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카르도 잔도나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리카르도 잔도나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로베레토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이다. 페사로 음악원에서 피에트로 마스카니에게 작곡을 사사하고, 3년 만에 9년 과정의 커리큘럼을 마쳤다. 오페라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의 성공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이탈리아를 지지하는 애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후 로시니 음악원 원장을 역임하며 지휘자로 활동했고, 푸치니의 《투란도트》 완성에 참여할 뻔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관현악곡, 성악곡, 영화 음악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이탈리아의 작곡가 - 프란체스코 란디니
프란체스코 란디니는 14세기 이탈리아 트레첸토 양식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오르간 연주자, 가수, 시인, 악기 제작자로,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칭송받았으며, '란디니 종지'라는 독특한 종지 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고 그의 세속 발라타 작품은 스콰르찰루피 사본에 상당수 보존되어 14세기 이탈리아 음악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 이탈리아의 작곡가 - 움베르토 조르다노
움베르토 조르다노는 19세기 후반 이탈리아의 베리스모 오페라 대표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안드레아 셰니에》를 통해 명성을 얻었으나 후기 작품은 베리스모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담한 조옮김을 활용해 극적인 음악을 만들었지만 드라마 내용이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도 존재하며, 《안드레아 셰니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 이탈리아의 클래식 작곡가 - 루제로 레온카발로
루제로 레온카발로는 《팔리아치》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극작가로, 자신의 오페라 대본을 직접 집필하고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 대본에도 참여했으며,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나 현재는 《팔리아치》 외 작품은 저평가되어 재평가가 필요하다. - 이탈리아의 클래식 작곡가 - 니콜로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는 이탈리아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뛰어난 연주 기교로 명성을 얻었으며 24개의 카프리스와 바이올린 협주곡 등을 작곡하고 후대 음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오페라 작곡가 - 에프렘 짐발리스트
러시아 제국 출신 미국 바이올리니스트, 작곡가, 지휘자, 음악 교육자인 에프렘 짐발리스트는 레오폴트 아우어의 제자로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명성을 얻었고 커티스 음악원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은퇴 후에도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 오페라 작곡가 - 가브리엘 포레
가브리엘 포레는 프랑스의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피아니스트, 음악 교육자로서, 프랑스 가곡의 거장으로 불리며 파반느, 레퀴엠,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야상곡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리카르도 잔도나이 | |
---|---|
기본 정보 | |
이름 | 리카르도 잔도나이 |
원어 이름 | Riccardo Zandonai |
출생지 | AUT1867, 티롤주로베레토 |
직업 | 작곡가, 지휘자 |
장르 | 클래식 음악, 영화 음악 |
2. 생애
리카르도 잔도나이는 1883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로베레토에서 태어났다.[3]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여 페사로 음악원에서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지도를 받았으며, 9년 과정을 3년 만에 마치는 등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1]
졸업 후 밀라노에서 활동하며 아리고 보이토를 통해 출판업자 줄리오 리코르디와 인연을 맺었고, 이는 그의 본격적인 오페라 작곡가 경력의 시작이 되었다. 초기 작품인 Il grillo del focolareita (1908)와 Conchitaita (1911)가 성공을 거두며 주목받기 시작했다.[2] 그의 명성을 확고히 한 작품은 가브리엘레 다눈치오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Francesca da Riminiita (1914)로,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공연되는 그의 대표작이다. 이 시기 그는 소프라노 타르퀴니아 타르퀴니와 결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국적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이탈리아 애국심을 드러내며 애국가 Alla Patria|조국을 위하여ita (1915/1916)를 작곡했고, 이로 인해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했다(전후 반환).