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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켈리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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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켈리아 원정은 기원전 415년부터 413년까지 아테네가 시켈리아 섬을 정복하려 했던 대규모 군사 원정이다. 아테네는 세게스타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원정을 결정했지만, 알키비아데스의 소환, 스파르타의 개입, 그리고 아테네 지휘관들의 전략적 불협화음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혔으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켈리아 원정은 민주주의의 한계, 지도자의 중요성, 그리고 전쟁의 비극성에 대한 교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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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켈리아 원정
시켈리아 원정
시라쿠사에서 아테네 군대의 파괴, 1900년 그림
시라쿠사에서 아테네 군대의 파괴, 1900년 그림
개요
분쟁펠로폰네소스 전쟁
날짜기원전 415년 – 기원전 413년
장소시칠리아, 이탈리아
결과스파르타/시라쿠사 연합의 주요 승리
아테네 원정군 전멸
교전 세력아테네
델로스 동맹
세게스타
에트루리아
상대 세력스파르타
코린토스
시라쿠사
지휘관 및 지도자
아테네니키아스(POW, 처형)
라마코스(KIA)
데모스테네스(POW, 처형)
에우리메돈(KIA)
시라쿠사/스파르타길리포스
헤르모크라테스
병력 규모
아테네 초기 원정군호플리테스 5,100명
궁수 480명
투석병 700명
기타 경보병 120명
기병 30명
삼단 노선 134척
기원전 414년 증원군아테네 기병 250명
기마 궁수 30명
시켈리아 용병 기병 400명
기원전 413년 증원군호플리테스 5,000명
다수의 경보병
삼단 노선 73척
시라쿠사 초기 병력호플리테스 5,000–6,000명
기병 1,200명
최소 삼단 노선 100척
길리포스 구원군무장 선원 700명
호플리테스 1,000명
시켈 전사 1,000명
기병 100명
기원전 413년 그리스 구원군호플리테스 2,000명
기원전 413년 시켈리아 구원군병사 2,300명
사상자 및 피해
아테네전체 원정군 사망, 포로 또는 노예로 판매
시라쿠사/스파르타불명
기타
참고 사항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 사령관 중 한 명으로 전투를 시작했지만, 재판을 받기 위해 아테네로 소환된 후 스파르타로 망명했다.

2. 배경

시칠리아와 펠로폰네소스 전쟁


=== 아테네와 시켈리아 ===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아테네는 시켈리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76][8][47] 시라쿠사이는 스파르타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마찬가지로 도리아인 도시였던 반면, 시켈리아의 아테네 동맹 도시는 대부분 이오니아인이 세운 도시였다.[9][48] 시켈리아의 작은 도시 국가들은 아테네를 시라쿠사에 대항할 세력으로 기대했다. 아테네에게 시라쿠사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곡물과 지원을 제공하는 위협인 동시에, 정복할 수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10][49]

기원전 427년, 아테네는 레온티노이의 지원 요청을 받고 라케스의 지휘 아래 20척의 군선을 파견했다.[11][50] 이들은 레기온을 기지로 몇 년간 시라쿠사이 및 그 동맹 도시와 싸웠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12][51] 기원전 425년, 아테네는 삼단노선 40척을 증파할 계획이었으나, 필로스 전투로 인해 예정대로 도착하지 못했다.[13][52] 결국 함대가 도착했을 때, 아테네 동맹 도시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고, 기원전 424년 젤라 회의에서 "시켈리아인을 위한 시켈리아"를 기초로 한 평화 조약이 체결되자 아테네 함대는 철수했다.[14][53]

===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개 ===

기원전 42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니키아스 강화조약〉을 맺었으나,[77][15][54] 조약 내용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77][15][54] 스파르타는 조약에 규정된 암피폴리스를 아테네에게 인도하지 않았고,[77][15][54] 아테네도 필로스를 계속 점유하고 있었다.[77][15][54]

기원전 418년에는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충돌했다.[77][15][54] 아테네는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및 다른 펠로폰네소스 도시를 지원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반 스파르타 동맹을 설립하려고 시도했다.[77][15][54] 이 시도는 아테네의 귀족 알키비아데스가 주도한 것으로, 만약 성공한다면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대한 스파르타의 지배를 타개할 수 있는 것이었다.[77][15][54] 이 기획은 실패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17년 봄에 장군으로 선출되었다.[77][16][55] 아테네의 외교 정책은 니키아스를 중심으로 하는 ‘평화주의자’(친 스파르타 파)와 알키비아데스를 중심으로 하는 ‘전쟁파’로 갈라졌다.[77][17][56]

