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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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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무예제보는 1598년 한교가 명나라 병법서 등을 참고하여 편찬하고 국어로 번역, 간행한 병서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군사 훈련 강화와 명나라 병법 및 전술 도입을 위해 제작되었으며, 6종의 개인 무기 제작법과 조련법을 그림과 함께 한글로 해설하여 사병들의 이해를 도왔다. 1714년에 중간본이 간행되었으며, 훈련도감에서 명나라 장수에게 훈련법을 전수받아 편찬에 참여했다. 1610년에는 최기남에 의해 무예제보번역속집이 간행되었고, 1759년 무예신보, 1790년 무예도보통지의 편찬에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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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예제보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유형무예 서적
제작 시기조선 선조 43년 (1610년)
저자한교
언어한문
문화재 정보
문화재 지정번호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37호
지정일2019년 2월 14일
소유자국립한글박물관
상세 정보
무예 종류곤봉
등패
낭선
장창
당파
내용명나라의 기효신서에 수록된 무예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수정 및 보완
특징무예 훈련의 중요성 강조
그림과 함께 설명되어 있어 이해 용이
관련 서적무예제보번역속집
무예도보통지
기타
참고기효신서의 무예를 바탕으로 함

2. 지정 사유

1598년(선조) 한교(1556~1627)가 왕명으로 명나라 병법서 기효신서 등을 참고하여 편찬하고, 이를 국어로 번역하여 목판으로 간행한 원간본을 저본으로 1714년에 다시 중간한 목판본 1책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거치면서 군사 훈련 강화와 명나라 병법 및 전술 도입을 위해 제작되었다. 대봉(곤봉), 등패(방패), 낭선, 장창(긴 창), 당파, 장도(검) 등 6종의 개인 무기 제작법과 조련법을 그림과 함께 한글로 해설하였다.[7]

조사 대상본(중간본)은 수원화성박물관과 프랑스 동양언어문화학교에 소장된 원간본과는 달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유일본이다. 따라서 새로 발견된 이 중간본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7]

3. 조사 보고서

한명회의 5세손 한교(韓嶠, 1556~1627)는 이이와 성혼을 따라 학문을 배워 천문, 지리, 병학서 등에 두루 통하였던 인물이다. 유성룡의 천거로 낭관이 되었고, 1594년(선조 27)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그곳에 봉직하면서 명나라 장수 허국위에게 창법 등 살수(殺手)의 훈련법을 전수받았다.[7]

조사 대상본은 중간본으로 1권 1책의 목판본이며, 닥종이로 표백과 도침이 잘 되어 있는 상품지이다. 전체 63장(목록 1장, 본문 59장, 발문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먼저 한문으로 기록하고 그 내용을 우리 글로 번역하여 1글자를 내려서 기술하는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본문 사이사이에는 무예 조련 그림을 삽입하여 수련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7]

형태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변란은 사주단변(四周單邊)으로 반곽의 크기는 24.0×15.5cm이다. 반엽 기준 전체 10행, 한 행의 경문은 20자로 배열되어 있다. 중앙 판심부에는 상하 2엽화문 어미가 서로 내향하고 있으며, 판심제는 어미 사이에 '武藝諸譜'라는 서명이 기재되어 있고, 아래로 장차(張次)가 표시되어 있다.[7]

중간본은 원간본을 저본으로 그대로 판각하여 내용과 판식 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어미가 원간본은 3엽화문 어미인데 중간본은 2엽으로 판각되어 있으며, 권말에 원간본에는 없는 대자로 쓴 발문이 추가된 점이 다르다. 특히 조사 대상본 권말에 이이명(李頤命, 1658~1722)이 갑오년(甲午年)에 썼다는 발문이 추가되어 있어 중간본 간행 연대는 이이명이 생존한 시기인 1714년(숙종 40)임을 알 수 있다.[7]

