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막스 슈멜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막스 슈멜링은 1905년 독일에서 태어난 권투 선수이다. 1924년 프로 데뷔 후 독일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유럽 챔피언, 독일 헤비급 챔피언을 거쳐 1930년에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그는 1936년 조 루이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지만, 1938년 재대결에서 패배했다. 슈멜링은 나치 정권과의 관계 속에서 유대인을 보호하는 등 저항적인 면모를 보였으며, 은퇴 후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는 1992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5년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출신 - 한스 델브뤼크
    한스 델브뤼크는 독일의 군사 역사가이자 이론가, 정치인으로서, 군사사를 일반 역사의 틀 안에서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특히 고대 전쟁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주 출신 - 하인리히 슐리만
    하인리히 슐리만은 독일의 사업가이자 아마추어 고고학자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하고 미케네 등지에서 발굴을 진행하며 에게 문명 연구에 기여했으나, 현대 고고학적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발굴 방법으로 논란을 낳기도 했다.
  •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자 - 프란츠 베켄바워
    프란츠 베켄바워는 "Der Kaiser"라는 별명으로 불린 독일의 전설적인 축구 선수이자 감독, 행정가로, 바이에른 뮌헨과 서독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며 발롱도르 수상, 월드컵 우승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은퇴 후에도 독일 축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자 - 롤란트 마테스
    롤란트 마테스는 올림픽에서 8개의 메달을 획득하고 세계 및 유럽 수영 선수권 대회에서도 다수의 금메달을 딴 동독의 전설적인 배영 전문 수영 선수로서, 은퇴 후에는 정형외과 의사이자 사회 활동가로 활동했으며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나 2019년 사망했다.
막스 슈멜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0년 3월 막스 슈멜링
1930년 3월 막스 슈멜링
본명막시밀리안 아돌프 오토 지크프리트 슈멜링
별칭라인 강의 검은 창기병
Der schwarze Ulan vom Rhein
체급라이트헤비급
헤비급
신장185 cm
리치193 cm
출생일1905년 9월 28일
출생지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주 클라인 루코브
사망일2005년 2월 2일
사망지독일 니더작센 주 벤젠도르프
스타일오소독스
통계
총 경기 수70
승리56
KO 승40
패배10
무승부4
메달 기록
메달남자 아마추어 복싱
대회독일 전국 선수권 대회
은메달1924 켐니츠 (라이트헤비급)

2. 생애

막스 슈멜링은 1905년 9월 28일 독일 제국 브란덴부르크 주 클라인-루코우에서 태어났다.[4] 십 대 시절 잭 뎀프시와 조르주 카르팡티에의 경기를 보고 복싱에 입문, 1924년 프로 데뷔했다.[24] 1926년 막스 딕만을 꺾고 독일 라이트헤비급 챔피언,[5] 1927년 페르난드 델라지를 꺾고 유럽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1928년 프란츠 디에너에게 판정승하며 독일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1928년 뉴욕에 진출,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 몬테를 KO로 꺾으며 데뷔했고,[24] 1929년 2월 1일 조니 리스코를 꺾은 경기는 ''The Ring'' 잡지 ‘올해의 대결’로 선정되었다.[24] 미키 워커에게는 8라운드 기권승을 거두며 세계 최고 헤비급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1930년 잭 샤키와의 경기에서 4라운드 로우 블로 반칙으로 승리,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는데,[22] 이는 반칙으로 챔피언이 된 최초의 사례였다.[22] 뉴욕 주 체육 위원회(NYSAC)는 이 판정을 승인했다.[22] 이후 '반칙 챔피언'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영 스트리블링과의 방어전에서 TKO 승을 거두며 논란을 잠재웠고, 1932년 샤키와의 재대결에서는 논란의 판정패를 당했다.[22]

1936년1938년 조 루이스와 두 차례 역사적인 대결을 펼쳤다. 1936년 1차전에서는 12라운드 KO승, 1938년 2차전에서는 1라운드 KO패를 당했다.

