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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리지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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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리지의 난은 642년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주도한 정변이다. 배경은 친당 정책을 펼친 영류왕과 주화파에 대한 주전파의 반발과 내부 권력 다툼이었다. 연개소문은 열병식에 주화파 대신들을 초대하여 살해하고, 영류왕을 시해한 뒤 보장왕을 옹립하고 대막리지에 올라 권력을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고구려는 연개소문과 그 가문의 독재 체제로 전환되었으며, 대외 정책도 강경하게 변화했다. 연개소문 사후에도 그의 아들들이 대막리지를 세습하며 연씨 정권이 26년간 지속되다 고구려 멸망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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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리지의 난
기본 정보
별칭연개소문의 난, 연개소문의 정변
장소고구려
날짜642년
결과
결과연개소문의 집권
참가자 및 사상자
사망자100~180여 명
원인
원인정치적 갈등

2. 배경

고구려586년 평원왕평양성으로 천도한 이후, 옛 수도였던 국내성평양성 간의 대립이 심해졌다. 국내성유리명왕 때부터 장수왕 이전까지 400년 넘게 고구려의 수도였기에 그 정통성과 계파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도 고구려 오부가 장악한 국내성을 떠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을지문덕과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류왕은 즉위 후 친(親唐) 노선을 유지했다. 영류왕과 주화파 대신들은 과 포로를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교류하였다. 624년에는 으로부터 책봉을 받아 평양성 내 주전파들의 반감을 샀다. 626년 당 태종이 즉위하자 영류왕은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고, 백제신라와 화친하라는 의 요구도 수용하였다.

640년, 고구려동돌궐을 멸망시킨 의 요구에 따라 왕태자 고환권장안에 보내 당 태종에게 국학 입학을 청원했다. 왕태자의 입조는 속국에서 행해지던 일이었기에 주전파는 반대했으나, 영류왕은 주화파의 노선을 따라 왕태자를 보냈다.

641년, 당 태종은 답례로 진대덕을 고구려에 파견했다. 영류왕은 낮은 벼슬의 진대덕에게 왕의 의전을 제공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서 간첩 활동을 하고, 수나라와의 전쟁 승전 기념탑을 허무는 등 고구려인의 감정을 자극했으나, 영류왕은 이를 무시했다.

2. 1. 주화파의 득세

고구려586년 평원왕이 새 궁을 건설하여 평양성으로 천도한 시점부터 구 고도였던 국내성평양성간에 대립이 심화되었다. 국내성유리명왕이 서기 3년 천도한 후 다시 장수왕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약 4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고구려의 수도였기 때문에 그 정통성과 계파는 중앙정부인 평양성이 무시할 수준이 못되었다. 애초에 장수왕이 도읍을 평양으로 옮긴 것 또한 고구려 오부가 장악하고 있는 국내성을 떠나 새 도읍으로 이전하여 그곳의 신흥세력을 만들고 국내성의 세를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국내성파와 평양성파는 고구려-수 전쟁동안 협력하여 (隋) 양제의 110만 대군을 방어해내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가 망하고 (唐)이 들어서 다시 고구려를 침공할 기미를 보이자 영류왕을 중심으로 (唐)에 사대외교를 도모하자는 주화파(主和派)와 (隋)때와 비슷하게 대등한 외교를 앞세운 주전파(主戰派)로 나뉘었다. 국내성은 400년의 고도였던 만큼 고구려 오부의 근거지로서 국익보다 권익을 중시해 전쟁을 피하자는 주화파가 득세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2인자에 해당하는 막리지에 있던 을지문덕과 함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 영류왕은 강경노선이었던 영양왕에 뒤를 이어 즉위한 후 줄곧 친(親唐) 노선을 유지해왔다. 왕을 중심으로 주화파 대신들이 조정을 장악하여 나라 정책을 좌지우지하였다. 영류왕은 주화파 노선을 걸어 고구려-수 전쟁 당시 잡혀갔던 양국의 포로들을 교환하고 도교를 수입하는 등 다방면에서 서로 교류하였다. 624년에는 으로부터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에 책봉되어 평양성내의 주전파들의 반감을 샀다. 626년 황태자 이건성을 죽이고 당 고조를 압박해 선위로써 찬탈한 당 태종 이세민이 제위에 오르자 영류왕은 발맞춰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다. 백제신라가 당에 고구려으로 가는 길을 막는다고 호소하자, 당은 고구려백제신라와 화친하라고 종용하였다. 영류왕당 태종이 한 요구를 수용해 백제신라와 화친하였다.

2. 2. 태자의 장안 입조와 내부 갈등

640년에 장안에 왕태자 고환권을 보내 당 태종에게 왕태자를 당의 국학에 입학시켜달라고 청원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동돌궐을 멸망시킨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왕태자를 장안에 입조시키라는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왕태자의 입조 문제를 두고 주전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했다. 왕태자가 상대국에 입조하는 것은 대개 그 나라에 종속된 속국에서 행해졌던 일이기 때문에, 주전파는 반대했고 주화파는 당과의 사대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해 찬성했다. 영류왕은 주화파의 노선을 따라 왕태자를 장안에 보냈다.

641년, 당 태종은 왕태자의 예방에 답하고자 직방낭중 진대덕을 고구려에 파견했다. 진대덕은 정5품에서 정6품 사이의 관직인 직방낭중이었기에 국왕의 의전을 받기에는 낮은 벼슬이었으나, 영류왕은 주화파의 손을 들어주며 진대덕에게 왕의 의전을 제공했다.

