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앤 페이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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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리앤 페이스풀은 1960년대 데뷔하여 팝 아이돌로서 인기를 얻은 영국의 가수이자 배우이다. 1964년 "As Tears Go By"로 데뷔했으며, 믹 재거와의 교제, 마약, 건강 문제 등 사생활의 어려움을 겪었다. 1979년 앨범 《Broken English》로 재기에 성공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음반을 발표하고 연기 활동을 병행했다. 2009년 여성 세계상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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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앤 페이스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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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메리앤 에블린 게이브리얼 페이스풀 |
| 출생일 | 1946년 12월 29일 |
| 출생지 | 런던, 햄프스테드 |
| 직업 | 싱어송라이터 배우 |
| 활동 기간 | 1964년 – 현재 |
| 배우자 | 존 던바 (1965년 결혼, 1966년 이혼) 벤 브리어리 (1979년 결혼, 1986년 이혼) 조르조 델라 테르차 (1988년 결혼, 1991년 이혼) |
| 파트너 | 믹 재거 (1966년–1970년) |
| 자녀 | 1명 |
| 어머니 | 에바 폰 자허-마조흐 |
| 친척 | 사이먼 페이스풀 (이복 형제) |
| 웹사이트 | 메리앤 페이스풀 공식 웹사이트 |
| 음악 경력 | |
| 장르 | 록 포크 얼터너티브 블루스 재즈 |
| 레이블 | 데카 런던 아일랜드 RCA 허트/버진 나이브 |
| 관련 활동 | 앤드루 루그 올덤 메탈리카 롤링 스톤스 닉 케이브 |
2. 초기 생애
영국 런던 출생. 아버지는 대학교수[75],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명문 귀족 가문 출신으로, 선조가 합스부르크 왕가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마리앤의 외증조부모 형제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76] 2009년, BBC 인터뷰에서 사촌의 죽음으로 자허마조흐 남작 가문의 가문을 상속받았다고 밝혔다.[77] 그러나 가정이 그다지 부유하지 않아, 어린 시절 부모가 이혼하고 마리앤은 수도원에서 자라게 된다. 그리고 17세에 존 던바와 결혼하지만, 던바와 롤링 스톤스의 당시 매니저 앤드류 루그 올덤이 마침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파티에 참석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에 입문, 그녀를 위해 준비된 곡 "눈물 흘러(As Tears Go By)"로 1964년에 데뷔하게 된다. 이후 팝 아이돌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고 그 가창력과 미모로 인기를 얻었다. 게다가 장 뤽 고다르에게 발탁되어 영화 데뷔도 한다. 이후 66년에 던바와 이혼하고 본격적으로 스톤스의 믹 재거의 연인이 된다.[75]
1966년부터 70년까지 믹 재거와 교제했지만, 유산과 정신 불안정으로 자살 미수도 반복했다고 한다. 마약을 하는 마리앤을 보다 못한 믹은 마약을 끊게 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아 결국 두 사람은 1970년에 결별. 그녀는 데뷔 후 몇 년 동안은 엔젤 보이스라고 불렸지만, 1969년의 "시스터 모르핀"에서 깨끗한 목소리에서 변화가 나타났다.