1933년 나치당 집권 이후, 슈멜링은 나치의 선전 도구로 이용될 위기에 처했으나, 막스 베어와의 경기에서 패배했다.[10] 그는 나치당 입당을 거부하고, 유대인 프로모터와 계속 일했으며, 수정의 밤 때는 유대인 아이들을 숨겨주기도 했다.[10]

1948년 은퇴 후,[26] 코카콜라 컴퍼니 독일 지사 사장으로 사업에 성공했다.[12] 1981년 조 루이스 사망 시 장례식을 치러주었고,[13] 1992년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05년 99세로 사망했다.[26]

2. 1. 유년기와 데뷔 초창기

막스 슈멜링은 1905년 9월 28일, 독일 제국 브란덴부르크 주의 클라인-루코우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4] 그는 1902년에 태어난 형 루돌프와 1913년에 태어난 여동생 에디스를 두었다. 십 대 시절, 아버지와 함께 잭 뎀프시와 조르주 카르팡티에의 헤비급 챔피언십 경기를 관람하면서 복싱을 처음 접했다. 뎀프시의 경기력에 감명을 받은 젊은 슈멜링은 그의 새로운 영웅을 따라 하겠다고 결심했다.

1924년 짧은 아마추어 경력을 거쳐 프로로 데뷔했다.[24] 그는 아마추어 대회에서 복싱을 시작했고 같은 해 독일 전국 아마추어 라이트 헤비급 타이틀을 획득했다. 얼마 뒤 프로로 전향한 그는 그 해에 치른 9경기 중 8경기를 승리하고, 그 중 6경기에서 KO승을 거뒀다. 유일한 패배는 그 해 10월 10일베를린에서의 경기에서 막스 딕만에게 당했다.[24] 데뷔 2년 만인 1926년, 슈멜링은 막스 딕만을 1라운드 KO로 꺾고 독일 라이트헤비급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5] 이듬해인 1927년에는 페르난드 델라지를 꺾고 유럽 라이트헤비급 챔피언에 올랐으며, 1928년에는 미하일 보나글리아를 KO로 꺾고 유럽 타이틀을 방어, 프란츠 디에너에게 판정승을 거두며 독일 헤비급 챔피언을 획득하며 미국으로 진출했다.

그는 반격에 적합한 섬세하고 기술적인 스타일을 선호했다. 이러한 스타일로 그는 첫 23경기 중 13경기를 KO승으로, 총 17경기를 이겼다. 1925년에 그는 유럽을 투어 중이던 당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 잭 뎀프시와 한 링에 섰다. 뎀프시는 슈멜링과 두 라운드 동안 경기를 펼쳤고 훗날 슈멜링에 따르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1928년 뉴욕에 처음 왔을 때, 슈멜링은 미국 복싱계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미국 복싱계에서는 처음에는 슈멜링이 자신들이 모르는 독일과 유럽 선수들을 상대로 기록을 부풀렸다고 여겼기 때문에, 조 제이콥스를 이긴 후에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기회는 잘 주어지지 않았다. 미국에서 슈멜링의 데뷔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 몬테를 8 라운드에 KO 시키면서 시작되었다. 다음으로 그보다 높은 명성을 가지고 있었던 조니 리스코와 결투를 벌였다. 1929년 2월 1일, 슈멜링은 심판이 대회를 끝내기 전까지 리스코를 총 네 번 눕혔다. 더 링 잡지는 이 승리를 ‘올해의 대결’이라고 칭했다.

