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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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룩퉁은 라마 4세 시대에 서양 악기를 도입한 플렝 타이 사콘에서 기원한 태국의 대중 음악 장르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수라폰 솜밧차로엔의 활약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1970년대에는 룩 크룽과의 경쟁, 1973년의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서민들의 정서를 대변하며 성장했다.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룩퉁은 쇼, 콘테스트, 춤, 의상 등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겪으며 발전했다. 룩퉁은 멜로디, 성조, 가사, 악기, 춤, 상품 등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하며,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룩퉁은 태국 음악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현재까지도 많은 가수들이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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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퉁 | |
---|---|
음악 장르 개요 | |
이름 | 룩퉁 (Luk thung) |
로마자 표기 | luk thung |
문자 그대로의 뜻 | 들판의 아이 노래 |
다른 이름 | 타이 컨트리 음악 |
설명 | 태국의 대중음악 장르로, 태국 시골의 삶, 사랑, 사회 문제를 다룬다. |
음악적 특징 | |
스타일 기원 | 쁠렝 타이 사콘 태국 민속 음악 |
문화적 기원 | 1930년대 (쁠렝 타이 사콘) 1960년대 (룩퉁) 태국 |
파생 장르 | 쁠렝 프어 치윗 |
퓨전 장르 | 전자 룩퉁 |
악기 | 보컬 서양 악기 태국 악기 전자 악기 |
관련 항목 | |
관련 음악 | 태국 전통 음악 태국 팝 음악 모람 |
2. 역사
룩퉁은 라마 4세 시대에 서양 악기의 영향을 받은 플렝 타이 사콘에서 비롯되었다.[3] 플렝 타이 사콘은 라마 5세 시대에 영화와 공연에 사용되며 발전했다. 1939년 Eua Sunthornsanan은 ''Suntharaporn'' 밴드를 결성하여 플렝 타이 사콘의 선구자가 되었다.[3]
1944년 피분 정부는 서양 댄스 음악에 대항하여 ''롬봉'' 춤을 소개했는데, 이는 ''룩 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2] 이후 북동부 출신 연주자들이 태국 음악 산업에 진출하면서 ''룩 퉁'' 음악에 북동부의 영향이 커졌다.[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태국은 경제 성장을 겪으며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회복되었다. 예술가들은 녹음 활동을 재개했고, 사회적 위기와 정부의 압박, 정치 및 경제적 문제를 다룬 가사가 등장했다. ''룩 퉁''의 원래 형태는 ''플렝 탈랏'' ("시장 음악") 또는 ''플렝 치윗'' ("생명 음악")이라고 불렸다. 초기 ''플렝 치윗'' 예술가로는 쌩 나파 분라-시, 사네 코만춘, 수라폰 솜밧차른 등이 있다.
''룩 퉁''이라는 용어는 1964년에 널리 알려졌다. 태국 텔레비전 채널 4의 매니저였던 프라콥 차이피팟에 따르면, 1964년 5월 11일 쭘농 랑시쿨이 "플렝 차오 반" ("민요")이라는 TV 쇼를 시작했으나 부정적인 반응으로 중단되었다가, 12월에 "플렝 룩 퉁" ("들판의 아이 음악")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시작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4] 룩퉁의 원형 중 하나는 태국 민요(플렝 픙므엉)이며, SP 레코드와 라디오의 보급으로 곡의 길이가 짧아졌다. 또한, 영화 보급 이전에는 극중에 노래가 삽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연극 등의 무대 음악도 룩퉁의 원형 중 하나였다.[5] 룩퉁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기록은 1964년 5월 1일, 참농 랑시꾼(짬농 랑씨꾼)이 제작한 라디오 노래 프로그램명 "룩퉁 가요(เพลงลูกทุ่ง)"이다.[6] 초기에는 농작업과 관련된 노래가 많았다.
1970-72년 룩퉁의 첫 번째 경쟁 상대는 룩 크룽이었다. 룩퉁과 룩 크룽 모두 영화 주제가나 삽입곡으로 인기를 얻었으나, 서민적인 룩퉁이 태국 서민들의 지지를 받아 룩 크룽의 인기는 시들해졌다.[1]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태국 서민들은 룩퉁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수라폰 솜밧차른을 시작으로 하는 룩퉁 가수들의 인기가 급상승했다.[8] 피의 물요일 사건 이후, 룩퉁은 농민의 삶보다는 개인의 심상과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노래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9]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룩퉁은 룩퉁 쇼, 콘테스트, 백댄서의 춤과 의상 등에서 혁신적인 변화와 함께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촌라티 탄통(촌라티 탄통)등 다양한 작사·작곡가와 가수들이 등장하여 룩퉁의 인기를 태국 전역에 확산시켰다. 당시 인기 남성 가수로는 사얀 싸야(사얀 싸야) 등이 있으며, 여성 가수의 여왕은 품푸앙 둥짠([พุ่มพวง ดวงจันทร์])이었다.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룩퉁은 정체기를 겪었다. 해외 팝 음악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들이 잇따라 등장하여 인기를 얻었지만, 룩퉁계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1992년, 잉용 욧부앙암이 「솜시 1992([https://www.youtube.com/watch?v=lbm5H3wfmTc สมศรี 1992])」를 발표하면서 새로운 룩퉁의 시대를 열었다.
199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룩퉁 업계에 참여하는 사람은 끊이지 않고 있다.[10] RS 프로모션(현재는 R 사이암)과 GMM GRAMMY사는 룩퉁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과거 룩퉁은 라디오 AM파만으로 들을 수 있었지만, 영화, 텔레비전, 인터넷 등으로 그 매체를 넓혀왔다.
