숨었고, 총을 내 어깨에 올렸고, 그 크래커들이 계속 쏘고 있었다. 그는 총을 내 어깨에 댔고… 나보고 이쪽으로 기대라고 했고, 폴리 윌커슨이 문을 발로 찼다. 그가 문을 발로 찼을 때, 커즈 실은 그를 쐈다."[32][33]
몇 발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집은 총알 세례를 받았지만 백인들은 집을 점령하지 못했다. 대치는 다음 날 아침까지 오래 지속되었고, 사라와 실베스터 캐리어가 집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눈에 총을 맞은 아이를 포함하여 다른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C. P. "폴리" 윌커슨과 헨리 앤드류스 두 명의 백인이 사망했다. 윌커슨은 현관을 발로 찼고, 앤드류스는 그의 뒤에 있었다. 최소 4명의 백인이 부상을 입었고, 한 명은 치명적일 수 있었다.[34][35] 캐리어 집에 남아 있던 아이들은 뒷문으로 빠져나가 숲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흙길을 한 번에 한 명씩 건너 덤불 아래 숨어 로즈우드에서 모두 모일 때까지 숨어 있었다.[36]
3. 3. 실베스터 캐리어의 저항
워커 보안관과 제재소 감독관 W. H. 필스버리의 군중 해산 노력에도 불구하고 백인들은 계속 모여들었다. 1월 4일 저녁, 무장한 백인 남성 무리가 로즈우드로 가서 사라 캐리어의 집을 포위했다. 그 집에는 침대 매트리스 아래 2층에 숨어 있는 많은 어린이를 포함해 약 15명에서 25명의 피난민이 있었다. 일부 어린이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할머니 댁을 방문하러 그 집에 있었다.[54] 그들은 실베스터 캐리어와 아마도 다른 두 명의 남자에 의해 보호를 받았지만, 캐리어가 유일하게 무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자부심이 강하고 독립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로즈우드에서 그는 무서운 인물이었고, 명사수이자, 뛰어난 사냥꾼이자, 음악 교사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맨"이라고 불렀다. 많은 백인들은 그를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생각했다.[14][54]실베스터 캐리어는 ''뉴욕 타임스''에 파니 테일러에 대한 공격이 "흑인들이 간섭 없이 할 수 있는 일의 예"라고 말했다고 보도되었다.[30] 그가 이 말을 했는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보고된 진술에 격분한 20~30명의 백인 남성 무리가 캐리어의 집으로 갔다. 그들은 로즈우드의 흑인 공동체가 탈옥수 제시 헌터를 숨기고 있다고 믿었다.[14][31]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에 대한 보고는 상충되지만, 무리의 두 사람이 집에 접근한 후 누군가 총을 쐈다. 사라 캐리어는 머리에 총을 맞았다. 사흘 전 아론 캐리어가 집에서 끌려가는 것을 목격했던 그의 아홉 살짜리 조카 미니 리 랭글리도 그 집에 있었다. 랭글리는 누군가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할머니 엠마 캐리어를 찾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실베스터는 미니 리를 장작 벽장에 자신 앞에 두고 벽장을 엄호로 삼아 현관을 주시했다. "그는 나무 [통] 뒤에 숨었고, 총을 내 어깨에 올렸고, 그 크래커들이 계속 쏘고 있었다. 그는 총을 내 어깨에 댔고… 나보고 이쪽으로 기대라고 했고, 폴리 윌커슨이 문을 발로 찼다. 그가 문을 발로 찼을 때, 실베스터가 그를 쐈다."[32][33]
몇 발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집은 총알 세례를 받았지만 백인들은 집을 점령하지 못했다. 대치는 다음 날 아침까지 오래 지속되었고, 사라와 실베스터 캐리어가 집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눈에 총을 맞은 아이를 포함하여 다른 여러 명이 부상을 입었다. C. P. "폴리" 윌커슨과 헨리 앤드류스 두 명의 백인이 사망했다. 윌커슨은 현관을 발로 찼고, 앤드류스는 그의 뒤에 있었다. 최소 4명의 백인이 부상을 입었고, 한 명은 치명적일 수 있었다.[34][35] 캐리어 집에 남아 있던 아이들은 뒷문으로 빠져나가 숲으로 도망쳤다. 그들은 흙길을 한 번에 한 명씩 건너 덤불 아래 숨어 로즈우드에서 모두 모일 때까지 숨어 있었다.[36]
3. 4. 로즈우드의 파괴
캐리어 집에서 벌어진 무력 대치 소식은 주 전역의 백인들을 끌어들였다. 이 소식은 세인트피터스버그 인디펜던트, 플로리다 타임스-유니언, 마이애미 헤럴드, 마이애미 메트로폴리스 등 여러 신문에 사실과 과장이 섞여 보도되었다. 마이애미 메트로폴리스는 흑인 20명과 백인 4명이 사망했다며 이 사건을 "인종 전쟁"으로 묘사했다. 전국 신문들도 이 사건을 1면에 실었다. 워싱턴 포스트와 세인트루이스 포스트-디스패치는 "무장한 흑인"과 "흑인 악당"이 연루되었다고 묘사했다.[37] 이러한 정보의 대부분은 워커 보안관, 폭도들의 소문, 그리고 AP통신에 기사를 전송하는 기자들에 의해 부풀려졌다. 특히 무력 대치에 대한 세부 정보는 매우 자극적이었다. 역사가 토마스 다이에 따르면, "로즈우드의 흑인들이 백인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었다는 생각은 딥 사우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14]흑인 신문들은 이 사건을 다른 시각으로 보도했다. 볼티모어의 아프로-아메리칸은 "야만인"의 공격에 맞선 아프리카계 미국인 영웅들의 행동을 강조했다. 또 다른 신문은 "두 흑인 여성이 로즈우드와 섬너 사이에서 공격을 받아 강간당했다. 잔혹한 백인 폭도들의 성적 욕망이 충족되자, 여성들은 목 졸려 죽었다."라고 보도했다.[37]
백인 폭도들은 로즈우드의 흑인 교회들을 불태웠다. 필로메나 고인스의 사촌 리 루스 데이비스는 남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가 불을 지르자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54] 폭도들은 로즈우드의 백인 교회도 파괴했다. 많은 흑인 주민들은 늪으로 피신했으며, 일부는 잠옷 차림이었다. 당시 9살이었던 윌슨 홀은 어머니가 새벽에 늪으로 도망치라고 깨웠던 것을 회상했다. 몇 마일 밖에서도 백인들의 차량 불빛이 보였다. 홀 가족은 늪지를 통해 약 24.14km 떨어진 걸프 해먹 마을까지 걸어갔다. 생존자들은 당시 플로리다에서는 이례적으로 추웠고, 폭도를 피해 해먹에서 며칠 밤을 보내면서 고통을 겪었다고 회상한다. 일부는 동정심 많은 백인 가족에게 피신했다.[14] 샘 카터의 69세 미망인은 이틀 동안 늪에 숨어 있다가 우편 배달부의 도움으로 치프랜드에 있는 가족에게 합류했다.[10]