2. 2. 미국 진출과 성장

미키 워커와의 대결에서 워커는 훗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였고, 최근 샤키와의 경기에서 많은 이들이 워커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무승부로 끝났다. 이 경기는 진정한 헤비급 챔피언십을 위한 싸움으로 여겨졌다. 전 웰터급 선수였던 워커는 두 체급에서 챔피언을 차지한 인기 있는 슬러거였지만, 유럽 출신인 슈멜링에 비해 체격 조건에서 불리했다. 워커가 점수에서 앞섰지만, 경기가 진행되면서 슈멜링은 워커에게 일방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8라운드가 끝난 후, 워커 측은 기권했고, 슈멜링은 세계 최고의 헤비급 선수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33년 슈멜링과 체코 배우 아니 온드라의 결혼식. 이 부부는 온드라가 1987년에 사망할 때까지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그러나 1933년이 되면서 슈멜링의 미국 내 이미지는 나빠지기 시작했다. 1932년, 나치당이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고, 당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의 이념에는 반유대주의적 경향이 강했다. 뉴욕과 같은 주요 미국 도시에는 유대인 인구가 많았고, 그들은 나치당이 그들의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우려했다. 독일 출신인 슈멜링은 히틀러의 세계 지배 계획의 연장선으로 여겨졌다. 그가 1933년 6월 8일, 강펀치의 도전자 맥스 베어와 싸우게 되자, 그는 즉시 팬들의 눈에 '악당'이 되었다. 유대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유대인 아버지를 둔 베어는 반바지에 다윗의 별을 새기고 링에 올랐다. 프로모터 잭 뎀프시는 이 점을 부각시켰고, 이 경기는 슈멜링이 대표하는 나치의 편견에 맞서 베어가 자신의 신앙을 옹호하는 싸움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좋지 않은 여론에 영향을 받은 슈멜링은, 베어의 거친 난투 스타일과 잦은 반칙(손등 펀치와 래빗 펀치 포함)으로 인해 10라운드 후, 양키 스타디움에서 6만 명 가까운 관중 앞에서 공격을 받았다. 독일 선수가 10라운드에 로프에 몰려 공격받자, 심판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이 경기와 이듬해 초 도전자 스티브 하마스에게 패배한 후, 많은 사람들은 슈멜링이 여전히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인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2. 3. 세계 챔피언 등극과 논란

1930년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파울리노 우스쿠둔을 15라운드 판정승으로 꺾은 슈멜링은 헤비급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세계 헤비급 챔피언 진 터니가 은퇴하자, 프로모터들은 슈멜링과 잭 샤키의 대결을 주선하여 챔피언 자리를 채우려 했다. 1930년 6월 12일, '대륙 간의 싸움'이라 불린 이 경기에서 슈멜링은 4라운드에 샤키의 로우 블로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슈멜링은 반칙을 주장했고, 매니저 제이콥스가 링에 뛰어드는 혼란 속에서 심판은 샤키의 실격을 선언하고 슈멜링을 승자로 판정했다. 이로써 슈멜링은 반칙으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이 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뉴욕 주 체육 위원회(NYSAC)는 이 판정을 검토하고 승인했다.[22]

슈멜링은 33년 만에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최초의 유럽인이자, 독일인 최초의 헤비급 챔피언이었다. 그러나 타이틀 획득 방식 때문에 '반칙 챔피언'이라 불리며 미국과 유럽에서 실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샤키와의 재대결을 거부하자 NYSAC는 슈멜링의 챔피언 인정을 박탈했지만, 전미 복싱 협회(NBA)와 ''The Ring'' 잡지는 여전히 그를 챔피언으로 인정했다. 이후 슈멜링은 영 스트리블링과의 첫 방어전에서 15라운드 TKO 승을 거두며 비판을 잠재웠다. 1932년 6월 21일, 슈멜링은 샤키와의 재대결에서 논란이 많은 판정 끝에 패배했다. 진 터니와 뉴욕 시장을 포함한 많은 관중은 슈멜링이 더 나은 경기력을 보였음에도 억울하게 졌다고 생각했다. 이 패배로 슈멜링은 오히려 복싱 팬들 사이에서 명성을 높였다.[22]

2. 4. 조 루이스와의 대결

1936년1938년, 막스 슈멜링은 조 루이스와 두 차례 역사적인 대결을 펼쳤다.

