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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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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관 전투는 후한 말 조조가 관중 지역을 침략하려 하자, 마초와 한수를 중심으로 한 관중 군벌들이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한 전투이다. 조조는 장로를 토벌하기 위해 종요와 하후연을 파견하려 했으나, 관중 군벌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마초 등은 연합군을 결성하여 조조군에 맞섰다. 조조는 이간계를 통해 연합군의 분열을 유도하고, 결국 승리하여 관중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 전투는 삼국 시대 정세에 영향을 미쳤으며, 《삼국지연의》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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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분쟁후한 말의 전쟁의 일부
전투명동관 전투 (潼關之戰)
다른 이름위남 전투 (渭南之戰)
허저와 마초
허저와 마초의 가상 결투, 이화원의 장랑에 있는 초상화, 베이징
시기211년 4월 ~ 11월 (추정)
장소동관 (현재의 중국 산시성 퉁관 현)
원인불명
결과조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조
교전국 2관서 군벌 연합
지휘관 및 지도자
교전국 1조조
조인
허황
장합
허저
가후
주령
교전국 2마초
한수
후선
성음
양추
이감 (전사)
장횡
양흥
성의 (전사)
성공영
병력 규모
교전국 160,000명 (추정)
교전국 2100,000명 (추정)
피해 규모
교전국 110,000명
교전국 235,000명
관련 전투
전역후한 말의 충돌

2. 배경

후한 말, 조조208년 적벽 대전에서 유비, 손권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서쪽의 관중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당시 관중 지역은 마등한수를 비롯한 여러 군벌들이 할거하고 있었다.

211년 4월경, 조조는 종요에게 군대를 이끌고 한중장로를 공격하도록 명령하고, 하후연에게는 하동군에서 출발하여 종요를 지원하도록 했다.[1] 그러나 고유는 조조에게 이러한 움직임이 서쪽 군벌들의 의심을 사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2]

종요의 군대가 관중에 들어서자, 마초와 한수를 중심으로 군벌들이 연합하여 한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이 연합에는 후선(侯選|후선중국어), 성은(程銀|성은중국어), 양추, 이감(李堪|이감중국어), 장횡(), 양흥(梁興|양흥중국어), 성의(成宜|성의중국어), 마완() 등이 있었으며, 한족, 강족, 오호 병사들이 혼합되어 있었다.[3]

이에 조조는 조인동관 (오늘날의 동관현, 산시성)에 보내 연합군에 맞서게 했고, 휘하 장수들에게는 적과 교전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4]

2. 1. 후한 말의 혼란과 서량 지역의 할거

후한 말, 옹주와 양주에서는 184년 한수가 반란을 일으킨 이래 각지에서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할거하여 중앙 정부와 서역 간의 연락이 끊길 지경이었다. 동탁손견은 이 일대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날렸다.[1]

192년 동탁이 살해당한 후, 한수와 마등은 동탁의 잔당들에게 굴복했다가 유언과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서쪽으로 도주했다. 이후 한동안 중앙 정계에 발을 끊고 있었다. 마등과 한수는 원상과 손을 잡고 조조를 공격했다가, 조조가 파견한 부간의 설득으로 조조 편으로 돌아서 곽원을 공격해 죽였다.

한편, 마등과 한수의 사이가 벌어지자, 양주 자사 장기는 마등을 설득하여 일족들과 함께 조조의 근거지 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211년, 조조가 종요하후연을 파견하여 장로를 토벌하고자 했는데, 고유와 장기는 이 행동이 한수, 마초 등 관중 군벌들의 의혹을 사 반란을 일으키게 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지만, 조조는 듣지 않았다. 한수, 마초 등 관중 군벌들은 조조의 한중 정벌을 보고 거병했다.[2][3]

양주는 후한 영제 말년 무렵부터 강족과 저족의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 변장, 한수, 왕국 등의 여러 장수들이 이에 동조하고, 경비와 부섭 등 많은 관리가 살해되는 등 혼란 상태에 있었다. 반란군끼리의 내분도 빈번하게 일어나, 이윽고 한수와 마등의 세력이 대두되었다. 후한 조정은 토벌군을 여러 차례 보냈지만, 황건적의 잔당이나 유주의 장거·장순, 익주의 마상, 형주 남부의 구성·주조 등의 반란이 각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영제의 병사 후 정치적 혼란(십상시의 난과 동탁의 난)도 있어 한수 등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었다. 한수와 마등은 동맹 관계에 있었지만, 이윽고 서로 다투게 되었다. 사태를 우려한 조조가 파견한 종요에 의해 화해한 두 사람은 조조에게 인질을 바치고 귀순한다. 208년에는 장기의 압력에 의해 마등은 일족을 이끌고 입조하고, 대신 아들 마초가 그 군세의 지휘를 맡았다.