4. 역사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군사 훈련의 필요성을 크게 느껴, 명나라 군대의 병법과 전술을 도입하고자 했다. 1598년(선조 31), 한교(韓嶠, 1556~1627)는 왕명으로 명나라의 병법서 기효신서(紀效新書) 등을 참고하여 무예제보를 편찬했다.[7] 이 책은 곤봉, 등패(방패), 낭선, 장창(긴 창), 당파, 장도(검) 등 6종의 개인 무기를 만드는 법과 조련법을 그림과 함께 해설하여 사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5세손이자 이이(栗谷李珥, 1536~1584)와 성혼(成渾, 1535~1598)에게 학문을 배운 한교는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으며, 1594년(선조 27)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명나라 장수에게 창술 등 살수(殺手) 훈련법을 배워 책을 편찬했다.[7]

1593년 여름, 류성룡은 명나라 장수 락상지로부터 중국 병술을 배울 것을 권유받았고, 군 장병 70명을 락상지의 부하 10명에게 붙여 창, 검, 낭선 등의 기술을 배우게 했다.[4] 선조는 일본군의 칼과 창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중국에서 배운 도검, 창술 훈련을 명했으나, 군 상층부에서는 궁술을 경시하게 된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4]

1604년, 선조는 무예제보에 추가 정보를 더하도록 명령했지만, 개정판이 출판되기 전에 사망했다. 광해군은 선조의 사업을 이어받아 최기남이 쓴 무예제보속집을 출판했고, 1610년에는 무예제보번역속집을 편찬했다.[3]

4. 1. 무예제보 번역속집

1610년 광해군의 명에 따라, 최기남이 무예제보속집을 한글로 번역한 것이 무예제보번역속집이다.[4]

척계광기효신서 14권본(1588년)을 인용하여 "일본고" 4권을 추가했는데, 여기에는 일본의 지리, 풍속, 전술, 검술 등에 대한 해설이 들어있다. 이는 17세기 한글 문법 연구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다.

조선은 임진왜란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을 상대로 한 군대 강화를 목표로 병서를 편찬했으며, 병졸들을 위해 그림을 많이 사용하고 한글로 번역한 서적을 펴냈다. 이는 병졸들의 군사 기술 향상을 위한 것이었으며, 정신 수양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1627년 정묘호란1636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만주 기병과 화포를 주력으로 하는 청군을 상대하기 위해 전술을 대폭 전환해야 했다.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면서 전쟁이 끝나자, 이러한 노력은 한 세기 동안 잊혀졌다.

이와는 별개로, 귀화한 왜인들로부터 조총 전술을 적극적으로 배우면서 조선 조총대는 높은 숙련도를 갖게 되었다. 효종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흑룡강에서 남하하는 러시아와의 전투(나선 정벌, 1654년과 1658년)에 조총대를 파견했고, 파견 부대는 수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군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4. 2. 무예신보

1759년 영조의 명으로 사도세자가 편찬한 것이 『무예신보』이다. 원본은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무예도보통지』의 설명을 통해서만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

18세기 조선은 숭명배청(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함)을 이념으로 하는 노론이 주도했다. 이 시기에는 소중화 사상의 영향으로 조선의 문화를 재검토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실학의 기운도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728년 무신란(이인좌의 난)이라는 대규모 반란을 경험한 영조는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무예신보 편찬을 명했다. 『무예신보』에는 『무예제보』의 6가지 무예에 더하여 "죽장창", "예도", "제독검", "권법", "편곤" 등 중국 무술 아홉 가지, "왜검", "교전" 등 일본 무술 두 가지, 그리고 조선 전통 검술인 "본국검"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언급된 "교전"은 일본 무술에서 말하는 쿠미테(組手, 대련)를 그림으로 해설한 것이다. 중국 무술과 이를 바탕으로 한 조선에서는 혼자서 단련하는, 일본에서 말하는 "형"(形)의 습득이 기본이며, 이를 숙달함으로써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4. 3. 무예도보통지

1790년 정조의 명에 따라 무예신보를 토대로 편찬된 것이 『무예도보통지』이다.