1936년 6월 19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1차전에서 슈멜링은 당시 무패 복서였던 조 루이스에게 첫 패배를 안기며 이변을 일으켰다. 슈멜링은 루이스의 약점을 분석, 12라운드 KO승을 거두었고, 이 경기는 “올해의 대결”로 선정되었다.

1938년 6월 22일 같은 장소에서 열린 2차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의 긴장된 국제 정세 속에서 '자유 대 파시즘'의 대결로 묘사되며 큰 관심을 받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까지 각각 루이스와 슈멜링에게 승리를 독려해, 이 경기는 스포츠 경기를 넘어선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슈멜링은 1라운드에 KO패를 당했다.

경기 후 슈멜링은 루이스와 친분을 유지했으며, 훗날 "그 경기에 져서 거의 행복하다"고 회고하며, 나치와의 연관성을 피할 수 있었던 것에 안도했다.

2. 4. 1. 1차전: 세기의 이변

1936년 6월 19일, 막스 슈멜링은 미국에서 무패의 신예로 승승장구하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던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와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대결을 펼쳤다.[1] 슈멜링은 이미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를 받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가 루이스의 명성을 높여주는 제물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1] 그러나 슈멜링은 경기 전 루이스의 경기들을 분석하여 루이스가 왼손 잽을 던질 때 왼쪽 어깨가 처진다는 약점을 파악했다.[1]

경기에서 슈멜링은 루이스의 왼손 잽을 오른손 훅으로 맞받아치며 거리를 유지했고, 4라운드에 오른손 어퍼컷을 루이스의 복부에 꽂아 루이스 생애 첫 다운을 만들어냈다.[1] 루이스는 간신히 일어났지만, 다운에 당황하여 전의를 상실한 듯했다.[1] 슈멜링은 루이스의 왼쪽을 집요하게 공략하며 몰아붙였고, 12라운드에 KO승을 거두었다.[1] 이 경기는 미국의 복싱 잡지 “The Ring”이 선정한 “올해의 대결”에 뽑혔다.[1]

1936년 루이스 대 슈멜링


독일에서는 슈멜링의 승리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히틀러는 슈멜링의 아내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2] 슈멜링 또한 독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총통에게 감사를 표하며, 이 승리가 독일 국기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2]

2. 4. 2. 2차전: 역사적 대결

1937년 챔피언에 오른 조 루이스는 "슈멜링을 꺾을 때까지는 나를 챔피언이라 부르지 말라"며 복수전을 별러왔다.[25] 1938년 6월 22일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재대결은,[25] 제2차 세계 대전을 앞둔 상황에서 미국과 독일의 대리전 양상을 띠며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서방 언론은 두 선수의 경기를 ‘흑인 대 백인’, ‘자유 대 파시즘’, ‘선(善) 대 악(惡)’의 대결로 묘사했다.[25] 조 루이스는 미국에서 자유와 기회의 상징으로, 막스 슈멜링은 히틀러가 창조한 독일의 국민적 영웅이자 자유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25]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경기 며칠 전 루이스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당신의 두 팔에 미국(운명)이 달려 있다”고 말했으며,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총통도 슈멜링에게 “미국 검둥이를 때려 눕혀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만방에 알리라”고 특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25]

슈멜링은 1회 2분 4초 만에 KO패를 당했고,[25] 미국 언론은 이를 ‘사악한 나치’에 대한 ‘자유의 승리’라고 보도했다.[25] 경기 후 슈멜링은 루이스와 친분을 유지했으며, 1995년 90회 생일에 “내 친구 루이스가 먼저(1981년 사망) 세상을 떠난 것이 가장 아쉽다”고 회고했다.[25]