2. 1. 초기
룩퉁의 초기 형태는 라마 4세 시대에 오케스트라와 전자 악기 같은 서양 악기의 영향을 받은 플렝 타이 사콘에서 비롯되었다. 플렝 타이 사콘은 라마 5세 시대에 계속 발전하여 영화와 무대 공연에서 선보여졌다. 1939년 Eua Sunthornsanan은 최초의 태국 ''사콘'' 밴드인 ''Suntharaporn''을 결성했고, 2,000곡이 넘는 곡을 작곡하여 플렝 타이 사콘의 선구자가 되었다.[3]1944년 피분 정부의 미술부는 서양 댄스 음악에 대항하여 ''롬봉'' 춤을 소개했는데, 이는 ''룩 퉁'' 형성에 중요한 단계였다. 우본 랏차타니 출신 Tumthong Chokchana(일명 Benjamin), 로이엣 출신 Chaloemchai Sriruecha와 같은 북동부 출신 연주자들이 태국 음악 산업에 진출하면서 ''룩 퉁'' 음악에 북동부의 영향이 커졌다.[2]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태국은 경제 성장을 겪었고, 엔터테인먼트 및 상업 산업도 회복되었다. 예술가들은 녹음 활동을 재개했고, 전쟁의 여파로 새로운 음악 트렌드가 나타났는데, 특히 사회적 위기와 정부의 압박, 정치 및 경제적 문제를 다룬 가사가 등장했다.
''룩 퉁''의 원래 형태는 ''플렝 탈랏'' ("시장 음악") 또는 ''플렝 치윗'' ("생명 음악")이라고 불렸다. 초기 ''플렝 치윗'' 예술가로는 쌩 나파 분라-시, 사네 코만춘, 수라폰 솜밧차른 등이 있다.
''룩 퉁''이라는 용어는 1964년에 널리 알려졌다. 태국 텔레비전 채널 4의 매니저인 프라콥 차이피팟에 따르면, 1964년 5월 11일 쭘농 랑시쿨이 "플렝 차오 반" ("민요")이라는 TV 쇼를 시작했으나 부정적인 반응으로 중단되었다가, 12월에 "플렝 룩 퉁" ("들판의 아이 음악")으로 이름을 바꿔 다시 시작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4]
룩퉁의 원형 중 하나는 태국 민요(플렝 픙므엉)이며, 룩퉁 초기에는 SP 레코드와 라디오의 보급으로 곡의 길이가 짧아졌다. 또한, 연극 등의 무대 음악도 룩퉁의 원형 중 하나로, 영화 보급 이전에는 극중에 노래가 삽입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5]
룩퉁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기록은 1964년 5월 1일, 참농 랑시꾼(짬농 랑씨꾼)이 제작한 라디오 노래 프로그램명 "룩퉁 가요(เพลงลูกทุ่ง)"이다.[6] 초기에는 농작업과 관련된 노래가 많았다.
2. 2. 경쟁
1970-72년 룩퉁의 첫 번째 경쟁 상대는 룩 크룽이었다. 룩퉁과 룩 크룽 모두 영화 주제가나 삽입곡으로 인기를 얻어 이 시기에 많은 명곡이 만들어졌다. 여러 가수가 영화에 출연하고 심지어 주연을 맡아 인기를 얻는 사람도 있어, 그 경쟁은 치열했지만, 우등생적인 룩 크룽보다 서민적인 룩퉁이 태국 서민들의 지지를 받아 이 경쟁 이후 룩 크룬의 인기는 시들해졌다.[1]2. 3. 세정과 룩퉁
피의 일요일 사건 이후, 태국 서민들은 룩퉁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수라폰 솜밧차른을 시작으로 하는 룩퉁 가수들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특히 가사 내용이 현실적인 소재를 다루고, 운율, 은유, 대구, 의인법 등의 문예적인 기법을 사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경향은 이후 태국 팝, 록 등의 가사에도 영향을 주어, 태국 유행가는 전반적으로 가사의 문예 수준이 높아졌다.[8]피의 물요일 사건 이후, 룩퉁은 농민의 삶보다는 개인의 심상과 아름다움에 초점을 맞추고, 다양한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노래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9] 1976년 말부터 1977년까지 룩퉁 업계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여 침체되었고, 음반 판매량도 감소했다.
2. 4. 새로운 물결
1977년부터 1985년까지 룩퉁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룩퉁 쇼, 콘테스트, 백댄서의 춤과 의상 등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다양한 작사·작곡가와 가수들이 등장하여 룩퉁의 인기를 태국 전역에 확산시켰다.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사·작곡가로는 촌라티 탄통(촌라티 탄통), 찰롱 푸사완(찰롱 푸사완), 캄피 쌩통([https://open.spotify.com/album/6Inkmv5cjgoeJgDSVewLwk 캄피 쌩통]), 차이야폰 므엉수판([https://open.spotify.com/artist/348Qk2Xl3FKuG1XLPz4hOR 차이야폰 므엉수판]), 쑤차티 티안통(쑤차티 티안통), 춘차이 찤파웡([https://www.youtube.com/watch?v=c3eYBTyTY1o 춘차이 찤파웡]), 도이 인타논([https://www.youtube.com/watch?v=-2LU0ChiszY 도이 인타논]), 다오 반돈(다오 반돈) 등이 있다.
