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노 류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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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노 류케이는 1850년 오이타현에서 태어나 게이오기주쿠를 졸업하고, 자유민권운동과 입헌개진당 결성에 참여했다. 그는 1890년 궁내성 관료가 되었고, 1897년부터 1899년까지 청나라 주재 일본 공사를 역임했다. 정치소설 《경국미담》을 저술하고, 번역서 독법을 다룬 《역서독법》을 출간하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또한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저술과 강연을 하였으며, 언론 및 출판 분야에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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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류케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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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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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851년 1월 2일 |
사망일 | 1931년 6월 18일 |
출생지 | 분고국 |
사망지 | 도쿄부 |
학력 | 게이오기주쿠 오사카 게이오기주쿠 도쿠시마 게이오기주쿠 (현 게이오기주쿠 대학) |
직업 | 궁내성식부관 |
소속 정당 | (동양의정회 →) 입헌개진당 |
칭호 및 훈장 | 정4위 |
전 직책 | 궁내성식부관 |
정치 경력 | |
재임 기간 | 1897년 ~ 1899년 |
직책 | [[파일:Flag of the Qing Dynasty (1889-1912).svg|25px]] 청나라주차특명전권공사 |
내각 | 제2차 마쓰카타 내각 제3차 이토 내각 |
2. 생애
2. 1. 출생과 성장 배경
분고국 (현재의 오이타현) 사에키번에서 번사 야노 미쓰요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라 봉행, 마치 봉행, 군 봉행을 역임했다.소년 시절 번교인 시카쿄에 다니며 양이론이 일어났을 때 철포소에 들어가 철포술 면허를 받았다. 조부로부터 유교적 훈련과 정치적 소질을, 아버지로부터는 『로빈슨 크루소』를 읽는 등 서양 지식을 배웠다. 히로세 탄소의 고제자인 아키즈키 깃몬 및 호아시 반리에게 배우며 번주로부터 주목받았다.
1868년 도바-후시미 전투 때는 번주를 따라 교토로 올라가 조정 친병 분대장으로서 궁궐 어문 경호를 담당했고, 이후 귀번하여 청년조 영수로 활약했다. 메이지 유신 후, 아버지가 가쓰시카현 대참사로 임명되어 일가는 상경, 다구치 코손에게 고학파 한학을 배웠다. 아버지는 폐번치현과 함께 오카야마 후카쓰현 지사가 되었다.
2. 2. 게이오기주쿠 수학과 관료 생활
1871년 (메이지 4년)에 게이오기주쿠에 입학하여 영미의 헌법사를 연구하고, 1873년 (메이지 6년)에 졸업하여 강사가 되었다.[1] 동창으로는 바바 타츠이, 와다 요시로, 모리시타 이와쿠스, 이카이 아사지로 등이 있다.[1] 또한 이 해에 사에키 번사 사쿠마 마모루의 차녀 레츠와 결혼했다.[1] 1874년 (메이지 7년)에 「상업에 고함」을 게이오기주쿠의 기관지인 『민간잡지』에 발표하고, 『서양 위인 언행록』을 출판했다.[1] 1876년 (메이지 9년)에 게이오기주쿠의 오사카 분교 교장, 1877년 (메이지 10년)에는 도쿠시마 분교 교장으로 선발되어 문학가 모리타 시켄이나 후에 맹우가 되는 오자키 유키오와 이누카이 쓰요시 등과 교류하며 영미의 정치 제도를 연구했다.[1] 민권의 신장과 입헌 체제의 수립이라는 뜻을 세우고, 『호치 신문』에 평론을 보내기 시작했다.[1]1879년 (메이지 12년)에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으로 우시바 타쿠조, 이누카이 쓰요시, 오자키 유키오와 함께 관료로서 정부에 들어가 통계원의 태정관에서 내무 권대서기관을 거쳐 대장성에 입성했다.[1] 대장 서기관, 이어서 회계 검사국원으로 근무하며 종6위에 서위되었다.[1] 사사헌법이 논의되기 시작하자 교순사 창설에도 참여하여 상임의원이 되었다.[1] 1880년 (메이지 13년)에는 오바타 아쓰지로 등과 사사헌법을 기초하여 헌정의 수립을 설파한 『삼세론』은 이듬해 오쿠마 시게노부에 의해 주상되었다.[1] 1881년 (메이지 14년)에는 오쿠마와 함께 『우편호치신문』을 인수하고, 같은 해 1월에 『우편호치신문사』 사장에 취임했다.[1] 그러나 이노우에 쓰요시로부터 메이지 14년의 정변으로 정계에서 물러났다.[1]