=== 아테네의 내부 상황 ===

기원전 42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니키아스 강화조약〉을 맺었으나, 기원전 415년에도 명분상의 평화만 유지되고 있었다. 강화 조건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는데, 스파르타는 조약에 규정된 암피폴리스를 아테네에 인도하지 않았고, 아테네는 필로스를 계속 점유했다.[77]

기원전 418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충돌했다. 아테네는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등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을 지원하여 반 스파르타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 이 시도는 알키비아데스가 주도한 것으로, 성공하면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대한 스파르타의 지배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비록 이 계획은 실패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17년 봄 장군으로 선출되었다. 아테네의 외교 정책은 니키아스를 중심으로 하는 평화파와 알키비아데스를 중심으로 하는 전쟁파로 나뉘어 있었다.[77]

=== 세게스타의 구원 요청 ===

젤라 회의에서 실현된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회의 직후, 시라쿠사이는 레온티노이의 민주파와 과두파 사이의 내분 사건에 개입하여 과두파를 지지했다. 외세 지배의 가능성은 레온티노이인들을 결속시켰고, 두 파는 시라쿠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18] 아테네는 기원전 422년에 시라쿠사와의 전쟁 재개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사절을 시켈리아에 보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19]

그러나 기원전 416년, 세게스타가 셀리노스와 전쟁을 벌여 초전에 패배한 후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20] 세게스타인들은 아테네의 지원을 얻기 위해 함대 파견 비용의 대부분을 조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선불로 60 탈란트의 은괴를 제공했다.[21] 또한 아테네 사절들에게 그들의 금과 기타 귀중품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도시가 실제보다 더 번영하는 것처럼 속였다.[21][22]

2. 1. 아테네와 시켈리아

기원전 5세기 중반부터 아테네는 시켈리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76][8][47] 시라쿠사이는 스파르타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마찬가지로 도리아인 도시였던 반면, 시켈리아의 아테네 동맹 도시는 대부분 이오니아인이 세운 도시였다.[9][48] 시켈리아의 작은 도시 국가들은 아테네를 시라쿠사에 대항할 세력으로 기대했다. 아테네에게 시라쿠사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곡물과 지원을 제공하는 위협인 동시에, 정복할 수 있는 도시이기도 했다.[10][49]

기원전 427년, 아테네는 레온티노이의 지원 요청을 받고 라케스의 지휘 아래 20척의 군선을 파견했다.[11][50] 이들은 레기온을 기지로 몇 년간 시라쿠사이 및 그 동맹 도시와 싸웠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12][51] 기원전 425년, 아테네는 삼단노선 40척을 증파할 계획이었으나, 필로스 전투로 인해 예정대로 도착하지 못했다.[13][52] 결국 함대가 도착했을 때, 아테네 동맹 도시들은 전쟁에 지쳐 있었고, 기원전 424년 젤라 회의에서 "시켈리아인을 위한 시켈리아"를 기초로 한 평화 조약이 체결되자 아테네 함대는 철수했다.[14][53]

2. 2.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개

기원전 42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니키아스 강화조약〉을 맺었으나,[77][15][54] 조약 내용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77][15][54] 스파르타는 조약에 규정된 암피폴리스를 아테네에게 인도하지 않았고,[77][15][54] 아테네도 필로스를 계속 점유하고 있었다.[77][15][54]

기원전 418년에는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충돌했다.[77][15][54] 아테네는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및 다른 펠로폰네소스 도시를 지원하여 펠로폰네소스반도에 반 스파르타 동맹을 설립하려고 시도했다.[77][15][54] 이 시도는 아테네의 귀족 알키비아데스가 주도한 것으로, 만약 성공한다면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대한 스파르타의 지배를 타개할 수 있는 것이었다.[77][15][54] 이 기획은 실패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17년 봄에 장군으로 선출되었다.[77][16][55] 아테네의 외교 정책은 니키아스를 중심으로 하는 ‘평화주의자’(친 스파르타 파)와 알키비아데스를 중심으로 하는 ‘전쟁파’로 갈라졌다.[77][17][56]

2. 3. 아테네의 내부 상황

기원전 42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니키아스 강화조약〉을 맺었으나, 기원전 415년에도 명분상의 평화만 유지되고 있었다. 강화 조건은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는데, 스파르타는 조약에 규정된 암피폴리스를 아테네에 인도하지 않았고, 아테네는 필로스를 계속 점유했다.[77]

