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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스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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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멜로스의 대화는 투키디데스가 저술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등장하는 사건으로, 기원전 416년 아테네가 중립국인 멜로스를 정복하려 할 때 벌어진 아테네 사절과 멜로스 지도자 간의 협상 내용을 담고 있다. 아테네는 멜로스에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거나 멸망하라는 최후통첩을 제시하며, 강자의 논리를 내세웠고, 멜로스는 중립을 지키려 했지만, 아테네는 이를 무시하고 멜로스를 공격했다. 멜로스는 결국 아테네에 의해 점령되었고, 멜로스인들은 처형되거나 노예로 팔렸다. 이 사건은 아테네 제국의 잔혹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현실주의적 정치 철학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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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로스의 대화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전투 이름메로스 공방전
관련 전쟁펠로폰네소스 전쟁
메로스 섬의 위치
메로스 섬의 위치
메로스, 스파르타, 아테네 기원전 416년
메로스(보라색), 델로스 동맹(주황색), 펠로폰네소스 동맹(녹색)
시기기원전 416년 여름-겨울
장소에게해 밀로스섬
결과아테나이의 승리, 메로스의 멸망
교전 세력
교전국 1델로스 동맹 (아테나이)
교전국 2멜로스
지휘관 및 지도자
아테나이클레오메데스
티시아스
필로크라테스
메로스불명
병력 규모
아테나이
: 아테나이 중보병 1,600명
: 아테나이 궁병 300명
: 아테나이 궁기병 30명
: 델로스 동맹 중보병 1,500명

: 아테나이 30척
: 키오스 6척
: 레스보스 2척
메로스불명
피해 규모
아테나이미미
메로스메로스의 성인 남자 전체 처형 및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림

2. 배경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지속된 전쟁으로,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고전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 사이에 벌어졌다. 당시 아테네는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에게해의 거의 모든 섬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멜로스는 아테네의 지배를 받지 않는 에게해의 몇 안 되는 주요 섬 중 하나였다.[2]

멜로스 사람들은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인 계통이었지만,[3][4][5][6] 특정 세력에 속하지 않고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고자 했다.[7] 반면 아테네는 이오니아인이었다.[3][4][5][6] 이러한 상황 속에서 에게해의 패권을 장악하려던 아테네는 중립을 표방하는 멜로스를 잠재적인 위협 또는 복속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2. 1. 아테네의 멜로스에 대한 적대적 행위

멜로스 (보라색), 델로스 동맹 (주황색), 펠로폰네소스 동맹 (녹색)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404년) 당시, 에게해의 대부분 섬을 장악한 델로스 동맹의 맹주 아테네는 중립을 지키던 멜로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멜로스는 스파르타와 같은 도리아인 계통이었으나 전쟁에서 중립을 유지하려 했다.[7] 일부 멜로스인이 스파르타를 지원했다는 증거도 있지만,[9][10][11] 멜로스의 공식적인 입장은 중립이었다.

기원전 426년, 아테네는 2,000명의 병력을 보내 멜로스의 농촌 지역을 약탈했으나, 멜로스 주민들은 항복하지 않았다.[12][13][14] 이후 기원전 425년 또는 424년, 아테네는 멜로스에 15탈렌트(약 390kg[16])에 달하는 막대한 양의 은을 공물로 바칠 것을 요구했다.[15] 이는 당시 트리에르 승무원에게 15개월치 임금을 지급하거나,[17][18] 540 미터톤의 밀을 구매하여 2,160명을 1년 동안 먹일 수 있는 상당한 금액이었다.[19] 이러한 요구는 멜로스가 비교적 부유한 섬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20] 하지만 멜로스는 아테네의 요구를 거부했다.[21]

3. 멜로스 공방전

섬의 고대 도시 근처인 멜로스


기원전 416년 여름, 스파르타와의 휴전 기간 동안 아테네는 멜로스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최소 3,400명 규모의 이 군대는 아테네와 다른 델로스 동맹 도시 출신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아테네 원정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병종출신병력 수
중장 보병아테네1,600명
궁수아테네300명
기마 궁수아테네20명
중장 보병델로스 동맹 도시1,500명
총계3,400명 이상



이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총 38척의 함대가 동원되었다. 아테네 원정 함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출신함선 수
아테네30척
키오스6척
레스보스2척
총계38척



원정은 장군 클레오메데스와 티시아스가 지휘했다. 아테네군은 멜로스 섬에 상륙하여 야영지를 설치한 후, 멜로스 통치자들에게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다. 아테네 사절은 멜로스가 델로스 동맹에 가입하여 아테네에 조공을 바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파멸을 맞이할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전달했다.

멜로스인들은 아테네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아테네는 멜로스 도시를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으며, 다른 전선에서의 전투를 위해 대부분의 병력은 섬에서 철수시켰다. 포위된 멜로스인들은 여러 차례 성 밖으로 출격하여 아테네의 방어선 일부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으나,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는 실패했다.