2. 3. 언론 활동과 자유민권운동
1882년 유빈호치 신문(郵便報知新聞)의 사장에 취임했으며, 1884년부터 1886년까지 유럽, 미국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귀국한 뒤, 신문의 대중화를 내걸고 일대 개역을 단행했다. 1924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 부사장을 역임했다.같은 해 동양의정회를 이끌고 입헌개진당에 참가했다. 당 운영 등으로 과로하여 병상에 눕게 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국민을 고무하고 헌정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는 정치 소설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고대 그리스의 테베 흥망을 소재로 한 『경국미담』의 전편이 1883년에 발표되자 큰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전편·제11회 『봄의 꽃』은 자유민권운동가들에게 애창되었다. 마쓰바야시 하쿠엔이나 가와카미 오토지로가 강담으로 연기했다고 전해진다. 자유민권운동이 고조되던 1884년 2월에 후편이 출판되었다.
이후 신문 사업 시찰을 위해 유럽으로 떠나, 홍콩을 경유하여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독일, 미국 등을 1886년에 걸쳐 방문했고, 클레망소, 레셉스 등과도 회견했다. 이 과정에서 정치, 문화, 과학 기술, 상업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였고, 『주유잡기』 등에 발표했다.
귀국 후에는 『유빈호치 신문』의 개혁을 위해 구독료 인하, 기사 충실화, 문체의 평이화, 배달의 신속화를 추진하고, 동생 오구리 사다오와 미키 젠파치를 기용했다. 야노는 추대되어 구리모토의 차석 격으로 자리 잡았고, 사장 격에는 구리모토 조운이 있었다. 편집장에는 게이오기주쿠 출신의 후지타 시게키치가 있었다.
2. 4. 정치 활동과 입헌개진당
야노 류케이는 오이타현인 분고국 사이키번(佐伯藩)에서 태어나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을 졸업했다. 1878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를 보좌했고, 1881년 정변으로 오쿠마가 하야한 뒤 1882년 입헌개진당 결성에 참여했다. 1882년과 1884년에는 자유민권운동을 주장하는 책을 썼다.1890년 일본 제국의회 개원 직후 궁내성 관료가 되었으며, 메이지 천황의 시종으로 참례했다. 1897년부터 1899년까지는 당시의 외무대신 오쿠마 휘하에서 청나라 주재 일본 공사를 맡아 청일 전쟁 후 청국 외채 차입 문제를 처리했다. 이 공로로 훈3등욱일중수장을 받았다.
재임 중 이홍장과의 친분으로 1896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청국 유학생을 받아들였고, 1900년과 1901년에는 관련 규정이 발부되어 일본 유학의 길이 열렸다. 과거 야노는 해군 확장의 급무를 설파했고, 1887년에는 북진론으로 이어지는 동양 전략을 언급하기도 했다.
2. 5. 유럽 및 미국 시찰
2. 6. 청나라 주재 공사
1897년(메이지 30년) 외무대신이었던 오쿠마 시게노부의 요청으로 청국 특명 전권 공사에 취임하여 2년간 베이징에 체류하였다. 청일 전쟁 후 청국 외채 차입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홍장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공로로 훈3등욱일중수장을 받았다.1896년(메이지 29년)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청국 유학생을 받아들였는데, 이는 청조 정부가 선발한 13명의 관비 유학생이었다. 1898년(메이지 31년)에는 주청국 전권 대사로서 청국 정부에 지속적인 유학생 파견을 설득했다. 그 결과, 1900년(메이지 33년) 「문부성 직할 학교 외국 위탁생에 관한 규정」, 1901년(메이지 34년) 문부성령 제15호 「직할 학교 외국인 특별 입학 규정」이 발부되어 일본 유학의 길이 열렸다.
