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로쿠 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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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로쿠 잡지는 1874년 메이지 유신 시기 일본의 지식인 단체인 메이로쿠샤 회원들에 의해 창간된 잡지이다.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목표로 서구 문물을 소개하고 일본의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제도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았다. 후쿠자와 유키치, 모리 아리노리 등 당대 지식인들이 기고했으며, 국어 국자, 처첩론, 민선 의원 등 다양한 사회적 논쟁을 촉발했다. 1875년 정부의 언론 통제로 인해 폐간되었지만, 자유민권운동 등 사회 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새로운 어휘(번역어)를 만들어내는 등 그 유산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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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로쿠 잡지 - [회사]에 관한 문서 | |
---|---|
메이로쿠 잡지 | |
출판사 | 호치샤 컴퍼니 |
언어 | 일본어 |
국가 | 일본 |
소재지 | 도쿄 |
창간일 | 1874년 4월 2일 |
폐간일 | 1875년 11월 14일 |
최종호 | 43호 |
2. 메이로쿠샤(明六社)
메이로쿠샤(명육사)는 메이지 유신 초기, 미국에서 돌아온 모리 아리노리가 니시무라 시게키와 상의하여 설립한 단체이다. 1873년(메이지 6년)에 결성되었기 때문에 메이로쿠샤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들은 서구처럼 지식인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학식을 쌓는 동시에 민중을 계몽하고자 했다.
메이로쿠샤는 부국강병을 통해 서구 열강과 대등한 국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단순한 제도 도입뿐만 아니라, '민심 일신'을 통해 국민을 '문명국' 수준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계몽사상을 추구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정례 연설회와 메이로쿠 잡지 발행이 있었다.
메이로쿠샤의 핵심 구성원들은 모리 아리노리, 니시무라 시게키를 비롯하여 쓰다 마미치,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가토 히로유키, 미쓰쿠리 슈헤이, 후쿠자와 유키치, 스기 코지, 미쓰쿠리 린쇼 등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하급 무사나 서민 출신으로, 양학을 공부하고 서양 유학 경험이 있었으며, 유신 후 관료로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가졌다.
2. 1. 설립 배경
森有礼|모리 아리노리일본어가 주도하여 서구식 지식인 결사를 목표로 설립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가장 큰 목표는 부국강병을 통해 서구 열강과 대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서구의 기술, 인재,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겨 '민심 일신'을 통해 국민을 '문명국' 수준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계몽사상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문명국"이라는 "세계 표준"을 따라잡기 위해 민중을 "문명국"적인 "국민"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진 계몽가들이 모여 메이로쿠샤를 결성했다.메이로쿠샤는 1873년(메이지 6년)에 미국에서 귀국한 모리 아리노리가 니시무라 시게키와 상의하여 설립한 결사이다. '메이지 6년'에 결성되었기 때문에 메이로쿠샤라는 이름이 붙었다. 설립 목적은 서구처럼 지식인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학식을 쌓는 동시에 민중을 계몽하는 것이었다.
모리 아리노리, 니시무라 시게키의 권유로 쓰다 마미치,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가토 히로유키, 미쓰쿠리 슈헤이, 후쿠자와 유키치, 스기 코지, 미쓰쿠리 린쇼 등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메이로쿠샤에 참여했다. 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니시무라 시게키를 제외하고는 모두 하급 무사나 서민 출신이었다.[6] 또한, 메이지 시대 이전부터 양학자로 두각을 나타내 막부의 개성소 등에 등용되었으며, 막말 메이지 시대에 서양 유학 경험이 있고, 존왕양이 사상에 물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를 제외하면, 메이지 유신 이후 관료로서 태정관에서 일했다는 점도 특징이다.[7]
이들은 정례 연설회와 잡지 발행을 통해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정례 연설회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이를 바탕으로 『메이로쿠 잡지』에 글을 게재했다. "연설"이라는 단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스피치(speech)를 번역한 것이다.[8]
2. 2. 주요 인물
모리 아리노리, 西村茂樹|니시무라 시게키일본어, 津田真道|쓰다 마미치일본어, 西周|니시 아마네일본어, 中村正直|나카무라 마사나오일본어, 加藤弘之|가토 히로유키일본어, 箕作秋坪|미쓰쿠리 슈헤이일본어, 福沢諭吉|후쿠자와 유키치일본어 등은 메이로쿠샤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하급 무사 또는 서민 출신 양학자로서, 막부 말기 서양 유학 경험이 있었고, 유신 후 관료로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6]2. 3. 활동 방식
메이로쿠샤는 계몽을 위한 수단으로 정례 연설회와 잡지 발행을 활용했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였는데, 정례 연설회에서 여러 주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이를 바탕으로 작성된 글이 『메이로쿠 잡지』에 게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지식 정보 전달 방식은 『메이로쿠 잡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연설"이라는 단어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영어 단어 '스피치(speech)'를 번역한 것이다.[7] 연설회는 쓰키지 세이요켄에서 개최되었다.[8]3. 『메이로쿠 잡지(明六雑誌)』
메이로쿠샤 결성 몇 달 후인 1874년에 『메이로쿠 잡지』가 창간되었다.[1] 첫 호는 1874년 4월 2일에 발행되었다.[2] 후쿠자와 유키치를 비롯한 메이로쿠샤 회원들이 창립자였다.[3]
『메이로쿠 잡지』는 서양 문화에 대한 글을 다룬 일본의 초기 간행물 중 하나로,[3] 메이지 시대의 간행물이었기에 가족 및 국가의 도덕과 관련된 교육 관련 주제를 자주 논의했다.[4] 1884년에는 약 3,000부가 판매되었다.[5]
잡지는 계몽을 목표로 했지만, 엄밀한 편집 방침은 없었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도 없고, 개별 호마다 필자들의 태도가 달라 통일된 느낌을 주지 않았다. 특정 의견을 주장하기보다는 여러 문제를 드러내고 지식을 소개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다. 또한, 연설회와 잡지라는 새로운 정보 전달 수단 자체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논의를 공개하고 의견 통일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양한 관점이 확산되도록 하는 것도 잡지의 성격 중 하나였다.