상황이 장기화되자 아테네는 필로크라테스가 지휘하는 증원군을 파견했다. 또한, 아테네는 멜로스 내부의 배신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멜로스는 겨울에 아테네에 항복했다.

4. 멜로스 대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5권 84~116장)는 고대 아테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저작으로, 이 책에는 아테네 사절단과 멜로스 지도자들 사이의 협상 과정이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투키디데스는 당시 망명 중이었기에 이 협상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멜로스 대화'로 알려진 이 부분은 실제 대화의 정확한 기록이라기보다는, 투키디데스가 양측의 입장과 상황을 바탕으로 논의되었을 법한 내용을 재구성하여 요약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대화는 국제 관계에서 강대국의 현실 정치와 힘의 논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4. 1. 멜로스 대화의 주요 내용

아테네는 멜로스인들에게 항복하고 조공을 바치거나 멸망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최후 통첩을 제시했다. 아테네인들은 현실적으로 힘이 정의를 만든다며 도덕성 논쟁을 피하고자 했다. 아테네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겪어야 할 것을 겪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27]

멜로스인들은 자신들이 중립 도시이며 적이 아니므로 아테네가 침략할 명분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아테네인들은 멜로스의 중립과 독립을 인정하면 자신들이 약하게 보일 것이고, 이는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는 국가들이 아테네가 멜로스를 정복할 힘이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 것이라고 반박했다.

멜로스인들은 아테네의 침략이 다른 중립적인 그리스 국가들을 불안하게 하여 아테네에 적대적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테네인들은 본토의 그리스 국가들은 그렇게 행동할 가능성이 낮으며, 오히려 이미 정복한 불만을 품은 민족들, 특히 해상 지배력을 위협할 수 있는 섬들로부터의 잠재적 반란을 더 우려한다고 반박했다. 멜로스를 정복하는 것이 아테네의 힘을 보여주고 반란을 억제하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멜로스인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하는 것은 수치스럽고 비겁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아테네인들은 멜로스인들에게 이것은 공정한 싸움이 아니며 패배는 멸망을 의미하므로 자존심을 버리라고 충고했다. 멜로스인들은 아테네가 훨씬 강하지만 여전히 승리할 가능성이 있으며, 운에 도전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테네인들은 승리 가능성이 희박하고 패배의 결과가 끔찍한 상황에서 희망에 의존하지 말라고 반박했다. 만약 멜로스인들이 저항한다면 패배할 가능성이 높고, 그들의 비이성적인 낙관주의를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멜로스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도덕적으로 정당하기에 신들의 도움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테네인들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므로 신들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멜로스인들은 동족인 스파르타가 방어하러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가 멜로스에 개입할 만큼 중요한 이해관계가 없으며, 아테네의 해군력이 더 우위에 있음을 지적하며 스파르타의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아테네인들은 멜로스인들의 현실 인식 부족에 충격을 표하며, 압도적으로 강한 적, 특히 합리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적에게 항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재차 강조했다. 하지만 멜로스인들은 생각을 바꾸지 않고 정중하게 사절들을 돌려보냈다.

5. 분석 및 평가

투키디데스아테네가 멜로스를 정복한 목적이 아테네의 힘과 엄격함을 보여주어 다른 섬 영토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 달성 여부는 불확실하다. 멜로스 정복 이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아테네는 시칠리아 원정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겪었고, 이는 제국 전역의 반란으로 이어졌다. 결국 멜로스 정복으로 얻으려 했던 이점은 시칠리아에서의 재앙으로 인해 상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에게 해의 섬들은 아테네에게 중요한 세수입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해군력 유지에 필수적인 항구를 제공했다. 고대의 군함인 삼단노선은 보급품 적재 공간이 부족하고 승무원 숙영 시설이 없어 매일 항구에 정박하여 보급품을 구매하고 야영해야 했다. 또한 내항성이 약해 악천후를 피할 항구가 필요했다. 아테네에서 소아시아까지의 거리는 약 300km에 달했지만, 삼단노선은 하루에 약 80km 정도만 항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에게 해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섬들의 항구를 장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32][33][34] 멜로스가 중립을 유지한다면 아테네의 적 함선이 멜로스 항구에서 보급을 받을 수 있었기에, 아테네는 멜로스를 점령함으로써 이러한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35] 그러나 이러한 전략적 고려는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멜로스 대화에서는 직접적으로 논의되지 않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 아테네는 패배한 적들에게 비교적 관용을 베풀기도 했다. 예를 들어 기원전 429년 반란을 일으킨 포티다이아를 진압한 후, 생존자들이 도시를 떠나도록 허락했다.[36]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아테네인들은 관용이 약점으로 비춰져 오히려 반란을 부추긴다고 여기게 되었다.[37] 또한, 전쟁 초기부터 극심했던 스파르타의 잔혹성에 대한 대응으로 아테네의 잔혹성 역시 점차 증가했다.[38] 특히 기원전 429년 플라타이아이 포위전에서 스파르타가 저지른 학살 이후, 아테네 역시 포로를 학살하는 경우가 늘어났다.[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로스에서의 학살은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세계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40] 아테네의 웅변가 이소크라테스는 훗날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행보를 변호하면서도 멜로스 학살을 주요 비판점으로 인정해야 했으며, 다만 그것이 필요악이었고 다른 교전국들도 마찬가지로 잔혹했다고 주장했다.[41][42][43] 아테네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기원전 405년 스파르타 군대가 아테네를 포위했을 때, 아테네 시민들이 자신들이 멜로스인들에게 가했던 것과 같은 잔혹한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44] 이는 멜로스 학살이 당시 아테네인들에게도 큰 트라우마로 남았음을 보여준다.