과거 야노는 『우편 보치 신문』에 청일 해군을 비교하여 해군 확장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1887년(메이지 20년)에는 집성사의 『동양의 안위』(후지노 후사지로 저) 서문에서 북진론으로 이어지는 동양 전략을 언급하기도 했다.
2. 7. 사회주의 연구와 말년
야노 류케이는 1899년(메이지 32년) 정계에서 은퇴한 후 사회주의에 관심을 가졌다.[3] 1901년(메이지 34년) 타가와 다이키치로 등과 '사회문제연구회'를 설립하고, 1902년(메이지 35년)에는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선언했다.[3]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조화를 주장하는 유토피아 소설인 『신사회』를 발표했으며, 도쿠토미 이치로, 미야케 유지로 등과 함께 사회주의 관련 강연을 했다.[3]1902년(메이지 35년) 쿠니키다 돗포를 '경업사'에 입사시켰고, 이후 '근사화보사'의 고문이 되어 돗포를 지원했다.[3] 『근사화보』, 『부인화보』 등에 많은 논설을 게재했으며, 1904년(메이지 37년) 러일 전쟁 발발로 잡지명이 『전시화보』로 변경되었다.[3] 1906년(메이지 39년) 모토야마 히코이치의 추천으로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에 입사하여 상담역, 감사역, 부사장을 역임하며 소설 『불필요』를 연재하고 다수의 수필과 정론을 발표했다.[3]
1926년(다이쇼 15년) 승용차와 게이오선 전차 충돌 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1931년(쇼와 6년) 도요타마군센다가야 정 자택에서 요폐증으로 사망하여 다마 묘지에 안장되었다.[3]
3. 저술 활동
야노 류케이는 유명한 정치소설 《경국미담》(經國美談)을 썼다.[11]
번역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내용이 담긴 《역서독법》(譯書讀法)이라는 책도 썼다.[11] 1883년 호치샤(報知社)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11] 야노가 살았던 오이타현의 쓰루타니(鶴谷)란 곳에는 향리 사람들이 영국과 미국의 순회도서관을 본떠서 책을 돌려가며 읽는 독서회를 만들었다. 역서주람사라고 불렸다.[11] 역서주람사의 구성원은 열 명 남짓으로 많지 않았지만, 무슨 책부터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몰라서 야노에게 가르침을 부탁했다. 야노는 역서를 읽는 데는 '정해(精解)의 법'과 '소달(疏達)의 법'이 있는데, 전자는 정독하며 깊이 있게 읽는 방식이라 많이 읽을 수 없고, 후자는 좀 모르는 부분이 있더라도 뛰어넘어가서 많은 책을 읽는 다독 방식인데 두 방법 모두 장단점이 있으니 균형있게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파편화된 정보를 기억해서 여러 장르의 책들을 스스로 연관지어 가면서 읽어야 한다고도 설명했다. 지리를 읽을 때는 지리만, 역사를 읽을 때는 역사로만 암기해서는 안 되고 그렇게 '연결'의 방법으로 지리와 역사를 결합해야 이해가 빠르고 온전하다는 말이다. 야노는 아예 독서법을 써서 출판했고 그게 바로 《역서독법》이다.[11] 야노는 내무성 도서국에 납본된 '역서 목록'을 일일이 조사해서 실제로 그 책을 대조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11]
- 『서양 위인 언행록(상・하)』 1874년 감천당
- 『영미 예기』 1878년 마루젠
- 『인권 신설 반론』 1882년 보치사
- 『제무명사 경국미담 (전편・후편)』 1883-84년, 보치사
- 『역서 독법』 1883년 보치사
- 『연설 문장 입법』 1884년 마루젠
- 『일본 문체 문자 신론』 1886년 보치사
- 『보치총담지별상인물어』 1888년 성문당
- 『주유 잡기』 1888년 보치사