『메이로쿠 잡지』는 1875년 11월 14일에 43호가 발행된 후 폐간되었다.[2][5]
3. 1. 간행 정보
- 제호: 메이로쿠 잡지(明六雑誌)
- 발행처: 보치사(報知社)
- 간행 형태: 월 2~3회 간행. 예약 구독 및 서점 판매 병행.
- 크기: 17cm × 12cm (B6판에 가까움) 혹은 21cm × 14.5cm (A5판에 가까움)
- 면수: 12~24면, 평균 20면
- 종이 재질: 일본지(간피지)
- 활자 크기: 5호 활자로 면당 30자 × 13행
- 발행 부수: 2800~3200권
- 정가: 3~5전 (면수에 따라)
- 비고: 몇 종류의 이본(異本)이 존재한다.
메이로쿠샤 결성 후 몇 개월 뒤에 메이로쿠 잡지가 출간되었다. 인쇄된 날짜와 실제 발간일이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이는 발행 과정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월 2회 발행을 지향했지만, 처음에는 4호까지 한 번에 출간했고 월 1회만 나온 때도 있었다. 게재된 논설 개수도 2~6개로 차이가 있으며 여러 이본이 있다. 제목도 '메이로쿠 잡지' 혹은 '메이로쿠샤 잡지' 등으로 다른 표기가 있다. 크기도 B6에 준하는 것과 A5에 준하는 것 등 두 가지가 있었다.
종합 학술지를 지향했기 때문에 학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다루는 범위는 요괴의 종류까지 상당히 폭넓었으며, 특이하게도 문학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게재된 논설은 총 156개이다.[21] 주요 필진과 논설 수는 다음과 같다.
필자 | 논설 수 |
---|---|
쓰다 마미치 | 29개 |
니시 아마네 | 25개 |
사카타니 로로 | 20개[22] |
스기 코지 | 13개 |
모리 아리노리, 니시무라 시게키, 나카무라 마사나오 | 11개 |
가토 히로유키 | 10개 |
간다 다카히라 | 9개 |
미쓰쿠리 린쇼 | 5개 |
가시와바라 다카아키 | 4개 |
후쿠자와 유키치 | 3개 |
시미즈 우사부로 | 2개[23] |
미쓰쿠리 슈헤이, 쓰다 센, 시바타 마사키치 | 각 1개[24] |
- -
발간사 (여기에서는 '메이로쿠 동사 식'으로 되어 있음) - -
'품백'(대가 설명)
3. 2. 특징
메이로쿠 잡지의 논설들은 다양한 분야를 다루지만,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보인다. 우선, 서구의 제도와 사상을 소개하고 이를 문명국의 표준으로 삼아, 일본의 낡은 사고방식과 제도를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츠다 마미치의 「고문론」에서는 메이지 시대에도 용의자 심문에 고문이 허용되었지만, 이는 문명국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악습이며 사법에 대한 불신과 억울한 누명을 야기한다고 주장한다.[21]
제도 개혁뿐 아니라 국민의 정신을 개혁해야 한다는 입장도 뚜렷하다. 니시 아마네는 「국민기풍론」에서 일본인들이 전제정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으며, 막부 말기까지도 이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쇄국을 지향하지 않는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게 이러한 태도는 무기력함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필자들은 '국민'과 '개인'의 정의를 내려야 했다. 서구의 'individual' / 'individuality'라는 개념은 당시 일본어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주독립이라는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관은 일본어에 없었다.[25] 니시 아마네는 'individuality'를 '사람들', '개개의 사람들'로, 니시무라는 '각 개인', '사람 각 개인'으로 번역하며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려 노력했다.
이는 일본인에게 보이는 노예근성이 'individuality'에 비추어 볼 때 더욱 심각한 문제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서구와 일본의 차이를 인식하는 태도에는 국민 개개인이 지식을 쌓고 문화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선형적 발전사관이 깔려 있었다.
에도 시대의 주류 학문이었던 주자학은 인간의 욕망과 이익 추구를 억제하는 것을 중시했다.[26] 반면, 메이로쿠 잡지의 계몽주의는 미신과 인습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합리적인 정신을 추구하며, 욕망과 이익 추구를 긍정하는 공리주의적 인간관을 제시한다. 츠다 마미치는 「정욕론」에서 정욕을 '천성의 자연'이라 긍정했고, 니시 아마네는 「인세삼보론」에서 건강, 지식과 함께 '부유함'을 중요한 가치로 언급했다.
메이로쿠샤가 어떤 사상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잡지에 실린 번역 논설을 통해 알 수 있다. 총 156편의 논설 중 16편이 번역이었으며, 프랜시스 베이컨, 토머스 홉스, 허버트 스펜서, 블룬칠리(Johann Kaspar Bluntschli), 헨리 버클(Henry Thomas Buckle) 등의 글이 번역되었다.
3. 3. 주요 논쟁
메이로쿠 잡지는 토론 자체를 지면에 담아 세상의 의견을 더 불러일으키는 것을 지향한 새로운 미디어였으며, 이 논의들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메이로쿠 잡지에서 촉발된 내용을 담은 다양한 투고가 여러 신문사로 날아들어 논의가 확산되었다. 지면에서 벌어진 주요 논쟁들은 다음과 같다.; 학자 직분 논쟁
이 논쟁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메이로쿠 잡지 외부에서 자신의 책 학문의 권장 4편을 통해 제기한 것이다. 후쿠자와는 학자가 관직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실전에서 뛰어야 하며, 계몽의 목적 중 하나는 권력에 짓눌린 민중이 무기력함과 비굴함을 극복하게 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계몽은 관이 주도하는 것보다 민의 힘으로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관직에 있는 학자를 기생에 비유하며 강력하게 비판했다.[27]
이에 대해 가토 히로유키, 모리 아리노리, 니시 아마네 등 관직에 있던 인물들이 반론했다. 이들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관민협조론의 입장에 서있으면서 민에 과도한 비중을 둔 주장을 폈다고 반박했다. 재야를 지향한 후쿠자와는 메이로쿠샤에서 독특한 존재였고 다른 동인들에게 비판적이었다. 그는 끝까지 메이로쿠샤에 속했으면서도 메이로쿠 잡지엔 세 개의 논설만을 실었다.[27]
; 민선의원 논쟁
메이로쿠 잡지의 발행시기는 자유민권운동의 초기와 겹친다. 1874년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민선의원설립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했고 이를 둘러싼 논쟁이 메이로쿠샤 내에도 있었다. 논의의 중심에는 가토 히로유키의 시기상조론「민선 의원 불가립의 논」이 있다. 가토는 의회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아직 국민 수준이 의회를 감당할 정도가 아니니 선계몽 후도입의 점진론을 주장했다. 모리 아리노리, 니시 아마네, 나카무라 마사나오, 사카타니 로로, 간다 다카히라 등도 동조하였다. 반면 니시무라 시게키는 국민이 반개화 상태라 시기상조라는 말은 이유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의회 설립으로 민중을 문명으로 이끌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쓰다 마미치와 후쿠자와 유키치가 여기에 동조했다.