멜로스인들이 극심한 굶주림 끝에 항복했다는 정황 증거도 존재한다. '멜로스의 기근'이라는 표현은 극심한 기아 상태를 나타내는 은유로 그리스어에 자리 잡았다. 이 표현은 기원전 414년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새''에서 처음 등장하며,[45] 10세기 비잔틴 제국의 백과사전인 ''수다''에도 언급될 정도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46][47]

기원전 415년 3월, 아테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트로이의 여인들''이라는 희곡을 초연했다. 이 작품은 정복당한 도시 주민들의 고통을 다루고 있으며, 비록 배경은 트로이 전쟁이지만 일부 학자들은 이 작품이 멜로스 학살에 대한 비판적 해설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가 멜로스 포위 공격이 시작되기 전부터 희곡을 구상했을 가능성이 높고, 멜로스 함락 후 작품을 수정할 시간이 촉박했으며, 당시 아테네 관객들의 정서를 거스를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인 연관성은 낮다는 반론도 있다.[48]

5. 1. 논란

멜로스가 진정으로 중립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때때로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투키디데스는 기원전 426년 니키아스의 습격 이후, 멜로스인들이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였다고 기록했지만,[28] 투키디데스나 그 시대의 다른 작가들은 멜로스가 아테네에 저지른 구체적인 범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29][30] 멜로스가 한때 스파르타에 돈(약 12.5kg의 은)을 기증했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지만, 이 기증이 니키아스의 습격 전인지 후인지는 불확실하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멜로스는 일반적으로 학자들에 의해 아테네 제국주의의 무고한 희생자로 여겨진다.[31]

멜로스의 운명이 아테네 정부에 의해 결정되었는지 또는 멜로스에 주둔한 아테네 장군들에 의해 결정되었는지 역시 불확실하다. 안도키데스에게 잘못 귀속된 역사적 연설에 따르면, 정치인 알키비아데스가 아테네 정부 앞에서 멜로스 생존자들을 노예로 만들 것을 옹호했다고 주장한다.[49] 그러나 이 설명은 법령의 날짜를 제공하지 않으므로, 사후에 잔혹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통과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기록에서 그러한 법령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50]

멜로스인에 대한 처우는 때때로 고대 세계의 집단 학살의 한 예로 여겨진다.[51][52][53]

6. 영향

멜로스에서의 학살은 아테네를 포함한 그리스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아테네의 잔혹성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40] 아테네의 웅변가 이소크라테스는 후일 아테네의 정복 행위를 변호하면서도 멜로스 학살을 아테네에 대한 주요 비판 지점 중 하나로 언급했으며, 다만 그것이 필요악이었고 다른 교전국들도 유사한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41][42][43] 아테네의 역사가 크세노폰은 기원전 405년 스파르타 군대가 아테네를 포위했을 때, 아테네 시민들이 과거 멜로스인들에게 자행했던 것과 같은 잔혹한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44]

멜로스인들이 항복하기 전 극심한 굶주림을 겪었다는 정황 증거가 있으며, 이 사건으로 인해 "멜로스의 기근"이라는 표현은 극심한 기아 상태를 비유하는 관용구로 그리스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 표현은 기원전 414년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새''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며,[45] 이후 10세기 비잔틴 제국의 백과사전인 ''수다''에도 언급될 정도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46][47]

기원전 415년 3월, 아테네의 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정복당한 도시 주민들의 고통을 그린 희곡 ''트로이의 여인들''을 초연했다. 작품의 배경은 트로이 전쟁이고 멜로스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작품이 멜로스 학살에 대한 간접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가 멜로스 포위 공격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희곡 집필을 시작했고, 멜로스 함락 후 작품을 수정할 시간이 매우 짧았다는 점, 그리고 당시 연극 제작 비용을 고려할 때 아테네 관객의 심기를 거스를 위험을 감수했을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이러한 해석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48]

현대에 이르러 멜로스인들에 대한 처우는 고대 세계에서 벌어진 집단 학살의 한 사례로 간주되기도 한다.[51][52][5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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