2. 2. 마등과 한수의 대두

후한 말, 옹주와 양주에서는 184년 한수가 모반을 일으킨 이래 각지에서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할거하여 중앙 정부와 서역 간의 연락이 끊길 지경이었다. 동탁손견도 이 일대의 모반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날렸다.

192년 동탁이 살해당한 후 한수와 마등은 일단 이각 등 동탁의 잔당들에게 굴복하였다가 나중에 유언과 손을 잡고 반역을 일으켰으나 패퇴하여 서방으로 도주했다. 이후 한동안 중앙 정계에 발을 끊고 있었다. 마등과 한수는 원상과 손을 잡고 조조를 공격했다가, 조조가 파견한 부간의 설득으로 조조 편으로 돌아서 곽원을 공격해 죽였다.

한편, 마등과 한수의 사이가 벌어지자, 양주 자사 장기는 마등을 설득하여 일족들과 함께 조조의 근거지 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211년, 조조가 종요하후연을 파견하여 장로를 토벌하고자 했는데 고유와 장기는 이 행동이 한수, 마초 등 관중 군벌들의 의혹을 사 모반을 일으키게 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지만, 조조는 듣지 않았다. 한수, 마초 등 관중 군벌들은 조조의 한중 정벌을 보고 거병했다.

2. 3. 조조의 서진과 관중 군벌의 반발

후한 말, 옹주와 양주에서는 184년 한수가 모반을 일으킨 이래 각지에서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 할거하여 중앙 정부와 서역 간의 연락이 끊길 지경이었다. 192년 동탁이 살해당한 후 한수와 마등은 일단 동탁의 잔당들에게 굴복하였다가 나중에 유언과 손을 잡고 반역을 일으켰으나 패퇴하여 서방으로 도주했다. 이후 한동안 중앙 정계에 발을 끊고 있었다. 마등과 한수는 원상과 손을 잡고 조조를 공격했다가, 조조가 파견한 부간의 설득으로 조조 편으로 돌아서 곽원을 공격해 죽였다. 한편, 마등과 한수의 사이가 벌어지자, 양주 자사 장기는 마등을 설득하여 일족들과 함께 조조의 근거지 으로 이주하도록 했다.

211년, 조조가 종요하후연을 파견하여 장로를 토벌하고자 했는데, 고유와 장기는 이 행동이 한수, 마초 등 관중 군벌들의 의혹을 사 모반을 일으키게 할 우려가 있다고 반대했지만, 조조는 듣지 않았다.[2] 한수, 마초 등 관중 군벌들은 조조의 한중 정벌을 보고 거병했다.[3]

당시 군벌 마등조조의 지배 아래 있는 화북 평원을 위협하는 대규모 군대를 중국 북서부 변경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조조는 207년에 화북 통일을 완료한 후, 남쪽으로 진격하여 군벌 유비손권을 공격하려 했다. 뒤에서 예상치 못한 공격을 피하기 위해 조조는 마등을 관직에 임명하고 그를 (오늘날의 한단, 허베이성)으로 소환했다. 마등과 그의 가족 일부는 마등의 아들 마초가 조조의 영토를 침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실상 인질로 잡혀 있었다.

조조의 남쪽 원정은 실패했고, 208년 적벽 전투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패했다. 그는 대신 서쪽으로 눈을 돌려 관중 지역을 침략할 준비를 했다.