메이로쿠 잡지의 논쟁은 잡지를 넘어선 반향이 있었다. 시기상조론에 대해 오이 겐타로가 도쿄니치니치 신문에 반론을 게재했다. 그는 삼권분립을 먼저 설명한 뒤 조슈 번의 파벌 정치를 깨기 위해서라도 의회가 필요하다 주장했다. 가토는 반개화상태에서의 의회설립은 오히려 관료독재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이 논쟁은 당시에 한정된 주제여서 더 깊은 논의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의회설치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자유민권운동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 처첩론 논쟁
모리 아리노리의 처첩론으로 인해 시작된 논쟁이다. 모리는 서구문명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일부일처제 형태가 자연스럽고 일본의 축첩제, 처첩동거라는 환경은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부는 반드시 평등해야 하며, 가부장제 내에서 여자는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이 있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역할론에 기반한 평등을 설파했다. 그의 의견은 부부동등론이라 부를만한 것으로 부부동권론까지 이어지진 못했으나 이후 자유민권운동이 벌어지면서 여권신장론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인정된다.[28]
가토 히로유키와 쓰다 마미치는 여기에 대립했다. 가토는 부부동권은 레이디 퍼스트를 과하게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으며 여권신장에 냉담했다. 가토는 여성 참정권과 미성년자, 범죄자, 극빈자, 여성에게 선거권을 주어선 안된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처첩론 논쟁은 부부간 사적 공간에서의 남녀평등을 적극적으로 문제제기했고, 공적 공간에서의 정치, 사회적 여권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논쟁은 가족제도에 비판적인 시선을 던졌으며 이후 일본사회에는 점차 서구적 결혼관이 퍼져나갔고 1882년에는 법적으로 축첩제가 폐지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 국어 국자 논쟁
이 논쟁은 창간호에 게재되었다. 자국어를 어떻게 표기할 것인가의 문제는 동양의 뒤떨어진 문명에서 어떻게 이탈하여 서구 문명으로 뛰어들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했다. 중국 문명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 문맹자를 줄여나가는 것이 필요했다.
메이로쿠샤 이전에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내놓은 마에지마 히로카(前島密)는 한자를 폐지하고 히라가나의 띄어쓰기를 하자고 주장했다. 니시 아마네는 창간호에서 더 과감한 주장을 펼쳤는데 아예 가나를 버리고 알파벳을 이용해 로마자로 일본어를 표기하자 주장했다. 서구 언어 습득도 쉬워질 뿐 아니라 서구 용어도 굳이 번역하지 않고 바로 쓰면 된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니시무라 시게키는 같은 호에 표기문제는 차차 고민하고 지금은 교육을 통한 개화가 우선이라는 주장을 했다. 시미즈 우사부로(清水卯三郎)는 아예 히라가나를 쓰자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일반민중에게 쉽다는 것이었다.
지상 논쟁은 이정도 선에서 멈추었으나 이후 가나문자표기론은 1883년 가나회「가나의 모임」 설립으로, 로마자표기론은 1884년 로마자회「로마자회」설립으로 이어졌다.[29]
3. 4. 영향력
메이로쿠 잡지는 광범위한 독자층을 확보하고 지방 신문에 논설이 전재되는 등 여론 형성에 기여했다.[30] 당시 관리, 학생, 구 사족, 부농, 거상 등 다양한 지식인층이 메이로쿠 잡지를 읽었으며, 도쿄뿐만 아니라 오사카, 히로시마, 아오모리 등 전국 각지에서 널리 읽혔다.[31]특히 우에키 에모리는 16세에 메이로쿠 잡지를 읽고 감동하여 상경해 정기 연설회에 참여하는 등, 자유민권운동과 같은 사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31] 메이로쿠 잡지는 다양한 문제와 관심을 공유하는 공론장을 형성하여 각지의 지식인층이 자유민권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게 하였다.
또한, 메이로쿠 잡지는 과학, 사회, 철학 등 현대까지 사용되는 다양한 용어(번역어)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32]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조선 등 주변국에도 영향을 미쳤다.[32]
메이로쿠 잡지에서 기원했거나, 이 잡지를 통해 널리 사용된 대표적인 용어들은 다음과 같다.
용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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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농학, 서양학, 서양풍, 규소, 비소, 전자기, 면죄, 검사, 의회, 영사, 영사관, 압정, 학제, 원가, 자금, 외채, 사교, 사요, 관권, 광고, 안식, 치매, 열심, 보건, 확보, 확립, 과식, 완구, 현상, 공장, 신고 |
이 외에도 국채, 철학, 사회 등 기존에 있던 단어나 중국에서 유래한 단어를 차용하여 의미를 전용한 것도 있다.