백인들은 집을 포위하고 등유를 뿌려 불을 지른 다음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장티푸스를 앓던 렉시 고든은 아이들을 숲으로 보냈다. 그녀는 집에 불이 난 후 집 아래에 숨어 있다가 도망치려다 샷건에 맞아 사망했다. 패니 테일러의 매형이 그녀를 살해했다고 주장했다.[14] 1월 5일, 더 많은 백인들이 모여 200명에서 300명 사이의 폭도를 형성했다. 일부는 다른 주에서 왔다. 약 32.19km 떨어진 브론슨 근처에서 테레빈 유액을 모으던 밍고 윌리엄스는 백인들이 가득 찬 차가 멈춰 서서 그의 이름을 물었을 때, 자신의 별명 "주님"을 말하자 총에 맞아 죽었다.[54]
워커 보안관은 앨라추아 카운티 보안관 P. G. 램지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게인즈빌에서 워커를 돕기 위해 차들이 몰려왔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그 주 초에 있었던 KKK 집회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W. H. 필스버리는 흑인 노동자들을 지키려 했고, 그의 조수 존슨과 함께 백인 노동자들이 폭력에 가담하는 것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워커 보안관이 보낸 무장 경비병들은 늪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는 흑인들을 돌려보냈다.[38] W. H. 필스버리의 아내는 사람들을 몰래 탈출하도록 도왔다. 마을 이발사를 포함한 일부 백인들은 폭도에 가담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54]
캐리 하디 주지사는 국가 방위군을 투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워커는 하디에게 전보를 보내 "추가적인 혼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주지사 사무실은 북부의 강렬한 관심 때문에 상황을 주시했지만, 하디는 워커의 요청 없이는 국가 방위군을 소집하지 않았다. 워커는 자신이 상황을 처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하디 주지사는 워커 보안관의 말을 믿고 사냥 여행을 떠났다.[39]
제임스 캐리어는 실베스터의 형이자 사라의 아들로, 이전에 뇌졸중을 앓아 부분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는 늪을 떠나 로즈우드로 돌아왔다. 그는 백인 테레빈 공장 감독인 W. H. 필스버리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필스버리는 그를 집에 가두었지만 폭도들은 캐리어를 찾아내, 탈옥한 죄수 제시 헌터를 도왔는지 알아내기 위해 고문했다. 그들이 캐리어에게 자신의 무덤을 파게 한 후, 그들은 그를 치명적으로 쏴 죽였다.[54][40]
3. 5. 대피와 침묵
1월 6일, 백인 열차 차장 존 브라이스와 윌리엄 브라이스는 흑인 주민들을 게인즈빌로 대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형제는 열차에 대한 애정이 있던, 독립적으로 부유한 시더 키 거주민이었다. 그들은 로즈우드 사람들을 알고 있었고 정기적으로 교역을 해왔다.[41] 그들은 그 지역을 지나면서 열차의 속도를 늦추고 경적을 울리며 여성과 아이들을 태웠다. 폭도들의 보복이 두려워 흑인 남성은 태우기를 거부했다.[14] 많은 생존자들이 백인 잡화점 주인 존 라이트와 그의 아내 메리 조 부부가 숨겨준 후 기차에 탑승했다. 다음 며칠 동안, 다른 로즈우드 주민들은 워커 보안관의 도움을 받아 라이트의 집으로 도망쳤는데, 워커 보안관은 라이트에게 가능한 한 많은 주민들을 마을 밖으로 수송해 달라고 요청했다.리 루스 데이비스, 그녀의 여동생, 그리고 두 형제는 그들의 아버지가 숲에 숨어 있는 동안 라이트 부부에게 숨겨졌다. 폴리 윌커슨의 장례식 날 아침, 라이트 부부는 참석하기 위해 아이들을 혼자 내버려 두었다. 데이비스와 그녀의 형제들은 집에서 몰래 나와 인근 마을 와일리에 있는 친척들과 숨으려 했지만,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다시 돌아왔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숲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라이트 부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돌아오는 길에 총을 든 남자들을 발견한 후, 그들은 공포에 질린 라이트 부부에게 다시 기어갔다.[32] 데이비스는 나중에 그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물속 깊이 누워 있었고, 우리는 하루 종일 거기에 앉아 있었어요... 우리는 배를 땅에 대고 기어갔어요. 우리는 덤불 사이로 사람들이 우리를 보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했어요... 우리는 라이트 씨의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그의 집에 다 도착했을 때, 라이트 씨와 부인은 덤불 밖으로 나와 우리를 부르며 소리쳤고, 우리가 대답하자 그들은 매우 기뻐했어요."[14] 섬너의 다른 여러 백인 주민들이 로즈우드의 흑인 주민들을 숨겨서 마을 밖으로 밀반출했다. 게인즈빌의 흑인 공동체는 로즈우드에서 대피한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기차역에서 기다리고, 시트에 덮인 채로 내리는 생존자들을 맞이했다. 1월 7일 일요일, 100명에서 150명에 이르는 백인 폭도들이 로즈우드에 남아 있는 12채 정도의 구조물을 불태우기 위해 돌아왔다.[42]
4. 사건의 여파와 진상 규명 노력
1923년 2월, 백인으로만 구성된 대배심이 브론슨에서 소집되어 25명의 증인(그 중 8명은 흑인)의 증언을 들었지만, 어떤 가해자도 기소할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사건을 주재한 판사는 폭도들의 행동을 비난했다.[43][48] 사건 이후, 주 지도자들은 주의 관광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하여 캐리 하디 주지사는 로즈우드와 레비 카운티의 다른 사건들을 조사하기 위해 특별 대배심과 특별 검사를 임명했다.