1938년, 챔피언 조 루이스는 슈멜링과 타이틀전을 치를 것이라고 발표했고, 이 리매치는 즉시 국제적인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많은 이들이 경기를 고대했지만, 국제적인 긴장과 히틀러가 챔피언십을 차지할 가능성을 두려워하며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난하고 하층민 출신이었던 루이스는 기회의 땅으로서 미국의 상징으로 미국 팬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반면 미국인들은 슈멜링과 히틀러와의 관계를 그러한 기회와 이상에 대한 명백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1938년 6월 22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독일인 슈멜링이 링으로 걸어 들어갈 때, 관중석에서는 쓰레기가 쏟아졌다. 루이스는 1라운드부터 맹렬하게 공격했고, 슈멜링은 반격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로프에 몰린 슈멜링은 상대에게 등을 돌리고 로프를 붙잡으며 비명을 질렀는데, 이는 신장에 펀치를 맞았기 때문이라고 후에 밝혔다. 슈멜링은 마지못해 로프에서 물러섰지만, 몇 번의 펀치 후 다시 쓰러졌고, 결국 심판은 경기를 중단시켰다.

1975년, 슈멜링은 "돌이켜보면, 그 경기에 져서 거의 행복하다. 만약 내가 승리해서 독일로 돌아갔다면, 나는 나치와 아무 관련이 없었지만, 그들은 나에게 메달을 줬을 것이다. 전쟁 후 나는 전범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나치 독일오스트리아를 합병하는 등 다른 서방 국가들과의 긴장을 높였고, 미국의 매스 미디어에서도 많은 반독일 선전을 만들어냈다. 1938년 6월, 슈멜링이 루이스와의 두 번째 시합을 위해 뉴욕에 도착했을 때, 동행한 나치 홍보 담당자는 "슈멜링이 승리할 경우, 슈멜링의 파이트 머니는 독일의 전차를 만드는 데 사용될 것이다"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영향으로, 슈멜링이 미국에서 묵는 호텔 앞에서는 루이스와의 두 번째 시합 며칠 전부터 반나치 시위가 벌어졌고, 슈멜링에게도 엄청난 양의 증오가 담긴 협박 편지가 보내졌으며, 시합에서 링으로 입장할 때는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던져졌다.

시합 며칠 전, 뉴욕주 체육 위원회는 슈멜링의 매니저인 조 제이콥스가 슈멜링의 세컨으로 참여하는 것과 대기실 출입을 금지했다. 게다가, 항상 슈멜링의 세컨을 맡았던 닥 케이시도 세상의 악평을 두려워하여 세컨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시합 전 대기실에서 슈멜링은 신경질적인 상태였지만, 반면 루이스는 대조적으로 2시간 낮잠을 자는 등 편안한 모습을 보였다.

1938년 6월 22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조 루이스와의 재대결이 펼쳐졌지만, 전과는 달리 슈멜링의 카운터 노림수는 통하지 않았고, 1라운드에 세 번의 다운을 당하며 KO패했다. 이 패배 이후 나치는 슈멜링을 국민적 영웅으로 대하는 것을 멈췄고, 슈멜링과 나치 사이에는 점차 틈이 벌어졌다. 슈멜링은 나치당 입당 제안을 거절했고, 프로모터 조 제이콥스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프로모터를 바꾸라는 나치의 권고에도 응하지 않았다. 1938년 11월 독일 각지에서 일어난 반유대주의 폭동인 수정의 밤게슈타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유대인 아이 2명을 아파트에 숨겨주었다. 이러한 나치에 대한 저항은 전후 칭찬받았다.

2. 5. 나치 정권과의 관계

1932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반유대주의 이데올로기를 내건 나치당이 제1당이 되어 정권을 잡자, 뉴욕 등 미국의 주요 도시에 많은 유대인유대교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독일 출신인 슈멜링은 히틀러의 세계 지배 계획의 일환으로 여겨지면서 미국에서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바뀌기 시작했다.[10]

1933년 6월 8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막스 베어와의 시합에서는 슈멜링이 악역으로 비춰졌다. 프로모터인 잭 뎀프시의 아이디어로, 나치당의 반유대주의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막스 베어라는 스토리라인이 그려졌다. 베어는 아버지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대교를 신앙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윗의 별을 바지에 붙이고 경기에 임했고, 슈멜링도 마지못해 그 스토리라인에 따랐다. 시합에서는 슈멜링은 6만 명에 가까운 관중 앞에서 막스의 거친 복싱에 뒷손 공격이나 래빗 펀치 등 반칙을 여러 번 당하며 10라운드 TKO 패를 당했다.[10]

