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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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란사 사건은 1871년 류큐 어용 선박의 대만 표류와 원주민과의 충돌로 시작된 사건으로, 일본 메이지 정부가 대만을 출병하는 계기가 되었다. 류큐는 일본과 청나라의 양속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은 이 사건을 통해 류큐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일본은 청나라에 배상을 요구하고, 청나라가 이를 거부하자 대만 출병을 결정했다. 대만 출병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드러냈으며, 류큐의 일본 귀속, 미쓰비시 재벌의 성장, 군의 의료 체계의 문제점 등을 야기했다. 이 사건은 청일 양국 간의 외교적 갈등을 초래했으며, 류큐의 최종적인 일본 귀속은 청일 전쟁 이후에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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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사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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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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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 모란사 사건 |
시기 | 1874년 5월 6일 – 1874년 12월 3일 |
장소 | 청나라 푸젠성 타이완부 |
명분 | 보탄사/모란사 사건 |
결과 | 일본의 군사적 승리 타이완 남부 점령 중국의 일본에 대한 배상금 지불 류큐 열도에 대한 청의 종주권 포기 |
교전 세력 | |
교전국 2 | 보탄사 |
지휘관 및 지도자 | |
일본 제국 | 사이고 주도 사쿠마 사마타 더글러스 캐슬 아카마쓰 노리요시 |
보탄사 | 알 수 없음 |
병력 규모 | |
일본 제국 | 육군: 3,600명 해군: 6척의 군함 |
보탄사 | 알 수 없음 |
사상자 및 피해 | |
일본 제국 | 전사: 12명 부상: ~30명 질병 사망: 561명 |
보탄사 | 사망: 89명 부상: 다수 |
추가 정보 | |
추가 정보 | 561명의 일본군과 더글러스 캐슬이 원정 및 점령 기간 동안 질병으로 사망함. |
2. 배경
1871년 10월, 미야코섬에서 슈리로 공물을 수송하고 돌아오던 류큐 어용 선박이 태풍을 만나 조난당했다. 이 사건은 미야코섬 조난 사건으로 이어진다.
류큐 왕국은 에도 시대 일본 사쓰마번과 중국 대륙의 청나라 사이에서 양속 관계에 있었고,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류큐의 귀속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33]
1872년, 가고시마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는 청나라의 책임 회피에 대해 일본 정부에 출병을 건의했다. 1873년에는 빗추국 아사쿠치군 카시와지마 촌(현재의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시)의 선박이 대만에 표류하여 승무원 4명이 약탈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본 정부 내외에서 대만 정벌 여론이 높아졌다.[33]
2. 1. 미야코섬 조난 사건
1871년 10월, 미야코섬에서 슈리로 공물을 수송하고 돌아오던 류큐 어용선이 태풍을 만나 조난당했다. 배에는 관리, 뱃사공, 승무원 등 총 69명이 타고 있었다. 표류하던 승무원들은 대만 남부에 도착했고, 이 중 66명(3명 익사)은 원주민(현재 대만 원주민 파이완족)에게 구조를 요청했다.[18]그러나 원주민들은 이들을 마을에 납치했고, 12월 17일 의사소통이 되지 않자 조난자들은 마을에서 도망쳤다. 원주민들은 도망자들을 적으로 간주하여 54명을 참수했다. 이를 '미야코섬 조난 사건'이라고 한다.[18]
생존자 12명은 한족 이민자에게 구조되어 대만부의 보호를 받았다. 이후 푸젠성 푸저우를 거쳐 미야코섬으로 돌아갔다.[18] 청나라는 이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수송을 마련했고, 이들은 1872년 7월에 출발했다.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에 사건 배상을 요구했지만, 청나라는 관할 지역 밖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18]
2. 2. 류큐 왕국의 양속 관계
류큐 왕국은 에도 시대 일본 사쓰마번과 중국 대륙의 청나라 사이에서 양속 관계에 있었고, 일본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귀속을 둘러싼 정치적 문제가 일어나고 있었다.[33]2. 3. 일본 내 정세