211년 4월경, 조조는 종요에게 군대를 이끌고 한중의 군벌 장로를 공격하도록 명령하고, 다른 병력을 이끌고 하동군에서 출발한 하후연을 종요를 지원하도록 보냈다.[1]

관중 지역의 여러 군벌들은 종요의 군대가 한중으로 가는 길에 관중 지역을 지나갈 것이기 때문에 조조가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고 두려워했다. 종요의 군대가 관중에 들어서자마자, 마초와 한수를 중심으로 한 군벌들은 연합(일명 "관서 연합" 또는 "동관 서쪽의 연합")을 결성하여 한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3] 이 군벌들에는 후선(侯選|후선중국어), 성은(程銀|성은중국어), 양추, 이감(李堪|이감중국어), 장횡(), 양흥(梁興|양흥중국어), 성의(成宜|성의중국어), 마완() 등이 있었다. 이 연합은 한족, 강족, 오호 병사들이 혼합되어 있었다. 이 지역의 많은 현들이 반란에 가담했다.

이에 조조는 조인을 동관(오늘날의 동관현, 산시성)에서 연합에 맞서 보냈고, 그의 장군들에게 적과 교전하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을 내렸다.[4]

3. 전투 과정

마초는 아버지 마등의 의형제인 한수후선, 정은, 이감, 장횡, 양흥, 성의, 마완, 양추 등과 함께 20만 대군을 이끌고 장안 태수 종요를 무찌르고 사예주의 장안성을 함락시켰다.

결국 조조는 군사를 물려 부하 조홍과 서황에게 동관을 지키게 했지만, 10일도 채 되지 않아 동관을 함락당한다. 이에 조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마초와 대치하여 부하 장수들을 보내 싸우게 한다. 조조는 이후 마초와 몇 차례 접전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가자 마초를 도와주던 한수가 화친을 청했고, 조조는 이를 이용해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시켜 서량군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려는 작전을 세운다. 마초와 한수는 협력하여 조조군을 공격했으나 조조의 기습을 받아 서량군은 크게 패했다. 성의와 이감이 죽고 양추는 항복했으며, 마초는 부하 30기만 이끌고 농서의 임조로 후퇴하고 조조는 안정까지 추격했다가 허창으로 회군한다. 그리고 업에 있던 마등은 아들 마철, 마휴 등과 함께 3족까지 모조리 멸족당한다.

조조는 통관에 도착하자 서황과 주령에게 그들의 부대를 이끌고 밤에 포반진(蒲阪津|포반진중국어)을 통해 위수를 건너 서쪽 강가에 진영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6] 조조와 그의 부하들이 위수를 건너 북쪽 강가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마초의 공격을 받았다. 장합과 다른 장교들은 상황이 매우 위급하다는 것을 알고 조조를 배에 태웠다. 강물이 매우 거세서 조조의 배는 남쪽 강가에서 4~5 리 떨어진 곳으로 빠르게 항해했다. 마초는 그의 군대에게 적의 배에 화살을 비처럼 쏟아부으라고 명령했다. 조조 휘하의 대령인 정비丁斐|정비중국어는 적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소와 말을 풀어주었고, 관서 군대는 즉시 공격을 포기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가축을 붙잡기 시작했다. 조조는 "오늘 그 녀석에게 거의 갇힐 뻔했군!"라고 말하며 웃었다.[7][8]

강을 건넌 조조군은 강둑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연합군은 퇴각하여 위수 강가에 진을 쳤다. 조조는 적을 혼란시키기 위해 많은 미끼를 설치하는 동시에 몰래 군대를 보내 강을 건너 부교를 건설했다. 그의 군대는 그날 밤 강을 건너 남쪽에 진을 쳤다. 같은 날 밤, 연합군이 공격했지만 조조가 미리 배치한 복병에게 격퇴되었다. 마초와 그의 동맹군 또한 남쪽에 주둔하며 조조에게 사자를 보내 강 서쪽 영토를 평화와 교환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조조는 거절했다.[9]

조조군은 다시 위수를 건너려 했지만, 건너려 할 때마다 마초와 그의 기병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의 진지는 안정되지 않았고, 지형이 너무 모래땅이라 성벽을 쌓을 수 없었다. 누규는 조조에게 "날씨가 춥습니다. 모래와 물을 섞어 벽을 만드십시오. 하루 밤만 지나면 완성될 것입니다."라고 제안했다. 조조는 누규의 제안을 받아들여 군대에게 밤새도록 벽을 쌓도록 명령했고, 다음 날 벽이 완성되었다. 조조와 그의 군대는 이에 위수를 건널 수 있었고, 적은 벽에 의해 저지되었다.[10] 마초는 그의 군대를 이끌고 벽을 공격했지만, 조조의 복병에 의해 격퇴되었다.