1934년 2월 13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컨벤션 홀 시빅 센터에서 전 미식축구 선수 스티브 하마스와 대결하여 12회 판정패를 당해 2연패를 기록했다. 슈멜링은 이 시합 후 독일로 돌아가 3경기를 치렀지만, 1935년 3월 10일 함부르크에서 하마스에게 9회 KO승을 거두며 설욕했다. 그러나 시합 후 하마스는 뇌진탕에 시달렸고,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으나, 왼쪽 반신의 마비가 3년 동안 낫지 않아, 이것이 마지막 시합이 되어 은퇴했다.[10]

2. 6. 은퇴 이후

1948년 43세의 나이로 은퇴했다.[26] 은퇴 후 1950년대에는 그동안 번 돈으로 독일에서 최초로 코카콜라 컴퍼니의 사장이 되었고, 사업상으로도 크게 성공했다.[12]

1981년 조 루이스가 사망하자, 그의 장례식을 치러주기도 했다.[13]

1987년 그의 아내 아니 온드라가 사망했다. 같은 해 독일 스포츠 담당 기자 등의 투표에 의해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독일의 운동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26]

1991년 본인의 이름을 따서 막스 슈멜링 재단을 설립했다.[26]

1992년에는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5년 2월 2일 99세의 일기로 타계하였다.[26]

2010년에는 그의 일대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27]

조 루이스와 1971년의 막스 슈멜링

3. 유산 및 평가

조 루이스에게 패배한 후 독일로 돌아온 슈멜링은 나치에게 외면당했다. 그는 아돌프 호이저를 1라운드에 KO 시키며 같은 날 독일 및 유럽 헤비급 챔피언십에서 모두 우승했다. 나치가 베를린에서 유대인을 숙청하는 동안 그는 아파트에 유대인 아이 두 명을 숨겨 그들의 생명을 구했다.[7] 슈멜링이 나치 정권의 유대인 혐오에 반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히틀러는 슈멜링이 유대인 권투 프로모터인 조 제이콥스와의 관계에 매우 불만을 품고 스포츠 국가부 장관을 통해 이를 끊기를 원했지만, 슈멜링은 히틀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다.[8]

전쟁 중 슈멜링은 징집되어 루프트바페에서 복무했으며 공수부대원으로 훈련받았다.[9] 1941년 5월 크레타 전투에 참전했으며, 전투 첫날 박격포 파편에 오른쪽 무릎을 부상당했다. 회복 후 부상으로 인해 임무 수행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아 현역에서 면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4년 7월, 그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전 세계 뉴스에 보도되었다.[10] 그는 나중에 독일의 미국 포로 수용소를 방문하여 때때로 포로들의 상황 개선을 도우려 했다. 1945년 초까지 그는 독일 장교 식당에서 전 영국 자유 군단 단원 에릭 플레전츠와 함께 시범 경기를 했다.[11]

전쟁 후 슈멜링은 함부르크에 정착하여 1947년 자금난에 시달리다 복싱에 복귀하여 1948년 10월 영구적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5번의 경기 중 3번을 승리하고 2번의 판정패를 당했다.

1950년대 초 슈멜링은 밍크, 닭, 담배 농장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 10년 말, 코카콜라 컴퍼니의 독일 지사와의 여러 차례 만남을 거친 후 슈멜링은 '코카콜라화'의 얼굴이 되었고 코카콜라의 독일 재진출을 이끌었다. 머지않아 그는 자신의 병입 공장을 소유했고 회사 내에서 임원 직책을 맡았다. 슈멜링은 독일에서 자동판매기 사용을 도왔다.[12]

그는 조 루이스와 친구가 되었고, 말년에는 전 라이벌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여 1981년 그의 장례식을 치렀다.[13]

1987년, 54년간 그의 아내였던 체코 출신 배우 아니 온드라가 사망했다. 1992년 그는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1994년 그의 자서전 ''막스 슈멜링: 자서전''이 출판되었다. 그는 부유한 사람으로서 남은 생을 보냈고 열렬한 복싱 팬으로, 2005년 2월 2일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

2010년, 슈멜링의 청동상이 홀렌슈테트에 세워졌다.[15]

4. 문화적 영향

2005년 독일 우표


막스 슈멜링은 여러 대중 매체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언급되거나 묘사되었다.