로즈우드는 더 이상 주요 백인 신문의 1면을 장식하지 못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신문인 ''시카고 디펜더''는 로즈우드의 "인종 전쟁"으로 19명이 사망했고, 테드 콜이라는 병사가 린치 폭도와 싸우려다 사라졌다고 보도했다. 이 보고서 이후 그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44] 플로리다 신문에는 이 사건을 요약한 몇몇 사설이 실렸다. ''게인즈빌 데일리 선''은 관련된 백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며 "백인이든 흑인이든, 무고하고 무력한 여성을 잔혹하게 공격하는 자는 개처럼 죽어야 한다는 것을 지금부터 영원히 이해하라"고 썼다. ''탬파 트리뷴''은 이 지역의 백인들의 과도한 행위에 대해 드물게 논평하며 이를 "레비 카운티 사람들의 치욕스럽고 지속적인 오점"이라고 불렀다.[45]
북부 간행물은 법의 붕괴를 더 기꺼이 언급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를 남부의 후진적인 사고방식의 탓으로 돌렸다. 사회주의 신문인 ''뉴욕 콜''은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문화적 진보가 얼마나 놀라울 정도로 적게 이루어졌는지"를 언급했고, ''내슈빌 배너''는 로즈우드의 사건을 최근 북부 도시에서 일어난 인종 폭동과 비교했지만, 전체 사건을 "비참하다"고 특징지었다.[46] 남부 감리교회가 조직한 애틀랜타에서 열린 3일간의 회의는 로즈우드의 혼란스러운 한 주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어떤 가족도, 어떤 인종도 여성성보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없다. 따라서 여성의 지성은 함양되어야 하며, 두 인종 모두에게 단일한 도덕 기준을 유지함으로써 여성성의 순수함과 존엄성을 보호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46]
공식적으로 1923년 1월 첫 주에 기록된 사망자 수는 8명(흑인 6명, 백인 2명)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숫자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일부 생존자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최대 27명의 흑인 주민이 살해되었을 수 있으며, 신문은 전체 백인 사망자 수를 보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캐리어 가문의 포위 공격에 있었던 미니 리 랭글리는 집을 떠날 때 현관에서 많은 백인 시체를 밟고 지나갔다고 회상한다.[14] 여러 목격자들은 흑인으로 가득 찬 집단 무덤을 보았다고 주장한다. 한 사람은 시더 키에서 가져온 쟁기로 26구의 시신을 덮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당국이 이러한 주장을 조사할 때쯤, 대부분의 증인들은 사망했거나, 너무 늙고 병약하여 이야기를 확인할 장소로 그들을 인도할 수 없었다.[4]
아론 캐리어는 1923년 초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혔고, 1965년에 사망했다. 제임스 캐리어의 미망인 엠마는 손과 손목에 총을 맞고 기차로 게인즈빌에 도착했다. 그녀는 결코 회복되지 못하고 1924년에 사망했다. 사라 캐리어의 남편 헤이우드는 로즈우드의 사건을 보지 못했다. 그는 사냥 여행을 갔었고, 돌아와서 아내, 형제 제임스, 아들 실베스터가 모두 살해당하고 그의 집이 백인 폭도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로즈우드에서 일어난 일을 알게 된 충격 이후, 헤이우드는 자신 외에는 거의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옷을 입지 않은 채 가족을 떠나 방황했다. 그의 손자 아넷 고인은 그가 슬픔으로 인해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헤이우드 캐리어는 학살 1년 후에 사망했다.[47] 탈옥수 제시 헌터는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많은 생존자들이 다른 도시로 다양한 방향으로 도망쳤고, 일부는 백인들이 그들을 추적할까 두려워 이름을 바꿨다. 그들 중 아무도 로즈우드에 다시 살기 위해 돌아오지 않았다.[48]
패니 테일러와 그녀의 남편은 다른 제재소 마을로 이사했다. 그녀는 만년에 "매우 신경질적"이었고, 암으로 사망했다. 존 라이트의 집은 로즈우드에 남아 있는 유일한 구조물이었다. 그는 그 안에서 살면서 카운티와 생존자들 사이의 사절 역할을 했다. 그들이 마을을 떠난 후, 그들의 땅은 거의 모두 세금으로 팔렸다.[54] 메리 조 라이트는 1931년경에 사망했고, 존은 알코올 문제를 겪게 되었다. 그는 생존자들을 돕는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조롱을 당했으며, 그의 집 모든 방에 총을 보관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시더 키에서 과음을 한 후 사망했으며, 서머의 표시 없는 무덤에 묻혔다.[49] 서머의 제재소는 1925년에 불탔고, 소유주들은 그 사업을 플로리다주 파스코 카운티의 라쿠치로 옮겼다. 일부 생존자뿐만 아니라 폭도 행위에 참여했던 사람들도 그곳의 제재소에서 일하기 위해 라쿠치로 갔다. W. H. 필스버리도 그들 중 하나였고, 전 서머 주민들에게 조롱을 당했다. 더 이상 감독 권한이 없어진 필스버리는 회사에서 조기 퇴직했다. 그는 잭슨빌로 이사했고 1926년에 사망했다.[50]
플로리다 주의 인종 폭력 피해자 보상 법안 심의는 미국 주 정부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반대론자들은 이 법안이 위험한 선례를 만들고, 로즈우드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플로리다 주민들에게 생존자와 후손에 대한 보상 책임을 떠넘긴다고 주장했다.[58][66]
1994년, 주 의회는 법안의 타당성을 논의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었다. 모든 증거를 청취한 후, 플로리다 주의회 증언을 주재한 특별 관리인 리처드 힉슨은 주가 로즈우드의 전 주민들에게 배상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저는 그들이 보상에 대해 신경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단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진실이 알려지기를 바랐다고 생각합니다. 50센트를 받든 1.5억달러를 받든 상관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69]
플로리다 주의 흑인 및 히스패닉계 의원들은 로즈우드 보상 법안을 대의로 삼아, 민주당 소속 로턴 차일스 주지사가 법안에 찬성 투표를 하도록 민주당이 지배하는 주 의회를 압박할 때까지 그의 의료 계획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했다. 차일스는 초기부터 보상 법안을 지지했고, 입법 의원들이 이전에 그의 의료 계획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기 때문에 불쾌감을 느꼈다.[66]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차일스 주지사는 생존자와 그 후손을 보상하기 위한 210만달러 규모의 로즈우드 보상 법안에 서명했다.