기원전 418년, 〈만티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충돌했다. 아테네는 아르고스, 만티네이아 등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을 지원하여 반 스파르타 동맹을 구축하려 했다. 이 시도는 알키비아데스가 주도한 것으로, 성공하면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대한 스파르타의 지배를 약화시킬 수 있었다. 비록 이 계획은 실패했지만, 알키비아데스는 기원전 417년 봄 장군으로 선출되었다. 아테네의 외교 정책은 니키아스를 중심으로 하는 평화파와 알키비아데스를 중심으로 하는 전쟁파로 나뉘어 있었다.[77]

2. 4. 세게스타의 구원 요청

젤라 회의에서 실현된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회의 직후, 시라쿠사이는 레온티노이의 민주파와 과두파 사이의 내분 사건에 개입하여 과두파를 지지했다. 외세 지배의 가능성은 레온티노이인들을 결속시켰고, 두 파는 시라쿠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18] 아테네는 기원전 422년에 시라쿠사와의 전쟁 재개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사절을 시켈리아에 보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19]

그러나 기원전 416년, 세게스타가 셀리노스와 전쟁을 벌여 초전에 패배한 후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20] 세게스타인들은 아테네의 지원을 얻기 위해 함대 파견 비용의 대부분을 조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선불로 60 탈란트의 은괴를 제공했다.[21] 또한 아테네 사절들에게 그들의 금과 기타 귀중품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도시가 실제보다 더 번영하는 것처럼 속였다.[21][22]

3. 원정 준비와 논란

세게스타의 사절은 아테네의 민회에 개입을 호소했다. 민회의 의견은 그때까지의 주장에 따라 두 가지로 갈렸다. 결국 민회는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지만, 병력은 삼단 노선 60척에, 중장 보병은 파견하지 않기로 했다. 원정군은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라마코스 3명이 이끌게 되었다. 투키디데스는 니키아스의 임명은 그의 의사에 반하는 것이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민회에서의 논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첫 번째 민회에서 5일 후, 두 번째 민회가 개최되었고, 원정 병참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니키아스는 원정군의 파견 자체를 다시 고려하도록 민회에 호소했다. 여러 연설을 통해 니키아스는 원정에 반대하는 여러 종류의 논거를 말했다. 그는 아테네 시민에게 시켈리아에 원정군을 보내게 되면, 뒤에 강력한 적을 남겨두게 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니키아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알키비아데스의 동조자는 경험이 부족하고, 자기애가 강하며, 자신을 위해 아테네를 전쟁에 말려들게 하는 젊은이에 불과하다고 호소했다.

그런 주장에 맞서 알키비아데스는 일반 시민과 지도자로서의 그의 선행을 강조하며 니키아스의 공격을 피했다. 또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시켈리아 동맹 도시에 대한 의무를 떠올리며 아테네에 승리를 가져왔던 적극적 정신을 호소하였다. 또한, 시켈리아에 도착하면 현지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 원정 계획에 대한 니키아스의 경고에 반박했다.[81]

민회의 의견은 알키비아데스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니키아스는 원정 자체를 반대해도 이를 취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른 전술을 취하려고 했다. 그는 아테네가 맞서게 될 시켈리아 도시의 부와 세력을 언급하며, 원정을 성공시키기 위해 지난번 인정받은 이상의 대군을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내심 이러한 대규모 원정 부대는 시민 찬성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82] 그러나 니키아스의 예상과는 반대로, 민회는 열정적으로 그의 제안을 지지하였고, 100여척의 함대와 중장보병 5,000명을 파병하는 것으로 가결되었다.[83] 니키아스 방식은 대실패로 끝났다. 민회의 의사를 읽지 못한 실수로 인해 전략적 상황은 바뀌었다. 60척의 손실은 고통이지만 견딜 수는 있었다. 그러나 대군을 잃는다면 파국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었다. 도널드 케이건은 니키아스의 개입이 없었다면, 기원전 415년 시켈리아 원정이 시행되었다고 해도 큰 손해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84]

3. 1. 아테네 민회의 논쟁

세게스타의 사절은 아테네의 민회에 개입을 호소했고, 민회는 원정 파견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60] 민회는 결국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라마코스 세 명이 지휘하는 60척의 삼단 노선으로 구성된 원정군을 승인했지만, 중장 보병은 동행하지 않았다.[21]