미야코섬 주민의 대만 실종 사건을 알게 된 청나라 샤먼 주재 미국 총영사 샤를 르 장드르는 주일 미국 공사 찰스 드롱을 통해 “야만인을 징벌해야 한다”며 일본 외무성을 옹호했다.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드롱의 중개를 통해 샤를 르 장드르와 회담했고,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도 르 장드르의 의견에 주목하여 르 장드르는 고문으로 외무성에 고용되었다.[19] 당시 메이지 정부는 조선 출병을 둘러싼 정한론 등으로 갈등을 겪었고, 가바야마 스케노리와 가고시마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도 사쓰마번의 대만 출병을 건의했다. 이러한 강경론의 배경에는 폐번치현으로 실직한 40만~50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족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1873년 특명전권대사로 청나라에 간 소에지마 외무경은 수행원 야나기하라 사키미쓰를 통해 미야코섬 주민 실종 사건을 추궁했다.[19] 그러나 청나라 외무 당국은 대만 원주민은 ‘화외’(化外)이며, 청나라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의 사건이라고 답변하며 책임을 회피했다.[18]
이후 일본에서는 그해 가을, 조선 사절 파견을 둘러싸고 정부가 분열되었다. (메이지 6년 정변)[18] 1874년 1월 이와쿠라 도모미 암살 미수 사건, 2월 에토 신페이의 반란(사가의 난) 등 내정 불안이 이어졌다.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메이지 정부는 국내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대만 정벌을 결정했다. 1874년 4월 참의 오쿠마 시게노부를 대만 번지 사무국 장관, 육군 중장 사이고 주도를 대만 번지 사무 도독으로 임명하고 군사 행동 준비에 들어갔다.[18]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에서 메이지 천황의 칙령은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이유로 ‘정한’을 연기한 것뿐이었다. 러시아와 국경이 확정되면 정한파의 요구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았다. 정변으로 소에지마는 하야했고, 외교를 맡게 된 오쿠보는 조선보다 제압이 쉬운 대만 출병을 적극적으로 기획했다.

3. 대만 출병
1874년 5월 3일, 후쿠시마 구세이는 푸젠-저장 성의 리 헤니안 총독에게 죄인을 처벌하기 위해 미개척 지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했다.
5월 6일, 일본군은 더글러스 R. 카셀이 지휘하는 소규모 병력을 상륙시켜 바다로 요새화된 야영지를 선택했다.[6] 다음날인 5월 7일, 중국인 통역관 잔 한성이가 무단과 쿠스쿠스를 제외한 다른 부족들과 평화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상륙했다.
미국인 외국 장교와 후쿠시마는 처청과 신지에 상륙했다. 그들은 칭강푸의 바시안만을 병영으로 사용하려 했지만 며칠 후 폭우로 인해 그 지역이 침수되어 5월 11일 랑차오만 남쪽 끝으로 이동했다. 이후 탕케토(톡아톡이라고도 알려짐)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셰말리 부족을 초청하여 회담을 가졌다. 일본 정찰병들이 흩어져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았다. 5월 15일, 카셀은 섬의 16개 남부 부족의 수장인 이사 추장과의 협상가로 활동했다. 이사 추장은 "보탄"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며 일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처벌할 수 있도록 동의했다.[7]
5월 17일, 100명의 병력이 다른 야영지 위치를 정찰하기 위해 내륙으로 들어갔고, 이 부대에서 12명이 마을을 조사하기 위해 분리되었다. 우호적인 지역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소규모 그룹은 보탄족의 기습을 받았다. 이어진 교전에서 일본군 병사 1명이 목에 부상을 입고 사쓰마 출신 하사가 사망했다. 소규모 일본군은 본대로 후퇴했고, 돌아와 하사가 원주민에게 참수되어 머리가 전리품으로 가져가졌음을 발견했다.[8]
5월 18일, 닛신호는 아카마쓰 노리요시의 지휘 하에 콰량 만에 정박하여 측량을 위한 소형 보트를 출항시켰다. 코알루트 마을의 원주민들은 머스킷총으로 보트를 공격했다. 아카마쓰는 부상을 입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 분노하여 코알루트뿐만 아니라 인근 링루안 마을도 공격할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은 연기되었고 결국 취소되었다.[8]