[1] 자코모 푸치니 사후 미완성 오페라 ''투란도트''의 완성을 위한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푸치니의 아들 토니오 푸치니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이후에도 ''줄리에타와 로메오'' (1922), I cavalieri di Ekebù|에케부의 기사ita (1925) 등 여러 오페라를 발표했다. 1935년에는 모교인 페사로의 로시니 음악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조아키노 로시니의 작품 발굴 및 편곡에 힘썼다.[1] 말년에는 주로 지휘자로 활동하며 기악곡과 영화 음악도 작곡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중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며, 1944년 담석 수술 후 페사로에서 사망했다.[1][3] 그의 유해는 1947년 고향 로베레토로 옮겨졌다.[3]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리카르도 잔도나이는 1883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속했던 남티롤의 로베레토 보르고 사코에서 태어났다.[3] 1894년 로베레토의 음악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젊은 시절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1899년 페사로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에트로 마스카니에게 작곡을 배웠는데, 마스카니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9년 과정의 교육과정을 단 3년 만에 마치고 1902년에 졸업했다.[1] 이 시기에 그는 고향 지방의 이탈리아 민족 통일 운동 청년들을 위한 찬가인 Inno degli studenti trentiniita를 작곡했다. 졸업 작품으로는 조반니 파스콜리의 시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Il ritorno di Odisseoita(''율리시스의 귀환'')를 작곡했으며, 이는 성악가,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이었다. 같은 해 1902년에는 파스콜리의 또 다른 시를 바탕으로 한 Il sogno di Rosettaita를 작곡했다.2. 2. 초기 경력 및 작품 활동
리카르도 잔도나이는 1883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남티롤 로베레토의 보르고 사코에서 태어났다.[3]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1899년 페사로 음악원에 입학하여 1902년에 졸업했다. 9년 과정을 단 3년 만에 마치는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1] 그의 스승 중 한 명인 피에트로 마스카니는 그를 높이 평가했다.이 시기 잔도나이는 고향 트렌티노 지방 청년들을 위한 찬가 Inno degli studenti trentiniita를 작곡했다. 졸업 작품으로는 조반니 파스콜리의 시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 Il ritorno di Odisseo|율리시스의 귀환ita를 선보였으며, 같은 해 파스콜리의 다른 시 Il sogno di Rosettaita에도 곡을 붙였다. 1904년부터는 밀라노에 거주했으며, 1908년 밀라노의 한 사교 모임에서 아리고 보이토의 눈에 띄어 당시 이탈리아 음악 출판계의 거물이었던 줄리오 리코르디에게 소개되었다.
같은 해 토리노에서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벽난로의 귀뚜라미』를 원작으로 한 그의 오페라 Il grillo del focolareita가 초연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2] 이 작품 악보의 성공적인 판매 이후, 출판사 리카르디는 자코모 푸치니가 작곡을 포기했던 피에르 루이스의 소설 『여인과 인형』을 원작으로 한 대본 Conchitaita의 작곡을 잔도나이에게 제안했다. Conchitaita는 1911년 밀라노에서 초연되어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리카르디사는 잔도나이를 푸치니의 유력한 후계자로 여기게 되었다.
잔도나이의 명성을 확고히 한 작품은 오페라 Francesca da Riminiita이다. 이 작품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지옥'' 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가브리엘레 다눈치오가 비극으로 각색한 희곡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1914년 토리노의 레조 극장에서 초연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동시대에 상연된 스승 마스카니의 오페라 ''파리지나''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공연되고 여러 차례 녹음되었다. 잔도나이는 Conchitaita의 주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타르퀴니아 타르퀴니와 1916년에 결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국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잔도나이는 강한 이탈리아 애국심을 보였다. 그는 1915년(또는 1916년) 이탈리아에 헌정하는 노래 Alla Patria|조국을 위하여ita를 작곡했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으로부터 국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사코에 있던 그의 집과 재산이 몰수되었다(전쟁 후 반환됨).
자코모 푸치니가 오페라 ''투란도트''를 미완성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을 때, 리코르디 출판사는 작품 완성을 위해 여러 작곡가를 물색했고 잔도나이도 그중 한 명이었다. 푸치니 자신도 임종 직전 잔도나이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역시 잔도나이를 선호했다. 그러나 푸치니의 아들 토니오 푸치니는 불분명한 이유로 이를 반대했는데, 일설에 따르면 잔도나이의 명성이 이미 너무 높아 아버지의 오페라에 그늘을 드리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투란도트''의 완성은 프랑코 알파노에게 맡겨졌다.