목소리를 망가뜨린 원인은 마리앤의 유산과 믹과의 결별, 그 후의 마약, 자살 미수, 알코올, 담배로 허스키한 목소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2. 1. 가계
마리안느 페이스풀은 1946년 런던 햄스테드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로버트 글린 페이스풀 소령은 영국 정보 장교이자 런던 대학교 베드퍼드 칼리지의 이탈리아 문학 교수였다.[1]그녀의 어머니 에바 폰 자허-마조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스스로를 에바 폰 자허-마조흐, 에리소 남작 부인으로 칭했다.[1] 에바는 젊은 시절 막스 라인하르트 컴퍼니의 발레리나였으며, 독일 극작가 듀오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쿠르트 바일의 작품에 출연했다.[2] 에바는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18년 비엔나로 이주했다. 자허-마조흐 가문은 비엔나에서 나치 정권에 은밀히 반대했다. 페이스풀의 아버지가 영국 육군을 위해 정보 업무를 하면서 이 가문과 접촉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에바를 만났다.[3] 페이스풀의 외조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귀족 출신이었고, 페이스풀의 외할머니는 유대인이었다.[4]
페이스풀의 외증조부인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는 그의 에로틱 소설 ''가죽 속의 비너스''에서 "마조히즘"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5] 오스트리아 귀족으로서의 그녀의 뿌리에 관해, 페이스풀은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에 출연하여 가족 구성원이 사용한 칭호가 기사 폰 자허-마조흐라는 것을 논의했다.[6] 2009년, BBC 인터뷰에서 사촌의 죽음으로 자허마조흐 남작 가문의 가문을 상속받았다고 밝혔다.[77]
2. 2. 유년 시절
페이스풀은 런던에서 태어났다.[75] 아버지는 대학교수였고,[75]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명문 귀족 가문 출신으로, 선조가 합스부르크 왕가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마리앤의 외증조부모 형제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였다).[76] 2009년, BBC 인터뷰에서 사촌의 죽음으로 자허마조흐 남작 가문의 가문을 상속받았다고 밝혔다.[77] 그녀의 가족은 아버지의 리버풀 대학교 박사 학위 과정을 돕기 위해 랭커셔주 Ormskirk에 살았다. 어린 시절은 아버지인 존 노먼 글레이스터가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옥스퍼드셔주 Braziers Park의 공동체에서 보냈다. 부모는 그녀가 6살 때 이혼했고, 이후 어머니와 함께 레딩의 밀만 로드로 이사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으며, 소녀 시절 결핵을 앓았다. 레딩의 세인트 조셉 로마 가톨릭 수녀원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는 학생이었으며,[7] 프로그레스 극장 학생 그룹의 일원이었다.[8]3. 음악 경력
3. 1. 1960년대: 데뷔와 성공
페이스풀은 1964년 포크 음악을 부르며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9] 롤링 스톤스의 런칭 파티에서 앤드류 루그 올드햄에게 발탁되어 데뷔했다.[9]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가 작곡한 "As Tears Go By"는 차트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10] 이후 "This Little Bird", "Summer Nights", "Come and Stay with Me" 등의 히트곡을 발표했다.[9]
1965년 5월 6일, 존 던바와 결혼하여 런던 벨그라비아 레녹스 가든 29번지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았다.[1] 같은 해 11월 10일 아들 니콜라스를 낳았다.[1] 그러나 1966년, 페이스풀은 남편과 헤어지고 믹 재거와 연애를 시작했다. 이들은 런던 사교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14]
믹 재거와의 관계는 롤링 스톤스의 여러 곡에 영감을 주었다. "Sympathy for the Devil"은 미하일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가리타''에서 영향을 받았으며,[9]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는 페이스풀에 대한 노래로 추정된다.[9] 또한 "Wild Horses"와 "I Got the Blues"도 페이스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9] "Sister Morphine"은 페이스풀이 공동 작곡했으나, 저작권 문제로 오랜 법적 분쟁을 겪었다.[9] 1968년에는 ''The Rolling Stones Rock and Roll Circus'' 콘서트에서 "Something Better"를 불렀다.[9]