5월 21일, 사쓰마 하사가 살해된 지역을 조사하기 위해 12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이 조사 과정에서 분견대는 50명의 원주민 그룹에게 다시 기습을 당했고, 교전 과정에서 일본군 2명이 중상을 입고 공격자 1명이 사망했다. 일본군은 서둘러 해안으로 돌아가 경고를 알렸고, 제임스 R. 와슨을 동반한 250명의 병력이 대응하기 위해 내륙으로 진군했다. 와슨은 일본군, 특히 후방의 훈련 부족에 당황했는데, 그들은 즉시 대열을 이탈하여 전투에 먼저 참여하기 위해 돌진했다. 원주민들은 주력이 도착하자 후퇴했다.[9]
사이고 쓰구미치는 5월 22일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사쿠마 사마타 대령은 150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너무 깊숙이 내륙으로 진군하다가 70명의 무단 전사에게 기습을 당하여 석문 전투가 시작되었다. 원주민들은 이미 돌 뒤에 미리 선정된 매복 위치에 있었지만, 일본군은 허리 깊이의 강에 놓인 바위에서 찾을 수 있는 엄호물을 이용해야 했고, 지형 때문에 한 번에 30명의 병력만 투입할 수 있었다. 교전 초반에 사쿠마는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그의 부대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계속 싸웠다. 전투는 1시간 조금 넘게 지속되었고, 사쿠마는 20명의 사수에게 그의 왼쪽 절벽을 기어 올라가 강에 있는 병사들이 그들을 계속 압박하는 동안 위에서 원주민들에게 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20명의 사수가 절벽 꼭대기에 있는 것을 본 원주민들은 후퇴했다. 무단족은 추장 아굴루와 그의 아들을 포함하여 16명이 사망하고 훨씬 더 많은 부상자를 냈다.[10] 일본군은 장교 1명과 부상자 30명을 포함하여 7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후 일본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남, 북, 중앙 루트로 향했다. 남부 루트 군대는 쿠스쿠스 부족의 기습을 받아 병사 3명을 잃었다. 반격으로 쿠스쿠스 전사들을 물리치고 일본군은 그들의 마을을 불태웠다. 중앙 루트는 무단족의 공격을 받아 병사 2, 3명이 부상을 입었고, 일본군은 그들의 마을을 불태웠다. 북부 루트는 뉘나이 마을을 공격했다. 6월 3일, 일본군은 점령했던 모든 마을을 불태웠다. 7월 1일, 무단 부족의 새로운 지도자와 쿠스쿠스 추장은 패배를 인정하고 난파된 표류자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항복한 원주민들은 일본 국기를 받아 마을에 걸었다. 그들은 일본과의 평화의 상징이자 경쟁 부족으로부터의 보호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원주민에 대한 관할권의 상징이었다.[11]
3. 1. 외교적 노력과 갈등
미야코섬 주민의 대만 실종을 알게 된 청나라 샤먼 주재 미국 총영사 샤를 르 장드르는 주일 미국 공사 찰스 드롱을 통해 “야만인을 징벌해야 한다”며 일본 외무성을 옹호했다.[18]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드롱의 중개를 통해 르 장드르와 회담을 가졌고,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도 르 장드르의 의견에 주목하여 르 장드르는 고문으로 외무성에 고용되었다.1873년, 특명 전권대사로 청나라에 건너간 소에지마 외무경은 수행원 야나기하라 사키미쓰를 통해 미야코섬 주민의 대만 실종 사건을 추궁했다.[19] 그러나 청나라 외무 당국은 대만 원주민은 ‘화외’(化外)이며, 청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의 사건이라고 답변하고 책임을 회피했다.[18]
이후 일본에서는 그해 가을, 조선 사절 파견을 둘러싸고 정부가 분열되었다. (메이지 6년 정변) 1874년 1월 이와쿠라 도모미 암살 미수 사건, 2월 에토 신페이의 반란(사가의 난) 등 내정 불안이 고조되자,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메이지 정부는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대만 정벌을 결정했다.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에서 메이지 천황의 칙령은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이유로 한 ‘정한’의 연기였으나, 러시아와 국경이 확정되면 정한파의 요구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았다. 정변으로 소에지마는 하야했고, 오쿠보가 외교를 맡게 되면서 조선보다 제압이 쉬운 대만 출병을 적극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3. 2. 출병 결정
미야코섬 주민의 대만 실종 사건을 알게 된 청나라 샤먼 주재 미국 총영사 샤를 르 장드르는 주일 미국 공사 찰스 드롱을 통해 “야만인을 징벌해야 한다”며 일본 외무성을 옹호했다.[18] 외무경 소에지마 다네오미는 드롱을 통해 르젱드르와 회담을 가졌고, 내무경 오쿠보 도시미치도 르젱드르의 의견에 주목하여 르젱드르는 고문으로 외무성에 고용되었다. 당시 메이지 정부는 조선 출병을 둘러싼 정한론 등으로 갈등이 있었고, 가바야마 스케노리와 가고시마현 참사 오야마 쓰나요시도 사쓰마번의 대만 출병을 건의했다.