3. 5. 정간(停刊)
참방률과 신문지 조례가 공포되면서 언론 통제가 강화되었다. 번벌 정부는 신문이나 잡지 발행 시 내무성에 신고하고 허가를 받도록 했으며, 기사에 필자의 서명을 의무화했다. 태정관은 관료들에게 관보 공고 외에 정치 관련 언급을 금지시켰다.[33]메이로쿠샤의 발기인 모리 아리노리는 순수 학술지를 지향했지만, 자유민권운동 관련 논설이 종종 게재되면서 잡지의 입장이 모호해졌다. 그는 30호에서 "당시의 정사에 관여하여 논하는 것과 같은 행위는 본래 우리 회 개회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하며 비정치적 노선을 강조했지만, 관료로서 비정치적 잡지를 내려는 그의 자세는 한계에 부딪혔다.[33]
후쿠자와 유키치는 '학자 직분론' 이후 관료와 계몽가의 입장 차이를 인식하고 정부 규제 속에서 활동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가졌다. 1875년 9월, 후쿠자와 유키치와 미쓰쿠리 슈헤이는 정간을 제안했고, 니시 아마네, 모리 아리노리, 쓰다 마미치 등은 간행 유지를 원했지만, 메이로쿠샤 내 다수 의견은 정간으로 기울었다. 결국, 메이로쿠샤는 정간을 결정하고 모임 이름을 메이로쿠회로 바꾸어 친목 위주로 운영하게 되었다.
4. 『메이로쿠 잡지』 게재 논설 목록
연도 | 호 | 발행일 | 필자 | 논설 제목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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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 제1호 | 메이지 7년 3월 (4월 3일) | 니시 아마네 | 양자를 써서 국어를 쓰는 논 | |
제1호 | 메이지 7년 3월 (4월 3일) | 니시무라 시게키 | 개화의 정도에 따라 문자를 고쳐야 한다는 논 | ||
제2호 | 메이지 7년?월 (4월 8일) | 가토 히로유키 | 후쿠자와 선생의 논에 답하다 | ||
모리 아리노리 | 학자직분론의 평 | ||||
츠다 마미치 | 학자직분론의 평 | ||||
니시 아마네 | 비학자 직분론 | ||||
제3호 | 메이지 7년?월 (?) | 모리 아리노리 | 개화 제1화 | ||
니시무라 시게키 | 진언 일칙 | ||||
모리 아리노리 | 민선 의원 설립 건언서의 평 | ||||
스기 쿄지 | 아국(俄國) 표트르 대제의 유훈 | ||||
츠다 마미치 | 개화를 진행하는 방법을 논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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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호 | 메이지 7년?월 (4월 2일) | 미츠쿠리 린쇼 | 인민의 자유와 토지의 기후와 서로 상관하는 논 일 | ||
가토 히로유키 | 블룬칠리 씨의 국법 범론 발췌민선 의원 불가립의 논 | ||||
스기 쿄지 | 불인(佛人) 슐리 씨 국가의 쇠퇴에 이르는 징후를 열거하는 조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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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츠쿠리 린쇼 | 버클 씨의 영국 문명사에서 초록 | ||||
스기 쿄지 | 남북 아메리카 연방론 | ||||
츠다 마미치 | 고문론 일 | ||||
시미즈 우사부로 | 히라가나설 | ||||
제8호 | 메이지 7년 5월 (5월 31일) | 츠다 마미치 | 복장론 |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일 | ||||
미츠쿠리 슈헤이 | 교육담 | ||||
스기 쿄지 | 공상(空商)의 일을 기록하다 | ||||
니시 아마네 | 교문론 사 | ||||
츠다 마미치 | 책은 하나가 아님을 논함 | ||||
제9호 | 메이지 7년 6월 (6월 12일) | 츠다 마미치 | 운송론 | ||
미츠쿠리 린쇼 | 리볼치의 설 | ||||
니시 아마네 | 교문론 오 | ||||
츠다 마미치 | 정론 일 | ||||
제10호 | 메이지 7년 6월 (6월 28일) | 츠다 마미치 | 고문론 이 | ||
스기 쿄지 | 진위정자(真偽政者)의 설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바탕으로 한 서학 일반 | ||||
사카타니 소로 | 질의 일칙 | ||||
제11호 | 메이지 7년 6월 (7월 4일) | 츠다 마미치 | 정론 이 |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이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이 | ||||
사카타니 소로 | 국어 국자 문제에 대한 질의 일칙 | ||||
제12호 | 메이지 7년 6월 (7월 17일) | 니시 아마네 | 교문론 육 | ||
츠다 마미치 | 정론 삼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삼 | ||||
제13호 | 메이지 7년 6월 (?) | 가토 히로유키 | 미국 정교 삼 | ||
츠다 마미치 | 상상론 | ||||
사카타니 소로 | 민선 의원을 세우려면 먼저 정체를 정해야 한다는 의문 | ||||
제14호 | 메이지 7년 7월 (8월 7일) | 니시 아마네 | 지설 일 | ||
미츠쿠리 린쇼 | 리볼치의 설 이 | ||||
스기 쿄지 | 화폐의 효능 | ||||
츠다 마미치 | 텐구설 | ||||
제15호 | 메이지 7년 8월 (9월 7일)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삼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사 | ||||
사카타니 소로 | 조세의 권리는 상하 공공해야 한다는 설 | ||||
츠다 마미치 | 정론 사 | ||||
제16호 | 메이지 7년?월 (9월 22일) | 츠다 마미치 | 정론 오 | ||
스기 쿄지 | 인간 공공의 설 일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오 | ||||
니시 아마네 | 애적론 | ||||
제17호 | 메이지 7년 9월 (9월 30일) | 칸다 고헤이 | 재정 변혁의 설 | ||
츠다 마미치 | 지진의 설 | ||||
니시 아마네 | 지설 이 | ||||
제18호 | 메이지 7년 10월 (10월 25일) | 츠다 마미치 | 서양의 개화 서행하는 설 | ||
가토 히로유키 | 경국(輕國) 정부 | ||||
스기 쿄지 | 인간 공공의 설 이 | ||||
사카타니 소로 | 화장의 의문 | ||||
니시 아마네 | 정실설 | ||||
칸다 고헤이 | 국악을 진흥해야 한다는 설 | ||||
제19호 | 메이지 7년 10월 (11월 4일) | 니시 아마네 | 비밀설 | ||