원래 생존자들에게 제안된 총 보상액은 700만달러였으며, 이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의회는 결국 150만달러로 결정했다. 이는 1923년 동안 로즈우드에 살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각 개인에게 150000USD를 지급하고, 같은 기간 동안 로즈우드에 재산을 소유한 조상이 있었음을 증명한 후 기금을 신청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500000USD의 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70] 나중에 플로리다 교육부는 로즈우드 후손과 소수 민족을 위한 로즈우드 가족 장학 기금을 설립했다.[72]
4. 1. 침묵의 문화
백인과 흑인 신문 모두에서 전국적인 보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과 버려진 작은 마을은 잊혀졌다. 생존자 대부분은 플로리다의 여러 도시로 흩어져 아무것도 없이 다시 시작했다. 어린이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허드렛일을 해야 했다. 교육은 수입을 얻기 위해 희생해야 했다. 그 결과, 로즈우드 생존자 대부분은 하녀, 구두닦이, 감귤 공장이나 제재소에서 일하는 육체 노동에 종사했다.[32]로즈우드 학살 이후 생존자들의 경험은 달랐지만, 그 누구도 공개적으로 일어났던 일을 인정하지 않았다. 샘 카터의 조카인 로비 모틴은 1923년 1월 3일, 아버지가 그녀를 로즈우드에서 동쪽으로 약 32.19km 떨어진 치프랜드로 가는 기차에 태웠을 때 7살이었다. 모틴의 아버지는 그날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로즈우드의 중심부를 피했는데, 모틴은 이 결정이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고 믿는다. 모틴의 아버지는 몇 년 후 플로리다주 리비에라 비치에서 그들을 만났다. 모틴의 할머니의 명령에 따라 그 가족 중 누구도 로즈우드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 우리 출신을 누군가 알게 되면 우리에게 덤벼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10]
이 침묵은 흑인 가족들 사이의 구전 역사 관행의 예외였다. 미니 리 랭글리는 제임스 캐리어와 엠마 캐리어를 부모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60년 동안 자녀들에게 그 이야기를 숨겼다. "그들이 내가 겪었던 일을 알기를 원치 않았고, 그들과는 전혀 상의하지 않았어요... 나는 그들이 내가 어떤 식으로 자랐는지 알기를 원치 않았어요. 나는 그들이 백인들이 우리를 집에서 내쫓으려 한다는 것을 알기를 원치 않았어요." 수십 년이 흐른 후에야 그녀는 백인을 신뢰하기 시작했다.[58] 일부 가족은 로즈우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금지했다. 아넷 도는 어머니 필로메나 고인스 도어터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녀는 패니 테일러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한 날 사라 캐리어와 함께 있었고, 실베스터 캐리어와 함께 집에 있었다. 그녀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자녀들에게 로즈우드에 대해 이야기했다. 도어터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사로잡혔고, 이모들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려 했지만,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설득을 받았다.[51]
1982년, ''세인트 피터스버그 타임스''의 조사 보도원 게리 무어는 이야기를 찾기 위해 탬파 지역에서 시더 키로 차를 몰고 갔다. 그가 시더 키의 "침울한 분위기"에 대해 언급하고, 20세기 초에 흑인이 거의 절반이었던 남부 도시가 왜 모두 백인인지 질문했을 때, 그 지역 여성은 "당신이 무엇을 파헤치려 하는지 알아요. 당신은 나에게 그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려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무어는 흥미를 느꼈다.[52][53] 그는 아넷 도어터가 어머니에게 말하지 않고 그와 함께 현장을 방문하도록 설득할 수 있었다. 무어는 사건이 기록되거나 구두로 전해지는 역사에서 사라진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센세이션을 일으킨 1주일 후, 1923년 1월의 몇 주는 마치 가족의 옷장에 있는 말할 수 없는 해골처럼 플로리다의 의식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54]
필로메나 고인스 도어터는 아들이 한 일을 알고 격분하여 그를 의절하겠다고 위협하고, 그를 흔든 다음 뺨을 때렸다.[58] 1년 후, 무어는 그 이야기를 CBS의 ''60분''에 가져갔고, 조엘 번스타인이 제작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저널리스트 에드 브래들리가 해설한 작품의 배경 보도원이었다. 필로메나 도어터는 가족들에게 전화하여 무어의 이야기와 브래들리의 텔레비전 폭로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선언했다.[55] 플로리다 대학교의 심리학자는 나중에 주 청문회에서 로즈우드 생존자들이 비밀에 의해 악화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징후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 그들은 백인과의 사회화에 대한 두려움, 부인, 그리고 과잉 경계를 보였는데, 특히 자녀들과 관련하여 명확하게 표현했으며, 무관심의 발작이 있었다.[32] 이러한 특징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들은 로즈우드의 공격 이후 삶에서 종교적 신앙을 필수적인 것으로 여겼으며, 쓴맛을 느끼지 않도록 했다. 로즈우드에 대한 책을 쓴 마이클 도르소는 "모두가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들만의 말로, 만약 쓴맛을 느끼고, 미워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이 그들을 잠식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했다.[56] 로비 모틴은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묘사했다. "나는 내 삶에 뭔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것이 나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나거나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10]