첫 번째 민회 5일 후, 원정 병참에 관한 논의를 위해 두 번째 민회가 개최되었다.[23] 여기서 니키아스는 원정군 파견 자체를 다시 고려하도록 민회에 호소하며 여러 연설을 통해 반대 논거를 제시했다.[62] 그는 아테네가 시켈리아에 원정군을 보내면 뒤에 강력한 적을 남겨두게 되고, 정복하기 어려운 많은 적과 적대 행위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24] 또한 니키아스는 알키비아데스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그의 동조자들이 경험이 부족하고 자기애가 강하며 자신을 위해 아테네를 전쟁에 말려들게 하는 젊은이들이라고 주장했다.[25][63]

알키비아데스는 이에 맞서 시민과 지도자로서 자신의 업적을 강조하며 니키아스의 공격을 피했다.[26][64] 그는 시켈리아 동맹 도시에 대한 아테네의 의무를 상기시키고, 아테네에 승리를 가져왔던 적극적인 정신을 호소했으며, 시켈리아에 도착하면 현지인의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니키아스의 경고에 반박했다.[81][64]

민회의 의견은 알키비아데스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니키아스는 원정 자체를 반대해도 이를 취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다른 전술을 취했다.[65] 그는 아테네가 맞서게 될 시켈리아 도시의 부와 세력을 언급하며, 원정을 성공시키기 위해 지난번 인정받은 것 이상의 대군을 파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내심 이러한 대규모 원정 부대는 시민 찬성을 얻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82] 그러나 니키아스의 예상과는 반대로, 민회는 열정적으로 그의 제안을 지지하여 100여척의 함대와 중장보병 5,000명을 파병하는 것으로 가결했다.[83][66] 도널드 케이건은 니키아스의 개입이 없었다면 기원전 415년 시켈리아 원정이 시행되었어도 큰 손해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84][67]

3. 2. 헤르마 파괴 사건

함대는 오랜 준비 끝에 출항 준비를 갖췄다. 출항 전날 밤, 도시 곳곳에 행운의 표시로 놓여 있던 헤르메스의 흉상이 있는 헤르마가 다수 파괴되었다. 이 사건은 원정에 대한 불길한 징조이자 정부 전복을 기도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심각하게 다루어졌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키비아데스의 정적인 안드로클레스는 가짜 증인을 내세워 알키비아데스와 그 지지자들이 헤르마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알키비아데스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사형을 각오하고 즉각적인 재판을 요구했지만, 그의 정적들은 알키비아데스가 출항하여 군대를 이끌고 떠난 뒤에 재판을 열어 불리한 판결을 유도하려 했기 때문에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군 전체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아르고스와 만티네이아의 지원도 얻고 있었기에 기소되지 않은 채 함대는 다음날 출항했다.

4. 원정 과정

4. 1. 세 장군의 전략 대립

기원전 415년, 시켈리아 원정을 승인한 아테네 민회는 니키아스, 알키비아데스, 라마코스 세 명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30][68] 이 결정은 두 번째 민회에서도 변경되지 않았다. 알키비아데스는 원정을 제안한 ‘전쟁파’ 지도자였고, 니키아스는 ‘평화파’ 지도자로 알키비아데스에게 비판적이었다.[68] 라마코스는 50세의 경험 많은 군인이었으며,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아카르나이의 사람들》에서는 ‘흰소리를 쏘아대는 영원히 가난한 전사’로 풍자되었다.[30][68] 세 장군이 선출된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민회는 공격적인 젊은 지도자와 보수적인 노인의 균형을 맞추고, 군대 경험이 많은 라마코스를 추가한 것으로 추정된다.[30][68]

세 장군은 각기 다른 전략을 제안했다. 니키아스는 원정 지역을 한정하고 셀리노스로 함대를 진행시켜 셀리노스와 세게스타 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안했다. 그 후 세게스타가 원정 비용 전부를 부담하지 않으면 시켈리아 각지에서 ‘위세를 과시’하고 아테네로 귀환하자고 했다.[31][69] 알키비아데스는 외교 수단을 이용하여 시켈리아 동맹 도시를 얻고, 이어서 셀리노스와 시라쿠사이를 공격할 것을 제안했다.[85][32][70] 라마코스는 기습 효과를 기대하고 시라쿠사이를 직접 공격하여 도시 외곽에서 야전을 할 것을 제안했다. 즉시 공격하면 시라쿠사이는 방어 준비가 불충분하여 조기에 항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86][33][71] 그러나 결국 라마코스는 알키비아데스의 방안을 지지했다.

