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이 겐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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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라이 겐사이(1856-1927)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활동한 일본의 언론인이자 소설가이다. 미카와국 출신으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도쿄 외국어학교를 중퇴한 후 러시아어 번역 및 저술 활동을 했으며,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이후 신문과 잡지 현상 논문에 입상하고 미국 여행을 다녀온 후, 우편보치 신문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소설가로서 『소설가』, 『고양이』, 『히노데지마』 등을 발표했으며, 특히 1903년 호치 신문에 연재된 『식도락』은 그의 대표작으로, 요리 만화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말년에는 자연식과 단식을 실천하며 괴인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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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이 겐사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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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무라이 겐사이 (村井弦斎) |
본명 | 무라이 도미사부로 (村井富三郎) |
다른 이름 | 겐사이 (弦斎), 시오자키 산시 (塩崎三世), 간도샤 (頑道舎) |
직업 | 신문 기자, 소설가 |
출생 및 사망 | |
출생 | 1863년 1월 3일, 일본 미에현 |
사망 | 1927년 6월 20일 (향년 64세) |
활동 정보 | |
장르 | 소설, 평론 |
대표작 | 《식도락》 |
가족 | |
배우자 | 무라이 미치요 (村井美知代) |
자녀 | 무라이 마사시 (村井正視)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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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무라이 겐사이는 미카와요시다 번의 무가 출신으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아버지의 결정으로 서양학을 배우기 위해 1872년 상경했다. 영재 교육을 받고 도쿄 외국어학교를 중퇴한 후 우울증을 겪었으나, 회복 후 언론인, 작가, 편집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1903년 『식도락』을 발표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식육 개념을 알렸다. 1904년부터 가나가와현히라쓰카시에서 미식 생활을 하다가, 만년에는 현미식과 자연식을 실천하여 괴인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사후 그의 자택은 고노 이치로와 고다이라 나미헤이에게 매각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미카와요시다 번의 무가(武家) 출신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 모두 유학자로서 번에 봉사하며 한학에 능통한 집안이었다. 아버지 무라이 키요는 저술가로서 『방훈주석 서양천자문』 등 여러 권의 책을 출판했으며, 시부사와 에이이치 아들의 가정교사를 맡을 정도로 교양인이었다. 조카는 작곡가 고 테이지로이다.아버지 무라이 키요는 메이지 유신 이후 사회 신분 변동을 목격하고 "아들에게 한학뿐만 아니라 서양학도 일찍부터 배우게 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1872년 일가족을 이끌고 상경하여 9살의 겐사이에게 집안의 미래를 맡겼다.
겐사이는 어릴 때부터 러시아어 가정교사에게 배우거나 한학 서당에 다니는 등 조기 영재 교육을 받았다. 1873년 도쿄 외국어학교 (현 도쿄 외국어대학교)가 개교했을 때, 입학 자격이 13세 이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2세에 시험을 보고 입학했다. 맹렬한 공부로 수석을 차지했지만 건강을 해쳐 1881년에 러시아어과를 중퇴했다. 이후 러시아어 번역 및 저술로 생계를 꾸렸다. 그러나 가정 교육과 맹렬한 공부 등이 겹쳐 우울증 경향 등의 신경성 질환을 앓아 잠시 요양했다. 병이 나은 후 신문, 잡지 현상 논문에 응모하여 마이니치 신문에 응모한 논문이 3등에 입선한 외에 몇몇 논문이 활자화되었다. 영자 신문의 논문 모집에 입선하여 미국 여행 현상을 얻었다. 20세에 도미하여 미국에서는 러시아계 이민자 집에 기거하며 영어를 배우고, 일하면서 사회 제도를 배웠다. 미국 체류 중에 호치 신문 사장 야노 류케이와 알게 되었다[1]。
2. 2. 언론인 및 작가 활동
1887년 귀국 후, 우편보치 신문 객원이 되었고, 1890년 우편보치 신문 정사원이 되었으며, 1895년 동 편집장이 되었다. 지즈카 레이스이, 하라 호이치안, 무라카미 로로쿠와 함께 "보치의 사천왕"이라고 불렸다[2]。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저술가로서 활약했다.1887년에는 도쿄 전문학교(후의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문학의 길을 걷는다. 『소설가』 (1890년~91년)로 인정받아, 현대 소설에서 미래 전쟁 소설이 된 『고양이』 (1891년~92년)로 소설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으며, 발명 소설 『히노데지마』 (1896년~1901년)로 그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이 무렵 미래 전기의 정치 소설, 발명 소설을 발표하여 "SF 소설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한다[3]。
대표작은 호치 신문에 1903년(메이지 36년) 1월부터 12월까지 연재된 『백도락 시리즈』로, 『주도락』, 『조어도락』, 『여도락』, 『식도락』이 집필되었다. 그 외에도 당구 도락, 연극 도락, 바둑 도락 등 구상은 있었지만, 집필한 것은 4작품뿐이다. 이들 작품은 식도락과 같은 도락에 정신을 빼앗기는 유흥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러한 도락을 삼가고, 음주의 건강 피해를 이야기하며, 정처 이외에 애인을 두는 옛 악습을 규탄하는 교훈·계몽 소설이다. 그 중 『식도락』은 메이지 시대 도쿠토미 로카의 『귀거래』와 더불어 가장 많이 읽혔으며, 소설이면서 그 내용 곳곳에 600종 이상의 사계절 요리 및 식재료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또한, "어린이에게는 덕육보다, 지육보다, 체육보다, 식육이 먼저다. 체육, 덕육의 근본도 식육에 있다."라고 식육이라는 용어를 기술했다. 속편도 쓰여졌지만, 정편만큼의 반향은 없었다.
