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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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옥진은 원나라 말기 쓰촨성 충칭에서 출생하여 홍건적의 난에 참여, 1361년 충칭을 수도로 명하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한 인물이다. 그는 1351년 홍건적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웠고, 서수휘의 천완 홍건군에 합류하여 통군 원수로 임명되었다. 이후 사천 지역을 평정하고, 1360년 진우량이 서수휘를 살해하자 독립하여 농촉왕을 칭했다. 1363년 대하를 건국하고 내정을 정비하며 주원장과 우호 관계를 맺었으나, 1366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후 아들 명승이 황위를 계승했으나, 명하는 1371년 명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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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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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명옥진 (明玉珍) |
묘호 | 태조 (太祖) |
시호 | 흠문소무황제 (欽文昭武皇帝) |
시대 | 명하 |
신상 정보 | |
출생일 | 1328년 10월 2일 (원나라 천력(天曆) 2년 9월 9일) |
사망일 | 1366년 3월 17일 (원나라 지정(至正) 26년 2월 6일) |
아버지 | 명학문 (明學文) |
어머니 | 조씨 (趙氏) |
배우자 | 팽황후 (彭皇后) |
자녀 | 명승 |
매장지 | 예릉 (叡陵; 현재 충칭시 장베이구 상헝가(上橫街)에 위치) |
즉위 정보 | |
작위 | 명하 황제 |
재위 기간 | 1362년 ~ 1366년 |
이전 | 없음 |
이후 | 명승 |
통치 | |
연호 | 천계 (天啟): 1361년 ~ 1362년 (서송의 연호 사용) 천통 (天統): 1363년 ~ 1366년 |
기타 정보 | |
가문 | 명씨 |
2. 생애
1361년 12월 19일, 명옥진은 충칭을 수도로 명하(明夏)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했다.[9] 1362년 1월 16일에는 외아들 명승을 황태자로 책봉했다.[9]
명옥진은 검소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겸손한 성품이었다. 황제가 된 후에도 참모 유정의 건의에 따라 내정을 추진했는데, 주 왕조를 본받아 육경을 설치하고 교육 및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9] 군사적으로는 만승, 추흥 등에게 명하여 운남, 파주, 흥원 등지를 공격하게 했다.[9]
당시 강남 지역을 장악하려던 주원장에게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9] 주원장은 답신에서 삼국 시대처럼 명옥진과 자신이 힘을 합쳐 북쪽의 원나라에 대항하자고 제안했고, 이후 두 세력은 지속적으로 교류했다.[9]
1366년 봄, 명옥진은 38세(만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황태자 명승이 황위를 계승했고, 명옥진은 충칭 북쪽 보개산의 예릉(현재의 충칭시 강북구)에 안장되었다.[9]
2. 1. 초기 생애와 홍건적 가담
원나라 쓰촨 성 충칭에서 출생하여 지난날 한때 원나라 후베이 성 쑤이저우와 원나라 산시 성 옌안을 거쳐 원나라 쓰촨 성 청두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9] 1353년 홍건적이 일어나자 곽자흥(郭子興) 장군의 휘하 병졸로 가담하여 원나라에 항거하였다.[9]지정 11년(1351년) 서수휘가 무장 봉기하자, 명옥진은 인근의 1000명 정도를 모아 자위단을 결성하고 청산에 주둔했다.[9] 그러나 서수휘는 천완국의 황제를 칭하며 명옥진에게 합류를 강요했고, 명옥진은 이에 항복하여 통군 원수로 임명되어 면양을 지켰다.[9] 이 시기에 원나라 장수 합마돌과의 전투에서 화살이 오른쪽 눈에 맞아 실명했다.[9]
2. 2. 쓰촨 평정과 독립
1351년 홍건의 난이 일어나 서수휘가 무장 봉기하자, 명옥진은 인근의 1000명 정도를 모아 자위단을 결성하고 청산에 주둔했다. 그러나 곧 서수휘는 천완국의 황제를 칭하고 명옥진에게 "합류할 것인가, 죽을 것인가"를 강요했다. 이에 명옥진은 서수휘의 천완 홍건군에 항복하여 통군 원수로 임명되어 면양을 지켰다. 이 시기에 원나라 장수 합마돌과의 전투에서 화살이 오른쪽 눈에 맞아 실명했다.[9]이후 명령을 받아 서쪽으로 정벌하여, 무협을 경유하여 쓰촨에 진입, 원나라 장수 합마돌, 완자도 등을 격파하고 중경을 점령했다. 태평 2년(1357년), 서수휘는 명옥진을 농촉행성 우승으로 임명하여 이 지역을 맡겼다. 점령 후 각지에 토벌군을 보내 현지의 원군을 격파하고 쓰촨 지역을 대략 평정했다.[9]