칸다 고헤이 | 민선 의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논 | ||||
사카타니 소로 | 존이설 | ||||
스기 쿄지 | 인간 공공의 설 삼 | ||||
제20호 | 메이지 7년 11월 (11월 29일) | 츠다 마미치 | 신문지론 |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사 | ||||
사카타니 소로 | 여우설의 의문 | ||||
사카타니 소로 | 여우설의 광의 | ||||
니시 아마네 | 지설 삼 | ||||
제21호 | 메이지 7년 11월 (12월 14일) | 후쿠자와 유키치 | 대만 출병에 대한 정대(征臺) 화의(和議)의 연설 | ||
츠다 마미치 | 석가, 예수, 공자를 가리키는 삼성론 | ||||
스기 쿄지 | 인간 공공의 설 사 | ||||
사카타니 소로 | 여장(女裝) 의문 | ||||
제22호 | 메이지 7년 12월 (12월 19일) | 니시 아마네 | 지설 사 | ||
츠다 마미치 | 모리 "처첩론"에 대한 반론인 부부 유별론 | ||||
사카타니 소로 | 정교의 의문 일 | ||||
시미즈 우사부로 | 화학 개혁의 개요 | ||||
칸다 고헤이 | 지폐 환전 간청록화폐 사록 일 | ||||
제23호 | 메이지 7년 12월 (?) | 니시 아마네 | 내지 여행 | ||
칸다 고헤이 | 정금 외출 탄식록화폐 사록 이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육 | ||||
제24호 | 메이지 7년 12월 (?) | 츠다 마미치 | 내지 여행론 | ||
스기 쿄지 | 무역 개정론 | ||||
제25호 | 메이지 7년 12월 (?) | 니시 아마네 | 지설 오 | ||
사카타니 소로 | 정교의 의문 이 | ||||
츠다 마미치 | 괴상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호소하는 괴설 | ||||
1875년 | 제26호 | 메이지 8년 1월 ( ? ) | 후쿠자와 유키치 | 내지 여행 서생의 설을 반박함 | |
제26호 | 메이지 8년 1월 ( ? ) | 츠다 마미치 | 무역 권형론 | ||
제26호 | 메이지 8년 1월 ( ? ) | 칸다 고헤이 | 지폐 성행 망상록 | ||
제27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3일)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5 | ||
제27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3일) | 사카타니 소로 | 민선 의원 변칙론 1 | ||
제28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9일) | 사카타니 소로 | 민선 의원 변칙론 2 | ||
제28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9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정체 3종 설 1 | ||
제28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9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정체 3종 설 2 | ||
제29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26일) | 니시 아마네 | 망라 의원의 설 | ||
제29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26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자유 거래론 | ||
제29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26일) | 카시와바라 타카오키 | 교문론 의문 1 | ||
제30호 | 메이지 8년 2월 (3월 8일) | 모리 아리노리 | 메이로쿠사 제1년 회역원 개선에 부쳐 연설 | ||
제30호 | 메이지 8년 2월 (3월 8일) | 츠다 마미치 | 인재론 | ||
제30호 | 메이지 8년 2월 (3월 8일) | 카시와바라 타카오키 | 교문론 의문 2 | ||
제30호 | 메이지 8년 2월 (3월 8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인민의 성질을 개조하는 설 |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가토 히로유키 | 부부 동권의 유폐론 1 |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가토 히로유키 | 부부 동권의 유폐론 2 |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수신 치국 비이도론 |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카시와바라 타카오키 | 교문론 의문 3 |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후쿠자와 유키치 | 남녀 동수론 | ||
제32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25일) | 니시 아마네 | 국민 기풍론 | ||
제32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25일) | 사카타니 소로 | 첩설의 의 | ||
제33호 | 메이지 8년 3월 (4월 6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선량한 어머니를 만드는 설 | ||
제33호 | 메이지 8년 3월 (4월 6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적설 | ||
제33호 | 메이지 8년 3월 (4월 6일) | 카시와바라 타카오키 | 일요일의 설 | ||
제33호 | 메이지 8년 3월 (4월 6일) | 칸다 고헤이 | 화폐 병근 요치록 | ||
제34호 | 메이지 8년 4월 (4월 25일?) | 스기 쿄지 | 상상 쇄국설 | ||
제34호 | 메이지 8년 4월 (4월 25일?) | 칸다 고헤이 | 화폐 사록 부언 | ||
제34호 | 메이지 8년 4월 (4월 25일?) | 츠다 마미치 | 정욕론 | ||
제35호 | 메이지 8년 4월 (5월 14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지나 불가모론 | ||
제35호 | 메이지 8년 4월 (5월 14일) | 사카타니 소로 | 천강설 1 | ||
제35호 | 메이지 8년 4월 (5월 14일) | 츠다 마미치 | 부부 동권 변 | ||
제36호 | 메이지 8년 5월 (5월 20일) | 사카타니 소로 | 천강설의 계속 | ||
제36호 | 메이지 8년 5월 (5월 20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서어 12해 1 | ||