  • 슈체틴 (현재 폴란드의 슈체친) 출신 밴드 디 아날로그스는 2000년 앨범 ''Hlaskover rock''에 "막스 슈멜링"이라는 노래를 수록했다.
  • 영국의 제2차 세계 대전 노래 "히틀러는 공 하나밖에 없다"에서 언급되었다.[16]
  • 로앤오더 시즌 9 또는 10 에피소드에서 탐정들이 특정 총을 찾고 있을 때 언급되었으며, 그 총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1937년 슈멜링과 장기간 경기를 치렀던 1930년대의 권투 선수였다.
  • 영화 ''취리히의 약혼''(1957)에서 잠시 본인 역할로 출연했다.
  • 미국-독일 영화 ''조 앤 맥스''(2002)는 조 루이스와 막스 슈멜링의 실화와 그들의 지속적인 우정을 다루었다.
  • 소설 ''카발리에와 클레이의 놀라운 모험''에서 조 카발리에는 막스 슈멜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누군가에게 맞는데, 작가는 슈멜링이 당시 폴란드에서 싸우고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아마도 그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 2005년, 오스트리아 우체국은 독일 예술가 게오르그 그로츠의 1926년 그림을 바탕으로 막스 슈멜링을 기념하는 우표를 발행했다.[17]
  • 영화 ''록키 4''에서 미국인 록키 발보아와 러시아인 이반 드라고의 마지막 경기는 조 루이스와 막스 슈멜링의 경기를 모티브로 했으며, 냉전 시대를 반영하여 업데이트되었다.[18]
  • 조 루이스의 삶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섀도우복서''의 등장인물로 등장한다.[19]
  • P.F. 클루게의 2010년 소설 ''A Call From Jersey''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2010년 5월 21일 홀렌슈테트에서 막스 슈멜링 기념비 제막식 후의 헨리 마스크와 블라디미르 클리치코

  • 쿠르치오 말라파르테의 소설 ''카푸트''(1944)에서 1942년 2월 바르샤바 벨베데르 궁전에서 총독 한스 프랑크 박사가 주최한 모임을 묘사하는 "폴란드의 크리켓" 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슈멜링이 공수 부대원으로서의 역할은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1959)에서 언급된다.
  • 영화 ''막스 슈멜링 – 독일의 전설''(2010)에서 그를 알고 지냈던 전 권투 챔피언 헨리 마스크가 막스 슈멜링 역을 연기했다.
  • ''보이저스!'' 에피소드 "모두 넘어지다"는 조 루이스와의 두 번째 경기를 묘사한다. 이 시리즈의 시간 여행 주인공인 피니어스 보그와 제프리 존스는 루이스가 경기를 포기하지 않도록 설득했고, 1938년 6월 22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슈멜링을 상대로 승리하는 것을 목격했다.
  • 인디 밴드 예이어의 노래 Ambling Alp에서 "오, 막스 슈멜링은 강력한 적이었고, Ambling Alp도 그랬어, 적어도 내가 들은 바로는"이라고 언급된다.
  • 독일인 캐릭터 리히토펜이 "알파 오메가" DLC 좀비 모드 맵에서 좀비에게 공격당했을 때 비디오 게임 ''콜 오브 듀티: 블랙 옵스 4''에서 언급된다("아! 넌 언데드 막스 슈멜링이냐?!").
  • 시즌 6의 에피소드 7, "더 나은 콜 사울"에서 주인공이 현관문을 열면서 "내가 열게. 막스 슈멜링이 펀치를 날리면서 들어올 경우를 대비해서."라고 말할 때 하워드 햄린이라는 캐릭터와 비교된다.[20]