조조는 가후의 제안에 따라 마초와 연합군이 여러 차례 전투를 걸어왔지만, 이를 무시하고 그들의 제안을 수락하는 척했다.[13] 나중에 한수와 조조는 만났다. 한수의 아버지와 조조는 같은 해에 ''효렴''(문관 후보)으로 추천되었으며, 조조와 한수는 옛 수도 낙양에서 함께 일했던 전 동료이기도 했다. 가까이서 만났을 때, 그들은 군사 문제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옛날에 대한 가벼운 대화만 나눴다. 한수가 나중에 진영으로 돌아가자 마초가 그에게 물었다. "조조가 무슨 말을 했소?" 한수가 대답했다. "아무 말도 안 했소." 마초와 다른 사람들은 한수를 의심하게 되었다.[14]

조조가 나중에 한수를 다시 만나러 갈 때, 그의 부하들은 그에게 경고했다. 조조는 그들의 제안에 동의하고 장벽 뒤에서 한수와 그의 동맹들에게 말했다. 연합군 구성원들은 그를 만났을 때 조조에게 인사를 했고, 그들의 병사들은 그를 더 가까이 보려고 앞으로 밀려 들어왔다.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소? 나도 평범한 사람이오. 눈이 넷, 입이 둘인 것은 아니지만, 더 지혜롭소." 조조는 5,000명의 갑옷 기병을 데리고 와서 인상적인 진형을 갖추도록 지시했다. 반군들은 조조가 보여준 이러한 군사력에 충격을 받았다.[15]

며칠 후, 조조는 한수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에는 몇 가지 "수정 사항"이 포함되어 있어서, 마치 수신자가 무언가를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편지의 내용을 편집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마초와 다른 사람들은 그 편지를 본 후 한수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한편, 조조는 연합군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먼저 가벼운 무장 부대를 보내 공격하게 한 다음, 정예 기병대를 파견하여 양쪽에서 공격을 가했다. 조조는 연합군에 큰 승리를 거두었다. 정의, 이감 등이 전투에서 사망했고, 양추는 안정군으로 도주했으며, 마초와 한수는 양주로 후퇴했다. 관중 지역은 평정되었다.[16]

3. 1. 동관에서의 대치

마초는 아버지 마등의 의형제인 한수 등과 함께 장안을 함락시켰다. 조조는 조홍과 서황에게 동관을 지키게 했으나 10일도 채 되지 않아 함락당했다.[36] 이에 조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마초와 대치하며, 몇 차례 접전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

전쟁이 장기전으로 흘러가자, 조조는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시켜 서량군의 내부 분열을 꾀했다. 211년 7월, 조조는 서쪽으로 정벌하여 동관에서 관중 군과 대치했다.[37] 조조는 몰래 서황, 주령에게 명하여 황하 서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양흥을 격파했다. 조조는 황하를 건너려다 마초의 급습을 받았으나, 정비허저의 도움으로 도하에 성공했다.

조조는 황하 서안에 용도를 구축하고 남하하여 위수를 건너 진지를 구축하고, 관중 군을 격파했다. 관중 제후들은 화의를 요청했지만, 조조는 거절했다. 211년 9월, 조조는 위수를 건넜고, 마초 등의 도발에도 응하지 않았다. 관중 제후들이 다시 화의를 요청하자, 조조는 가후의 계략에 따라 거짓으로 허락하는 척했다. 마초, 한수, 조조는 회담을 가졌지만, 허저 때문에 마초는 손을 쓸 수 없었다.[38] 가후의 이간의 계략에 걸린 마초는 한수를 의심하게 되었다.

조조는 관중 군을 협공하여 크게 승리하고, 성의, 이감 등을 참수했으며, 마초와 한수는 량주로 패주했다. 양추는 항복하여 후하게 대우받았다.