제37호 | 메이지 8년 5월 (6월 7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자주 자유 해 | ||
제37호 | 메이지 8년 5월 (6월 7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상벌 훼예론 | ||
제37호 | 메이지 8년 5월 (6월 7일) | 칸다 고헤이 | 철산을 열어야 한다는 의론 | ||
제38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14일) | 니시 아마네 | 인생 삼보 설 1 | ||
제38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14일) | 사카타니 소로 | 전환 접교설 | ||
제39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25일) | 니시 아마네 | 인생 삼보 설 2 | ||
제39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25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정부와 인민 이리해론 | ||
제39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25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칠 | ||
제40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니시 아마네 | 인생 삼보 설 3 | ||
제40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사카타니 소로 | 양정신 1설 | ||
제41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츠다 마미치 | 사형론 | ||
제41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츠다 센 | 화화 매조법지설 | ||
제41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사카타니 소로 | 양정신 1설 2 | ||
제42호 | 메이지 8년 10월 (10월 10일, 16일) | 니시무라 시게키 | 권리해 | ||
제42호 | 메이지 8년 10월 (10월 10일, 16일) | 니시 아마네 | 인생 삼보 설 4 | ||
제42호 | 메이지 8년 10월 (10월 10일, 16일) | 츠다 마미치 | 폐창론 | ||
제43호 | 메이지 8년 11월 (11월 14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전환설 | ||
제43호 | 메이지 8년 11월 (11월 14일) | 사카타니 소로 | 존왕양이설 |
4. 1. 1874년
호 | 발행일 | 필자 | 논설 제목 | 비고 |
---|---|---|---|---|
제1호 | 메이지 7년 3월 (4월 3일) | 니시 아마네 | 양자를 써서 국어를 쓰는 논 | |
제1호 | 메이지 7년 3월 (4월 3일) | 니시무라 시게키 | 개화의 정도에 따라 문자를 고쳐야 한다는 논 | |
제2호 | 메이지 7년?월 (4월 8일) | 가토 히로유키 | 후쿠자와 선생의 논에 답하다 | |
모리 아리노리 | 학자직분론의 평 | |||
츠다 마미치 | 학자직분론의 평 | |||
니시 아마네 | 비학자 직분론 | |||
제3호 | 메이지 7년?월 (?) | 모리 아리노리 | 개화 제1화 | |
니시무라 시게키 | 진언 일칙 | |||
모리 아리노리 | 민선 의원 설립 건언서의 평 | |||
스기 쿄지 | 아국(俄國) 표트르 대제의 유훈 | |||
츠다 마미치 | 개화를 진행하는 방법을 논하다 | |||
니시 아마네 | 구상공(舊相公)을 반박하는 의론(駁舊相公議) 일제(一題) | |||
제4호 | 메이지 7년?월 (4월 2일) | 미츠쿠리 린쇼 | 인민의 자유와 토지의 기후와 서로 상관하는 논 일 | |
가토 히로유키 | 블룬칠리 씨의 국법 범론 발췌민선 의원 불가립의 논 | |||
스기 쿄지 | 불인(佛人) 슐리 씨 국가의 쇠퇴에 이르는 징후를 열거하는 조목 | |||
니시 아마네 | 교문론 일 | |||
니시 아마네 | 연화석조(煉火石造)의 설 | |||
제5호 | 메이지 7년?월 (4월 15일) | 츠다 마미치 | 보호세를 비난하는 설 | |
니시 아마네 | 교문론 이 | |||
스기 쿄지 | 북아메리카 합중국의 자립 | |||
미츠쿠리 린쇼 | 인민의 자유와 토지의 계절과 서로 상관하는 논 이 | |||
가토 히로유키 | 미국 정교 일 | |||
제6호 | 메이지 7년?월 (4월 28일) | 츠다 마미치 | 출판 조례에 대한 반론 | |
니시 아마네 | 교문론 삼 | |||
가토 히로유키 | 미국 정교 이 | |||
모리 아리노리 | 바텔의 종교 | |||
시바타 쇼키치 | 만국공법 중 종교를 논하는 장 | |||
제7호 | 메이지 7년 5월 (5월 17일) | 모리 아리노리 | 독립 국권 의 | |
가토 히로유키 | 무관의 공순 | |||
미츠쿠리 린쇼 | 버클 씨의 영국 문명사에서 초록 | |||
스기 쿄지 | 남북 아메리카 연방론 | |||
츠다 마미치 | 고문론 일 | |||
시미즈 우사부로 | 히라가나설 | |||
제8호 | 메이지 7년 5월 (5월 31일) | 츠다 마미치 | 복장론 |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일 | |||
미츠쿠리 슈헤이 | 교육담 | |||
스기 쿄지 | 공상(空商)의 일을 기록하다 | |||
니시 아마네 | 교문론 사 | |||
츠다 마미치 | 책은 하나가 아님을 논함 | |||
제9호 | 메이지 7년 6월 (6월 12일) | 츠다 마미치 | 운송론 | |
미츠쿠리 린쇼 | 리볼치의 설 | |||
니시 아마네 | 교문론 오 | |||
츠다 마미치 | 정론 일 | |||
제10호 | 메이지 7년 6월 (6월 28일) | 츠다 마미치 | 고문론 이 | |
스기 쿄지 | 진위정자(真偽政者)의 설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바탕으로 한 서학 일반 | |||
사카타니 소 | 질의 일칙 | |||
제11호 | 메이지 7년 6월 (7월 4일) | 츠다 마미치 | 정론 이 |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이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이 | |||
사카타니 소 | 국어 국자 문제에 대한 질의 일칙 | |||
제12호 | 메이지 7년 6월 (7월 17일) | 니시 아마네 | 교문론 육 | |
츠다 마미치 | 정론 삼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삼 | |||
제13호 | 메이지 7년 6월 (?) | 가토 히로유키 | 미국 정교 삼 | |
츠다 마미치 | 상상론 | |||
사카타니 소 | 민선 의원을 세우려면 먼저 정체를 정해야 한다는 의문 | |||
