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치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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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치주의는 유교의 등장 이후 점차 제도적 윤곽을 드러낸 통치 형태로, 학문과 문화를 중시하고 문관을 우대하는 특징을 보인다. 송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확립되어 과거 제도를 통해 문관을 등용하고 절도사의 권한을 축소하는 등 문치주의 체제를 정비했다. 고려와 조선에서도 문치주의가 나타났으며, 특히 조선은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더욱 강화했다. 문치주의는 학문 발전과 효율적인 행정 체계 구축에 기여했으나, 무인을 경시하는 풍조와 당파 싸움, 군사력 약화 등의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현대에는 문민 통제의 원칙과 균형 잡힌 인재 등용의 중요성을 시사하며, 역사적 교훈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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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치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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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유교 등장 이후 훈고학이 발달했던 전한(BC.206 ~ BC.8) 때 '예악 정치(禮樂政治)'[2]라는 초기 문치주의 통치 형태가 처음 실시되었다고 알려져 있다.[1] 그러나 당시에는 체계화된 제도가 없어 '법형주의(法刑主義)'와 혼합된 형태로, 전제주의 정치 체제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되기도 했다.[3]
송나라(宋) 송태조 조광윤(趙匡胤)은 당나라의 절도사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수나라(隋) 때부터 시작된 과거 제도를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문치주의를 본격적으로 확립했다. 진종 때 체제가 구체화되면서 문인들이 권력을 잡고 과거 제도에 백성들이 몰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송나라에서는 학문이 크게 발전하고 주자학(朱子學)이 정립되는 등 문치주의 정치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군사력이 약화되고 관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여러 문제점을 겪었고, 송신종 때 왕안석을 등용하여 개혁을 시도했으나 사대부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했다.[4]
고려(918 ~ 1392) 광종 때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문치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문신 중심의 정치 운영은 무신 천대 풍조를 낳았고, 이는 정중부의 난과 같은 무신 정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 김부식, 윤관, 서희, 강감찬 등 거란 침입을 물리치거나 여진을 몰아낸 군의 총사령관도 대부분 문신이었다.[1]
조선은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문치주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문신 중심의 정치 운영이 지속되었으며,[5]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따른 당파 싸움과 군사력 경시 풍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국난을 초래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5]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등 주요 정치 변동에도 문신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2. 1. 초기 문치주의
문치주의 제도의 창시자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보통 유교 등장 이후부터 서서히 제도적 윤곽이 드러났다고 알려졌다. 초기 문치주의 통치 형태는 유교 훈고학이 발달했던 전한(BC.206 ~ BC.8)[1] 때 최초로 실시된 것이라고 알려져있다. 이 당시는 '문치주의'가 아닌 '예악 정치(禮樂政治)'[2]라고 불렸다. 그러나 당시 예악정치는 체계화 된 제도를 갖추지 못했으며, 이상적이고 모호했기 때문에 실제론 '법형주의(法刑主義)'와 혼합된 상태로 통치 체제가 존속됐다. 그리고 이러한 법형주의적 예악 정치는 오히려 전제주의 정치 체제를 정당화하는 것으로 이용되었다.[3]2. 2. 송나라의 문치주의
송나라(宋)는 문치주의를 본격적으로 확립한 시기이다. 송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은 당나라 제도에서 파생된 절도사(節度使)의 권한을 대폭 줄였다. 절도사는 지방 군대의 지도자로서 국경 수비를 책임지는 직책이었는데, 군사력이 절도사에게 몰려 세력을 키운 절도사들로 인한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러한 문제는 오대 십국 시대라고 불리는 당나라 일대의 '무인들의 난'에서도 나타났다.송태조는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수나라(隋) 때 '선거제'란 이름으로 최초 시행된 과거 제도를 전국적으로 시행하여 문인들에게 행정적 권한을 이양하는 '문치주의적 군주제' 체제를 정비했다. 이러한 체제는 진종에 의해 구체화되었으며, 문인들에게 권력이 집중된 상태에서 과거 제도에 백성들이 몰리기 시작하는 동시에 절도사도 문인으로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송나라 성립 초기엔 절도사에게 지방 군대의 지휘권을 주었지만, 문치주의 개혁이 시작된 후엔 지방 군대의 지휘권은 문인이 가지게 되었다. 또한 송태조는 징병제 방식을 모병제 방식으로 고쳐서 군대의 충성심을 높였다.
과거 제도로 문인들이 배출되고, 문인이 권력을 잡자, 당시 송나라는 학문이 크게 발전하게 되었으며, 왕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닌 현명한 문인들의 조언을 중시하는 문화가 중앙 정치 문화로 굳어졌다. 송나라에서 주자학(朱子學)이 새롭게 정립된 것은 이러한 문치주의 정치와 상당히 관련이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문치주의 정치는 무인이 천시를 받게 함으로써 군사력을 낮추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송나라는 북방의 침략 행위를 돈으로 해결하는 등, 비대해진 관료들의 수를 유지하기 위한 지출을 과도하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겪었다. 약해진 군사력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송신종은 왕안석을 등용하여 새로운 부국강병 개혁을 진행하였으나 기존 사대부의 반대로 끝내 개혁이 성공하지는 못했다.[4]
2. 3. 한반도의 문치주의
고려와 조선 시대에 한반도에서 문치주의가 발전하였다.2. 3. 1. 고려
고려(918 ~ 1392) 광종 때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문치주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문신 중심의 정치 운영은 무신 천대 풍조를 낳았고, 이는 정중부의 난과 같은 무신 정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1] 김부식, 윤관, 서희, 강감찬 등 거란 침입을 물리치거나 여진을 몰아낸 군의 총사령관도 대부분 문신이었다.[1]2. 3. 2. 조선
조선은 주자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문치주의를 더욱 강화하였다. 문치주의는 학문과 문화를 발전시키고 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무과를 신설하여 무관을 등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신 중심의 정치 운영이 지속되었다.[5] 공리공론(空理空論)에 따른 당파 싸움과 군사력 경시 풍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과 같은 국난을 초래하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5]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 등 주요 정치 변동에도 문신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 의병으로 활약하거나 군을 총지휘한 사람들, 여진, 왜구, 야인 토벌 총지휘, 4군 6진 개척의 주인공, 북벌을 계획한 사람들도 모두 문관이었다.3. 문치주의의 영향
문치주의는 사회 전반에 걸쳐 다양한 영향을 미쳤으며,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한다.
4. 현대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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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역사
현재 중국 역사학계는 전한보단 서한(西漢)이란 용어를 더 잦게 쓴다.
[2]
기타
예악(禮樂)은 『맹자』에서 나오는 용어로, 교학(敎學), 왕도(王道)에 이어서 '민본 정치'를 구성하는 3대 요소이다. 이는 음악(예를 들면 시를 포함한 문예 요소)과 같은 예술을 통하여 군자를 만든다는 이념을 뜻하는 용어로 주로 사용되었다.
[3]
서적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4]
서적
중국사 다이제스트 100
[5]
서적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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