1873년 특명 전권대사로 청나라에 간 소에지마 외무경은 수행원인 야나기하라 사키미쓰를 통해 미야코섬 주민의 대만 실종 사건을 추궁했다.[19] 그러나 청나라 외무 당국은 대만 원주민은 ‘화외’(化外)이며, 청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에서의 사건이라고 답변하고 책임을 회피했다.[18]
이후 일본에서는 그해 가을, 조선 사절 파견을 둘러싸고 정부가 분열되었다. (메이지 6년 정변) 또한, 다음 해 1874년 1월 이와쿠라 도모미 암살 미수 사건, 2월 에토 신페이의 반란(사가의 난) 등 내정 불안이 고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심으로 한 메이지 정부는 국내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대만 정벌을 결정했다. 1874년 4월 참의 오쿠마 시게노부를 대만 번지 사무국 장관으로, 육군 중장 사이고 주도를 대만 번지 사무 도독으로 각각 임명하고 군사 행동 준비에 들어갔다.[18]
1873년, 메이지 6년 정변에서 메이지 천황의 칙령은 러시아와 국경 분쟁을 이유로 한 ‘정한’의 연기일 뿐이었다. 러시아와 국경이 확정되면 정한파의 요구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았다. 정변으로 소에지마는 하야했고, 대신 외교를 맡게 된 오쿠보의 입장에서는 조선보다 더 쉽게 제압할 수 있는 대만 출병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기획한 것이다.
3. 3. 군사 작전

대만 출병에 대해 정부 내부와 영국 공사 파크스, 미국 공사 존 빙엄 등의 반대 의견이 있었다. 특히 참의 기도 다카요시는 정한론을 부정하면서 대만 파병은 모순이라며 반대했고, 1874년 4월 18일 사표를 제출했다. 정부는 일단 파병 중단을 결정했다.[34]
그러나 사이고는 독단으로 출병을 강행, 나가사키에 대기하던 정토군 3,000명을 출동시켰다. 정토군은 2개 대대였으며, 친다이 병 1개 대대와 규슈 각지 사족으로 구성된 '식민병'으로 편성되었다. 5월 2일 사이고의 명을 받은 다니 다테키, 아카마쓰 노리요시가 이끄는 주력군이 에도 막부로부터 계승한 작은 군함 3척으로 나가사키를 출항하자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추인하였다.[34]
1874년 4월 4일, 산조 사네토미에 의해 대만 번지 사무국이 설치되었다. 4월 5일, 대만 번지 사무 도독으로 사이고 주도가 임명되었다.[35] 4월 6일 다니 다테키와 아카마쓰 노리요시가 대만 번지 사무국 참군으로 임명되어 사이고 주도를 보좌하게 되었다.[36] 4월 7일, 해군성에서 포함 모오슈, 운요호, 보병 제1소대, 해군포 2문과 육군성에서 구마모토진 관할 보병 1대대, 포병 1소대의 출병 명령이 내려졌다.[37]

5월 6일, 일본군은 대만 남부에 상륙하여 대만 원주민과의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5월 22일, 대만 서남부의 사료항에 전군을 집결시키고 사이고의 명령에 의해 본격적인 진압을 시작했다.[33] 5월 7일, 중국인 통역관 잔 한성이가 무단과 쿠스쿠스를 제외한 다른 부족들과 평화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상륙했다. 5월 15일, 이사 추장과의 협상에서 이사 추장은 "보탄"이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며 일본인들이 원하는 대로 처벌할 수 있도록 동의했다.[7]
5월 17일, 보탄족의 기습으로 일본군 병사 1명이 사망했다. 닛신호는 아카마쓰 노리요시의 지휘 하에 콰량 만에 정박하여 측량을 위한 소형 보트를 출항시켰으나 코알루트 마을의 원주민들이 머스킷총으로 보트를 공격했다.[8]
5월 21일, 12명의 병력이 사쓰마 하사가 살해된 지역을 조사하던 중 50명의 원주민 그룹에게 다시 기습을 당했고, 교전 과정에서 일본군 2명이 중상을 입고 공격자 1명이 사망했다.[9]