1968년, 페이스풀은 재거의 아이를 임신했으나 유산했다.[9][15]
3. 2. 1970년대: 몰락과 재기
1970년 5월, 페이스풀은 앵글로-아일랜드 귀족인 "패디" 로스모어와 불륜을 저지르면서 믹 재거와의 관계를 끝냈다.[9] 같은 해 아들의 양육권도 잃었고, 이로 인해 자살을 시도했다.[9] 이후 페이스풀의 사생활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경력은 곤두박질쳤다. 1973년 10월 데이비드 보위와 함께 공연에서 소니 앤 셰어의 "I Got You Babe"를 부른 것이[9] 몇 안 되는 활동이었다.페이스풀은 런던 소호 거리에서 2년 동안 살면서 헤로인 중독과 신경성 식욕 부진에 시달렸다.[18] 친구들의 개입으로 NHS 헤로인 보조 치료 프로그램에 등록되었으나,[19] 중독을 통제하거나 안정시키는 데 실패했다.[20] 1971년, 프로듀서 마이크 리앤더가 길거리에서 그녀를 발견하고 앨범 ''리치 키드 블루스''의 일부를 제작했지만, 이 앨범은 1985년까지 보류되었다.[9] 심각한 후두염과 지속적인 약물 남용으로 인해 페이스풀의 목소리는 영구적으로 변했고, 갈라지고 음이 낮아졌다. 새로운 목소리가 일부 비평가들로부터 "위스키에 절은" 목소리로 칭찬받았지만, ''선데이 타임스''의 저널리스트 존 존스는 그녀가 "영구적으로 목소리를 저속하게 만들었다"고 썼다.[9] 1975년, 컨트리 음악의 영향을 받은 음반 ''Dreamin' My Dreams''를 발매했고, 1978년에는 새로운 트랙이 추가되어 ''Faithless''로 재발매되어 아일랜드 앨범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9] 당시 남자 친구였던 밴드 더 바이브레이터스의 벤 브리얼리와 함께 첼시에서 온수나 전기가 없는 불법 점거지로 이사했다.
1979년, 노르웨이에서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체포된 같은 해,[9] 페이스풀의 경력은 앨범 ''Broken English''로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다.[9] 펑크 팝 사운드의 동명 타이틀 곡은 울리케 마인호프에게 헌정되었으며, 유럽의 테러리즘을 다루었다.[21] 펑크-레게 리듬의 "Why D'Ya Do It?"는 히스코트 윌리엄스의 시를 각색한 공격적인 가사를 담고 있으며, 페이스풀은 이를 "초창기 랩 음악의 형태"라고 언급했다.[9] ''Broken English''는 페이스풀의 알코올 및 약물 사용의 전모와 그것이 그녀의 목소리에 미치는 영향을 드러낸 앨범으로, 초창기 음반의 멜로디 보컬은 이 앨범의 노래에서 표현된 날것의 감정을 포착하는 데 도움이 된 거칠고 깊은 목소리로 대체되었다.[9]
3. 3. 1980년대 이후: 꾸준한 활동
메리앤 페이스풀은 1980년대 중반까지 중독과 싸웠으나, 재활 치료를 통해 극복했다.[9] 1981년에는 루퍼트 하인의 싱글 "Misplaced Love"에 보컬로 참여하여 호주 차트에 진입하기도 했다.[22] 1985년에는 할 윌너의 트리뷰트 앨범 ''로스트 인 더 스타스: 커트 바일의 음악''에서 "Ballad of the Soldier's Wife"를 불렀다.[15]1987년, 페이스풀은 재즈와 블루스에 도전한 앨범 ''스트레인지 웨더''를 발표하여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15] 이 앨범에는 밥 딜런의 "I'll Keep It with Mine", 제롬 컨과 오토 하바흐가 작곡한 "예스터데이", 톰 웨이츠가 작곡한 타이틀 트랙 등이 수록되었다.[15] 또한, 데뷔곡인 "눈물은 흘러가고"를 재녹음하여 수록했다.[15] 1990년에는 로저 워터스의 록 오페라 ''The Wall'' 베를린 공연에서 핑크의 어머니 역을 맡았고,[15] 라이브 앨범 ''Blazing Away''를 발매했다.[15]
1990년대에는 ''A Collection of Her Best Recordings''(1994), 패티 스미스가 쓴 곡이 포함된[15] ''어 시크릿 라이프''(1995), The Chieftains와 함께 부른 아일랜드 민요 "Love Is Teasin"이 수록된 ''The Long Black Veil''(1995), 옥스보우 앨범 ''Serenade in Red''(1997) 참여, 메탈리카의 앨범 ''Reload''의 수록곡 "The Memory Remains" 피처링 및 뮤직 비디오 출연(1997),[36] 쿠르트 바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음악을 담은 ''Twentieth Century Blues''(1996),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가 지휘한 ''The Seven Deadly Sins''(1998), ''A Perfect Stranger: The Island Anthology''(1998) 등을 발표했다. 1999년에는 로저 워터스가 작곡한 "Incarceration of a Flower Child"가 수록된 ''Vagabond Ways''를 발매했다.