3. 2. 조조의 반격과 위수 도하

211년 7월, 조조는 서황, 주령에게 명하여 부반진(蒲阪津)을 건너 황하 서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해 온 양흥을 격파했다.[6] 조조는 황하 서안으로 건너가 용도(양쪽에 방벽을 쌓은 길)를 구축하며 황하를 따라 남하하여 부대를 분할하여 위수를 건너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해 온 관중 군을 복병을 사용하여 격파했다.[37] 관중 제후들은 조조에게 화의를 요청했지만, 조조는 거절했다.[38]

조조와 그의 부하들이 위수를 건너 북쪽 강가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마초가 갑자기 공격해왔지만, 조조는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장합과 다른 장교들은 상황이 매우 위급하다는 것을 알고 조조를 배에 태웠다. 강물이 매우 거세서 조조의 배는 남쪽 강가에서 4~5 리 떨어진 곳으로 빠르게 항해했다. 마초는 그의 군대에게 적의 배에 화살을 비처럼 쏟아부으라고 명령했다. 정비丁斐|정비중국어는 소와 말을 풀어 적의 주의를 분산시켰고, 관서 군대는 즉시 공격을 포기하고 가축을 붙잡기 시작했다. 혼란 속에서 주군을 놓친 조조의 장교들은 걱정하고 당황했지만, 나중에 그와 재회했을 때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조조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 그 녀석에게 거의 갇힐 뻔했군!"[7][8]

3. 3. 이간계와 관중 연합군의 분열

마초는 아버지 마등의 의형제인 한수 등과 연합하여 장안을 함락시켰다. 조조는 조홍과 서황에게 동관을 지키게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동관마저 함락되었다. 조조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마초와 대치했고, 몇 차례 전투에서 크게 승리했다.[13]

전쟁이 장기화되자, 한수는 화친을 제안했다. 조조는 가후의 계책에 따라 이를 이용하여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시켜 연합군을 분열시키려는 작전을 세웠다.[16]

조조와 한수는 과거 효렴으로 함께 추천되었고, 낙양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였다. 그들은 만나서 군사 문제는 이야기하지 않고 옛날이야기만 나누었다. 한수가 돌아가자 마초는 조조가 무슨 말을 했는지 물었고, 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로 인해 마초는 한수를 의심하게 되었다.[14]

며칠 후, 조조는 한수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의도적으로 내용을 수정하여 마치 한수가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마초는 이 편지를 보고 한수를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15]

조조는 이간계를 쓰는 한편, 연합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조조는 먼저 경무장 부대로 공격하게 한 다음, 정예 기병대로 양쪽에서 협공하여 크게 승리했다. 성의, 이감 등이 전사했고, 양추는 안정군으로 도주했으며, 마초와 한수는 양주로 후퇴했다. 이로써 관중 지역은 평정되었다.[16]

211년 9월, 조조는 가후의 계략에 따라 한수와 마초를 이간질했다. 조조, 한수, 마초 세 사람은 말 위에서 회담을 가졌지만, 허저가 조조 곁을 지키고 있어 마초는 손을 쓸 수 없었다.[38] 가후의 이간계에 걸린 마초는 한수를 의심하게 되었다.

4. 전투의 결과

마초는 동관 전투에서 패배한 후 서쪽으로 후퇴했다. 조조는 안정군까지 추격했지만, 두 달 만에 추격을 포기하고 북중국에 불안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예(현재의 한단, 허베이성)로 돌아갔다. 하후연을 장안에 남겨두었다.[18][19] 조조가 떠난 후, 마초는 이 지역의 여러 부족들을 이끌고 관중의 군과 현을 공격했고, 백성들은 그의 부름에 응하여 반란에 참여했다. 마초는 양주자사 위강을 죽이고 계성(兾城)을 장악, 위강의 부하들을 강제로 굴복시키고 양주를 장악했다.[21] 그러나 위강의 부하들은 마초에게 불만을 품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고, 그해 말 반란을 일으켜 마초를 관중에서 몰아냈다.[22] 마초는 한중으로 도망쳐 군벌 장로에게 군대를 빌려 관중에서 자신을 몰아낸 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돌아왔다. 강서, 조앙, 왕이 및 그들의 동맹군을 기산(祁山; 현재의 리현, 간쑤성 일대)에서 약 30일 동안 포위했으나, 조조의 장군 하후연장합이 이끄는 증원군이 나타나 포위를 풀었다.[23][24] 한편, 한수는 흉노와 연합하여 하후연과 싸웠으나 패배, 서쪽 변방 서평군으로 도주하여 병사했다(살해되었다는 설도 있다). 조조는 마초·한수 두 사람의 몰락과 전후하여 하후연·장합 등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양흥 등 관중의 잔당과 독립 세력인 송건을 굴복시키고 양주를 평정했다. 조조는 한중의 장로 또한 항복시켜 일시적으로 한중을 손에 넣었지만(양평관 전투), 얼마 지나지 않아 한중의 지배권을 두고 유비와 다투게 된다(정군산 전투).