2. 3.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와 성공
잔도나이의 명성은 주로 오페라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에 크게 기인한다. 이 작품은 단테 알리기에리의 《지옥》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가브리엘레 다눈치오가 쓴 비극을 자유롭게 각색한 것이다. 1914년 토리노의 레조 극장에서 초연되어, 같은 시기 상연된 스승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오페라 《파리지나》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레퍼토리에 오르며 여러 차례 음반으로도 발매되었다.《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초연 직후, 잔도나이는 이 작품의 주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타르퀴니아 타르퀴니와 결혼했다. 그는 아내 타르퀴니를 위해 오페라 《콘치타》의 타이틀 롤을 만들었다. 이 오페라는 자코모 푸치니가 작곡을 고사했던 피에르 루이스의 소설 《여인과 인형》을 원작으로 하며, 1911년 밀라노에서 초연되어 세계 각지에서 상연되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으로 이탈리아의 주요 음악 출판사인 리카르디는 잔도나이를 푸치니의 유력한 후계자로 여기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잔도나이는 강한 애국심을 보이며 조국 이탈리아를 지지했다. 그는 1915년 이탈리아에 헌정하는 애국적인 노래 ''Alla Patria'' ("조국을 위하여")를 작곡했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로부터 국가 반역죄로 간주되어 고향 사코의 집과 재산을 몰수당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되찾을 수 있었다.
한편, 자코모 푸치니가 오페라 《투란도트》를 미완성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리코르디 출판사는 작품 완성을 위해 여러 작곡가를 물색했고 잔도나이도 그중 한 명이었다. 푸치니 자신도 생전에 잔도나이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명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역시 잔도나이가 작업을 마무리하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푸치니의 아들 토니오 푸치니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이를 반대했는데, 일각에서는 잔도나이의 높은 명성이 오히려 아버지 푸치니 오페라의 명성을 가릴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결국 《투란도트》의 완성은 프랑코 알파노에게 맡겨졌다.
전후에도 잔도나이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1919년에는 페사로에서 희극 오페라 《창밖으로 본 거리》를, 1922년에는 로마에서 《줄리에타와 로메오》를 상연했다. 1925년에는 I cavalieri di Ekebù|에케부의 기사ita가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밀라노의 스칼라좌에서 초연되었고, 1928년에는 《줄리아노》가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 무대에 올랐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은 1933년에 상연된 La farsa amorosa|사랑의 희극ita이다.
2. 4.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잔도나이는 비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적이었으나 강한 애국심을 바탕으로 이탈리아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는 1915년(다른 자료에서는 1916년[1]) 이탈리아에 헌정하는 애국적인 노래 Alla Patria|알라 파트리아ita("조국을 위하여")를 작곡했다. 이로 인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치하에 있던 그의 집과 재산은 국가 반역죄로 몰수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다시 돌려받았다.[1]1916년에는 그의 오페라 콘치타에서 주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타르퀴니아 타르퀴니와 결혼하여 페사로에 정착했다.
2. 5. 푸치니의 《투란도트》 보필 문제
푸치니가 오페라 《투란도트》의 마지막 막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악보 출판을 담당했던 리코르디 출판사는 미완성 부분을 완성할 작곡가를 물색했다. 잔도나이는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다. 푸치니 본인도 생전에 잔도나이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이며,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역시 잔도나이의 참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그러나 푸치니의 아들 토니오 푸치니는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잔도나이의 참여를 반대했다. 일설에 따르면, 토니오는 잔도나이가 이미 너무 유명한 작곡가였기 때문에, 그가 《투란도트》 완성에 참여할 경우 아버지 푸치니의 명성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결국 《투란도트》의 완성은 프랑코 알파노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초연 지휘를 맡았던 토스카니니는 알파노가 완성한 부분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이후 공연에서는 알파노가 작곡한 부분을 대폭 축소하거나 생략하는 것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2. 6. 후기 활동 및 사망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 국적이었음에도 강한 애국심을 보인 잔도나이는 1915년[3] 이탈리아를 지지하는 애국가 Alla Patria||조국을 위하여it를 작곡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정부로부터 국가 반역죄로 간주되어 로베레토 사코에 있던 그의 집과 재산을 몰수당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돌려받았다.[1][3]1916년에는 자신의 오페라 콘치타에서 주역을 맡았던 소프라노 타르퀴니아 타르퀴니와 결혼하여 페사로에 정착했다.[1][3] 이후에도 꾸준히 오페라를 작곡하여 발표했다.