로즈우드의 유산은 레비 카운티에 남아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시더 키나 섬너에는 흑인 주민이 살지 않았다. ''시더 키 비콘''의 백인 편집장인 로빈 래프티스는 무어의 이야기를 게재하여 공개 토론의 장을 열려고 했다. 그녀는 수년 동안 일화를 수집해 왔으며, "숲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얼마나 심각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알았어요, 여러분, 해골이 있는 옷장을 열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실수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반복할 운명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래프티스는 "우리는 당신과 당신의 아이들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성냥 한 개면 됩니다."라는 쪽지를 받았다.[57] 플로리다 대학교 역사학자 데이비드 콜번은 "주민들과 그들의 친척들이 일어난 일에 대해 부인하는 패턴이 있으며, 실제로 그들은 여러 차례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고, 관련된 사람을 식별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또한 관련된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왔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58]
1993년, 흑인 부부가 치프랜드에서 워싱턴 D.C.로 은퇴하여 로즈우드에 정착했다. 그들은 ''워싱턴 포스트''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치프랜드에서 흑인 친구들을 데려왔을 때, 그들은 항상 해가 지기 전에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그들은 해가 진 후 로즈우드에 있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물어봤지만, 사람들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습니다."[57]
4. 2. 정의를 위한 투쟁
로즈우드 학살 사건은 전국적인 뉴스 보도에도 불구하고 곧 잊혀졌다. 생존자들은 플로리다 주 전역으로 흩어져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많은 이들이 교육 대신 생계를 위해 육체 노동, 가정부, 구두닦이 등의 직업을 택했다.[32]생존자들은 겪은 일에 대해 침묵했다. 샘 카터의 조카딸 로비 모틴은 사건 당시 7세였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로즈우드에서 32km 떨어진 치플랜드로 가는 열차에 태웠다. 모틴의 아버지는 그날 창고로 가는 길에 로즈우드를 피해 갔는데, 이는 그들의 생명을 구한 결정이었다. 모틴의 가족은 로즈우드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으며, 모틴의 할머니는 "누군가 우리가 어디 출신인지 알면 우리를 찾아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32]
흑인 가족들 사이에서는 구술 전통이 예외였다. 미니 리 랭글리는 60년간 자녀들에게 이 이야기를 숨겼다. 그녀는 "백인들이 우리를 집에서 쫓아내려 했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백인을 신뢰하기까지는 수십 년이 걸렸다. 어떤 가족들은 로즈우드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그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금했다. 아넷 닥터는 어머니 필로미나 고인스 닥터로부터 패니 테일러가 폭행당했다고 주장한 날 세라 캐리어와 함께 있었고 실베스터 캐리어와 집에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마다 자녀들에게 로즈우드에 대해 이야기했다. 닥터는 어머니의 이야기에 사로잡혔고, 이모들에게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었다.[32]
1982년, 세인트피터스버그 타임스의 조사 기자 게리 무어는 이 이야기를 추적하기 위해 탬파 지역에서 세다키로 갔다. 세다키의 "우울한 분위기"에 대해 현지인에게 언급하고, 20세기 초 거의 절반이 흑인이었던 남부 마을이 왜 전부 백인인지 묻자, 현지 여성은 "당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안다. 당신은 내가 그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바란다"고 답했다. 무어는 흥미를 느꼈다. 그는 아넷 닥터를 설득하여 현장 방문에 동행하게 했다. 무어는 "1923년 1월의 주들은 가족 옷장 속의 해골처럼 플로리다 주의 의식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 같다"고 언급했다.[32]
필로미나 고인스 닥터는 아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게 되자 격분하여 그를 부인하고 때렸다. 1년 후, 무어는 이 이야기를 CBS의 〈60 Minutes〉에 가져갔고, 조엘 번스타인이 제작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저널리스트 에드 브래들리가 서술한 작품의 배경 기자가 되었다. 필로미나 닥터는 가족들에게 무어의 이야기와 브래들리의 텔레비전 보도가 거짓이라고 말했다. 플로리다 대학교의 심리학자는 주의 청문회에서 로즈우드 생존자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보였으며, 비밀로 인해 악화되었다고 증언했다. 사건 후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백인과의 관계에 대한 두려움, 거부, 과잉 경계 등을 나타냈다. 이러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생존자들은 종교적 믿음을 통해 쓰라림을 극복했다. 로즈우드에 대해 저술한 마이클 도소는 "모두가 자신의 방식과 말로, 만약 쓰라림을 허용하면 미움이 그들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로비 모틴은 "인생이 나에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내 인생에서 무엇이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화가 나거나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32]