5. 수상 및 명예

수상 및 명예
독일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1926–1928)
유럽 라이트 헤비급 챔피언 (1927–1928)
독일 헤비급 챔피언 (1928)
세계 헤비급 챔피언 (1930–1932)
유럽 헤비급 챔피언 (1939–1943)
로스앤젤레스 명예 시민
라스베이거스 명예 시민
클라인-루코 (고향) 명예 시민
오스트리아 권투 연맹 명예 회원
제5대 독일 라이트헤비급 왕좌
제9대 독일 헤비급 왕좌
제16대 유럽 헤비급 왕좌
세계 헤비급 왕좌


참조

[1] 웹사이트 Max Schmeling http://www.nndb.com/[...] 2017-03-05
[2] 웹사이트 Max Schmeling http://www.auschwitz[...] 2005-02-02
[3] 웹사이트 Ring Magazine's 100 Greatest Punchers http://boxing.about.[...] 2012-02-10
[4] 뉴스 Hintergrund Die Lebensstationen von Max Schmeling: Max Schmelings Leben und Wirken im Überblick http://www.faz.net/a[...] Frankfurter Allgemeine 2005-02-04
[5] 서적 Beyond glory : Joe Louis vs. Max Schmeling and a world on the brink Vintage Books, a division of Random House, Inc 2005
[6] 뉴스 Boxing legend Max Schmeling dies at 99 https://www.usatoday[...] USA Today 2005-02-04
[7] 뉴스 S.F. hotelier recalls the day a German boxer saved him https://www.jweekly.[...] The Jewish News of Northern California, 8 March 2002 2002-03-08
[8] 웹사이트 Joe Jacobs (1898–1939) https://www.pbs.org/[...] WGBH Educational Foundation 2022-04-21
[9] 웹사이트 Max Schmeling (1905-2005) https://www.pbs.org/[...] WGBH Educational Foundation 2022-04-22
[10] 뉴스 Max Schmeling Reported Killed on American Front https://www.newspape[...] Chicago Tribune 1944-07-21
[11] 간행물 Renegades Random House 2014-11-12
[12] 서적 The Greatest Fight of Our Generation 2006
[13] 웹사이트 American Experience | The Fight | People & Events https://www.pbs.org/[...] PBS 2017-03-05
[14] 뉴스 Heavyweight legend Max Schmeling dies http://news.bbc.co.u[...] BBC Sport 2005-02-04
[15] 뉴스 "Hollenstedt: Max-Schmeling bekommt ein Denkmal" Hamburger Abendblatt 2010-04-01
[16] 서적 Unruly Audience University Press of Colorado
[17] 웹사이트 Austria: Max Schmeling postage stamp https://findyourstam[...] FindYourStampsValue.com 2005-03-01
[18] Youtube The Making of ROCKY VS. DRAGO by Sylvester Stallone https://www.youtube.[...] 2021-10-30
[19] 뉴스 "Inspired by Joe Louis, opera 'Shadowboxer' scores one for reality" https://www.washingt[...] Washington Post 2010-04-17
[20] 뉴스 s06e07 – Plan and Execution – Better Call Saul Transcripts – TvT https://tvshowtransc[...]
[21] 뉴스 Besprechung: ''Beyond Glory'' New York Times 2005-10-02
[22] 영화 ノックアウト
[23]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boxrec.com/li[...] 2014-11-09
[24] 문서 Schmeling-Max-Born-in-German-Village-Uckermark http://sports.jrank.[...]
[25] 뉴스 '[책갈피 속의 오늘]1938년 조 루이스, 슈멜링에 복수전'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06-06-22
[26] 뉴스 독일 전설적 권투선수 막스 슈멜링 타계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5-02-04
[27] 웹인용 보관된 사본 http://dalje.com/en-[...] 2014-11-0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