1906년 『부인세계』 편집 고문이 되어, 처음으로 요리법, 의료법 등의 실용 기사를 많이 도입하여, 현재의 여성 잡지의 원형을 만들었다.
2. 3. 《식도락》과 식문화 기여
1903년 1월부터 12월까지 호치 신문에 연재된 『백도락 시리즈』는 『주도락』, 『조어도락』, 『여도락』, 식도락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식도락』은 메이지 시대에 도쿠토미 로카의 『귀거래』와 함께 가장 많이 읽힌 작품 중 하나였다.[3]『식도락』은 단순한 소설을 넘어, 600종 이상의 사계절 요리와 식재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어린이에게는 덕육보다, 지육보다, 체육보다, 식육이 먼저다. 체육, 덕육의 근본도 식육에 있다."라고 식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식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무라이 겐사이는 『식도락』의 인세로 가나가와현히라쓰카시의 히라쓰카역 남쪽에 저택을 짓고, 밭과 과수원, 온실, 가축 사육 시설 등을 갖춰 신선한 식재료를 자급자족했다. 딸기와 아스파라거스 등 당시에는 드물었던 작물도 재배했다. 각계의 유명 인사를 초대하고, 유명 요리사나 식품 회사의 시제품을 받는 등 미식의 전당으로 불리는 생활을 했다.[1]
하지만, 『식도락』 시리즈를 끝낸 후 절필하고 호치 신문도 사직했다. 이후 각기병 치료를 위해 현미식 연구에 몰두하고, 단식과 자연식을 실천하며,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만 먹고 생활하여 괴인이나 변인으로 취급받기도 했다.[2]
2. 4. 만년과 죽음
1906년 『부인세계』 편집 고문이 되어, 요리법, 의료법 등의 실용 기사를 처음으로 많이 도입하여 현재의 여성 잡지의 원형을 만들었다.190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가나가와현히라쓰카시의 히라쓰카역 남쪽에 거주했다. 『식도락』의 인세로 저택의 광대한 부지에 일본식·서양식 채소밭, 감, 비파, 무화과 등의 과수원, 온실, 닭, 염소, 토끼 등의 사육 시설, 그리고 마구간을 지어 신선한 식재료를 자급했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딸기와 아스파라거스 재배까지 했다. 또한 각계의 유명 인사를 초대하거나, 유명 요리사나 식품 회사의 시제품 등이 배달되는 등 미식의 전당으로 불리는 우아한 생활을 영위했다. 다만, 그는 일련의 『식도락』 시리즈를 종료한 후 절필하고, 호치 신문마저 사직해 버렸다. 그 후, 각기병 치료를 위해 현미식 연구에 몰두했으며, 단식, 자연식을 실천했다. 또한, 스스로 수혈 건축물에 살면서, 살아있는 벌레 등 가공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것만 먹고 생활하여, 괴인, 변인 취급을 받았다. 본인의 사후, 자택 일부는 동쪽은 고노 이치로에게, 서쪽은 고다이라 나미헤이에게 매각되었다.
3. 가족
이름 | 설명 |
---|---|
무라이 다카코(1880년 - 1960년) | 겐사이의 아내. 『겐사이 부인의 요리담』 등의 저서가 있다[4]。 |
무라이 요네코(1901년 - 1986년) | 겐사이의 장녀. |
4. 유산과 평가
2000년부터 매년 가을, 히라쓰카시의 무라이 겐사이 거주지(무라이 겐사이 공원)에서 "무라이 겐사이 축제"가 열리고 있다.
4. 1. 무라이 겐사이 축제
2000년 이후 매년 가을, 현재의 거주지(무라이 겐사이 공원)에서 "무라이 겐사이 축제"가 개최되고 있다.5. 주요 저서
제목 | 출판사 | 출간 연도 | 비고 |
---|---|---|---|
주도락(酒道楽) | 신인물왕래사 | 1977년 | (상, 하), 무라이 요네코 편 |
조도락(釣道楽) | 신인물왕래사 | 1977년 | (상, 하) |
정본 식도락(定本食道楽) | 신인물왕래사 | 1978년 | 상 - 봄의 권, 여름의 권 / 하 - 가을의 권, 겨울의 권, 무라이 요네코 편 |
부엌 보물기(台所重宝記) | 헤이본샤 라이브러리 | 2001년 | 무라이 요네코 편역 |
식도락의 헌립(食道楽の献立) | 카도카와 하루키 사무소 | 1997년 | (랑티에 총서) |
식도락(食道楽) | 이와나미 문고 | 2005년 | (상, 하) |
주도락(酒道楽) | 이와나미 문고 | 2006년 | |
부엌 보물기(台所重宝記) | 주오코론신샤 문고 | 2017년 8월 | 무라이 요네코 편역 |
식도락(食道楽) | 주오코론신샤 문고 | 2018년 9월 | 무라이 요네코 편역 |
6. 연구서
쿠로이와 히사코의 《「식도락」의 인물 무라이 겐사이》(이와나미 쇼텐, 2004년)가 있다.
7. 겐사이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 히자카 마사시의 소설 『미식 탐정』(고단샤 문고, 2003년, ISBN 4062738252)에서 무라이 겐사이를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다.
- * 2008년 12월 카도카와 문고에서 신판(ISBN 4043919034)이 간행되었다.
참조
[1]
서적
百年前の二十世紀
ちくまプリマーブックス
[2]
서적
日本SF精神史 完全版
河出書房新社
[3]
서적
新・日本SFこてん古典
徳間文庫
[4]
간행물
「食道楽」の家系 村井弦斎、多嘉子、米子の著作
https://www.lib.city[...]
神奈川県平塚市北図書館
202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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