당시 인기 남성 가수로는 사얀 싸야(사얀 싸야), 크리앙크라이 크룽사얌([https://th-th.facebook.com/people/%E0%B9%80%E0%B8%81%E0%B8%A3%E0%B8%B5%E0%B8%A2%E0%B8%87%E0%B9%84%E0%B8%81%E0%B8%A3-%E0%B8%81%E0%B8%A3%E0%B8%B8%E0%B8%87%E0%B8%AA%E0%B8%A2%E0%B8%B2%E0%B8%A1/100007611706567 크리앙크라이 크룽사얌]), 쑤라차이 쏨밧차른(쑤라차이 쏨밧차른 - 쑤라폰 쏨밧차른의 아들), 욧락 삿락차이, 손차이 메크위차이(손차이 메크위차이), 손펫 쏜수판(손펫 쏜수판), 폰 파이쏜([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gJyyHF3vrOov-b3RAVSRbmCFVp3baI2U 폰 파이쏜]) 등이 있다.
여성 가수의 여왕은 품푸앙 둥짠([พุ่มพวง ดวงจันทร์])이었으며, 그 외에 난티다 깨우부아사이(난티다 깨우부아사이), 다오타이 므엉뜨랑([https://www.youtube.com/watch?v=Y7YmMaxqcEM 다오타이 므엉뜨랑]), 홍통 다오웃돈(홍통 다오웃돈), 솟시 펌세삭산([https://www.youtube.com/watch?v=m4RuvmJOCaM 솟시 펌세삭산]), 오이팁 빤야톤([https://www.youtube.com/watch?v=dn9xLevbbrA 오이팁 빤야톤]) 등이 있었다.
1985년 이후, 여성 가수의 콘서트는 해마다 패셔너블해지고 있으며, 이는 품푸앙 둥짠이 시작한 경향이다. 특히 1986년 중반 센트럴 플라자(เซ็นทรัลพลาซ่า)에서의 콘서트가 유명하다.[9]
2. 5. 성쇠
1988년부터 1992년까지 룩퉁은 정체기를 겪었다. 해외 팝 음악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들이 잇따라 등장하여 인기를 얻었지만, 룩퉁계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1992년, 만반의 준비를 갖춘 잉용 욧부앙암이 「솜시 1992([https://www.youtube.com/watch?v=lbm5H3wfmTc สมศรี 1992])」를 발표했다. 이 곡은 서양 음악과 옛 태국 창법을 융합한 새로운 룩퉁이었다. 편곡은 서양 음악처럼 웅장했지만, 창법은 기존 프로페셔널 룩퉁 가수의 안정감을 부정하려는 듯 아마추어 시골 가수처럼 목소리를 뒤집거나, 꺾기도 불안정하게 넣는 등, 선조들의 창법으로 회귀한 듯했다. 그러나 높은 가창 기술로 뒷받침되어 흠잡을 데 없는 노래였다. 평론가들이 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고심하는 사이에, CD와 카세트 테이프는 폭발적으로 판매량을 늘렸다.
한편, 니타야 분숭넌(니타야 분숭넌)의 '턴마이(ทางใหม่ - 새로운 길)'처럼 중화의 추세에 맞춘 새로운 시도는 계속 발매될 것이지만, 그것은 룩퉁이 아니었다. 1988년부터 1992년 사이에 등장하여 일세를 풍미했던 크로스오버나 퓨전 등 십 대들에게 인기를 끄는 류의 음악들은 룩퉁에 비해 훨씬 다양한 융합을 보였지만,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2. 6. 룩퉁의 현재
1998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룩퉁 업계에 참여하는 사람은 끊이지 않고 있다.[10] 1990년대 중반까지 신흥 레이블 중 하나였던 RS 프로모션(현재는 R 사이암)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세력을 확대하여, 지금은 GMM GRAMMY사와 쌍벽을 이루는 연예 기획사로 성장했다. 지금도 R 사이암의 주력은 룩퉁이지만, 최근에는 음악뿐만 아니라, 93년부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RS 러브 드라마(อาร์เอส รักละคร)" 시리즈라고 불리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 드라마와 주제가가 세트로 되어 히트하고 있다. 그 전까지 룩퉁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젊은 층도 교묘하게 끌어들여 업적을 늘리고 있다. 곡은 물론 룩퉁이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가수는 콧 짝라판 아프콘부리일 것이다. 그는 기존 룩퉁 팬에 더해 도시 젊은 리스너까지 끌어들여 R 사이암 경영진을 기쁘게 했다.과거 룩퉁은 라디오 AM파만으로 들을 수 있었지만, 이윽고 영화, 텔레비전, 인터넷 등으로 그 매체를 넓혀왔다. 시대와 방법이 변해도, 룩퉁은 우리의 마음을 계속 사로잡고 있다.
3. 룩퉁의 요소
룩퉁은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된 음악 장르이다.