로즈우드의 유산은 레비 카운티에 남아있었다. 수십 년 동안 흑인 주민들은 세다키나 섬너에 살지 않았다. 세다키 비콘의 백인 편집자 로빈 래프티스는 무어의 이야기를 인쇄하여 공개 포럼에서 사건을 다루려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일화를 수집해 왔고, "숲 밖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것에 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얼마나 나빴나? 우리는 모른다... 그래서 나는 '좋아, 모두들, 만약 우리가 실수로부터 배우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반복할 운명이기 때문에 난 해골들과 함께 옷장을 열고 있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래프티스는 "우리는 당신과 당신의 자녀를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 안다. 필요한 것은 일치뿐이다"라는 협박 편지를 받았다. 플로리다 대학교 역사학자 데이비드 콜번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주민들과 그 친척들이 연루된 사람들을 밝히기를 원하지 않았고,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을 지목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말했다.[32]
1993년, 흑인 부부가 워싱턴 D. C.에서 로즈우드로 이주했다. 그들은 워싱턴 포스트에 "우리가 치플랜드에 친구가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해가 지기 전에 떠나기를 원했다. 그들은 어두운 후에 로즈우드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우리는 항상 궁금했지만 사람들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고 말했다.[32]
1991년 필로메나 고인스 박사가 사망했다. 그녀의 아들 아넷은 그 당시 로즈우드 사건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원래 로즈우드 배상 소송에서 제외되었지만, 언론의 보도로 이 사실이 드러난 후 포함되었다. 1993년, 아넷 고인스, 미니 리 랭글리 및 다른 생존자들을 대리하여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보호하지 못한 것에 대해 주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66] 이 사건은 플로리다에서 가장 큰 법률 회사 중 한 곳에서 무료 변론으로 맡게 되었다.[32]
생존자들은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을 확대하기 위해 홍보 캠페인에 참여했다. 랭글리와 리 루스 데이비스는 1993년 마틴 루터 킹 데이에 ''모리 포비치 쇼''에 출연했다. 게리 무어는 1993년 3월 7일자 ''마이애미 헤럴드''에 로즈우드에 관한 또 다른 기사를 게재했다. 그는 이 기사를 게재하기 위해 신문 편집자들과 약 1년 동안 협상해야 했다. 처음에 그들은 이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회의적이었고, 두 번째로 ''마이애미 헤럴드''의 기자 로리 로자는 1992년 12월에 대부분의 생존자가 제외된 사기성 배상 소송의 첫 단계를 보도했었다. 한 편집자는 "만약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우리는 그것이 역사책에 다 실렸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썼다.[59]
아넷 닥터는 전 세계 인쇄 매체와 텔레비전 기자들에게 로즈우드 사건의 이야기를 했다. 그는 로즈우드에 살았던 역사적 주민들의 숫자와 캐리어 가옥 포위 공격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를 늘렸으며, 조지아주 애틀랜타와 비교하여 로즈우드의 현대적 중요성을 과장했다. 닥터는 로즈우드 사건이 계속 뉴스에 나오기를 바랐다. 그의 설명은 거의 수정 없이 인쇄되었다.[60] 역사가 토마스 다이에 따르면, 닥터의 "전국 각지 단체, 특히 전미 유색 인종 발전 협회(NAACP)에 대한 강력한 연설과 그의 많은 감동적인 텔레비전 출연은 입법부에 로즈우드에 관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력을 가했다".[48] 1996년 12월, 닥터는 잭슨빌 비치에서 열린 회의에서 로즈우드에서 30명의 여성과 어린이가 생매장되었으며, 그의 사실은 언론인 게리 무어에 의해 확인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어가 청중 속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당황했다. 홀랜드 앤 나이트(Holland & Knight) 법률 회사가 배상 소송을 계속 진행하면서, 1923년 폭력 사태 당시 로즈우드에 살았던 13명의 생존자를 대리하여 입법부에 배상을 청구했다.[61]
소송은 1993년 1월 1일 마감 기한을 놓쳤다. 플로리다 하원 의장은 형평성 있는 청구 법안을 평가할 수 있도록 그룹을 구성하여 연구하고 보고서를 제공하도록 의뢰했다. 그들은 인터뷰를 포함한 연구와 보고서 작성을 완료하는 데 거의 1년이 걸렸다. 1993년 12월 22일, 플로리다 주립 대학교, 플로리다 A&M 대학교, 플로리다 대학교의 역사학자들은 로즈우드 학살에 대한 1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400페이지의 부속 문서 포함)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이용 가능한 1차 문서와 사건의 흑인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다. 생존자들의 청구 제기에 따라 시더 키와 섬너 주민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백인 참여자들은 역사학자들에게 인터뷰를 제공하는 것을 꺼렸다. 보고서는 1923년에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고 샘 카터의 린치를 우연히 목격했던 어니스트 파햄과의 인터뷰와 사망한 시더 키 주민 제이슨 맥엘빈이 사건에 대해 녹음한 설명을 사용했다.[62] 파햄은 이 사건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63] 이 보고서의 제목은 "1923년 1월 플로리다주 로즈우드에서 발생한 사건의 문서화된 역사"였다.[64][65] 1982년 로즈우드 사건을 다시 수면 위로 올린 ''세인트 피터스버그 타임스''에 기사를 쓴 조사 기자 게리 무어는 보고서의 명백한 오류를 비판했다. 위촉된 그룹은 대중의 논의 없이 이러한 가장 심각한 오류를 철회했다. 그들은 최종 보고서를 플로리다 이사회에 전달했고, 이 보고서는 입법 기록의 일부가 되었다.[48]