사이고 쓰구미치는 5월 22일 더 많은 병력을 이끌고 도착했다. 사쿠마 사마타 대령은 150명의 병력을 지휘하여 너무 깊숙이 내륙으로 진군하다가 70명의 무단 전사에게 기습을 당하여 석문 전투가 시작되었다. 교전 초반에 사쿠마는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그의 부대는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계속 싸웠다. 무단족은 추장 아굴루와 그의 아들을 포함하여 16명이 사망하고 훨씬 더 많은 부상자를 냈다.[10] 일본군은 장교 1명과 부상자 30명을 포함하여 7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은 세 부대로 나뉘어 남, 북, 중앙 루트로 향했다. 남부 루트 군대는 쿠스쿠스 부족의 기습을 받아 병사 3명을 잃었다. 반격으로 쿠스쿠스 전사들을 물리치고 일본군은 그들의 마을을 불태웠다. 중앙 루트는 무단족의 공격을 받아 병사 2,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은 그들의 마을을 불태웠다. 북부 루트는 뉘나이 마을을 공격했다. 6월 3일, 그들은 점령했던 모든 마을을 불태웠다. 7월 1일, 무단 부족의 새로운 지도자와 쿠스쿠스 추장은 패배를 인정하고 난파된 표류자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6월 3일에는 모란사 등 사건 발생 지역을 제압하고 현지 점령을 계속했다. 전사자는 12명이었다.[33] 그러나 현지 군은 열악한 위생 상태 속에서 아열대 지역의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리는 등 피해가 확산되어 조속한 해결이 필요하게 되었다. 말라리아 창궐로 인해 561명의 병력이 병사했다.[33]
4. 협상과 결과
1874년 대만 출병 이후, 일본과 청나라 간에는 외교적 협상이 진행되었다. 회담은 난항을 겪었지만, 영국 공사 토머스 프랜시스 웨이드의 중재와 이홍장의 유화론 덕분에 10월 31일 '청일 양국 상호 조약'이 체결되었다.[33][39]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일본군의 출병을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의로운 행동으로 인정했고, 일본은 '생번'(대만 산악족)[41]에 대한 법을 마련하라고 요구했으며, 1874년 12월 20일까지 정벌군을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청나라는 조난당한 일본인에게 위로금 을 지불하고, 대만의 제반 설비 비용으로 [42]을 지불했다.[43]
이 조약으로 청나라가 일본군의 행동을 승인함에 따라 류큐 주민은 일본인으로 간주되었고, 류큐의 일본 귀속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형태가 되었다.[33]
4. 1. 청나라와의 협상
메이지 정부는 타이완 출병 당시 청나라에 사전 통지를 하지 않았고, 청나라 내 이권을 가진 열강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이는 분쟁의 소지가 있는 외교적 실책이었다. 청나라의 실력자 이홍장과 영국의 주일 대사 파크스는 일본의 군사 행동에 강하게 반발했다.이후 영국 공사 토머스 프랜시스 웨이드의 중재로 강화 회담이 진행되었고, 8월에 오쿠보 도시미치가 전권대신으로 베이징에 파견되어 청나라 정부와 협상했다. 오쿠보는 르 장드르와 프랑스인 법학자 구스타브 에밀 보아소나드를 고문으로 대만 문제 협상에 참여시켰다.[39] 청나라에서는 선정대신 심보정을 흠차대신 겸 총리각국사무아문대신으로 삼아 협상에 임했다.[40]
회담은 난항을 겪었으나, 웨이드의 중재와 이홍장의 유화론 덕분에 10월 31일 '청일 양국 상호 조약(zh)'이 체결되었다.[33][39] 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일본군의 출병을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의로운 행동으로 인정하고, 일본은 '생번'(대만 산악족)[41]에 대한 법을 마련하라고 요구했으며, 1874년 12월 20일까지 정벌군을 철수시키기로 합의했다. 또한 청나라는 조난당한 일본인에게 위로금 100000냥을 지불하고, 대만의 제반 설비 비용으로 400000냥[42]을 지불했다.[43]
이 조약으로 청나라가 일본군의 행동을 승인함에 따라 류큐 주민은 일본인으로 간주되었고, 류큐의 일본 귀속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33]
4. 2. 류큐 귀속 문제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서 귀속이 분명하지 않았던 류큐는 모란사 사건의 처리를 통해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875년 메이지 정부는 류큐에 대해 청나라와의 책봉, 조공 관계를 폐지하고 메이지 연호 사용 등을 명령했다. 그러나 류큐는 청나라와의 관계 존속을 간청했고, 청나라가 류큐의 조공 금지에 항의하는 등 외교적인 결론은 나지 않았다.[29]1879년 메이지 정부의 이른바 류큐 처분에 대해 청나라는 반대했고, 1880년 베이징에서 협상이 벌어졌다. 일본은 오키나와 본섬을 일본 영토로 하고 미야코섬과 야에야마 제도를 청나라 영토로 하는 분도안(섬 나누기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원래 두 섬의 영유권을 바라지 않았고, 책봉 관계 유지를 위해 두 섬을 류큐에 반환한 후의 류큐 왕국 재건을 요구했다. 또한, 분도에 대한 류큐인의 반대도 있어 조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30]