멜로디와 리듬 면에서는 초기에는 태국 민요에서 유래한 것이 많았으며, 민요의 선율이나 가사의 일부를 차용했다. 중부 룩퉁은 선율을 중시했고, 동북부 룩퉁은 강한 리듬이 특징이다.[5] 룩퉁의 고전 명작이나 외국 멜로디를 도입하기도 했다.[11] 추임새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며, 콜 앤 리스폰스 형태로 사용되기도 한다.[5] 리듬 패턴은 다양하며, 템포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빨라지는 경향을 보였다. 많은 악곡은 펜타토닉 스케일을 기본으로 하지만, 7평균율에 의한 악곡도 있다.[5] 룩퉁 멜로디와 일본 엔카의 유사성이 언급되기도 하지만, 룩퉁은 일본 엔카를 모방하여 발생한 음악이 아니다.[5]
성조가 있는 태국어의 특성상, 노래를 부를 때 멜로디와 성조가 결합되어 독특한 프레이징이 나타난다. 이는 재즈와의 친화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13]
가사는 표준 태국어와 이산어를 비롯한 방언을 사용하며, 농촌의 전통, 인간관계, 불교 신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11] 특히 여성의 이미지는 룩퉁 가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11]
초기 룩퉁 녹음에는 서양 악기가 사용되었지만, 이후 민족 음악을 위한 악기도 사용하게 되었다.[15]
룩퉁 콘서트나 TV 출연 시에는 춤꾼(항크르앙)들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수라폰 솜밧차른은 태국에서 처음으로 백 댄서를 이끌고 노래한 인물이다. 춤꾼들의 춤과 의상은 룩퉁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3. 1. 멜로디와 리듬
룩퉁 초기에는 전통적인 태국 민요에서 유래한 것이 많았으며, 민요의 선율이나 가사의 일부를 차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부 룩퉁은 선율을 중시했고, 쵸이(ฉ่อย), 이새우(อีแซว - 수판부리의 민요), 탐랏(ลำตัด - 수판부리 민요), 끄롱야오(กลองยาว - 미얀마 기원의 긴 북을 반주로 노래하는 민요), 배 노래(เพลงเรือ - 아유타야 등 민요), 수확 노래(เพลงเกี่ยวข้าว - 아유타야 민요) 등이 그 예이다.[5]동북부에서는 람 가요(เพลงลำ) 또는 모람(มอลำ)과 션(เซิ้ง)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람터이(ลำเต้ย), 람플른(ลำเพลิน), 람산완(ลำสารวัน)이 인기가 있었다. 선율적이고 인기 있는 것은 샌봉파이(เซิ้งบ้องไฟ)로, 이것들을 유래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부 룩퉁에 비해 강한 리듬이 특징이다.[5]
초창기부터 중기 무렵에는 룩퉁의 고전 명작에서 멜로디를 차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블루스 등의 리프와 같이 짧은 선율을 차용했으며, 폰 피롬 와이폿(พร ภิรมย์ ไวพจน์), 펫수판(เพชรสุพรรณ), 신나콘 크라이랏(ชินกร ไกรลาศ), 랑작티폰(หลังจากที่พร) 등이 자주 사용된 원곡이다.[5]
추임새(히우, ฮิ้ว 등)가 들어가는 경우도 있으며, 불교 의식이나 성직자의 노래 등에서 많이 나타났다. 오늘날에는 감격한 부분에서 콜 앤 리스폰스 형태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서양 음악의 영향을 받은 룩클룽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자연 발생적이라는 설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5]
외국 멜로디를 도입한 작품도 있는데, 특히 아시아 유래의 곡이 많아 중국, 인도, 라오스, 일본, 한국 등의 멜로디가 태국인들에게 친숙하다.[11]
리듬 패턴은 다양하며, 초창기에는 느린 템포의 작품이 많았으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템포가 빨라지는 경향을 보였다. 현재 4박자 악곡은 칼립소에 가까운 것이 많다. 동북부 모람의 영향을 받은 악곡은 빠른 2박자로 다운 비트에 강한 악센트를 두고, 반주의 타악기 등은 리듬이 뒤로 밀려 싱코페이션이 효과가 있는 댄서블한 연주가 된다. 도입부 인트로가 느리고 여유로운 템포 루바토에 반주 없는 아카펠라로 노래하다가, 돌변하여 강한 리듬을 뿜어내는 잘 짜여진 구성을 가진 곡도 많다.[5]
태국의 댄스 가요는 삼차(สามช่า・3ช่า - 3개의 차)라고 부르는데, 이는 차차차를 의미하지만 리듬 패턴의 "차차차"와는 전혀 다르다. 일본 가요곡의 "블루스"가 서양의 블루스 형식과 전혀 다른 것처럼, 태국에서 삼차는 춤출 수 있는 악곡의 총칭이다.[5]
선율은 다양하지만, 많은 악곡은 펜타토닉 스케일(요나누키 음계 등의 5음 음계)의 선법을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이는 룩퉁만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재즈, 록, 블루스, 각국의 민요, 동요 등에도 폭넓게 사용되므로 태국 고유의 수법은 아니다.[5]
드물게 태국 고전 음악에서 보이는 "7평균율"에 의한 악곡도 있다. 7평균율은 서양 음악이 1옥타브를 12등분하는 반면, 태국 고전 음악에서는 1옥타브를 7등분한 것으로, 라나트(ระนาด)라는 목금 등은 이 음계로 만들어져 있다. 12평균율과는 음계와 피치가 달라, 서양 음악의 절대음감 또는 상대음감을 가진 사람이 [https://www.youtube.com/watch?v=bL5OOuyuKoY 7평균율 연주]를 들으면 두통, 구역질 등의 불쾌감을 호소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폼판 뒨찬의 대표곡 "[https://www.youtube.com/watch?v=Bm3wdl0Cqn0 หม้ายขันหมาก](빈랑의 미망인)" 등은 7평균율로 만들어진 악곡으로, 새로운 시도라기보다는 잊혀진 전통으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음계는 주변 제국에서는 보이지 않고(아프리카 모잠비크 일부 부족에게서 보인다) 아시아에서는 태국 고유라고 할 수 있다.[5]
룩퉁 멜로디와 일본 엔카의 유사성 때문에 룩퉁을 "태국의 엔카와 같은 것"이라고 형용하기도 하지만, 공통점은 펜타토닉 스케일의 다용과 창법에서 꺾기를 넣는 정도이며, 이 둘은 일본과 태국에 한정되지 않고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드물지 않다. 일본 엔카는 단음계 선율이 주류이지만, 룩퉁에서는 장음계 선율의 악곡도 적지 않다. 메이지 시대 연설을 노래로 한 것에서 시작된 일본 엔카는 현대에 이르러 크게 변화했으며, 현재 스타일이 된 지 60년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태국 룩퉁이 현재 스타일의 일본 엔카보다 역사가 오래되었고 일본 엔카를 모방하여 발생한 음악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5]
3. 2. 성조와 선율

태국어는 타이-카다이어족 언어이며, 중국어와 마찬가지로 성조가 있다. 태국어에는 5종류의 성조가 있으며, 발성의 음정이 변화함으로써 의미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새로운 목재는 타지 않는다"는 태국어로 "ใหม่ ไม้ ไม่ ไหม้"라고 말하며, 각 단어는 "마이"로 소리나지만, 성조가 다르다. 태국 문자의 철자와 성조 기호에 의해 단어가 가진 의미가 명확해지고, 듣는 사람은 그 단어의 음정으로 의미를 파악한다.[12]
노래를 부를 때, 멜로디에 태국어를 얹으면 작곡자가 의도하는 선율과는 별개로 태국 단어가 가진 성조에 따른 음정의 상하가 더해진다. 성조를 희생하고 멜로디를 우선시하면 가사의 의미가 불분명해질 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의미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성조가 희생되는 일은 없다.[13]
원래 멜로디에 의도하지 않은 음정이 끼어드는 것은 당연하며, 이 음정이 [https://www.weblio.jp/content/%E3%82%A2%E3%83%9C%E3%82%A4%E3%83%89%E3%83%BB%E3%83%8E%E3%83%BC%E3%83%88 어보이드 노트](회피음)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어보이드 노트의 출현이 대담하고 특이한 화음 해석을 연상시키며, 태국 가요 특유의 프레이징의 큰 특징이 되고 있다. 어보이드 노트는 많은 경우, 텐션 노트로 구성된다. 그러나 최근에는 드물게 구성음을 전회시켜 대리 코드로 해석하여 연주되는 경우도 있으며, 이는 2000년 전후부터 태국 연주자들의 수준이 획기적으로 향상되고 음악 이론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에 기인한다.