제14호 | 메이지 7년 7월 (8월 7일) | 니시 아마네 | 지설 일 | |
미츠쿠리 린쇼 | 리볼치의 설 이 | |||
스기 쿄지 | 화폐의 효능 | |||
츠다 마미치 | 텐구설 | |||
제15호 | 메이지 7년 8월 (9월 7일)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삼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사 | |||
사카타니 소 | 조세의 권리는 상하 공공해야 한다는 설 | |||
츠다 마미치 | 정론 사 | |||
제16호 | 메이지 7년?월 (9월 22일) | 츠다 마미치 | 정론 오 | |
스기 쿄지 | 인간 공공의 설 일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오 | |||
니시 아마네 | 애적론 | |||
제17호 | 메이지 7년 9월 (9월 30일) | 칸다 고헤이 | 재정 변혁의 설 | |
츠다 마미치 | 지진의 설 | |||
니시 아마네 | 지설 이 | |||
제18호 | 메이지 7년 10월 (10월 25일) | 츠다 마미치 | 서양의 개화 서행하는 설 | |
가토 히로유키 | 경국(輕國) 정부 | |||
스기 쿄지 | 인간 공공의 설 이 | |||
사카타니 소 | 화장의 의문 | |||
니시 아마네 | 정실설 | |||
칸다 고헤이 | 국악을 진흥해야 한다는 설 | |||
제19호 | 메이지 7년 10월 (11월 4일) | 니시 아마네 | 비밀설 | |
칸다 고헤이 | 민선 의원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논 | |||
사카타니 소 | 존이설 | |||
스기 쿄지 | 인간 공공의 설 삼 | |||
제20호 | 메이지 7년 11월 (11월 29일) | 츠다 마미치 | 신문지론 |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사 | |||
사카타니 소 | 여우설의 의문 | |||
사카타니 소 | 여우설의 광의 | |||
니시 아마네 | 지설 삼 | |||
제21호 | 메이지 7년 11월 (12월 14일) | 후쿠자와 유키치 | 대만 출병에 대한 정대(征臺) 화의(和議)의 연설 | |
츠다 마미치 | 석가, 예수, 공자를 가리키는 삼성론 | |||
스기 쿄지 | 인간 공공의 설 사 | |||
사카타니 소 | 여장(女裝) 의문 | |||
제22호 | 메이지 7년 12월 (12월 19일) | 니시 아마네 | 지설 사 | |
츠다 마미치 | 모리 "처첩론"에 대한 반론인 부부 유별론 | |||
사카타니 소 | 정교의 의문 일 | |||
시미즈 우사부로 | 화학 개혁의 개요 | |||
칸다 고헤이 | 지폐 환전 간청록화폐 사록 일 | |||
제23호 | 메이지 7년 12월 (?) | 니시 아마네 | 내지 여행 | |
칸다 고헤이 | 정금 외출 탄식록화폐 사록 이 |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육 | |||
제24호 | 메이지 7년 12월 (?) | 츠다 마미치 | 내지 여행론 | |
스기 쿄지 | 무역 개정론 | |||
제25호 | 메이지 7년 12월 (?) | 니시 아마네 | 지설 오 | |
사카타니 소 | 정교의 의문 이 | |||
츠다 마미치 | 괴상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호소하는 괴설 |
다양한 분야의 논설이 게재되었지만, 서구의 제도와 사상을 소개하고 문명국의 표준으로 삼는 한편, 기존 일본의 사고방식과 제도에 비판을 가하는 특징을 보인다. 예를 들어 츠다 마미치의 "고문론"에서는 메이지 시대에도 용의자 심문에 고문이 허용되었지만, 이는 문명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악습이며 사법 불신과 억울한 누명을 낳는다고 비판한다.[30]
4. 2. 1875년
메이지 8년(1875년)에 발행된 『메이로쿠 잡지』 제26호부터 제43호까지는 다양한 주제의 논설들이 게재되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니시 아마네를 비판하는 글을 썼고, 츠다 마미치는 무역, 칸다 고헤이는 화폐에 대한 글을 썼다.[30] 모리 아리노리는 처첩론을 이어갔고, 사카타니 소로는 민선의원에 대한 글을 썼다. 니시무라 시게키는 정치 체제에 대한 3가지 설과 자유 무역에 대한 글을 썼고, 니시 아마네는 의회에 대한 글을 썼다.[31]카시와바라 타카오키는 니시 아마네의 종교론에 대한 반론을 제시했다. 모리 아리노리는 메이로쿠샤 1주년 연설에서 잡지 판매 부수와 회관 건설 계획을 밝혔다. 츠다 마미치는 인재론에서 자유로운 기상을 강조했고,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인민의 질을 높이기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32]
가토 히로유키는 부부 동권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썼고, 니시무라 시게키는 수신과 정치의 관계를 설명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남녀 동수론으로 남녀 평등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니시 아마네는 국민 기풍론을 썼고, 사카타니 소로는 첩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현모양처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니시무라 시게키는 적대 세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했다. 칸다 고헤이는 화폐 문제에 대한 글을 썼다.[33]
스기 쿄지는 쇄국에 대한 상상적인 글을 썼고, 츠다 마미치는 정욕에 대한 글을 썼다.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중국을 경계해야 한다는 글을 썼고, 츠다 마미치는 부부 동권에 대한 반론을 제시했다. 니시무라 시게키는 서양 단어 12가지에 대한 해설을 시작했고, 나카무라 마사나오는 상벌에 대한 글을 썼다. 칸다 고헤이는 철산 개발에 대한 글을 썼다. 니시 아마네는 인생 삼보설을 이어갔고, 니시무라 시게키는 정부와 인민의 이해관계에 대한 글을 썼다. 츠다 마미치는 사형에 대한 글을 썼고, 츠다 센은 농업 기술에 대한 글을 썼다. 니시무라 시게키는 권리에 대한 글을 썼고, 츠다 마미치는 매춘 폐지에 대한 글을 썼다. 마지막으로 니시무라 시게키는 전환에 대한 글을, 사카타니 소로는 존왕양이에 대한 글을 썼다.
이러한 논설들은 서구의 제도와 사상을 소개하고, 문명국의 표준을 제시하며, 일본의 기존 사고방식과 제도를 비판하는 특징을 보였다. 예를 들어, 츠다 마미치의 "고문론"은 문명국에서는 고문이 허용되지 않으며, 사법 불신과 억울한 누명을 낳는 악습이라고 비판했다.
다음은 1875년에 발행된 메이로쿠 잡지(제26호 ~ 제43호)에 게재된 논설 목록이다.