4. 2. 알키비아데스의 소환과 망명

아테네 함대는 케르키라 섬에서 동맹군과 합류한 후, 시켈리아의 카타나(카타니아)에 도착했다.[72] 그러나 그곳에서 알키비아데스는 헤르마이 파괴 혐의뿐만 아니라 엘레우시스의 밀의를 모독했다는 혐의로 체포 영장이 발부되었다.[73]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로 귀환하는 대신 투리이(en)에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향해 탈출, 스파르타로 망명을 요청했다. 아테네는 부재 중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했지만,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 도시에 아테네에 불리한 정보를 제공했다.

4. 3. 시라쿠사의 반응과 방어 준비

시라쿠사 시민들은 아테네가 세게스타를 돕는다는 구실로 실제로는 자신들을 공격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라쿠사의 장군 헤르모크라테스는 시켈리아의 다른 도시들과 카르타고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또한 아테네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오니아 해에서 만나 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아테네가 스파르타와 전쟁 중인데도 시라쿠사를 공격할 만큼 어리석지 않을 것이라며 아테네의 위협을 과소평가하거나, 심지어 원정 함대의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테나고라스(en)는 헤르모크라테스 등이 대중에게 공포심을 심어 정부를 전복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4. 4. 초기 전투와 아테네의 전략 변경

아테네 함대는 케르키라 섬에서 동맹군과 합류한 후, 세 부대로 나뉘어 시켈리아로 향했다. 삼단노선 134척(아테네 100척 포함), 중장보병 5,100명(아테네 병사 2,200명 포함), 궁병 480명, 투척병 700명, 경장보병 120명, 기병 30명, 보급선 130척 등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이었다.[88][73] 그러나 시켈리아 동맹 도시들은 아테네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았고, 세게스타는 약속한 자금을 제공하지 않았다.[87]

이에 아테네 군 지휘관들 사이에서 전략 논쟁이 벌어졌다. 니키아스는 소극적인 전략을, 알키비아데스는 친아테네 파 지원 후 시라쿠사와 셀리누스 공격을, 라마코스는 즉각적인 시라쿠사이 공격을 주장했다.[87] 이러한 와중에 알키비아데스는 헤르마 파괴 및 엘레프시나의 비밀의식 혐의로 체포령이 내려져 스파르타로 망명했고, 아테네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했다.[72]

결국 아테네 군은 카타나(현재의 카타니아)에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했다. 이 사이 시라쿠사 군은 공격 준비를 갖추고 카타나로 진군했으나, 아테네 군은 배를 타고 시라쿠사 교외로 이동하여 상륙했다. 시라쿠사 군은 급히 회군하여 전투를 벌였다.[39] 아테네 군은 아르고스 병력과 만티네이아 병력을 우익에, 다른 동맹군을 좌익에, 자국 군을 중앙에 배치한 8열 횡대 진형을 갖추었다. 시라쿠사 군은 16열 횡대 진형으로 맞섰으며, 1,200명의 기병을 보유하여 아테네 군보다 우세했다.[40]

전투는 아테네 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고, 시라쿠사 군의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아르고스 병력이 적 좌익을 돌파하면서 승리했다. 그러나 시라쿠사 기병의 방해로 아테네 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양측은 각각 50명과 260명의 사상자를 냈다.[40] 이후 아테네 군은 카타나로 돌아가 겨울을 보냈다.

한편, 헤르모크라테스는 시라쿠사 군을 재편하고 장군 수를 3명(헤르모크라테스, 헤라클레이데스, 시카누스)으로 줄였다. 또한 코린토스와 스파르타에 지원을 요청했다. 겨울 동안 아테네는 추가 자금과 기병을 요청했고, 시라쿠사는 요새와 성벽을 건설했다. 양측은 카마리나를 비롯한 여러 도시 국가에 외교관을 보내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카마리나는 중립을 선택했다.[72]

아테네는 카르타고와 에트루리아에도 지원을 요청했다. 에트루리아는 소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아테네를 지원했다. 코린토스에서 시라쿠사 대표들은 스파르타와 협력하던 알키비아데스를 만났고,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에 시라쿠사 지원과 아테네 근처 데켈레아 요새화를 조언했다. 스파르타는 길리푸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시라쿠사로 파견했다.