이러한 텐션 노트나 대리 코드의 사용은 태국 가요가 재즈와의 친화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재즈풍으로 편곡된 악곡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룩퉁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태국어 가사로 불리는 가요에 공통적인 것으로, 특히 룩끄룽 등은 그 성립을 포함하여 재즈의 영향이 짙다.
3. 3. 가사
룩퉁의 가사는 표준 태국어와 이산어를 비롯한 방언을 사용하며,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농촌의 전통, 인간관계, 불교 신앙 등이 가사에 나타난다.[11] 민요, 축제, 사계절의 풍경, 의식 등도 가사의 소재로 활용된다.룩퉁 가사는 태국 농민 사회와 생활상을 반영하고, 태국 시골의 자연환경을 묘사한다. 밭, 강, 동물, 바람, 태양, 달빛, 별 등이 등장하며,[11] 노래 속 인물들은 주로 농촌 사람들이나 가난한 서민들이다. 직업, 집, 거주지, 의복, 식사, 오락, 미신, 점성술 같은 신념 체계와 가치관도 노래된다.[11]
특히 여성의 이미지는 룩퉁 가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순결, 배신, 남녀 간의 행복 등이 자주 노래된다.[11]
방언을 섞어 노래하는 대표적인 가수로는 차이 므앙싱, 룸펫 람싱, 송시리 핍라츙왓, 송펫 손스판, 사얀 사냐, 시라판 위라퐁 등이 있다. 켓 랏타칸 등은 북부 억양이 섞인 가사를 부른다.[11]
3. 4. 악기
초기 룩퉁 녹음에는 서양 악기가 사용되었다. ขุนวิจิตรมาตรา|쿤 위칫 마크라th(1930년대에 활약한 작사·작곡가)는 "초기 룩퉁 녹음에는 서양 악기가 사용되었습니다. 오래된 태국 노래. 토착 노래인데도"라고 말했다.그러나 이후 녹음 기회가 늘어나면서 그 연주에는 민족 음악을 위한 악기도 사용하게 되었다. 라나트(--) (ระนาด-목금), 소두앙(--) (ซอด้วง-이호), 칭(ฉิ่ง-심벌), 트레(แตร-관악기), 타폰(ตะโพน-북) 등이다.
이윽고 서양 악기와 협연할 수 있도록 자케(จะเข้-프렛 부착 3현 치터), 라나트 (ระนาด-목금) 등, 서양 악기의 음높이(피치)와 음계에 맞출 수 있도록 개조한 악기도 만들어지게 되었다.[15]
3. 5. 춤꾼
룩퉁에서는 콘서트나 TV 출연 시 가수가 노래하는 뒤에서 춤을 추는 춤꾼(항크르앙)들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수라폰 솜밧차른은 태국에서 처음으로 백 댄서를 이끌고 노래한 인물로, 1964년부터 1967년 사이에 4명에서 6명으로 댄서 수를 늘렸다. 인원이 많을수록 화려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이 춤꾼들을 "항크르앙(หางเครื่อง, 직역: 기계 장치의 꼬리)"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최초의 춤꾼들이 모두 촌부리 주사타힙 군 반사레(บางเสร่) 마을의 항크르앙 집락(หมู่บ้านหางเครื่อง)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에서 연상되어 댄서 의상 뒤에 커다란 깃털 장식을 꼬리로 부착했다. 이것이 곡에 맞춰 흔들리면서 리듬을 강조하는 "케야오 항크르앙(เขย่าหางเครื่อง, 직역: 기계 장치의 꼬리를 흔들다)"이라는 춤이 되었다. 리듬에 맞춰 의상의 장식이 화려하게 움직이면서 더욱 리듬이 느껴지고, 화려하고 즐겁다고 한다.