- 1919년: 페사로에서 희극 오페라 La via della finestra||창밖으로 본 거리it 상연[3]
- 1922년: 로마에서 오페라 ''줄리에타와 로메오'' 상연[3]
- 1925년: 오페라 I cavalieri di Ekebù||에케부의 기사it를 밀라노의 스칼라좌에서 명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3]
- 1928년: 오페라 Giuliano||줄리아노it를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상연[3]
- 1933년: 로마에서 상연된 오페라 La farsa amorosa||사랑의 희극it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 작품이 되었다.[3]
한편, 자코모 푸치니가 오페라 ''투란도트''를 미완성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악보 출판사인 리카르디는 작품 완성을 위해 여러 작곡가를 물색했고 잔도나이도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었다. 푸치니 본인도 임종 직전 잔도나이를 염두에 두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특히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는 잔도나이의 선임을 지지했다. 하지만 푸치니의 아들 토니오 푸치니가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반대하여 결국 프랑코 알파노가 작업을 맡게 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토니오 푸치니는 잔도나이의 명성이 너무 높아 아버지의 오페라에 연관될 경우 오히려 아버지의 명성을 가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고 한다.[1]
1935년, 잔도나이는 자신이 졸업했던 페사로의 로시니 음악원 원장으로 부임했다.[1] 그는 이곳에서 존경하는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의 잊혀진 작품들을 발굴하고 부활시키는 데 힘썼다. 대표적으로 오페라 ''랭스 여행''과 ''마호메트 2세''의 서곡을 복원했으며, 1941년에는 로시니의 오페라 ''도둑까치''를 3막으로 재편곡하기도 했다.[1]
오페라 작곡을 멈춘 후에는 주로 지휘자로 활동하며 기악곡과 영화 음악 작곡, 로시니 작품 편곡 등에 집중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군에게 페사로 자택을 압수당하고 몬발로치오의 한 수도원에서 지내야 했다.[3] 1944년, 담석 수술을 받은 후 페사로의 트레비안티코에서 사망했다.[1][3] 임종 직전, 로마가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고향 방언으로 Bene! Viva l'Italia, la parte bona.it("좋아! 이탈리아 만세, 좋은 부분.")이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1] 그의 유해는 1947년 고향 로베레토로 이장되었다.[3]
3. 주요 작품
3. 1. 오페라
- 왕자의 잔 ''La coppa del re'' (1906년경, 미공개)
- 금빛 새 ''L'uccellino d'oro'' (1907년)
- 화롯가의 귀뚜라미 ''Il grillo del focolare'' (1908년)
- 콘치타 ''Conchita'' (1911년)
- 멜레니스 ''Melenis'' (1912년)
-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Francesca da Rimini'' (1914년)
- 창 너머의 길 ''La via della finestra'' (1919년)
- 줄리에타와 로메오 ''Giulietta e Romeo'' (1922년)
- 에케부의 기사들 ''I cavalieri di Ekebù'' (1925년)
- 줄리아노 ''Giuliano'' (1928년)
- 어떤 이별 ''Una partita'' (1933년)
- 어리석은 사랑 ''La farsa amorosa'' (1933년)
- 입맞춤 ''Il bacio'' (1944년, 임종 직전 미완성)
3. 2. 관현악곡
- "발 디 솔레의 봄"
- "산속의 가을"
- "영웅적인 발라드"
- "돌로미티의 호텔들 속에서"
- "세간티니의 그림" (1931)
- "트렌티노 랩소디"
- "콜롬비나"
- 바이올린을 위한 ''로맨틱 협주곡'' (1919)
- 첼로를 위한 ''안달루시아 협주곡''
- 백설공주 ''Biancaneve'' (1939)
3. 3. 성악곡
- 남성 합창과 오르간을 위한 ''테 데움'' (1906)
- ''멜로디 페르 칸토 에 피아노'' (Melodie per canto e piano) 두 곡 (1907, 1913)
- 합창, 오르간,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 파드레 노스트로 케 네이 첼리 스타이'' (O Padre nostro che nei cieli stai) (1912)
- 합창을 위한 ''레퀴엠 미사'' (Messa da Requiem) (1914)
- 2011년 2월 경 ''죽은 자를 위한 미사'' (Messa da Requiem)가 발견되었다.
- 그 외 다수의 성악곡.
3. 4. 영화 음악
- ''타라카노바 공주'' (1938)
- ''노래하는 바보'' (1939)
- ''나를 사랑해, 알프레도!'' (1940)
- ''카라바조'' (1941)
참조
[1]
서적
Baker's Biographical Dictionary of Musicians
Schirmer Books
[2]
웹사이트
Il grillo del Focolare. Commedia musicale in tre atti (1907)
https://archive.org/[...]
Internet Archive
2017-10-13
[3]
간행물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https://www.treccani[...]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