류큐 귀속 문제가 청일 간에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은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서였다.[31]
5. 영향
1874년 타이완 출병은 표면적으로는 류큐 상인 54명이 살해된 사건에 대한 처벌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 메이지 정부의 여러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류큐 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했는데, 류큐 왕국은 전통적으로 청나라의 종주국이었지만, 17세기부터는 사쓰마 번의 봉신이기도 했다.[12] 이 원정은 청나라가 타이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일본은 류큐인들을 대변할 권리를 더욱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청나라로부터 배상금을 받았지만, 타이완에 대한 청나라의 주권은 인정했다.[12]
1874년 영국의 중재로 이루어진 합의에는 일본의 원정이 "민간인 보호"를 위한 것이라는 청나라의 인정을 언급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일본이 나중에 류큐에 대한 청나라의 권리 포기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1879년 일본은 이 분쟁을 영국의 중재에 넘겼고, 영국은 류큐에 대한 일본의 주권을 확인했지만, 청나라는 이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원정은 미래의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망을 위한 예행연습이 되었다. 타이완은 이미 일본 내 일부 세력에게 잠재적인 일본 식민지로 간주되었다.[13]
일본의 타이완 침공과 이에 대한 청나라의 미미한 대응은 청나라의 약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으며, 이는 다른 외세가 타이완에 침입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일본 침공의 성공은 청불 전쟁 중인 1884년 10월 프랑스가 타이완을 침공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13] 청나라 조정은 뒤늦게 타이완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 시도했다. 1875년 청나라 황실 위원 선바오전은 산악 지역에 한족 정착을 장려하고 원주민을 더 잘 복종시키기 위해 섬의 험준한 내륙을 가로지르는 바통관 트레일을 건설했다.[14][15]
5. 1. 일본 국내에 미친 영향
미야코지마 섬 주민 조난 사건에 대해 청 정부가 "대만인은 화외의 백성으로 청 정부의 책임 범위가 아닌 사건(청 정부가 실효 지배하지 않는 관할 지역 밖의 사건)"이라고 하여 책임을 회피하자, 일본 측이 범죄 수사 등을 명목으로 출병했다. 원인이 54명 살해라는 대규모 살육 사건임을 이유로 경찰이 아닌 군대를 파견했다. 이는 일본의 첫 해외 파병이었다.[16]5. 2. 질병 피해
일본군은 전사 8명, 전상 25명으로 기록되었지만, 장기 주둔으로 인해 말라리아 등의 감염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출정한 군인, 군속 5,990여 명 중 환자 수는 16,409명으로, 1인당 약 2.7회 질병에 걸리는 비참한 상황이었다.[18]1871년 병부성은 육군성과 해군성으로 분리되었고, 군의관학교는 육군성에 속했으며, 군의료 책임자는 마쓰모토 준이었다. 타이완 출병 당시 군의관부는 창립 기간이 짧아 경험이 부족했지만, 총력을 기울였다. 출정군의 의무 책임자는 쿠와타 고오헤 이등군의관정(소령 상당), 부대의 의료관은 미야모토 마사히로 군의(대위 상당)였다. 그 외에도 24명의 의무관이 종군했다.