플로리다 주의 인종 폭력 피해자 보상 법안 심의는 미국 주 정부에서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반대론자들은 이 법안이 위험한 선례를 만들고, 로즈우드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플로리다 주민들에게 생존자와 후손에 대한 보상 책임을 떠넘긴다고 주장했다.[58][66] 플로리다 주를 대표하는 제임스 피터스는 이 소송에서 제기된 법 집행관인 워커 보안관과 하디 주지사가 오래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제한 시효가 적용된다고 주장했다.[66] 그는 또한 보고서의 단점을 지적했다. 역사학자들은 보상을 염두에 두고 보고서를 작성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워커 보안관과 하디 주지사의 행동에 대한 결론을 제시했다. 이 보고서는 법률 전문가가 아닌 역사학자들이 주도한 조사에 근거했으며, 그들은 이미 사망한 증인들의 전언에 의존했다. 비평가들은 일부 보고서 작성자들이 인터뷰에서 유도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48]
법안의 취지에 동의하는 의원들조차도 로즈우드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 시대의 전형적인 사건이었다고 주장했다. 게리 무어가 인터뷰한 한 생존자는 로즈우드를 예외적인 사건으로 취급하여 세상 전체가 로즈우드가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은 "비열한" 일이라고 말했다.[54] 법안을 지지하는 주 의원인 민주당의 알 로슨과 공화당의 미겔 드 그란디는 백인에게 잔혹한 행위를 당한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노예와는 달리, 로즈우드의 주민들은 세금을 납부하고 자급자족하는 시민이었으며, 지역 및 주 법 집행 기관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에 흑인에 대한 폭도들의 린치는 즉흥적이고 빠르게 끝나는 경향이 있었지만, 로즈우드 사건은 며칠에 걸쳐 지속되었다.[58] 일부 의원들은 쿠 클럭스 클랜 회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증오 편지를 받기 시작했다. 한 의원은 자신의 사무실이 이 법안에 대해 전례 없는 반응을 받았으며, 찬성하는 사람보다 반대하는 사람이 10배나 많았다고 말했다.[48]
1994년, 주 의회는 법안의 타당성을 논의하기 위한 청문회를 열었다. 리 루스 데이비스는 증언이 시작되기 몇 달 전에 사망했지만, 미니 리 랭글리, 아넷 고인스, 윌슨 홀, 윌리 에반스, 그리고 로즈우드에서 온 여러 후손들이 증언했다. 다른 증인으로는 플로리다 대학교의 임상 심리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생존자들이 외상 후 스트레스를 겪었다고 증언했고, 재산 피해 규모에 대한 전문가들의 증언이 있었다.[48] 랭글리가 먼저 연설을 시작했고, 청문회장에는 언론인과 구경꾼들이 가득했는데, 그들은 그녀의 발언에 매료된 것으로 알려졌다.[67] 어니스트 파햄도 자신이 본 것에 대해 증언했다. 샘 카터의 죽음에 관해 법 집행 기관과 언제 연락을 받았는지 묻는 질문에 파햄은 증언하기 2주 전에 카터의 죽음에 대해 처음 연락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샘 카터의 검시 심리는 1923년 1월 총격을 받은 다음 날 열렸고, 그는 카터가 "미상의 인물"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결론지었다.[68]
모든 증거를 청취한 후, 플로리다 주의회 증언을 주재한 특별 관리인 리처드 힉슨은 주가 로즈우드의 전 주민들에게 배상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저는 그들이 보상에 대해 신경 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단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진실이 알려지기를 바랐다고 생각합니다. 50센트를 받든 1억 5천만 달러를 받든 상관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69]
플로리다 주의 흑인 및 히스패닉계 의원들은 로즈우드 보상 법안을 대의로 삼아, 민주당 소속 로턴 차일스 주지사가 법안에 찬성 투표를 하도록 민주당이 지배하는 주 의회를 압박할 때까지 그의 의료 계획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했다. 차일스는 초기부터 보상 법안을 지지했고, 입법 의원들이 이전에 그의 의료 계획에 대한 지지를 약속했기 때문에 불쾌감을 느꼈다.[66] 의회는 법안을 통과시켰고, 차일스 주지사는 생존자와 그 후손을 보상하기 위한 2100000USD 규모의 로즈우드 보상 법안에 서명했다. 차일스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일곱 명의 생존자와 그들의 가족들이 서명식에 참석했다.
> 이러한 생존자와 그 가족들의 강한 의지와 헌신 덕분에, 오랫동안의 침묵이 마침내 깨지고 그림자가 걷혔습니다... 잊혀지는 대신, 그들의 증언으로 인해 로즈우드의 이야기는 우리 주 전역과 우리 나라 전역에 알려졌습니다. 이 법은 로즈우드의 비극이 다가오는 세대에 의해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임을 보장합니다.[66]
원래 생존자들에게 제안된 총 보상액은 7000000USD였으며, 이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의회는 결국 1500000USD로 결정했다. 이는 1923년 동안 로즈우드에 살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각 개인에게 150000USD를 지급하고, 같은 기간 동안 로즈우드에 재산을 소유한 조상이 있었음을 증명한 후 기금을 신청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한 500000USD의 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70] 증언한 네 명의 생존자는 자동으로 자격을 얻었고, 다른 네 명은 신청해야 했다. 전 세계에서 400개 이상의 신청서가 접수되었다.