진대덕은 고구려에 머무는 동안 요수에서 평양성까지 고구려의 지리를 자세히 관찰하고 각 성의 군사력을 면밀히 조사하는 등 간첩 활동을 방해받지 않고 수행했다. 또한 수나라와의 전쟁 승전 기념탑을 허물고 전사자 유골을 모아 장례를 치르는 등 고구려인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행위를 했다. 주전파는 이에 항의했으나 영류왕은 이를 무시했고, 진대덕은 귀국 후 당 태종에게 고구려 공격을 간언했다.

3. 경과

영류왕의 친당 정책으로 입지가 좁아지면서 주전파의 불만은 더욱 커졌다. 영류왕을 비롯한 주화파는 주전파의 불만을 무시하는 것을 넘어 에 대한 모화사상(慕華思想)으로 발전했고, 당나라의 공격을 방비하기 위해 시행한 천리장성 축조까지 중단하려 했다. 이에 천리장성 축조 감독을 맡았던 연개소문이 강하게 반발하였다.

영류왕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분위기를 눈치챈 연개소문은 측근 및 주전파들과 모의하여 영류왕과 주화파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3. 1. 연개소문의 등장과 주전파의 결집

천리장성 축조 과정에서 연태조의 후임 감독을 맡았던 연개소문은 축조 중단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연개소문은 이미 주전파의 핵심 인물이었고 평양성 내에서 입지가 컸기 때문에, 그의 반발에 주전파들은 크게 동요하였다. 왕족 사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는데, 평원왕의 3남 고대양(高大陽)을 따르던 세력은 왕위 경쟁에서 밀려나 현 조정에 불만이 있는 상황이었다. 고대양의 아들 고장연개소문과 결탁하여 주전파를 등에 업고 왕위를 도모하려 하였다.[2]

영류왕과 주화파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주전파와 대양왕(大陽王)계가 모이는 여론을 의식하여, 그의 영향력과 성품을 두려워한 나머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3. 2. 왕을 시해하고 장을 옹립하다

642년 음력 10월, 연개소문은 자신이 통솔하는 군대의 열병식에 주화파 대신으로 추정되는 100여 명(《일본서기》는 "이리거세사伊梨渠世斯 등 180여 명")을 초대하여 모두 살해했다.[3] 그리고 평양성 대궐로 쳐들어가 영류왕을 살해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다.[3] 연개소문은 도망가려는 영류왕을 잡아 살해하고 그 시신을 토막내어 목과 사지를 저자거리에 매달았다. 이후 고장(高臧)을 보장왕으로 옹립하고, 할아버지 연자유와 아버지 연태조가 맡았던 고구려 총리격인 막리지보다 더 강력한 실권을 가진 대막리지를 신설해 본인이 그 자리에 올랐다. 도현신 작가는 《어메이징 한국사》(서해문집)에서 영류왕에 대한 저자세 외교에 대한 반감이 이 사건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연개소문이 상징하는 주전파 민족주의 성향 군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했을 것으로 본 것이다.

4. 결과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고구려 중앙 정계는 크게 변화했다. 주화파 대신 100여 명이 살해당하고, 연개소문을 따르는 주전파들이 평양성 조정을 장악했다.[4] 642년 이후 고구려의 모든 권력은 연개소문에게 집중되었다. 연개소문 사후에는 아들인 연남생, 연남건 등이 대막리지직을 세습하며 권력을 독점했다. 이 연씨정권668년 고구려 멸망까지 26년간 지속되었다.[4]

4. 1. 연씨정권의 성립과 특징

연개소문고구려에서 왕에 이은 2인자이자 총리직에 해당하는 막리지(莫離支)보다 더 강한 실권을 가진 왕과 대등한 대막리지(大莫離支) 관등을 신설하고 본인이 직접 그 자리에 올랐다. 대막리지(大莫離支)는 왕의 총무를 모두 독점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왕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얼굴마담에 해당하였다. 대막리지의 역할은 일본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세이이타이쇼군)과 고려 최씨정권의 교정도감(敎定都監)과 유사하였다.[4]

연개소문은 대신을 100여명 이상 죽이는 학살에 가까운 정변을 통해 주화파가 득세하던 고구려 중앙 정계의 판 자체를 뒤바꿔놓았다. 642년을 기점으로 고구려의 모든 권한은 연개소문이 독점하게 되었으며 그의 식솔들과 그를 따르는 주전파들이 평양성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4]

연개소문 사후에도 그의 아들들인 연남생, 연남건등이 대막리지 자리를 세습하고 고구려의 권력을 연씨가 독점하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연씨정권은 26년간 이어지다 668년 고구려가 망하여 끝이 났다.[4]

5. 연개소문 정변을 다룬 작품

다음은 연개소문 정변을 다룬 작품들이다.

=== 드라마 ===



=== 소설 ===

제목출판사출판 연도비고
강무학, 「연개소문」(전2권)문예춘추사1984년
유현종, 「연개소문」(전7권)행림출판사1986년~1992년
박혁문, 「연개소문」(전6권)중명2003년~2006년
이언호, 「연개소문」큰방2003년
김영진, 「연개소문」신성문화사2006년
명건영, 「안시성」한솜미디어2006년


5. 1. 드라마

5. 2. 소설

제목출판사출판 연도비고
강무학, 「연개소문」(전2권)문예춘추사1984년
유현종, 「연개소문」(전7권)행림출판사1986년~1992년
박혁문, 「연개소문」(전6권)중명2003년~2006년
이언호, 「연개소문」큰방2003년
김영진, 「연개소문」신성문화사2006년
명건영, 「안시성」한솜미디어2006년


참조

[1]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 문화콘텐츠닷컴 전미희,1994 -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
[3] 서적 삼국사기
[4] 웹인용 매경프리미엄 연개소문은 왜 당과 맞서 싸웠는가? https://www.mk.co.kr[...] 2020-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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