2000년대에는 ''Vagabond Ways''(1999),[15] Blur, 벡, 빌리 코건 등과 협업한 ''Kissin Time''(2002), PJ 하비, 닉 케이브와 주로 협업한 ''Before the Poison''(2005),[23][24] 패트릭 울프와의 듀엣곡 "Magpie"가 수록된 ''The Magic Position''(2007), 할 윌너가 프로듀싱한 ''Easy Come, Easy Go''(2008) 등을 발표했다. 2009년에는 월드 라디오 스위스와의 인터뷰에서 에이미 와인하우스에 대한 공감을 표했다.[30][31]
2010년대에는 ''Horses and High Heels''(2011),[32][33][34] 플리트우드 맥 트리뷰트 앨범 ''Just Tell Me That You Want Me'' 참여 (2012),[37] ''Give My Love to London''(2014), ''Negative Capability''(2018) 등을 발표했다.
2021년에는 워런 엘리스, 브라이언 이노, 닉 케이브 등이 참여한 음성 낭독 앨범 ''She Walks in Beauty''를 발매했다.[42][43] 2023년, 롤링 스톤은 페이스풀을 역대 가장 위대한 가수 200인 중 173위로 선정했다.[44] 2009년, 여성 세계상(Women's World Awards)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4. 연기 경력
메리앤 페이스풀은 음악 경력 외에도 연극, 텔레비전, 영화에서 배우로 활동했다. 1967년 장뤽 고다르의 영화 《미국에서 만들어짐》에 본인 역할로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했다. 같은 해, 안톤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의 로열 코트 극장 각색 작품에서 글렌다 잭슨, 아브릴 엘가와 함께 이리나 역을 맡아 첫 전문 연극 무대에 섰다.
1968년에는 가죽 오토바이 복장을 한 여성을 연기한 영화 《오토바이 타는 소녀》에 출연했고, 1969년에는 케네스 앵거의 《루시퍼 라이징》에 출연했다. 같은 해 런던 라운드하우스 (공연장)에서 공연된 《햄릿》에서 오필리아 역을 맡았고, 이는 이후 《햄릿》으로 영화화되었다.
1970년대에는 스티븐 위크스의 《Ghost Story》에서 소피 크윅웨르 역, 《Assault on Agathon》에서 헬렌 로슈포트 역을 맡았다. 1991년에는 더블린 게이트 극장에서 공연된 《서푼짜리 오페라》에서 해적 제니 역할을 맡았고, 이후 쿠르트 바일의 "The Seven Deadly Sins"를 빈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하여 1998년에 CD로 발매했다.
2001년 파트리스 셰로의 《인티머시》에 출연했고, 2006년에는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역을 맡았다. 2007년 영화 《이리나 팜》에서는 아픈 손자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성매매를 하는 60세 과부 매기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고, 이 연기로 유럽 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68][69]
2011년과 2012년에는 영화 《군중 속의 얼굴》과 《벨 뒤 세뇨르》에 조연으로 출연했다.