- 『보치 이문 부성 이야기』 1890년 보치사
- 『서유 만기 회상록 수필 잡찬』 1891년 나가시마 서방
- 『이타가키 군 조난 실기』 야노 류케이 저, 1891년
- 『금만가』 1892년 히요시당
- 『서양 군주 언행기략』 미간행, 1895년에 도궁 가루히토 친왕에게 주상
- 『신사회』 1902년 다이일본원서 주식회사
- 『사회 강연』 1902년 슈에이샤 (아베 이소오 공저)
- 『통속 신사회』 1903년 다이일본원서 주식회사
- 『세계에 있어서의 일본의 장래』 1905년 근사화보사
- 『터무니없는 기록』 1905년 근사화보사
- 『한화집』 1906년 돗포사
- 『불필요』 1907년 슌요도
- 『류케이 수필』 1911년 동아서방
- 『야스다 젠지로 전』 1924년 야스다 보선사 / 중앙공론 문고에서 재간행, 1979년
- 『류케이 한화』 1924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
- 『한니발』 1939년 박정사
; 작품집
- 『메이지 문학 전집 15 야노 류케이집』 1970년 지쿠마 서방. 오치 지오 편
3. 1. 정치 소설
야노 류케이는 1883년부터 1884년에 걸쳐 고대 그리스의 테베 흥망을 소재로 한 정치 소설 《경국미담》을 발표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11] 특히 전편·제11회 『봄의 꽃』은 자유민권운동가들에게 애창되었으며, 마쓰바야시 하쿠엔이나 가와카미 오토지로가 강담(講談)으로 연기하기도 했다.[11]1890년에는 『우편보치신문』에 신형 군함 「해왕환」,「부성」을 타고 동남아시아에서 소국의 독립 운동에 협력하여 네덜란드·영국군과 싸운다는 내용의 SF 해양 모험 소설 《보치이문 부성 이야기》를 연재했다.[5] 이 작품은 남진론의 영향을 받았으며, 우치다 로안, 이시바시 닌게츠 등은 "인간이 그려지지 않았다"고 비판했다.[5] 이에 대해 야노는 비사 소설의 목적은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부수적으로 "일본의 성쇠존망", "해외의 풍토, 일상, 물산", "이과학의 귀중함", "위인걸사의 풍채"를 알리는 것이라고 반론했다.[5] 모리 오가이는 야노를 옹호하며 해당 소설을 로빈슨 크루소나 쥘 베른의 작품들과 견줄 만한 걸작이라고 평했다.[5] 도쿠토미 소호나 모리타 시켄도 야노 류케이를 옹호했다. 야나기다 이즈미는 이 논쟁을 "메이지 문단 사상, 최초의 문단 대 대중 문학의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평가했다.[6] 야노는 논쟁에 싫증을 느껴 속편 집필을 중단했다.[5]
《부성 이야기》는 오시카와 슌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7] 이는 오시카와의 데뷔작 《해저 군함》으로 이어졌다. 《부성 이야기》는 오시카와의 여러 작품들과 더불어 아부 텐푸나 야마나카 미네타로 등 후대 모험 소설 작가에게 영향을 주어, 모험 소설의 기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3. 2. 언론 및 출판
야노 류케이는 1882년 《유빈호치 신문》(郵便報知新聞)의 사장에 취임했으며,[11] 1884년부터 1886년까지 유럽과 미국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귀국한 뒤, 신문의 대중화를 내걸고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11] 1924년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사 부사장을 역임했다.귀국 후에는 『우편보치신문』의 개혁을 꾀하여, 구독료 인하, 기사 충실화, 문체의 평이화, 배달의 신속화를 추진하고, 동생 오구리 사다오와 미키 젠파치를 기용했다. 야노는 추대되어 구리모토의 차석 격으로 자리 잡았고, 사장 격에는 구리모토 조운이 있었다. 편집장에는 게이오기주쿠 출신의 후지타 시게키치가 있었다.