기원전 414년 봄, 아테네는 증원군(기병 250명, 기마 궁수 30명, 은 300 탈란트)을 파견하여 시켈리아 동맹군으로부터 기병 400명을 고용했다. 여름에는 에피폴라이에 상륙하여 시라쿠사 군을 격파했다. 이후 양측은 벽 건설 경쟁을 벌였는데, 아테네는 시라쿠사를 봉쇄하기 위한 '원' 모양의 포위벽을, 시라쿠사는 도시 방어를 위한 여러 개의 반대 벽을 건설했다. 전투 중 라마쿠스가 전사하여 니키아스만 남게 되었지만, 아테네는 결국 시라쿠사를 육지와 바다에서 완전히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시라쿠사는 장군들을 교체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4. 5. 스파르타의 개입과 전황 악화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스파르타길리포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시라쿠사에 파견했다. 길리포스는 히메라(현재의 테르미니 이메레제 동쪽 12km)에 상륙하여 해병 700명, 호플리테스 1,000명, 기병 100기와 시켈리아 병력 1,000명을 이끌고 시라쿠사로 향했다.[41]

공성 보루와 대응 성벽을 보여주는 지도


아테네 군은 에피폴라이 고원에 라부다론 성채인 ‘원형 성채’를 건설하고, 공성 보루를 쌓아 시라쿠사를 봉쇄하려 했다. 시라쿠사 역시 대응 성벽을 건설하여 아테네 군의 봉쇄를 저지하려 했다. 처음에는 아테네 군이 대응 성벽 일부를 파괴했지만, 시라쿠사 군은 도랑을 포함한 새로운 대응 성벽을 건설하여 아테네 군의 공성 보루 확장을 저지했다. 아테네 군은 재차 대응 성벽을 공격하여 점령했지만, 라마코스가 전사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길리포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군은 에피폴라이 고원에 대응 성벽을 건설하려 했으나 처음에는 아테네 군에게 격퇴당했다.[41] 그러나 두 번째 전투에서 기병과 투창병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아테네 군을 격퇴하고, 시라쿠사 군은 대응 성벽을 완성하여 아테네 군의 공성 보루를 무력화시켰다.[41] 이후 코린토스 함대도 시라쿠사에 합류했다.

니키아스는 건강이 악화되고 전황이 불리해지자, 아테네에 서한을 보내 철수 또는 증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그는 전군 철수가 어렵다면 자신만이라도 해임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아테네는 데모스테네스와 에우리메돈이 이끄는 증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4. 6. 데모스테네스의 증원과 마지막 전투

데모스테네스에우리메돈은 73척의 배와 5,000명의 중장보병을 이끌고 시켈리아에 도착했다. 아테네 함대가 도착하자, 시라쿠사 해군 80척이 항만에서 이들을 공격했다. 해전은 이틀 동안 이어졌지만, 결정적인 결과는 없었다. 시라쿠사 함대는 퇴각하는 척하다가 아테네 함대가 식사하는 틈을 타 기습했지만, 7척을 침몰시키는 데 그쳤다.[42]

데모스테네스는 상륙하여 에피폴라이 고원에 있는 시라쿠사 군의 방벽을 야간에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방벽을 파괴하는 데 성공했지만, 스파르타 군의 보이오티아 병력에 의해 격퇴당했다. 많은 아테네 병사들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고, 도주한 나머지 병사들도 일부 죽었다.[42] 아테네 군 야영지는 습지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고, 니키아스를 포함한 많은 병사들이 질병에 시달렸다.[42] 이를 본 데모스테네스는 아티카를 보호하기 위해 아테네로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니키아스는 시라쿠사의 자금 고갈과 친 아테네 세력의 반란을 기대하며 철수를 반대했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증원군이 도착한 이후, 니키아스도 철수에 동의했다.[42]

8월 28일 월식이 일어나자, 미신을 믿던 니키아스는 신관들에게 조언을 구했고, 신관들은 27일을 더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89] 시라쿠사이는 이 기회를 틈타 아테네 해군을 공격하여 에우리메돈을 전사시켰다. 아테네 군은 시라쿠사 항만에 갇히게 되었다.[89][42]

9월 9일 벌어진 마지막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는 데모스테네스, 메난드로스, 에우티데모스가 이끌었고, 시라쿠사 함대는 시카누스, 아가토클레스가 양 날개를, 중앙을 코린토스의 피텐이 이끌었다.[42] 양측 모두 100척 정도의 전력이었다. 아테네 함대는 좁은 공간에서 기동에 어려움을 겪었고, 시라쿠사 함대의 충각 공격에 취약했다. 시라쿠사 함대는 갑판을 짐승 가죽으로 덮어 아테네 군의 갈고리를 튕겨냈다. 결국 시라쿠사 함대가 아테네 함대를 해안으로 몰아넣었고, 아테네군은 배를 버리고 도망쳤다. 양측 모두 절반가량의 배를 잃었다.[42]