초기 춤꾼은 남녀 비율이 비슷했고, 광대 역할이 있는 희극적인 춤을 췄다. 이는 당시 프랑스 파리에 있었던 폴리 베르제르(Folies Bergère)의 무대에서 착안한 것이었다.[16] 춤이라기보다는 곡에 맞춰 깃털 장식 꼬리를 흔들며 걸어 다녔다. 의상도 1966년까지는 옷에 꼬리를 꿰매어 붙인 정도였다. 수라폰 솜밧차른의 사망 후, 그의 미망인 시므완 솜밧차른(ศรีนวล สมบัติเจริญ)이 댄서 수배를 인계받아 댄서 수는 10명까지 늘었고, 룩퉁 무대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17]
1974년경부터 춤은 곡에 맞춰 추는 현재 스타일이 되었다. 태국 전통 무용과 서양 모던 댄스의 움직임이 더해져, 흥을 돋우는 곁가지가 아닌 관객을 매료시키는 춤도 나타났다.
이 무렵 춤꾼 수는 더욱 증가했고,[18] 1977년 춤꾼의 황금기에는 가수 전속 빅 밴드가 전속 댄서를 거느리게 되었는데, 그 수가 약 60명에 달하는 경우도 있었고, 당시 의상 비용은 100만태국 밧였다고 한다.[17]
댄서 의상은 선명한 황금색, 검은색 천을 비롯해 빨간색, 파란색, 녹색, 분홍색 등 밝은 색상의 옷을 입는다. 목걸이, 스팽글, 팔찌, 피어싱과 꽃으로 장식하며, 남성은 부츠를 착용하기도 한다.
현재 춤꾼은 민요 등 전통과는 무관해진 경우가 많고, 서양 문화의 영향이 강하다. 비즈니스 측면에서 룩퉁에 춤꾼은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으며, 일반 관객은 춤꾼들의 춤과 의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환호한다.[19]
4. 사업으로서의 룩퉁
1967년, 태국 국내 음악 시장에서 레코드와 카세트 테이프의 판매가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가 이 시장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룩퉁은 정치적 침체를 반영하여 1977년 한때 쇠퇴했다. 그 후 회복되었지만, 1998년에는 아시아 외환 위기를 겪으며 다시 불황에 시달렸다. 현재는 다시 번성하여 새로운 가수들이 잇따라 데뷔하고 새로운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20]
오늘날, 룩퉁은 태국 왕국에게 대규모 시장이며, 크고 작은 다수의 레이블이 음악 시장에 넓은 기반을 가지고 있다. 주요 시장 점유율 비율은 다음과 같다.[21]
지역 | 비율 |
---|---|
이산(북동) 지방 | 50% |
북·중부 | 35% |
남부 | 15% |
회사별로는 그라미 골드사(그라미 골드)가 시장 점유율의 65%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R 사이암사(R 사이암)가 19%이다. 그 외 합계가 16%이다.[21]
2006년 음악 시장의 총 사업 매출은 2005년부터 9% 증가하여 약 7100만태국 밧이며, 태국의 전체 시장 중에서도 음악 시장은 중요한 것 중 하나이다. 전체 음악 중 룩퉁이 45%, 기타 음악이 30%를 차지한다. 가사(룩퉁 포함)가 20%, 기타가 5%라는 내역이다.[22]
오늘날, 룩퉁에 한정되지 않고 음악 산업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불법 복제된 CD나 카세트, 불법으로 다운로드되는 음원이나 이미지 데이터 등이 시장에 저가 또는 무료로 대량 유통되고 있다는 점이며, 이로 인해 매출이 저조하다. 따라서 일부 음악 레이블은 곡을 홍보하는 대신 아티스트와 그들의 무대를 홍보하고, 콘서트 등으로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23]
5.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룩퉁은 원래 AM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었다. 1997년 FM 라디오 방송국이 설립되기 전까지 AM 라디오는 룩퉁의 최대 미디어였다. FM 라디오 프로그램이 시작된 이후, 룩퉁 FM(95MHz)은 MTV를 모방한 룩퉁 전문 라디오 방송국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 방송국은 2001년 골든 리스 어워드에서 대상을 수상했으며, DJ 중심의 리스트 형식과 전화 연결을 통해 청취자들과 소통하며 히트곡을 소개하는 스타일로 전국적으로 30만 명의 청취자를 확보했다. 특히 심야와 오전 3시부터 5시 사이의 청취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24]
텔레비전 업계에서도 다양한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다. 신인 발굴 프로그램은 특히 인기가 높았는데, 트루 아카데미 판타지아 (''ทรู 아카데미 판타지아''), 스타를 찾아라 (''데อะ스타 콘파콰다오''), 더 싱어 (데อะ 싱어) 룩퉁 타이 신성 프로젝트 (โครงการดาวรุ่งลูกทุ่งไทยแลนด์) 등이 대표적이다.[25]
태국 영화에도 룩퉁 관련 콘텐츠를 가진 작품이 많다. 펜에크 라타나루앙 감독의 2001년 작품 《문락 트랜지스터》[26] 와 2002년 작품 《문플랭 룩퉁 FM》[27] 등, 태국의 룩퉁 관련 영화 작품은 170편이 넘는다. 이산 지방 출신의 룩퉁 인기 그룹 퐁랑 사언을 소재로 한 2007년 영화 《โปงลางสะดิ้ง ลำซิ่งส่ายหน้าth》는 총수입 7500만태국 밧의 대히트를 기록했다.[28]
6. 룩퉁과 상품
룩퉁 시장이 변화하면서 룩퉁과 관련된 다양한 상품이 등장하였다. 룩퉁을 선호하는 구매층 중에는 저소득층이 많았기 때문에, 특히 저가 상품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전략이 많았다. 룩퉁은 이러한 수요에 잘 대응했으며, 소규모의 빠른 판단력을 가진 중소 제조 회사들이 많아 다양한 제품이 출시되었다. 대기업 또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한 기획 상품을 선보였다.