번역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내용이 담긴 《역서독법》(譯書讀法)이라는 책을 썼다.[11] 1883년 호치샤(報知社)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11] 야노가 살았던 오이타현의 쓰루타니(鶴谷)란 곳에는 향리 사람들이 영국과 미국의 순회도서관을 본떠서 책을 돌려가며 읽는 독서회인 역서주람사를 만들었다.[11] 역서주람사의 구성원의 요청으로 야노는 독서법을 써서 출판했고 그게 바로 《역서독법》이다.[11] 야노는 내무성 도서국에 납본된 '역서 목록'을 일일이 조사해서 실제로 그 책을 대조해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11]
야노 류케이는 그외에도 『서양 위인 언행록(상・하)』(1874년), 『영미 예기』(1878년), 『인권 신설 반론』(1882년), 『연설 문장 입법』(1884년), 『일본 문체 문자 신론』(1886년) 등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3. 3. 사회 사상
야노 류케이는 1902년 다이일본원서 주식회사에서 《신사회》를 저술하였다.[11] 《신사회》는 사회주의 사상을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1902년에는 슈에이샤에서 아베 이소오/安部磯雄일본어와 함께 《사회 강연》을 저술하였다.[11] 1903년에는 다이일본원서 주식회사에서 《통속 신사회》를 저술하는 등 사회주의 관련 저술 및 강연 활동을 이어나갔다.[11] 1905년에는 근사화보사에서 『세계에 있어서의 일본의 장래』, 『터무니없는 기록』을 저술하였다.[11]3. 4. 기타 저술
야노 류케이는 정치 소설 《경국미담》 외에도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남겼다.[11] 번역서를 읽는 방법론을 제시한 《역서독법》(譯書讀法)은 1883년 호치샤(報知社)에서 출간되었는데, 정독과 다독의 균형, 그리고 여러 분야의 지식을 연결하는 독서법을 강조했다.[11]그 외 저술로는 『서양 위인 언행록』(1874년), 『영미 예기』(1878년), 『인권 신설 반론』(1882년), 『연설 문장 입법』(1884년), 『일본 문체 문자 신론』(1886년), 『보치총담지별상인물어』(1888년), 『주유 잡기』(1888년), 『보치 이문 부성 이야기』(1890년), 『서유 만기 회상록 수필 잡찬』(1891년), 『이타가키 군 조난 실기』(1891년), 『금만가』(1892년), 『서양 군주 언행기략』(1895년, 미간행), 『신사회』(1902년), 『사회 강연』(1902년, 아베 이소오 공저), 『통속 신사회』(1903년), 『세계에 있어서의 일본의 장래』(1905년), 『터무니없는 기록』(1905년), 『한화집』(1906년), 『불필요』(1907년), 『류케이 수필』(1911년), 『야스다 젠지로 전』(1924년), 『류케이 한화』(1924년), 『한니발』(1939년) 등이 있다. 사후에는 작품집 『메이지 문학 전집 15 야노 류케이집』(1970년)이 지쿠마 서방에서 출간되었다.