이 시대에는 노론 내부에서도 절정기에 있던 청나라의 경제력과 높은 문화를 인정한 "북학파"가 나타나 실학의 풍조가 더욱 높아졌다.

『무예도보통지』는 『무예신보』의 18기에 "기창(騎槍)", "마상월도", "격구" 등 중국 마상기(중국 당나라 시대에 페르시아로부터 전래되었을 가능성 있음) 6기를 더한 24기로 구성되어 있다.

『무예신보』에서 이어 게재된 것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왜검보(倭剣譜)", "교전보(交戰譜)", "본국검(本國劍)"이다.

무관 김체건은 왜관에 출입하며 검술을 습득하고, 1682년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장군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숙종이 파견한 조선통신사에 수행하여 "토유류(土由流)", "운광류(運光流)", "천류류(千柳流)", "류피류(柳彼流)"를 배웠다고 한다. "왜검보"와 "교전보"는 김체건의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지만, 그가 배웠다는 유파명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 어떤 유파인지 판별되지 않는다. 또한, 도보에 실린 내용도 일본 검술의 정확성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국검"은 신라 시대 화랑을 기원으로 하는 전통 검술로 알려져 있지만, 명나라 시대 『무비지』에 게재된 "조선세법"을 베껴 쓴 것임이 밝혀졌다.

5. 내용

임진왜란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군사 훈련의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명나라 군대의 병법과 전술 도입을 위해 대봉(大棒, 곤봉), 등패(藤牌, 방패), 낭선(狼筅), 장창(長鎗, 긴 창), 당파(鎲鈀), 장도(長刀, 검)라는 6종의 개인 무기를 만드는 법과 조련법을 사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과 함께 해설하였다.[7]

본문의 내용은 먼저 한문으로 기록하고 그 내용을 우리 글로 번역하여 1글자를 내려서 기술하는 방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리고 본문 사이사이에 무예를 조련하는 내용을 그림으로 삽입하여 수련자의 이해를 돕고자 하였다.

무예제보는 다음 무기 사용법을 다룬다.


  • 장창 (긴 창)
  • 쌍수도 (긴 양손 검)
  • 곤봉 (긴 막대)
  • 등패 등나무 방패와 던지는 창
  • 등패 등나무 방패와 허리 칼
  • 낭선 (가시 창)
  • 당파 (삼지창)


방패와 던지는 창의 조합 사용에 대한 정보는 방패와 허리 칼의 조합 사용을 다루는 것과 같은 장의 일부이다.

6. 현대 출판

현존하는 유일한 『무예제보 번역속집』은 1998년 대한민국 대구계명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0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2] 계명대학교 출판부는 1999년에 『무예제보 번역속집』을 재간행했다.

참조

[1] 웹사이트 무예제보번역속집(武藝諸譜飜譯續集) Sequel to the Book of Martial Arts https://encykorea.ak[...] 2023-11-08
[2] 웹사이트 보물 무예제보번역속집 (武藝諸譜飜譯續集)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청 Muye jebo beonyeok sokjip (Sequel to the Book of Martial Arts) https://www.heritage[...] 2023-11-08
[3] 웹사이트 Site at Keimyung University dealing with the Mu Ye Je Bo Beon Yeon Sok Jib https://web.archive.[...]
[4] 문서 李氏朝鮮では15世紀以来、銅製活字が用いられていたが、日本軍に戦利品として持ち去られ、印刷ができなくなっていた。将兵への配布を急ぐ為に木製活字が製造され、これを訓錬都監活字と称する。兵書以外の出版にも流用された。 2022-07
[5] 문서 孝宗自身は北伐([[:ko:효종의 북벌]])論者(対清強硬論)であったが、断るような力は朝鮮に無かった。 2022-07
[6] 간행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및 민속문화재 지정고시 http://event.seoul.g[...] 서울특별시장 2019-02-14
[7] 웹인용 가장 오래된 무예서 '무예제보' 보물 됐다 https://www.kha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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