5. 사생활
페이스풀은 세 번의 유산과 네 번의 낙태를 겪었다. 첫 번째 낙태는 1964년 진 피트니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이루어졌으며, 당시 영국에서는 이 시술이 불법이었고, 페이스풀은 죄책감을 느끼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51][52] 그녀는 그 다음 해에 아들이 태어난 후 기분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후의 낙태는 그녀의 약물 남용 기간 동안 이루어졌으며, 그녀는 아이들이 중독자로 태어나기를 원하지 않았다.[51][52]
1960년대 후반, 전라로 과다 복용 상태로 쓰러져 있는 것을 경찰에 발견되는 등의 스캔들에 휩싸였다. 그녀는 그 동안의 청순파 이미지를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메리앤 페이스풀의 아이돌 생명은 끝났다고 여겨진다. 후년에, 마르스 바 스캔들이 날조였다고 한다.
영화계와 TV 드라마계에서도 러브콜을 받아, 안나 카리나와 세르주 갱스부르가 주연한 TV 영화 『안나』에서는 노래만 부르는 장면이었지만, 출연을 달성했다. 게다가 대스타 알랭 드롱 주연 영화 『그 가슴에 다시 한번』에서 드롱과 불륜 관계에 빠지는 여성을 연기했다.
『그 가슴에 다시 한번』에는, 히로인이 전라에 가죽 라이더 수트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이 있어, 스즈키 노리후미 감독이나, 이즈츠 카즈유키 감독 등이 영화 속 페이스풀에게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으며, 또한 『루팡 3세』의 미네 후지코의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안나 카리나 주연의 고다르의 『메이드 인 USA』에서 도리스 미조구치 (도리스 미조구치/Doris Mizoguchi프랑스어 (미조구치 겐지에 대한 오마주 캐릭터) 역의 코사카 쿄코 (여배우) (프랑수아 트뤼포 『가정』(1970)의 "쿄코"의 모델이 된 여성,)와 동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 공동 출연 장면은 없다.
여배우로서, 2006년에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로 출연. 2007년에는 61세로 영화 『부드러운 손』의 주역, 매기를 연기했다.
5. 1. 건강 문제
메리앤 페이스풀의 투어 및 작업 일정은 건강 문제로 인해 반복적으로 중단되었다. 2004년 말, 그녀는 Before The Poison을 홍보하는 월드 투어의 유럽 일정을 밀라노 공연 중 쓰러진 후 취소하고, 과로로 입원했다.[56] 2006년 9월, 그녀는 유방암 진단을 받은 후 다시 콘서트 투어를 취소했다.[53][54] 다음 달, 프랑스에서 수술을 받았고, 종양이 매우 초기 단계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추가 치료는 필요하지 않았다. 질병을 극복했다고 선언한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페이스풀은 완전한 회복에 대한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55]2007년 10월, 페이스풀은 영국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This Morning에서 C형 간염을 앓고 있으며, 12년 전에 처음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암과 간염 진단에 대해 그녀의 회고록인 ''Memories, Dreams and Reflections''에서 더 자세히 논의한다.[2]
2013년 8월, 페이스풀은 캘리포니아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허리 부상을 입어 미국과 레바논에서 일련의 콘서트를 취소해야 했다.[57] 2014년에는 그리스 로도스 섬에서 넘어져 고관절 골절을 입고 수술을 받았다.[58] 이후, 보철물 부위에 감염이 발생하여 추가 수술과 재활을 위해 50주년 투어의 일부를 취소하거나 연기했다.[59]
2020년 4월 4일, 페이스풀이 런던의 병원에서 코로나19 양성 반응을 보인 후 폐렴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발표되었다.[60] 그녀의 매니지먼트 회사는 그녀가 "안정적이며 치료에 반응하고 있다"고 보고했다.[60] 4월 21일, 그녀는 3주간의 입원 후 퇴원했다.[61] 간단한 성명에서 페이스풀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녀의 생명을 구한 병원 직원들에게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했다.[61] 그녀는 처음에 코로나바이러스가 폐에 미치는 영향으로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기억 상실을 계속 겪었다.[62] 그러나 그녀는 이후 회복의 일환으로 호흡 운동과 노래 연습을 하고 있다.[63]
5. 2. 사회적 활동
6. 수상 및 영예
메리앤 페이스풀은 1999년 VH1의 "100명의 가장 위대한 여성 록앤롤"에서 25위에 올랐다. 2007년 11월 4일, 유럽 영화 아카데미는 페이스풀이 영화 ''이리나 팜''에서 매기 역으로 최우수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고 발표했다.[48] 2009년 3월 5일에는 2009년 여성 세계상에서 평생 공로상인 세계 예술상을 수상했다.[46] 2011년 3월 23일,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 문학 훈장 커맨더를 수여받았다.