호수 | 연월(발행일) | 저자명 | 논설명 |
---|---|---|---|
제26호 | 메이지 8년 1월 ( ? ) | 후쿠자와 유키치 | 내지 여행 서생의 설을 반박함 |
제26호 | 메이지 8년 1월 ( ? ) | 츠다 마미치 | 무역 권형론 |
제26호 | 메이지 8년 1월 ( ? ) | 칸다 고헤이 | 지폐 성행 망상록 |
제27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3일) | 모리 아리노리 | 처첩론 5 |
제27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3일) | 사카타니 소로 | 민선 의원 변칙론 1 |
제28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9일) | 사카타니 소로 | 민선 의원 변칙론 2 |
제28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9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정체 3종 설 1 |
제28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19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정체 3종 설 2 |
제29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26일) | 니시 아마네 | 망라 의원의 설 |
제29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26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자유 거래론 |
제29호 | 메이지 8년 2월 (2월 26일) | 카시와바라 타카오키 | 교문론 의문 1 |
제30호 | 메이지 8년 2월 (3월 8일) | 모리 아리노리 | 메이로쿠사 제1년 회역원 개선에 부쳐 연설 |
제30호 | 메이지 8년 2월 (3월 8일) | 츠다 마미치 | 인재론 |
제30호 | 메이지 8년 2월 (3월 8일) | 카시와바라 타카오키 | 교문론 의문 2 |
제30호 | 메이지 8년 2월 (3월 8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인민의 성질을 개조하는 설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가토 히로유키 | 부부 동권의 유폐론 1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가토 히로유키 | 부부 동권의 유폐론 2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수신 치국 비이도론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카시와바라 타카오키 | 교문론 의문 3 |
제31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15일) | 후쿠자와 유키치 | 남녀 동수론 |
제32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25일) | 니시 아마네 | 국민 기풍론 |
제32호 | 메이지 8년 3월 (3월 25일) | 사카타니 소로 | 첩설의 의 |
제33호 | 메이지 8년 3월 (4월 6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선량한 어머니를 만드는 설 |
제33호 | 메이지 8년 3월 (4월 6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적설 |
제33호 | 메이지 8년 3월 (4월 6일) | 카시와바라 타카오키 | 일요일의 설 |
제33호 | 메이지 8년 3월 (4월 6일) | 칸다 고헤이 | 화폐 병근 요치록 |
제34호 | 메이지 8년 4월 (4월 25일?) | 스기 쿄지 | 상상 쇄국설 |
제34호 | 메이지 8년 4월 (4월 25일?) | 칸다 고헤이 | 화폐 사록 부언 |
제34호 | 메이지 8년 4월 (4월 25일?) | 츠다 마미치 | 정욕론 |
제35호 | 메이지 8년 4월 (5월 14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지나 불가모론 |
제35호 | 메이지 8년 4월 (5월 14일) | 사카타니 소로 | 천강설 1 |
제35호 | 메이지 8년 4월 (5월 14일) | 츠다 마미치 | 부부 동권 변 |
제36호 | 메이지 8년 5월 (5월 20일) | 사카타니 소로 | 천강설의 계속 |
제36호 | 메이지 8년 5월 (5월 20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서어 12해 1 |
제37호 | 메이지 8년 5월 (6월 7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자주 자유 해 |
제37호 | 메이지 8년 5월 (6월 7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상벌 훼예론 |
제37호 | 메이지 8년 5월 (6월 7일) | 칸다 고헤이 | 철산을 열어야 한다는 의론 |
제38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14일) | 니시 아마네 | 인생 삼보 설 1 |
제38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14일) | 사카타니 소로 | 전환 접교설 |
제39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25일) | 니시 아마네 | 인생 삼보 설 2 |
제39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25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정부와 인민 이리해론 |
제39호 | 메이지 8년 6월 (6월 25일) | 나카무라 마사나오 | 서학 일반 칠 |
제40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니시 아마네 | 인생 삼보 설 3 |
제40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사카타니 소로 | 양정신 1설 |
제41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츠다 마미치 | 사형론 |
제41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츠다 센 | 화화 매조법지설 |
제41호 | 메이지 8년 8월 (9월 5일) | 사카타니 소로 | 양정신 1설 2 |
제42호 | 메이지 8년 10월 (10월 10일, 16일) | 니시무라 시게키 | 권리해 |
제42호 | 메이지 8년 10월 (10월 10일, 16일) | 니시 아마네 | 인생 삼보 설 4 |
제42호 | 메이지 8년 10월 (10월 10일, 16일) | 츠다 마미치 | 폐창론 |
제43호 | 메이지 8년 11월 (11월 14일) | 니시무라 시게키 | 전환설 |
제43호 | 메이지 8년 11월 (11월 14일) | 사카타니 소로 | 존왕양이설 |
참조
[1]
논문
Images of the Family in Meiji Periodicals: The Paradox Underlying the Emergence of the "Home"
[2]
웹사이트
Meiroku Zasshi (明六雑誌)
https://www.japanese[...]
Japanese Corpus
2021-09-27
[3]
논문
Intersections. Western Presence at Work in Japanese Literary Magazines
[4]
서적
Gendering Modern Japanese History
Harvard University Press
[5]
논문
William Braisted, Meiroku Zasshi: Journal of the Japanese Enlightenment (Book review)
https://www.proquest[...]
[6]
문서
加藤弘之の出身階層
[7]
문서
演説会
[8]
문서
築地精養軒
[9]
문서
論説総数の数え方
[10]
문서
阪谷素
[11]
문서
清水卯三郎
[12]
문서
柴田
[13]
문서
自由
[14]
문서
朱子学の役割
[15]
문서
森の弁明
[16]
문서
明治事物起源
[17]
문서
読書の変遷
[18]
문서
植木の東京での落ち着き先
[19]
문서
社会
[20]
문서
『明六雑誌』と『郵便報知新聞』
[21]
문서
論説総数の数え方
[22]
문서
사카타니 로로
[23]
문서
시미즈 우사부로
[24]
문서
柴田
[25]
문서
自由
[26]
문서
朱子学の役割
[27]
문서
당시 자신의 책 학문의 권유와 [[문명론의 개략]]을 쓰던 시기였긴 하지만 확실히 논설의 개수가 적다.
[28]
문서
森の弁明
[29]
문서
明治事物起源
[30]
문서
読書の変遷
[31]
문서
植木の東京での落ち着き先
[32]
문서
社会
[33]
문서
『明六雑誌』と『郵便報知新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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