시켈리아의 아테네 해군


데모스테네스는 재차 돌파를 시도하려 했으나, 병사들은 두려움에 승선을 거부하고 육로로 탈출하기로 했다. 헤르모크라테스는 아테네 군에 허위 정보를 흘려 탈출을 지연시켰고, 그 사이 귈리포스는 도로를 봉쇄했다. 시라쿠사 군은 해안에 있던 아테네 배를 불태워, 아테네 군은 내륙으로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42]

4. 7. 아테네 군의 패주와 전멸

8월 28일 월식이 일어나자, 미신을 깊이 신봉하던 니키아스는 신관들의 조언에 따라 27일을 더 기다렸다.[89] 시라쿠사이는 이 기회를 틈타 76척의 배로 아테네 해군 86척을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에우리메돈이 전사했다. 9월 3일 시라쿠사이는 만 입구를 완전히 봉쇄했고, 9월 9일 벌어진 마지막 해전에서 아테네 함대는 대패했다. 데모스테네스는 재돌파를 제안했으나, 병사들이 두려워 승선을 거부하여 육로로 탈출하기로 했다. 헤르모크라테스의 계략으로 탈출이 지연되는 사이, 길리포스는 도로를 봉쇄했고, 시라쿠사 군은 아테네 선박을 불태웠다.[43]

9월 13일 아테네 군은 부상병과 시신을 남겨둔 채 야영지를 떠났다. 비전투원을 포함한 40,000명의 생존자들은 아나푸스 강에서 소규모 시라쿠사 군을 격파했지만, 시라쿠사 기병과 경보병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았다. 에리네우스 강 근처에서 데모스테네스는 시라쿠사 군에게 공격받아 6,000명의 병력과 함께 항복했다. 니키아스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아시나루스 강으로 향했지만, 식수를 구하려는 혼란 속에서 많은 병사들이 짓밟히거나 서로 싸우다 죽었다. 강 건너편에서 기다리던 시라쿠사 군은 아테네 군을 학살했고, 이는 원정 최대의 패배였다. 니키아스는 기원전 421년의 평화 조약에서 자신의 역할을 기억해 줄 것을 기대하며 길리포스에게 항복했다. 소수만이 카타나에 도착했다.

7,000명에 달하는 포로들은 시라쿠사 인근 채석장에 갇혔다. 길리포스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데모스테네스니키아스는 처형되었다.[43] 나머지 포로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10주 동안 방치되었고, 아테네 인을 제외하고는 노예로 팔렸다. 아테네 인들은 채석장에서 질병과 기아로 서서히 죽어갔으며, 소수의 생존자들만이 아테네로 돌아가 이 비극을 전했다.

시라쿠사에서 아테네 군의 패주 경로

5. 원정 실패의 원인과 영향

일부 역사가들은 시켈리아 원정이 시작부터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테네의 시켈리아 정복 시도는 오만함의 한 예라고 말한다.[43]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전략적으로 계획 자체에 본질적인 문제는 없었으며, 아테네 지도부가 일련의 잘못된 전술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3] J. B. 버리는 원정의 치명적인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알키비아데스의 소환으로 악화된 니키아스의 무능함이라고 평가했다.[43]

시켈리아 원정의 대실패는 아테네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처음 아테네 시민들은 패배 소식을 믿지 않았으며,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 《니키아스전》에서 이 소식이 전해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피레아스를 방문한 한 여행자가 이발소에서 패배 소식을 전했고, 이를 들은 이발사가 아르콘에게 알리면서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소식을 가져온 이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해, 거짓 정보를 퍼뜨린 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처했다.

시켈리아에서 아테네 군대의 파괴


패전의 규모가 명확해지자 아테네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데켈레아를 점령한 스파르타 군대가 아티카를 점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 패배는 다른 도시 국가들의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립을 지키던 국가들은 스파르타 편에 가담했고, 델로스 동맹의 많은 동맹국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아테네는 함대 재건을 시작했지만, 동맹 도시들의 이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약 10,000명의 중장보병 손실도 컸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켈리아에 파견된 대함대의 손실이었다. 삼단노선은 다시 건조할 수 있었지만, 30,000명에 달하는 숙련된 노잡이들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아테네는 훈련되지 않은 노예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11년 아테네에서는 과두정이 들어섰고, 페르시아 제국이 스파르타 편에 서서 참전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테네는 몇 년 동안 회복세를 보였고, 과두정이 중단되었으며, 키노스세마 해전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의 종말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결국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점령당했다.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테네에게 이 원정은 "전염병만큼 고통스러운 인적 재앙이자 정치적 재앙"이었으며, 도시의 전쟁 노력과 동맹국에 대한 패권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스파르타는 이 약점을 이용하여 다음 몇 년 동안 경쟁자에 대한 압박을 크게 높였지만, 전략적 돌파구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반면에, 아테네와 함께 싸웠던 에트루리아인들은 이 분쟁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예를 들어, 타르퀴니아의 스푸리나 가문은 수세기 동안 시켈리아 원정에 참여했던 것을 기렸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아테네의 패배는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아테네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5. 1. 실패 원인