| 상 | 연도 | 후보 | 부문 | 결과 | |
|---|---|---|---|---|---|
| 유러피언 영화상 | 2007 | 이리나 팜 | 여우주연상 | [48] | |
| 그래미상 | 1981 | 브로큰 잉글리시 | 최우수 여성 록 보컬 퍼포먼스 | [49] | |
| Q 어워드 | 2009 | 본인 | Q 아이콘 | [50] | |
| 우먼스 월드 어워드 | 2009 | 본인 | 평생 공로상 | [46] |
7. 음반 목록
- ''Come My Way'' (1965, 영국 한정)
- ''마리앤 페이스풀'' (1965)
- ''Go Away from My World'' (1965, 미국 한정)
- ''North Country Maid'' (1966, 영국 한정)
- ''Faithfull Forever'' (1966, 미국 한정)
- ''Love in a Mist'' (1967, 영국 한정)
- ''Dreamin' My Dreams'' (1976, 1978년 ''Faithless''로 4곡을 추가하여 재발매)
- ''Broken English'' (1979)
- ''Dangerous Acquaintances'' (1981)
- ''A Child's Adventure'' (1983)
- ''Rich Kid Blues'' (1985, 1971년 녹음)
- ''Strange Weather'' (1987)
- ''A Secret Life'' (1995)
- ''The Seven Deadly Sins'' (1998)
- ''Vagabond Ways'' (1999)
- ''Kissin Time'' (2002)
- ''Before the Poison'' (2005)
- ''Easy Come, Easy Go'' (2008)
- ''Horses and High Heels'' (2011)
- ''Give My Love to London'' (2014)
- ''Negative Capability'' (2018)
- ''She Walks in Beauty'' (2021)[64]
- 아즈 티어스 고 바이 (1964년)
- "Blowin' In The Wind" (1964년)
- "Come and Stay With Me" (1965년)
- "This Little Bird" (1965년)
- 사랑의 하룻밤 (1965년)
- 예스터데이 (1965년)
- 혼자가 되고 싶어 (1965년)
- 내일을 위해 (1966년)
- "Counting" (1966년)
- 사랑의 수단 (1967년)
- 희망의 종 (1967년)
- "Something Better" (1969년)
- "Dreamin' My Dreams" (1975년)
- "All I Wanna Do In Life" (1976년)
- "The Way You Want Me To Be" (1978년)
- "The Ballad Of Lucy Jordan" (1979년)
- "Broken English" (1980년)
- "Intrigue" (1981년)
- 너에게만 (1981년)
- 스위트하트 (1982년)
- "Sister Morphine" (1982년)
- "Running For Our Lives" (1983년)
- "Hang It On Your Heart" (1997년)
- "Vagabond Ways" (1999년)
- "Sex With Strangers" (2002년)
- "Easy Come, Easy Go" (2008년)
- "Why Did We Have To Part?" (2011년)
- "Sparrows Will Sing" (2014년)
- "The Gypsy Faerie Queen" (2018년)
8. 출연 영화
– "The Last Shout: Part 2" (1996)
– "Donkey"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