천정 2년(1360년)에 서수휘의 부장이었던 진우량이 서수휘를 살해하고 황제를 칭하자, 명옥진은 분노하여 병사들에게 명하여 무창의 동쪽에 있는 구당협을 막아 진우량과 단절하고, 성의 남쪽 구석에 서수휘의 묘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서수휘의 죽음으로 자립해야만 했던 명옥진은 농촉왕을 칭했다. 참모로는 원나라의 진사 출신으로 하급 관료였던 유정을 초빙했다.[9]
지정 23년(1363년) 봄, 유정의 헌책을 받은 명옥진은 중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하, 연호를 천통으로 했다.[9]
2. 3. 명하 건국과 통치
1361년 12월 19일, 명옥진은 충칭을 수도로 명하(明夏)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했다.[9] 이듬해인 1362년 1월 16일에는 외아들 명승을 황태자로 책봉했다.[9]명옥진은 검소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겸손한 성품이었다. 황제가 된 후에도 참모 유정의 건의에 따라 내정을 추진했는데, 주 왕조를 본받아 육경을 설치하고 교육 및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9] 군사적으로는 만승, 추흥 등에게 명하여 운남, 파주, 흥원 등지를 공격하게 했다.[9]
당시 강남 지역을 장악하려던 주원장에게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를 맺었다.[9] 주원장은 답신에서 삼국 시대처럼 명옥진과 자신이 힘을 합쳐 북쪽의 원나라에 대항하자고 제안했고, 이후 두 세력은 지속적으로 교류했다.[9]
1363년 봄, 유정의 건의를 받아들여 명옥진은 중경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하, 연호를 천통으로 정했다.[9]
1366년 봄, 명옥진은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황태자 명승이 황위를 계승했고, 명옥진은 중경 북쪽 보개산의 예릉(현재의 중경시 강북구)에 안장되었다.[9]
2. 4. 죽음과 명하의 멸망
1366년 명옥진이 붕어하자 11세의 황태자 명승이 보위를 이어 명하 제국 제2대 군주로 등극하였으며 팽태후(彭太后, 1338년 ~ 1404년)가 섭정을 하였다.[1] 5년 후인 1371년에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에게 명하 제국이 멸망하였다.[1] 팽태후와 아들 명승은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선처로 1372년 5월 29일 고려에 귀순하였다.[1]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창건되자 이들은 1392년 8월 30일 조선에 재귀순하였다.[1]3. 사후
명옥진이 1366년에 붕어하자 11세의 황태자 명승이 명하 제국 제2대 군주로 등극하였으며, 팽태후(1338년 ~ 1404년)가 섭정을 하였다. 하지만 5년 후 1371년에 명 태조 홍무제 주원장에게 명하 제국이 멸망하였다. 33세의 팽태후와 16세의 아들 명승은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의 선처로 1372년 5월 29일에 고려에 귀순하였다. 1392년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창건되자, 이들 모자는 1392년 8월 30일에 조선에 재귀순하였다.[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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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Adopted the era name of the Xu Shou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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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重慶市概要-在重慶日本国総領事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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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明玉珍素無遠略、然性節倹、頗好学、折節下士」(『明史』巻一百二十三 列伝第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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