일부 역사가들은 시켈리아 원정이 시작부터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테네의 시켈리아 정복 시도는 오만함의 한 예라고 말한다.[43]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전략적으로 계획 자체에 본질적인 문제는 없었으며, 아테네 지도부가 일련의 잘못된 전술적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면 성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43] J. B. 버리는 원정의 치명적인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알키비아데스의 소환으로 악화된 니키아스의 무능함이라고 평가했다.[43]

5. 2. 아테네에 미친 영향

시켈리아 원정의 대실패는 아테네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처음 아테네 시민들은 패배 소식을 믿지 않았으며,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저서 《니키아스전》에서 이 소식이 전해진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피레아스를 방문한 한 여행자가 이발소에서 패배 소식을 전했고, 이를 들은 이발사가 아르콘에게 알리면서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소식을 가져온 이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하지 못해, 거짓 정보를 퍼뜨린 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처했다.

패전의 규모가 명확해지자 아테네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데켈레아를 점령한 스파르타 군대가 아티카를 점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다.

이 패배는 다른 도시 국가들의 정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중립을 지키던 국가들은 스파르타 편에 가담했고, 델로스 동맹의 많은 동맹국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아테네는 함대 재건을 시작했지만, 동맹 도시들의 이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약 10,000명의 중장보병 손실도 컸지만, 가장 큰 문제는 시켈리아에 파견된 대함대의 손실이었다. 삼단노선은 다시 건조할 수 있었지만, 30,000명에 달하는 숙련된 노잡이들을 대체하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아테네는 훈련되지 않은 노예들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411년 아테네에서는 과두정이 들어섰고, 페르시아 제국이 스파르타 편에 서서 참전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아테네는 몇 년 동안 회복세를 보였고, 과두정이 중단되었으며, 키노스세마 해전에서 승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는 아테네의 종말을 알리는 시작이었다. 결국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점령당했다.

5. 3.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미친 영향

시켈리아 원정의 실패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아테네에게 이 원정은 "전염병만큼 고통스러운 인적 재앙이자 정치적 재앙"이었으며, 도시의 전쟁 노력과 동맹국에 대한 패권을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스파르타는 이 약점을 이용하여 다음 몇 년 동안 경쟁자에 대한 압박을 크게 높였지만, 전략적 돌파구를 마련하지는 못했다. 반면에, 아테네와 함께 싸웠던 에트루리아인들은 이 분쟁에서의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다. 예를 들어, 타르퀴니아의 스푸리나 가문은 수세기 동안 시켈리아 원정에 참여했던 것을 기렸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아테네의 패배는 스파르타와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며, 아테네의 패망으로 이어졌다.

6. 역사적 평가와 교훈

존 플레처는 2005년 12월 BBC 라디오 3에서 90분짜리 라디오 드라마 "시켈리아 원정 - 고대 아테네 전쟁 드라마, 이라크 전쟁과 함께"를 방송했다. 이 드라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특히 시켈리아 원정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플레처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 개입과 아테네의 시켈리아 침공 사이에 유사점을 암시하며, 두 사건 모두 국외와 국내에서 재앙을 초래했다고 주장한다.[44]

메리 르노의 소설 마지막 포도주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는 원정 실패 후 시라쿠사의 채석장에 갇혔다가 돌아온다. 해리 터틀도브의 단편 소설 "악마"(아틀란티스와 다른 장소들에 수록)는 알키비아데스소크라테스의 조언 덕분에 원정군과 함께 남아 아테네가 시라쿠스를 점령하고 스파르타를 습격하는 대체 역사 시나리오를 다룬다.

시켈리아 원정은 민주정의 한계와 맹목적인 군사적 팽창주의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으며,지도자의 자질과 역할, 전략적 판단의 중요성, 그리고 전쟁의 비극성에 대한 교훈을 남겼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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