4. 1. 관중 군벌의 몰락

마초는 강족에게로 달아나 군사를 다시 추스려 조조군의 철수를 노리며 농서의 여러 군현을 제압하고 양주 자사 위강을 살해한 뒤 기성을 중심으로 다시 저항했다.[21] 마초는 스스로 정서장군 · 영 병주목 · 독양주군사를 칭하자, 위강의 부하이던 양주참군 양부와 강서, 통관교위 윤봉, 조앙 등이 노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마초가 조앙의 아들 조월을 죽이고 출전했지만 제대로 진압하지 못했고, 그 사이 조조의 명령을 받은 하후연까지 참전했으며, 곧이어 양부와 강서의 명령을 받은 양관과 조구 등이 마초의 처자와 부하들을 살해했다.[22]

기성의 성문까지 굳게 닫히자 진퇴양난에 빠진 마초는 결국 도주해 한녕태수 장로에게 몸을 의탁하는 신세가 되었다.[23][24] 212년, 마초의 잔당이던 양흥이 풍익에서 노략질을 벌이자 여러 현에서는 양흥을 두려워하여 역소를 성 아래로 옮겼으나, 풍익 태수 정혼이 군민을 단결시켜 양흥 아래의 부녀자들을 사로잡았다. 처자들을 잃은 사람들이 정혼에게 투항하여 양흥의 세력은 곧 무너졌다. 양흥 등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부성에 집결했으나, 하후연이 원군으로 파견되자 정혼은 부성을 함락하고 양흥과 그 지파를 참수했다.

214년, 한수가 장리의 강족과 흥국의 저족들을 도우며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연이 이를 진압했다. 한수는 215년 서량의 장수 국연과 장석에게 살해당했다. 장로에게 의탁하던 후선정은215년 한중 공방전에서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같이 투항했다.

이로써 동관 전투에 참전한 관중 10군벌은 모두 세력을 잃었고, 관중 · 관서 지역에 대한 조조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완전히 조조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어서, 이후에도 세력 있는 강족의 지도자나 토호들이 자주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태수 · 자사들을 쫓아내거나 심지어 살해하기까지 했다.

4. 2. 조조의 관중 지배 강화

동관 전투에서 패배한 마초는 강족에게 달아나 군사를 다시 모아 조조군의 철수를 노리며 농서의 여러 군현을 제압했다. 213년, 마초는 양주자사 위강을 살해하고 기성을 중심으로 다시 저항하며 스스로 정서장군, 영 병주목, 독양주군사를 칭했다.[21] 그러나 위강의 부하였던 양부, 강서 등은 노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마초는 진압에 실패했다. 그 사이 조조의 명령을 받은 하후연이 참전했고, 양관과 조구 등이 마초의 처자와 부하들을 살해했다.[22] 기성의 성문이 닫히자 마초는 한녕태수 장로에게 몸을 의탁했다.[23]

212년, 마초의 잔당 양흥이 풍익에서 노략질을 벌였으나, 풍익 태수 정혼이 군민을 단결시켜 양흥의 세력을 무너뜨렸다. 양흥은 남은 무리를 이끌고 부성에 집결했으나, 하후연이 원군으로 파견되자 정혼은 부성을 함락하고 양흥과 그 지파를 참수했다.

214년 한수가 강족과 저족들을 도우며 반란을 일으키자 하후연이 이를 진압했고, 한수는 215년 서량의 장수 국연과 장석에게 살해당했다. 장로에게 의탁하던 후선정은215년 한중 공방전에서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하면서 같이 투항했다.