의무관들은 모두 분투했지만, 열악한 환경과 맹렬한 전염병으로 와병하는 사람이 많았고, 사이고 쓰구미치 도독은 병사에게 약만 처방해달라고 요청했다. 의관 대부분은 한의사여서 열대 질병 치료 경험이 전혀 없었다. 교대로 22명이 도착하여 간신히 귀국할 수 있었다. 궁내성에서 외국인 의사가 파견되었다. 독일 출신의 구스타프 센베르크(Dr. Gustav Schoenberg)는 도쿄대학 의학부 전신인 대학교에 속한 외국인 의사 레오폴트 뮐러를 천거했지만, 능력이 없어 문제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와 함께 보낸 6개의 제빙기는 매우 유용했다고 한다.
5. 3. 국제 관계에 미친 영향
1874년 타이완 출병은 표면적으로는 류큐 상인 54명이 살해된 사건에 대한 처벌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 메이지 정부의 여러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일본은 오랫동안 류큐 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주장해 왔는데, 류큐 왕국은 전통적으로 청나라의 종주국이었지만, 17세기부터는 사쓰마 번의 봉신이기도 했다.[12]이 사건의 처리를 통해 류큐는 일본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1875년(메이지 8년) 메이지 정부는 류큐에 대해 청과의 책봉, 조공 관계를 폐지하고 메이지 연호를 사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류큐는 청과의 관계 존속을 간청했고, 청나라는 류큐의 조공 금지에 항의하는 등 외교적 결론은 나지 않았다.[17]
1879년 (메이지 12년), 메이지 정부의 류큐 처분에 반대하는 청나라와의 1880년 (메이지 13년) 베이징 교섭에서, 일본은 오키나와 본섬을 일본 영토로, 야에야마 제도와 미야코 섬을 청나라 영토로 하는 안(분도개약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청나라는 본래 두 섬의 영유를 바라지 않았고, 책봉 관계 유지를 위해 두 섬을 류큐에 반환한 후의 류큐 왕국 부흥을 요구했으며, 류큐인들의 분도 반대도 있어 조인에 이르지 못했다.[29]
일본의 타이완 침공과 청나라의 미미한 대응은 청나라의 약점을 드러냈으며, 이는 다른 외세가 타이완에 침입하는 요인이 되었다. 특히, 일본 침공의 성공은 청불 전쟁 중인 1884년 10월 프랑스가 타이완을 침공하기로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13]
한편, 메이지 정부는 병력 수송에 영미 선박 회사를 예상했지만 거부당했고, 대형 선박을 급히 구입해야 했다. 또한 국유 회사인 일본 우편 증기선 회사에 운항을 위탁했지만 이 역시 거부당했다. 오쿠마 시게노부는 어쩔 수 없이 신흥 민간 기업인 우편기선 미쓰비시 회사(미쓰비시 상회 계열)를 기용하기로 결정했다.[29] 1874년 7월 28일, 미쓰비시 상회는 정부 수입 선박 13척에 의한 운항 업무를 수탁하여 군사 수송을 위탁받았다.[30] 이 협력으로 미쓰비시는 이후 정부의 지원을 받아 급성장하여 재벌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3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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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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副島の任務は1871年(明治4年)の[[日清修好条規]]の批准交換であった。遠山(1979)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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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の後討伐軍が編成されたが、[[鎮台兵]]以外は「植民兵」として薩摩など九州各地の[[士族]]([[藩士]]編成の部隊)から占領地[[永住]]を前提に募集・編成されたものであっ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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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군함 3척은 다카사고마루, 다이우(大有), 메코(明光)였다. 또한 [[오쿠보 도시미치]]를 중국에 보낸 것은 기함 [[류조 (철갑함)|류조]]와 군함 [[쓰쿠바 (코르벳)|쓰쿠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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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정벌사건/17 / 十六三条太政大臣ヨリ外務省ヘ達/十七親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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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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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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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 공문서관 아시아 역사자료 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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