로비 모틴은 이 기간 동안 생존자로서 나섰다. 그녀는 1923년에 로즈우드에 살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총 9명의 생존자가 보상을 받았다. 보상을 받는 것은 일부 가족을 변화시켰고,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일부 후손들은 이를 거부했고, 다른 사람들은 친구와 친척들이 구호품을 요구하는 언론을 피하기 위해 숨어 다녔다. 일부 후손들은 형제자매들끼리 기금을 나눈 후 각각 100달러 남짓 받았다.[71] 나중에 플로리다 교육부는 로즈우드 후손과 소수 민족을 위한 로즈우드 가족 장학 기금을 설립했다.[72]
4. 3. 역사적 기억과 유산
로즈우드 학살과 이후의 침묵, 보상 청문회는 1996년 마이크 도르소(Mike D'Orso)의 저서 『심판의 날처럼: 로즈우드라는 마을의 파멸과 구원(Like Judgment Day: The Ruin and Redemption of a Town Called Rosewood)』의 주제였다. 이 책은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 베스트셀러였으며, 조지아 대학교(University of Georgia) 도서관과 남부 지역 위원회가 인종 및 사회적 불평등을 강조한 작가에게 수여하는 릴리안 스미스 도서상(Lillian Smith Book Award)을 수상했다.[73]
존 싱글턴(John Singleton) 감독의 1997년 영화 ''로즈우드(Rosewood)''는 이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미니 리 랭글리(Minnie Lee Langley)는 세트 디자이너 자료 제공자로, 아네트 닥터(Arnett Doctor)는 컨설턴트로 참여했다.[77][74] 로즈우드와 서머 마을은 레비 카운티에서 멀리 떨어진 플로리다 중부에 재현되었다. 그레고리 포이리에(Gregory Poirier)의 영화 버전에서는 '만'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서부 영화 스타일의 영웅을 등장시켰다. 역사적 인물들을 조합하여 캐릭터를 구성했으며, 해피 엔딩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E.R. 십(E.R. Shipp)은 싱글턴의 젊음과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의 배경이 로즈우드 이야기를 다루는 데 기여했다고 보았다. 그녀는 흑인들을 희생자로 보는 이미지를 거부하고, "흑인 가족이 온전하고 사랑스러우며 번영하는 목가적인 과거와, 올가미에서 벗어나 두 자루의 총으로 폭도에 맞서 싸워 많은 여성과 아이들을 죽음에서 구하는 흑인 슈퍼히어로"를 묘사한 점에 주목했다.[76] 싱글턴은 "이 나라에서 흑인들이 겪은 공포와 악의 많은 부분이 남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두려움이 아닌 깊은 경멸을 느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다루는 나의 방식이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75]
영화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십은 싱글턴의 허구적 이야기에 대해 "많은 것을 가정하고 그 이상을 만들어낸다"고 평했다.[76] 영화는 목격자 증언보다 훨씬 많은 사망자를 암시한다. 게리 무어(Gary Moore)는 외부 캐릭터가 로즈우드 시민들에게 반격하도록 영감을 주는 것은 생존자들을 모욕하는 것이라 비판하며, 부풀려진 사망자 수를 지적하고 영화를 "환상의 흥미로운 경험"이라고 칭했다.[77] 반면, 2001년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스탠리 크라우치(Stanley Crouch)는 ''로즈우드''를 싱글턴의 최고작으로 꼽으며, "미국 영화 역사상 남부의 인종차별적 히스테리가 이토록 분명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색깔, 계급, 성이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가 높이 평가했을 수준으로 엮여 있다."라고 썼다.[78]

2004년, 플로리다 주는 로즈우드를 플로리다 문화유산 랜드마크로 지정하고, 24번 주도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명시하고 지역 사회의 파괴를 설명하는 역사적 표지판을 세웠다.[79] 교회, 상점, 몇몇 집(특히 존 라이트의 집)을 포함한 흩어진 구조물들이 남아있다. 2018년 5월 2일, 마지막 생존자로 알려진 메리 홀 다니엘스가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98세로 사망했다.[80] 2020년에는 이전에 생존자로 알려지지 않았던 베라 고인스-해밀턴이 플로리다주 라코치에서 100세로 사망했다.[81]
로즈우드 후손들은 학살을 알리기 위해 로즈우드 헤리티지 재단과 리얼 로즈우드 재단(Real Rosewood Foundation, Inc.)을 설립했다. 로즈우드 헤리티지 재단은 국제 순회 전시회를 열었고, 플로리다주 데이토나 비치의 베튠-쿡먼 대학교 도서관에 영구 전시관이 있다.[79] 리얼 로즈우드 재단은 플로리다 중부 사람들에게 인도주의적 상을 수여하고, 로버트 워커 보안관, 존 브라이스, 윌리엄 브라이스 후손들에게 무명 영웅상을 수여하여 흑인들을 보호했던 주민들을 기렸다.[82] 재단 이사이자 로즈우드 학교 교사의 조카인 리지 젠킨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런 종류의 역사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수년 동안 이야기를 전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제게 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라고 하셨고, 그래서 저는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슬픈 이야기지만, 모두가 들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83]
젠킨스의 지도 아래, 리얼 로즈우드 재단은 존 라이트의 집을 플로리다주 아처로 옮겨 박물관으로 만들 기금을 모으고 있다.[84] 2020년, 플로리다 주는 로즈우드 가족 장학금 프로그램을 설립하여 직계 후손인 매년 최대 50명의 학생에게 최대 6100USD를 지급한다.[85]
5.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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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image was originally published in a news magazine in 1923, referring to the destruction of the town. Its veracity is somewhat disputed. Eva Jenkins, a Rosewood survivor, testified that she knew of no such structure in the town, that it was perhaps an outhouse. Rosewood houses were painted and most of them neat. However, the Florida Archives lists the image as representing the burning of a structure in Rosewood. (D''Orso, pp. 238–239) ([http://www.floridamemory.com/PhotographicCollection/ Florida Memory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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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dar Key resident Jason McElveen, who was in the posse that killed Sam Carter, remarked years later, "He said that they had ''em, and that if we thought we could, to come get ''em. That be just like throwing gasoline on fire ... to tell a bunch of white people that." (Thomas Dye in ''The Historian'', 1996) Both Sylvester Carrier and Sam Carter had been previously arrested; Carrier for changing brands on cattle, and Carter for brandishing a shotgun at a sheriff''s deputy. Carter had been released before being indicted, and Carrier, convinced that he was wrongly arrested and the charges were brought about by whites competing for grazing lands, was forced to serve on a chain gang for the summer of 1918, which he deeply resented. (Jones ''et al.'', "Incident at Rosewood", p. 30)(D''Orso, p. 104) Carrier''s demeanor was vastly different from other black residents of Levy County. He was known to confront white people whom his younger sisters claimed had been rude to them, and made clear that they would have to deal with him in the future. ([[#Appendices|Jones, ''et al.'' "Appendices"]], pp. 215–216.) Arnett Doctor said that the story about Taylor being raped arose during the three-day span between the death of Sam Carter and the standoff at the Carrier house ([[#Appendices|Jones ''et al.'', "Appendices"]], p. 150.) Carrier''s wife was of mixed ancestry and so light skinned she could [[Passing (racial identity)|pass for white]]. All these elements, according to Doctor, made Sylvester Carrier a target. ([[#Appendices|Jones, ''et al.'', "Appendices"]], 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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