에너지 드링크는 룩퉁과 관련된 대표적인 상품군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https://th-th.facebook.com/M150Thai/ M-150]"을 선호하는 노동자층(2000년경까지 태국에서는 영양 음료를 사람들 앞에서 마시는 것이 천하다고 여겨져 남의 눈에 띄지 않게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을 대상으로 룩퉁 업계는 연간 약 7000만태국 밧의 예산을 사용한다.[20] M-150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의 에너지 드링크도 룩퉁 관련 광고를 진행하며, 가사에 제품명을 직접 넣거나 프로 스포츠와의 제휴를 통해 에너지 드링크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있다.
과거에는 "7명의 선인은 살 필요가 없다"와 같이 편의점 체인을 연상시키는 가사가 있었지만, 현재는 "까르푸의 KFC에서 그녀를 기다린다"와 같이 직접적인 표현을 사용한다.
태국 왕국의 휴대전화 사용자 45만 명 중, AIS사의 휴대전화 사용자는 27만 명이며, 이들과 제휴하고 있는 포크 가수는 피 사뎃(พี สะเดิด)이다. 그래미사 소속의 폰 타나손톤(ฝน ธนสุนธร)은 결혼식 비디오 관련 제휴를 맺고 있다. R사이암사의 아자리아 펌프륵(อาจารียา พรหมพฤกษ์)은 30바트의 음악 배포를 통해 4,000만 다운로드를 달성하기 위해 SIM 카드 관련 회사와 제휴하고 있으며, 이는 트루 코퍼레이션 총수입의 9.6%인 2.23억태국 밧에 달한다.
자동차 산업에서는 토요타가 이산 지방의 여가수 친타라 푼랍과 제휴하고, 이스즈는 짜크라판 콘부리티라콧(จักรพันธ์ ครบุรีธีรโชติ)과 계약했다.[29]
7. 계발 활동
노동자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수준 높은 룩퉁 작가나 가수에게는 "황금 화환상"이 수여된다. 2001년부터 타이 룩퉁 FM(สมาคมลูกทุ่ง เอฟ. เอ็ม.)[30]과 MCOT FM이 협찬해 왔다[31]. MCOT FM은 국립 문화 위원회와 함께, 마하나콘 어워드[32]라는 자선 행사도 개최했다.
1989년, 국가 문화 위원회는 최초의 "반세기에 걸친 룩퉁상"을 개최했다. 당시 룩퉁 업계는 침체된 시기였지만, 많은 태국 국민들은 여전히 룩퉁을 즐겨 들었다. 태국 TV 방송국과 국립 문화 위원회는 룩퉁을 지원하기 위해 이미 대스타였던 품푸앙 두앙찬의 라이브를 방송했고, 국민들의 호평을 받았다.
1990년에는 "반세기에 걸친 룩퉁상 2"가 개최되었다. 전년에 이어 품푸앙 두앙찬이 수상했고, 시린톤 공주가 참석하여 공주가 작사·작곡한 곡 "[https://www.youtube.com/watch?v=NFuNLc9u99k 쏨땀(ส้มตำ)]"을 품푸앙에게 수여했다. 이 곡은 크게 히트하여 품푸앙의 대표곡 중 하나가 되었다.
1991년, 위원회는 수나리 라차시마[33]를 중심으로 룩퉁 콘테스트를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91년부터 2012년까지, 당시 국가 문화 위원회 회장 솜삭 프릿사난탄쿨(สมศักดิ์ ปริศนานันทกุล)[34] 전 문부성 장관의 주도로 음악과 민속 예술의 무대 예술 분야에서 국민적 아티스트에게 상을 수여했다[35]. 룩퉁 부문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연도 | 수상자 | 비고 |
---|---|---|
1991 | 파용 무크다(พยงค์ มุกดา) | 룩퉁 작곡가 |
1992 | 퐁시 워라눗(ผ่องศรี วรนุช) | 룩퉁 가수·코러스 |
1995 | 차이 므앙싱(ชาย เมืองสิงห์) | 룩퉁 가수, 작사·작곡가 |
1997 | 와이폿 페쳇수판(ไวพจน์ เพชรสุพรรณ) | 룩퉁 가수, 작사·작곡가 |
1998 | 차이차나 분나초(ชัยชนะ บุญนะโชติ) | 룩퉁 가수 |
1999 | 친라콘 크라일랏(ชินกร ไกรลาศ) | 룩퉁·민요 가수 |
1999 | 촐라티 탄통(ชลธี ธารทอง) | 룩퉁 작곡가 |
2005 | 롭 부리랏(ลพ บุรีรัตน์) | 룩퉁 가수 |
2009 | 프라용 춘이옌(ประยงค์ ชื่นเย็น) | 룩퉁 작곡가[36] |
2012 | 푼 프롬댕(เพลิน พรหมแดน) | 룩퉁 가수 |
8. 논쟁
1940년대에는 룩퉁 가수의 노래가 국가에 대한 불만을 표현한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했다. 당시 플랙 피분송크람 총리의 독재 정권은 "푸 텐 콰이(ผู้แทนควาย, 야생 소 또는 바보의 대표)", "탈렌칸 아이트이(แถลงการณ์ไอ้ทุย, 이런 젠장)", "아쑨 킨므앙(อสูรกินเมือง, 거리를 먹는 악마)"과 같은 노래를 국민에게 들려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37]
2003년, 태국 문부성은 공서양속에 반하는 노래 18곡의 발매 및 방송을 금지했다. 금지된 곡 중에는 "미아 피 미추([https://www.youtube.com/watch?v=c0fKMjTlp3o 메ียพี่มีชู้], 아내의 불륜)"처럼 오랫동안 불려온 노래도 있었지만, 문부성은 도덕, 태국 전통, 정조에 반하는 노래는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한편, 차이 므앙싱(ชาย เมืองสิงห์)이나 캄론 삼분난논(คำรณ สัมบุญณานนท์)처럼 독실한 불교도는 좋은 행동의 규범이 된다고도 말했다.[38]
2006년 태국 군사 쿠데타 직전, 가수 수쿠마 마니칸(สุขุมา มณีกาญจน์)의 광고 사진 속 드레스 가슴 노출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태국 문부성의 비난을 받았다.[39] 2007년에는 수쿠마의 곡 "어머니, 죄송해요(ขอโทษแม่เฒ่า)"의 가사 중 "늙은 어머니에게 묻는 것은 잘못되었고, 방콕에 함께 모이는 것도 늙은 어머니에게 묻는 것과 마찬가지로 잘못되었다"라는 부분이 외설적이라며 방송 금지를 요구했다.[40] 그러나 "함께 모이는(เอากัน)"이라는 표현이 외설적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고, 이산 지방에서는 "산다"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논쟁은 종결되었다.[41]
2017년 6월, 쁘라윳 총리가 람야이 하이통캄(ลำไย ไหทองคำ)의 춤에 대해 "허리 흔드는 모습이 불량하다"고 비판한 사건이 있었다. 람야이는 신곡 "푸사오 카 피아오(ผู้สาวขาเฟี้ยว, 멋진 다리의 소녀)"를 발표하고, [https://www.youtube.com/watch?v=iziuDVIquMM 허리 흔드는 횟수를 줄이고 노출도 줄였다고 하는 뮤직비디오(MV)]를 공개했다. 이 뮤직비디오에는 쁘라윳 총리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영상이 삽입되어 화제가 되었다.[42]
9. 대표적인 룩퉁 가수
수라폰 솜밧자런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걸쳐 ''룩퉁''의 초기 음반을 발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룩퉁''이 최고의 인기를 누리도록 이끌었다. 이로 인해 그는 "룩퉁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100곡이 넘는 곡을 작곡했으며, "Nam Da Sow Vienne"("라오 소녀의 눈물"), "Sieow Sai"("복통 신경"), "Kong Bplom"("가짜 물건"), "Sao Suan Taeng"("오이 농장의 소녀")와 같은 많은 유명 음반을 포함한다.[1]
1966년 2월, 솜요트 타사나판은 파용 묵다가 작곡한 "Chor Tip Ruang Tong"("황금의 신성한 꽃다발")으로 태국 왕립 골든 디스크 상을 수상한 최초의 ''룩퉁'' 아티스트가 되었다.[1]