이로써 동관 싸움에 참전한 관중 10군벌은 모두 세력을 잃었고, 관중 · 관서 지역에 대한 조조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완전히 조조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어서, 이후에도 세력 있는 강족의 지도자나 토호들이 자주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태수 · 자사들을 쫓아내거나 심지어 살해하기까지 했다.

211년 11월 말 또는 12월,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장안에서 출발하여 양추를 공격, 안정군(현재의 핑량, 간쑤성 일대)을 포위했다. 양추는 항복했고, 이전의 직함을 유지하고 그의 영지에서 백성을 안정시키도록 허락받았다.[17]

마초가 한 황실에 반기를 든 지 약 1년 후, 헌제는 예에서 마초의 가족들을 처형하라는 조서를 내렸다.[20]

5. 전투의 의의와 영향

동관 전투는 군사 전략적 측면과 한국 문화에 다음과 같은 의의와 영향을 남겼다.


  • '''군사 전략적 의의''': 조조는 이 전투에서 적의 허점을 찌르는 뛰어난 전략을 보여주었다. 반란군이 동관에 집중하는 동안, 서쪽의 방비가 허술한 틈을 타 서황과 주령을 보내 서쪽 강둑을 점령하고, 주력 부대는 북쪽 강둑으로 건너는 데 성공했다. 또한, 적을 안심시키기 위해 거짓으로 평화 협정을 맺는 척하며,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갑작스러운 천둥 소리에 귀를 막을 틈도 없는" 상황을 연출했다.[25] 조조는 관중 지역의 넓은 지형을 고려하여, 반란군이 여러 요충지에 분산 주둔하는 것보다 동관에 집결하는 것이 오히려 한 번의 공격으로 격파하기 쉽다는 점을 간파했다.[26]

  • '''한국 문화에 미친 영향''': 일본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 ''진 삼국무쌍''에서 동관 전투는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플레이어는 조조 편에 서서 한수를 배반하게 만드는 역사적 사건을 따라가며 전투를 쉽게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이 스테이지는 플레이스테이션 3 및 Xbox 360용 ''진 삼국무쌍 6'' 초기 버전에서는 삭제되었으나, 이후 PS2용 후속 버전에서 다시 추가되었다.

5. 1. 군사 전략적 의의

조조의 장수들은 반란군이 동관에 있을 때 위수 북쪽이 방비가 없었는데, 왜 풍익군을 공격하지 않고 동관을 지키며 강을 건넜는지 물었다. 조조는 이렇게 답했다. "반란군이 동관에 있었기에, 동쪽 강둑으로 가면 여울 방어가 강화되어 서쪽으로 건너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관에 군대를 배치해 반란군이 남쪽 강둑에 방어력을 집중하고 서쪽 경계를 늦추도록 했다. 이로 인해 서황과 주령이 먼저 서쪽 강둑을 점령하고, 주력 군대가 북쪽 강둑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반란군은 서쪽 강둑의 지배권을 놓고 싸울 수 없었다. 수레를 연결하고 나무 울타리를 세워 남쪽으로 향하게 했을 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적에게 약점을 드러냈다. 남쪽 강둑으로 강을 건너 성벽을 쌓았을 때, 적이 과신하게 만들기 위해 병사들이 교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반란군은 성벽을 공격하지 않고 평화를 위해 영토 할양을 요청했다. 나는 그들이 안심하고 경계를 늦추도록 동의하는 척했고, 우리 군대는 전투를 준비했다. 공격했을 때, 그것은 '갑작스러운 천둥 소리에 귀를 막을 틈도 없다'는 경우였다. 전장 상황은 여러 방식으로 변할 수 있다."[25]

전투 중 조조는 적군 도착 소식을 받을 때마다 기뻐했다. 전투 후 장수들이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관중은 매우 넓다. 반란군이 여러 요충지에 주둔하고 우리가 각개격파한다면 1~2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관에) 모였다.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분열되었고 지도자가 부족했기 때문에 한 번의 공격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 예상보다 쉬웠기 때문에 기뻤다."[26]

5. 2. 한국 문화에 미친 영향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 삼국무쌍''에서 동관 전투는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 중 하나이다. 플레이어가 조조 편에 서서 한수를 배반하게 만드는 역사와 소설의 사건 순서를 따르면 쉽게 승리할 수 있다. PS3 및 Xbox 360용 ''진 삼국무쌍 6'' 초판에서는 해당 스테이지가 삭제되었으나, PS2용 후속 버전에서 濡須구 전투 및 가정 전투와 함께 다시 추가되었다.