4. 사상과 영향
4. 1. 자유주의와 입헌주의
야노 류케이는 분고국 사이키번(佐伯藩)에서 1850년 후지와라씨 계열 모리씨 출신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을 졸업했다. 1878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를 보좌했고, 1881년 정변으로 오쿠마가 하야한 뒤 1882년 입헌개진당을 결성하자 이에 참여했다. 1882년과 1884년에는 자유민권운동을 주장하는 책을 썼다.4. 2. 점진주의와 사회 개혁
4. 3.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
4. 4. 동아시아 인식과 북진론
야노 류케이는 1850년 지금의 오이타현인 분고국 사이키번에서 후지와라씨 계열 모리씨 출신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게이오 의숙을 졸업했다. 1878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를 보좌했고, 1881년 정변으로 오쿠마가 하야한 뒤 1882년 입헌개진당 결성에 참여했다. 1882년과 1884년에는 자유민권운동을 주장하는 책을 썼다.1890년 일본 제국의회 개원 직후 궁내성 관료가 되었으며, 1897년부터 1899년까지 당시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 휘하에서 청나라 주재 일본 공사를 맡기도 했다. 청일전쟁 전후 그의 동아시아 인식 변화와 북진론과의 관련성, 그리고 제국주의 일본의 팽창 정책에 대한 그의 입장은 비판적으로 분석될 필요가 있다. 퇴임 후에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5. 평가와 비판
5. 1. 긍정적 평가
5. 2. 비판적 시각
5. 3. 모리 오가이의 평가
6. 야노 류케이와 한국
야노 류케이는 1850년 지금의 오이타현인 분고국 사이키번(佐伯藩)에서 후지와라씨 계열 모리씨 출신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게이오 의숙(慶應義塾)을 졸업했다. 1878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추천으로 오쿠마 시게노부를 보좌했고, 1881년 정변으로 오쿠마가 하야한 뒤 1882년 입헌개진당을 결성하자 이에 참여했다. 1882년과 1884년에는 자유민권운동을 주장하는 책을 썼다.
1890년 일본 제국의회 개원 직후에 궁내성 관료가 되었으며, 1897년부터 1899년까지는 당시의 외무대신 오쿠마 휘하에서 청나라 주재 일본 공사를 맡기도 했다. 퇴임 후에도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야노 류케이는 1897년부터 1899년까지 당시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 휘하에서 청나라 주재 일본 공사를 맡았다. 이 시기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이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던 때였다.
야노 류케이는 정치소설 《경국미담》(經國美談)으로 유명하다. 번역서를 읽는 방법에 대한 책인 《역서독법》(譯書讀法)을 저술하여 1883년 호치샤(報知社)에서 출간했다. 야노는 고향 오이타현의 쓰루타니(鶴谷) 사람들이 만든 독서회인 역서주람사(譯書周覽社)의 요청으로 독서법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그는 '정해(精解)의 법'과 '소달(疏達)의 법'을 균형 있게 사용하고, 여러 장르의 책을 서로 연관 지어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야노는 내무성 도서국에 납본된 '역서 목록'을 직접 조사하고 대조하여 《역서독법》을 집필했다고 한다.
6. 1. 청나라 주재 공사 시절의 활동
야노 류케이는 1897년부터 1899년까지 당시 외무대신 오쿠마 시게노부 휘하에서 청나라 주재 일본 공사를 맡았다. 이 시기는 청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이 청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던 때였다.6. 2. 그의 저술과 한국
야노 류케이는 정치소설 《경국미담》(經國美談)으로 유명하다.[11] 번역서를 읽는 방법에 대한 책인 《역서독법》(譯書讀法)을 저술하여 1883년 호치샤(報知社)에서 출간했다.[11] 야노는 고향 오이타현의 쓰루타니(鶴谷) 사람들이 만든 독서회인 역서주람사(譯書周覽社)의 요청으로 독서법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11] 그는 '정해(精解)의 법'과 '소달(疏達)의 법'을 균형 있게 사용하고, 여러 장르의 책을 서로 연관 지어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1] 야노는 내무성 도서국에 납본된 '역서 목록'을 직접 조사하고 대조하여 《역서독법》을 집필했다고 한다.[11]참조
[1]
서적
自由民権思想の研究
[2]
서적
井上毅研究
[3]
간행물
明治に於ける社會主義文學の勃興と展開
筑摩書房
1965
[4]
웹사이트
矢野龍渓
http://www.asahi-net[...]
[5]
뉴스
浮城物語立案の始末
국민신문
1890-06-28
[6]
서적
浮城物語
岩波文庫
1940
[7]
서적
雑本展覧会
日本経済新聞社
2000
[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7-06-01
[9]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05-01-21
[10]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898-06-16
[11]
서적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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