최근에는 서양식 화려한 의상을 입은 백댄서 그룹(일명 ''하앙 크르엉'')이 ''룩퉁'' 콘서트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 품푸앙 두앙짠은 이 시대의 가장 성공한 ''룩퉁'' 여성 아티스트였다. 그녀는 스트링 음악을 ''룩퉁''에 접목하여 일렉트로닉 ''룩퉁''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그녀의 첫 음반은 "Phleng Kaew Raw Pi"("깨우, 나를 기다려줘")였으며, 이후 많은 히트곡을 발표하며 "''룩퉁''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1]
10. 관련 논문
이지은은 2023년 한국태국학회에서 발행하는 《한국태국학논총》 29-2에 〈태국 대중음악 룩퉁에 나타난 연애관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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การตลาดThrough the Line ปลุกกำลังซื้อเพลงลูกทุ่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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พลังลูกทุ่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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ลูกทุ่งยุคต่อไป เดินหน้าหรือถอยหลัง
นิตยสารผู้จัดกา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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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M 95 ลูกทุ่งมหานคร ไพร์มไทม์หลังเที่ยงคื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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ดาวรุ่งลูกทุ่งไทยแลนด์ บันไดขั้นแรกนักร้องลูกทุ่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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ข่าววันที่ 25 มิถุนายน 2545
ผู้จัดการออนไลน์
2545-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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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มนต์เพลงลูกทุ่งเอฟ.เอ็ม.รับกระแสลูกทุ่งฟีเวอร์
บิสิเนสไทย
200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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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20 หนังยอดฮิตแดนสยามปี 2550
ผู้จัดการออนไลน์
2551-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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เครื่องมือการตลาดที่ทรงพลัง
นิตยสารผู้จัดกา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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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เอกชัย – ฝน” คว้ารางวัล "มาลัยทอง ครั้งที่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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ผลรางวัลมาลัยทองประจำปี 2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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จ๊ะจ๋ามหานค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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ส้มตำ ฟังเพลิน – กินต้องระวัง… เขียนโดย สวท.ขอนแก่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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ศิลปินแห่งชาติสาขา ศิลปะการแสดง ๑๐๕ ค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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ผมเป็นผู้แทนมาจากควาย ฟังเถิดพี่น้องหญิงชาย นี่ควายเขาใช้ฉันมา...
กรุงเทพธุรกิ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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สุทธิดา มะลิแก้ว ,กระทรวงวัฒนธรรม (ทางเพ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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วธ.ขู่ลูกทุ่งโชว์เต้า ไม่เลิกเจอคุกแ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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โวยเพลงมีคำว่าเอากั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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วธ. ไม่แบนลูกทุ่ง "ขอโทษแม่เฒ่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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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บิ๊กตู่” ฉะ “ลำไย ไหทองคำ” ผู้สาวขาเลาะเต้นเกือบโชว์ของสงวน!
https://www.khaosod.[...]
ข่าวสด
2017-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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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 Lam and Luk Thung: A guide to Bangkok's Thai folk music scene
http://travel.cnn.co[...]
CNN 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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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k Thung The Culture and Politics of Thailand's Most Popular Mu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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