6.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마초마등과 그의 동생 마휴, 마철을 조조가 살해한 것에 복수하기 위해 군대를 모아 조조를 공격했다.[27][28]

조조는 전투의 첫 교전에서 마초에게 패했다. 혼란 속에서 조조는 도망쳤고 마초에게 추격당했다. 마초가 붉은 옷을 입은 자가 조조라고 외치자, 조조는 자신이 인식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옷을 벗어 던졌다. 마초는 다시 긴 수염을 가진 자가 조조라고 외치자, 조조는 칼을 뽑아 수염을 짧게 잘랐다. 마초가 짧은 수염을 가진 자가 조조라고 외치자, 조조는 깃발로 턱을 감쌌다. 조홍이 나타나 마초를 막아 조조가 도망칠 시간을 벌었다.

다음 날, 마초는 조조의 장수 허저와 결투를 벌였다. 허저는 상의를 벗고 말 위에서, 그리고 땅에서 마초와 싸웠다. 그들 중 누구도 상대를 이기지 못했다.

조조는 결국 가후의 계략을 따라 마초와 그의 동맹 한수를 이간질했다. 마초는 속아 한수가 자신을 배신하려 한다고 믿고 한수의 막사로 쳐들어가 그를 공격했다. 한수는 싸움 중에 왼팔을 잃었고 부하들의 보호 아래 간신히 탈출했다. 조조는 그들의 내부 갈등을 이용하여 그들을 공격했고 마초를 격파했다. 마초는 패배 후 군벌 장로에게 합류하기 위해 한중으로 도망쳤다.[33][34][35]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가 거병하는 것과 마씨 일족이 살해당하는 순서가 뒤바뀌어, 마초는 일족이 살해당한 복수심으로 조조에게 군사를 일으킨다는 구도로 묘사된다.[29]

마초는 귀신과 같은 무용을 발휘하여 조조를 궁지에 몰아넣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간계로 한수와 사이가 틀어져 패배한다. 허저의 활약 또한 정사 삼국지보다 더 크게 다루어지며, 특히 전투 중반에 삽입된 마초와의 일기토에서는 "움직임이 둔해지니 이런 것은 필요 없다"라며 갑옷을 벗어 던지고 상반신을 드러낸 채 마초와 호각으로 무예를 겨루는 명장면이 연출된다.

7. 참전 인물



동관 전투에는 조조의 아들인 조식 등도 종군했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1
[2] 서적 Sanguozhi vol. 24
[3] 서적 Sanguozhi vol. 1
[4] 서적 Sanguozhi vol. 1
[5]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
[6] 서적 Sanguozhi vol. 1
[7] 서적 Sanguozhi vol. 1
[8] 서적 Cao Man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
[9] 서적 Sanguozhi vol. 1
[10] 서적 Cao Man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
[11] 서적 Cao Man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
[12]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
[13] 서적 Sanguozhi vol. 1
[14] 서적 Sanguozhi vol. 1
[15] 서적 Wei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
[16] 서적 Sanguozhi vol. 1
[17] 서적 Sanguozhi vol. 1
[18] 서적 Sanguozhi vol. 1
[19] 서적 Sanguozhi vol. 36
[20] 서적 Di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6
[21] 서적 Sanguozhi vol. 36
[22] 서적 Sanguozhi vol. 36
[23] 서적 Sanguozhi vol. 9
[24] 서적 Lie Nü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25
[25] 서적 Sanguozhi vol. 1
[26] 서적 Sanguozhi vol. 1
[27] 서적 Sanguozhi vol. 36
[28] 서적 Sanguozhi vol. 1
[29] 서적 Dian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6
[30] 서적 Sanguozhi vol. 36
[31] 서적 Sanguozhi vol. 1
[32] 서적 Sanguozhi vol. 18
[33] 서적 Sanguozhi vol. 36
[34] 서적 Sanguozhi vol. 1
[35] 서적 Sanguozhi vol. 10
[36] 서적 三国志
[37] 서적 三国志
[38]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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